망명 - 윤한봉 회고록
윤한봉 지음 / 한마당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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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떤 재판에 대한 뉴스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 계엄군에 대항하던 시민들의 유해가 가족 품으로 온 장면이었다. 자식과 형제 그리고 친구의 차가운 몸과 붉게 젖은 천을 바라보며 그들은 원통한 눈빛으로 통곡하고 있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으나, 군인이 민간인을 총으로 살해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국군이란 헌법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 나라를 지켜야 하나, 때로는 권력자들의 눈빛을 따라 움직일 때도 있다. 이른바 충정훈련, 공수부대를 오랫동안 훈련시키면서 전투요원의 마음에 진압당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때려죽여야 하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5월 17일 그들의 작전이 시작되고, 18일부터 누군가의 지시 아래 총포가 울린다. 아직도 그 총포를 지시한 지휘관은 누구인지 그 윗선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만약 진짜 518사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총을 쏘게 한 지휘관은 누구고, 그 명령을 내린 상부기관과 상관의 이름이 나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정 국가의 위기를 모면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라면, 분명 그것은 바른 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35년이 넘은 지금에도 그 지시를 내린 자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른다.

 

만약 진짜 북한의 음모와 반국가적 폭동이라고 한다면 그 지휘관의 이름과 상관의 이름은 분명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누구인지 모르고, 그것을 전혀 밝혀들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518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전혀 다른 사건이란 점을 반증하게 된 것이다. 진짜 북한의 소행이라고 한다면 희생자 중에서 임신한 여성이나 이제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나, 어린 여중생들이 왜 국군의 총에 맞아 사망해야 하는가?

 

이런저런 비논리와 비이성적 억척은 거짓의 논란과 위증의 말꼬리를 잡고, 그런 것 같더라 혹은 그랬다고 하네요. 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쏟아낸다. 518의 역사, 그리고 최근 정치권에서 광주중심으로 한 정당을 창당, 왠지 모르게 역사의 흐름에서 계속 되풀이 되는 상황이 보이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는 이번에 읽은 책이 518 최후의 수배자 윤한봉이 저술한 <망명>이란 책을 읽으면서다. 본래 <똥가방>이란 이름이란 책으로 발간했지만, 내용을 보충하고, 다소의 에필로그를 추가하여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윤한봉은 참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운동역사에서 빠질 수 없던 인물이다. 1970년대 유신정권이 들어오면서 사실상 대한민국 헌법은 권력자의 무력 앞에 무참하게 짓밟혔다. 이때부터 많은 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나 군사정권은 고문과 감금 그리고 심지어 사법사형까지 일삼는 잔혹한 추태를 보였다. 윤한봉은 1970년대부터 유신에 대한 저항으로 체포되어 구형되었고, 출옥 후에도 계속 민주주의운동을 하였다.

 

제3공화국 말, 윤한봉은 강제로 감옥에 끌려와 각종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1026사건 이후 출옥되자, 조만간 1212사건이 일어난다. 군부가 장악하던 시절, 윤한봉은 1980년 5월이 오기 전부터 신군부가 25일 전후로 광주에 유혈진압을 할 것이란 말을 한다. 모두 다 아닌 것 같다고 하나, 막상 18일이 되자 광주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윤한봉의 친구와 동무들은 무참하게 진압부대의 총과 칼 아래 주검으로 변하고, 윤한봉은 수배자로 몰리자 주변의 의견에 따라 외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다.

 

미국으로 가는 배, 35일 동안 더운 방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배고픔, 외로운, 억울함, 죄책감으로 사무쳐 괴로워하며 표범(leopard)호에 탑승한다. 미국에 내릴 때 그는 병든 사람처럼 창백했고, 자유가 없는 고국을 떠나 낯선 타국살이를 시작해야 했다. 1981년대부터 시작하여 12여년을 타국에서 보낸 후 1993년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의 생활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가난도 그런 것이지만, 망명을 받아들인 것은 한참 후이고, 미국정부와 미국 내 한국대사관의 공작으로 계속 억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굴복하지 않고, 미국에 한국청년연합회를 결성하여 미국 내 여기저기 흩어진 동포를 모우고 그들이 한국인이란 사실을 망각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에 있으면서 고국에 있는 친구와 가족들이 남영동 고문실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받는 것을 소식으로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려야 했다.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을 보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그들이 자신의 망명 때문에 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거 윤한봉은 자신이 감옥에 수감되고 나올 때, 아버지가 노환으로 사망한 것을 들었다.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점에서 그는 가슴이 무너졌다. 그런데도 미국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고, 돌아간다 해도 무사할지 모르는 것이다. 벼랑이 언제나 눈앞에 있는 그의 운명에서 그는 불굴의 정신으로 미국 LA 한인사회를 차츰 변화시켰다. 지금의 미국 한인동포 모임에서 그가 남긴 업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미국에 온 이민자들, 고향을 잃은 사람과 고향을 등진 사람들, 그래도 한국은 우리의 고향이고 그리운 흙이 있는 곳이었다.

 

이 책을 보며 느끼지만, 약하고 힘이 없는 자들은 어떻게든 바르게 정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도 불리한 상황은 계속 압박하고 때에 따라서는 박해는 지속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을 억압하는 무리에 대해 다른 조직이나 사람들과 연대하겠지만, 그 연대하는 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명분이란 이름으로 숨기며 각종 특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가슴이 아팠다. 언제나 겨울의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여름의 더위와 외로움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막상 어느 상자리가 차려질 것 같으면 어김없이 달려 들어와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518재단을 발기했을 때 윤한봉이 처음 공로가 많았지만, 막상 그 행사가 열린 당일에는 윤한봉을 시기하는 무리가 나와 묘소에 참배하는 것을 가로 막았다. 윤한봉이 했던 일 중에 아마 DJ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은 자신의 지지자가 있더라도, 만약 지지자들의 비판이 있으면 그것을 듣고, 반성하여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했다. 호남권에서 DJ의 비판은 곧 적이 되어야 했고, 윤한봉은 그것을 바로 실시하던 사람이었다. 광주에서 518의 슬픔은 윤한봉 역시 크다. 그러나 그 슬픔의 공로를 정치적인 이익에 이용하는 무리에 대해서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DJ정신의 계승에서 김대중 대통령 사망 이후 보이는 정치권의 행태는 왠지 참 안타까웠다. 2007년 윤한봉이 사망했으니 이미 그 전에 <망명>이란 책이 발간되었다. 그런데 벌써 그것을 예측하고 문제가 터졌다. 인간에 따라 공과 실은 나누어지나, 공만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실책을 보고, 그것을 다시 반성하여 새롭게 나가는 게 바른 길이다. 지금 한국 정치에는 전혀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작년에 우연히 광주에 갈 일이 있어서 망월동에 있는 518묘지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이 책을 보고 나니 다음에 갈 일이 있으면 윤한봉의 묘지 앞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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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22 08:43   좋아요 0 | URL
아~!
제 전공은 정치와 철학이 아닙니다.
저는 공대출신입니다. 전공이 환경인지라 환경 자체가 아주 조금 인류학이랑 관계가 있다보니 인류학쪽으로 관심을 돌리다가 이렇게 오게 되었군요.

오덕은 진화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