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베스트셀러로 출판되었던 <책은 도끼다>의 박웅현 카피가 다시 인문학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도서를 출판했다. 카피라이터, 광고와 혹은 어떤 문구로 통해 고객 내지 수용자에게 어떤 마음이나 감동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만나본 카피라이터로는 정철이란 분이 있었고, 정철 카피와 박웅현 카피는 국내에서 일류로 활동하는 분이다. 그러나 각각의 책을 보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정철 카피 역시 인문학적 사고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분의 책을 보면 조금 더 쉽고도 강한 메시지가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웅현 카피의 책이 인문학적 감성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나 카피라이터 각자마다 가지고 있는 능력과 공감대가 다르겠지만, 그 방향성과 의미성은 분명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웅현 카피의 <여덟 단어>를 읽을 때, 조금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박웅현 카피의 사고방식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만, 한편으로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얼마 전에 알라딘 서재에서 어느 분과 페미니즘 담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류 페미니즘 사상과 나하고 맞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하다가 결론부에 어떤 인간이든지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조건에 따라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문구가 나올 때 인간은 결론적으로 자신의 위치와 상황 그리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 사고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여덟 단어>에서 의미하는 가치관은 매우 좋을 수도 있고, 박웅현 작가 역시 다변적인 현실인간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사례에서 삶을 설계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괴리감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정말 피곤하고 따분하고 지루한 사회를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유는 없이 한가로운 맛도 없이 게다가 팍팍한 일상에서 매일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 전투적인 인생에서 새로운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생각의 전환이다. 카피라이터의 사고는 곧 생각의 전환이고, 그것이 광고로 기획되어 자신의 생계벌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여덟 단어>는 사고의 전환이나 생각의 확장은 좋은 책이다. 그렇지만 그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 기반에서 모두가 동일하지 않다.


물론 작가 역시 알고 있지만, 정작 본인의 사례에서 말해주는 부분은 일반인들에게 너무 머나먼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 책에 대한 감상보다 먼저 작가의 담론을 심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여덟 단어>가 나쁜 책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나쁜 책은 아니지만, 그렇게 좋은 책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작가 본인이 카피라이터 때문에 책 본문을 읽을 때마다 발상의 전개가 참 대단하나, 그 발상에 독자가 심취하면 책으로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허사가 된다는 점이다.


책의 주제 여덟의 주제는 “자존(自尊), 본질(本質), 고전(古典), 견(見), 현재(現在), 권위(權威), 소통(疏通), 인생(人生)”이다. 만일 이 책을 아직 책에 대해 잘 접하지 않았거나 혹은 이제 입문하는 분에게 추천할 수 있겠지만, 정작 깊은 내용을 찾는 분에게 추천 드리지 않을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철학이나 인문학 서적에서 플라톤, 칸트, 니체, 스피노자 등의 원전 번역서를 읽지 않더라도 이런 철학자를 소개하는 도서에서 충분히 저런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철학은 모든 사유의 시작이고, 정치학과 사회학의 시초이다. 작가 역시 인생에서 철학은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하나, 모든 것에는 철학이 있다고 한다. 만일 이미 어느 정도 인문학에 깊은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박웅현 작가의 말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의 인문학적인 견해보다는 그런 견해를 상당히 잘 포장된 문구로 전달할 수 있는 플랫폼에 놀라워할 것이다. 작가는 본질적으로 매체는 다르게 변해가더라도 콘텐츠의 질과 소재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변하지 않은 것은 없으나 변하지 않을 것도 있다.”라는 방식은 이미 오래된 문구이며, 하나의 진리이기도 하다.


변하지 않기 위해 변해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이란 한계점이 있고, 그 한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놓여있다. 운명이란 자신이 헤쳐 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주어지는 것인가? 어느 것이든 둘 다 정답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주어진 조건과 환경 안에서 앞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모르나 제일 마음에 들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자신이 찾아가는 길이 자신의 의도하고 무관하게 흘러가 거기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으나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어떻게든 자신의 조건 아래에서 모든 상황을 정리하여 길을 여는 것은 옳은 말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 조건과 상황이 무척 다변적이다. 저자도 알고 있지만, 그 사례로 들어보는 것들이 너무 좋은 것만을 보여준 것이다. 나와 내 주변은 이렇게 그물에 걸려도 잘 풀고 다르게 가는데, 이런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남의 성공담을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열린 생각으로 가고자하는 것도 틀린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답답한 세상의 기변에 깔린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제대로 보는 게 아니라 단순히 거기에 맞추어 개인이 알아서 잘 해야 한다는 논조가 다소 스며있다.


박웅현 카피의 마인드는 좋다. 특히 외국의 CEO가 회사를 오고가는데 쓸데없이 허례허식도 필요하고, 서로의 자존감을 건들지 않는 것도 좋다. 한국이 그게 용인될 사회가 아닌 것도 안다고 해서 그것을 독자에게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기존의 한국 기성세대가 가진 관료주의식 내지 군대문화는 우리 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런 식으로 살 필요가 없지 않으냐 말은 무리수가 있다. 이런 사회에서 살 수밖에 없다면 답답한 사회에서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겠고, 이를 위해 우리 모두 조금씩 여유를 찾아 변화해야 하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위의 페미니즘 담론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고 일하고 존재하는 공간적 기반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공간적 주박을 부정하기 보단 그 주박에 대한 문제점을 생각하고 조금씩 고치기 위해 생각의 전환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는 아니나 인문학적으로 자기계발서 같은 도서다. 단지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와 다를 뿐이다.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에 대해 상당히 꺼리는 편인데, 그 이유는 자신의 롤 모델은 자신의 롤 모델이지 그 이상으로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 거의 희박하다. 단순히 가능성으로 제시하면 모르나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방식만큼 더 멍청한 조언과 조언자는 없다.


<여덟 단어>의 “자존(自尊), 본질(本質), 고전(古典), 견(見), 현재(現在), 권위(權威), 소통(疏通), 인생(人生)”을 보고 우리는 당장 우리 삶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런다고 조금 삶의 저편에 작은 바람은 분다고 생각한다. <여덟 단어>는 저자와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예로 들었지, 저자의 삶을 롤 모델까지 하지 않았다. 단지 그 예가 너무 일반적인 사람들과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내가 이 책을 비판한 점이다. 작가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히 들어볼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작가의 말을 듣고 그것에 대해 분명히 판단해야 할 필요성은 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현실적으로 무리수가 있다면 결코 그것은 좋은 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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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경제를 다른 애니메이션으로 "C(COLLAPSE)"란 작품이 있다. The Money of Soul and Possibility Control, 돈 그것은 영혼과 가능성을 결정짓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중요한 점은 돈의 그 가치를 나타내는 화폐에 본 작품은 경영학이 아니라 경제학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요가 키미마로는 일본 대학교 경제학부에 다니는 학생이기 때문이다. 경제학과 경영학의 차이점은 경영학은 사업적인 관리, 즉 개인이나 기업의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학문이고, 경제학은 경영학과 달리 국가 전반적인 생산과 소비에 대해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C"의 주인공이 보는 경제적인 관점은 단순히 개인의 이익에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의 영역으로 이어간다. 일단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현재 조건을 보면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어릴 적부터 친척집에 자란 가난한 대학생이고, 학비는 장학금으로 견뎌내더라도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주인공 키미마로는 헤이세이대학(도쿄대학) 경제학과를 다닌 점에서 일본 내 최고의 경제학도이다.

 

그런대도 현실적으로 자신의 경제 상황을 정리할 수 없다. 경제학으로 경제를 아는 것과 자신의 경제적인 여건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경제라는 것은 과연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 것일까? "C"의 1화 첫 장면에서는 요가가 수업시간에 교수의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교수의 강의를 듣지 않더라도 교수의 강의는 충분히 영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경제사(經濟史), 즉 경제의 역사이다. 경제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보통 일반인들은 경제라는 단어에 민감해도 경제라는 그 거대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경제학의 명칭이나 개념은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했으며, 정치철학 영역에서 경제가 등장한 사례로 플라톤의 <국가>이다. 어느 장소에 5명이 살고 있는데, 각자가 구두를 만들고, 집을 만들고, 무기를 만들고, 혹은 어떤 특정 업무를 한다. 그런데 만약 자기가 맡은 특기분야 대신 다른 것을 한다면 제대로 생산품을 만들 수 없으므로, 각자가 맡은 분야의 일을 맡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경제적 가치관이 그 당시와 비교하여 다소 차이가 나겠지만, 우선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이익의 목적이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더 넓게 보자면 사회 시스템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다시 “C"로 돌아가면 경제사에 대해 교수강의를 들어보면 경제의 시작은 물물교환에서 시작한다. 어느 누군가가 자신이 가진 재화나 혹은 상품이 넘친다. 하지만 다른 누구는 그 재화나 상품이 부족하다. 넘치는 상품은 내구력이 견고한 것도 아니고, 많이 있어도 보관하기가 귀찮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합리적으로 대안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건네주고, 대신 다른 것을 받아오는 것이다. 만약 그 사회의 부족사회 내지 가족단위의 사회라면, 친목과 평화 그리고 서로 간의 사랑이 통하므로 증여로서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부족 안에서 생산되는 다량의 재화는 그 부족 어디라도 충분하므로 그 부족이 아닌 다른 부족 혹은 사회그룹과 물물교환이 이루어진다. 그곳부터 경제가 시작되고, 경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화를 넘겨주고 자신이 필요한 재화를 받아온다. 흔히 경제적인 관점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주로 금융, 화폐와 신용에 대해 생각한다. 신용은 화폐를 움직일 수 있는 가치나 척도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화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화폐는 상품의 이동에서 물물교환이 비효율적인 부분에 따라 새롭게 개편된 시스템에서 등장한 도구다. 화폐가 어느 순간 모든 가치를 액수로 정하는 가치가 척도가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경제구조에서는 화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하지만 경제라는 것은 모든 것을 화폐로 통해 보는 것만이 아니라 화폐라는 척도로써 바라보는 게 정당하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경제의 시작점은 필요한 재화의 이동에서 시작한 것이다. 경제학과 경영학이 복잡다양하게 우리 사회에 등장하고 있지만, 사회전반적인 변화과정에서 경제라는 것은 생산과 소비에 대한 관계이다. 결국 돈을 투자하여 얼마나 이익을 얻고, 부의 창조를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이익을 위한 경영이란 business Management, 사업에 대한 관리이다. 경제적인 부분은 경영적인 부분과 추구하는 목표는 다르나, 경영인들의 경영관리와 경제활동이 엮인다.

 

지금이야 식료품이 다양하게 넘치나, 과거에 기술이 발전하지 못할 시기는 식량을 수익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파나 홍수 또는 전쟁과 전염병 등과 같은 재난재해는 농지를 황폐화시키거나 노동인력을 크게 손실시켜 식량 생산력을 급격히 감소시킨다. 식량이 제때 공급되지 않을 경우 그 나라의 국민들은 생존하기가 어려우며, 그 나라는 최후에 자멸하거나 타국의 침공에 의해 멸망한다. 식량에서 밀의 생산력은 곧 국민들의 배를 채울 수 있게 하고, 이에 따른 필요한 재화를 추가로 발생시켜 국민들에게 주어지게 하여 나라의 생산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 바로 국가의 경쟁력이란 국민이 얼마나 건강한 육체로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는 척도가 정치경제의 첫 걸음이고, 정치철학의 근본이다. 정치학에서 공공경제의 목적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국가의 모든 시작은 인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을 수입하고 파는 것은 상인들이고, 그들은 자기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타국의 상인과 농민조차 그런 자본에 의해 움직인다. 화폐가 지금처럼 달러나 위안화 등과 같이 세계의 무역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이었다. 상인들이 상품을 팔아 수익을 얻으면, 수익 일부를 국가세금으로 낸다. 상인들은 흉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위한 것도 아니고(어떻게 보면 통상적 가격보다 훨씬 높은 이윤으로 판다), 그들의 국가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자신의 이익, 경영관리로써 이윤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런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흉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결국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과거 상인을 현대사회에서 대상인물과 대조해보면 자신(들)의 이윤을 목표로 활동하는 기업이 된다. 기업이 제때 물건을 시장에 내놓지 않으면 국민생활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기업에 일하는 사람들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이기에 기업의 존속은 그 사회의 안정까지 이어진다. 경제학과 경영학의 시작에서 목표, 가치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어떻게든 서로가 연결되는 구조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맹점이 발견된다. “C"에서 요가는 가난하나, 국가인 일본은 매우 부유하다. 국가는 부유한데, 왜 국민은 가난해지고 있는가이다?

 

우선 공공경제와 개인경제는 다르다는 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국가경제에서 기업의 경영과 관련이 있다는 점, 기업의 이윤이 올라가도 그것은 세금으로 충당되어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지만, 기업이 버는 돈 그 자체가 국가가 버는 돈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업에서 얻는 이윤은 기업을 위한 이윤이고, 기업에서 고용한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임금이 생계수단으로 소비세로 지출되는 편이 더 많은 세금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기업이 돈을 잘 버는 것이 국가의 공공경제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어느 기업에 속하거나 혹은 그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가족들의 생계과정에서 일어나는 소비가 더 높은 경제활동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경제라는 것은 기업이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필요한 재화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경제이든 경영이든 모든 것을 화폐로서 이루어지고 이른바 금융에 의해 일어난다. 은행에서 화폐를 생산하여 시중 은행에 넘기어 시중은행은 필요한 사람에게 대여하고, 그 사람은 화폐를 이용하여 투자와 구매를 한다. "C"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화폐에 대한 부분이다. Midas 은행, 신화에서 어느 누구라도 그의 손에 닿는 순간 황금이 된다는 마이다스의 손, 작품에서 일본에서 발행된 화폐와 Midas bank에서 나온 화폐는 서로 다르다.

 

모르는 사람에게 같은 화폐로 보이나, 막상 금융가의 길에서 결투를 하는 사람에게 검은 돈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Midas Bank에서 나온 화폐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Midas Bank는 일본만 아니라 세계 금융가가 있다면 어디든 존재한다. 그들의 돈은 어디서 나오고,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수 없다. 단지 그 돈이 들어온 나라에는 무한정적으로 유통되는 화폐단위가 증가한다는 점이고, 어느 순간 화폐의 액수가 0이 되는 순간 "C(COLLAPSE)"가 일어나고, 그 나라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심각한 경우 작품에서 세계지도에서 사라지는 비극이 탄생된다.

 

경제구조가 파탄나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는 점이다. 그런데 왜 망하는 것인가? “C"는 인간의 자본에 대한 욕망,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딜레마라고 보여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모든 것을 화폐로써 가치를 정한다. 그런데 그 화폐가 의도적으로 흘려보낸 뒤 마지막에 빼앗는 것이라면? ”C"는 바로 그런 자본주의에 대한 현실을 고발한다. 요가가 마지막으로 일본의 국가를 "C(COLLAPSE)"에서 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금력과 투자할 수 있는 금전적인 규모가 작품에서 캐릭터로 등장한다. 요가의 캐릭터 에셋은 마슈이다. 마슈는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가 거느린 에셋과 비슷했다고 한다.

 

에셋의 주인 앙트러가 다른 앙트러와 대결해서 패배하면 에셋은 사라지고, 그의 신변에 큰 악몽이 탄생한다. 그의 미래가 사라지는 것이다. 만약 자본력을 많이 가지거나 혹은 공공 경제에서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일수록 그 피해정도는 심각해진다. 만일 대기업이 파산할 경우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량으로 해고되고, 금융권은 크게 요동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날 때 대처하는 방법이다. 무너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무너지는 것을 받치기 위해 다른 자본을 동원하는 점이다.

 

빚을 갚기 위해 다른 누군가 빚을 갚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 돈이 순전히 구매자의 자금력이 아니라 그 사람조차 빚으로 갚았던 돈이다. 미쿠니의 행동은 결국 자신이 보유한 순수금액이 아니라 Midas Bank의 대출금이다. 대출을 받으면 나중에 되갚는 문제가 있다. 대갚는 것을 개인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국가예산이 빈약해지고, 혹은 빚을 억지로 내어 대출을 갚으려면 또 다른 빚이 늘어난다. 일본에서 만든 화폐는 1000엔인데 다수의 은행을 통해 억지로 돈을 불리고 불려 10000엔으로 된다면, 빚은 9000엔이다. 문제는 갚아야 할 돈은 9000엔이 아니라 9000엔의 이자까지 포함이다.

 

사회적으로 본래의 화폐가 아닌 빚으로 만들어진 화폐가 유입되면 실제 존재하는 돈은 소규모라도 유통되고 있는 화폐액수는 계속 증가한다. “C" 마지막에 보면 미쿠니와 싸우는 요가는 개인 또는 국가의 미래를 담보로 돈을 움직이는 Midas Bank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본의 화폐가치를 모두 종이로 만들어버린다. 즉 슈퍼 인플레이션을 일으켜서 화폐가 시중 금융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퍼뜨린 것이다. 미쿠니의 부하가 가로채려는 돈 액수만으로 충분히 인플레이션의 효과를 일으켰고, 결국 일본 화폐경제는 붕괴한다.

 

빚을 빚으로 갚는 것에서 이미 국가경제는 망하는 징조라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을 잘 보여주는 점이 미쿠니는 Midas Bank에서 엄청난 대출을 받아 첫 번째 "C(COLLAPSE)"에서 일본의 피해를 피한다. 하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인구 출산이 한 해 3명이란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 그 와중에 계속 Midas Bank의 화폐가 유입되면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활기가 사라지고, 의욕이 사라져 희망조차 잃게 되는 상태에 이른다.

 

미쿠니는 지금의 위기를 탈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요가는 미래의 존속을 걸고 싸운다. 미쿠니는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하여도 되는 것이고, 요가는 그 희생으로 인해 더 이상 미래에 대한 희망할 수 없다는 것에서 대립된다. “C"에서 미쿠니와 요가의 모습은 사실 현실의 우리 사회하고 많은 연계성이 보인다. Midas Bank의 화폐가 계속 시중에 유입되고, 그 화폐는 실재하지 않은 화폐, 즉 빚에 의해 만들어진 화폐이다. 우리는 빚으로 만들어진 경제구조 위에서 놀아나는 점이다.

 

마지막에 엔화가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달러를 이용하여 경제구조가 다시 시작된다. 일본의 화폐가 없어졌는데도 왜 경제활동은 가능한가? 여기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경제라는 것은 어느 재화가 필요한 사람이 있고, 재화를 팔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경제시장이 존재할 수 있다. 일본에서 없어진 것은 엔화라는 화폐이지, 화폐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진 게 아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경제라는 것은 인간의 생활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사람이 경제에 얽매인 노예가 되었다는 점이다.

 

경제에 대해 다룬 작품으로 <늑대와 향신료>와 <용사마왕 마오유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확실히 말하자면 나는 경제학과 경영학 전공자가 아니고, 경제적인 관점이라 해도 문화인류학적 관점에 많이 의존했다. 경제가 현재는 화폐를 중심으로 생각하나, 화폐의 입수보단 인간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생필품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늑대와 향신료>를 보면 그것은 경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경영자의 마인드고, <용사마왕 마오유우>가 더 경제적인 요소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용사마왕 마오유우>에서 감자를 악마의 열매라고 하나, 막상 감자는 식량으로 가치가 매우 높고,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한다.

 

그것을 전해준 사람은 악마의 종복이라 하고, 마왕은 세상을 어지럽히기 위한 악의 절대자로 묘사한 시대가 있다. 작품에서 항해술이나 망원경 등 각종 기술과 지식들은 그 나라의 부를 성장시키는 것도 있지만, 권력자들의 이익 즉 국가의 무력과 지배력을 확장시키며, 필요한 물품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이어진다. 경제라는 것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진행하여 결국 어떤 식으로 좋은 방향으로 이어지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경제학은 어떤 방향을 추구하는지 모르나. 경제학의 시작인 <국부론>에서는 경제라는 것은 수요자의 보다 나은 생활을 만들기 위해 연구해야할 과제이다.

 

<늑대와 향신료>에서 생산품의 가격이 저렴한 곳에 가서 대량으로 물품을 구매하여 그것을 비싸게 팔리는 곳에 가서 금화와 은화를 받으려 하는 것은 경제시장구조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의 경영관리 방법이다. <늑대와 향신료>의 주인공 로렌스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등장하는 빵을 굽는 제빵사와 같은 사람이다. <국부론>에서 빵을 파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동정심에 의해 물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물건을 파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활동이 재화가 필요한 사람에게 물건을 주고,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늑대와 향신료>를 보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상회나 상인들은 어느 상품에 대하여 독점이나 과다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모습이 나온다. 만약 독점이 일어나면 재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은 비싼 가격으로 구매해야 하고, 만일 그 재화를 구매할 수 없는 경우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분명 말하지만 경제의 목적은 필요한 사람에게 적재적소의 물품을 합리적으로 입수하게 하여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 조건, 기업과 정부의 정책과 시장논리는 이상하게 만들어낸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은 손”은 분명 그런 말이 아닌데, 혼용하는 경우가 다분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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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3-07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컬랩스를 꼭 보겠어요! 불끈~~!

최근 알드노아 제로..보고 눈 베려서 안구 정화할 작품이 필요했는데, 정말 괜찮은 작품을 추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당~!

만화애니비평 2016-03-07 19:11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님도 은근 덕후라니 좋습니다. 우후후
 

어찌 보면 괜히 폼을 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나, 개인적으로 영화는 대중영화보단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대중영화의 특성은 기본적으로 흥행만 바라보는 점에서 이야기는 재미만 넣었지만, 막상 보고나면 무슨 내용인지 기억해내기가 귀찮아진다. 잊어버리는 것보단 이미 영화를 보기 전부터 자신의 무의식 공간에서 스토리의 흐름을 계산하고, 거기에 얼마나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생각한다. 영화의 서사에서 등장인물, 스토리, 배경이나 소재만 다르지 그 작품에서 의미하는 주제성은 거의 동일하게 흘러간다. 아슬아슬한 갈등관계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로맨스나 신화적 영웅을 추구하는 게 보편적인 관객의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는 솔직히 말해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상으로 표출되는 이미지의 세계가 친절하지 못하다. 박찬욱 박찬경 형제가 만든 <파란만장>이란 30분 넘는 영화를 보면 정말 불친절한 영상미를 보여준다. 아이폰4로 촬영해서 만든 영화이니 관객에 대한 친절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작품 그 자체이기에 영화는 진짜 영화로 제작될 수 있었다. 문화예술을 찾아가는 정체성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나는 3‧1절을 맞이하여 새로운 형태의 예술영화를 보았다. 아는 동생 녀석에 추천받은 <사울의 아들>을 말이다. 박감독 형제가 만든 <파란만장>은 <사울의 아들>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사울의 아들>을 보는 순간,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추천할 수 없는 영화다. 내용이 정말 비참하고 끔찍하며, 화면에서 나타내는 카메라연출까지도 상당히 불편하다. 감독은 일부러 그런 요소를 노렸다. 그렇게 불편한 장면과 서사들이 결국 예술이란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가장 큰 사건이란 바로 전쟁이다. 전쟁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는 지에서 예술로서의 가치가 존재한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는 전쟁영화를 많이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적인 가치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영화를 하나의 쇼라는 블록버스터 장르로써 전쟁 그 자체를 하나의 스펙타클로 구축한다.

 

전쟁이란 공간은 영웅의 등장만이 아니라 정의의 구현보단 차라리 지옥이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전쟁은 전혀 친절한 얼굴을 하지 않으며,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나머지 상황들을 버린다. 그러나 전쟁에서 언제나 카메라 중심은 우리 아군이라는 점, 아군의 승리와 패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군이 보여주는 활약이다. 살아남으면 승리의 영웅이고, 죽으면 고귀한 희생으로 추앙된다. 이기나 지나, 살아남으나 죽으나 어차피 영화는 주제성을 명확히 전달할 뿐이다. 그렇다면 주제성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 의미를 생각하여 만약 그 대상이 우리가 일반적인 범주에서 다가가기 어려우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울의 아들>은 진짜 그런 영화다. 전쟁은 인류가 만든 가장 멍청한 행위이면서 인류문명을 가속화시킨 원인 중에 하나다. 더 많은 적을 빨리 치명적으로 죽이기 위해 효율적인 방법을 연구하면서 과학과 기술은 발전한다. 인류가 100세를 바라보는 이유도 전쟁에서 사망한 병사의 시체, 그리고 비인도적으로 자행된 생체실험의 결과물이다. 생체실험이 이루어진 국가로 일본 731부대, 그리고 독일의 나치수용소이다. 독일에 의해 점령된 헝가리, 일본에 의해 정렴된 조선이란 국가는 전쟁에 의해 엄청난 수탈과 억압을 받은 나라다.

 

일본은 되도 않은 황국신민화 논리로 조선인을 제2의 일본인으로 만들어서 전쟁에 보내나, 독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의 총알받이보단 신속히 가스실에 보낸다. 대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챈다.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시작한다.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 밥과 음식을 제공 전, 먼저 샤워를 하라면서 옷을 모두 벗긴 채 어느 방 안으로 보내고, 잠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난무한다. 독가스를 마신 사람들은 질식으로 모두 사망하고, 가스실은 피가 바닥에 스며들고, 차갑게 식어버린 시체들이 즐비하다.

 

나치독일의 만행, 가스실의 제노사이드다. 하지만 이 잔혹한 계획은 나치가 수행했으나, 모든 일처리를 “존더커맨더”라고 불리는 포로였다. 이들은 몇 개월 동안 나치 감시 속에 업무를 맡다가 어느 일정기간이 지나면 처형된다. 죽기 전에 실컷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더러운 일에 동원된다. 그들의 얼굴에 그 어떤 희망의 눈빛을 찾아볼 수 없고, 굳어버린 표정과 타성에 젖은 대답만 할 뿐이다. 그런 세계에 더 심각한 절망과 증오가 불타오른다. 영화 <사울의 아들> 주인공 사울 역시 절망의 세계에 살아가는 한 남자다. 그는 평소대로 나치의 업무를 수행 중에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다.

 

독가스를 마시면 일반적으로 호흡곤란으로 모두 죽는 반면, 어느 포로들은 살아남은 경우가 있다. 어느 한 소년이 가스실에서 생존하여 침대 위에 올려지고, 군의관 1명이 와서 생존여부를 확인 후 소년의 목을 눌러 교살시킨다. 결국 소년은 차가운 주검으로 변하고, 사울의 눈빛은 동요하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행동들을 일으킨다. 그 소년은 영화제목처럼 <사울의 아들>이었고, 사울은 눈앞에서 아들이 죽어가도 아비로서 아무것도 못한 채 가만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아들은 다른 시체처럼 토막으로 취급되어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야 했다.

 

아들을 구할 수 없는 아버지, 그래도 그는 아들의 마지막을 불이 아니라 땅에 매장해주고 싶었다. 매장을 하려면 물론 땅을 파고 거기에 묻어야 하나, 문제는 랍비 즉 성직자가 필요했다. 종교는 구시대에서 유럽의 정치를 좌우하던 권력이었으나, 20세기 유럽에서는 정치보단 그 종교의 문화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담당하던 문화적 역할이 컸다. 아이가 죽으니 랍비의 장례절차가 필요했다. 신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죽은 아이에게 신의 은총이 내려지길 원한 것이다. 인간의 생에서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죽어가나, 죽은 이후의 세계에선 영혼의 구원을 바란 것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랍비를 찾기 위해 사울은 여기저기 수소문을 찾아보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가 되지 않고, 언제나 벽이 막힌 현실은 카메라의 연출에서 잘 볼 수 있다. 영화의 영상미가 참으로 불편한데, 보총 영화는 16:9나, 여기는 4:3이란 점, 더욱 놀라운 점은 보통 영화는 롱샷, 풀샷, 미디엄샷, 클로즈업 등이 골고루 배치하도록 연출하나, <사울의 아들>은 거의 모든 화면이 클로즈업으로 처리하려 한다. 사울의 얼굴을 중심으로 다른 피사체는 아주 흐릿하게 보인다.

 

사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주변 인물과 대화하고, 상황과 장소 정도만 풀샷 정도로 보여준다. 카메라의 시점은 거의 2인칭으로 사울의 행동에 집중적으로 따라가며, 배경과 상황정도만 3인칭 정도로 보여준다. 사울은 언제나 주변의 눈치를 보고, 늘 위기와 감시 속에서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행동한다. 랍비를 찾기 위해 다른 반장의 작업장에 찾아가고, 나치의 만행을 폭로하려는 사람의 일을 도와준다. 나치수용소 내부를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어느 수용자는 사진기로 촬영할 때 망을 봐주거나, 나치가 “존더커맨더” 작업인부 70명 정도 죽이려고 할 때 봉기를 위한 화약을 구하는 일도 맡는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되지만, 사울은 묵묵히 그 일을 수행하고, 랍비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하필 그 날이 수용소 감독관이 전쟁포로 처리인원을 갑자기 늘리던 때였다. 도착한 포로들을 15분에 1번씩 가스실에 넣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며, 가스실의 사체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소각로가 모두 차게 되었다. 그러자 나치는 포로를 야외에 끌고 나와 그 자리에서 바로 옷을 벗기고, 머리에 총을 겨누고 사격한다. 그리고 야외에 만든 임시 소각장에 시체를 불태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하고 충격적인 장면만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래도 사울은 랍비라고 말하는 남자를 찾아내나, 그것도 마지막에 허사로 끝난다. 마지막 장면에 나치는 작업반장을 죽이는 것을 시작하여 “존더커맨더”를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사태의 위험에서 사울은 아들의 시체를 매장하려 하나, 결국 그것도 되지 못한다. 나치에 봉기 도중 도망쳐야 했으며, 마지막에 나치가 보낸 염탐꾼의 첩보로 모두 죽는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영화로 유명한 작품으로 <쉰들러 리스트>가 있다. 이 영화는 암울한 수용소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찾아간 것이라 말한다면, <사울의 아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울의 아들>이란 영화는 매우 불편하고, 친절함이 전혀 없는 작품이다. 시체의 알몸, 해부실의 시체, 즉결총살, 불타는 시체 등등 피비린내와 죽음의 공간이 인간의 운명을 옆에서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로테스크한 세계와 냉소적인 인간, 이런 잔인한 영화가 왜 계속 나와야 하는 것일까? 불편한 시선과 달리 보기에만 좋은 작품들은 현실에서 금방 잊어버리고, 그저 흘러가는 것들로 공중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 같은 작품은 인류가 저지른 악몽과 지옥을 되새기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제시한다.

 

영화에서 본 지옥 같은 수용소, 악몽이 현실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런 삶과 세상을 오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길 것이다. 만일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을 경우 비극은 또 다시 반복된다. 역사의 교훈은 바로 지나간 일들이 다시 미래에 똑같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왜냐하면 그 당시 인간들은 모두 죽었으니) 똑같은 방식과 형식으로 되풀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미래조차 열어갈 수 없으며, 자신의 눈앞에서 미래가 파괴되는 절망을 사울처럼 겪을 것이다. 영화 <사울의 아들>에서 아들은 바로 미래와 희망이다.

 

사울은 바로 그 미래와 희망을 잃을 자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본처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얻었으나) 다른 수용소에 있는 것으로 알았지만, 아우슈비츠에 끌려왔고, 거기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미래와 희망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과거의 오류를 반성하고 되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에 얽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겠지만, 지나간 것을 무시하면 앞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간다. 그리고 그 앞은 절벽이란 사실은 마치 무언의 약속처럼 등장하여 우리를 절망으로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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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3-01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사울과 스포트라이트 둘 중 하나 고민하다 결국 후자 보았는데, 주말에는 사울도 봐야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3-01 21:45   좋아요 2 | URL
오오~!
역시 주말은 이런 영화를 혼자 보는 재미가 있지요...

yureka01 2016-03-01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젤만 ㄷㄷㄷㄷㄷㄷ그러게요 ....ㅠㅠ

만화애니비평 2016-03-02 08:56   좋아요 1 | URL
주말과 휴일은 잘 보냈는지
 
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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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학계를 그렇게 잘 아는 편은 않으나, 확실히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문학소설을 읽으면 기존 한국소설계는 뭔가 모르는 엄숙주의 내지 장편으로 전개되는 유형이 많았다. 물론 소설 중에 단편적인 부분도 많으나, 대부분 단편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꾸려진 경우는 드물지 않은 것 같다. 소재나 이야기의 주제성도 거대한 서사에서 점차 작은 이야기로 넘어가고, 예전에 읽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처럼 한국의 소설도 왠지 모르게 일본의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서브컬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가는 게 아닌가도 싶었다.

 

이번에 읽은 최제훈 소실모음집 <퀴르발 남자의 성>을 읽을 때 생각이 드는 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몽타주의 편집적 요소가 보인다는 점, 또 다른 하나는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요소가 조금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시간과 공간의 일치성보단 시간전개가 뒤죽박죽인 “퀴르발 남자의 성”, 추리 소설 <셜록 홈즈> 작가인 코난 도일을 최제훈 소설문집에서 셜록 홈즈가 발견한 피해자로 등장시키거나, 또는 정신적 해리증세를 가진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 가면 뒤에 숨겨진 인간의 추악함 등을 작품에 반영시킨다.

 

최제훈 소설모음집은 이른바 추의 미학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고, 기존의 도덕적 가치관에 대해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반영한다. 인간의 추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란 바로 오늘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추악함은 원래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아니라면 만들어져 가는 것인가? 여러 가지 모습이 드러나겠지만, 점차 인간이 부패하가는 모습을 작가는 잘 맞춘 것 같다. 물론 이 소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과 평이 있으며, 심지어 뒤에 보면 문학평론가의 심사평이 따른다.

 

나는 문학도가 아니고, 문학평론가는 전혀 관계없으니 굳이 그렇게 정리할 필요 없다. 단지 나대로 생각하여 그것이 타인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객관성을 추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찍어볼 것이란 문제다. 이 소설에 재미있기도 하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 서브컬처의 느낌이 나는 이유는 이미 이 이야기들이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등장할지 모르나, 서브컬처 내에서 그렇게 드물지 않은 이야기다. 영웅의 시대가 서사를 풍미하는 게 아니라 반영웅, 혹은 얼간이라도 주인공이 나오고, 별에 별 기막힌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서브컬처이다.

 

마녀에 대한 이야기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메데이아라는 마녀의 이름이 이미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라는 게임 및 애니메이션에 등장한다. 단지 사람들은 마녀가 처음 가진 의미, 마녀의 시작과 그 변이과정을 잘 모를 뿐이다. 작가 최제훈은 마녀의 이야기에서 고증적인 연구를 많이 했다. 마녀사녕은 문명이 존재하는 인간세계에 얼마나 추악한 일들이 벌여졌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존재이다. 문제는 그것은 되풀이되는 하나의 세계이고, 이제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공동체사회만이 아니라 사이버세계까지 이어진다.

 

그렇지 않을까? “그녀의 매듭”에서 고교동창생이 학원비를 벌기 위해 조건만남을 한 것을 알았던 주인공은 친구의 성공과 자신의 실패에 대한 분노로 뒤에서 공작을 펼친다. 그런 공작은 대학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에 나와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남자사람친구 주변 여자까지 견제에 들어간다. 마녀는 사실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마녀 같은 인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나, 형이상학적인 사이버세계에서 난무하고 있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타적 의식이 개인의 영역이 아닌 집단적 광기로 변화하여 한 개인을 괴물로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보다는 왜 악하게 되어 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의 아이를 죽여 괴물의 성에서 같이 향연을 열던 부모와 삼촌내외의 모습에서 우리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욕망에 이성과 도덕관을 잃어간다. 아니 처음부터 도덕이란 무엇인가? 개인에게 가해진 물리적, 사회적 폭력은 어느 한 개인을 자신도 모르게 괴물로 키워낸다. 그리고 자신을 한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거나,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기도 한다.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2사람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단 다른 사람의 이름을 꺼내어 그 주제에 맞추어 간다.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물론 나와 상대가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상대만 조금 알고 나는 잘 모르는데, 그 사람을 하나의 가십거리를 삼아버리는 것은 현대사회 인간이 본인 자신을 타자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타자에 대한 욕망, 그것이 자신의 욕망으로 대체한 것이다. 사실 다른 책에서 흡혈귀와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글을 보면서 기억나는 게 미국대공황 이후 경제적 문제에서 흡혈귀는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고, 프랑켄슈타인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것을 하나로 모우는 것, 즉 현실에 대한 도전에 대한 의미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보인 흡혈귀 아니 퀴르발 남작에서 그는 보통 사람마저 식인귀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처음부터 미국에서 살던 가족들이 시집보낸 딸집에 간 이유는 경제적인 조건이 어려워서이다. 경제적 상황에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성만 따지기에 효율성에서 개인과 개인의 집합에선 윤리적 가치를 따질 이유는 없다. 그런 모순은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처럼 코난 도일이 추리소설 <셜록 홈즈>의 작가이고, 홈즈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그가 죽었는데, 홈즈는 추리과정에서 혼선을 빚는다.

 

창조자가 코난 도일이고, 코난 도일을 찾아가는 홈즈는 그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다. 오리지널보다 카피 내지 만들어진 존재가 오히려 죽어버린 자신을 찾아가지만, 헛수고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녀의 매듭”처럼 자신의 소꿉친구의 얼굴사진을 도려, 이현정의 사진과 합성시킨 연화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다. 본질은 수동적이고, 본질이 아닌 가상, 허구, 복사, 잉여적 존재가 우리 일상을 움직이고 있다. 아마 소설의 제목을 여러 작품에서 “퀴르발 남자의 성”이라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분명 저 남자의 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에 삼켜지거나 그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 활보하는 세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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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9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1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전에 본 영화중에 <한공주>라는 작품이 있었다. 평소 여자연예인들에게 관심이 없는 나에게 마음에 드는 연예인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한공주>에서 주연을 맡은 천우희 씨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연기를 정말 잘 했기 때문이다. <한공주>란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리뷰를 작성하지 못했는데,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한 마음과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여준 잔혹한 장면들이 사실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에 비해 상당히 완화된 것이라 한다. 과거 밀양에서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당한 여중생은 자살했는데, 그 이후 거기에 가담한 남학생들이나 그 남학생 주변의 인간들은 사회에 나가도 잘 먹고 잘 사는 어이없는 현실이 된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에서 일본 2CH에서 어떤 히키코모리가 고등학교 당시 자신을 엄청 괴롭힌 4명으로 24살 되도록 세상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은둔하고 있다는 사연을 보았다. 동창회에 가기 싫어 억지로 가보니 자신을 괴롭힌 4명은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참고로 밀양 집단성폭행 사건 가담자 1명은 공무원이 되었다는 인터넷(Face Book 화면갈무리) 게시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가해자가 피해자를 나두고 떳떳하게 얼굴을 내미는 세상이 되었을까? 아무튼 세상이 이상하게 미쳐가고 있는 것 같다. 어째서 피해자가 자신의 억울하게 당한 부조리를 말하지도 못하게 하고, 말하는 것조차 이상하게 보는 세상, 과연 이게 정당한 도덕적 가치관인가?

 

이번에 본 영화 <귀향>, 귀향이란 하면 귀향(歸鄕)이란 집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귀향(鬼鄕), 즉 귀신같은 넋이나 혼과 같은 영혼의 고향이다. 고향에서 억지로 끌려나와 먼 곳에서 억울하게 생을 마쳐야했던 소녀들, 그들은 아직 자신의 유골조차 고향 뒷동산에 안치되지 못하고, 설사 살아와도 그때 이후로 시간은 멈추었다. 예전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낮은 목소리>를 본 적이 있었다. 어느 만화애니메이션축제에서 프랑스 앙골렘 만화축제에 상당한 평가를 받았던 “지지 않는 꽃”이란 전시회를 보았다. 만화작가가 그린 하나의 만화서사도 있었지만, 위안부에 끌려갔던 살아남은 소녀들의 그림도 있었다.

 

점점 갈수록 그들의 수는 줄어들고, 그들의 한 맺힌 분노는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깊은 상처에 시들어간다. 이미 “지지 않는 꽃” 전시회에서 <나비의 노래>를 통해 보았다. <귀향>에서도 내림굿을 받은 소녀가 상처투성이 소녀와 나비를 보았다고 한다. 나비, 자유로이 날개를 펼치면 날아가는 생물, 그 나비를 마치 무참하게 밟은 일본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한 일본군 장교가 나비의 표본작업 중 날개 하나를 잔인하게 부순다. 자유를 향해 날고 싶은 소녀들을 마치 포악하게 파괴하듯이 말이다.

 

시놉시스적인 부분에서 정말 표준적이다. 하지만 잘 모르는 분에게 충격의 연속일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보다 더 화가 나는 장면은 과거 위안부에 끌려간 살아나온 영희(손숙 선생님 배역)가 TV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관공서에 가서 신고해달란 기사를 보고 관공서로 향한다. 그때 앉아있던 남자직원에게 차마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용기가 없어서 뒤돌아서는 순간, 직원들은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업무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걸 신고하는 미친년이 어디 있어? 라는 말에 화가 난 영희의 억울함이 더 먹먹해졌다.

 

자신의 나라가 없을 때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나라가 있는데도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억울하다는 점이다. 위에서 <한공주>와 <귀향>을 놓고 내가 이렇게 대조하는 것은 바로 이게 우리 사회의 암적인 모습인 것이다. 왜 피해자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숨어 지내고 계속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른바 화냥년이란 말이 있다. 화냥년이란 원래 환향녀(還鄕女)에서 나 말이다. 병자호란 때 청국에 끌려간 많은 여성들이 다시 고향에 올 때 돌아온 것은 자신을 반겨주는 가족의 미소가 아니라 마치 오랑캐에게 몸을 팔았다고 여기는 더러운 눈빛이다.

 

한국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면서도 내가 느끼는 딜레마 중에 하나가 바로 저런 모순이다. 물론 전쟁이란 엄청난 재난은 인간을 하여금 가학적인 요소로 변질시킨다. 죽음에 맞대 있기에 그 증오와 불안을 여성에게 화풀이하는 방식으로 일시적으로 해소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복과 망각으로 이어지므로 연속적인 가학성으로 이어진다. 나중에 성폭행에서 단순히 폭행을 즐기는 변태적인 모습으로 변질된다. 사디스트적인 성적쾌락은 남성에게 주어지는 폭력성이 하나의 미적인 가치로 변해 오히려 당하는 대상을 억압하는 모티브가 된다.

 

<귀향>은 전쟁에서 위기에 봉착한 일본군, <한공주>에선 인격과 무관하게 돈과 성공만 강조하는 한국사회, 모두 강박관념이 약자에 대한 배려보단 약자를 착취로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 <귀향>을 보면서 연출적인 부분에서 딱 2가지가 충격적이었다. 그로테스크, 즉 보기가 흉하고 끔찍하여 상당한 불쾌감을 주는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하이앵글 각도에서 수많은 위안부소녀들이 그 작은 방에서 일본군에게 강제로 성폭행당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그것도 방 하나가 아니라 방이 수십 개나 되는 벌집처럼 말이다. 전쟁의 광기로 가득한 위안부소녀들의 착취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그리고 그 비극의 말로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자, 살해 후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서 모금해준 분들과 위안부할머니들이 그렸던 그림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위안부소녀 시체를 불태우는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을 모티브가 된 장면은 시체가 기름에 의해 타는 장면으로 연출된다. 물론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 일본군복을 입혀 총알받이가 되게 하거나, 식량이 없다면 인육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총을 쏴 죽이고, 칼로 찔려 죽이고, 동굴에 화염방사기로 태우거나 폭탄을 날리기도 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한지 신이 해본 실험으로 세계 2차 대전이 아닐까 싶다. 인간을 생체실험에 가장 많이 사용하고, 폭격과 독가스, 세균전, 핵폭탄이 이때 최고조로 달했다. 이런 일이 있고도 반성하는 국가는 영원히 그때의 비극을 잊지 않은 반면, 어느 국가는 그때를 오히려 영광의 순간으로 여긴다. 다른 국가는 어느 국가의 만행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그때의 영광이라 말하는 것조차도 제대로 발끈하지 못한다. 오히려 할머니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인간도 있다. 어떤 블로그에 글을 봤는데, 분명히 여성분 같은데, 위안부 할머니에게 위로되지 못할망정 망언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남자라면 그 남자의 아내, 딸, 손녀까지 모두 위안부 같은 곳에 끌려가라고 말이다. 오히려 그 말이 정답이지 않을까도 싶다. 물론 반인륜적인 부조리를 당한 사람에게 폭언을 하는 사람에게 반인륜적인 부조리를 당해보라고 하는 것이 다소 윤리적인 영역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남에게 인륜적 가치를 대하지 않은 이상 자신에게 그런 가치를 받을 자격은 없다고 나 역시 그렇게 본다. 영화 <귀향>에서 무속인이 굿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마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는 천도제인 오구풀이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면 과연 그 소녀들의 영혼은 하늘로 혹은 고향으로 날아갈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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