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괜히 폼을 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나, 개인적으로 영화는 대중영화보단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대중영화의 특성은 기본적으로 흥행만 바라보는 점에서 이야기는 재미만 넣었지만, 막상 보고나면 무슨 내용인지 기억해내기가 귀찮아진다. 잊어버리는 것보단 이미 영화를 보기 전부터 자신의 무의식 공간에서 스토리의 흐름을 계산하고, 거기에 얼마나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생각한다. 영화의 서사에서 등장인물, 스토리, 배경이나 소재만 다르지 그 작품에서 의미하는 주제성은 거의 동일하게 흘러간다. 아슬아슬한 갈등관계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로맨스나 신화적 영웅을 추구하는 게 보편적인 관객의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는 솔직히 말해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상으로 표출되는 이미지의 세계가 친절하지 못하다. 박찬욱 박찬경 형제가 만든 <파란만장>이란 30분 넘는 영화를 보면 정말 불친절한 영상미를 보여준다. 아이폰4로 촬영해서 만든 영화이니 관객에 대한 친절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작품 그 자체이기에 영화는 진짜 영화로 제작될 수 있었다. 문화예술을 찾아가는 정체성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나는 3‧1절을 맞이하여 새로운 형태의 예술영화를 보았다. 아는 동생 녀석에 추천받은 <사울의 아들>을 말이다. 박감독 형제가 만든 <파란만장>은 <사울의 아들>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사울의 아들>을 보는 순간,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추천할 수 없는 영화다. 내용이 정말 비참하고 끔찍하며, 화면에서 나타내는 카메라연출까지도 상당히 불편하다. 감독은 일부러 그런 요소를 노렸다. 그렇게 불편한 장면과 서사들이 결국 예술이란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가장 큰 사건이란 바로 전쟁이다. 전쟁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는 지에서 예술로서의 가치가 존재한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는 전쟁영화를 많이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적인 가치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영화를 하나의 쇼라는 블록버스터 장르로써 전쟁 그 자체를 하나의 스펙타클로 구축한다.

 

전쟁이란 공간은 영웅의 등장만이 아니라 정의의 구현보단 차라리 지옥이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전쟁은 전혀 친절한 얼굴을 하지 않으며,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나머지 상황들을 버린다. 그러나 전쟁에서 언제나 카메라 중심은 우리 아군이라는 점, 아군의 승리와 패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군이 보여주는 활약이다. 살아남으면 승리의 영웅이고, 죽으면 고귀한 희생으로 추앙된다. 이기나 지나, 살아남으나 죽으나 어차피 영화는 주제성을 명확히 전달할 뿐이다. 그렇다면 주제성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 의미를 생각하여 만약 그 대상이 우리가 일반적인 범주에서 다가가기 어려우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울의 아들>은 진짜 그런 영화다. 전쟁은 인류가 만든 가장 멍청한 행위이면서 인류문명을 가속화시킨 원인 중에 하나다. 더 많은 적을 빨리 치명적으로 죽이기 위해 효율적인 방법을 연구하면서 과학과 기술은 발전한다. 인류가 100세를 바라보는 이유도 전쟁에서 사망한 병사의 시체, 그리고 비인도적으로 자행된 생체실험의 결과물이다. 생체실험이 이루어진 국가로 일본 731부대, 그리고 독일의 나치수용소이다. 독일에 의해 점령된 헝가리, 일본에 의해 정렴된 조선이란 국가는 전쟁에 의해 엄청난 수탈과 억압을 받은 나라다.

 

일본은 되도 않은 황국신민화 논리로 조선인을 제2의 일본인으로 만들어서 전쟁에 보내나, 독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의 총알받이보단 신속히 가스실에 보낸다. 대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챈다.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시작한다.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 밥과 음식을 제공 전, 먼저 샤워를 하라면서 옷을 모두 벗긴 채 어느 방 안으로 보내고, 잠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난무한다. 독가스를 마신 사람들은 질식으로 모두 사망하고, 가스실은 피가 바닥에 스며들고, 차갑게 식어버린 시체들이 즐비하다.

 

나치독일의 만행, 가스실의 제노사이드다. 하지만 이 잔혹한 계획은 나치가 수행했으나, 모든 일처리를 “존더커맨더”라고 불리는 포로였다. 이들은 몇 개월 동안 나치 감시 속에 업무를 맡다가 어느 일정기간이 지나면 처형된다. 죽기 전에 실컷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더러운 일에 동원된다. 그들의 얼굴에 그 어떤 희망의 눈빛을 찾아볼 수 없고, 굳어버린 표정과 타성에 젖은 대답만 할 뿐이다. 그런 세계에 더 심각한 절망과 증오가 불타오른다. 영화 <사울의 아들> 주인공 사울 역시 절망의 세계에 살아가는 한 남자다. 그는 평소대로 나치의 업무를 수행 중에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다.

 

독가스를 마시면 일반적으로 호흡곤란으로 모두 죽는 반면, 어느 포로들은 살아남은 경우가 있다. 어느 한 소년이 가스실에서 생존하여 침대 위에 올려지고, 군의관 1명이 와서 생존여부를 확인 후 소년의 목을 눌러 교살시킨다. 결국 소년은 차가운 주검으로 변하고, 사울의 눈빛은 동요하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행동들을 일으킨다. 그 소년은 영화제목처럼 <사울의 아들>이었고, 사울은 눈앞에서 아들이 죽어가도 아비로서 아무것도 못한 채 가만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아들은 다른 시체처럼 토막으로 취급되어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야 했다.

 

아들을 구할 수 없는 아버지, 그래도 그는 아들의 마지막을 불이 아니라 땅에 매장해주고 싶었다. 매장을 하려면 물론 땅을 파고 거기에 묻어야 하나, 문제는 랍비 즉 성직자가 필요했다. 종교는 구시대에서 유럽의 정치를 좌우하던 권력이었으나, 20세기 유럽에서는 정치보단 그 종교의 문화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담당하던 문화적 역할이 컸다. 아이가 죽으니 랍비의 장례절차가 필요했다. 신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죽은 아이에게 신의 은총이 내려지길 원한 것이다. 인간의 생에서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죽어가나, 죽은 이후의 세계에선 영혼의 구원을 바란 것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랍비를 찾기 위해 사울은 여기저기 수소문을 찾아보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가 되지 않고, 언제나 벽이 막힌 현실은 카메라의 연출에서 잘 볼 수 있다. 영화의 영상미가 참으로 불편한데, 보총 영화는 16:9나, 여기는 4:3이란 점, 더욱 놀라운 점은 보통 영화는 롱샷, 풀샷, 미디엄샷, 클로즈업 등이 골고루 배치하도록 연출하나, <사울의 아들>은 거의 모든 화면이 클로즈업으로 처리하려 한다. 사울의 얼굴을 중심으로 다른 피사체는 아주 흐릿하게 보인다.

 

사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주변 인물과 대화하고, 상황과 장소 정도만 풀샷 정도로 보여준다. 카메라의 시점은 거의 2인칭으로 사울의 행동에 집중적으로 따라가며, 배경과 상황정도만 3인칭 정도로 보여준다. 사울은 언제나 주변의 눈치를 보고, 늘 위기와 감시 속에서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행동한다. 랍비를 찾기 위해 다른 반장의 작업장에 찾아가고, 나치의 만행을 폭로하려는 사람의 일을 도와준다. 나치수용소 내부를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어느 수용자는 사진기로 촬영할 때 망을 봐주거나, 나치가 “존더커맨더” 작업인부 70명 정도 죽이려고 할 때 봉기를 위한 화약을 구하는 일도 맡는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되지만, 사울은 묵묵히 그 일을 수행하고, 랍비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하필 그 날이 수용소 감독관이 전쟁포로 처리인원을 갑자기 늘리던 때였다. 도착한 포로들을 15분에 1번씩 가스실에 넣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며, 가스실의 사체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소각로가 모두 차게 되었다. 그러자 나치는 포로를 야외에 끌고 나와 그 자리에서 바로 옷을 벗기고, 머리에 총을 겨누고 사격한다. 그리고 야외에 만든 임시 소각장에 시체를 불태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하고 충격적인 장면만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래도 사울은 랍비라고 말하는 남자를 찾아내나, 그것도 마지막에 허사로 끝난다. 마지막 장면에 나치는 작업반장을 죽이는 것을 시작하여 “존더커맨더”를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사태의 위험에서 사울은 아들의 시체를 매장하려 하나, 결국 그것도 되지 못한다. 나치에 봉기 도중 도망쳐야 했으며, 마지막에 나치가 보낸 염탐꾼의 첩보로 모두 죽는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영화로 유명한 작품으로 <쉰들러 리스트>가 있다. 이 영화는 암울한 수용소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찾아간 것이라 말한다면, <사울의 아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울의 아들>이란 영화는 매우 불편하고, 친절함이 전혀 없는 작품이다. 시체의 알몸, 해부실의 시체, 즉결총살, 불타는 시체 등등 피비린내와 죽음의 공간이 인간의 운명을 옆에서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로테스크한 세계와 냉소적인 인간, 이런 잔인한 영화가 왜 계속 나와야 하는 것일까? 불편한 시선과 달리 보기에만 좋은 작품들은 현실에서 금방 잊어버리고, 그저 흘러가는 것들로 공중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 같은 작품은 인류가 저지른 악몽과 지옥을 되새기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제시한다.

 

영화에서 본 지옥 같은 수용소, 악몽이 현실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런 삶과 세상을 오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길 것이다. 만일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을 경우 비극은 또 다시 반복된다. 역사의 교훈은 바로 지나간 일들이 다시 미래에 똑같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왜냐하면 그 당시 인간들은 모두 죽었으니) 똑같은 방식과 형식으로 되풀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미래조차 열어갈 수 없으며, 자신의 눈앞에서 미래가 파괴되는 절망을 사울처럼 겪을 것이다. 영화 <사울의 아들>에서 아들은 바로 미래와 희망이다.

 

사울은 바로 그 미래와 희망을 잃을 자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본처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얻었으나) 다른 수용소에 있는 것으로 알았지만, 아우슈비츠에 끌려왔고, 거기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미래와 희망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과거의 오류를 반성하고 되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에 얽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겠지만, 지나간 것을 무시하면 앞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간다. 그리고 그 앞은 절벽이란 사실은 마치 무언의 약속처럼 등장하여 우리를 절망으로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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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3-01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사울과 스포트라이트 둘 중 하나 고민하다 결국 후자 보았는데, 주말에는 사울도 봐야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3-01 21:45   좋아요 2 | URL
오오~!
역시 주말은 이런 영화를 혼자 보는 재미가 있지요...

yureka01 2016-03-01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젤만 ㄷㄷㄷㄷㄷㄷ그러게요 ....ㅠㅠ

만화애니비평 2016-03-02 08:56   좋아요 1 | URL
주말과 휴일은 잘 보냈는지
 
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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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학계를 그렇게 잘 아는 편은 않으나, 확실히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문학소설을 읽으면 기존 한국소설계는 뭔가 모르는 엄숙주의 내지 장편으로 전개되는 유형이 많았다. 물론 소설 중에 단편적인 부분도 많으나, 대부분 단편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꾸려진 경우는 드물지 않은 것 같다. 소재나 이야기의 주제성도 거대한 서사에서 점차 작은 이야기로 넘어가고, 예전에 읽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처럼 한국의 소설도 왠지 모르게 일본의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서브컬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가는 게 아닌가도 싶었다.

 

이번에 읽은 최제훈 소실모음집 <퀴르발 남자의 성>을 읽을 때 생각이 드는 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몽타주의 편집적 요소가 보인다는 점, 또 다른 하나는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요소가 조금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시간과 공간의 일치성보단 시간전개가 뒤죽박죽인 “퀴르발 남자의 성”, 추리 소설 <셜록 홈즈> 작가인 코난 도일을 최제훈 소설문집에서 셜록 홈즈가 발견한 피해자로 등장시키거나, 또는 정신적 해리증세를 가진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 가면 뒤에 숨겨진 인간의 추악함 등을 작품에 반영시킨다.

 

최제훈 소설모음집은 이른바 추의 미학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고, 기존의 도덕적 가치관에 대해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반영한다. 인간의 추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란 바로 오늘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추악함은 원래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아니라면 만들어져 가는 것인가? 여러 가지 모습이 드러나겠지만, 점차 인간이 부패하가는 모습을 작가는 잘 맞춘 것 같다. 물론 이 소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과 평이 있으며, 심지어 뒤에 보면 문학평론가의 심사평이 따른다.

 

나는 문학도가 아니고, 문학평론가는 전혀 관계없으니 굳이 그렇게 정리할 필요 없다. 단지 나대로 생각하여 그것이 타인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객관성을 추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찍어볼 것이란 문제다. 이 소설에 재미있기도 하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 서브컬처의 느낌이 나는 이유는 이미 이 이야기들이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등장할지 모르나, 서브컬처 내에서 그렇게 드물지 않은 이야기다. 영웅의 시대가 서사를 풍미하는 게 아니라 반영웅, 혹은 얼간이라도 주인공이 나오고, 별에 별 기막힌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서브컬처이다.

 

마녀에 대한 이야기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메데이아라는 마녀의 이름이 이미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라는 게임 및 애니메이션에 등장한다. 단지 사람들은 마녀가 처음 가진 의미, 마녀의 시작과 그 변이과정을 잘 모를 뿐이다. 작가 최제훈은 마녀의 이야기에서 고증적인 연구를 많이 했다. 마녀사녕은 문명이 존재하는 인간세계에 얼마나 추악한 일들이 벌여졌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존재이다. 문제는 그것은 되풀이되는 하나의 세계이고, 이제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공동체사회만이 아니라 사이버세계까지 이어진다.

 

그렇지 않을까? “그녀의 매듭”에서 고교동창생이 학원비를 벌기 위해 조건만남을 한 것을 알았던 주인공은 친구의 성공과 자신의 실패에 대한 분노로 뒤에서 공작을 펼친다. 그런 공작은 대학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에 나와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남자사람친구 주변 여자까지 견제에 들어간다. 마녀는 사실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마녀 같은 인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나, 형이상학적인 사이버세계에서 난무하고 있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타적 의식이 개인의 영역이 아닌 집단적 광기로 변화하여 한 개인을 괴물로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보다는 왜 악하게 되어 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의 아이를 죽여 괴물의 성에서 같이 향연을 열던 부모와 삼촌내외의 모습에서 우리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욕망에 이성과 도덕관을 잃어간다. 아니 처음부터 도덕이란 무엇인가? 개인에게 가해진 물리적, 사회적 폭력은 어느 한 개인을 자신도 모르게 괴물로 키워낸다. 그리고 자신을 한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거나,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기도 한다.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2사람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단 다른 사람의 이름을 꺼내어 그 주제에 맞추어 간다.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물론 나와 상대가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상대만 조금 알고 나는 잘 모르는데, 그 사람을 하나의 가십거리를 삼아버리는 것은 현대사회 인간이 본인 자신을 타자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타자에 대한 욕망, 그것이 자신의 욕망으로 대체한 것이다. 사실 다른 책에서 흡혈귀와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글을 보면서 기억나는 게 미국대공황 이후 경제적 문제에서 흡혈귀는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고, 프랑켄슈타인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것을 하나로 모우는 것, 즉 현실에 대한 도전에 대한 의미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보인 흡혈귀 아니 퀴르발 남작에서 그는 보통 사람마저 식인귀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처음부터 미국에서 살던 가족들이 시집보낸 딸집에 간 이유는 경제적인 조건이 어려워서이다. 경제적 상황에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성만 따지기에 효율성에서 개인과 개인의 집합에선 윤리적 가치를 따질 이유는 없다. 그런 모순은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처럼 코난 도일이 추리소설 <셜록 홈즈>의 작가이고, 홈즈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그가 죽었는데, 홈즈는 추리과정에서 혼선을 빚는다.

 

창조자가 코난 도일이고, 코난 도일을 찾아가는 홈즈는 그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다. 오리지널보다 카피 내지 만들어진 존재가 오히려 죽어버린 자신을 찾아가지만, 헛수고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녀의 매듭”처럼 자신의 소꿉친구의 얼굴사진을 도려, 이현정의 사진과 합성시킨 연화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다. 본질은 수동적이고, 본질이 아닌 가상, 허구, 복사, 잉여적 존재가 우리 일상을 움직이고 있다. 아마 소설의 제목을 여러 작품에서 “퀴르발 남자의 성”이라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분명 저 남자의 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에 삼켜지거나 그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 활보하는 세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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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9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1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전에 본 영화중에 <한공주>라는 작품이 있었다. 평소 여자연예인들에게 관심이 없는 나에게 마음에 드는 연예인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한공주>에서 주연을 맡은 천우희 씨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연기를 정말 잘 했기 때문이다. <한공주>란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리뷰를 작성하지 못했는데,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한 마음과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여준 잔혹한 장면들이 사실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에 비해 상당히 완화된 것이라 한다. 과거 밀양에서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당한 여중생은 자살했는데, 그 이후 거기에 가담한 남학생들이나 그 남학생 주변의 인간들은 사회에 나가도 잘 먹고 잘 사는 어이없는 현실이 된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에서 일본 2CH에서 어떤 히키코모리가 고등학교 당시 자신을 엄청 괴롭힌 4명으로 24살 되도록 세상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은둔하고 있다는 사연을 보았다. 동창회에 가기 싫어 억지로 가보니 자신을 괴롭힌 4명은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참고로 밀양 집단성폭행 사건 가담자 1명은 공무원이 되었다는 인터넷(Face Book 화면갈무리) 게시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가해자가 피해자를 나두고 떳떳하게 얼굴을 내미는 세상이 되었을까? 아무튼 세상이 이상하게 미쳐가고 있는 것 같다. 어째서 피해자가 자신의 억울하게 당한 부조리를 말하지도 못하게 하고, 말하는 것조차 이상하게 보는 세상, 과연 이게 정당한 도덕적 가치관인가?

 

이번에 본 영화 <귀향>, 귀향이란 하면 귀향(歸鄕)이란 집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귀향(鬼鄕), 즉 귀신같은 넋이나 혼과 같은 영혼의 고향이다. 고향에서 억지로 끌려나와 먼 곳에서 억울하게 생을 마쳐야했던 소녀들, 그들은 아직 자신의 유골조차 고향 뒷동산에 안치되지 못하고, 설사 살아와도 그때 이후로 시간은 멈추었다. 예전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낮은 목소리>를 본 적이 있었다. 어느 만화애니메이션축제에서 프랑스 앙골렘 만화축제에 상당한 평가를 받았던 “지지 않는 꽃”이란 전시회를 보았다. 만화작가가 그린 하나의 만화서사도 있었지만, 위안부에 끌려갔던 살아남은 소녀들의 그림도 있었다.

 

점점 갈수록 그들의 수는 줄어들고, 그들의 한 맺힌 분노는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깊은 상처에 시들어간다. 이미 “지지 않는 꽃” 전시회에서 <나비의 노래>를 통해 보았다. <귀향>에서도 내림굿을 받은 소녀가 상처투성이 소녀와 나비를 보았다고 한다. 나비, 자유로이 날개를 펼치면 날아가는 생물, 그 나비를 마치 무참하게 밟은 일본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한 일본군 장교가 나비의 표본작업 중 날개 하나를 잔인하게 부순다. 자유를 향해 날고 싶은 소녀들을 마치 포악하게 파괴하듯이 말이다.

 

시놉시스적인 부분에서 정말 표준적이다. 하지만 잘 모르는 분에게 충격의 연속일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보다 더 화가 나는 장면은 과거 위안부에 끌려간 살아나온 영희(손숙 선생님 배역)가 TV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관공서에 가서 신고해달란 기사를 보고 관공서로 향한다. 그때 앉아있던 남자직원에게 차마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용기가 없어서 뒤돌아서는 순간, 직원들은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업무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걸 신고하는 미친년이 어디 있어? 라는 말에 화가 난 영희의 억울함이 더 먹먹해졌다.

 

자신의 나라가 없을 때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나라가 있는데도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억울하다는 점이다. 위에서 <한공주>와 <귀향>을 놓고 내가 이렇게 대조하는 것은 바로 이게 우리 사회의 암적인 모습인 것이다. 왜 피해자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숨어 지내고 계속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른바 화냥년이란 말이 있다. 화냥년이란 원래 환향녀(還鄕女)에서 나 말이다. 병자호란 때 청국에 끌려간 많은 여성들이 다시 고향에 올 때 돌아온 것은 자신을 반겨주는 가족의 미소가 아니라 마치 오랑캐에게 몸을 팔았다고 여기는 더러운 눈빛이다.

 

한국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면서도 내가 느끼는 딜레마 중에 하나가 바로 저런 모순이다. 물론 전쟁이란 엄청난 재난은 인간을 하여금 가학적인 요소로 변질시킨다. 죽음에 맞대 있기에 그 증오와 불안을 여성에게 화풀이하는 방식으로 일시적으로 해소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복과 망각으로 이어지므로 연속적인 가학성으로 이어진다. 나중에 성폭행에서 단순히 폭행을 즐기는 변태적인 모습으로 변질된다. 사디스트적인 성적쾌락은 남성에게 주어지는 폭력성이 하나의 미적인 가치로 변해 오히려 당하는 대상을 억압하는 모티브가 된다.

 

<귀향>은 전쟁에서 위기에 봉착한 일본군, <한공주>에선 인격과 무관하게 돈과 성공만 강조하는 한국사회, 모두 강박관념이 약자에 대한 배려보단 약자를 착취로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 <귀향>을 보면서 연출적인 부분에서 딱 2가지가 충격적이었다. 그로테스크, 즉 보기가 흉하고 끔찍하여 상당한 불쾌감을 주는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하이앵글 각도에서 수많은 위안부소녀들이 그 작은 방에서 일본군에게 강제로 성폭행당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그것도 방 하나가 아니라 방이 수십 개나 되는 벌집처럼 말이다. 전쟁의 광기로 가득한 위안부소녀들의 착취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그리고 그 비극의 말로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자, 살해 후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서 모금해준 분들과 위안부할머니들이 그렸던 그림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위안부소녀 시체를 불태우는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을 모티브가 된 장면은 시체가 기름에 의해 타는 장면으로 연출된다. 물론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 일본군복을 입혀 총알받이가 되게 하거나, 식량이 없다면 인육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총을 쏴 죽이고, 칼로 찔려 죽이고, 동굴에 화염방사기로 태우거나 폭탄을 날리기도 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한지 신이 해본 실험으로 세계 2차 대전이 아닐까 싶다. 인간을 생체실험에 가장 많이 사용하고, 폭격과 독가스, 세균전, 핵폭탄이 이때 최고조로 달했다. 이런 일이 있고도 반성하는 국가는 영원히 그때의 비극을 잊지 않은 반면, 어느 국가는 그때를 오히려 영광의 순간으로 여긴다. 다른 국가는 어느 국가의 만행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그때의 영광이라 말하는 것조차도 제대로 발끈하지 못한다. 오히려 할머니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인간도 있다. 어떤 블로그에 글을 봤는데, 분명히 여성분 같은데, 위안부 할머니에게 위로되지 못할망정 망언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남자라면 그 남자의 아내, 딸, 손녀까지 모두 위안부 같은 곳에 끌려가라고 말이다. 오히려 그 말이 정답이지 않을까도 싶다. 물론 반인륜적인 부조리를 당한 사람에게 폭언을 하는 사람에게 반인륜적인 부조리를 당해보라고 하는 것이 다소 윤리적인 영역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남에게 인륜적 가치를 대하지 않은 이상 자신에게 그런 가치를 받을 자격은 없다고 나 역시 그렇게 본다. 영화 <귀향>에서 무속인이 굿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마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는 천도제인 오구풀이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면 과연 그 소녀들의 영혼은 하늘로 혹은 고향으로 날아갈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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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 탄생의 역사 - 마르크스 40년 경제 이론 작업의 전모를 밝히다 동아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총서 3
비탈리 비고츠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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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준교수님의 이번 도서는 번역도서이군요.

마르크스 원전이 모두 번역하는 그날이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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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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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내 글을 쓰는 형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내 글에 대해 생각하면 문법이나 문장의 매끄러움이 부족한 것을 안다. 과거에 적은 내 글에 비교하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많은 어려움에 부딪힌다. 특히 논문을 심사하면서 벽에 부딪히는 부분이 역시 문법과 어감의 난해성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나, 마음 한편에 숨은 불편한 초조함은 언제나 내 마음을 억눌리기에 충분하다. 이런 식의 화두를 던지 이유는 이번에 읽은 서적이 <밤이 선생이다>라는 황현산 교수의 산문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하여 문학서적과 번역도서를 출간한 이 분, 황현산이란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하는 생각에 그의 프로필을 보니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인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를 번역했던 분이다. 디드로의 책을 읽지 않으나, 그 책의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하면서 번역자의 이름으로 황현산이란 이름을 본 것 같았다. 문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 동기는 황현산 교수의 <밤이 선생이다>가 매우 논리적인 성찰은 논리로서 풀어낸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문체로 살려낸 것이다.

 

내 글을 본다면 그렇게 쓸 자신이 없다. 내 글을 보면 상당히 파고 들어가는 감이 없지 않게 강하다. 이른바 오타쿠라는 무단히 파고들어가는 인생살이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아니라면 다른 삶에 의한 요소인가?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타인과의 소통이 잘 되는 편은 아니다. 남의 말을 들을 때 정보의 인식은 정확히 알아들어도 거기에 대한 기호적인 대답은 다른 식으로 전달된다. 쉽게 말하면 엉뚱한 녀석이다. 인간에 대해 내가 생각하자면 누구나 변태적인 요소가 있고, 도착적인 요소가 있다고 여긴다. 변태라고 하여 성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성격과 말투, 몸짓, 관심, 취향, 정체성까지 파고들어간다고 여긴다.

 

인간은 원래 동물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라면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쇠사슬에 묶인 존재라고 해야 하나? 어째든 인간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인위적 존재가 되고, 자연적 본연의 모습과 현실의 인위적인 관계에서 만들어진 간극 아래 자신의 입장과 의지가 모호하게 비치된다. 즉 인간은 본연적인 삶을 살 수 없고, 삶의 틀에서 타자와의 관계성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자신의 본연적인 세계가 아니라 본연적이지 세계가 형성되어 자신의 말과 언어로 표출된다.

 

황현산 교수 역시 삶을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단지 그 분은 아주 부드러운 섬세한 글로 보여준다면 나는 오히려 투박하고 퍽퍽한 느낌이 강할 것이다. 문체의 부드러움과 표현에 대한 환상적 요소, 삶에 대한 시선이 언제나 비딱하게 보는 나에게 무리인 것 같다. 언제 개인적으로 작문하여 내가 다시 확인해보면 뭔가 작품 내 등장인물이 다소 강박적인 반응하고, 다른 사람을 내 눈의 대신 관찰할 때도 역시 뭔가 경계하는 날카로움이 담겨있다. 즉 내 글은 절대 부드럽고 친절한 글은 아니다.

 

그런다고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본질은 하나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적인 보고 느끼는 것이며, 과거에 있던 것들을 현재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현대인들은 그런 예술적 삶을 제대로 맛 볼 수 없다. 솔직히 그렇지 아니한가? 1970년대 6시 되면 오디오의 파놉티콘이 울려 퍼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억지로 눈을 떠야 했다. 인간은 생물이고, 자기만의 바이오리듬을 가지고 있다. 낮에 물론 자신의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에 접해 있겠지만, 밤의 공간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다.

 

낮에는 착취당하고, 밤에는 위로받는다. 사실 낮에는 타인의 눈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나 밤에는 자신의 눈에 맞추어야 한다. 고요한 밤이 왜 중요한가? 조용한 방에 시야를 빼앗기는 것도 없이 오로지 어둠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낮과 밤은 모두 같을지 모르나, 인간 개인에게 낮과 밤은 서로 다르다. 낮과 밤 속에서 단지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의 대조만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책에 언제나 낮의 밝은 것만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강박관념을 바라본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적인 조건에 의해 움직인다. 자신의 결정한다는 그 자체도 사회적인 조건과 현실의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점은 부정하고 마치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것은 참으로 기만적이다. 우리 삶은 언제나 기만적인 것을 추구해온 것이다. 작가는 빠르게 지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나, 과거에 의해 조성되어 미래로 움직이는 시간적 존재다. 시간적 단절에서 우리는 시간의 축척을 무심코 버린다.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지 몰라, 자신의 장소는 만드는 것보다 어디든지 화려한 곳이 보이면 너도 나도 상관없이 달려든다. 유행의 시대에 걸맞은 화제의 장소는 언제나 인파로 가득하다.

 

자신을 생산하기보단 스스로를 소비하고 소모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그런 세상에 태어나다보니 나 역시 황현산의 글에 많은 놀라움을 느낀다. 작은 섬에 태어나 소금의 맛까지 말하며 바다의 정취와 산의 모습, 그리고 그곳에 살아가는 인간은 도시의 소모품이 아니라 농가의 인간이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가득 찬 회색 빛 천국에서 하늘의 달조차 매연에 가려져 흐릿하다. 현대인들은 감수성은 메마르고 감정은 폭발한다. 드라마를 비롯하여 TV를 거의 안 보는 나에게 TV 드라마만큼 가장 재미있는 콘텐츠이면서도 가장 저질스러운 콘텐츠는 없다고 본다.

 

인간의 이성을 마비하고, 오로지 욕망과 기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세상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파생실재의 공간이나, 우리의 공간은 드라마부터 소외된 실존하는 가상에 위치해야 하는 세상이다. 모두가 꺼리는 세계, 밤이라는 것은 어둠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둠은 빛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우리는 밤이라는 어둠을 너무 외면한 것이다. 산문집처럼 밤이 선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언제나 주변에 화려한 것만 보고 듣기를 강요했기에 우리 안의 세계를 찾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 주변의 인간들을 잊어가고, 그들의 이야기를 외면하려고 했다. 밤이면 낮보다 조금 더 조용하고 한산하다. 낮에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를 나와 주변의 소리를 기울이고, 다음으로 그동안 잊고 있던 이야기에 기울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잘못된 것은 고치는 것은 맞으나, 지나친 것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더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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