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면, 어떤 지역을 제목으로 내세운 작품은 그렇게 좋은 내용으로 마무리 되지 않는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영도는 흔히 부산에서는 영 아일랜드라고 불리지만, 실제 그 의미는 그림자 섬(影島)이다. 예전에 절영도(絶影島)라고 불리는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전쟁터였으며, 한자어가 불리게 된 동기는 여기는 원래 섬이기 때문에 말을 키우기 좋고, 여기서 달리는 말들은 매우 빨리 달리기 때문에 탄생한 단어가 절영도이다. 하지만 영도만 보면 그림자 섬이고, 영어로는 Shadow Island이다. 빛이 가려져 그림자가 남은 어둠, 사실 영화 <영도>는 주인공이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저주받은 운명 아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제목을 잘 관찰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다. 영화 곡성, 사실 곡성군은 전남에 위치한 작은 시골이다. 곡성은 사실 외부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다. 전남에서 유명한 동네면, 해남 배추, 강진의 다산초당, 보성녹차 순천과 여수 정도만 알려질 것이다. 말 그대로 전남 일대는 산과 논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곡성군의 곡성(谷城)이 왜 곡성(哭聲)이 되었는가? 내가 영화 <영도>를 거론한 이유는 영도라는 곳은 교량이 없으면 주변이 바다로 이루어진 지역이고, 부산 안에서도 가장 구석에 위치하여 더 이상 어디를 갈 수 없는 형태다. 물론 교량을 이으면 충분히 교두점이 될지 몰라도 교량 없는 영도는 고립된 곳이다.

 

영화 <곡성>에서 배경지역인 곡성은 한자어처럼 골자기로 이루어진 성이다. 즉 지형을 생각해본다면 산이 주변으로 에워 쌓여 밖으로 나가기도 혹은 들어오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런 지역에서는 이상한 살인사건이나 기묘한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물론 현실은 모르나 영화, 소설, 애니메이션, 만화 등 다양한 장르를 보더라도 주변과 가로막힌 곳에서는 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법칙이 있다. 영화 <곡성>에서 주변 지형을 보면 온통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 영화는 처음부터 어두운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영화의 시놉시스는 간단하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곡성>이란 영화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대중영화의 형태를 따라가지 않았다. 흔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상당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고, 매년 자주 나오는 장르 중에 하나이다. 이른바 B급 정서를 가진 영화다. B급 정서라면 좀비나 흡혈귀 같은 것들이 출몰하고, 잔인한 장면과 동시에 어이없는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한국에서 B정서를 가진 영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오히려 대중영화시장을 보면 대부분 거대자본력을 가진 업체들에 의해 좌우될 뿐이다.

 

예술영화나 인디영화에 B급영화가 잘 등장할리 없다. 영화 곡성의 최대 매력은 B급 정서를 가진 작품이 대중영화 매체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런 배경은 아마 한국의 웹툰 시장이 많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대중매체 콘텐츠는 TV와 영화에서 모든 것을 대중의 입맛에 맞춘 것이다. 스릴러 영화조차 그렇다. 하지만 <곡성>같은 영화가 등장한 배경을 보자면, 그만큼 한국 내 문화콘텐츠가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작품이 등장하려면 그 기반이 되어야 하는 작가나 시나리오 라이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화 <곡성>은 리얼리즘에 대한 상당히 많은 요소를 집어넣었다. 일단 한국 내 곡성군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영화에서 등장하는 많은 건물과 지형들은 실존하고 현재도 충분히 그 기능을 수행한다. 영화는 애니메이션 영상과 다르게 실사영상 중심이 되므로 리얼리티 요소를 반영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리얼리티와 리얼리즘은 다르다는 적이다. 리얼리즘이라고 해도 어떤 식의 리얼리즘에 따라 작품성은 달라진다. <곡성>은 현실적 조건에서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있지만, 또 하나로는 마술적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것 같다. 마술적 리얼리티는 분명 미신이나 불명확하지만, 그 지역과 그 시대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하나의 사실인 점이다.

 

왜 그런 것인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소설인 <백년의 고독>을 읽어보면 도저히 우리 인식능력을 그 작품에서 말하는 조건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남미의 세계, 그 원주민이 살아가는 세계는 그렇다. 가령 아주 오랜 문화를 지키고 있는 원주민들은 자신들에게 조상의 영령이 다가와서 예언과 힘을 준다는 믿는다. 우리는 그것을 두고 미개하거나 미신이라고 말할 수 있어도 그들 스스로에겐 그 믿음이란 사실이다. 영화 곡성이 그런 마술적 사실주의가 반영되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샤머니즘이 영화 소재로 나오기 때문이다. 박수무당이 등장하여 잡귀신을 몰아내는 굿판에서 이미 무당의 역할은 무속신화로 통한 본풀이가 아니라 제령의식이다.

 

귀신의 실존성에서 실제 영화 <곡성>에서는 귀신이 있다는 설정을 두었다(문제는 귀신이 너무 예쁘다는 게 특징이다). 영화를 보면 곡성의 마을이 점점 어느 누군가의 위협으로 사람들이 점차 죽어나가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이상하게 난폭하고 공격적이며, 심지어는 사람을 공격한다. 곽병규(곽도원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마을의 경찰로 등장한다. 어느 집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사람을 죽인 사람은 이상하게 눈을 보고 있으며, 사람이 있으면 여기저기 물기 위해 달려든다. 그리고 그 이상한 병에 걸린 사람은 계속 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난폭하게 굴다가 어느 순간 경직이 멈추면 죽는다.

 

살인사건 현장에서 곽병규는 이상한 여자를 만난다. 옛날 남자군복 상의를 입은 하얀 원피스 아가씨는 이상하게 그에게 돌을 던진다. 돌을 던지는 이유는 뭔가 전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뒤에 나오지만, 그녀는 그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가고 있는 귀신이다. 처녀귀신인 것은 분명하나 특이한 점은 하얀 한옥이 아닌 점이다. 귀신을 대하여 생각하면 무속신화와 같이 시대와 같이 변천한다. 한국의 귀신들을 보면 대부분 조선시대의 의복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귀신이 존재했다면 고려도 삼국시대도 있었을 것이고, 일연의 <삼국유사>를 보더라도 귀신의 이야기가 나온다.

 

천우희 씨가 맡은 역할에서 귀신 역시 사회적인 변천을 통해 인간의 의식공간에서 재탄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귀신의 역할을 무엇인가? 작품에서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레 행동하는 장면이 큰 힌트가 된다. 내가 발견은 2가지다. 맨 처음 내가 의문을 가진 게 곽병규가 살인사건이 일어난 집에 가는데, 말린 나뭇가지 것들이 마루에 걸려 있었다. 그것은 귀신이 동네주민에게 해가 나지 않기 위해 걸어놓은 주술이었다. 처음 곽병규가 괴물에게 습격당할 때 무사하게 집에 갈 수 있었던 이유도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있다. 왜 곽병규는 실제 당한 일을 꿈에서 꾼 악몽처럼 떠오른다. 인간이 지나친 충격이나 공포를 느끼면 자신이 당한 일들이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라고 여기고 싶어 한다. 이때까지 곽병규를 괴롭히던 꿈들은 모두 실제 일어난 일이고, 꿈을 악몽이라며 믿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인간의 습성이다. 다른 1가지는 황정민님이 맡으신 박수무당이다. 내가 중간에 약간 의심 가는 장면이 있었다. 박수무당집으로 찾아 간 곽병규는 그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한국남자가 입는 하의 속옷은 일반적으로 삼각 내지 사각 팬티다. 혹은 전통한복에서 남성은 속고의와 속저고리만 입는다. 결국 한국 전통한복에는 일본의 훈도시 같은 의상을 남자들이 입지 않는다. 박수무당이 입은 훈도시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해야 했다. 인간을 습격하던 붉은 눈의 괴물이 나체에 훈도시만 입었던 것이다. 훈도시를 입은 점에서 박수무당은 이미 마을주민을 살해하는 음모세력하고 공범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작품에서 조금 의아한 장면이 있다. 괴물에게 감염되어 좀비처럼 된 사람의 옷을 보면 모두 귀신이 상의를 입고 있다는 점이다. 병규는 박수무당의 말을 듣고 귀신이 범인이라 여겼을 지도 모르나, 시기적으로 보면 군복상의를 입은 사람은 산에서 조난당한 사람이다. 귀신이 힌트를 준 것인지 모른다. 누가 지금 괴물에게 감염되어 죽어가고 있는지 말이다.

 

<곡성>에서 이런 전개과정에서 하이라이트 장면은 박수무당과 일본인이 펼치는 굿판이다. 굿판에서는 무당은 악령을 제거하기 위해 악령은 박수무당을 막기 위해라도 하나, 사실 그것은 틀린 것이다. 박수무당이 곽병규 집으로 왔을 때 귀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신을 본 박수무당은 코와 입에서 피를 나오고,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계속 피를 토한다. 그날 굿을 한 것은 박수무당과 일본인의 대결인 것처럼 보였지 사실은 원래 살던 귀신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귀신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귀신이 견제할 수 있는 것은 괴물이었지만, 인간 그 자체는 견제할 수 없었다. 마지막 장면은 3번 닭이 울면 위기가 벗어날 것이라 했지만, 결국 병규는 귀신의 터부를 어기고 집으로 돌아갔고, 딸은 이미 괴물의 전염에 완료되어 결국 어머니와 할머니를 살해한다. 작품을 보면 병규의 딸 효진이의 모습에서 그런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유진이가 TV를 보고 있을 때 항상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을 보여준다. 그 장면은 강력한 맹수가 자신보다 힘이 없는 동물을 잡아먹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이다. 맹수처럼 되어버린 효진이는 가족을 살해하고, 마지막에는 괴물의 지배를 받는다.

 

작품의 시나리오를 보고 리뷰하자면 여기까지는 단지 1차적인 글에 불과할 것이다. 영화라면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Context적인 맥락 관계를 볼 필요가 있다. 작품에서는 마을이 죽어가는 것이고, 그 원인이 외부에서 찾아온 일본인이라는 점이다. 마을을 붕괴하는 것은 외부의 인물 일본인이고, 그것에 의해 마을주민들은 죽어가는 것이다. 마을에 단순히 여행이 목적이라 하는 그는 마을을 파괴하는 원흉이다. 그런데 마을을 파괴하는 것은 단지 외부인인가?

 

그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에 대해 주변을 속일 수 있는 속임수가 있었다. 일본인의 방에는 온갖 주술적인 도구와 희생자의 사진이 있었다. 그가 펼치는 것은 한국의 무속의식과 같았으며, 그의 공범자인 박수무당 역시 무속의식을 보여준다. 무속의식은 서로 다르게 진행되나, 서로의 목적지는 같았다. 희생자들을 노리고 계속 음모를 꾸미는 것이다. 마을의 몰락은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외부의 침략을 동조할 수 있는 내부의 내응이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서로 혼란을 겪으며 파멸을 맞이한다.

 

그 파멸은 우리가 이때까지 믿고 있던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 구별하지 못한 점이다. 사실 박수무당이라면 그 마을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처녀귀신의 편이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마지막 병규는 자신의 가족을 모두 죽은 효진이의 모습을 보고도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자신의 가족과 자신마저 죽이던 효진이를 마지막까지 지켜주겠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면 우리가 계속 믿어왔던 그 근본이 틀린 것이라 말한다. 병규는 주변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증세와 공격성을 기억해도 자신의 딸이 그런 행동을 보여도 자신의 딸에게 큰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박수무당에게 찾아간 병규는 묻는다. 왜 나의 딸에게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지 말이다. 박수무당의 말은 참으로 간단명료하다. 낚시를 하는데 낚시꾼이 자신에게 걸린 물고기가 어떤 것인지 신경이 쓰이는지 물어본다. 절대 낚시꾼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자기가 낚은 물고기가 좋은 것이면 그만이다. 자신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닥쳐도 세상을 원망하더라도 불행은 내가 피해가고 싶어 피해가는 게 아니라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점이다. 운이 좋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그 운이 다했다면 어떤 비극의 씨앗이 올라올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 비극이 닥치면 인간은 받아 들이야 하겠지만, 현실의 인간들은 그 비극이 일어나는 순간조차 외면한다는 것이 진정한 비극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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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19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글은 너무 좋은데 괜히 읽었어 ㅋㅋ 저 이 영화 아직 안 봤단 말이에요 ㅋ 아 괜히 읽었어 ㅋㅋㅋㅋㅋ

그래도 정말 뛰어난 리뷰입니다. (엄지 척) 흠 대체 만화애니비평님은 뭐하시는 분인 걸까..덕후인가 오타쿠인가 히키코모리인가...아니면 이중적 생활을 즐기는 변태인가..의문이 가시지 않습니다. 흠 정말 오랜만에 좋은 덕후를 만났다는 이 전율! 아 리뷰 재미지다 ㅋ

저도 지지 않기 위해 덕후력 기르고 있어요. 기대해 주세요!

곡성보다 더 미스테리한 건 만화애니비평님의 정체...

만화애니비평 2016-06-19 22:35   좋아요 0 | URL
이 정도면 그렇게까지 스포 많이 하지 않았어요. 거의 제가 집어낸 이야기는 영화보던사람들이 집어내지 않은 장면입니다. ㅎㅎㅎㅎ

덕후이고 오타쿠이나 히키코모리는 되지 못한 일인입니다. 직장인이다 보니 내일 출근이 두렵군요..ㅎㅎㅎ

그런데 변태는 맞습니다. 군대 갔을 때 내무실 고참과의 대화내용 잊을 수 없네요.
˝너 담배피나?˝
˝안 핍니다˝
˝너 술 좋아하나?˝
˝술 평소에 안 마십니다˝
˝너 여자는 있나?˝
˝여자 없습니다˝
˝당구는 칠 줄 아나?˝
˝칠 줄 모릅니다.˝
˝아니 이 새끼 완전히 변태네, 도대체 무슨 재미로 세상 사는데.˝

그렇습니다....ㅎㅎㅎ



루쉰P 2016-07-1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곡성>을 보고 다시 한번 리뷰를 읽었습니다. 더 확확 읽히네요. 곡성을 다 보고 어렴풋이 무명과 박수무당, 일본인의 관계에 대해서 알았는데, 리뷰를 읽으니 더욱 명료해 지네요.
마치 <곡성>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처럼 다양한 해석을 내리게 해 주는 것 같아요. 이 영화에 대해 많은 해석이 있더라구요. ㅋ
근데 전 만화애니비평님의 마지막 문장이 참으로 맞다고 생각해요.

`현실의 인간들은 그 비극이 일어나는 순간조차 외면한다는 것이 진정한 비극일 것이다.`

이 문장보고 소름이 쫙!!!!!!!!!! 만화애니비평님의 존재야 말로 저에게는 곡성의 무명과 같네요. 후후후 어찌 이런 리뷰를...통찰력이 대단하십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7-17 19:40   좋아요 0 | URL
아 영화보셨습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책은 아직이라 뭐라 할 수 없지만,
영화는 아무 것도 도움이 되는 게 없다! 라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소름이라니..그런데 무명의 천우희씨 이쁩니다..ㅎㅎ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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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화에서 우리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서사라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자면 문학과 영화는 문자서사인지 혹은 영상서사인지의 차이점이지, 안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은 같을 것이다. 단지 영상서사인 영화보다 문자서사인 문학이 조금 더 가치 있는 이유는 영상서사는 수용자의 시선을 향하여 정보만 주고, 그 이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부족하다. 물론 제작하는 이들의 노력에서 보자면 충분히 그 능력을 발휘하나, 수용자의 입장에서 영상이란 스쳐지나가는 잔상으로 지나간다.

 

문자서사인 문학은 이와 다르게 글자를 접하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항상 머릿속에 어떤 상황인지를 끊임없이 떠올려야 한다. 문학은 영화와 다르게 친절하지 않다. 친절함 영상미와 달리 문학은 내가 직접 보면서 어떤 것인지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물론 문학이 소설의 형태로 나오면서 소설 모든 것이 영화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나, 페이지를 넘기는 것에 대한 시간적 투쟁은 독자로 하여금 인내심을 요구한다.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은 나에 대한 또 다른 수련일 수 있고, 하나의 성찰의 길을 안내할 수 있다.

 

이번에 읽은 <스토너>는 아마 이런 문학소설에서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책이다. 그렇게 분량이 길지도 짧지도 않으면서, 책 내용을 봐도 뭔가 격정적이고 파행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물론 스토너가 살던 시절은 20세기 미국이다. 그는 19세기 말에 태어났으나, 그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은 20세기 미국이다. 미국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19세기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에서 북부의 연합팀이 승리한다. 하지만 전쟁이란 단순히 사람만을 전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전쟁이 발발하면 그 열화와 같은 공간에 스며들며, 자신도 모르게 그 안에서 허무한 아지랑이처럼 사라진다. 스토너가 대학에 오면서 그 상황에 처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수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를 향하여 움직였고, 많은 청춘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바람처럼 흩어졌다. 스토너가 대학에 오면서 친구 2명이 있었지만, 하나는 참전한지 반년도 못되어 죽는다. 그리고 고든은 돌아오고, 자신이 있는 학교의 권력자가 된다. 스토너의 인생은 그렇게 열정적이지 못하다.

 

미국을 떠오르면 아메리카 드림을 말하나, 그에겐 그런 것보단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인고의 삶을 지켰다. 스토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까지 계속 힘든 농장 일을 하고, 돼지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몇 리나 떨어진 축사까지 걸어간다.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에게 공부할 기회를 준 것은 인생의 대역전이다. 하지만 스토너는 그런 전환조차 하나의 기회보단 그저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토너의 인생은 처음에 수동적인 자세로 보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스토너는 오히려 수동적인 인간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같은 인생노선을 걷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대학에서 스토너의 모습이다. 대학에 있는 사람들은 시대적 조류에 너무 충실했다. 아니 그것을 따르는 편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빛을 내는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스토너는 그런 인생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고자 했다. 농학을 전공하여 농장 일을 제대로 계획하려다 오히려 영문학으로 발을 옮긴 스토너,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도 가끔 느낀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도 계시나, 부모님만큼이나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분들도 많다. 슬론 교수는 스토너에게 제일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단지 대학에 오고, 우연히 강의를 받던 스토너, 그는 슬론 교수에게 학자의 길을 걸을 것을 권유받고 교수가 되기로 한다. 그런 과정에서 소설은 격정적으로 보여주기보단 스토너에 대한 묘사에서 매우 아름다운 표현을 구사한다. 슬론이 말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문학에서 논리학과 수사가 중요한 게 아니나 어찌 보면 문법이 중요하다고 했다.

 

인간의 이성이 존재해도 그 이성에 자극을 주는 것은 글 안에 담겨있는 생생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왜 20세기 인간들은 아니라면 내가 살아있는 21세기 인간들은 영국 대문호인 셰익스피어의 글에 빠져드는가? 인간 스스로가 느낄 수 없는 감동과 삶의 의미를 문학은 연결해주고 있다. 인간은 생이 다른 동물에 비하여 길지만, 그렇다고 목숨 그 자체가 긴 것은 아니다. 옛날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다. 예술의 세계에 빠지는 것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새로움이란 주변에 보이는 사물들의 변화가 아니다. 새로운 것이란 내가 추구하는 길에 보이는 이때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이다.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문학과 예술이라면, 그 세계가 어떤 식을 가는지에 따라 다른 모습을 전해준다. 생각하면 문학의 매체로 소설 <스토너>에서 스토너는 느린 것에 대한 미학, 자신 안의 세계에서 넓은 우주로 가는 구도자 같다면, 스토너의 아내인 이다스는 순간적인 변화 쾌락적인 감각을 추구한다. 그녀는 잠시라도 가만히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다. 이다스가 결혼 후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다 나중에 그녀의 아버지가 죽자, 얼마간 집에서 나가있었다.

 

돌아온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예전보다 화장을 도발적으로 했으며, 연극 팀을 도와주거나 조각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지겨워지고, 그녀는 자신이 만든 최고의 예술인 딸 그레이스에게 집착한다. 그레이스를 대하는 모습에서 이다스는 집착이 지나치다 못해 정신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스토너가 그레이스의 어린 시절을 돌봐주었으나, 그레이스는 그런 스토너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은 채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절단시켰다. 스토너는 집에서 보면 항상 단절된 존재였고, 그 단절감은 가족의 시간에서 보였고, 심지어 공간적으로 차별되었다. 인간의 공간, 즉 공간은 인간의 사유와 사상이 그대로 반영된다.

 

스토너에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오로지 그가 머문 공간은 자신 안의 세계, 학자의 길이다. 우연히 그가 진정했던 사랑했던 대학원 출신의 시간강사 그녀만은 달랐다. 사랑을 깨닫는 것은 이다스를 처음 본 그날의 느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아주고,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반응해주는 것이다. 마음이 통하는 여성을 만나 서로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누고, 육체적인 교감을 나누는 것은 행복이다. 그러나 스토너에게 그녀의 등장은 너무 늦었고, 스토너의 행동은 모두가 알았다.

 

스토너가 시대적 조류에 쓸려가지 않기에, 언제나 그 모든 세계에서 중심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런 길을 걷기에 항상 스토너는 사방이 막힌 벽에만 갇힌 채 인내의 시간을 요구했다. 다른 교수가 추천한 워커 학생을 심사하던 중에 스토너는 그 학생이 기발하고 창의적인 것은 알지만, 학자로 성장하기에 너무 부족하고 기본적인 학업이 안 된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박사진학과정에서 워커를 인정하지 않으려다 영문학과 학과장에게 미움을 받아 노장 교수는 시간강사들이 관리하는 1학년의 수업을 맡게 되고, 시간표도 오전 아침과 오후 저녁에 배정받았으며, 강의실조차 엉망이었다.

 

스토너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나머지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연구와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에 향했다. 스토너의 모습을 보면 우리들은 모두 이럴 것이다. “왜 그렇게 힘든 길을 선택하지? 왜 그렇게 남의 말을 안 듣지, 적당히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인데 말이지.” 실상 우리 인생은 스토너의 모습을 나나 혹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길을 생각하고 스스로 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은 충실히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반증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생은 자신의 것이야 하나, 인간이 속한 사회는 개인 혼자가 아니라 개인들로 구성된 하나의 집단이다.

 

집단에서 언제나 정치적 갈등과 이권의 분쟁이 일어난다. 스토너는 바로 그 학교 내 정치적 갈등에서 권력을 따르지 않았고, 이권을 추구하지 않았다. 현대사회의 인간이라면 소소한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할 수 있고, 비겁한 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스토너는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았던 자다. 어린 시절 농사를 보면서 손에 박힌 흙의 자국, 대학을 다니면서 친척집 일을 도와주던 스토너는 남들처럼 좋은 옷도 없었고, 언제나 같은 옷으로 학교를 돌아다녀야 했다. 지독한 가난과 무기력하게 지나가는 인생의 길에서 스토너는 불행한 삶을 살았는가?

 

다르게 생각하자면 나는 스토너가 불행한 인간이라 보는 자들이 더 불행할 줄 모른다. 스토너는 결혼생활이 불운했고, 학교교직생활이 불편했다. 심지어 딸은 처음에 아내인 이다스와 다른 길을 갈 줄 알았지만, 이다스의 인생처럼 되어버렸다. 그레이스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으나, 술김에 잠을 자서 임신하고, 그길로 결혼한다. 하지만 그레이스 남편은 죄책감으로 견디지 못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사망했고, 그레이스는 혼자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어떤 삶인가? 위스키가 없으면 버티지 못했다.

 

이다스나 그레이스나 자신의 삶을 자기가 아닌 주변에 의해 조작되면서 모든 것이 불편해졌다. 스토너는 그런 삶과 다르게 담담히 자기만의 길을 걸었다. 집에서 외면 받고, 학교에서 무시당해도 말이다. 그러나 스토너는 마지막 모습을 보면 너무 침착하고 담담했다. 죽음의 심사를 의사로부터 들어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업무를 정리하고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비주류의 인생이 살아갔지만, 후회 없는 삶이라 말할 수 있다. 고통에 대한 인고의 세월은 길어도 그 결실은 고통의 시간처럼 보답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길을 걷는 이유는 자신의 삶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 <스토너>에선 예술적이라고 강요하지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굴곡은 뭐든지 화려하지 않다. 때로는 불행과 악운도 존재한다. 마지막 장신이 모든 것의 승리가 아니다. 그렇지 못한 삶이라도 얼마나 자신 스스로를 잃지 않고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게 구도자의 길일 것이다. 소설내용을 보자면 우리 삶과 너무 익숙하거나 친숙하게 보일 것이다. 일상세계에 머무는 인간은 이야기에서는 비일상의 세계를 원한다. <스토너>는 비일상이 아닌 완벽한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다. 바로 불편한 삶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런 불편한 삶을 관찰한 우리가 느낄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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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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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전공이 환경공학이 나는 환경부문의 여러 분야 중에서 수질 및 폐기물 쪽으로 공부했다. 그래서 자격증 역시 수질과 폐기물 관련 기사 자격증이 있다. 환경을 공부하면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모든 것을 접하게 된다. 인간이 먹고 살아가는 것은 곧 환경에 대한 파괴이고, 그 환경에서 다시 새로운 자원을 얻기 위해 환경을 복원해야 하는 이중적인 행위를 맺게 된다. 인간이 처음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식량을 찾는 것이었다. 대부분 수렵과 사냥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채집은 식물의 생존전략을 이어주는 방편이었다. 분변에 씨앗이 그대로 지면에 닿으면서 거기서 새로운 생명이 유지된다.

 

하지만 동물은 다르다. 동물은 잡히는 순간 도살당하여 뼈와 살이 분리되어 생명을 잃게 된다. 지나친 사냥은 숲을 황폐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사냥대상이 육식동물일 경우 작은 초식동물의 천적이 사라짐으로써, 초식동물이 모든 나무와 풀을 먹어버리는 상황에 이른다. 동물을 먹는다는 게 그래 간단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생태환경시스템은 어느 균형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인간의 역사에서 생태환경의 파괴는 결국 인간의 목숨을 좌우하는 아이러니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역사와 문화를 이어오면서 동물을 사냥하는 게 아니라 우리 속에 가두어 키우게 되었다.

 

최근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통 한국사회에서 주요 안주나 간식거리 중에서 치킨이 주요 음식이 되었다. 내가 어릴 적에 옛날통닭 즉 시장에서 파는 통닭을 사면 양이 엄청 많았으나, 지금은 그렇게 크지 않다. 몇 조각 안 되는 닭고기는 현재 45일 정도 된 어린 닭인 것이다. 과거 시장에서 파는 시골촌닭은 조금 다르다. 닭장 우리 속에 있는 닭은 옛날에 내가 먹어본 닭이 아니다. 그저 자동화된 공장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인스턴트식품이 되었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기 전에 이미 나는 <가축이 행복해야 인간이 행복하다>라는 책을 읽었다.

 

그래서 새삼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고, 생각보다 이전에 읽은 책보다 새로운 느낌은 없었다. 단지 전에 읽은 책은 가축인 소와 돼지 중심이라면 이번에 읽은 서적은 해양생물이 나온 게 마음에 들었다. 가축사육과 관련하여 최근 환경부 관할법령으로 “가축분뇨의 관리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 개정 반포되었다. 가축 중에 당연히 대표되는 동물은 한우, 젖소, 돼지, 닭, 오리, 사슴 등 다양한 가축이 있다. 가축이 내뿜는 분뇨의 양은 인간에 비해 많고, 대규모 사육은 밀집된 공간에 점오염원을 발생시킨다. 한국에서 주요 광역도시와 경기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가축이 사육된다.

 

가축사육은 주로 농촌의 농가에서 이루어지고, 농가 주변부에 하천이나 저수지 같은 수원지가 분포하는 경우가 많다. 비오는 날 강우유출수에 의해 지표면에 부착된 오염물질이 그대로 빗물에 휘말려 하천으로 유입된다. 가축분뇨의 어려움은 대부분 축사 영세한 농가인 점이다. 그러나 가축을 잡는 도살장은 다르다. 옛날에 시골 축제에서 돼지 1마리를 그대로 잡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지정된 도살장에서 가축들을 잡는다. 가축도살 과정을 들어보면 우선 소 같은 경우 전기 총으로 충격을 주어 기절시키거나, 그것이 되지 않으면 머리에 총을 사격하여 뇌를 관통시키는 경우가 있다.

 

실제 도살된 소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전기충격으로 인해 두 눈에 붉은 실핏줄이 보이고, 입은 크게 벌려져 있으며, 눈알은 조금 돌출되었다. 그 다음에 소의 목을 베었으니 그 모습이 참으로 엽기적이었다. 겉으로 본다면 징그럽고 무섭지만, 우리는 그런 과정을 거친 고기를 식당에서 매우 맛있게 먹는다. 그 절차가 잔인하고 끔찍하다 말하면서 식당에서 맛있게 입맛을 다지는 모습에서 상황적 간격이 있다. 문제는 바로 그 고기에 대해서다. 최근 시골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면 소 사육시설이 있다. 수많은 소들이 볏짚과 영양 사료를 먹고 성장하고, 작은아버지는 그것을 판매하여 생계를 꾸려간다.

 

그러나 내가 아주 어릴 때 적어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2분이 계실 적에 소는 우사에 1마리가 있었다. 그런데 소가 따로 외양간 건물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조부모님이 살던 집 지붕과 이어진 우사에 있었다. 작은할아버지 댁에 가도 그렇다. 작은방에 작은 문을 열면 우사에 소가 있었다.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우리집안은 농사일을 약 200년 전부터 시작한 것 같다. 증조부께서는 급사로 돌아가시기 그 전날까지 소에 쟁기를 끌고 다니면 논일을 했다. 소가 예전에는 한국농촌의 거대한 뿌리였지만, 이제는 소로 농사를 하지 않는다. 들판에 나가 여물을 먹거나 여기저기 움직이지 않는다.

 

돼지도 인간이 주는 잡식이 아니라 사료만 먹는다. 닭도 마당에 풀어 키우는 게 아니라 닭장 아래 갇혀 있다. 인간도 어디 나가지 않고 좁은 독방에 갇혀 사육되면 아마 몸이 먼저 무너지는 게 아니라 정신이 붕괴되어 자살할 것이다. 동물은 시간적 감각이 인간보다 덜하다. 인간은 시간을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단지 몇 시인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뿐이다. 전등기 빛으로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어 닭에서 알을 계속 뽑아내고, 돼지에게 수없이 사료만 준 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나마 위생적인 축사는 괜찮다. 축사 내 분뇨가 가득하여 냄새가 진동하고, 병이 나도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가축도 있다. 이런 가축의 육질은 떨어질 뿐만 아니라 게다가 몸에 질병을 앓고 있어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병균이 이미 심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물론 미국보다는 아니다. 적어도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은 미국 내 대형 공장식 가축사육시설을 두고 저술한 책이니 말이다. 하지만 국내도 미국식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그런 과정은 금융시장만이 아니라 공장도 마찬가지다. 사육시설은 공장처럼 기계화 되어 있다.

 

가축사육시설은 언제나 악취와 비위생적인 공간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운 좋은 기회가 있어서 여러 가축사육시설을 본 기회가 있었다. 물론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만큼 비참한 상태는 아니나, 영세한 축사 중에는 매우 심각한 상태도 있었다. 우리가 먹어야 하는 식량이 바로 이렇게 관리되는 셈이다. 이 글을 적는 와중에 내가 왜 닭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가? 예전에 우리가 이렇게 닭을 많이 소비하지 않았다. 닭고기 소비량이 최근에 들어 부쩍 상승했고, 일반 주택지역과 아파트 대단지 인근을 보면 치킨집이 즐비하다.

 

이 많은 가게들이 수많은 가정집에 닭고기를 요리해준다. 심지어 시내 술집과 식당을 가더라도 닭고기는 메인 메뉴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닭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45일 아니라면 최장 60일까지 성장한다면 닭은 대량생산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닭의 부리가 잘려나가고, 발톱도 잘려나가며, 수평아리는 그대로 처분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가축들의 희생 아래 그 위에서 서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보인 작가의 관점을 좋게 보지 않는다. 동물의 죽음에서 분명 잔혹한 것은 있다. 하지만 작가는 알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물가의 차이다. 자동차의 가격이 예전에 비해 수 천 %가 올랐지만, 그 기간에 고기의 가격은 몇 백%만 상승한 점이다.

 

왜 자동차와 식량인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것을 몰라도 쌀 가격은 올리지 않는다. 물론 고기가격은 많이 오른 편이라도 해도 식량에 대한 가격은 올리지 않는다. 작가인 조너선 샤프란 포어는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가축도살 현실에 대해 잘 지적한다. 그 기업이 펼치는 로비나 혹은 미디어의 작용도 거론한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기를 먹지 않아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니라면 고전의 경영방식을 답습하여 운영하는 농장주를 계속 키우는 것일까?

 

식물을 위주로 하면 식당의 판매가격이 낮아지는 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시장에 공급하는 대규모 경영업체가 보여주는 행동이다. 권력기관과 언론기관을 동시에 협력하여 눈속임하는 것, 그리고 공장 내 노동자의 인권문제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 시점에서 단지 고발만 하는 식은 좋지 못하다. 과정의 관계에서 대안의 설정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모든 음식이 그렇게 전달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시장구조는 제대로 맥을 잡아내지 못했다.

 

수 억명에 이르는 인구가 살고 있는 나라에 식량을 저렴하게 공급하려면 그 만큼의 자본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규모농장이 용인되지 않은 경제적 상황, 영세농가의 현실, 자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산업구조 변화에 대한 대안성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의 빈부격차는 어마한 것이고, 그 빈부격차에서 빈곤계층이 주어지는 식량은 고칼로리의 햄버그와 콜라다. 그들에게 신선한 건강식이란 벽에 걸린 그림이고, 더러운 공장에서 도축과정에서 잔인하게 죽는 동물의 피 때문에 살아간다.

 

작가는 미국 유명한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몇 년 동안 상을 받은 사람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 중산층에 있는 사람이고, 상당한 엘리트다. 엘리트이기에 그런 책을 서술할 수 있지만, 엘리트의 한계성이 드러나는 책이다. 그런 음식을 먹고 싶고 말고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으나, 선택권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도 있다. 미국 도심지 내 텃밭을 가꾸어 채소를 가꾸기란 무리고, 농촌에 자기의 텃밭을 꾸며서 자신의 생계를 꾸릴 수도 없다. 문제의 현실을 잘 지적해도 그런다고 대안성은 없다.

 

세계의 절반은 왜 굶는가? 미국 내 식량은 빈민을 모두 살릴 수 있지만, 모두 가축사료로 사용된다. 남는 것이 있어도 그렇게 하는 것은 절망적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하나의 숫자로 보는 자본주의시장경제의 비참함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선택지가 파괴된 인간에게 이 책의 논리는 그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공장식 사육시설 비위생적이고 비인도적인 도축시설이 사라져간다고 작가는 말하나, 그의 말은 너무 오점이 많다. 물론 가능하다. 지금 살아있는 빈곤계층이 사회적으로 재생산을 할 수 없으면 말이다.

 

경제적 능력이 따르지 못해 2세를 낳지 못하거나, 또는 출산율이 저하되어 부부 당 출산인원이 2.0 이상이 아니라 1.0에 머물면 인구는 확연하게 감소된다. 우리나라가 지금 그런 경제적 상황에 머물려 있다. 게다가 식량의 문제, 생계에서 주거비용과 의복도 중요하나 식단의 구성에서 작은 임금으로 식사를 해결하려면 저렴한 식품공급이 필요하다. 이런 현실에서 이 책은 상당히 낭만적인 발상만 넘치는 것 같다. 좋은 내용을 보여줘도 좋은 대안은 없다. 동물이 불쌍하게 죽어 우리의 입으로 오는 것은 안다.

 

특히나 대기업들은 자신들이 만든 환경오염문제를 자신들의 비용이 아닌 공공성의 영역을 침해한다. 이래저래 막지도 못하고, 현실을 비판하면서 뭔가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란 얼마나 답답한가? 문제의 근원은 어디부터 있지만, 그것을 건들기도 하지만, 그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옛날에 가난의 상징은 영양실조이나, 지금은 비만의 상징은 과도한 비만이다. 경제적 빈부격차는 음식에서 바로 차이난다. 영양제와 항생제가 듬뿍 들어간 고기를 먹는 게 나쁜 것은 잘 알아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은 훨씬 나쁘다. “내가 이래 잘 알고 있는데, 너는 왜 그것을 몰라? 아니면 모르지만, 이것을 알면 정말 놀라울 거야.” 라는 식은 결국 자기 만족의식이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에 대한 배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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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6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7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6-06-07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시간이 날 때 페이퍼를 쓰려 하는 주제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육식은 반-생태순환적이지만, 인류 역사 초기의 반-생태순환은 농업이었고, 친-생태순환은 사냥에 의한 육식이었죠. 사냥감이 줄어들면 인간은 굶어 죽음으로써 균형을 이루었는데, 인간이 굶어 (또는 이에 의해 2차적으로 다른 이유로) 죽는다는 것을 막은 것과 생태 순환과 어느 것이 더 도덕적인지 고민 중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6-07 16:06   좋아요 0 | URL
저도 진보성향이나, 가끔 진보라고 생각하는 분들의 가장 짜증나는 요소는
바로 대안이 없다는 점입니다. 현실에 대해 까기만 바쁘고, 근본원인과 대안책도 없고,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면 계속 뱅뱅이니...참 고민입니다.
이번 고기도 마찬가지죠. 자신들조차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모순과 혜택을 누리면서
거기에 대한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 참..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비한국학연구총서 14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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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을 중심으로 보는 조선이란 왜란과 호란에 따른 전쟁의 역사다. 조선 군주 중에서 전쟁의 핵심 가운데 있었던 자로써 광해군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에 읽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에서 다소 여러 가지 생각이 변화되기도 했다. 우선 선조가 참으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군주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정치적인 외교 전략이 있었다는 점이다. 광해군이 가진 독특한 외교능력은 선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고 광해군은 그것을 조금 더 발전시켜 상당히 교묘한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이란 서적을 보았다. 그가 폭군인지 혹은 명군인지 명확하게 답을 내리기는 그러하나, 적어도 그를 한 가지로 본다는 것은 엄청난 무리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번에 한명기 교수는 나름 광해군을 평가했다. 외치적인 부분에서 완벽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전략은 현실적 상황을 제대로 간파한 점이고, 내치적으로 명에 대한 군사원조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원인이 조선의 궁핍한 사정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왜란으로 소실된 궁을 복원해야할 이유는 없고, 궁궐 내 수많은 은을 몰래 매장할 필요도 없다.

 

결국 그는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를 세우기 위해 혹은 자신의 왕권을 위해 매우 논리정연하고 날카로운 임금이 되었다. 그런다고 하여 광해군만 욕만 할 수 없다. 광해군의 의외의 모습은 그가 대북의 권력자들을 손을 잡고 있었지만, 대북의 영수 이이첨과 마지막에 갈등이 있었던 점, 남인과 서인 등 다른 파벌과 같이 정국을 운영하려 했던 점이다. 조선시대 남인과 서인의 갈등은 역시 정여립 옥사부터 시작된다. 정여립 옥사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때 남인의 영수로 있었던 이발은 정여립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발의 80세 노모와 10세의 어린 아이까지 모진 고문으로 옥사했다(그래서 아버지가 왜 송강 정철을 나쁘다고 말하는지 이해간다).

 

권력에 대한 욕망에서 선조는 정철을 속아 넘어가주었는지 아니면 선조가 그런 찬스를 노린 것인지를 생각하면, 기축옥사는 매우 무서운 일이다. 선조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당파전쟁의 피 냄새가 진동했고, 조광조를 비롯한 선비를 죽임과 낙향을 만든 기묘사화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런 부분은 임진왜란을 시작하여 정묘호란의 열쇠로 이어진다. 역사란 항상 한 가지로 볼 수 없고, 다변적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역사적인 연구도서를 보면 이른바 변증법적인 관계성이 보인다. 어느 누군가 반응을 보이면 다른 누군가의 반응에 이르고, 그것이 하나의 갈등으로 누적되면, 피할 수 없는 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학봉 김성일이 남인으로 일본에 갈 때, 그와 같이 간 인물 간의 갈등이 조정의 보고에서 희비가 엇갈리며, 율곡 이이의 있지도 않은 10만 양병설이 김장생에 의해 만들어진다. 서애 유성룡은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막상 임진왜란 시 명나라 장군이 와서 양명학을 조정에 이야기하자 선조는 주자 성리학에만 치우쳐 이야기한다. 갈등과 아이러니는 결국 또 다른 갈등과 폭발로 이어지고, 결국에 참극을 일으키는 열쇠가 된다. 이런 내정의 문제는 외교적인 문제로 확장되고, 전쟁 중에는 서로 손발이 맞지 않을 수가 있다. 동인(남인과 북인)과 서인 계열 장수가 서로 갈리고, 동인(남인) 계열의 지지를 받던 이순신은 서인의 지지를 받던 원균에 비해 혹독한 대우를 받는다.

 

사실 임진왜란 의병장 중에 곽재우 같은 경우 북인 계열이고, 충무공 이순신은 남인이었으나 사실 공훈과 비교하여 높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유성룡이 조정에서 내려올 때 이순신의 서거라는 점에서 임진왜란은 왜국과의 전쟁이기도 하나, 사실 내부적으로 정치권력의 다툼도 보였다. 그것의 시발점이 기축옥사이고, 광해군 시대에도 은근 잠재하였으며, 효종의 죽음에 이르러 크게 폭발한다. 이런 상황에서 외교적 관계, 특히 중국과의 관계성은 매우 재미있다. 이미 한명기 교수의 책에서 명나라가 원군을 보낼 때 우리나라의 실정에 무척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눈에 확 온다.

 

한국은 당시 베나 포 같은 옷을 만드는 원자재로 화폐가치를 했다면, 중국은 은을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다. 은은 중국만 아니라 일본, 포르투갈, 세계 다른 국가하고 무역하기가 편했으며, 은 자체가 녹이 슬지 않는 특성에서 은화로 결재하기가 편했다. 중국의 병사월급은 은으로 주고, 군량의 구매와 죽은 병사의 장례조차 은으로 처리한다. 자본주의시대 이전이긴 해도 자본주의 경제구조 이전의 중상주의적 가치는 이미 실현된 셈이다. 은의 이용은 조선에서 용이하지 않고, 은을 받기를 원하는 중국사신에게는 조선은 어떻게든 흔들어야 했던 존재다.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을 왕위를 올리는데, 많은 은을 뇌물로 받쳐야 했고, 인조반정 후에도 인조의 책봉을 위해 또 다시 은을 바쳐야 했다.

 

은을 두고 뇌물로 활용하는 점에서 지나친 은의 징발은 국가의 존속을 어렵게 했고, 명나라 사신은 은을 찾기 위해 민가를 약탈까지 했다. 일본군이 지나면 큰 빗이 지나가도, 명군이 지나가면 참빗이 지나간다는 말처럼 은의 약탈은 조선으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들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관계성에서 조선에 놓인 상황은 참으로 기묘했다. 물론 광해군은 양쪽으로 외교를 보내는 것으로 유혈사태를 막으려 했지만, 막상 그것이 불만인 세력이 광해군을 뒤집자 자신들조차 그것에 얽매이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명이 임진왜란을 구해준 재조지은, 8년의 전쟁을 8년 후부터 명나라가 망하는 그날까지 도리를 조선에게 말했다. 모문룡이 와서 행패부리고, 하다못해 명나라에서 도망친 유민까지 설쳐대며, 심지어 그들의 위세를 믿고 약탈을 일삼은 조선인들이 있다고 하니 정말 한숨만이 나온다. 역사의 기로에서 400년이 지난 일들이 현실에 무슨 일이라고 하나, 모문룡의 행동과 거기에 대한 모택동의 발언이 의구심이 든다. 모택동이 모(毛)를 가진 이유로 한국전쟁 시 중공군을 내보낸 이유가 임진왜란까지 이어지니 말이다.

 

모름지기 실리적인 이익도 중요하나, 실리에 대한 명분은 훨씬 중요하다. 실리만 추구할 경우 국가가 망하는 경우도 많고, 명분만 추구하도 망하는 경우도 많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정말 그렇다.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천민을 양인으로 만들고, 우수한 무예가를 장수로 기용하는데, 많은 세력들이 반대했다. 중국은 재상만 가정을 거느리는데, 왜 조선은 너나 나나 모두 종을 부리는 것에 비판했다. 하인으로 메여 있으면 군적에 올릴 수 없고, 필요한 군사력을 보충이 불가능하다. 사대부들은 무관에 응해도 병역군무를 기피했다. 오늘날 고위 관료들이 하는 행동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반정 이전과 반정이후에 대한 모습을 보면 그 구조가 특이하게 변화하지 않는다. 조광조의 죽음이 중종반정 공신들(진짜가 아닌 자까지)의 비리와 부패를 지적한 점, 서애 유성룡 역시 양반의 특권을 축소하려 했던 점도 눈에 보인다. 연산군 시절 폭군 옆에서 권력을 누리는 자는 없어져도, 그가 누린 권력을 고스란히 타인에게 이양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백성의 삶이 나아진 것도 아니고, 광해군이 물러나도 나아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때보다 못할 경우도 있었다. 외교적 관계성에서 전쟁으로 인한 여파와 그에 대한 대책과 정책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건들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기득권을 지닌 자와 거기에 동조하는 자들의 문제다. 겉으로 명에 대한 재조지은 말하던 이들이 막상 인조정권에선 아무 말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명나라 멸망 후 청나라가 들어서자 겉으로 청나라를 몰아내자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오히려 그런 분노의 감정을 이용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적개심을 심어두어 자신들의 이권에 방해되지 않으려 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바보 같은 한 사람의 말만 듣는다는 비판은 아마 이런 기류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성리학의 주자가 내세운 말 한 자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국제정세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시기를 계속 놓치게 만든 셈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계속 그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필요가 있고, 거기에 강홍립 도원수가 있었다. 강홍립의 항복은 대부분 광해군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 해도, 막상 그가 출천 당시 만 명이 넘은 병사 중에 9천 명이 사망한 점에서 그게 과연 약속된 항복이란 점은 잘못되었다는 점을 이 책에서 잘 집어주었다. 자기 혼자 살고자 해서 수하를 몰살시키는 것은 몰상식하고, 그런 몰상식한 자가 책임감을 느꼈다면 계속 광해군에게 서신을 보낼 이유도 없다. 강홍립 장군 진영에 양반 출신 무관들은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양반으로서 자신의 수하무관을 죽는 것을 원하는 것도 사리에 맞지 못한다.

 

역사의 기록은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 전해온다. 이기지 못한 자들이 기록을 남길 수 없거나 혹은 이길 수 없었기에 변방에서 원한에 사무친 기록을 남긴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에서 다시 재조명되어 그 당시의 사료와 주변 국가의 사료까지 찾아 다시 재조립한다. 임진왜란이 대부분 많은 한국인들은 이순신의 활약만 있다고 보겠지만, 그 뒤로는 중국과의 외교문제가 엄청나게 많이 작용한 것을 잘 몰랐을 것이다. 중국이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은 맞으나, 실제 그것이 제대로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조금 어렵다.

 

선조는 의병장의 활약과 이순신의 승전을 좋은 표정을 받아들이면서 악의적인 감정을 품었다. 주상은 도망쳤으나 남은 재야신료와 자신에 의해 반죽음에 놓인 명장의 위세에 많은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명군에 의지하던 선조는 결국 재조지은을 강조함으로써 변방에서 목숨을 버린 의사자를 버린 채 자신의 안위를 챙기고, 위엄을 보이려 한 셈이다. 임진왜란 공신에서 사실 그보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초개처럼 잃었다. 그들의 죽음이 인정되지 못하고, 단지 정치적 이익에서 중국의 명군에 의지하려던 그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 현실은 무엇인가? 광해군은 자신의 궁궐을 짓는데 예산이 부족한 것을 걱정했으나, 그가 명분으로 내세운 전쟁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하다.

 

전쟁이 나면 많은 인명이 손상당하고, 거기에 부족한 인원을 보충해야 하는데, 전쟁 후로 부족한 인구를 어떻게 메울지, 그리고 사람들의 식량을 어떻게 정리할지를 생각하면 골치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 최근 한국에서도 군사 병력의 부족사태로 방위산업체 요원이나 혹은 해외 이중국적을 가진 남성을 현역으로 복무하고자 한다. 그런데 계속 인구가 감소하는 현실에서 국민들은 공익을 고려하여 삶을 살아야 하나 오히려 개인의 이기심을 추구하며, 정치인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다.

 

부조리에 대한 정리에서 분명 모순을 들추어 내고, 거기에 대한 대책을 내세우나, 현실에서 반응을 엄청난 반발이 쏟아진다.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 하지만 일반의지를 대신한 사사로운 이기심은 하나의 공공성을 이루어 전체의지로 대변된다. 역사의 교훈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한다. 주변에 강대국과 38선을 경계로 군사가 대적하고 있는 상황에 외교 전략은 한국의 연속적 유지를 위한 방편이다. 극단적인 자세를 취하면 안 되나, 한편으로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그것은 한명기 교수의 서적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21세기가 도래하여 우리는 과연 선진국인가? 경제적 규모로 그 거품의 화려함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거품이 터지면 병속에 음료수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혹은 상해서 버려야 하는지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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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2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2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기획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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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2권을 읽으면서 전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에 대한 이야기만 등장한다. 영웅의 존재란 바로 전쟁터에서 무수한 적을 맞이하여 무찌르는 자가 바로 그런 것인가? 전에 영웅이란 무엇인가 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낼 수 있는 평범하지 않은 자들, 만약 신이 그렇게 과업을 완수했다면 그것은 신이(神異)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의 육체로 태어난 이들에게 영웅(英雄)이란 말이 칭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 아니기에 신과 같은 활약을 원하는 게 인간의 심리다. 영웅이란 바로 많은 대중들이 뭔가를 원하고 있을 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전쟁에서 크고 작은 전투로 많은 인간이 죽고, 다친다. 전쟁의 승패는 남자들에겐 죽음을 여자와 아이들에게 평생의 노예가 기다리고 있다. 전쟁에서 피할 수 없는 승부를 펼치는 것은 곧 죽음이란 세계에 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노예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노예의 말로는 조금 비참하다. 노예는 인간이란 생물학적 존재로 살아갈망정,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노예는 재산으로 분류된다. 만약 노예가 주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면 매질을 당하고, 범죄를 저지르면 주인에 의해 처형을 당한다. 그리스시대 즉 할로스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오로지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었다. 죽음과 노예, 삶과 번영,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이 급박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영웅은 비로소 그 시대에 부응하여 나타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부와 명예인지 아니면 그들의 도시국가의 공익인지는 각자의 가치관마다 다르나,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한 차례의 통과의식을 거쳐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인물은 2가지로 대립된다. 하나는 원래부터 영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있는 인물과 그렇지 못한 인물로 말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업적은 제각각이라도 그들이 어떤 신분에 있든지 충분히 영웅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과 그들의 업적은 영원히 칭송받을 점을 나열한다. 단지 모든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에 그런 한계성으로 때로는 영웅들에게 허점이 보이기도 한다. 완벽한 존재는 오로지 신이나 혹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자만이 가능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이나, 그의 인간됨됨이는 남을 시기하는 이유로 로마시민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추후에 추방당했다. 자신이 그렇게 바다 속에 수장시킨 페르시아에 가서 오히려 페르시아왕의 친구가 된다. 그는 단지 남보다 위로 가기를 바란 인물이지 그런다고 목숨 그 자체를 우위에 두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지막에 할라스의 영웅이면서 자신의 라이벌이던 아리스테이데스와 결전을 벌일 때 그는 자살을 하여 마지막을 승화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마지막 최후의 순간은 언제나 비참할 경우가 많다. 물론 그것은 모든 이들의 영웅도 마찬가지다.

 

영웅은 모두에게 칭송받는 존재이기도 하나, 모두에게 경계와 시기를 받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 희비가 갈리는 존재이므로 영웅의 마지막은 모두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게다가 영웅들은 대부분 전장을 누빈다. 전투가 잦은 사회에서는 정치와 군대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정치지도자가 전장을 누비는 경우가 많다. 전쟁의 영웅은 곧 정치적인 입지를 갖추게 되어 평화가 오는 시기에 정치력이 높은 인물은 합당한 찬사를 받으나, 그렇지 못하거나 정치에 관심 없는 자는 타인의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질투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일까? 역사의 기록에서 영웅을 통해 보는 활약보단 주변 정치적 상황이 참으로 급박하다. 2권에서 인상 남은 인물은 다 그러하나 카토가 조금 인상이 깊게 베인다. 그는 부지런하여 노예와 같이 같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게다가 일도 같이 한다. 겉으로 보자면 그는 부지런하고 삶의 열정이 가득하다. 하지만 더 이상 노동력이 없는 노예는 자신의 옆에 두지 않고 팔아버린다. 플루타르코스는 이것을 보고 인간은 이성적 논리도 중요하나,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을 중시했다.

 

인간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변의 조건과 상황에 의해 운이 결정되고, 승부가 갈리기도 한다. 하다못해 말 못하는 동물조차 인간의 사랑을 받으면 그 은혜를 알고 충성을 다한다. 전장을 향하여 떠나는 주인을 그리워하는 어느 개가 주인의 배를 따라 가다 결국 지쳐 어느 섬에 도달하여 탈진하여 죽는 모습이란 참으로 슬프다. 필요 없다고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은 결국 그 자신도 필요의 조건이 사라지면 고장이 난 TV처럼 버리게 된다.

 

다른 기억나는 장면은 아마 카밀루스일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전쟁은 횟수가 줄었다. 고대의 전쟁은 군인에 의한 전쟁이다. 하지만 민간인이나 여성들은 포로로 되고 노예의 길을 걷게 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력을 채울 수 있는 건장한 남자다. 남자아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결혼의 제도로 통해 아이를 가지고 육성시킨다. 그러나 전쟁이 나면 대부분 남자들은 무기를 들고 나가며, 때에 따라서 부상입거나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고대 할라스 시대에 인구가 지금보다 많을 리가 없겠지만, 전쟁에 나가면 기본적으로 몇 만 명이나 출전한다. 운이 좋으면 모르나 아수라장 같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남자가 죽으면 집에 있는 아내는 과부가 된다. 과부는 참으로 안타까운 것 같다. 물론 홀아비도 마찬가지나, 전쟁은 자연의 섭리보단 문화적 과정에 의해 성립되는 경우가 많다. 인구증가, 식량부족, 주거환경 등과 같은 물질적 조건, 오로지 전쟁에서 명예를 얻으려는 상급자들의 목적, 이 모든 것이 혼합되면 전쟁으로 이어진다. 전쟁에서 죽은 자보다 더 비참한 자들은 전쟁에서 생환을 기다리는 죽은 자의 가족이다. 전장에 젊은 남자들이 출전하니 그의 반려자들은 젊은 여자이고, 이들은 꽃다운 나이에 가족을 잃은 슬픔과 사랑을 찾을 수 없는 상실이다.

 

그런데 아마 아리스테이데스가 나이가 많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를 처음에 설득으로 뒤로 가서 벌금으로 압박하여 과부와 결혼을 해주는 것은 참으로 바른 일이다. 누군가의 영광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지고, 그 영광의 크기는 병사들의 장례식 횟수와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사가 없거나, 병사를 제대로 통솔할 장군이 없으면 적은 항상 넘어와서 약탈과 살인을 저지른다. 영웅의 기지는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게다가 진정한 영웅은 모든 실리와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는 게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한 전사와 신의 축복으로 바친다. 언제나 신전에 가서 신에게 제물을 바쳐 경건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한다. 물론 신의 제물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 들어가 만족스러운 식사가 된다. 영웅들은 은퇴하거나 전장에 물러나면 이미 자신이 그 도시국가의 공인이란 사실을 자각하는 경우가 많다. 모두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쉴 곳을 마련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 영웅으로 칭송받는 것은 무기를 든 적이 있을 때가 아니라, 배고픔과 가난을 들고 있는 적에게도 대항한다.

 

아마 여기서 카토의 마지막 삶에서 지혜가 부족한 이유가 밑에 사람에게 인식했던 점이고, 아내가 죽어 재혼을 하더라도 아들보다 어린 여자를 들인 이유다. 그가 비록 할라스에 건강한 남자아이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도 좋으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는 소녀가 아니라도 충분히 가능하니 말이다. 권력자가 되기까지 여정은 위대해도 되고 나서부터는 교만해지기 쉬운 게 인간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선 그런 영웅들의 차이점이 너무 잘 드러난다. 물론 말년의 판단착오가 그 업적을 지우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의 인상에 깊은 기억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인이 가져야할 의무와 도덕은 죽기 전까지 계속 가는 것이다. 한국에서 공인의 위치에 있는 분들이 계속 실망을 주는 기사를 보고 있다. 그들에게 역사의 교훈이란 없는 것일까?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인 것이다. 영웅을 시기하고 시민을 우습게보고, 권력과 이권만 챙기려하다 마지막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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