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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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전공이 환경공학이 나는 환경부문의 여러 분야 중에서 수질 및 폐기물 쪽으로 공부했다. 그래서 자격증 역시 수질과 폐기물 관련 기사 자격증이 있다. 환경을 공부하면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모든 것을 접하게 된다. 인간이 먹고 살아가는 것은 곧 환경에 대한 파괴이고, 그 환경에서 다시 새로운 자원을 얻기 위해 환경을 복원해야 하는 이중적인 행위를 맺게 된다. 인간이 처음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식량을 찾는 것이었다. 대부분 수렵과 사냥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채집은 식물의 생존전략을 이어주는 방편이었다. 분변에 씨앗이 그대로 지면에 닿으면서 거기서 새로운 생명이 유지된다.

 

하지만 동물은 다르다. 동물은 잡히는 순간 도살당하여 뼈와 살이 분리되어 생명을 잃게 된다. 지나친 사냥은 숲을 황폐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사냥대상이 육식동물일 경우 작은 초식동물의 천적이 사라짐으로써, 초식동물이 모든 나무와 풀을 먹어버리는 상황에 이른다. 동물을 먹는다는 게 그래 간단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생태환경시스템은 어느 균형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인간의 역사에서 생태환경의 파괴는 결국 인간의 목숨을 좌우하는 아이러니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역사와 문화를 이어오면서 동물을 사냥하는 게 아니라 우리 속에 가두어 키우게 되었다.

 

최근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통 한국사회에서 주요 안주나 간식거리 중에서 치킨이 주요 음식이 되었다. 내가 어릴 적에 옛날통닭 즉 시장에서 파는 통닭을 사면 양이 엄청 많았으나, 지금은 그렇게 크지 않다. 몇 조각 안 되는 닭고기는 현재 45일 정도 된 어린 닭인 것이다. 과거 시장에서 파는 시골촌닭은 조금 다르다. 닭장 우리 속에 있는 닭은 옛날에 내가 먹어본 닭이 아니다. 그저 자동화된 공장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인스턴트식품이 되었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기 전에 이미 나는 <가축이 행복해야 인간이 행복하다>라는 책을 읽었다.

 

그래서 새삼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고, 생각보다 이전에 읽은 책보다 새로운 느낌은 없었다. 단지 전에 읽은 책은 가축인 소와 돼지 중심이라면 이번에 읽은 서적은 해양생물이 나온 게 마음에 들었다. 가축사육과 관련하여 최근 환경부 관할법령으로 “가축분뇨의 관리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 개정 반포되었다. 가축 중에 당연히 대표되는 동물은 한우, 젖소, 돼지, 닭, 오리, 사슴 등 다양한 가축이 있다. 가축이 내뿜는 분뇨의 양은 인간에 비해 많고, 대규모 사육은 밀집된 공간에 점오염원을 발생시킨다. 한국에서 주요 광역도시와 경기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가축이 사육된다.

 

가축사육은 주로 농촌의 농가에서 이루어지고, 농가 주변부에 하천이나 저수지 같은 수원지가 분포하는 경우가 많다. 비오는 날 강우유출수에 의해 지표면에 부착된 오염물질이 그대로 빗물에 휘말려 하천으로 유입된다. 가축분뇨의 어려움은 대부분 축사 영세한 농가인 점이다. 그러나 가축을 잡는 도살장은 다르다. 옛날에 시골 축제에서 돼지 1마리를 그대로 잡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지정된 도살장에서 가축들을 잡는다. 가축도살 과정을 들어보면 우선 소 같은 경우 전기 총으로 충격을 주어 기절시키거나, 그것이 되지 않으면 머리에 총을 사격하여 뇌를 관통시키는 경우가 있다.

 

실제 도살된 소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전기충격으로 인해 두 눈에 붉은 실핏줄이 보이고, 입은 크게 벌려져 있으며, 눈알은 조금 돌출되었다. 그 다음에 소의 목을 베었으니 그 모습이 참으로 엽기적이었다. 겉으로 본다면 징그럽고 무섭지만, 우리는 그런 과정을 거친 고기를 식당에서 매우 맛있게 먹는다. 그 절차가 잔인하고 끔찍하다 말하면서 식당에서 맛있게 입맛을 다지는 모습에서 상황적 간격이 있다. 문제는 바로 그 고기에 대해서다. 최근 시골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면 소 사육시설이 있다. 수많은 소들이 볏짚과 영양 사료를 먹고 성장하고, 작은아버지는 그것을 판매하여 생계를 꾸려간다.

 

그러나 내가 아주 어릴 때 적어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2분이 계실 적에 소는 우사에 1마리가 있었다. 그런데 소가 따로 외양간 건물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조부모님이 살던 집 지붕과 이어진 우사에 있었다. 작은할아버지 댁에 가도 그렇다. 작은방에 작은 문을 열면 우사에 소가 있었다.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우리집안은 농사일을 약 200년 전부터 시작한 것 같다. 증조부께서는 급사로 돌아가시기 그 전날까지 소에 쟁기를 끌고 다니면 논일을 했다. 소가 예전에는 한국농촌의 거대한 뿌리였지만, 이제는 소로 농사를 하지 않는다. 들판에 나가 여물을 먹거나 여기저기 움직이지 않는다.

 

돼지도 인간이 주는 잡식이 아니라 사료만 먹는다. 닭도 마당에 풀어 키우는 게 아니라 닭장 아래 갇혀 있다. 인간도 어디 나가지 않고 좁은 독방에 갇혀 사육되면 아마 몸이 먼저 무너지는 게 아니라 정신이 붕괴되어 자살할 것이다. 동물은 시간적 감각이 인간보다 덜하다. 인간은 시간을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단지 몇 시인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뿐이다. 전등기 빛으로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어 닭에서 알을 계속 뽑아내고, 돼지에게 수없이 사료만 준 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나마 위생적인 축사는 괜찮다. 축사 내 분뇨가 가득하여 냄새가 진동하고, 병이 나도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가축도 있다. 이런 가축의 육질은 떨어질 뿐만 아니라 게다가 몸에 질병을 앓고 있어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병균이 이미 심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물론 미국보다는 아니다. 적어도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은 미국 내 대형 공장식 가축사육시설을 두고 저술한 책이니 말이다. 하지만 국내도 미국식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그런 과정은 금융시장만이 아니라 공장도 마찬가지다. 사육시설은 공장처럼 기계화 되어 있다.

 

가축사육시설은 언제나 악취와 비위생적인 공간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운 좋은 기회가 있어서 여러 가축사육시설을 본 기회가 있었다. 물론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만큼 비참한 상태는 아니나, 영세한 축사 중에는 매우 심각한 상태도 있었다. 우리가 먹어야 하는 식량이 바로 이렇게 관리되는 셈이다. 이 글을 적는 와중에 내가 왜 닭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가? 예전에 우리가 이렇게 닭을 많이 소비하지 않았다. 닭고기 소비량이 최근에 들어 부쩍 상승했고, 일반 주택지역과 아파트 대단지 인근을 보면 치킨집이 즐비하다.

 

이 많은 가게들이 수많은 가정집에 닭고기를 요리해준다. 심지어 시내 술집과 식당을 가더라도 닭고기는 메인 메뉴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닭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45일 아니라면 최장 60일까지 성장한다면 닭은 대량생산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닭의 부리가 잘려나가고, 발톱도 잘려나가며, 수평아리는 그대로 처분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가축들의 희생 아래 그 위에서 서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보인 작가의 관점을 좋게 보지 않는다. 동물의 죽음에서 분명 잔혹한 것은 있다. 하지만 작가는 알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물가의 차이다. 자동차의 가격이 예전에 비해 수 천 %가 올랐지만, 그 기간에 고기의 가격은 몇 백%만 상승한 점이다.

 

왜 자동차와 식량인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것을 몰라도 쌀 가격은 올리지 않는다. 물론 고기가격은 많이 오른 편이라도 해도 식량에 대한 가격은 올리지 않는다. 작가인 조너선 샤프란 포어는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가축도살 현실에 대해 잘 지적한다. 그 기업이 펼치는 로비나 혹은 미디어의 작용도 거론한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기를 먹지 않아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니라면 고전의 경영방식을 답습하여 운영하는 농장주를 계속 키우는 것일까?

 

식물을 위주로 하면 식당의 판매가격이 낮아지는 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시장에 공급하는 대규모 경영업체가 보여주는 행동이다. 권력기관과 언론기관을 동시에 협력하여 눈속임하는 것, 그리고 공장 내 노동자의 인권문제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 시점에서 단지 고발만 하는 식은 좋지 못하다. 과정의 관계에서 대안의 설정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모든 음식이 그렇게 전달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시장구조는 제대로 맥을 잡아내지 못했다.

 

수 억명에 이르는 인구가 살고 있는 나라에 식량을 저렴하게 공급하려면 그 만큼의 자본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규모농장이 용인되지 않은 경제적 상황, 영세농가의 현실, 자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산업구조 변화에 대한 대안성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의 빈부격차는 어마한 것이고, 그 빈부격차에서 빈곤계층이 주어지는 식량은 고칼로리의 햄버그와 콜라다. 그들에게 신선한 건강식이란 벽에 걸린 그림이고, 더러운 공장에서 도축과정에서 잔인하게 죽는 동물의 피 때문에 살아간다.

 

작가는 미국 유명한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몇 년 동안 상을 받은 사람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 중산층에 있는 사람이고, 상당한 엘리트다. 엘리트이기에 그런 책을 서술할 수 있지만, 엘리트의 한계성이 드러나는 책이다. 그런 음식을 먹고 싶고 말고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으나, 선택권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도 있다. 미국 도심지 내 텃밭을 가꾸어 채소를 가꾸기란 무리고, 농촌에 자기의 텃밭을 꾸며서 자신의 생계를 꾸릴 수도 없다. 문제의 현실을 잘 지적해도 그런다고 대안성은 없다.

 

세계의 절반은 왜 굶는가? 미국 내 식량은 빈민을 모두 살릴 수 있지만, 모두 가축사료로 사용된다. 남는 것이 있어도 그렇게 하는 것은 절망적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하나의 숫자로 보는 자본주의시장경제의 비참함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선택지가 파괴된 인간에게 이 책의 논리는 그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공장식 사육시설 비위생적이고 비인도적인 도축시설이 사라져간다고 작가는 말하나, 그의 말은 너무 오점이 많다. 물론 가능하다. 지금 살아있는 빈곤계층이 사회적으로 재생산을 할 수 없으면 말이다.

 

경제적 능력이 따르지 못해 2세를 낳지 못하거나, 또는 출산율이 저하되어 부부 당 출산인원이 2.0 이상이 아니라 1.0에 머물면 인구는 확연하게 감소된다. 우리나라가 지금 그런 경제적 상황에 머물려 있다. 게다가 식량의 문제, 생계에서 주거비용과 의복도 중요하나 식단의 구성에서 작은 임금으로 식사를 해결하려면 저렴한 식품공급이 필요하다. 이런 현실에서 이 책은 상당히 낭만적인 발상만 넘치는 것 같다. 좋은 내용을 보여줘도 좋은 대안은 없다. 동물이 불쌍하게 죽어 우리의 입으로 오는 것은 안다.

 

특히나 대기업들은 자신들이 만든 환경오염문제를 자신들의 비용이 아닌 공공성의 영역을 침해한다. 이래저래 막지도 못하고, 현실을 비판하면서 뭔가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란 얼마나 답답한가? 문제의 근원은 어디부터 있지만, 그것을 건들기도 하지만, 그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옛날에 가난의 상징은 영양실조이나, 지금은 비만의 상징은 과도한 비만이다. 경제적 빈부격차는 음식에서 바로 차이난다. 영양제와 항생제가 듬뿍 들어간 고기를 먹는 게 나쁜 것은 잘 알아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은 훨씬 나쁘다. “내가 이래 잘 알고 있는데, 너는 왜 그것을 몰라? 아니면 모르지만, 이것을 알면 정말 놀라울 거야.” 라는 식은 결국 자기 만족의식이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에 대한 배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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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6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7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6-06-07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시간이 날 때 페이퍼를 쓰려 하는 주제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육식은 반-생태순환적이지만, 인류 역사 초기의 반-생태순환은 농업이었고, 친-생태순환은 사냥에 의한 육식이었죠. 사냥감이 줄어들면 인간은 굶어 죽음으로써 균형을 이루었는데, 인간이 굶어 (또는 이에 의해 2차적으로 다른 이유로) 죽는다는 것을 막은 것과 생태 순환과 어느 것이 더 도덕적인지 고민 중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6-07 16:06   좋아요 0 | URL
저도 진보성향이나, 가끔 진보라고 생각하는 분들의 가장 짜증나는 요소는
바로 대안이 없다는 점입니다. 현실에 대해 까기만 바쁘고, 근본원인과 대안책도 없고,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면 계속 뱅뱅이니...참 고민입니다.
이번 고기도 마찬가지죠. 자신들조차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모순과 혜택을 누리면서
거기에 대한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