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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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화에서 우리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서사라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자면 문학과 영화는 문자서사인지 혹은 영상서사인지의 차이점이지, 안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은 같을 것이다. 단지 영상서사인 영화보다 문자서사인 문학이 조금 더 가치 있는 이유는 영상서사는 수용자의 시선을 향하여 정보만 주고, 그 이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부족하다. 물론 제작하는 이들의 노력에서 보자면 충분히 그 능력을 발휘하나, 수용자의 입장에서 영상이란 스쳐지나가는 잔상으로 지나간다.

 

문자서사인 문학은 이와 다르게 글자를 접하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항상 머릿속에 어떤 상황인지를 끊임없이 떠올려야 한다. 문학은 영화와 다르게 친절하지 않다. 친절함 영상미와 달리 문학은 내가 직접 보면서 어떤 것인지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물론 문학이 소설의 형태로 나오면서 소설 모든 것이 영화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나, 페이지를 넘기는 것에 대한 시간적 투쟁은 독자로 하여금 인내심을 요구한다.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은 나에 대한 또 다른 수련일 수 있고, 하나의 성찰의 길을 안내할 수 있다.

 

이번에 읽은 <스토너>는 아마 이런 문학소설에서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책이다. 그렇게 분량이 길지도 짧지도 않으면서, 책 내용을 봐도 뭔가 격정적이고 파행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물론 스토너가 살던 시절은 20세기 미국이다. 그는 19세기 말에 태어났으나, 그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은 20세기 미국이다. 미국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19세기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에서 북부의 연합팀이 승리한다. 하지만 전쟁이란 단순히 사람만을 전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전쟁이 발발하면 그 열화와 같은 공간에 스며들며, 자신도 모르게 그 안에서 허무한 아지랑이처럼 사라진다. 스토너가 대학에 오면서 그 상황에 처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수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를 향하여 움직였고, 많은 청춘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바람처럼 흩어졌다. 스토너가 대학에 오면서 친구 2명이 있었지만, 하나는 참전한지 반년도 못되어 죽는다. 그리고 고든은 돌아오고, 자신이 있는 학교의 권력자가 된다. 스토너의 인생은 그렇게 열정적이지 못하다.

 

미국을 떠오르면 아메리카 드림을 말하나, 그에겐 그런 것보단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인고의 삶을 지켰다. 스토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까지 계속 힘든 농장 일을 하고, 돼지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몇 리나 떨어진 축사까지 걸어간다.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에게 공부할 기회를 준 것은 인생의 대역전이다. 하지만 스토너는 그런 전환조차 하나의 기회보단 그저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토너의 인생은 처음에 수동적인 자세로 보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스토너는 오히려 수동적인 인간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같은 인생노선을 걷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대학에서 스토너의 모습이다. 대학에 있는 사람들은 시대적 조류에 너무 충실했다. 아니 그것을 따르는 편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빛을 내는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스토너는 그런 인생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고자 했다. 농학을 전공하여 농장 일을 제대로 계획하려다 오히려 영문학으로 발을 옮긴 스토너,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도 가끔 느낀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도 계시나, 부모님만큼이나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분들도 많다. 슬론 교수는 스토너에게 제일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단지 대학에 오고, 우연히 강의를 받던 스토너, 그는 슬론 교수에게 학자의 길을 걸을 것을 권유받고 교수가 되기로 한다. 그런 과정에서 소설은 격정적으로 보여주기보단 스토너에 대한 묘사에서 매우 아름다운 표현을 구사한다. 슬론이 말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문학에서 논리학과 수사가 중요한 게 아니나 어찌 보면 문법이 중요하다고 했다.

 

인간의 이성이 존재해도 그 이성에 자극을 주는 것은 글 안에 담겨있는 생생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왜 20세기 인간들은 아니라면 내가 살아있는 21세기 인간들은 영국 대문호인 셰익스피어의 글에 빠져드는가? 인간 스스로가 느낄 수 없는 감동과 삶의 의미를 문학은 연결해주고 있다. 인간은 생이 다른 동물에 비하여 길지만, 그렇다고 목숨 그 자체가 긴 것은 아니다. 옛날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다. 예술의 세계에 빠지는 것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새로움이란 주변에 보이는 사물들의 변화가 아니다. 새로운 것이란 내가 추구하는 길에 보이는 이때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이다.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문학과 예술이라면, 그 세계가 어떤 식을 가는지에 따라 다른 모습을 전해준다. 생각하면 문학의 매체로 소설 <스토너>에서 스토너는 느린 것에 대한 미학, 자신 안의 세계에서 넓은 우주로 가는 구도자 같다면, 스토너의 아내인 이다스는 순간적인 변화 쾌락적인 감각을 추구한다. 그녀는 잠시라도 가만히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다. 이다스가 결혼 후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다 나중에 그녀의 아버지가 죽자, 얼마간 집에서 나가있었다.

 

돌아온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예전보다 화장을 도발적으로 했으며, 연극 팀을 도와주거나 조각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지겨워지고, 그녀는 자신이 만든 최고의 예술인 딸 그레이스에게 집착한다. 그레이스를 대하는 모습에서 이다스는 집착이 지나치다 못해 정신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스토너가 그레이스의 어린 시절을 돌봐주었으나, 그레이스는 그런 스토너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은 채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절단시켰다. 스토너는 집에서 보면 항상 단절된 존재였고, 그 단절감은 가족의 시간에서 보였고, 심지어 공간적으로 차별되었다. 인간의 공간, 즉 공간은 인간의 사유와 사상이 그대로 반영된다.

 

스토너에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오로지 그가 머문 공간은 자신 안의 세계, 학자의 길이다. 우연히 그가 진정했던 사랑했던 대학원 출신의 시간강사 그녀만은 달랐다. 사랑을 깨닫는 것은 이다스를 처음 본 그날의 느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아주고,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반응해주는 것이다. 마음이 통하는 여성을 만나 서로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누고, 육체적인 교감을 나누는 것은 행복이다. 그러나 스토너에게 그녀의 등장은 너무 늦었고, 스토너의 행동은 모두가 알았다.

 

스토너가 시대적 조류에 쓸려가지 않기에, 언제나 그 모든 세계에서 중심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런 길을 걷기에 항상 스토너는 사방이 막힌 벽에만 갇힌 채 인내의 시간을 요구했다. 다른 교수가 추천한 워커 학생을 심사하던 중에 스토너는 그 학생이 기발하고 창의적인 것은 알지만, 학자로 성장하기에 너무 부족하고 기본적인 학업이 안 된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박사진학과정에서 워커를 인정하지 않으려다 영문학과 학과장에게 미움을 받아 노장 교수는 시간강사들이 관리하는 1학년의 수업을 맡게 되고, 시간표도 오전 아침과 오후 저녁에 배정받았으며, 강의실조차 엉망이었다.

 

스토너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나머지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연구와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에 향했다. 스토너의 모습을 보면 우리들은 모두 이럴 것이다. “왜 그렇게 힘든 길을 선택하지? 왜 그렇게 남의 말을 안 듣지, 적당히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인데 말이지.” 실상 우리 인생은 스토너의 모습을 나나 혹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길을 생각하고 스스로 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은 충실히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반증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생은 자신의 것이야 하나, 인간이 속한 사회는 개인 혼자가 아니라 개인들로 구성된 하나의 집단이다.

 

집단에서 언제나 정치적 갈등과 이권의 분쟁이 일어난다. 스토너는 바로 그 학교 내 정치적 갈등에서 권력을 따르지 않았고, 이권을 추구하지 않았다. 현대사회의 인간이라면 소소한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할 수 있고, 비겁한 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스토너는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았던 자다. 어린 시절 농사를 보면서 손에 박힌 흙의 자국, 대학을 다니면서 친척집 일을 도와주던 스토너는 남들처럼 좋은 옷도 없었고, 언제나 같은 옷으로 학교를 돌아다녀야 했다. 지독한 가난과 무기력하게 지나가는 인생의 길에서 스토너는 불행한 삶을 살았는가?

 

다르게 생각하자면 나는 스토너가 불행한 인간이라 보는 자들이 더 불행할 줄 모른다. 스토너는 결혼생활이 불운했고, 학교교직생활이 불편했다. 심지어 딸은 처음에 아내인 이다스와 다른 길을 갈 줄 알았지만, 이다스의 인생처럼 되어버렸다. 그레이스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으나, 술김에 잠을 자서 임신하고, 그길로 결혼한다. 하지만 그레이스 남편은 죄책감으로 견디지 못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사망했고, 그레이스는 혼자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어떤 삶인가? 위스키가 없으면 버티지 못했다.

 

이다스나 그레이스나 자신의 삶을 자기가 아닌 주변에 의해 조작되면서 모든 것이 불편해졌다. 스토너는 그런 삶과 다르게 담담히 자기만의 길을 걸었다. 집에서 외면 받고, 학교에서 무시당해도 말이다. 그러나 스토너는 마지막 모습을 보면 너무 침착하고 담담했다. 죽음의 심사를 의사로부터 들어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업무를 정리하고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비주류의 인생이 살아갔지만, 후회 없는 삶이라 말할 수 있다. 고통에 대한 인고의 세월은 길어도 그 결실은 고통의 시간처럼 보답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길을 걷는 이유는 자신의 삶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 <스토너>에선 예술적이라고 강요하지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굴곡은 뭐든지 화려하지 않다. 때로는 불행과 악운도 존재한다. 마지막 장신이 모든 것의 승리가 아니다. 그렇지 못한 삶이라도 얼마나 자신 스스로를 잃지 않고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게 구도자의 길일 것이다. 소설내용을 보자면 우리 삶과 너무 익숙하거나 친숙하게 보일 것이다. 일상세계에 머무는 인간은 이야기에서는 비일상의 세계를 원한다. <스토너>는 비일상이 아닌 완벽한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다. 바로 불편한 삶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런 불편한 삶을 관찰한 우리가 느낄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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