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천둥의 신 - 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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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신 토르라는 영화는 내가 판단한다면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영화보다는 차라리 애니메이션에 가깝다고 본다. 왜냐하면 실재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보다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이용한 애니메이션 영상이 훨씬 압도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토르가 살았던 그 전설(傳說) 속의 장면에서는 모든 영상이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나 불굴의 의지를 가진 게이트의 수호자가 길을 열고나서는 거의 대부분이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영상이다. 단지 그 애니메이션 영상 안에 등장인물의 실사영상 촬영모습을 대입할 뿐입니다. 차라리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영화적인 요소는 토르가 지구로 와서 지구인들과 같이 활동할 때가 영화 같다고 볼 수 있다.




원작부터 만화(漫畵)라고 들었으니 실사영상보다는 애니메이션 영상이 더욱 효과가 좋지 아니한가? 게다가 이 북유럽신화를 모티브로 했었던 만큼 이 천둥의 신 토르에서는 그런 신화적인 요소를 조금 현대적으로 살렸어도 원래가 신화인 만큼 애니메이션이 어울린다.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은 Animation이란 알파벳 철자로 사용하고 여기서 Anime는 라틴어로 영혼이라는 의미를 가졌고, 정신분석학 용어로는 남성성 안의 여성성이다.




그리고 영혼은 우리 인간 눈으로 볼 수 없는 비(非)물리적인 존재이므로 이런 존재를 믿고 신앙하는 종교를 애니미즘(Animism)이라고 불린다. 가령 세계 고대민족들의 이야기나 문화를 찾아가면 이런 신화(神話)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접한 자연은 그저 위대한 신이요 정령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과거 인류들이 지닌 가치관, 인식,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들어가서 나타난 것이 바로 신화이다. 그런 신화에서 켈트족인 북유럽신화는 백인들의 과거 정신을 보이고, 과거의 신화를 오늘날의 영화로 들어냄으로 다시 신화를 현대(現代)적인 감각으로 살려낸다.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敍事哲學)”에서 나와 있듯이 모든 서사에서 기본 중의 기본은 바로 신화다.




신화는 그 민족과 나라의 공통된 무의식적인 관념이고, 그 관념은 끊임없이 오늘날까지 살아간다. 그런데 보통 신화를 연구하고 그 신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을 보면 인간의 본연적인 문제나 혹은 인생관이 보인다. 단지 이번에 내가 본 천둥의 신 토르에서 조금 의아하게 여긴 것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의 차이다.




기본적으로 신화는 나라마다 다르나 조금씩 비슷한 부분이 많다. 가령 우리나라 신화 중에서는 “콩쥐와 팥쥐”라는 신화가 있는데, 이것은 유럽의 신데렐라 신화와 비슷하며, 신화 속에서 남편으로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여성의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신화가 다시 현재로 넘어와 이른바 신데렐라 콤플렉스,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캔디”로 통해 이른바 “캔디이데올로기”까지 나온 것이다.




물론 이런 세계적으로 구술 내지 기술되어 전승되는 신화는 조금씩 살펴보면 약간 비슷한 내용이 발견된다. 그 부분은 바로 부자(父子)간의 갈등관계이다. 이 천둥의 신 토르에서도 작품 초반에 갈등으로 등장한 것이 로키가 사는 차가운 얼음나라도 되겠으나, 정작 이 작품에서 가장 토르가 중시한 문제는 아버지와의 감정이었다.




우리나라 신화와 비교하여 한국 신화에서 등장하는 남자영웅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없거나 혹은 모르거나 또는 죽은 상태로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건국신화(建國神話)의 영웅들을 고찰해 보면 대부분 아버지가 없다. 이른바 한국 신화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은 이른바 “후레자식”이라는 아비 없이 자란 건방진 녀석이란 뜻이다. 고구려의 주몽신화부터 신라, 가야국의 건국동기가 그러하다. 건국신화가 아닌 무속신화(巫俗神話)에서도 이런 면이 등장한다.




제주도의 수호신 신화로 “궤네깃또”라는 무속신화가 있다. “궤네깃또”가 부모에 의해 밖으로 내쫓긴 후에 공을 세우고 나서 제주도에 들어오려는 그 순간 “궤네깃또”의 부모들은 아들의 귀환소식을 듣고 모두 도망치다 사고로 죽는다. 그리고 “궤네깃또”는 제주도에 돌아와서 마을의 권위 있는 자로 활동하고, 죽은 뒤에 마을신으로 추모(追慕)된다.




이런 부자간의 갈등은 그리스신화인 “오이디푸스왕”처럼 아버지인 라이오스왕을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처럼 단순히 근친상간(近親相姦)적인 요소만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가져가고 싶은 권력이라는 하나의 상징을 원한 것이다. 그러나 권위(權威)를 가진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아들은 그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오직 아버지가 자신의 권위를 물려줄 경우만 한해서다.




이런 모습은 작품 초반에 확실히 보인다. 토르의 아버지인 오딘은 매우 용감한 용사였으나 한편으로 매우 신중하고 현명한 왕이었다. 로키제국을 응징 후에 거기서 로키왕국의 왕자를 거두어 자신의 2번째 왕자로 삼아 사랑으로 대해 주었다. 그가 2번째 왕자로 되어 살아오면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를 주워온 사실을 알았고, 적국의 왕자를 키워준 점에서 의아하게 여겼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보살펴준 부모님의 사랑을 잊지 않았다.




단지 그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초반에 토르가 왕위 계승의식에서 동생은 자기 형만 인정받는 것이 싫어 로키의 병사를 몰래 유입시켜 그 행사를 망쳤다. 그는 형을 사랑했지만 한편으로 형을 질투했던 것이다. 자신이 왕이 되고 싶은 이유는 자기가 오딘의 친자가 아닌 양자라는 열등의식(劣等意識)이었다.




이런 동생의 질투로 계승식은 엉망이 되었고, 토르는 그 복수심에 로키에 찾아가서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차후 위기에 몰리자 아버지 오딘에 의해 구출된다. 그 상황에서 오딘은 아들이 너무 성급한 점과 아들의 오류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빠진다며 그를 책망하여 멀리 지구로 보낸다. 지구로 온 토르를 처음 내가 본 순간 그가 이 지구의 새로운 영웅으로 될 사람인가 하고 의문을 품었다.




왜냐하면 토르가 살던 왕국에는 아버지라는 절대적인 신이 있었으나, 지구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영웅이 없었기 때문이다. 토르와 토르의 해머가 지표면에 낙하할 때 모이던 정부관계자도 로키와 전혀 상관없는 그저 정부기관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닌 하나의 변방세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르가 있다는 이유는 토르의 동생에게 하나의 두려움이며 하나의 근심거리이었다.




그래서 동생은 형을 죽이기로 하였다. 이때까지 하더라도 토르는 자기위만과 과시욕으로 충만했다. 허나 아버지의 거짓죽음 소리를 들은 후와 그 죽음이 자기의 경솔함으로 이루어진 사실, 또한 로키와의 전쟁도 자기의 경솔함을 깨닫자 그는 작품 초반에 반항적인 영웅에서 순종적인 영웅으로 변했다. 그는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동생에게 죽음을 선택받기로 한다.




그런 결심을 한 후에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치며 토르의 해머가 갑자기 움직여서 토르의 손에 들어갔다. 토르가 처음 지구에 올 때 세상 그 어떤 누구도 그 해머를 들 수 없었다. 그런 점은 해머의 주인이었던 토르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아버지의 동의가 없으면 그는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던 용감한 남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고, 자신의 잘못으로 모든 사람에게 고통이 간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고,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깨닫는다. 작품 초반 추방 전에 보이던 그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의식으로 가득했으나 이제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같이 안고 갈 수 있는 위대한 마음을 말이다. 아버지인 오딘은 자신의 후계자인 토르가 모든 것을 안고 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점은 자신들의 적인 로키까지도 말이다. 아버지 오딘은 그런 포용심으로 토르의 동생을 이때까지 길렀고, 자신의 국가에 침입자가 들어와도 로키와의 분쟁을 피해가길 바란 것이다.




사실 아버지 오딘은 2째 아들이 배신한 사실도 알았고, 2째 아들과 대화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서 자신의 방에서 영원한 꿈을 꾸어도 사실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아도 가만히 누워 기다렸다. 단지 토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말이다. 마지막 순간 토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동생과의 결투에서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동생을 대했다.




하지만 동생은 과거에 경솔하고 망나니 같은 형이 어느 순간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자기를 대하자 더 이상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음에 자책하며 머나먼 우주 미로로 사라져 간다. 대신 이 결투로 인해 세계수인 위그드라실의 한쪽 부분을 잃어버린다. 그 나무의 줄기는 오딘의 제국에서 지구 인간계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였다. 그 곳에는 토르가 떨어져 토르를 위해준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곳이다.




토르는 그 세계로 가는 줄기를 파괴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왕국 그리고 아버지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대립하여 새로운 세계로 추방되어 해머를 손에 들고 영웅으로 될 수 있었으나 그것 역시 아버지의 권위로 좌절된다. 그런 좌절을 이겨 내고 다시 돌아오나 그것은 분명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닮아가는 과정이다.




오이디푸스 가부장체계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대신하고 싶은 욕망이 있으나 아들이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면 그것을 포기하게 된다. 또한 근친상간적인 요소에서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육체적 사랑을 욕망하나, 아버지라는 존재를 인식 후에 그 아버지까지 사랑하게 되면 어머니를 닮은 여자를 찾아 결혼한다고 한다. 그 여자는 바로 지구에 남겨진 토르의 연인이었다.




물론 마지막을 보면 다리가 끊겨 갈 수 없다고 하나 문지기 수호신은 희망이 있다면 언제가 찾아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작품은 결말을 보이며 막을 내린다. 이 영화를 보니 한편의 전형적인 영웅을 보이기보다는 그 영웅이 그 기존 세계의 질서에 다시 들어갈 뿐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은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되어 질서를 만드나 여기서는 그저 멈추어 버린다.




마지막 결론을 보고 대부분 관객들은 조금 뭔가 충만한 느낌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는 과업을 시작하여 과업을 완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버지의 손 위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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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의 사상과 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서사시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7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사순옥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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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헴름 니체하면 딱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그것은 "신은 죽었다"이다. 신이라는 절대불가침적인 존재를 죽었다니 다소 아이러니 하면서도 조금 묘한 기분의 말이다. 게다가 니체는 자신의 아버지가 교회목사였다. 독실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신이라는 존재를 죽었다니 상당한 반전을 불러 일으키는 어구이다.

 

하지만 그가 있었던 그 신이란 존재를 죽었다고 말하는 이유를 조금 다른 서적에서 본다면 이해가 간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던 "마빈 해리스" 교수(2001년 작고하심)의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어보면 왜 신을 죽었는가에 대해 알 수 있다.

 

단순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로 해서 '니체도 죽었다'라고 하는 것은 그 말하는 본인조차도 언제가는 죽어버리는 나약한 인간이므로 그 신이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아야 한다. 니체가 신을 죽인 까닭을 문화인류학자의 서적을 참고해 보면 조금 감이 온다. 그것은 바로 마녀사냥이라는 무서운 광기의 향연이었다.

 

<문화의 수수께끼>에서는 이런 서양역사 중에서 십자군 원정이나 다른 문화에서 보는 신에 대한 관점을 적어내려 가고 있다. 특히 로마의 고문서로 통해 본 신의 존재는 조금 우리가 아는 신의 존재와 다르다. 문제는 그 신이 왜 죽어 버려야 했는지 우리로 하여금 절실히 알게 해주는 것이다.

 

중세 교회는 정말 광기의 시절이었다. 이 마녀사냥의 공포는 당시 군중심리를 이용한 부패한 왕권과 교권의 폭력이었다. 당시 마녀사냥으로 몰리면 갖은 고문과 심문으로 사랑을 희생시키는데, 그 내용을 보면 너무 끔찍하다. 튀어나온 눈알, 팔에서 떨어져 나간 손목, 다리에서 잘라진 발들, 바닥은 온통 피와 피로 고여 있어도 계속 죽음은 계속된 점이 말이다.

 

당시 수십만명의 죄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도덕과 권력의 비양심으로 희생되었다. 그 덕분으로 어려운 중세유럽국가 권력층은 공포정치로 통해 대중들을 억압하여 통제하고, 종교는 하나의 인간구원이 아닌 인간통제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군중들의 눈앞에서 화형되는 자기 이웃을 바라보며 사악한 미소를 짓었으나 언제가 그 사악한 미소를 받을지도 모르는 운명이었다.

 

니체는 왜 그렇게도 신을 죽이고 싶었을까? 그리고 그 신을 따르는 자들도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자들까지도 멀리하려고 했을까?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는 서적이 바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그런 군중의식에 대한 비판과 그 대중들의 귀와 논을 속이는 저널리스트나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했다.

 

그들은 정말 대중들을 위해서일까? 니체 역시 독일인이기 때문에 다소 칸트가 지적한 교조적인 의식을 가진 무지한 사람에 대한 분노의 비판이 보였다. 그 분노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니체가 도달하고픈 초인 영원회귀사상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니체는 신은 어느 주체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그 자체로 신성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실 그 신이라는 존재가 신으로 모셔지지 않아도 신은 되었다. 그러나 그 신을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따른다고 해서 사람들은 신이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말에 기울이되 자기를 멀리하고 따라오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는 광신도의 맹목적인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로 본 대중들은 한 마리의 당나귀와 같았다. 그들은 어리석었으나 그들의 어리석음을 몰랐으며, 이 어리석은 존재를 그냥 그대로 방치하여 그들의 삶에 거밋줄을 치어 기생하는 타란튤라인 성직자처럼 되기 싫었다.

 

이웃을 사랑함에도 그 자기만의 이웃만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라고 했으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지 않으므로 그래서 인간은 평등해져야 하는게 아닐까? 모든 인간은 같지 못하므로 꼽추와 대화할 때는 꼽추처럼 대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그런 군중의 부도덕함과 당시 지자들의 욕심과 허영심에 뼈저리게 실망한 니체로서는 그런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하나의 인간성을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사실 니체의 서적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만 아나, 그가 도덕의 계보나 많은 서적으로 통해 계보학적인 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후에 가면 군중심리와 대중들의 눈속임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학자 미셀 푸코로 이어진다. 미셀 푸코 역시 미디어로 통해 대중들을 속이는 권력을 비판했다. 지금은 미디어가 군중심리를 자극하면 당시로는 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여 사리사욕을 챙기거나 허황된 유토피아 및 폭력적인 궤변가들이 선동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솔직히 1번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다. 단지 니체가 주장한 초인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자신의 새로운 세계에 가는 영원회귀사상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 심지어 이 글을 적는 나라는 인간도 그런 초인으로 가기에는 벅차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인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함에서 조금 생각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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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시드 - [초특가판]
카타야마 카즈요시 감독 / 플래닛 엔터테인먼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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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인 남자 니체가 만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국가에 대해서 나온다.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들이 독을 마시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들이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들의 완만한 자살을 “삶”이라고 부르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이건 마치 Apple Seed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시로 마시무네가 원작으로 한 이 애플시드는 그 말 그대로 사과씨앗이다. 사과는 기독교 성경에서 나오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에서 이브가 사과를 따먹음으로서 인간은 지혜와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 것처럼 애플시드라는 작품에서 보이는 인간들이란 그런 자신들의 지혜에 자신들을 죽이고 그 죽음으로 태어난 새로운 인간종족에게 자신의 인생가치마저 넘긴다.




작품 초반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 했던 프레이어는 그림을 그리는 도중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빌딩 숲속 아래로 몸을 던진다. 그녀는 이 완벽하게 보이는 도시가 모든 것이 풍족한 도시가 싫었다. 그녀는 새장에 갇힌 새보다 그 새장을 만들어 놓은 인간들이 더욱 더 괴롭게 여겼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오만으로 가득차서 인간이 만든 문명이 결국 인간을 속박하였다. 그 속박은 완벽한 세상은 되더라도 그 하나하나의 개체로서 존재감은 특출 난 것으로 볼 수 없다. 그저 이미 조작되어 하나의 부속품으로 되어 버린 인간세상인 것이다.




프레이어의 사랑하는 연인인 카론은 이런 세상에 대한 회의감과 의문감 그리고 좌절감으로 남은 여생을 괴롭게 살아간다. 그가 보고자 했던 아름다운 세상은 그저 하나의 신기루에 가까운 것일까? 프레이어의 죽음은 바로 이런 완벽함을 추구하려던 인간의 오만일까?




애플시드에서는 그리스신화를 인용한다. 이 애플시드 작품에서 완벽한 도시의 총감은 이 도시 이름 올림푸스의 파스테논에서 마치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에 의해 탄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으로 군림하려고 들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신전 같은 곳에 놓여있는 아테나 여신상은 기계과학으로 무장하여 모든 것을 제압하는 힘의 논리들을 말이다.




외형적으로 아름답게만 만들어진 도시 완벽하게만 보이려고 하는 세상 모든 것이 정말 정의로운가? 아니면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라 볼 수 있을까? 인간은 새장을 만든 주인이었던 동시에 새장에 갇힌 한 마리의 새로 그 새장이 너무 간과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물리적인 새장을 만들어 새를 넣고 키움으로 자신은 새장 안에 갇힌 것을 망각했을까?




애플시드에서 보이는 인간은 문명이란 하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그저 정해진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그게 언제가 인간을 소외해도 혹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어도 인간 그 자체를 하나의 도구로 만들어 버려도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방관할 뿐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그런 틀에서 벗어남을 두려워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인간은 정치적이기에 사회적이다. 그 사회는 인간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개체요 단체다. 하지만 인간을 위한 사회인지 아니면 사회의 부속품으로 이루어진 인간인지는 우리 스스로 생각할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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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助交際って未だにあるの? 2011-05-3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로 생각할 것은 아닐까
 
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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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세기 세계인류의 최고의 학자이자 위대한 인간 중의 하나다. 그는 프랑스에서 구조주의라(構造主義, Structuralism)라는 새로운 철학·사상·학문 분야를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구조주의 이전 탄생 이전에 배경이 되었던 학문으로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었으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했던 것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라는 언어학자의 ‘일반언어학’이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구조주의가 정확하게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단지 내가 구조주의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주변 문학비평을 전공하는 학도들이 나의 학문이나 사상적인 배경이 구조주의라는 평을 많이 듣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철학이나 사상에 깊은 통찰력과 이해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정규적으로 인문학을 배우는 학생도 아니었고, 예전부터 책을 그렇게 많이 읽은 사람도 아니다.

 

그저 무지하고 평범한 한국의 보통 인간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예전보다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나 여전히 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 자신의 한계와 수준을 알기 때문에 여전히 이런저런 책을 접하면서 공부하고 있다. 내가 철학과 사상 그리고 문학을 접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접한 분야는 후기구조주의 쪽이다. 고대 그리스나 중세와 근대철학보다는 현대철학부터 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보니 기초 없이 그저 끝부분만 들어다 보니 내 자신이 거기에 얽매인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학문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와 근대철학을 같이 읽어보기로 하였다. 중세 서양철학 역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나 너무 기독교(가톨릭)적인 부분이 많으므로 철학적인 부분보다는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인 부분이 강하여 그렇게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을 정하면서 이런저런 책을 직접 사서보고 도서관에서 빌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조주의 시작인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보기로 했다. 우선 나는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읽기 전에 먼저 “마빈 해리스”라는 문화인류학자의 책부터 보았다. 기본적으로 주변 사람들은 나보고 구조주의적이라고 하기도 하나 또한 문화상대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내가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라는 사실에서 시작하여 만화애니메이션을 리뷰, 비평, 칼럼을 하면서 같이 코스프레라는 문화에 대해서도 조금씩 관심을 기울여서 하나의 리뷰와 비평문화로 이끌어 내기 위해 코스프레 문화에 대한 연구서적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문화인류학자가 바로 마빈 해리스이다.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 “작은 인간”, “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말이다.

 

내가 이런 서적들을 읽으면서 문명과 야생이라는 이원화되어진 공간과 배경 그리고 시간 속에 문명이라는 곳에 살아가는 나 자신과 그리고 우린 인간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틀에 박힌 고정관념과 편견, 그 속에서 피어나는 하나의 광기적인 사고방식은 인간 자신 스스로가 인간이길 거부하게 만드는 마약과 같은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런 서적을 읽으면서 아마 나는 인문학 공부는 문화인류학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류학을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알아야할 사람이 바로 “레비 스트로스”라고 들었다. 그리고 예전에 미국 저명한 사회인류학자인 “에드먼드 리치”의 ‘레비 스트로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대략적으로 "레비 스트로스“가 누군가를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내용은 ”레비 스트로스“가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정적인 부분도 있는 비판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직접 현장에 방문하여 원주민에 대해 연구하기 보다는 먼발치에 머물러 단순히 외적인 부분에서 연구함에서 그것이 정확한 연구자료로 인정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레비 스트로스”가 직접 남아메리카 대륙에 가서 여러 원주민을 만나기 위해 열대로 들어가서 원주민과 생활하고 이야기하고 같이 동고동락한 일들을 적어간 이 '슬픈 열대‘는 “레비 스트로스”가 밀림 지역에 방문하여 거기에 있던 일들을 아주 생생하게 적어 내려간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슬픈 열대“를 읽어보면서 왜 슬플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문명에 살아가는 지금 현대사회에서 1930~1940년대 프랑스는 현 시점보다 문명이 덜 발달함은 사실이다. 그런 상태에서 오늘날 내가 보는 그 미개지역의 원주민들은 그 당시 사람보다 더욱 더 미개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하나의 선입관과 편견 그리고 자만과 오만에 빠뜨린다.

 

바로 그런 자만과 오만이 지금의 나나 많은 사람들에게 혹은 “레비 스트로스”가 방문했던 그 시대에 혹은 그 이전시대라도 말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조금 안타까운 부분이 많았다. 왜냐하면 원주민들의 고향이면 삶터인 남아메리카 대륙이 어느 순간 자신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라 다른 누구로부터 지배되어가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콜럼부스나 마젤란처럼 많은 항해자나 탐험가들이 남아메리카와 많은 미개척지를 발견한 순간 이 곳은 슬픈 열대로 되어 버렸다.

 

많은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식민지를 건설하여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고 밀림을 파괴하고, 광산을 캐어 환경을 오염시켰다. 그런 상태에서 남아메리카 대륙은 어느 순간 자신만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그 자신의 색깔을 잃어가면서 많은 원주민들은 고유의 문화를 상실하게 되었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바로 이런 원주민들에 대해 인류학자의 시점으로 그들의 생활과 삶 그리고 운명을 아주 객관적으로 지켜보면서 한편으로 나에게 슬픈 마음을 주었다.

 

특히 원주민들을 구호할 것이라고 유럽 선교사들이 파견되어도 선교사들은 자신들만의 사고와 문화에만 치중하여 원주민 고유문화를 무시하였고,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사상만이 최고로 여겨 원주민들을 업신여기거나 혹은 가혹하게 대하기도 하였다.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남아메리카에 도달한 정복자들은 원주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자신들의 옷이나 침구를 숲이나 거리에 놓았다. 그런데 이 옷에는 기존 원주민들이 모르던 무서운 재앙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남아메리카대륙에 아직 퍼지지 않은 많은 전염병들이 원주민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그 덕분으로 많은 원주민들이 사망하고 일부 종족은 멸종위기까지 갔었다. 이런 잔인하고 어리석은 행위는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어느 원주민 보호자들이 갔을 때에 그들은 원주민들은 아주 건강했다고 기록했으나, 그 원주민들은 어느 순간 없어지게 되었다. 그 보호자라고 하는 사람들하고 같이 온 병원성미생물이 원주민에게 하나의 사신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문명화되었다고 자만하던 인간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원주민을 죽이고 말았으며, 원주민이 야만적이고 잔인하다고 한 문명인들은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아주 잔인하게 죽였던 것이다. 물론 이 도서에서는 식인문화부분을 다루지 않았으나 사실 식인종족들이 자신의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해 죽이는 인간이 아주 많고 그 살해당하는 인간에게 아주 잔혹한 방법으로 고문하여 마지막까지 저주심을 잃게 하지 않으나, 한편으로 보자면 전쟁으로 수십만 내지 수백만 인류를 죽이는 문명들은 과연 도덕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문화라는 곳에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물질화된 문명으로 인해 우리의 정신은 항상 빈곤하고 뭔가 부족함 마음을 가진 채 텅 빈 가슴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그런 마음의 빈곤이 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에 동화되어 자신의 존재를 거기서 극복하고자 하였다. 자연을 극복하고 동화하고 조화로이 살아가는 것보다는 오로지 파괴로써 정복하려는 문명인과는 크게 다르다.

 

미개인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불쌍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막상 그 미개인 즉 원주민들이 불쌍하게 된 원인은 원주민들이 미개하기 보다는 문명인들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나는 미개인이 문명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미개인들은 문명인이 가지고 살아가는 정신적인 풍요에서는 우월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자연같이 살아가는 원주민들은 점점 현대사회에 도달하면서 조금씩 사라진다.

 

인간의 과도한 욕심, 그리고 지구를 오염시키는 환경오염과 자연파괴! 이 모든 행위는 우리 인간이 인간 스스로 인간적인 면을 버려 가며 자기만의 욕구와 타인에 대한 정복욕으로 슬프게 물들어 간다. 슬픈 열대는 문명인의 과도한 욕심과 이기심 그리고 오만으로 병들어간 열대 원주민들을 관찰한 책이다. 하지만 정작 슬픈 것은 열대 쪽의 미개인일까? 아니면 그 미개인을 바라보는 우리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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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2 대우고전총서 20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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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1, 2권을 다 본 현재로서 다 이해하고 납득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조금 내 자신에 대한 지적 능력이나 이해수준이 낮음이 아쉬우나 그나마 모두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지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 것은 아니다.

이 순수이성 비판 2권에서 내가 생각이 드는 것은 인간이 가진 이성의 한계와 그 한계를 느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칸트가 살던 시절은 코페니쿠스의 지구 자전설이 인정받던 시절이다. 물론 이 자전설이 인정되기 전에는 인간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이었다.

이런 과학적인 발전이 인간이 가진 고정관념 내지 편견을 지우고 하나의 과학적인 근거와 논리적인 이성으로 통해 자기들이 알고있는 한계를 비판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자고 하는 것이 칸트의 주요 골자이기도 하다.

그런다고 새로운 시대가 오더라도 인간은 그런 시기적인 흐름에 따라 뭔가 변해 가야 하겠지만 한편으로 변하면 안되는 것이 있다. 칸트는 이런 점을 잘 집어낸듯한 느낌이 온다. 당시 사람들은 정확한 내용이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이 알기 쉽고 모두가 편한 것만 찾기를 원했다.

가령 어느 한가지 사고에 대해 그것을 제대로 알아가기 보다는 모두 자신이 편한 식으로 해석하려고 했고, 이것은 하나의 교조적인 태도로 변했다. 단지 억지스러운 법칙으로 이성의 판단오류가 하나의 정당성을 인정함을 칸트는 비판하려고 했던 것이다 .

사람들 그러니깐 평범한 대중들은 어떤 사물이나 진리에 대해 좀 더 상세하고 논리적으로 대하기 보다는 그저 자신만의 궤변을 늘여 놓는다. 그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억지로 감추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정말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만약 그것에 대해 모르거나 혹은 자신이 가진 사고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경우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틀렸는지 다시금 생각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숙지하여 자신의 비논리적인 오류판단을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오류를 다시 오류로서 대하므로 그런 순수이성비판적 태도를 가질 수 없으므로 더욱 더 비논리로 대할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자기가 말하는 궤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맞는지 혹은 틀렸는지 대해 자기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 비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런 무지함을 비판하고 어느 일정한 진리를 통해 정립과 반정립으로 통해 변증법적으로 대하여 우리가 가진 일방적인 사고와 혹은 거기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동시에 비판하여 올바른 사고를 유도하기 원했다. 솔직히 이런 부분은 칸트가 죽은지 200년이 넘은 이 현대사회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자신만의 입장과 자신만의 논리 타자와 그 이외의 상황과 정황 그리고 반대되는 논리까지 모두 무시하고 자신만의 논리로만 이야기하려 한다. 어떻게 보자면 그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또는 자신을 이해시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없는 주장과 반박만 성립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적인 부분에서 칸트는 기본적으로 이성은 자기를 위한 합리적인 수단이기 보다는 인간을 위한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이 책 마지막 부분에 가면 칸트의 올바른 이성은 결국 인간을 대함에 있어 윤리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순수이성비판 2권이 아닌 1권에서 이런 비슷한 말투를 본 것 같았다. 윤리와 논리는 일치하지 않는다. 사실 주변을 보더라도 논리적인 인간이 윤리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고, 윤리적인 인간이 논리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다. 하지만 논리와 윤리 중에서 만약 우리가 택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에서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함은 자기의 비논리적인 오류판단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고자 함인데, 그 비판적인 태도는 결국 인간이 인간 스스로 오류로 빠져 스스로 기만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칸트는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함이고, 그 올바른 행동은 윤리적인 인간이 되어야 함은 아닐까? 어째든 그냥 1번 읽고 이해하기 서적이나 칸트가 주장하고픈 인간의 이성은 인간 자신 스스로 비판하고 사고하여 올바른 행위를 하기 위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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