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천둥의 신 - Tho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천둥의 신 토르라는 영화는 내가 판단한다면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영화보다는 차라리 애니메이션에 가깝다고 본다. 왜냐하면 실재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보다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이용한 애니메이션 영상이 훨씬 압도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토르가 살았던 그 전설(傳說) 속의 장면에서는 모든 영상이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나 불굴의 의지를 가진 게이트의 수호자가 길을 열고나서는 거의 대부분이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영상이다. 단지 그 애니메이션 영상 안에 등장인물의 실사영상 촬영모습을 대입할 뿐입니다. 차라리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영화적인 요소는 토르가 지구로 와서 지구인들과 같이 활동할 때가 영화 같다고 볼 수 있다.




원작부터 만화(漫畵)라고 들었으니 실사영상보다는 애니메이션 영상이 더욱 효과가 좋지 아니한가? 게다가 이 북유럽신화를 모티브로 했었던 만큼 이 천둥의 신 토르에서는 그런 신화적인 요소를 조금 현대적으로 살렸어도 원래가 신화인 만큼 애니메이션이 어울린다.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은 Animation이란 알파벳 철자로 사용하고 여기서 Anime는 라틴어로 영혼이라는 의미를 가졌고, 정신분석학 용어로는 남성성 안의 여성성이다.




그리고 영혼은 우리 인간 눈으로 볼 수 없는 비(非)물리적인 존재이므로 이런 존재를 믿고 신앙하는 종교를 애니미즘(Animism)이라고 불린다. 가령 세계 고대민족들의 이야기나 문화를 찾아가면 이런 신화(神話)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접한 자연은 그저 위대한 신이요 정령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과거 인류들이 지닌 가치관, 인식,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들어가서 나타난 것이 바로 신화이다. 그런 신화에서 켈트족인 북유럽신화는 백인들의 과거 정신을 보이고, 과거의 신화를 오늘날의 영화로 들어냄으로 다시 신화를 현대(現代)적인 감각으로 살려낸다.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敍事哲學)”에서 나와 있듯이 모든 서사에서 기본 중의 기본은 바로 신화다.




신화는 그 민족과 나라의 공통된 무의식적인 관념이고, 그 관념은 끊임없이 오늘날까지 살아간다. 그런데 보통 신화를 연구하고 그 신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을 보면 인간의 본연적인 문제나 혹은 인생관이 보인다. 단지 이번에 내가 본 천둥의 신 토르에서 조금 의아하게 여긴 것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의 차이다.




기본적으로 신화는 나라마다 다르나 조금씩 비슷한 부분이 많다. 가령 우리나라 신화 중에서는 “콩쥐와 팥쥐”라는 신화가 있는데, 이것은 유럽의 신데렐라 신화와 비슷하며, 신화 속에서 남편으로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여성의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신화가 다시 현재로 넘어와 이른바 신데렐라 콤플렉스,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캔디”로 통해 이른바 “캔디이데올로기”까지 나온 것이다.




물론 이런 세계적으로 구술 내지 기술되어 전승되는 신화는 조금씩 살펴보면 약간 비슷한 내용이 발견된다. 그 부분은 바로 부자(父子)간의 갈등관계이다. 이 천둥의 신 토르에서도 작품 초반에 갈등으로 등장한 것이 로키가 사는 차가운 얼음나라도 되겠으나, 정작 이 작품에서 가장 토르가 중시한 문제는 아버지와의 감정이었다.




우리나라 신화와 비교하여 한국 신화에서 등장하는 남자영웅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없거나 혹은 모르거나 또는 죽은 상태로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건국신화(建國神話)의 영웅들을 고찰해 보면 대부분 아버지가 없다. 이른바 한국 신화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은 이른바 “후레자식”이라는 아비 없이 자란 건방진 녀석이란 뜻이다. 고구려의 주몽신화부터 신라, 가야국의 건국동기가 그러하다. 건국신화가 아닌 무속신화(巫俗神話)에서도 이런 면이 등장한다.




제주도의 수호신 신화로 “궤네깃또”라는 무속신화가 있다. “궤네깃또”가 부모에 의해 밖으로 내쫓긴 후에 공을 세우고 나서 제주도에 들어오려는 그 순간 “궤네깃또”의 부모들은 아들의 귀환소식을 듣고 모두 도망치다 사고로 죽는다. 그리고 “궤네깃또”는 제주도에 돌아와서 마을의 권위 있는 자로 활동하고, 죽은 뒤에 마을신으로 추모(追慕)된다.




이런 부자간의 갈등은 그리스신화인 “오이디푸스왕”처럼 아버지인 라이오스왕을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처럼 단순히 근친상간(近親相姦)적인 요소만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가져가고 싶은 권력이라는 하나의 상징을 원한 것이다. 그러나 권위(權威)를 가진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아들은 그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오직 아버지가 자신의 권위를 물려줄 경우만 한해서다.




이런 모습은 작품 초반에 확실히 보인다. 토르의 아버지인 오딘은 매우 용감한 용사였으나 한편으로 매우 신중하고 현명한 왕이었다. 로키제국을 응징 후에 거기서 로키왕국의 왕자를 거두어 자신의 2번째 왕자로 삼아 사랑으로 대해 주었다. 그가 2번째 왕자로 되어 살아오면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를 주워온 사실을 알았고, 적국의 왕자를 키워준 점에서 의아하게 여겼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보살펴준 부모님의 사랑을 잊지 않았다.




단지 그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초반에 토르가 왕위 계승의식에서 동생은 자기 형만 인정받는 것이 싫어 로키의 병사를 몰래 유입시켜 그 행사를 망쳤다. 그는 형을 사랑했지만 한편으로 형을 질투했던 것이다. 자신이 왕이 되고 싶은 이유는 자기가 오딘의 친자가 아닌 양자라는 열등의식(劣等意識)이었다.




이런 동생의 질투로 계승식은 엉망이 되었고, 토르는 그 복수심에 로키에 찾아가서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차후 위기에 몰리자 아버지 오딘에 의해 구출된다. 그 상황에서 오딘은 아들이 너무 성급한 점과 아들의 오류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빠진다며 그를 책망하여 멀리 지구로 보낸다. 지구로 온 토르를 처음 내가 본 순간 그가 이 지구의 새로운 영웅으로 될 사람인가 하고 의문을 품었다.




왜냐하면 토르가 살던 왕국에는 아버지라는 절대적인 신이 있었으나, 지구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영웅이 없었기 때문이다. 토르와 토르의 해머가 지표면에 낙하할 때 모이던 정부관계자도 로키와 전혀 상관없는 그저 정부기관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닌 하나의 변방세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르가 있다는 이유는 토르의 동생에게 하나의 두려움이며 하나의 근심거리이었다.




그래서 동생은 형을 죽이기로 하였다. 이때까지 하더라도 토르는 자기위만과 과시욕으로 충만했다. 허나 아버지의 거짓죽음 소리를 들은 후와 그 죽음이 자기의 경솔함으로 이루어진 사실, 또한 로키와의 전쟁도 자기의 경솔함을 깨닫자 그는 작품 초반에 반항적인 영웅에서 순종적인 영웅으로 변했다. 그는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동생에게 죽음을 선택받기로 한다.




그런 결심을 한 후에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치며 토르의 해머가 갑자기 움직여서 토르의 손에 들어갔다. 토르가 처음 지구에 올 때 세상 그 어떤 누구도 그 해머를 들 수 없었다. 그런 점은 해머의 주인이었던 토르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아버지의 동의가 없으면 그는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던 용감한 남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고, 자신의 잘못으로 모든 사람에게 고통이 간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고,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깨닫는다. 작품 초반 추방 전에 보이던 그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의식으로 가득했으나 이제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같이 안고 갈 수 있는 위대한 마음을 말이다. 아버지인 오딘은 자신의 후계자인 토르가 모든 것을 안고 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점은 자신들의 적인 로키까지도 말이다. 아버지 오딘은 그런 포용심으로 토르의 동생을 이때까지 길렀고, 자신의 국가에 침입자가 들어와도 로키와의 분쟁을 피해가길 바란 것이다.




사실 아버지 오딘은 2째 아들이 배신한 사실도 알았고, 2째 아들과 대화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서 자신의 방에서 영원한 꿈을 꾸어도 사실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아도 가만히 누워 기다렸다. 단지 토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말이다. 마지막 순간 토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동생과의 결투에서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동생을 대했다.




하지만 동생은 과거에 경솔하고 망나니 같은 형이 어느 순간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자기를 대하자 더 이상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음에 자책하며 머나먼 우주 미로로 사라져 간다. 대신 이 결투로 인해 세계수인 위그드라실의 한쪽 부분을 잃어버린다. 그 나무의 줄기는 오딘의 제국에서 지구 인간계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였다. 그 곳에는 토르가 떨어져 토르를 위해준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곳이다.




토르는 그 세계로 가는 줄기를 파괴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왕국 그리고 아버지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대립하여 새로운 세계로 추방되어 해머를 손에 들고 영웅으로 될 수 있었으나 그것 역시 아버지의 권위로 좌절된다. 그런 좌절을 이겨 내고 다시 돌아오나 그것은 분명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닮아가는 과정이다.




오이디푸스 가부장체계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대신하고 싶은 욕망이 있으나 아들이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면 그것을 포기하게 된다. 또한 근친상간적인 요소에서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육체적 사랑을 욕망하나, 아버지라는 존재를 인식 후에 그 아버지까지 사랑하게 되면 어머니를 닮은 여자를 찾아 결혼한다고 한다. 그 여자는 바로 지구에 남겨진 토르의 연인이었다.




물론 마지막을 보면 다리가 끊겨 갈 수 없다고 하나 문지기 수호신은 희망이 있다면 언제가 찾아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작품은 결말을 보이며 막을 내린다. 이 영화를 보니 한편의 전형적인 영웅을 보이기보다는 그 영웅이 그 기존 세계의 질서에 다시 들어갈 뿐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은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되어 질서를 만드나 여기서는 그저 멈추어 버린다.




마지막 결론을 보고 대부분 관객들은 조금 뭔가 충만한 느낌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는 과업을 시작하여 과업을 완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버지의 손 위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