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종말
폴 R. 에얼릭 & 앤 H. 에얼릭 지음, 하윤숙 옮김 / 부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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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환경공학과를 전공하여 이제 환경과 관련된 업무를 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본다면 조금 환경을 다른 부분 혹은 영역을 확대한 도서라고 말하고 싶다. 기본적으로 환경공학에서는 수질·대기·토양·생태계 등 다양한 환경 분야의 학문을 배운다. 따라서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그 순간에는 마치 처음 보는 서적이라기보다는 과거 내가 학부시절이나 혹은 환경 직종과 연계되는 기사 및 산업기사 자격증 시험을 응시할 때 보던 하나의 수업에 가까웠다.

단지 그런 환경공학과란 학문이 공학과 과학의 다양한 조합에서 이루어진 학문 체계라고 본다면 이 책은 그런 환경공학에서 배워야 하는 수질, 대기, 토양, 생태학 등에 생물학, 진화학와 같은 순수 영역의 자연과학, 그리고 철학,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윤리학 등과 같은 다양한 인문학 적인 영역이 같이 곁들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런 부분을 인지라도 하는 듯 저명한 사상가인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 맬서스와 같은 이름도 보인다.

참고로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마르크스의 도서를 읽어보았는데,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와 당시 근대화로 이어지는 공업화에서 보이는 연관관계를 다시금 이 책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또한 마르크스 도서를 읽기 전에 구조주의 인류학 및 신화학자인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미국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 <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 <작은 인간>과 같은 서적을 읽었다.

그렇게 이미 환경공학 전공분야라는 기초 위에 각종 인류학 도서, 그리고 간간히 읽던 인문서적들에서 이 책을 읽는 내 심정은 이 책이 출간되는 것은 하나의 당위성으로 보였다. 일단 나는 이 책을 보며 내가 현장에서 겪은 일 내지 혹은 방송이나 미디어에서 접한 것을 생각했다. 이 책의 제목은 <진화의 종말>인데, 그 진화의 의미가 단순히 다윈이 제시한 생물학적인 종말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적 진화에 크게 지목했다.

물론 자연적인 조건에서 문명은 변화해 왔으나, 지금의 자연은 오히려 문명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자연은 그런 영향으로 인해 그동안 받아오던 압력에 그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돌려주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준 영향은 대략적으로 예상하고 출처를 밝혀내 갈 수 있는 반면 자연은 예고 없이 나타나고 그 범위나 위력은 가늠하지 못할 정도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일단 한번 우리나라의 지독한 강우로 인해 산사태 사건을 회상했다.

나는 우면산에 위치해 있는 서울시의 시민은 아니나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 그리고 환경공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본다면 이 참사는 단순히 자연재난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연으로 인해 생긴 문제가 아니라 자연이 인간으로 생긴 문제인 것이었다. 당시 많은 토사가 산 아래로 밀려와서 인명에 대한 손상과 재산에 손실로 이어졌다. 그러나 분명 우면산 일대는 어느 정도 안전재난과 관련하여 토목설계가 구비되어 시공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건을 일어났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던 범주에서 큰 규모로 자연이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가령 서울이란 도시는 대부분 평지에 낮고 낮은 산과 구릉지로 구성된 장소다. 그런 장소에 홍수 방지를 위해 또한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한강이라는 거대한 하천이 있다. 따라서 치수체계로 보자면 서울은 산악지역이 많은 다른 한국 영토에 비해 풍수해에 안전한 지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은 가장 홍수에 취약한 도시이다.

왜냐하면 대규모의 도로와 건물들이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구성되어 물이 지면 아래로 들어갈 수 없으며, 풀과 나무가 있는 초원과 숲이 부족하여 강우수를 그대로 지면위로 들어낸다. 또한 거대한 하천인 한강으로 가는 수로 역시 제대로 구비되어도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진화의 종말>을 보고 서울 우면산 사건을 보면 그 당위성은 확실히 보인다. 그것은 이미 내가 제시한 불투수성 표면 증가에 따른 물의 유출수가 그대로 지표면에 떠도는 사실, 다른 하나는 그 물이 하천으로 유입이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체되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 이 책에서는 사회적·경제적·문화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예를 들어 빈부격차에서도 환경적인 문제가 발휘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다른 식으로 먼저 등장한 것은 식량이었으나 식량 이외에도 각종 사회적 서비스 즉 SOC(사회간접자본) 영역에서도 재해부분이 일어나는 점이다. 내가 먼저 제기한 우면산은 서울시의 비싼 부동산 물가와 거기에 동반한 낮은 토지를 찾아 개발하거나 혹은 더 높은 가격을 얻기 위해 비싼 부동산이 위치한 주변을 개발하는 것이다.

우면산의 경우는 분명히 수리학적으로 강우강도를 견딜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견디지 못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문제이다. 도시계획에서 전반적인 치수관리가 이루어지나 소규모단계에서는 보장하지 못한다. 만약 어느 장소에서 강우량이 100㎜/h로 내린다면 보통 국내 강우빈도는 30년, 50년으로 설계되어 100㎜/h 이상 내려도 무사해야 한다. 그러나 무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우수라는 것은 그렇게 100㎜/h로 설계한 곳에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설계하지 않은 곳까지 연계된다.

물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그렇다면 하류에서 방비를 철저히 해도 상류나 혹은 다른 지역의 우수가 지면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자연스레 그 물은 아래로 갈 것이다. 또한 100㎜/h이란 수치도 1시간 이내이지 3~4시간 지속되면 이른바 임계점을 넘게 되어 그 효능을 상실한다. 아마 우면산은 그런 문제로 인해 붕괴되어 토사가 유출되어 아래에 우치한 동네를 엉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다른 점을 미루어 부동산의 과잉투기는 하수관거나 혹은 우수관거 같은 인프라 시설을 투자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 <진화의 종말>에서는 사회주의는 경제적인 관계를 간과했고, 자본주의는 환경적인 부분을 간과한 것에서 경제적인 부분은 실용적이고 이익이 연결되므로 당장의 문제가 나오지 않은 이상 그대로 방치된다. 그래서 한강이나 주변 하천으로 유입될 관로가 부족하거나 있다고 해도 관로직경이 부족하거나 직경이 충분해도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우수가 밀려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진화의 종말>에서는 이런 문명의 진화 즉 자본주의경제체계의 가속화 부분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찰하고 예를 들었다. 위에서 내가 예로 들은 우면산 사건은 솔직히 말하여 서울시로 본다면 큰 자연재해이나 지구단위로 보면 아주 작고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면산 사건의 피해범위는 지구환경위기에서는 아주 사소한 사건이 때문이다. 물론 당시 피해자와 국가적인 손실이 거대하도 말이다.

<진화의 종말>에서는 단순히 일시적인 환경문제가 아니라 잠재적이고 거대한 환경문제가 나왔다. 육식의 지나친 가속화로 식량의 대부분이 사료로 들어가 전 세계 빈곤국가 국민들이 굶주려 간다던지, 제3세계의 과잉 출산으로 토양과 지하수의 오염에 그리고 각종 질병까지 등장한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인간에게 오래 살 수 있는 기회는 주었지만, 이에 반해 인구폭발이라는 문제를 발생시켜 물, 식량, 에너지 문제를 야기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 것은 거의 미지수 혹은 마이너스에 가까운 형국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나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매일 병들어간다. 내가 듣기로는 매일매일 여의도 크기의 지구 표면이 사막화되어 가고, 매일 환경오염 문제로 사람이 죽어간다. 당장 내 눈에는 비추어지지 않지만, 이런 문제는 광범위적으로 발생하여 결국 언제가 나에게 도래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문제를 제시했다. 과거 체르노빌을 비롯한 어떤 나라에서 원자력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방사능이 그 지역 주민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반경 몇 십㎞ 혹은 몇 백㎞에 서식하는 자연과 인간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지구 국지적 내지 국부적인 영향이 아니라 더 넓은 국가적 내지 세계적으로 문제를 주었다. 이 방사능은 분명 과거 소비에트 연방 지금의 러시아 인근의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이 미국 대기층에도 올라갔다.

또한 중국의 모래가 중국 내가 아니라 미국이나 서구유럽까지 번졌다. 그것은 이 책에서 양모의 수확을 위해 염소들을 대량으로 사육했는데, 문제는 그 염소들은 풀을 계속 먹고 먹어 결국 토양을 사막화했다. 다시 염소 사육을 위해 그 사막화된 토지를 떠나 다른 토지를 찾아갔으며 이것은 사막화의 가속페달이 되었다. 이것이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사실은 오로지 사막화된 부지였다. 하지만 사막은 원래로 복귀되지 않고 끊임없이 모래폭풍만 지구에게 보냈다.

우리도 봄이 오면 중국의 황사로 고통 받는다. 최근에는 중국의 대기오염이 증가되면서 각종 중금속 및 화학물질까지 달라붙는다. 환경문제는 이제 국제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대기오염 문제를 보자고 하니 이미 산성비는 인간의 식수, 인간의 식량이 양식, 자연개체의 안전까지도 위험했다. 자연계의 생존만 아니라 예전 유럽의 심각한 대기오염은 위대한 문화제까지 파손했다. 왜냐하면 최고의 조각물들이 모두 산성비에 약한 석회질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석회질이 탄산칼슘으로 되어 지면으로 흘러내리니 석상의 모습은 온전할 수 없다. 

게다가 자연계의 석회질로 구성된 새의 알과 달팽이와 조개의 집과 껍질들은 단단한 보호막이 아니라 살짝 충격을 주어도 부수어지는 젤리처럼 되었다. 산성비는 pH가 낮기 때문에 동물이 아닌 식물에게 영향을 주고, 토양을 부식시키고, 호소수의 생태계를 파괴했다. 이런 문제는 결국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영역에 레드카드를 주었다. 사실 경고의 의미인 옐로우카드를 주기에는 너무 많이 달린 것이다.

이런 문제를 보자? 우리는 자연생태계 파괴로 먼저 답답한 도시에서 새집증후군, 새차증후군, 열섬현상에 시달리지 않은가? 또한 열이 많은 도시에서 새집증후군을 일으키거나 혹은 헌집증후군을 일으키는 빌딩 안에 외부의 더위와 추위를 피해 에어컨과 히터를 킨다. 에어컨 냉방병을 주고 히터는 일산화탄소 농도를 올리게 된다. 이런 문제가 될 때까지 인간들은 너무 안이했다. 아니 관심가지기 싫어했다.

단지 자기 앞에 나타지 않으면 피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방관적 태도이다. 경제강대국과 부유층들은 자신들의 이익도모와 주변의 쾌적함을 위해 제3세계의 숲을 파괴하고 강을 도려낸다. 그 결과 대기의 열을 흡수하는 하천이 사라지고, 그 열들은 북극의 얼음을 파괴하여 해수면 상승시켰다. 숲을 파괴하니 대기의 산소농도가 감소하고 탄소증가로 기온이 올라가 다시 그런 열문제를 해결하는 대응책 상실했으니 더욱 피해가 가중된다.

결국 다시 외면하려는 인간들에게 도달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탄소배출권 문제를 다룰 때에 어느 국가는 그 안건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은 언제나 지구에너지 소모하면서 책임은 다루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자국의 문제가 터지지 않으려 하고, 터지려 한다면 주로 빈곤계층 내지 약자들에게 미룬다. 그런 행동들이 또 다시 돌고 도는 자연의 지구시스템이란 자연과 혹은 인간이 만든 문명체계가 다시 자연의 지구시스템에 의해 문제가 된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진화의 종말>이란 단어처럼 과연 지구가 종말이 오는가에서 나는 온다라고 말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 인간은 과연 진화하고 있는가에서 나는 진화보다는 퇴보가 맞다고 본다. 인간이 아닌 생태계의 동물, 식물, 미생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위급하거나 혹은 큰 문제가 생기면 모두 멸종하거나 혹은 객체 자신의 변화로 생존한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최악의 발암물질인 DDT는 어느 순간 그것을 맞아도 멸종하지 않은 해충들을 양산했다.

그것뿐이겠는가? 인간은 오래 살 수 있는 비결 중의 하나가 의학의 발달이다. 특히 인간이 태어나면서 몸에 붙는 토착미생물은 주변에 잔존하는 떠돌이미생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 인간의 피부 외에 붙어있는 많은 미생물이 인간의 면역체계에 도움은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인간의 기회감염이란 큰 악재를 준다. 예를 들어 사람이 상처나면 항생제를 투여하는데, 과거 이런 항생제 발견 이전에 세균감염으로 인한 패혈증 발병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어느 순간 페니실린이란 항생제가 나오고 그것보다 강력한 메타실린이 나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구에 많이 분포하는 황생포도상구균은 메타실린에 대해 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뛰어 넘었다. 이른바 병원감염에서 매우 심각하게 다루는 MRSA(메타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 methicillin-resistant staphylococcus aureus)라는 슈퍼 박테리아를 양성하였다.

게다가 이제는 MRSA보다 더 강력한 세균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VRSA(반코마이신 내성 황색포도상구균(vancomycin resistant staphylococcus aureus)이었다. 인간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갔으나 인간의 면역력은 감소하고 퇴화하는데 반해 오히려 미생물은 강력해지고 위협적이었다. 그나마 수질로 인해 감염되던 콜레라나 이질은 상하수도 시설개선과 확충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미생물들은 막을 수 없었다. 인간의 문화의 진화하는데 반해 자연계의 미생물처럼 자신의 내성은 잃어만 가고 있었다.

최근 나는 업무와 관련하여 사무실 동료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눈 친구는 나처럼 환경공학과를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 중의 생물학과를 나왔다. 그는 이렇게 나에게 말했다. 여자가 아이를 가지기 위해 임신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놀랬다. 예전에는 여성의 배란일과 남성의 지나친 음주만 아니면 언제든지 수정착란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남자나 여자 모두 힘들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는 여자가 아이를 낳으려면 술과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를 낳기 위해 호르몬 촉진제까지 맞는다고 한다. 그래도 아기를 못가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남자 역시 예전보다 생식능력이 떨어졌다고 한다. 내가 대학 다닐 시절에 어느 생물이 수컷이었는데, 호르몬 문제로 암컷으로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컷인자가 호르몬작용제로 결국 자기 종족의 유지까지 위기를 맞이했다. 실제로 지나친 환경오염으로 어느 생물의 성염색체 유전자인 XY에서 Y의 출현이 낮아졌다고 한다.

과거 인간은 문화적인 영향으로 아들을 가지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인류 보전 문제로 인해 아들을 가지기를 바라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물론 아직까지 국내에서 이런 염색체 문제로 크게 사회적 이슈로 오르지 않으나, 적어도 여성이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서 그것도 상당히 노력해야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계속적으로 자신들만의 문명사회를 유지하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희생한다. 가끔 보면 그것이 인간이란 자기 존재여도 말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희생을 추구하여 당장은 안락을 도모할 상황이나 계속되는 희생유도플레이는 그 유도자까지 목을 옭아맨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성을 가진 인간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그런 문제를 나는 계속 여기저기 본다. 전공이 환경이라는 것과 환경으로 경제적·사회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타협할 수밖에 없다. 자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눈에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은 존재 말이다. 하지만 가끔 환경으로 먹고 사는 입장에서 그것은 정말 힘들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연이란 존재에 타협하기에 기대되는 이득이 당장 오지 않는다는 아킬레스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그것을 놓치면 더 큰 피해가 그 이상으로 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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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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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버트 험버트..

 



그는 자신이 사랑한 아름다우면서 지저분한 롤리타의 영원한 맹아(萌芽)였다. 아니 오히려 험버트 험버트는 롤리타가 있었기에 죽는 그 순간까지 맹아로 살아갔다. 소설 롤리타는 2중 적인 구조를 가진다. 먼저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라는 러시아계 남자가 적은 글이고, 이 롤리타의 원고는 주인공 험버트의 일기를 토대로 존 레이 박사가 복원한다. 

이 작품에서 험버트는 막대한 벌을 받았다는 점과 그 벌을 받는 이유가 엄청난 죄악이 있었다는 사실과 또한 그는 자신의 죄를 모두 소화(消火)하기 전에 자신의 인생 자체가 소화(消化)해버렸다. 그렇다. 그는 지독한 알콜 중독과 심통증으로 인해 이미 자기 자신을 영원히 하려던 롤리타 곁이 아닌 쓸쓸한 쇠창살이 가득한 추운 곳에서 인생을 마감한다.

험버트는 과연 불쌍할까 아니면 당연하게 벌받은 것인가? 책 마지막까지 읽은 나로서는 이 책에서 도덕적인 교훈 따위는 아무런 가치 없다는 말을 상기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롤리타라는 소설을 그런 뻔해 보이는 정의 - 겉으로는 정의로우나 속내는 사회적 이념이란 틀에 끼워 맞추기 바쁜 속물 - 보다는 험버트의 정의로만 이루어진 책이라 보았다.

이 책에서는 처음부터 인륜의 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열정적으로 혼자 병적으로 살아간 반미치광이 광대 같은 문학가인 험버트에게 모든 열쇠를 주어진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인간의 성적욕망(性的慾望) 혹은 그 성적욕망을 뛰어넘는 이야기에 흥미로웠다. 근친상간(近親相姦)과 치정(癡情)으로 얼룩져서 모두 파멸하는 클리셰라는 패턴적인 흐름에서 극적(劇的)으로 벗어난 것에 재미를 느꼈다.

대개의 작품의 서사에는 사건의 발달되는 부분부터 시작한다. 가령 어떤 인물이 사건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모든 이야기가 보통 우리가 보는 시나리오이다. 시공간은 일치하여 흘러가도 그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과 상황은 과거에 어떤 인물과 시대적인 사건과 상황에 따라 나타난다. 가령 어느 남자가 차를 몰고 가는데, 알고 보니 그 차의 트렁크 자리에 있는 얇고 넓은 판 아래 보조 타이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 대신 마약이 있다는 것이다. 본래의 차주인은 마약거래상이었으나, 마약을 돌리기 위해 그 차를 대포차로 변용하여 숨기다가 차의 특정 부위에 표시를 하여 다시 재구매하여 마약을 빼돌리는 수법 등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것이 없다. 단지 험버트의 시간과 공간의 연속적인 역사와 기록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단지 험버트 이외의 과거는 타인이 과거다. 험버트는 오로지 지금의 험버트에게 충직했다. 그리고 충직함은 모두 우리의 영원한 히로인 혹은 영원히 닿지 못할 수 있는 롤리타인 로!, 롤라!, 롤리타! 돌로레스 이었다.

험버트는 자신이 영원히 사랑했던 돌로레스를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Q라는 유명한 성불능 극작가 죽이고, 당장 가식적 사랑에 의해 결혼한 살로트를 뒤로 한 채, 아버지의 과도한 집착은 곧 롤리타의 주변사람들과 생활까지 피곤하게 하였다. 오로지 롤리타는 험버트 안에서만 모든 것을 이루어져야 했다. 

과도한 아동성도착증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파멸로 떨어진 험버트는 왜 그럴까? 위에서 그렇게 내가 적어 놓았지만, 본래 작품의 시점은 사건을 중심이나 여기는 인물의 일기를 중심으로 간 것이다. 어린 시절 험버트는 어머니의 사랑을 실컷 받아야할 3세에 어머니가 어이 없이 돌아갔다. 그것도 벼락을 맞았다는 설정에서 말이다.

피크닉에서 벼락을 맞다니(피크닉을 비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을 때 간다는 자체가 이해가지 않는다)? 보통 맑은 날씨를 가진 하늘에 벼락 치는 일은 없으며, 설사 일기현상이 어지럽게 산란해도 벼락이란 것이 인간의 몸에 떨어질 확률은 더욱 낮다. 게다가 벤저민 프랭클린 이후 과학이 계속 발달되면서 번개가 지면으로 떨어지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피뢰침이 설립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의문이다. 나는 솔직히 인스턴트 식품인 햄버그를 먹다가 병이 들어버린 험버트의 과거에서 그의 어머니는 자연 재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재해로 죽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했고, 험버트는 뭇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미남형이다. 그렇다면 험버트 아버지 역시 미남이 아닐까? 많은 여성들이 험버트의 아버지를 에워 있었고, 그녀들은 어린 시절의 험버트를 귀족아이처럼 대해주었다.

사실 험버트를 보면 나는 이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와 느끼는 부분을 많이 넣은 것으로 보았다. 가령 그가 귀족 출신 아들이란 점, 또한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자기네 가족들이 이주를 간 것이다. 그의 이주는 곧 프랑스에서 자신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발레리나의 정부 러시아 장교를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험버트에게 거짓 사랑으로 대해준 그 프랑스의 뚱뚱하고, 험버트가 멍청하다고 생각되던 발레리나는 결국 러시아의 퇴역장교와 눈이 맞았다.

그러나 그런 작가의 울분이 있는지 2명의 정부들은 1945년 미국 어느 실험에 의해 죽게 된다.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결혼초기에 그 프랑스 발레리나의 묘사에서 험버트는 마라(프랑스의 혁명의 지도자)처럼 보았고, 그녀가 즐겨보던 신문을 거론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소비에트 혁명에 의한 자신과 자신의 가족사에 암울함을 내비춘 듯하다. 

그런 암울함을 어떻게 소설에서 묘하게 롤리타로 우리를 자극할까? 불우한 험버트 소년은 자신보다 몇 달 연상인 애너벨을 사모했다. 험버트는 어머니도 없이, 아버지는 낯선 여자에게 빠지고, 그 낯선 여자는 험버트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아량을 떤다. 가식적이고 욕망으로 가득찬 어른세계에 그는 숨을 쉬기가 짜증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있다. 애너벨 그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소년시절의 님펫이었다.

마치 울창한 숲속의 작은 공터에 자연의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아름답게 미소짓던 그 작고 귀여운 천사같은 요정 님펫! 순수함과 어설픔을 동경하던 험버트는 애너벨에게 푹 빠졌고, 그녀로 통해 성적 만족을 배운다. 그리고 그 만족은 해변에서 들리던 파도소리, 그리고 애너벨의 육체로 통해 영혼을 위로했다. 하지만 애너벨과 헤어지고, 그녀는 얼마 후 병으로 죽는다.

험버트는 오로지 암흑이었다. 그는 자신의 공허함을 메우려 했다. 10대 창부(娼婦)와 돈으로 사랑을 나누었지만, 10대 창부는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결국 험버트는 9~14세의 님펫 즉 롤리타 소녀를 찾기 위해 창부알선처로 가고 어느 낮선 집에 간다. 그러나 그 소녀는 님펫도 아니고, 님펫라고 여기지 못할 추잡했다. 그런데 이 집의 마귀할멈과 무식한 2남자는 험버트에게 돈을 내라 한다. 사실 험버트는 돈을 주기 싫었으나 15세의 뚱뚱한 소녀의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돈을 주고 가버린다. 험버트는 물론 폭력적인 2남자가 두려웠으나 더 두려운 것은 15세의 돼지 같은 추잡한 소녀의 모습이 애처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고통과 슬픔은 잠시 험버트는 미국으로 가면서 어느 조용한 마을로 간다. 거기는 흑인들이 종살이를 한다. 아마 작가는 미국이란 국가는 흑인은 하인, 운전기사, 심부름꾼 등 따위의 백인들의 수족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험버트는 1910년에 태어나 1923년 슬픈 사랑 이후 1935년의 발레리나의 합법적인 동거 그리고 1937년 마침내 자신의 있을 곳을 찾는다.

자신의 영원한 롤리타인 로, 돌로레스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12세인 롤리타에겐 크나큰 장벽이 있었다. 담배를 피면서 집요하면서 똑똑한 살로트라는 로의 어머니가 있었다. 험버트는 자신은 롤리타를 사랑했다. 하지만 롤리타와 롤리타의 어머니는 험버트에게 모든 것을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 험버트는 오로지 롤리타의 모습을 합법적으로 다가가서 어느날 몰래 성적 유희를 즐기기 위해 살로트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 결혼은 살로트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롤리타를 다가가기 위해서다. 살로트는 남편 없이 살아가는 과부다. 그녀의 어린 딸인 로는 아버지 없이 사는 소녀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기고, 남편이 생겨버린 2여자는 성적욕망이란 대립관계가 펼친다. 물론 엘렉트라 콤플렉스에서는 딸과 아버지의 사랑이 강하다. 어머니를 로에 대한 질투, 그리고 지적이면서 미남인 험버트를 차지하기 위해 로를 캠핑 보낸다.  

그리고 험버트를 차지하고 결혼하나, 결국 그의 마음은 오로지 롤리타임을 알고 낙담한다. 그런 후에 자신의 성난 기분을 참지 못해 살로트는 우체통으로 뛰어가나 우체통 옆의 아스팔트 도로가 포장작업 미완료로 자신의 발에 앞으로 넘어지고, 거기에 간사한 남자의 차에 치어 즉사한다. 평생 로에게 아닌 사랑스런 롤리타에게 아무런 희망을 찾지 못할 것만 같던 험버트에겐 큰 행운이었다.

그렇다. 험버트는 로를 데려 오기 위해 캠프장에 가고, 그녀를 태우고 계속 여행을 다니고, 잠시 정착하다가 여행을 떠난다. 처음에는 보는 것으로 냄새 맡는 것으로 살짝 스킨쉽에서 모든 만족을 느낀 남자는 이제는 로를 자신의 딸이 아닌 자신의 정부로 만들어 버린다. 이미 캠프에서 12세의 로는 처녀가 아니게 된다. 그런 로를 보며 험버트는 처녀가 아닌 처녀인 로의 그런 공간을 채우겠노라 하며 그녀를 자신의 모든 성적욕망의 천국계단으로 여겼다.

그리고 험버트는 성적욕망과 환상적인 사랑도피에서 기쁨을 느꼈지만, 그만큼이나 많은 초조함에 시달렸다. 어느 낯선 대머리 남자가 따라와 로를 유혹하고, 그 로를 어느 병원에서 데려가 마치 3류 포르노가 나올 법한 공간에서 포르노 배우처럼 행동하길 바란 것이다. 그는 유명한 극작가에 시나리오 작가인데 말이다. 하지만 로는 그것을 거부하고 도망치고 여행의 종착지인 어느 외팔이 남자의 아내로 된다. 그 아내는 성이 처음에는 헤이즈에서 험버트 이제는 리처드 실러부인으로 생을 마감한다. 

피가 이어지지 않은 부녀간의 정욕과 그 정욕에서 벗어나려던 롤리타 돌로레스는 처음에 어머니를 질투하여 의붓아버지 험버트를 얻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집착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변남자에게 시선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런 시선과 외면은 오히려 험버트에게 질투와 집착만 올릴 뿐이다. 이에 반해 롤리타 역시 험버트에게 질투를 느낀다. 험버트가 학교에 잠시 정착하여 살 때 그에게 롤리타 학교친구가 와서 서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롤리타가 보고 은근히 험버트를 무시한다.

그가 어린 님펫을 좋아해서라는 특징일까? 아니라면 자신만 보다가 다른 여자를 보고 있다는 하나가 걸리는 것일까? 물론 험버트는 중간에 돌로레스 험버트가 실러 부인으로 되면서 리카라는 정신이 산만한 여자에게 빠진다. 3번 이혼에 7번째 기사에게 버린 받은 불운의 여인에게 말이다. 로를 찾는 것에 지쳐 빠진 리카이나 그녀는 롤리타의 그늘에서 험버트를 구해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외팔이 목수와 살던 로는 자신의 삶이 가난하고 추잡해도 외팔이 옆에서 외팔이의 다른 팔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까지 임신해 버렸지 않은가? 그렇지만 로의 입에는 담배가 하얗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가 사산아(死産兒)를 낳고 죽은 이유는 아마도 그런 인과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지는 않으리.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조금 생각난 책이 있었다. 로가 비어즐리 여학교에 다닐 때 약간 의아하게 여긴 부분이 있었다. 1947년 로와 방랑을 떠난 험버트는 1년 동안 과소비를 하면서 1948년 미국 동부에 머물면서이다. 1948년이라면 미국에서는 세계 제2차 대전 이후라는 점이고, 또한 당시 미국에서는 자본주의화가 가속되었다.  

예전에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도서 “섹스와 돈”이란 서적을 보며 이때의 미국 사회상에서는 전역군인들이 많았고, 이 군인들에게 많은 전쟁후원금이 주어졌으며, 여자들의 결혼연령이 낮아졌다는 통계자료가 있었다. 여자들은 이전 기성세대와 달리 화장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잡지와 영화로 통해 데이트를 즐김으로서 대기업은 이익은, 남성은 여성을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속박을 강요하던 시대이다.

그런 모습을 비어즐리 여학교에서 보인다. 교장은 험버트에게 명랑한 소녀를 데이트하기 좋은 아이, 사교적으로 춤도 추고 노래도 하며 또한 상대방과의 대화도 잘 하기 바라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그것은 여자아이가 마치 남자에게 사랑스러운 애인으로 갖추어야 덕목을 가르치던 느낌이었다. 물론 작가는 그런 느낌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시 사회의 당연시 여김 하나의 사회적인 분위기였다. 그것을 아는 부분은 바로 로의 어머니다. 그녀는 남편 없이 담배를 그저 하나의 권위적인 모습으로 피워 문학가이면서 향수회사의 도움을 받는 험버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물론 이미 죽은 미스터 헤이즈의 경제적인 여력이 있었겠지만 말이다.

오늘날에 와서 여전히 롤리타는 끊기지 않고 입에 오르고 내리는 신화적인 도서다. 아니 그 도서에서 험버트가 열정적으로 집착하는 롤리타는 이른바 롤리타 콤플렉스, 즉 로리콘으로 변용되었다. 어린 소녀에 대한 열정적인 성인남자의 집착, 사랑, 질투, 강요 그것은 자신은 이미 더럽혀진 존재임에도 더럽히지 않은 존재에 대한 동경이고, 그 동경마저 더렵히고 싶은 충동이 어긋난 사랑으로 틀어진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영원한 롤리타는 없다. 비록 험버트의 기억 속에서는 돌로레스는 영원한 롤리타로 기억되어 심장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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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악의(惡意)라는 소설을 보면서 생각이 나는 것은 악의가 있다면 분명히 악의에 반대되는 선의(善意)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악의를 품는다는 것은 분명 그 악의의 감정을 품는 대상이 처음부터 악의를 단순히 감정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아주 나쁜 마음으로 그것도 비겁하고 치사한 마음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때 나는 순간 예전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다산 정약용은 원래 정조 시절의 매우 뛰어난 정치인이고, 사상가였으며, 철학가였으며, 또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어떻게 본다면 한국의 고전철학사에서 그 종점은 다산 정약용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다산 정약용은 정치적인 붕당정치(朋黨政治)로 인해 남인(南人)이라는 이유로 벽파(僻派)인 노론(老論)에게 심한 정치적 보복을 당한다.


그런 보복을 당하기 전에 다산의 옛날 친구가 다산을 모함하려다가 오히려 역으로 들통 나는 바람에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다산은 예전 친구가 배신했다고 해도 그를 원망하거나 책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위해서 감옥에서 방면시키도록 사방으로 알아보았다. 또한 그 친구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그의 가족생계(家族生計)를 위해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에 있으며, 또한 그런 친구는 어디 있으랴? 아마 현대에 살아가는 나로서는 이런 친구가 단 1명이라도 있다면 분명 내 인생은 성공했다고 본다.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친구는 억만금의 보화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라는 차가운 생각들은 결국 친구라는 존재 역시 이용가치로 전략해 버렸다.


이런 슬픈 현대사회의 외로운 인간 속에서 나는 이 악의라는 소설의 비극을 본 것이다. 일단 다산 정약용은 그 친구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 친구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다산을 배신했다. 그는 1800년 학자군주 정조가 붕어하게 됨에 다산을 마지막까지 내몰린 것을 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짓된 음모까지 꾸몄다. 다산은 1801년 신유사옥과 황서영백서로 인해 정치적·사회적인 권리를 모두 빼앗겨 버렸다.


물론 다산의 친구가 모든 것을 공모하고 주도한 것은 아니나 적어도 자기에게 호의를 베푼 것도 모자라 용서해준 친구에게 악랄한 행동을 한 점에서 이런 슬픈 우정의 비극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믿지 못하게 하는 최악의 불신을 낳게 한다. 그런 불운의 이름을 가진 다산처럼 이 악의라는 소설에서 불운을 가진 주인공 히다카는 그야말로 선의로 베푼 자기의 마음에 오히려 악의라는 거대한 음모에 휘말린다.


사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소설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고, 매우 치밀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던 사람이다. 그 이유는 만화와 애니메이션만 본 것이 아니라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서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서사라는 것은 결국 인간과 인간이 어느 공간적, 시간적, 역사적인 상황에 아울러 진행되는 이야기다. 그런 공간적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인간에게 던져지는 운명의 굴레에서 다양한 담론들은 서사구조를 가진 체계라면 당연히 감을 잡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사건의 해결과 관련하여 범인의 공표는 너무 이르게 나오고, 나 역시 범인이 노노구치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 이유는 노노구치가 히다카의 살인현장을 보고 난 뒤에 단순히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모니터에 비춰진 소설의 문구였다. 히다카의 소설에서 노노구치는 그의 작업속도와 분량을 잘 알았다는 점과 그리고 죽기 전의 히다카의 원고는 평소 이상으로 높아져 있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그 원고를 손질한 사람이란 것이다. 사실 판단의 기초는 조금 핀트가 벗어나 있었다. 왜냐하면 추잡한 인간을 소재로 한 “수렵 금지구역”에서 그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후지오 마사야라는 남자의 죽음에서 그녀의 동생 미야코가 오고 난 후에 노노무라는 히다카의 집에서 나간다. 그리고 나서 그 날 저녁 히다카는 죽음을 맞이한다. 히다카의 갈등이 되는 정점은 바로 후지오 마사야라는 남자이며, 히다카 옆집에 사는 고양이의 죽음과 비교하여 히다카의 죽음에 대한 인과적인 부분은 후지오 마사야라는 남자에 대한 부분이 크다고 생각했다.


또한 더 중요한 사실은 히다카 죽기 전의 작품인 얼음의 문이다. 그 작품에 대해 히다카의 팬들은 모두 기대하고 있겠지만, 히다카의 원고작업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히다카의 편집자, 아내, 그리고 친구인 노노구치이다. 노노구치가 어떻게 그토록 원고에 대하여 잘 분석하고 있었으며, 단지 원고 페이지만으로 그가 이상한 상태라는 점을 알았는가이다.


그런 내 생각에 달리 문제의 해답은 다른 방향에서 나왔다. 그것은 형사 가가의 등장에서 부터이다. 나는 사실 게이고 히가시노라는 작가를 잘 모르고, 거기에서도 가가 형상 시리즈는 더욱 더 모른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모든 서사의 흐름은 이 가가 형사의 등장에서 모든 것이 반전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가 형사가 범인을 추적하는 동안 모든 사건의 원흉은 노노구치라는 점까지 밝혔다.


물론 서사구조에서 범인의 지목은 초반부가 중반부에 가기에 너무 빨리 다가왔다. 그렇다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잡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은 범죄자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그것으로 얻는 그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것이 들통 나고 노노구치는 겉으로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인척하나 사실 그가 가장 악랄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사실 나는 이 작품에 대한 서사구조에서 보이는 플롯과 반전, 그리고 집요한 추적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이 작품을 적은 작가가 그리고 그 작가의 애정 어린 캐릭터인 가가 형사로 통해 보는 세상의 담론이라는 점이다. 사실 피해자와 가해자인 히다카와 노노구치의 경우를 본다면 어린 시절의 조금 알고 지낸 학교친구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질투라는 이름에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나, 그것은 표면에 지나지 않은 이야기다.


그 작품의 내면에서 내가 보고자 하는 사실은 왜 노노구치가 그런 인간이 되었는가이다. 노노구치는 공부도 우수하고 국문학을 매우 잘하던 수재였다. 그리고 히다카는 노노구치만큼은 아니나 나름 우수한 인재였다. 그런 2사람 사이가 왜 이리 되었나에서 나는 다산 정약용의 이름을 떠오른 것이다. 가령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매우 위대하고 아름다우면 고귀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 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자신의 책무와 의무를 버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많은 인간들은 그를 좋아하겠으나 역으로 그것을 시샘하고 혹은 배척하는 경우가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리면서 당대 명사를 찾아갔으나, 오히려 당대 명사들은 소크라테스의 언변에 자신의 어리석음 수치를 느껴야 했다.


그 덕분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지로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그리스의 시민으로서 고귀하게 죽음의 독백을 삼켰다. 과연 소크라테스는 남들에게 악을 끼칠 만큼 강한 힘을 가졌고, 사악한 행동을 공모할만큼 악랄하고 지략가였는가?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사랑했으나 그만큼 증오한 사람도 많았다는 점이다. 그런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바로 히다카의 과거이다.


그는 학교에 가장 문제가 되는 학교폭력에 저항한 사람이다. 장난을 넘어 죽음의 위기에 턱에서 그는 학교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의 소설 수렵 금지구역의 모티브가 된 남자가 어느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나체의 사진까지 찍었다. 그 후 그런 인간이었는지 후지오 마사야는 어느 창부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칼에 비명사한다. 후지오 마사야는 히다카가 중학교 다닐 무렵 가장 그를 괴롭히던 사람이다.


그런 후지오가 성폭행 문제로 전학 가버리자 히다카는 편안한 중학교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히다카가 학교를 다닐 시절에 분명 노노구치도 후지오의 전학으로 약골인 자신에게 유리한 학창시절을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노노구치는 중학교의 히다카와 편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노노구치가 히다카를 그렇게도 괴롭히던 후지오의 편에 있었다는 점이다. 노노구치는 히다카가 괴롭힘을 당해도 그저 방관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를 외면한다.


또한 정말 문제가 되었던 여학생의 성폭행 사건에서 나체의 사진에 찍힌 여학생 뒤에 어느 남자가 찍혔는데, 그것은 중학교 시절의 노노구치였다. 그는 매우 비열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런 행동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히다카가 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히다카는 노노구치를 위해 아동문학 작가에 입문하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자기에게 악랄한 짓을 한 후지오 옆에서 자신을 무시하려던 그에서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이런 느낌이다. 어느 사회적인 약자가 자신의 약함을 강자에게 내맡긴 것도 모자라서 그런 부정의한 인간으로 통해 자신에게 없는 강함을 내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노노구치는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히다카와 어울리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2사람은 어울렸으나 그런 자신의 마음속에는 히다카에 대한 열등의식(劣等意識)에 사로 잡혔다는 것이다.


열등의식에 갇혀버린 인간은 자신보다 더 나약한 인간을 찾아 우월감(優越感)으로 대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기 보다는 힘을 가진 인간에게 모인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정의가 된다. 타자를 생각하는 윤리(倫理)가 없는 정의(正義)는 곧 폭력(暴力)이다. 폭력이 정당화되고 미화되면 이른바 파시즘으로 치닫는다. 그런 문제에 대해 작가는 가가 형사로 통해 추적하고 혹은 가가 형사가 밝히고 싶지 않은 지난날의 교사생활까지 언급한 것이다.


나는 이래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이 정의로운 인간이 되기보다는 자신들이 정의롭게 되어줄 희생양을 찾는다고 말이다. 그런 희생자로 히다카가 선택되고, 그런 정의의 사도로는 노노구치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의 핵심이 해체되자 그런 행동들은 멈추었다. 인간의 이성은 과연 진리를 찾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권력을 향하는가?


악의라는 책에서 그런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비열한 면들을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보여주는 작품이다. 거기의 악의를 저지른 노노구치는 단지 그런 인간들 중에서 가장 나약하면서도 히다카의 이름을 부러워하는 인간이다. 왜 그는 그토록 히다카를 향해 집요한 행동을 했을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애증관계이다. 그는 히다카처럼 되고 싶으나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와 옆에 있으면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실망만 한다.


그것은 마치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이야기처럼 살리에르는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모차르트가 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영화에서 음모를 꾸며 모차르트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 악의에서의 노노구치는 살리에르처럼 악의를 가진 것은 분명하나 재능보다는 자신에 대한 노력은 없었다. 살리에르는 그가 만들고 보여주어도 모차르트에게 가려진 것이지 노노구치처럼 아예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대한 문학적 능력보다는 타인의 문학의 능력까지 훔쳐서 마치 떳떳하게 병으로 죽어가는 고스트라이터로서 마치 명예롭게 인생을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그런 거짓된 명예의 성취조차 가가 형사에 의해 밝혀진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 작품에서 밝혀지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 무엇이 인간이 그토록 극으로 가게 하면서도 결국 그것으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걸어도 왜 이런 일은 생기는가이다.


혹시나 누가 알고 있을까나? 허구로 조작된 고스트라이터가 아닌 많은 어둠의 갈린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게 한 빛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고스트라이터도 아니면서도 고스트라이터인 것처럼 행동하는 노노구치의 비열함이 숨어있으나 정말 세상에는 그런 빛을 보지 못하는 많은 고스트라이터가 존재하지 말란 법은 없고, 이들 역시 노노구치와 다른 진정한 악의를 표출하지 않을까라는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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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대답들
니컬러스 펀 지음, 최훈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철학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대답들 그건 역시 정말 철학적인 질문만 늘어놓은 아주 무거운 책이다. 겉으로 나는 이 책을 보았을 때 A5 사이즈에 300페이지 분량이라서 과거 그리스철학자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중세로 가면서 스피노자나 데카르트, 그리고 근대로 접어들면서 칸트, 헤겔, 니체, 마르크스 마지막으로 현대사회의 철학자들이 담론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철학에 대한 담론을 제기하나 그 담론범위가 내가 작게만 보고 상식수준보다 이상이라기보다는 거의 철학 그 근본자체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아니 진짜 철학을 한다면 혹은 철학에 대해 생각한다면 반드시 나오고 사유해볼 내용을 아주 어렵게 제시했다. 물론 도서를 만든 저자의 입장에서 어렵게 만들 생각보다는 철학이란 것이 그래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님을 관철시킴으로 오히려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다가간 것이었다.


이 책에서 그런 철학적인 근본을 알아보기 위해 3가지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나는 누구인가?”, 제2부 “나는 무엇을 아는가?”, 제3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솔직히 이제 철학이란 학문에 접한 나로서는 마치 이것은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도서를 과거 플라톤 시대부터 현대사회의 노암 촘스키까지 이어진 느낌이다.


인간이란 태어나면서 자기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마지막 역자인 최훈 선생님의 후기를 보면 총 3가지 대분류에 따라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형이상학은 처음 내가 철학이라는 학문을 접할 당시 물리, 윤리, 논리이다. 처음에 고대 철학자들은 이런 부분에서 다방면적으로 연구했다. 가령 철학자들 즉 형이상학자들은 자연과학을 연구하고, 수학을 연구하고, 의학도 연구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매우 다방면적인 학문을 연구했다.


그래도 그것은 인간의 사유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인간이 철학하는 것은 매우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윤리적으로 인간을 대해야 하고,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기 위해 물리적인 자연현상을 알아야 했다. 단지 그 시대적인 특성과 인간이 가진 기술과학의 진보차이로 인해 그런 형이상학 범주가 다르게 여긴 것이다.


이제 현대로 오면서 논리분야는 수학이라는 학문으로 인해 그리고 물리는 자연과학이란 학문으로 발달되면서 직접적인 철학이기 보다는 철학의 그 자체보다는 철학의 담론에서 넓혀주고 새롭게 밝혀주는 하나의 길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분류되고 혹은 서로의 담론을 넓혀주는데도 철학은 여전히 문제가 풀리기 보다는 문제가 다르게 제기된다.


가령 공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기술을 배우기 전에 먼저 기초과학을 배운다. 과학을 배우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만든 부분보다는 오히려 근대와 현대에서 창시된 지식을 많이 배운다. 오히려 갈릴레이가 지구가 돌아가고 있다는 말처럼 지구가 돈다는 것을 거부한 중세유럽 사회에서 당시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관을 현재의 공학자들은 부정할 것이다.


이에 반해 철학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현대나 근대부터 시작해도 중세로 넘어 고대로 넘어간다. 아니 모든 철학은 고대 그리스의 물줄기에서 시작한다. “현실 속에서 이념”이라는 것을 주장한 마르크스 역시 이에 반박되는 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념 속에서 현실”이다. 어느 반대되고 또는 변증법적으로 의견이 달라도 그것 역시 반대되어야 하는 의견이 존재해야 가능한 것이다.


철학에서 이런 서로 다른 의견 그리고 당시 사회와 문화가 지금도 다르지만, 그래도 지금에도 계속 다루고 이야기되어 철학은 뿌리를 뽑는다는 것보다는 뿌리 위의 가지를 계속 넓혀가는 것이다. 단지 맺히는 열매가 겉과 속의 맛이 다를 뿐이다. 본질은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다.


오늘날의 철학은 누구의 입에서 떠도는 하나의 일상적인 언어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막상 진지하게 철학의 의미도 철학 그 자체의 의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살짝 돌린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일반적인 사람들이 바라보는 철학이라는 것이다. 진짜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정확한 답보다는 현재 살아있는 아주 덕망 높고, 지혜로우며 누구보다 인간을 생각하는 철학자의 입에서 철학을 듣는 것이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 인간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철학자라 해도 서로간의 가치관과 의견은 다르다. 서로 다른 의견을 통해 여러 가지 관점으로 인간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책은 정말 답을 충실하게 제공하는 친절한 서적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독자 스스로 친절하지 못한 철학의 공간에서 고민해야 한다.


사실 철학은 고민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철학은 과학처럼 정확한 지식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정확하지 않은 모호한 이야기로 스스로 답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어느 문제에 대해 답을 내어주는 학문이 아니라 문제의 답을 찾아 가는 학문이다. 그러니깐 답을 내려주는 공학용 계산기가 아니라 그 문제의 답인 원인인 발달을 찾는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책은 1번 보고 2번 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그 이상의 책읽기를 시도해도 쉽지 않다. 사실 나는 철학이나 사상에 깊이 들어가지 않았으나 적어도 문화상대주의적인 관점을 지닌다. 인간이 살아가고 다른 인간과 공유점이 되어 생활양식으로 나타나는 그 문화라는 공간은 매우 크고 작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때로는 전혀 상반되고 대립되는 형태까지 보인다.


그런 문화라는 공간에서 인간은 모두 다르게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간다. 그래서 어느 일정한 기준에 따라 인간을 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철학은 그 다양함 속에서도 진리라는 단어를 찾아내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그 진리로 100% 맞다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또한 그렇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그런 문제로 철학은 시작부터 시작하여 인류가 망하는 그 순간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굴레의 속박이다. 하지만 그 굴레의 숙박이 없다면 오히려 인간이 더욱 큰 고뇌에 부딪히거나 또는 무절제하고 아수라와 같은 세계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철학이란 굴레의 속박이 인간이 가진 오랜 고민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그 질문 자체에 대해 듣는 철학자 답이 모두 맞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단지 맞다 틀렸다고 하기에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옳지 않은지? 혹은 그런 선택에서 그것 자체가 옳은지 아니면 옳지 않은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철학은 답이 없는 학문이다. 답이 있다면 이미 인간은 철학적 사유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서 죽어야 하며, 자기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 소통해야 한다. 또한 인간은 인간의 소통에서 인간 아닌 존재에서도 사유를 요구하게 된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런 사유적으로 살아가야 할 인간에게 답을 준다고 하지 않으나 어떤 사유가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책을 읽고 계속 고민하여 르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처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되지 않을까 한다. 대신 조심할 점은 데카르트가 제시한 합리적인 이원화에 빠지면 안되는다는 것이다. 너무 이원화적인 사고에 빠지면 자기모순과 편견에 철학적인 인간이기 보다는 철학만 말하는 인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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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위화 지음, 조성웅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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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전율편
전율 편은 보는 나의 입장에선 뭐라고 할까나? 그냥 이제 나이가 43세에 들어선 남자와 그 남자보다 7살 어린 여자가 오랜만에 만나서 둘이 회상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모든 이야기의 결말을 보인다. 한때 엄청난 인기를 받고 모든 여자에게 선망의 대상이던 시인인 자우린은 이제 과거의 영광은 커녕 현재의 암울한 삶에 살아간다. 

첫 장부터 책을 잡지 않았다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비롯한 철학도서와 각종 문학도서를 집어 들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우연히 잡은 책에 종이쪽지가 나온다. 아주 오래 전에 보낸 쪽지인데, 거긴 마란이란 여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그 여자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고 다시 편지고 오고 둘은 다시 만나기로 한다.

이때 그의 갇혀있던 자신의 삶에서 밖으로 나간다. 귤이 먹고 싶은데 귤을 집어들 때 그는 귤이 얼마인지 몰랐다. 게다가 귤장수는 그에게 귤값을 내놓기 보다는 귤 하나를 주고 나가라고 한다. 그의 입장은 화려한 과거와 달리 참혹한 인생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겉은 비루하고 가난한 시인이었다.

그가 그런 몰골로 마란과 만나 과거를 회상한다. 둘은 주로 귤장수에게 귤을 얻어먹은 비참한 그는 마란과의 이야기에 꿈 같은 청춘을 맛본다. 잘생긴 외모와 화려한 말투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많은 여자들, 자우린은 과거에 많은 여자와 연애를 즐겼다. 자기 침대에서 혹은 상대의 침대나 다른 장소들 그리고 다양한 여자를 만나고 나서 마란과의 만남도 있었지만, 당시 마란에게 자우린은 눈길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하지만 영원한 화려함은 없다. 자우린은 어느 순간 여자들에게 인기 없는 남자였고, 그래도 자우린은 여전히 여자에게 손을 대려 했다. 그러는 동안 그렇게 작업을 계속 거는 와중에 그 자리에 마란은 있었다. 하지만 자우린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자우린의 사랑을 원했으나 자우린의 무관심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예전의 아름답던 청춘을 대신해 중년의 여자로서 그를 접한 것이다.

자우린은 솔직히 말해 타고난 작업남이었다. 흔히 여자에게 음흉한 작업을 거는 남자들은 대놓고 원하기 보다는 말을 돌려 말한다. 그렇게 언제나 여자에게 “너만은 특별해, 너니깐 이렇게 마음이 아픈거야” 라는 미사어구들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란 말처럼 시인의 입에서 나온 시의 언어는 청자로서 활동하는 여자에게 당연히 개연적으로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모든 여자들이 그의 포로로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포로로 되는 것은 그의 모습이 화려한 공작새와 같을 때다. 나이가 40대인 자우린 그것도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에겐 더 이상의 매력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30대의 마란도 마찬가지다. 중년의 여인답게 몸이 둔해짐을 나타남은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가길 바란 것이다. 그런 2사람의 과거사냥 다운 모습으로 침대 위에 놓인 외투에서 교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자우린의 외투 한쪽 팔이 마란의 어깨를 은근스레 건들고 있었다. 자우린이 직접적으로 야한 작업을 걸지 않았으나 그것이 하나의 제스쳐가 된 것이다. 그리고 2사람은 아주 열정적인 육체적인 관계에서 서로간의 과거를 되돌아가려 한다. 이때 그녀가 자우린에게 원한 것은 자우린의 얼굴표정이었다. 과연 자우린은 어떤 얼굴을 짓고 있는가?

자우린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쾌락이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자우린이 마란이란 여자에게 과연 전율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과거 잊혀진 얼굴로 기억된 자신에게 육체적인 관계로 통해 전율을 느껴 잃어버린 지난 시절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또한 자우린은 모든 과거로부터 멀어진 자신에게 과거로 가는 길을 가고 있었다. 2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탐닉하면 과거의 욕망을 채워간 것이다.


2편 우연한 사건  

이 사건은 어느 카페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토대로 장퍄오와 천허의 편지를 왕래한 이야기다. 살인사건의 발단은 어떤 조용히 휴식을 취하던 남자가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어떤 불안한 시선을 가진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의 가슴에 칼을 꼽고 나서 경찰을 부른 것이다. 살인의 동기는 알 수 없이 말이다. 

그날 현장에 있던 장퍄오와 천허는 경찰의 심문에 의해 신분증을 맡겼는데, 그것이 서로 엇갈리게 가버렸다. 그래서 편지를 주고 받는데, 그 내용은 살인사건에 대한 내용이었다. 천허는 그 사건의 희생자가 여자에게 바람을 피게 만들어 죄는 받은 것이고, 장퍄오는 그것은 처음부터 여자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일 수 있고, 또한 천허의 일방적인 추론을 일일이 비판적으로 사고하여 답변한다.

그러는 와중에 장퍄오는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여자를 품에 안고 성적희롱을 즐겼다. 또한 그런 여자 이외에도 다른 여자도 말이다. 장퍄오는 전형적인 바람둥이었다. 하지만 천허처럼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성적인 사고로 통해 천허하고 편지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장퍄오가 만난 여자이야기와 그 편지 내용과 일치해 가는 부분이다.

그리고 살인과정과 동기 그리고 차후 처리까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이 편지를 보낸 천허가 장퍄오가 만나는 여자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2사람은 만났고, 둘이 처음 살인을 목격한 카페에서 그 때 듣던 “당신은 왜 나를 쫓지 않은가”란 노래가 나오자 장퍄오의 가슴에는 칼이 꽂혀 버린다. 

솔직히 이 작품은 어느 결백증적인 남편이 자신의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고 그 의심이 되던 남자에게 의도적으로 다가가서 그런 부정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서 자신 역시 그런 살인범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결국 천허는 자신의 살인동기와 살인목적을 그렇게 찾은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앞의 살인은 치밀하지 않은 계획이라면 후자는 매우 치밀한 계획이었다. 자신이 죽일 남자에게 그 살인의 과정을 토론한 장퍄오는 참으로 허무하게 칼에 맞아 죽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 대해 크게 논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작품의 결말이 너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너무 내가 판단하던 결착으로 가게 되어 그런 여흥이 많지 않은 작품이었다.


3편 여자의 승리

이 작품은 여자의 사랑이 어떻게 질투로 변하고 어떻게 승화되는가이다. 린홍이란 여자는 평범한 주부로 남편인 리한린과 결혼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어느날 린홍은 리한린의 서랍에서 칭칭이라 하는 여자사진과 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결혼생활은 위기에 닥친다. 리한린의 여자에게 린홍은 순간 열등감에 사로 잡힌다.

그녀의 강박관념은 자신과 리한린의 주변 사람에게 전화하여 이것을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그 중에 아주 예전에 린홍에게 관심있던 남자에게 전화하자 그는 린홍에게 최대한 남편을 절벽에 몰게 하라고 한다. 그리고 린홍은 그렇게 따르고 처음에 자신의 외도를 누설당한 것을 생각지 못한 남편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칭칭의 사진을 보자 남편은 당황하고, 남편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매우 조용한 집안살이를 시작했다. 같이 자던 침대에서 나가고, 쇼파에서 눈치보면서 책보고 게다가 TV조차 못본다. 그러나 린홍은 그런 자중하는 태도의 리한린을 꽤씸하게 여긴다. 린홍은 남편이 자기에게 아주 열렬히 사과하고 잘못을 토하고 아니라면 격정적으로 대하길 바랬다. 하지만 오히려 리한린은 보통 남자처럼 아내를 배려하는 척으로 잘못을 인정하려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린홍에게 감정의 폭발로 이어진다. 이 장면을 보니 나도 과거의 내가 생각난다. 나 역시 그렇게 크게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나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이 상대편에게 큰 화를 부른 것이다. 오히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냄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최악으로 치닫게 되자 2사람은 이혼을 하러 관공서로 간다. 이때 마지막으로 카페에서 서로 커피와 사이다를 마시려 한다. 과거 2사람은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커피와 사이다를 마시면서 행복의 미래를 기대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얼굴조차 마주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린홍은 사이다를 마시다 다른 자리에 어디서 많이 본 여자 얼굴을 마주친다.

그 여자는 린홍의 라이벌인 칭칭이었다. 칭칭이 있자 남편도 놀랐으나 아내의 행동은 더욱 놀랐다. 린홍은 남편에게 대낮의 카페에서 자신에게 안아달라고 한다. 남편은 그렇게 하고 린홍은 남편을 더욱 강하게 안고 남편을 몸을 감싸고, 그녀의 혀를 남편의 입안으로 다가가서 남자의 미각을 황홀경으로 이끌어낸다. 그리고 마치 보란 듯이 칭칭이를 노려본다. 칭칭이는 보다 못해 나가버리고, 린홍은 이혼대신 집으로 가자고 한다. 그녀는 칭칭이를 두고 남편에게 자기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만약 이혼한다면 칭칭이에게 가라고 말이다. 

남편은 자신은 칭칭이에게 가도 할 수 없음을 알기에 다른 사람이 눈치에도 아내의 유혹을 따랐다. 결국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칭칭이에게서 모두 가져간 셈이다. 아내의 사랑이 질투로 변하고 질투는 투쟁으로 변하여 결국 사랑으로 돌아왔다. 결국 질투는 여자의 힘이란 것일까?


4편 무더운 여름

무더운 여름은 여자의 가식을 두고 서로 허풍을 떤다. 결국 2여자는 친구사이이나 알고 보면 경쟁자였다. 그녀들은 아주 착하고 성실한 리치강이란 남자를 두고 서로간의 허풍을 다툰다. 서로 리치강이 자기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자기에게 호감을 보인다고, 또한 리치강이 문화국에서 일하면서 인기가수 홍화의 공연에 관계되자 2여자는 리치강에게 서로 티켓을 달라고 한다.

리치강이란 남자는 아주 착하고 좋은 남자이지만, 나쁜 여자에게는 그저 단순하고 이기적인 희생양이 되는 남자였다. 50위안짜리 홍화공연 티켓을 2여자에게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녀들과 헤어진다.

2여자는 서로 리치강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고, 또한 리치강이 홍화와의 스캔들을 이야기했다. 그런 와중에 홍화의 애인으로 여기던 리치강은 어느 순간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어느날 2여자 중의 리핑은 그 2여자 중의 원홍과 이야기하다가 리핑이 남자친구가 생기고, 그와 데이트하러 간다고 하는 것이다.

리핑은 그가 누군지 알려달라고 하나 당장은 아니나 나중에 보여준다고 한다. 결국 그 남자는 리치강이었다. 그러나 그가 오기 전에 리핑은 거짓으로 인기가수 홍화가 리치강과 스캔들이 있고, 마치 자기에게만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원홍 역시 되받아치기 했다. 하지만 결국 팔짱을 끼던 리핑과 리치강에서 원홍의 거짓말은 탄로났다. 서로 리치강에게 관심있었지만 마치 서로 없는 것처럼 말하다가 결국 리핑이 선수친 것이다. 내숭적인 2여자 사이에서 리치강은 그저 내숭싸움의 승자에게 자신의 한쪽 팔을 내어주게 된 것이다.

처음에 2여자가 말하듯 남자를 사귀면 그 남자가 밥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주고, 데이트 비용도 내어주는 어장 같은 남자를 바랐다. 그런 점에서 리핑은 승리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본다면 리치강은 승리자의 노예가 된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에서 여자의 승리는 유혹의 여신에게 돌아간 것인가? 그런 것을 증명하듯 원홍은 흥하면서 리핑과 리치강이 가는 길 반대로 가고 있다.


5편 다리에서

자기보다 1살 어린 25살 트럭운전사는 자신의 아내가 임신여부를 끝없이 물어본다. 그는 아내가 임신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아이를 가지면 당장에 집안 가정생활이 어렵다는 이유다. 그래서 매일처럼 아내의 임신여부를 묻는다. 여성은 제2차 성징기가 오면 월경을 시작한다.

그래서 임신하게 된다면 월경이 중단되니 월경이 된다면 임신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처음에 아들을 가지고 싶다는 트럭운전수의 소망과 달리 이제는 왠 불임사실을 기뻐한다는 말인가? 남편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 아이를 가지면 돈을 벌지 못하거나 혹은 보모를 사용해서 돈이 많이 들어간다던지 혹은 아이를 일찍 가지면 50대에 할아버지 할머니로 돼서 그게 좋냐고 말이다.

그런 우려를 역시 잘 해결되었는지 아내는 결국 월경을 했고, 그 월경은 남편에게 반가운 친구로 다가왔다. 이에 아내는 힘든 과정을 극복한 후에 자신에게 그저 편안한 일상과 작은 남편의 상이 있기를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의 입에서는 나온 차가운 말은 이혼이었다. 남편은 이혼을 하기 위해서 아이가 없어야 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그 다리에서 사라지는 남편을 보며 아내를 절망해야 했다. 결국 여자는 무엇을 위해 결혼하였다는 말인가?


6편 그들의 아들

이 작품은 어렵게 힘들게 살아가는 노부부가 아들 하나를 두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노부부는 힘들게 공장에서 일하고 집에 갈 때는 만원버스를 타고 가며, 오늘 아들이 오기로 한 날에 일찍 가기로 했으나 버스 안의 사람들의 밀침에 혹은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의 방해로 일찍 집에 못가게 된다.

게다가 버스에서 떨어져 둘 다 심한 멍과 상처를 입는다. 그래 힘들게 일하면서 한 달 월급이 600위안도 되지 않으나 이에 반해 아들에게 한 달 300위안을 보낸다. 이런 부모의 고생에 아랑 곳 없이 아들은 그저 TV 보면서 음악을 듣는다. 게다가 오늘 집에 올 때 아들은 버스 대신 택시를 타고 온다. 버스는 사람 많고 비위생적이라 병에 걸릴 것 같고 토할 것 같다고 말이다.

처음에 아들의 행동에 분개한 부모는 아들의 말에 이제는 오히려 동조한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자신들은 버스를 타는데, 아들에겐 버스를 타지 말라니. 이게 어찌 보면 중국의 현대 젊은 사람들의 인식이다. 부모의 고생은 관심 없이 자신의 이익이나 관심을 최고로 하고 또래 아이들의 눈치만 보는 것이 말이다. 

그것은 한국에서 마찬가지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보다는 누가 어떻게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고 뒤쳐져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 한심한 태도에 부모는 고치기보다는 오히려 동조한다. 힘들게 일하면서 그래 키워서 무슨 소용인가? 이제 어머니는 4년 이후에는 돈을 벌 수 없다고 한다. 대신 아들은 퇴직금을 받으면 된다고 한다. 빵이 없으면 고기 먹으라고 하는 어느 어리석은 임금처럼 말한다. 그건 결국 현대사회의 젊은이들의 허영심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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