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험버트 험버트..

 



그는 자신이 사랑한 아름다우면서 지저분한 롤리타의 영원한 맹아(萌芽)였다. 아니 오히려 험버트 험버트는 롤리타가 있었기에 죽는 그 순간까지 맹아로 살아갔다. 소설 롤리타는 2중 적인 구조를 가진다. 먼저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라는 러시아계 남자가 적은 글이고, 이 롤리타의 원고는 주인공 험버트의 일기를 토대로 존 레이 박사가 복원한다. 

이 작품에서 험버트는 막대한 벌을 받았다는 점과 그 벌을 받는 이유가 엄청난 죄악이 있었다는 사실과 또한 그는 자신의 죄를 모두 소화(消火)하기 전에 자신의 인생 자체가 소화(消化)해버렸다. 그렇다. 그는 지독한 알콜 중독과 심통증으로 인해 이미 자기 자신을 영원히 하려던 롤리타 곁이 아닌 쓸쓸한 쇠창살이 가득한 추운 곳에서 인생을 마감한다.

험버트는 과연 불쌍할까 아니면 당연하게 벌받은 것인가? 책 마지막까지 읽은 나로서는 이 책에서 도덕적인 교훈 따위는 아무런 가치 없다는 말을 상기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롤리타라는 소설을 그런 뻔해 보이는 정의 - 겉으로는 정의로우나 속내는 사회적 이념이란 틀에 끼워 맞추기 바쁜 속물 - 보다는 험버트의 정의로만 이루어진 책이라 보았다.

이 책에서는 처음부터 인륜의 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열정적으로 혼자 병적으로 살아간 반미치광이 광대 같은 문학가인 험버트에게 모든 열쇠를 주어진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인간의 성적욕망(性的慾望) 혹은 그 성적욕망을 뛰어넘는 이야기에 흥미로웠다. 근친상간(近親相姦)과 치정(癡情)으로 얼룩져서 모두 파멸하는 클리셰라는 패턴적인 흐름에서 극적(劇的)으로 벗어난 것에 재미를 느꼈다.

대개의 작품의 서사에는 사건의 발달되는 부분부터 시작한다. 가령 어떤 인물이 사건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모든 이야기가 보통 우리가 보는 시나리오이다. 시공간은 일치하여 흘러가도 그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과 상황은 과거에 어떤 인물과 시대적인 사건과 상황에 따라 나타난다. 가령 어느 남자가 차를 몰고 가는데, 알고 보니 그 차의 트렁크 자리에 있는 얇고 넓은 판 아래 보조 타이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 대신 마약이 있다는 것이다. 본래의 차주인은 마약거래상이었으나, 마약을 돌리기 위해 그 차를 대포차로 변용하여 숨기다가 차의 특정 부위에 표시를 하여 다시 재구매하여 마약을 빼돌리는 수법 등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것이 없다. 단지 험버트의 시간과 공간의 연속적인 역사와 기록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단지 험버트 이외의 과거는 타인이 과거다. 험버트는 오로지 지금의 험버트에게 충직했다. 그리고 충직함은 모두 우리의 영원한 히로인 혹은 영원히 닿지 못할 수 있는 롤리타인 로!, 롤라!, 롤리타! 돌로레스 이었다.

험버트는 자신이 영원히 사랑했던 돌로레스를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Q라는 유명한 성불능 극작가 죽이고, 당장 가식적 사랑에 의해 결혼한 살로트를 뒤로 한 채, 아버지의 과도한 집착은 곧 롤리타의 주변사람들과 생활까지 피곤하게 하였다. 오로지 롤리타는 험버트 안에서만 모든 것을 이루어져야 했다. 

과도한 아동성도착증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파멸로 떨어진 험버트는 왜 그럴까? 위에서 그렇게 내가 적어 놓았지만, 본래 작품의 시점은 사건을 중심이나 여기는 인물의 일기를 중심으로 간 것이다. 어린 시절 험버트는 어머니의 사랑을 실컷 받아야할 3세에 어머니가 어이 없이 돌아갔다. 그것도 벼락을 맞았다는 설정에서 말이다.

피크닉에서 벼락을 맞다니(피크닉을 비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을 때 간다는 자체가 이해가지 않는다)? 보통 맑은 날씨를 가진 하늘에 벼락 치는 일은 없으며, 설사 일기현상이 어지럽게 산란해도 벼락이란 것이 인간의 몸에 떨어질 확률은 더욱 낮다. 게다가 벤저민 프랭클린 이후 과학이 계속 발달되면서 번개가 지면으로 떨어지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피뢰침이 설립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의문이다. 나는 솔직히 인스턴트 식품인 햄버그를 먹다가 병이 들어버린 험버트의 과거에서 그의 어머니는 자연 재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재해로 죽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했고, 험버트는 뭇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미남형이다. 그렇다면 험버트 아버지 역시 미남이 아닐까? 많은 여성들이 험버트의 아버지를 에워 있었고, 그녀들은 어린 시절의 험버트를 귀족아이처럼 대해주었다.

사실 험버트를 보면 나는 이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와 느끼는 부분을 많이 넣은 것으로 보았다. 가령 그가 귀족 출신 아들이란 점, 또한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자기네 가족들이 이주를 간 것이다. 그의 이주는 곧 프랑스에서 자신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발레리나의 정부 러시아 장교를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험버트에게 거짓 사랑으로 대해준 그 프랑스의 뚱뚱하고, 험버트가 멍청하다고 생각되던 발레리나는 결국 러시아의 퇴역장교와 눈이 맞았다.

그러나 그런 작가의 울분이 있는지 2명의 정부들은 1945년 미국 어느 실험에 의해 죽게 된다.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결혼초기에 그 프랑스 발레리나의 묘사에서 험버트는 마라(프랑스의 혁명의 지도자)처럼 보았고, 그녀가 즐겨보던 신문을 거론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소비에트 혁명에 의한 자신과 자신의 가족사에 암울함을 내비춘 듯하다. 

그런 암울함을 어떻게 소설에서 묘하게 롤리타로 우리를 자극할까? 불우한 험버트 소년은 자신보다 몇 달 연상인 애너벨을 사모했다. 험버트는 어머니도 없이, 아버지는 낯선 여자에게 빠지고, 그 낯선 여자는 험버트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아량을 떤다. 가식적이고 욕망으로 가득찬 어른세계에 그는 숨을 쉬기가 짜증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있다. 애너벨 그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소년시절의 님펫이었다.

마치 울창한 숲속의 작은 공터에 자연의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아름답게 미소짓던 그 작고 귀여운 천사같은 요정 님펫! 순수함과 어설픔을 동경하던 험버트는 애너벨에게 푹 빠졌고, 그녀로 통해 성적 만족을 배운다. 그리고 그 만족은 해변에서 들리던 파도소리, 그리고 애너벨의 육체로 통해 영혼을 위로했다. 하지만 애너벨과 헤어지고, 그녀는 얼마 후 병으로 죽는다.

험버트는 오로지 암흑이었다. 그는 자신의 공허함을 메우려 했다. 10대 창부(娼婦)와 돈으로 사랑을 나누었지만, 10대 창부는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결국 험버트는 9~14세의 님펫 즉 롤리타 소녀를 찾기 위해 창부알선처로 가고 어느 낮선 집에 간다. 그러나 그 소녀는 님펫도 아니고, 님펫라고 여기지 못할 추잡했다. 그런데 이 집의 마귀할멈과 무식한 2남자는 험버트에게 돈을 내라 한다. 사실 험버트는 돈을 주기 싫었으나 15세의 뚱뚱한 소녀의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돈을 주고 가버린다. 험버트는 물론 폭력적인 2남자가 두려웠으나 더 두려운 것은 15세의 돼지 같은 추잡한 소녀의 모습이 애처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고통과 슬픔은 잠시 험버트는 미국으로 가면서 어느 조용한 마을로 간다. 거기는 흑인들이 종살이를 한다. 아마 작가는 미국이란 국가는 흑인은 하인, 운전기사, 심부름꾼 등 따위의 백인들의 수족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험버트는 1910년에 태어나 1923년 슬픈 사랑 이후 1935년의 발레리나의 합법적인 동거 그리고 1937년 마침내 자신의 있을 곳을 찾는다.

자신의 영원한 롤리타인 로, 돌로레스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12세인 롤리타에겐 크나큰 장벽이 있었다. 담배를 피면서 집요하면서 똑똑한 살로트라는 로의 어머니가 있었다. 험버트는 자신은 롤리타를 사랑했다. 하지만 롤리타와 롤리타의 어머니는 험버트에게 모든 것을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 험버트는 오로지 롤리타의 모습을 합법적으로 다가가서 어느날 몰래 성적 유희를 즐기기 위해 살로트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 결혼은 살로트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롤리타를 다가가기 위해서다. 살로트는 남편 없이 살아가는 과부다. 그녀의 어린 딸인 로는 아버지 없이 사는 소녀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기고, 남편이 생겨버린 2여자는 성적욕망이란 대립관계가 펼친다. 물론 엘렉트라 콤플렉스에서는 딸과 아버지의 사랑이 강하다. 어머니를 로에 대한 질투, 그리고 지적이면서 미남인 험버트를 차지하기 위해 로를 캠핑 보낸다.  

그리고 험버트를 차지하고 결혼하나, 결국 그의 마음은 오로지 롤리타임을 알고 낙담한다. 그런 후에 자신의 성난 기분을 참지 못해 살로트는 우체통으로 뛰어가나 우체통 옆의 아스팔트 도로가 포장작업 미완료로 자신의 발에 앞으로 넘어지고, 거기에 간사한 남자의 차에 치어 즉사한다. 평생 로에게 아닌 사랑스런 롤리타에게 아무런 희망을 찾지 못할 것만 같던 험버트에겐 큰 행운이었다.

그렇다. 험버트는 로를 데려 오기 위해 캠프장에 가고, 그녀를 태우고 계속 여행을 다니고, 잠시 정착하다가 여행을 떠난다. 처음에는 보는 것으로 냄새 맡는 것으로 살짝 스킨쉽에서 모든 만족을 느낀 남자는 이제는 로를 자신의 딸이 아닌 자신의 정부로 만들어 버린다. 이미 캠프에서 12세의 로는 처녀가 아니게 된다. 그런 로를 보며 험버트는 처녀가 아닌 처녀인 로의 그런 공간을 채우겠노라 하며 그녀를 자신의 모든 성적욕망의 천국계단으로 여겼다.

그리고 험버트는 성적욕망과 환상적인 사랑도피에서 기쁨을 느꼈지만, 그만큼이나 많은 초조함에 시달렸다. 어느 낯선 대머리 남자가 따라와 로를 유혹하고, 그 로를 어느 병원에서 데려가 마치 3류 포르노가 나올 법한 공간에서 포르노 배우처럼 행동하길 바란 것이다. 그는 유명한 극작가에 시나리오 작가인데 말이다. 하지만 로는 그것을 거부하고 도망치고 여행의 종착지인 어느 외팔이 남자의 아내로 된다. 그 아내는 성이 처음에는 헤이즈에서 험버트 이제는 리처드 실러부인으로 생을 마감한다. 

피가 이어지지 않은 부녀간의 정욕과 그 정욕에서 벗어나려던 롤리타 돌로레스는 처음에 어머니를 질투하여 의붓아버지 험버트를 얻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집착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변남자에게 시선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런 시선과 외면은 오히려 험버트에게 질투와 집착만 올릴 뿐이다. 이에 반해 롤리타 역시 험버트에게 질투를 느낀다. 험버트가 학교에 잠시 정착하여 살 때 그에게 롤리타 학교친구가 와서 서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롤리타가 보고 은근히 험버트를 무시한다.

그가 어린 님펫을 좋아해서라는 특징일까? 아니라면 자신만 보다가 다른 여자를 보고 있다는 하나가 걸리는 것일까? 물론 험버트는 중간에 돌로레스 험버트가 실러 부인으로 되면서 리카라는 정신이 산만한 여자에게 빠진다. 3번 이혼에 7번째 기사에게 버린 받은 불운의 여인에게 말이다. 로를 찾는 것에 지쳐 빠진 리카이나 그녀는 롤리타의 그늘에서 험버트를 구해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외팔이 목수와 살던 로는 자신의 삶이 가난하고 추잡해도 외팔이 옆에서 외팔이의 다른 팔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까지 임신해 버렸지 않은가? 그렇지만 로의 입에는 담배가 하얗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가 사산아(死産兒)를 낳고 죽은 이유는 아마도 그런 인과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지는 않으리.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조금 생각난 책이 있었다. 로가 비어즐리 여학교에 다닐 때 약간 의아하게 여긴 부분이 있었다. 1947년 로와 방랑을 떠난 험버트는 1년 동안 과소비를 하면서 1948년 미국 동부에 머물면서이다. 1948년이라면 미국에서는 세계 제2차 대전 이후라는 점이고, 또한 당시 미국에서는 자본주의화가 가속되었다.  

예전에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도서 “섹스와 돈”이란 서적을 보며 이때의 미국 사회상에서는 전역군인들이 많았고, 이 군인들에게 많은 전쟁후원금이 주어졌으며, 여자들의 결혼연령이 낮아졌다는 통계자료가 있었다. 여자들은 이전 기성세대와 달리 화장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잡지와 영화로 통해 데이트를 즐김으로서 대기업은 이익은, 남성은 여성을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속박을 강요하던 시대이다.

그런 모습을 비어즐리 여학교에서 보인다. 교장은 험버트에게 명랑한 소녀를 데이트하기 좋은 아이, 사교적으로 춤도 추고 노래도 하며 또한 상대방과의 대화도 잘 하기 바라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그것은 여자아이가 마치 남자에게 사랑스러운 애인으로 갖추어야 덕목을 가르치던 느낌이었다. 물론 작가는 그런 느낌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시 사회의 당연시 여김 하나의 사회적인 분위기였다. 그것을 아는 부분은 바로 로의 어머니다. 그녀는 남편 없이 담배를 그저 하나의 권위적인 모습으로 피워 문학가이면서 향수회사의 도움을 받는 험버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물론 이미 죽은 미스터 헤이즈의 경제적인 여력이 있었겠지만 말이다.

오늘날에 와서 여전히 롤리타는 끊기지 않고 입에 오르고 내리는 신화적인 도서다. 아니 그 도서에서 험버트가 열정적으로 집착하는 롤리타는 이른바 롤리타 콤플렉스, 즉 로리콘으로 변용되었다. 어린 소녀에 대한 열정적인 성인남자의 집착, 사랑, 질투, 강요 그것은 자신은 이미 더럽혀진 존재임에도 더럽히지 않은 존재에 대한 동경이고, 그 동경마저 더렵히고 싶은 충동이 어긋난 사랑으로 틀어진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영원한 롤리타는 없다. 비록 험버트의 기억 속에서는 돌로레스는 영원한 롤리타로 기억되어 심장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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