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악의(惡意)라는 소설을 보면서 생각이 나는 것은 악의가 있다면 분명히 악의에 반대되는 선의(善意)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악의를 품는다는 것은 분명 그 악의의 감정을 품는 대상이 처음부터 악의를 단순히 감정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아주 나쁜 마음으로 그것도 비겁하고 치사한 마음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때 나는 순간 예전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다산 정약용은 원래 정조 시절의 매우 뛰어난 정치인이고, 사상가였으며, 철학가였으며, 또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어떻게 본다면 한국의 고전철학사에서 그 종점은 다산 정약용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다산 정약용은 정치적인 붕당정치(朋黨政治)로 인해 남인(南人)이라는 이유로 벽파(僻派)인 노론(老論)에게 심한 정치적 보복을 당한다.


그런 보복을 당하기 전에 다산의 옛날 친구가 다산을 모함하려다가 오히려 역으로 들통 나는 바람에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다산은 예전 친구가 배신했다고 해도 그를 원망하거나 책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위해서 감옥에서 방면시키도록 사방으로 알아보았다. 또한 그 친구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그의 가족생계(家族生計)를 위해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에 있으며, 또한 그런 친구는 어디 있으랴? 아마 현대에 살아가는 나로서는 이런 친구가 단 1명이라도 있다면 분명 내 인생은 성공했다고 본다.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친구는 억만금의 보화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라는 차가운 생각들은 결국 친구라는 존재 역시 이용가치로 전략해 버렸다.


이런 슬픈 현대사회의 외로운 인간 속에서 나는 이 악의라는 소설의 비극을 본 것이다. 일단 다산 정약용은 그 친구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 친구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다산을 배신했다. 그는 1800년 학자군주 정조가 붕어하게 됨에 다산을 마지막까지 내몰린 것을 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짓된 음모까지 꾸몄다. 다산은 1801년 신유사옥과 황서영백서로 인해 정치적·사회적인 권리를 모두 빼앗겨 버렸다.


물론 다산의 친구가 모든 것을 공모하고 주도한 것은 아니나 적어도 자기에게 호의를 베푼 것도 모자라 용서해준 친구에게 악랄한 행동을 한 점에서 이런 슬픈 우정의 비극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믿지 못하게 하는 최악의 불신을 낳게 한다. 그런 불운의 이름을 가진 다산처럼 이 악의라는 소설에서 불운을 가진 주인공 히다카는 그야말로 선의로 베푼 자기의 마음에 오히려 악의라는 거대한 음모에 휘말린다.


사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소설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고, 매우 치밀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던 사람이다. 그 이유는 만화와 애니메이션만 본 것이 아니라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서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서사라는 것은 결국 인간과 인간이 어느 공간적, 시간적, 역사적인 상황에 아울러 진행되는 이야기다. 그런 공간적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인간에게 던져지는 운명의 굴레에서 다양한 담론들은 서사구조를 가진 체계라면 당연히 감을 잡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사건의 해결과 관련하여 범인의 공표는 너무 이르게 나오고, 나 역시 범인이 노노구치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 이유는 노노구치가 히다카의 살인현장을 보고 난 뒤에 단순히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모니터에 비춰진 소설의 문구였다. 히다카의 소설에서 노노구치는 그의 작업속도와 분량을 잘 알았다는 점과 그리고 죽기 전의 히다카의 원고는 평소 이상으로 높아져 있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그 원고를 손질한 사람이란 것이다. 사실 판단의 기초는 조금 핀트가 벗어나 있었다. 왜냐하면 추잡한 인간을 소재로 한 “수렵 금지구역”에서 그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후지오 마사야라는 남자의 죽음에서 그녀의 동생 미야코가 오고 난 후에 노노무라는 히다카의 집에서 나간다. 그리고 나서 그 날 저녁 히다카는 죽음을 맞이한다. 히다카의 갈등이 되는 정점은 바로 후지오 마사야라는 남자이며, 히다카 옆집에 사는 고양이의 죽음과 비교하여 히다카의 죽음에 대한 인과적인 부분은 후지오 마사야라는 남자에 대한 부분이 크다고 생각했다.


또한 더 중요한 사실은 히다카 죽기 전의 작품인 얼음의 문이다. 그 작품에 대해 히다카의 팬들은 모두 기대하고 있겠지만, 히다카의 원고작업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히다카의 편집자, 아내, 그리고 친구인 노노구치이다. 노노구치가 어떻게 그토록 원고에 대하여 잘 분석하고 있었으며, 단지 원고 페이지만으로 그가 이상한 상태라는 점을 알았는가이다.


그런 내 생각에 달리 문제의 해답은 다른 방향에서 나왔다. 그것은 형사 가가의 등장에서 부터이다. 나는 사실 게이고 히가시노라는 작가를 잘 모르고, 거기에서도 가가 형상 시리즈는 더욱 더 모른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모든 서사의 흐름은 이 가가 형사의 등장에서 모든 것이 반전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가 형사가 범인을 추적하는 동안 모든 사건의 원흉은 노노구치라는 점까지 밝혔다.


물론 서사구조에서 범인의 지목은 초반부가 중반부에 가기에 너무 빨리 다가왔다. 그렇다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잡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은 범죄자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그것으로 얻는 그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것이 들통 나고 노노구치는 겉으로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인척하나 사실 그가 가장 악랄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사실 나는 이 작품에 대한 서사구조에서 보이는 플롯과 반전, 그리고 집요한 추적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이 작품을 적은 작가가 그리고 그 작가의 애정 어린 캐릭터인 가가 형사로 통해 보는 세상의 담론이라는 점이다. 사실 피해자와 가해자인 히다카와 노노구치의 경우를 본다면 어린 시절의 조금 알고 지낸 학교친구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질투라는 이름에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나, 그것은 표면에 지나지 않은 이야기다.


그 작품의 내면에서 내가 보고자 하는 사실은 왜 노노구치가 그런 인간이 되었는가이다. 노노구치는 공부도 우수하고 국문학을 매우 잘하던 수재였다. 그리고 히다카는 노노구치만큼은 아니나 나름 우수한 인재였다. 그런 2사람 사이가 왜 이리 되었나에서 나는 다산 정약용의 이름을 떠오른 것이다. 가령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매우 위대하고 아름다우면 고귀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 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자신의 책무와 의무를 버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많은 인간들은 그를 좋아하겠으나 역으로 그것을 시샘하고 혹은 배척하는 경우가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리면서 당대 명사를 찾아갔으나, 오히려 당대 명사들은 소크라테스의 언변에 자신의 어리석음 수치를 느껴야 했다.


그 덕분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지로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그리스의 시민으로서 고귀하게 죽음의 독백을 삼켰다. 과연 소크라테스는 남들에게 악을 끼칠 만큼 강한 힘을 가졌고, 사악한 행동을 공모할만큼 악랄하고 지략가였는가?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사랑했으나 그만큼 증오한 사람도 많았다는 점이다. 그런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바로 히다카의 과거이다.


그는 학교에 가장 문제가 되는 학교폭력에 저항한 사람이다. 장난을 넘어 죽음의 위기에 턱에서 그는 학교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의 소설 수렵 금지구역의 모티브가 된 남자가 어느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나체의 사진까지 찍었다. 그 후 그런 인간이었는지 후지오 마사야는 어느 창부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칼에 비명사한다. 후지오 마사야는 히다카가 중학교 다닐 무렵 가장 그를 괴롭히던 사람이다.


그런 후지오가 성폭행 문제로 전학 가버리자 히다카는 편안한 중학교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히다카가 학교를 다닐 시절에 분명 노노구치도 후지오의 전학으로 약골인 자신에게 유리한 학창시절을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노노구치는 중학교의 히다카와 편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노노구치가 히다카를 그렇게도 괴롭히던 후지오의 편에 있었다는 점이다. 노노구치는 히다카가 괴롭힘을 당해도 그저 방관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를 외면한다.


또한 정말 문제가 되었던 여학생의 성폭행 사건에서 나체의 사진에 찍힌 여학생 뒤에 어느 남자가 찍혔는데, 그것은 중학교 시절의 노노구치였다. 그는 매우 비열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런 행동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히다카가 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히다카는 노노구치를 위해 아동문학 작가에 입문하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자기에게 악랄한 짓을 한 후지오 옆에서 자신을 무시하려던 그에서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이런 느낌이다. 어느 사회적인 약자가 자신의 약함을 강자에게 내맡긴 것도 모자라서 그런 부정의한 인간으로 통해 자신에게 없는 강함을 내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노노구치는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히다카와 어울리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2사람은 어울렸으나 그런 자신의 마음속에는 히다카에 대한 열등의식(劣等意識)에 사로 잡혔다는 것이다.


열등의식에 갇혀버린 인간은 자신보다 더 나약한 인간을 찾아 우월감(優越感)으로 대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기 보다는 힘을 가진 인간에게 모인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정의가 된다. 타자를 생각하는 윤리(倫理)가 없는 정의(正義)는 곧 폭력(暴力)이다. 폭력이 정당화되고 미화되면 이른바 파시즘으로 치닫는다. 그런 문제에 대해 작가는 가가 형사로 통해 추적하고 혹은 가가 형사가 밝히고 싶지 않은 지난날의 교사생활까지 언급한 것이다.


나는 이래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이 정의로운 인간이 되기보다는 자신들이 정의롭게 되어줄 희생양을 찾는다고 말이다. 그런 희생자로 히다카가 선택되고, 그런 정의의 사도로는 노노구치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의 핵심이 해체되자 그런 행동들은 멈추었다. 인간의 이성은 과연 진리를 찾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권력을 향하는가?


악의라는 책에서 그런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비열한 면들을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보여주는 작품이다. 거기의 악의를 저지른 노노구치는 단지 그런 인간들 중에서 가장 나약하면서도 히다카의 이름을 부러워하는 인간이다. 왜 그는 그토록 히다카를 향해 집요한 행동을 했을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애증관계이다. 그는 히다카처럼 되고 싶으나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와 옆에 있으면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실망만 한다.


그것은 마치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이야기처럼 살리에르는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모차르트가 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영화에서 음모를 꾸며 모차르트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 악의에서의 노노구치는 살리에르처럼 악의를 가진 것은 분명하나 재능보다는 자신에 대한 노력은 없었다. 살리에르는 그가 만들고 보여주어도 모차르트에게 가려진 것이지 노노구치처럼 아예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대한 문학적 능력보다는 타인의 문학의 능력까지 훔쳐서 마치 떳떳하게 병으로 죽어가는 고스트라이터로서 마치 명예롭게 인생을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그런 거짓된 명예의 성취조차 가가 형사에 의해 밝혀진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 작품에서 밝혀지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 무엇이 인간이 그토록 극으로 가게 하면서도 결국 그것으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걸어도 왜 이런 일은 생기는가이다.


혹시나 누가 알고 있을까나? 허구로 조작된 고스트라이터가 아닌 많은 어둠의 갈린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게 한 빛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고스트라이터도 아니면서도 고스트라이터인 것처럼 행동하는 노노구치의 비열함이 숨어있으나 정말 세상에는 그런 빛을 보지 못하는 많은 고스트라이터가 존재하지 말란 법은 없고, 이들 역시 노노구치와 다른 진정한 악의를 표출하지 않을까라는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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