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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종말
폴 R. 에얼릭 & 앤 H. 에얼릭 지음, 하윤숙 옮김 / 부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환경공학과를 전공하여 이제 환경과 관련된 업무를 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본다면 조금 환경을 다른 부분 혹은 영역을 확대한 도서라고 말하고 싶다. 기본적으로 환경공학에서는 수질·대기·토양·생태계 등 다양한 환경 분야의 학문을 배운다. 따라서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그 순간에는 마치 처음 보는 서적이라기보다는 과거 내가 학부시절이나 혹은 환경 직종과 연계되는 기사 및 산업기사 자격증 시험을 응시할 때 보던 하나의 수업에 가까웠다.
단지 그런 환경공학과란 학문이 공학과 과학의 다양한 조합에서 이루어진 학문 체계라고 본다면 이 책은 그런 환경공학에서 배워야 하는 수질, 대기, 토양, 생태학 등에 생물학, 진화학와 같은 순수 영역의 자연과학, 그리고 철학,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윤리학 등과 같은 다양한 인문학 적인 영역이 같이 곁들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런 부분을 인지라도 하는 듯 저명한 사상가인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 맬서스와 같은 이름도 보인다.
참고로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마르크스의 도서를 읽어보았는데,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와 당시 근대화로 이어지는 공업화에서 보이는 연관관계를 다시금 이 책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또한 마르크스 도서를 읽기 전에 구조주의 인류학 및 신화학자인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미국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 <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 <작은 인간>과 같은 서적을 읽었다.
그렇게 이미 환경공학 전공분야라는 기초 위에 각종 인류학 도서, 그리고 간간히 읽던 인문서적들에서 이 책을 읽는 내 심정은 이 책이 출간되는 것은 하나의 당위성으로 보였다. 일단 나는 이 책을 보며 내가 현장에서 겪은 일 내지 혹은 방송이나 미디어에서 접한 것을 생각했다. 이 책의 제목은 <진화의 종말>인데, 그 진화의 의미가 단순히 다윈이 제시한 생물학적인 종말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적 진화에 크게 지목했다.
물론 자연적인 조건에서 문명은 변화해 왔으나, 지금의 자연은 오히려 문명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자연은 그런 영향으로 인해 그동안 받아오던 압력에 그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돌려주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준 영향은 대략적으로 예상하고 출처를 밝혀내 갈 수 있는 반면 자연은 예고 없이 나타나고 그 범위나 위력은 가늠하지 못할 정도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일단 한번 우리나라의 지독한 강우로 인해 산사태 사건을 회상했다.
나는 우면산에 위치해 있는 서울시의 시민은 아니나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 그리고 환경공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본다면 이 참사는 단순히 자연재난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연으로 인해 생긴 문제가 아니라 자연이 인간으로 생긴 문제인 것이었다. 당시 많은 토사가 산 아래로 밀려와서 인명에 대한 손상과 재산에 손실로 이어졌다. 그러나 분명 우면산 일대는 어느 정도 안전재난과 관련하여 토목설계가 구비되어 시공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건을 일어났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던 범주에서 큰 규모로 자연이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가령 서울이란 도시는 대부분 평지에 낮고 낮은 산과 구릉지로 구성된 장소다. 그런 장소에 홍수 방지를 위해 또한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한강이라는 거대한 하천이 있다. 따라서 치수체계로 보자면 서울은 산악지역이 많은 다른 한국 영토에 비해 풍수해에 안전한 지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은 가장 홍수에 취약한 도시이다.
왜냐하면 대규모의 도로와 건물들이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구성되어 물이 지면 아래로 들어갈 수 없으며, 풀과 나무가 있는 초원과 숲이 부족하여 강우수를 그대로 지면위로 들어낸다. 또한 거대한 하천인 한강으로 가는 수로 역시 제대로 구비되어도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진화의 종말>을 보고 서울 우면산 사건을 보면 그 당위성은 확실히 보인다. 그것은 이미 내가 제시한 불투수성 표면 증가에 따른 물의 유출수가 그대로 지표면에 떠도는 사실, 다른 하나는 그 물이 하천으로 유입이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체되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 이 책에서는 사회적·경제적·문화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예를 들어 빈부격차에서도 환경적인 문제가 발휘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다른 식으로 먼저 등장한 것은 식량이었으나 식량 이외에도 각종 사회적 서비스 즉 SOC(사회간접자본) 영역에서도 재해부분이 일어나는 점이다. 내가 먼저 제기한 우면산은 서울시의 비싼 부동산 물가와 거기에 동반한 낮은 토지를 찾아 개발하거나 혹은 더 높은 가격을 얻기 위해 비싼 부동산이 위치한 주변을 개발하는 것이다.
우면산의 경우는 분명히 수리학적으로 강우강도를 견딜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견디지 못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문제이다. 도시계획에서 전반적인 치수관리가 이루어지나 소규모단계에서는 보장하지 못한다. 만약 어느 장소에서 강우량이 100㎜/h로 내린다면 보통 국내 강우빈도는 30년, 50년으로 설계되어 100㎜/h 이상 내려도 무사해야 한다. 그러나 무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우수라는 것은 그렇게 100㎜/h로 설계한 곳에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설계하지 않은 곳까지 연계된다.
물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그렇다면 하류에서 방비를 철저히 해도 상류나 혹은 다른 지역의 우수가 지면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자연스레 그 물은 아래로 갈 것이다. 또한 100㎜/h이란 수치도 1시간 이내이지 3~4시간 지속되면 이른바 임계점을 넘게 되어 그 효능을 상실한다. 아마 우면산은 그런 문제로 인해 붕괴되어 토사가 유출되어 아래에 우치한 동네를 엉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다른 점을 미루어 부동산의 과잉투기는 하수관거나 혹은 우수관거 같은 인프라 시설을 투자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 <진화의 종말>에서는 사회주의는 경제적인 관계를 간과했고, 자본주의는 환경적인 부분을 간과한 것에서 경제적인 부분은 실용적이고 이익이 연결되므로 당장의 문제가 나오지 않은 이상 그대로 방치된다. 그래서 한강이나 주변 하천으로 유입될 관로가 부족하거나 있다고 해도 관로직경이 부족하거나 직경이 충분해도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우수가 밀려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진화의 종말>에서는 이런 문명의 진화 즉 자본주의경제체계의 가속화 부분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찰하고 예를 들었다. 위에서 내가 예로 들은 우면산 사건은 솔직히 말하여 서울시로 본다면 큰 자연재해이나 지구단위로 보면 아주 작고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면산 사건의 피해범위는 지구환경위기에서는 아주 사소한 사건이 때문이다. 물론 당시 피해자와 국가적인 손실이 거대하도 말이다.
<진화의 종말>에서는 단순히 일시적인 환경문제가 아니라 잠재적이고 거대한 환경문제가 나왔다. 육식의 지나친 가속화로 식량의 대부분이 사료로 들어가 전 세계 빈곤국가 국민들이 굶주려 간다던지, 제3세계의 과잉 출산으로 토양과 지하수의 오염에 그리고 각종 질병까지 등장한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인간에게 오래 살 수 있는 기회는 주었지만, 이에 반해 인구폭발이라는 문제를 발생시켜 물, 식량, 에너지 문제를 야기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 것은 거의 미지수 혹은 마이너스에 가까운 형국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나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매일 병들어간다. 내가 듣기로는 매일매일 여의도 크기의 지구 표면이 사막화되어 가고, 매일 환경오염 문제로 사람이 죽어간다. 당장 내 눈에는 비추어지지 않지만, 이런 문제는 광범위적으로 발생하여 결국 언제가 나에게 도래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문제를 제시했다. 과거 체르노빌을 비롯한 어떤 나라에서 원자력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방사능이 그 지역 주민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반경 몇 십㎞ 혹은 몇 백㎞에 서식하는 자연과 인간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지구 국지적 내지 국부적인 영향이 아니라 더 넓은 국가적 내지 세계적으로 문제를 주었다. 이 방사능은 분명 과거 소비에트 연방 지금의 러시아 인근의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이 미국 대기층에도 올라갔다.
또한 중국의 모래가 중국 내가 아니라 미국이나 서구유럽까지 번졌다. 그것은 이 책에서 양모의 수확을 위해 염소들을 대량으로 사육했는데, 문제는 그 염소들은 풀을 계속 먹고 먹어 결국 토양을 사막화했다. 다시 염소 사육을 위해 그 사막화된 토지를 떠나 다른 토지를 찾아갔으며 이것은 사막화의 가속페달이 되었다. 이것이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사실은 오로지 사막화된 부지였다. 하지만 사막은 원래로 복귀되지 않고 끊임없이 모래폭풍만 지구에게 보냈다.
우리도 봄이 오면 중국의 황사로 고통 받는다. 최근에는 중국의 대기오염이 증가되면서 각종 중금속 및 화학물질까지 달라붙는다. 환경문제는 이제 국제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대기오염 문제를 보자고 하니 이미 산성비는 인간의 식수, 인간의 식량이 양식, 자연개체의 안전까지도 위험했다. 자연계의 생존만 아니라 예전 유럽의 심각한 대기오염은 위대한 문화제까지 파손했다. 왜냐하면 최고의 조각물들이 모두 산성비에 약한 석회질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석회질이 탄산칼슘으로 되어 지면으로 흘러내리니 석상의 모습은 온전할 수 없다.
게다가 자연계의 석회질로 구성된 새의 알과 달팽이와 조개의 집과 껍질들은 단단한 보호막이 아니라 살짝 충격을 주어도 부수어지는 젤리처럼 되었다. 산성비는 pH가 낮기 때문에 동물이 아닌 식물에게 영향을 주고, 토양을 부식시키고, 호소수의 생태계를 파괴했다. 이런 문제는 결국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영역에 레드카드를 주었다. 사실 경고의 의미인 옐로우카드를 주기에는 너무 많이 달린 것이다.
이런 문제를 보자? 우리는 자연생태계 파괴로 먼저 답답한 도시에서 새집증후군, 새차증후군, 열섬현상에 시달리지 않은가? 또한 열이 많은 도시에서 새집증후군을 일으키거나 혹은 헌집증후군을 일으키는 빌딩 안에 외부의 더위와 추위를 피해 에어컨과 히터를 킨다. 에어컨 냉방병을 주고 히터는 일산화탄소 농도를 올리게 된다. 이런 문제가 될 때까지 인간들은 너무 안이했다. 아니 관심가지기 싫어했다.
단지 자기 앞에 나타지 않으면 피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방관적 태도이다. 경제강대국과 부유층들은 자신들의 이익도모와 주변의 쾌적함을 위해 제3세계의 숲을 파괴하고 강을 도려낸다. 그 결과 대기의 열을 흡수하는 하천이 사라지고, 그 열들은 북극의 얼음을 파괴하여 해수면 상승시켰다. 숲을 파괴하니 대기의 산소농도가 감소하고 탄소증가로 기온이 올라가 다시 그런 열문제를 해결하는 대응책 상실했으니 더욱 피해가 가중된다.
결국 다시 외면하려는 인간들에게 도달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탄소배출권 문제를 다룰 때에 어느 국가는 그 안건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은 언제나 지구에너지 소모하면서 책임은 다루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자국의 문제가 터지지 않으려 하고, 터지려 한다면 주로 빈곤계층 내지 약자들에게 미룬다. 그런 행동들이 또 다시 돌고 도는 자연의 지구시스템이란 자연과 혹은 인간이 만든 문명체계가 다시 자연의 지구시스템에 의해 문제가 된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진화의 종말>이란 단어처럼 과연 지구가 종말이 오는가에서 나는 온다라고 말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 인간은 과연 진화하고 있는가에서 나는 진화보다는 퇴보가 맞다고 본다. 인간이 아닌 생태계의 동물, 식물, 미생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위급하거나 혹은 큰 문제가 생기면 모두 멸종하거나 혹은 객체 자신의 변화로 생존한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최악의 발암물질인 DDT는 어느 순간 그것을 맞아도 멸종하지 않은 해충들을 양산했다.
그것뿐이겠는가? 인간은 오래 살 수 있는 비결 중의 하나가 의학의 발달이다. 특히 인간이 태어나면서 몸에 붙는 토착미생물은 주변에 잔존하는 떠돌이미생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 인간의 피부 외에 붙어있는 많은 미생물이 인간의 면역체계에 도움은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인간의 기회감염이란 큰 악재를 준다. 예를 들어 사람이 상처나면 항생제를 투여하는데, 과거 이런 항생제 발견 이전에 세균감염으로 인한 패혈증 발병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어느 순간 페니실린이란 항생제가 나오고 그것보다 강력한 메타실린이 나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구에 많이 분포하는 황생포도상구균은 메타실린에 대해 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뛰어 넘었다. 이른바 병원감염에서 매우 심각하게 다루는 MRSA(메타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 methicillin-resistant staphylococcus aureus)라는 슈퍼 박테리아를 양성하였다.
게다가 이제는 MRSA보다 더 강력한 세균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VRSA(반코마이신 내성 황색포도상구균(vancomycin resistant staphylococcus aureus)이었다. 인간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갔으나 인간의 면역력은 감소하고 퇴화하는데 반해 오히려 미생물은 강력해지고 위협적이었다. 그나마 수질로 인해 감염되던 콜레라나 이질은 상하수도 시설개선과 확충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미생물들은 막을 수 없었다. 인간의 문화의 진화하는데 반해 자연계의 미생물처럼 자신의 내성은 잃어만 가고 있었다.
최근 나는 업무와 관련하여 사무실 동료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눈 친구는 나처럼 환경공학과를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 중의 생물학과를 나왔다. 그는 이렇게 나에게 말했다. 여자가 아이를 가지기 위해 임신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놀랬다. 예전에는 여성의 배란일과 남성의 지나친 음주만 아니면 언제든지 수정착란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남자나 여자 모두 힘들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는 여자가 아이를 낳으려면 술과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를 낳기 위해 호르몬 촉진제까지 맞는다고 한다. 그래도 아기를 못가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남자 역시 예전보다 생식능력이 떨어졌다고 한다. 내가 대학 다닐 시절에 어느 생물이 수컷이었는데, 호르몬 문제로 암컷으로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컷인자가 호르몬작용제로 결국 자기 종족의 유지까지 위기를 맞이했다. 실제로 지나친 환경오염으로 어느 생물의 성염색체 유전자인 XY에서 Y의 출현이 낮아졌다고 한다.
과거 인간은 문화적인 영향으로 아들을 가지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인류 보전 문제로 인해 아들을 가지기를 바라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물론 아직까지 국내에서 이런 염색체 문제로 크게 사회적 이슈로 오르지 않으나, 적어도 여성이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서 그것도 상당히 노력해야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계속적으로 자신들만의 문명사회를 유지하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희생한다. 가끔 보면 그것이 인간이란 자기 존재여도 말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희생을 추구하여 당장은 안락을 도모할 상황이나 계속되는 희생유도플레이는 그 유도자까지 목을 옭아맨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성을 가진 인간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그런 문제를 나는 계속 여기저기 본다. 전공이 환경이라는 것과 환경으로 경제적·사회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타협할 수밖에 없다. 자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눈에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은 존재 말이다. 하지만 가끔 환경으로 먹고 사는 입장에서 그것은 정말 힘들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연이란 존재에 타협하기에 기대되는 이득이 당장 오지 않는다는 아킬레스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그것을 놓치면 더 큰 피해가 그 이상으로 온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