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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모든 법의 기초를 말하자면, 아니 모든 법을 행하는데 선위에 두는 것이 바로 헌법(憲法)이다. 헌법이란 그 모든 법을 만든 것에 원인이요, 행위이며,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바탕이 되는 근본이다. 그런 헌법이 유린되고, 자학되는 행위가 일어나는 곳은 자유와 민주, 그리고 평화가 있는 민주자유공화국이 아닌 곳이 된다. 자유공화국이란 말은 독재가 무척이나 기승을 부리고 있는 북한에서도 사용하고, 심지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기 전까지도 해당된다. 소비에트란 단어가 평의회란 뜻이고, 소비에트 당에는 그 누구라도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이 러시아혁명이었으나, 스탈린의 독재관료주의가 들어서면 소비에트는 무서운 감시경찰이 달라붙은 독재의 표본이 되고 말았다.
그런 독재적인 국가들이 세계적으로 20세기에 존재했듯이 독재국가가 비단 거기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그러지 않을 시기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영화 변호인은 그런 독재정치에서 살아가던 우리 시대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눈물과 아련한 추억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에서는 “시는 (개인에게)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말에서 영화 <변호인>은 시학에서 말하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시의 주인공이 변호인 송우석 변호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서 보이는 그 감동과 더불어 그들이 주인공을 누구로 만들고 싶은 것이냐는 철학적 질문이다.
판사가 재판과정에 묻는다. 아니 검찰과 경찰에 변호인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변호인 송우석은 대답한다. “넵, 압니다. 아주 잘 압니다.”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구다. 이 문구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필두로 하여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프랑스 혁명가들이 내세운 인권선언문 중에 나오는 단어와 일치한다. 우리의 자유와 평등의 권리는 이미 220년 전에 프랑스에서 시작한 그 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모든 주권과 권리는 국민 혹은 인민으로 나온다는 근대정치에서 모든 군주제로부터 민주제로 이양하게 되었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라는 사람이 지은 서적이름인 <법의 정신>처럼 법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있다. 법은 바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그 사람 중에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법이다. 헌법이란 인간의 생명과 인격을 존중하기 위해 만든 법은 오로지 국회의사당에서 의결한 것으로 그 누구도 바꿀 수가 없다. 헌법이란 국민이 모두의 의지로 만든 즉 일반의지로서 탄생한 존엄한 존재이다. 그래서 장군이 와도 서울시장이 와도 심지어 대통령조차 바꿀 수 없는 것이 헌법이다. 헌법을 유린한 자는 역사라는 무거운 이름 아래 그 오명을 새기게 되며, 19세기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는 프랑스의 역사상에서 아주 더러운 역사로 남았다.
쿠데타에 의한 의회진압과 그리고 국민에 대한 공격은 그것은 곧 자신이 국민의 대표로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주인으로서 활동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비합적인 폭력으로서 쿠데타가 아니라 하나의 합법이란 이름으로 가려진 불법이라면 누구에게 그 부당함을 제기하는가? <변호인>이란 영화의 주인공은 결코 변호인들이 아니다. 배우 송강호 씨가 연기한 송우석이란 변호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이 변호하고자 하는 그 대상이 바로 주인공들이다. 문제는 그 주인공들은 너무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으며,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벅찬 사람들이란 말이다.
길가에 지나가는 할머니, 학교를 가는 학생들, 그리고 소주잔에 한숨을 기울이는 아저씨들, 이 모두가 <변호인>이란 영화에서 내세우고 싶은 주인공이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이들은 주인공이 아니다. 단지 삶에서 보이는 주인공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지독하게 가난한 삶, 그리고 배고픔과 추위에 떨어가면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 이들이 바로 변호인들이 만들고 싶은 주인공이다. 시학에서 언급한 영웅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현재 혹은 현재 이전에 살아간 사람들과 앞으로 살아갈 미래까지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변호인>에서 우리의 삶은 우리라는 국민주권의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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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집행하고 판단하는 것도 국민을 위한 것이나, 법이란 결국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야 한다. 법에 의한 행위에서 변호인이 약자를 돕고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는 것은 인권변호인이 아니라 변호인 자체가 인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을 알기 위해서 법을 하기 위해서 법을 말하기 위해서는 철학이란 단어가 필요하다. 철학이란 윤리적인 상대주의적인 사유와 논리적인 이성으로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가끔 그게 어긋날 때도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이런 말을 자주 어른들에게 들었다. 그것도 내 나이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인 시절에 말이다. 말 함부로 잘못하면 어디로 끌려가 고문당하고 반병신이 된다고 말이다.
삼청교육대라는 무서운 곳을 나는 그 시대 아주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이야기에서 알았다.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고, 점점 크면서 삼청교육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광주학살을 들었고, 6월 항쟁의 뜨거운 부산과 그것이 시발점이 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까지도 말이다. <변호인>이란 영화는 겉으로는 픽션이란 영화로 위장하나, 실은 실제의 역사를 근거한 작품이다. 어떻게 보면 역사적인 하나를 어떻게 철학적으로 이전했는가에서 결국 법의 정신을 되묻는 영화가 된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송강호 씨를 <변호인> 이전에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서 만났으나, 영화스케일이나 자본력, 연출력과 각본은 분명 <설국열차>가 위라고 말할 수 있으나, 영화 그 자체는 <변호인>이었다.
카메라 앵글을 보면 단조롭기 짝이 없는 full-shot과 close-up이 이래저래 쓰인 작품이나, 그것이 하나의 장점이 되었다. 특히 <변호인>에서 카메라 앵글을 extreme close-up을 많이 사용한다. 그것이 이 작품에서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크게 전달했다. close-up이란 작중의 등장인물의 표정과 심리상황에 대해 관객에게 거기에 동화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그런데 close-up을 지나 extreme close-up을 사용하는 부분에서 동화를 넘어 하나의 새로운 경계선을 만들어내었다. 작품 내의 송강호 씨의 연기는 감동을 넘어 하나의 승화를 이룩한 것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이 홀로 고시에 붙은 상고출신 변호사가 힘든 생활 끝에 유명한 변호사가 되어 부를 누리려는 중에 국밥집 아들의 고문에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새로운 세계를 보는 장면은 주인공의 새로운 전환에서 우리가 말할 수도 없었고, 생각조차 떠오르기 싫은 지난 날의 아픔이 다시 새겨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분노와 증오보단 그것을 넘어가길 바란 것이 인상적이었다. 차경감이란 고문전문 경찰을 보면, 그가 과연 가해자인 것은 분명하다. 국가라는 이름에 의해 자행되는 하나의 폭력은 국가주의와 관료주의 그리고 전체의지라는 루소가 제기한 <사회계약론>처럼 바르지 못하다.
그는 말한다. 나의 아버지는 625 때 돌아가셨다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냉전시대의 산물이고, 냉전시대의 피해자이며, 그것으로 인해 가해자가 되었다. 피해심리로 인한 보상심리는 자신의 폭력성을 휘두르는 것이 하나의 정의로 되었다. 폭력이란 불법이기도 하나, 그것이 정당화 되어 수단도구가 되면,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정의가 된다. 죄가 없는 자라도 죄를 만들어 큰 공을 세울 수 있으며, 그 공으로 통해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 내어 하나의 당위성을 보여주게 된다. <변호인>이란 영화가 과연 주인공의 존재성에서 헌법 제1조 제2항의 조목을 떠올린다면 누가 과연 주인공이란 의미를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서거한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를 토대로 각본을 짠 것이다. 유시민이 엮은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와 비교하면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많다. 우선 부산상고 출신은 맞고, 대전에서 판사를 맡았으며, 변호사를 부산에서 개업하여, 슬하에 첫째가 아들 둘째가 딸은 분명하다. 부림사건에서 변호를 처음 맡아 시민운동가로 활동했고,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서 최루탄을 맞은 것도 사실이다. 다른 점은 국밥집에서 몰래 먹고 도망친 곳은 부산이 아니라 울산 쪽이고, 변호를 맡게 된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란 점이다.
그래서 연기를 맡은 송강호 씨의 입장에서 참으로 어려운 연기가 되어야 했고, 100%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치한 송우석의 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카메라의 연출효과가 매우 저조한 것을 알 수 있는 이유가 처음 영화를 상영할 때 광고가 없이 한 점과 엔딩이 흐르는 화면에서 지원한 스폰서가 거의 부족하다는 점이다. 영화의 미장센은 <설국열차>에 비해 아주 약할 수밖에 없다. 배경이나 소품을 보면 주막을 제외한 배경은 부산 위주로 했다. 부산 수영구 수영만 요트경기장 옆의 방파제, 영도 영선동의 산을 깎아 만든 집들, 부산에 살다보면 그런 곳을 가끔 들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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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와 1980년대의 가난한 시기의 모습이 아직도 나는 보고 있다. 게다가 국밥집에서 몰래 음식을 먹고 도망칠 때 송우석이 바닷가 앞에서 토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곳은 영락없는 영도다리 아래의 선착장이다. 그래서 영화는 카메라의 현란함과 컴퓨터그래픽의 화려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기본적인 카메라의 연출에 의존한다. 그래서인지 인상깊은 장면은 송우석 변호사가 고교동창에서 기자를 하던 친구와 싸울 때이다. 그의 어지러운 정신과 정신적 과도기에서 카메라를 over shoulder shot를 보일 때, 송우석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어지럽게 보인다.
또한 다른 인물이 송우석을 바라보는 화면은 close-up으로, 송우석이 바라보는 때에는 over shoulder shot으로 처리한다. 카메라 앵글에서 송우석 관점으로 보는 세상이란 과연 어느 것이란 말인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제일 인상 깊은 카메라 무빙워크는 법정에서 아무도 통하지 않는 세계에서 혼자 헌법의 권리를 변호인으로 말하는 광경이다. walking out-side란 기법으로 피사체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카메라를 돌리는 것이다. 낯선 법정, 울고 있는 학생들의 가족들, 실제 재판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과 심한 비인격적 행위로 법정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실제 모델인 된 인물이 겪은 일 때문에 나는 올해 2번을 울었다. 그것도 같은 날에 말이다. 알고는 있지만, 이른바 “원진 레이온” 사건에서 이황화탄소(CS2)라는 독가스를 마신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장애판단을 받았다. 문제는 회사에서 산업재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그 노동자와 가족들이 곤란한 지경이었다. 당시 그는 휠체어를 타고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그 노동자를 보고 차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 봉고차를 타고 돌아가는데, 그 노동자의 딸이 울면서 달려와 “우리 아버지 살려주세요!”라는 모습을 생각하면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죽고 “원진 레이온” 희생자가 추모하는 모습이다. 모르겠다. 나의 아버지도 역시 선원이었고, 힘든 노동조건에서 귀가 난청이 되고, 열 때문에 피부가 손상입고, 심하게 다쳤다. 그런다고 아무 말도 없이 일만 했지만, 육체는 상하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계속 보고 자랐다. 그러면서 힘이 없으면 그저 숙여 살아가는 것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울화통이 속에서 치밀어 오른다. 아직도 무서운 세상에 살아간다는 말에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어떻게 보면 나 같은 사람들이 주인공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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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고문에 대한 장면이 인상 깊다. 고문이 전체 영화의 70%를 차지하는 <남영동 1985>에서 고문이란 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같이 고문하는 자마저 고문당하는 것인지 보여준다. 인간의 정신의 파괴에서 폭력, 수조에 얼굴에 담구기, 얼굴에 헝겊을 두르고 고춧물을 뿌리기라는 비인격적 고문은 볼 때마다 불편하다. 내가 어린 시절에 들은 이야기가 영화로 나오나, 그것이 하나의 사실이었다는 점이고, 특히나 전기고문과 같이 인간을 반불구자로 만드는 비인도적인 방법을 국민에게 행한 것도 모자라 오히려 정당하다고 믿는 자들로부터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처럼 정의란 단지 폭력에 의해 정당화 되는 가장 비열한 이름이 되지 않았나 싶다.
19세기 철학자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1793년 여름, 프랑스대혁명의 여걸이며, 장 자크 루소를 사모했던 롤랑 부인이 단두대 아래에 사라져가기 전에 이런 말을 외쳤다.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작품에서 차경감이 고문하던 진우에게 묻는다. 너의 사상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진우는 이렇게 대답한다. “실존주의”라고 말이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인간의 실존은 결국 개인에 대한 그 자체의 자유이다. 자유가 없기에 우리는 실존적으로 자신의 주인조차 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헌법은 일반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전체의지로서 반영된 법이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 이상으로 위험한 것이 없다. 국가란 무엇이며,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 <변호인>에 숨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