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모든 법의 기초를 말하자면, 아니 모든 법을 행하는데 선위에 두는 것이 바로 헌법(憲法)이다. 헌법이란 그 모든 법을 만든 것에 원인이요, 행위이며,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바탕이 되는 근본이다. 그런 헌법이 유린되고, 자학되는 행위가 일어나는 곳은 자유와 민주, 그리고 평화가 있는 민주자유공화국이 아닌 곳이 된다. 자유공화국이란 말은 독재가 무척이나 기승을 부리고 있는 북한에서도 사용하고, 심지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기 전까지도 해당된다. 소비에트란 단어가 평의회란 뜻이고, 소비에트 당에는 그 누구라도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이 러시아혁명이었으나, 스탈린의 독재관료주의가 들어서면 소비에트는 무서운 감시경찰이 달라붙은 독재의 표본이 되고 말았다.

 

그런 독재적인 국가들이 세계적으로 20세기에 존재했듯이 독재국가가 비단 거기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그러지 않을 시기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영화 변호인은 그런 독재정치에서 살아가던 우리 시대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눈물과 아련한 추억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에서는 “시는 (개인에게)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말에서 영화 <변호인>은 시학에서 말하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시의 주인공이 변호인 송우석 변호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서 보이는 그 감동과 더불어 그들이 주인공을 누구로 만들고 싶은 것이냐는 철학적 질문이다.

 

판사가 재판과정에 묻는다. 아니 검찰과 경찰에 변호인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변호인 송우석은 대답한다. “넵, 압니다. 아주 잘 압니다.”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구다. 이 문구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필두로 하여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프랑스 혁명가들이 내세운 인권선언문 중에 나오는 단어와 일치한다. 우리의 자유와 평등의 권리는 이미 220년 전에 프랑스에서 시작한 그 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모든 주권과 권리는 국민 혹은 인민으로 나온다는 근대정치에서 모든 군주제로부터 민주제로 이양하게 되었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라는 사람이 지은 서적이름인 <법의 정신>처럼 법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있다. 법은 바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그 사람 중에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법이다. 헌법이란 인간의 생명과 인격을 존중하기 위해 만든 법은 오로지 국회의사당에서 의결한 것으로 그 누구도 바꿀 수가 없다. 헌법이란 국민이 모두의 의지로 만든 즉 일반의지로서 탄생한 존엄한 존재이다. 그래서 장군이 와도 서울시장이 와도 심지어 대통령조차 바꿀 수 없는 것이 헌법이다. 헌법을 유린한 자는 역사라는 무거운 이름 아래 그 오명을 새기게 되며, 19세기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는 프랑스의 역사상에서 아주 더러운 역사로 남았다.

  

쿠데타에 의한 의회진압과 그리고 국민에 대한 공격은 그것은 곧 자신이 국민의 대표로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주인으로서 활동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비합적인 폭력으로서 쿠데타가 아니라 하나의 합법이란 이름으로 가려진 불법이라면 누구에게 그 부당함을 제기하는가? <변호인>이란 영화의 주인공은 결코 변호인들이 아니다. 배우 송강호 씨가 연기한 송우석이란 변호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이 변호하고자 하는 그 대상이 바로 주인공들이다. 문제는 그 주인공들은 너무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으며,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벅찬 사람들이란 말이다.

 

길가에 지나가는 할머니, 학교를 가는 학생들, 그리고 소주잔에 한숨을 기울이는 아저씨들, 이 모두가 <변호인>이란 영화에서 내세우고 싶은 주인공이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이들은 주인공이 아니다. 단지 삶에서 보이는 주인공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지독하게 가난한 삶, 그리고 배고픔과 추위에 떨어가면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 이들이 바로 변호인들이 만들고 싶은 주인공이다. 시학에서 언급한 영웅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현재 혹은 현재 이전에 살아간 사람들과 앞으로 살아갈 미래까지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변호인>에서 우리의 삶은 우리라는 국민주권의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법을 집행하고 판단하는 것도 국민을 위한 것이나, 법이란 결국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야 한다. 법에 의한 행위에서 변호인이 약자를 돕고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는 것은 인권변호인이 아니라 변호인 자체가 인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을 알기 위해서 법을 하기 위해서 법을 말하기 위해서는 철학이란 단어가 필요하다. 철학이란 윤리적인 상대주의적인 사유와 논리적인 이성으로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가끔 그게 어긋날 때도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이런 말을 자주 어른들에게 들었다. 그것도 내 나이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인 시절에 말이다. 말 함부로 잘못하면 어디로 끌려가 고문당하고 반병신이 된다고 말이다.

 

삼청교육대라는 무서운 곳을 나는 그 시대 아주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이야기에서 알았다.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고, 점점 크면서 삼청교육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광주학살을 들었고, 6월 항쟁의 뜨거운 부산과 그것이 시발점이 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까지도 말이다. <변호인>이란 영화는 겉으로는 픽션이란 영화로 위장하나, 실은 실제의 역사를 근거한 작품이다. 어떻게 보면 역사적인 하나를 어떻게 철학적으로 이전했는가에서 결국 법의 정신을 되묻는 영화가 된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송강호 씨를 <변호인> 이전에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서 만났으나, 영화스케일이나 자본력, 연출력과 각본은 분명 <설국열차>가 위라고 말할 수 있으나, 영화 그 자체는 <변호인>이었다.

   

카메라 앵글을 보면 단조롭기 짝이 없는 full-shot과 close-up이 이래저래 쓰인 작품이나, 그것이 하나의 장점이 되었다. 특히 <변호인>에서 카메라 앵글을 extreme close-up을 많이 사용한다. 그것이 이 작품에서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크게 전달했다. close-up이란 작중의 등장인물의 표정과 심리상황에 대해 관객에게 거기에 동화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그런데 close-up을 지나 extreme close-up을 사용하는 부분에서 동화를 넘어 하나의 새로운 경계선을 만들어내었다. 작품 내의 송강호 씨의 연기는 감동을 넘어 하나의 승화를 이룩한 것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이 홀로 고시에 붙은 상고출신 변호사가 힘든 생활 끝에 유명한 변호사가 되어 부를 누리려는 중에 국밥집 아들의 고문에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새로운 세계를 보는 장면은 주인공의 새로운 전환에서 우리가 말할 수도 없었고, 생각조차 떠오르기 싫은 지난 날의 아픔이 다시 새겨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분노와 증오보단 그것을 넘어가길 바란 것이 인상적이었다. 차경감이란 고문전문 경찰을 보면, 그가 과연 가해자인 것은 분명하다. 국가라는 이름에 의해 자행되는 하나의 폭력은 국가주의와 관료주의 그리고 전체의지라는 루소가 제기한 <사회계약론>처럼 바르지 못하다.

  

그는 말한다. 나의 아버지는 625 때 돌아가셨다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냉전시대의 산물이고, 냉전시대의 피해자이며, 그것으로 인해 가해자가 되었다. 피해심리로 인한 보상심리는 자신의 폭력성을 휘두르는 것이 하나의 정의로 되었다. 폭력이란 불법이기도 하나, 그것이 정당화 되어 수단도구가 되면,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정의가 된다. 죄가 없는 자라도 죄를 만들어 큰 공을 세울 수 있으며, 그 공으로 통해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 내어 하나의 당위성을 보여주게 된다. <변호인>이란 영화가 과연 주인공의 존재성에서 헌법 제1조 제2항의 조목을 떠올린다면 누가 과연 주인공이란 의미를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서거한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를 토대로 각본을 짠 것이다. 유시민이 엮은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와 비교하면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많다. 우선 부산상고 출신은 맞고, 대전에서 판사를 맡았으며, 변호사를 부산에서 개업하여, 슬하에 첫째가 아들 둘째가 딸은 분명하다. 부림사건에서 변호를 처음 맡아 시민운동가로 활동했고,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서 최루탄을 맞은 것도 사실이다. 다른 점은 국밥집에서 몰래 먹고 도망친 곳은 부산이 아니라 울산 쪽이고, 변호를 맡게 된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란 점이다.

 

그래서 연기를 맡은 송강호 씨의 입장에서 참으로 어려운 연기가 되어야 했고, 100%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치한 송우석의 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카메라의 연출효과가 매우 저조한 것을 알 수 있는 이유가 처음 영화를 상영할 때 광고가 없이 한 점과 엔딩이 흐르는 화면에서 지원한 스폰서가 거의 부족하다는 점이다. 영화의 미장센은 <설국열차>에 비해 아주 약할 수밖에 없다. 배경이나 소품을 보면 주막을 제외한 배경은 부산 위주로 했다. 부산 수영구 수영만 요트경기장 옆의 방파제, 영도 영선동의 산을 깎아 만든 집들, 부산에 살다보면 그런 곳을 가끔 들릴 때가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가난한 시기의 모습이 아직도 나는 보고 있다. 게다가 국밥집에서 몰래 음식을 먹고 도망칠 때 송우석이 바닷가 앞에서 토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곳은 영락없는 영도다리 아래의 선착장이다. 그래서 영화는 카메라의 현란함과 컴퓨터그래픽의 화려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기본적인 카메라의 연출에 의존한다. 그래서인지 인상깊은 장면은 송우석 변호사가 고교동창에서 기자를 하던 친구와 싸울 때이다. 그의 어지러운 정신과 정신적 과도기에서 카메라를 over shoulder shot를 보일 때, 송우석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어지럽게 보인다.

 

 

또한 다른 인물이 송우석을 바라보는 화면은 close-up으로, 송우석이 바라보는 때에는 over shoulder shot으로 처리한다. 카메라 앵글에서 송우석 관점으로 보는 세상이란 과연 어느 것이란 말인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제일 인상 깊은 카메라 무빙워크는 법정에서 아무도 통하지 않는 세계에서 혼자 헌법의 권리를 변호인으로 말하는 광경이다. walking out-side란 기법으로 피사체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카메라를 돌리는 것이다. 낯선 법정, 울고 있는 학생들의 가족들, 실제 재판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과 심한 비인격적 행위로 법정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실제 모델인 된 인물이 겪은 일 때문에 나는 올해 2번을 울었다. 그것도 같은 날에 말이다. 알고는 있지만, 이른바 “원진 레이온” 사건에서 이황화탄소(CS2)라는 독가스를 마신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장애판단을 받았다. 문제는 회사에서 산업재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그 노동자와 가족들이 곤란한 지경이었다. 당시 그는 휠체어를 타고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그 노동자를 보고 차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 봉고차를 타고 돌아가는데, 그 노동자의 딸이 울면서 달려와 “우리 아버지 살려주세요!”라는 모습을 생각하면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죽고 “원진 레이온” 희생자가 추모하는 모습이다. 모르겠다. 나의 아버지도 역시 선원이었고, 힘든 노동조건에서 귀가 난청이 되고, 열 때문에 피부가 손상입고, 심하게 다쳤다. 그런다고 아무 말도 없이 일만 했지만, 육체는 상하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계속 보고 자랐다. 그러면서 힘이 없으면 그저 숙여 살아가는 것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울화통이 속에서 치밀어 오른다. 아직도 무서운 세상에 살아간다는 말에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어떻게 보면 나 같은 사람들이 주인공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마지막으로 고문에 대한 장면이 인상 깊다. 고문이 전체 영화의 70%를 차지하는 <남영동 1985>에서 고문이란 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같이 고문하는 자마저 고문당하는 것인지 보여준다. 인간의 정신의 파괴에서 폭력, 수조에 얼굴에 담구기, 얼굴에 헝겊을 두르고 고춧물을 뿌리기라는 비인격적 고문은 볼 때마다 불편하다. 내가 어린 시절에 들은 이야기가 영화로 나오나, 그것이 하나의 사실이었다는 점이고, 특히나 전기고문과 같이 인간을 반불구자로 만드는 비인도적인 방법을 국민에게 행한 것도 모자라 오히려 정당하다고 믿는 자들로부터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처럼 정의란 단지 폭력에 의해 정당화 되는 가장 비열한 이름이 되지 않았나 싶다.

 

19세기 철학자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1793년 여름, 프랑스대혁명의 여걸이며, 장 자크 루소를 사모했던 롤랑 부인이 단두대 아래에 사라져가기 전에 이런 말을 외쳤다.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작품에서 차경감이 고문하던 진우에게 묻는다. 너의 사상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진우는 이렇게 대답한다. “실존주의”라고 말이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인간의 실존은 결국 개인에 대한 그 자체의 자유이다. 자유가 없기에 우리는 실존적으로 자신의 주인조차 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헌법은 일반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전체의지로서 반영된 법이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 이상으로 위험한 것이 없다. 국가란 무엇이며,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 <변호인>에 숨어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곰곰생각하는발 2013-12-24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진레이온 이야기' 늘 만애비 님에게 듣는 소리이지만 들을 때마다 울컥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12-24 12:43   좋아요 0 | URL
다른 것은 모르나. 어제 글쓰면서 원진레이온만 생각하니 울컥하여 눈물이 나덥니다. 노무현대통령의 서거만큼 더 슬픈 게 저런 현실이 아직까지 지속되는 점이죠
 

 

최근에 신작들을 보며 느낀 바가 과연 저 작품이 의미하는 바에서 너무 미소녀 모에 내지 노출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좋은 지적과 참고가 된 철학교수 김용석의 <서사철학>이란 도서에서 서사라는 스토리에서 읽어내는 담론으로 통해 어느 이데올로기를 찾아볼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 점이다. 최근 종용한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를 현재 보고 있는데, 본인은 애니플러스에서 감상하고 있으므로 1주일 정도 늦게 보고 있다.

 

이번주에 아마 12화 마지막을 하는데, 작품 내용을 전반을 보면 용자가 되지 못한 남자 1명에 다수의 미소녀들이 모여 그것도 몸매가 좋아서 걸을 때마다 가슴이 출렁거릴 정도이다. 몸과 가슴이 별개로 움직이는 작화에서 너무 성적인 부분을 강조하지 않은가에서 우리나라 심의등급으로 18세 미만은 금지이니 아마 그럴 것 같다. 문제는 이런 작품들이 난무한 점에서 이런 작품들을 무한히 까댈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 점이다.

 

얼마 전에 용사 이야기에 대한 작품에서 새로운 흐름이 일어났다. 용자와 마왕이 손을 잡는 <마왕용자 마오유우>, 아르바이트를 하는 마왕인 <알바뛰는 마왕>, 그리고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까지를 보면 기존의 용사와 마왕이란 존재에 대한 헤게모니 관계가 해체되어 버린 점을 알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이런 계기는 어디서 나올까?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마든지 나의 개인적 관점이라 볼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꼭 그렇게 여길 수도 없다.

 

가령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로 해체주의 철학을 강의한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란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그 책이 논하고자 하는 취지만 알면 간단하다.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 바로 위의 마왕들의 소재에서 자본의 국경이 없다는 것을 논하는 것이다. <마왕용사 마오유우>에서 여자인 마왕은 자본주의 기본적인 대량생산 체계에 도움이 되는 과학기술을 전파하고, 오히려 상업적인 전략으로 통해 연합세력을 모운다. <알바뛰는 마왕>의 경우 마왕이 오히려 햄버거가게의 점원이 되어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마지막인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에서 용자나 마왕이나 모두 점원으로 일하는 모습이 나온다. 국경은 바로 마족과 인간의 경계지점에서 발생하는 대립구간이나, 이 구간에서 모두 자본이 뛰어넘는다. 생각해보면 "자본을 국경을 초월한" 것처럼 생산체계가 과거 미소냉전 체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본 그 자체가 모두 초월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 작품들은 다르게 보는 것이 정석이다. 볼만한 게 아니라 보고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전후맥락이 필요한 점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연방 해체이후 러시아 역시 자본주의국가체계를 도입했고, 자본주의국가체계에서도 기존의 소비에트 연방은 국가자본주의라는 점이고, 중공 역시 국가자본주의가 시장경제자유주의를 병행하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어떻게 보자면 제일 유치한 작품이란 너무 입맛에 적당히 칠해진 작품일 것이다. 과거에 <케이온>과 <Beck>에서 개연성과 입맛성을 생각했는데,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이데아적인 세계에 많은 것을 긍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 보다는 그 문제 자체를 없애고 해결하는 것이 목적을 둔다.

 

 

결국 형이상학적 이분법으로 인해 작품성에 논지를 두고 본다면 어설픈 논리만 나오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란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는 그런 문제를 아주 이상하게 꼬집은 작품이다. 마왕이 죽고 죽은 마왕의 딸이 마왕이 되어야 하는 운명에서 분명 마왕의 딸이 인간계로 온 것에서 순탄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필연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잊고 있는 사실에서 진장한 나쁜 것이 무엇인지 악이란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윤리성이다. 과거 미소냉전에는 단지 이데올로기만으로 판단할 수 있으나, 이데올로기가 탈 이데올로기되었다고 해서 그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탈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용사란 평화를 지키고 인명을 구하는 숭고한 임무이나, 그것은 그것을 위협하는 존재가 나오는 경우다. 결국 인간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삶을 지키는 것에서 철학적으로 본다면 그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용사가 필요하지, 그게 완료되면 용사란 그저 필요하지 않은 존재다. 그러나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에서 용사는 상당한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으며, 오히려 마왕이 있어야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운다. 순간 작품을 보며 우리 사회를 보게 된다.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기, 아니라면 안 될 가능성이 높은 자를 오히려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구조를 말이다.

 

라울의 예전동료들은 모두 강력한 힘을 가진 자다. 그런 자들이 장기적인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헤게모니적인 근거를 만들어내야 한다. 결국 피노를 악마의 군주로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작품의 피노는 그저 어린애같은 어리광만 피우는 미소녀 마족이다. 그런 피노가 악으로 되는 것은 악으로 되게 만드는 외압적인 요소가 크다. 이런 점을 파악하고 리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자세이다. 이야기의 구조가 표면적 구조와 달리 내면적 구조 혹은 차용하는 구조까지 같이 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작품에 대한 고찰이다.

 

작품을 내가 보는데 있어서 항상 검토하는 것은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요소이다. 가령 아래의 그림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낭만주의 화풍에서 1830년 프랑스혁명의 상징성을 담고 있다. 여신의 존재에서 그녀는 자유의 여신이기도 하나, 다른 존재에서 보면 최고의 마녀이다. 가령 <마법소녀 마도카 미기카>에서 큐베가 마도카는 최고의 마법소녀이면서도 최고의 마녀가 된다고 했다. 인간의 존재성에서 그 상징적 존재가 가장 위대하면 가장 최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절대왕정에서 루이16세는 태양왕의 후손이나, 1793년에는 자신의 의지보단 주변의 상황에 의해 목이 잘리는 비운을 겪는다. 그렇다면 루이16세가 포악하고 나쁜 왕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의 취미는 열쇠 자물쇠 만들기(장 자크 루소를 그토록 비웃어도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의 책에 따른 영향이 반영)고, 가난하고 배고픈 백성을 염려했다. 하지만 이미 주변에 장악한 봉건귀족의 이권놀이에 더 세금을 거두지 못했다.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 프랑스혁명은 루이16세가 나쁜 왕이 아니라 힘없는 왕이었고, 경제적 구조로 일어난 혁명이다.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에서 피노를 다시 돌아보자.

 

피노는 아버지가 난폭하여 자신의 어머니를 괴롭히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이 있고, 힘이 약한 마족을 괴롭히는 것도 부당하게 여긴다. 마왕의 딸이면서 전혀 일반인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생각조차 않고, 오히려 시장경제자유주의에서 긍정적요소만 바라보고 있다. 그 가치는 분명 도덕적인 상인윤리를 바탕하는 조건이다. 주변 사회의 약자인 노인에게 친절하고, 어린아이와 친하게 지낸다. 누가 보아도 좋은 성품을 지닌 왈가닥 소녀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하나의 상징적 희생양이 되길 바란다. 왕은 가장 훌륭한 상징이면서도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요새 마왕과 용자의 관계를 다시 봐야 할 것이다. 이때까지 용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한 아버지 살해가 정당화 할 수 있는 신화적 이야기로 생각했다.

 

마왕은 나이가 많고 이미 구체계의 지배자고, 용사는 신세계의 지도자이다.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면 공주와 결혼하여 왕위를 이어가거나 혹은 왕위를 이어가지 않아도 왕국의 모든 병사가 대항해도 용사에게 이길 수가 없다. 용사란 신세계에서 새로운 질서이며, 체계이다. 왜 우라노스가 자신의 남근을 크로노스에게 베였겠는가? 제임스 프레이져 경의 <황금가지>에서 어느 남자가 나무 아래서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겠는가? 그 나무 아래 남자는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살해자는 왕이 되고, 몇 년 뒤에 다시 살해당한다. 잘 기억하자. 우리나라 왕족도 가뭄이나 재해가 일어나면 희생양이 되던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용자물이나 용사이야기가 그저 뻔한 이야기만으로 보는 게 좋지 못한 것임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남도답사 일번지, 개정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중학교 시절인가?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란 도서가 처음으로 나온 것 같았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 다시 1권을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왜 이 책을 도서관에 비치하고 학생들에 추천도서로 선정했는 알 수 있었는데, 내가 다닌 중학교는 불교재단이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기본적으로 불교유산이 상당히 많다. 유흥준 교수는 불교신자보단 문화재를 사랑하고 미술을 사랑하는 미술사학자이다. 본래는 미학을 전공했으나 문화미술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미적인 감각으로 통해 제자들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은 불교문화에 상당히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가령 삼국시대부터 불교가 들어왔는데, 정치제도적인 구조에서 본다면 원래 한국은 고대정치관은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즉 임금이 제사를 직접 지내는 자라는 점에서 건국신화로 통해 보면 그들이 왕으로서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이데올로기 관점을 내세운다. 가령 우수한 문화와 기술을 소유하고, 게다가 무술과 학문을 가지고 있다면 그 당시에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중국 역사 중에 삼국지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에서 제후들이 왕으로 갈 수 있는 이유는 왕 자체가 하나의 장수이기도 했다.

 

삼국지에서 유비라도 황족이라고 하나, 그는 황건적과 동탁, 조조 등처럼 강력한 적과 라이벌을 싸운 하나의 장수이다. 장수로서 무예와 문예가 어울려진 점에서 고대 정치적인 조건에서 필요한 것은 왕은 하나의 정치지도자이면서도 장수라는 점이다. 왕이 직접 전쟁에서 지휘하고, 선두에서 적을 무찌르며, 정사를 직접 관여한다. 그러나 국가제도가 안정되고 왕의 영역과 권력이 넓어짐에 따라 왕이 직접 전선에 나가거나 혹은 지휘하는 것보단 휘하에 장수로 통해 실시된다. 그러나 만약 그 장수가 왕과 같은 출중한 무예와 지략이 있다면 왕에게 큰 위험존재가 아닐 수가 없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말에 모든 군주의 몰락은 외세의 침략과 더불어 장수들의 반란이다.

 

고려의 왕건 역시 장수이고, 발해의 왕 대조영 역시 장수이며, 조선의 이성계 역시 장수이다. 그런 위험한 정치관계에서 불교의 유입은 왕권의 강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부처나 보살을 왕족이나 귀족에 비유하고 중생을 피지배계급자에게 부여함에서 왕권강화와 더불어 지배체계를 도모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크게 번창하고, 숭유억불이던 조선시대에도 왕족이나 많은 양반들도 불교사찰에 큰 지원을 주었으며, 게다가 중으로 출가한 왕족에 학문의 명성이 뛰어난 승려도 많았다.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혹은 학문적이든 철학적이든 어느 것이라도 후세에 다르게 되면 다른 모습에서 접하게 된다. 당시 매우 신성한 종교적인 요소가 깃든 불교 내지 여러가지 제도의 산물이 지금에서도 강한 종교적인 주술적 도구로 되거나 혹은 예술품 내지 골동품, 더 가치가 있다면 문화재로 승급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부정신학이란 단어가 여기서 탄생한다. 신성한 것으로 탄생된 문화재는 당시로는 큰 종교적 위력을 가진 상징적 존재이나, 지금은 종교보단 오히려 문화재로서 예술과 문화로서 접근한다.

 

그런 문화의 숨결이 우리에겐 일상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쉬운 것인지 어려운 것인지 생각해보면 그 나름일지도 모른다.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우리 주변에 넓린 문화재가 얼마든지 많으며, 우리는 사소한 것이 있는데도 그저 지나가는 행인처럼 여기는 점이다. 거기다가 단순히 보러 온 게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역사적인 맥락과 더불어 조형적인 미까지 더 설명하니 이 책은 문화유산에 대한 시각을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지침서이다. 한국문화의 한계성에서 이른바 스토리텔링이 약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 스토리텔링을 살리기 위해 역사를 알고, 문화를 알고, 그 현장에 가서 채취와 온기 그리고 그 미학적 감각을 맛보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스토리의 발단이다.

 

사소한 돌 하나에 담긴 이야기와 그 공간에서 생긴 사람들의 시간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와 별개로 보이나, 그 물질적 존재는 우리에게 아직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제일 1번의 고향은 남도기행이고, 남도 중에 큰 답사지는 바로 강진과 해남이다. 강진이면 누가 어떻게 유명한가? 유흥준 교수도 역시 먹물을 먹은 사람이고, 먹물들을 만드는 지식인이다.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한국에서 자신들이 지식인이라고 믿거나 혹은 되고 싶은 자들이 뽑는 한국 위인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계신다.

 

물론 나 역시 다산 정약용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 지식인이 되고싶었던 지금이나 지식인이 되는 것과 전혀 무관한 20살 전후 시절에도 그 분을 가장 존경했다. 어려운 다산학에 대해 유학으로서 대하는 것은 나의 역량으로 불가하나, 그 분의 업적과 사상을 들여다보면,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보다 약하고 힘든 농민과 백성을 보면 분노하고 탄성을 했던 그 어진 도량, 특히 애절양이란 시는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을 찌른다. 군포세를 내지 못해 소를 빼앗긴 농민이 관아의 폭정에 참지 못해 자신의 성기를 잘라내고, 아낙네는 자신의 성기를 들고 관아에 가서 군포세 면제를 요청하나 비참하게 외면당한다. 그리고 그 갈대밭의 아나넥의 우는 모습을 본 다산은 그 시를 강진에서 지었다고 하니, 얼마나 강진이 우리 국문학에서 큰 빛을 내었는가?

 

하지만 그 빛은 빛이 나서는 안 될 빛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에 아무런 힘 없이 바라보던 귀향당한 정치인의 비참에서 태어난 시였다. 다산초당이 있는 강진군 도암면 귤동리, 실제로 나도 그 곳에 가서 다산초당도 가고, 혜장스님과 초의선사가 서로 왕래가 있던 백련사(만덕사)에 가보았다. 다산초당에서 보는 강진포구는 아름답지만, 마음에서 우려나오는 그 분에 대한 마음에서 아픔이 스며든다. 강진에서 다산초당을 지나 그분의 외갓집인 해남 녹우당도 나오고, 그런 후에 경주가 나온다.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유흥준 교수가 경주를 알기 위한 3가지에서 신라의 미학을 알 수 있는데, 신라의 본래 예술문화를 보면 단조로움과 소박함이 시작이라면, 후에 갈수록 수려하고 아름다운 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신라는 불교문화를 가장 늦게 받았고, 같은 시기에 백제보다 건축기술이나 귀금속 제조기술이 낮았다. 하지만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불교문화의 유입으로 신라의 천마총을 비롯한 많은 석탑과 사찰의 미는 아주 화려하고 아릅답다.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보이는 건축기술은 세계를 모두 놀래키고, 에밀레종의 울음소리는 매우 아름다워 그 소리를 낼 수 있는 종은 아예 없다는 일본 어느 학자의 말처럼, 우리의 문화는 아름다고 위대한 것이 많다. 자치 하면 민족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나, 급격히 산업화가 된 한국에서 전통문화의 씨앗이 사라지는 현실에서 이런 책은 우리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서적인 것이다.

 

그런 반성과 사유의 내용이 은근슬쩍 들어가 있고, 일제강점기의 고통과 군사독재의 아픔들이 아름다운 강산에 남겨 천박함을 아쉬워하던 유흥준 교수의 글에서 우리가 과거를 보고 현재를 알아가고,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적 메시지도 던진다. 그런 의미답게 유흥준 교수도 자신의 집필의 실수를 혼쾌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여 그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메모도 잊지 않는다. 해외의 문물경험도 좋으나, 한국의 미를 찾는 것도 생각보다 재미있다. 물론 모더니즘이란 엘리트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한계성은 있겠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수건달 (1disc)
조진규 감독, 박신양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박수건달이란 영화는 전형적인 한국의 저급한 3류틱한 조폭영화라는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3류 이상의 재미있는 요소와 학술적인 요소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문제는 결론적인 서사구조에서 보이는 점은 역시 3류는 그렇고 2류에 머물고 2류 중에서도 약간 떨어지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보이는 중요한 요소는 분명 있다. 그것은 건달이 하고 있는 박수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한국에서 고전이나 혹은 주요한 전통문화를 찾아가면 무속신앙에 대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巫라는 것은 하늘과 땅을 잇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神壇樹(신단수)라는 것에서 신단에 해당되는 나무가 바로 박달나무이다. 박달나무는 檀이란 단자이고, 한국의 최초 국가라는 고조선을 건립한 단군의 단자가 바로 박달나무이다. 그래서 한국의 최초의 왕은 무당이라는 뜻이다. 무당의 의미에서 현대에는 그저 미신에 불과하나 미신의 세계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이유는 그 미신이라 여기는 무속신앙 내지 문화에서 우리민족의 자화상 내지 존재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20세기 위대한 사상가이자 인류학자인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프랑스 구조주의 창시자로 알려져 분으로 그의 저서인 <슬픈열대>와 더불어 명작인 <야생의 사고>를 읽게 되는 순간 우리는 야만인을 대하는 어리석은 문명의 야만을 반성해야 한다. <야생의 사고>에서 야만인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 우리 문명인들은 알 수 없는 미스테리 내지 혹은 미신 내지 미개한 문화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자연적 조건과 더불어 오랫동안 살아온 문화의 소산이다.

 

오히려 야생의 사고라고 여기는 부분에서 문명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도리어 미개인들이 훨씬 웃돌고 있을 수 있다. 린네가 발견한 식물분류법보다 더 세분화된 지식으로 알아보는 원주민들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원주민에서 문명의 식물학자와 원주민 중에서 누가 식물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물론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으로 원주민들의 에믹의 요소보단 에틱으로 대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문화유물론적인 요소에서도 물질이 문화를 구성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연적, 지리적, 기후적인 요소로서 문화를 이룩한 것이다.

 

박수건달이란 영화로 돌아보면 한국의 문화적, 자연적, 지리적 특성에 대해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을 맡은 박신양 씨는 작품에서 조폭건달로 나온다. 그런 그가 무병에 걸려 무당이 되는 것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부산의 어느 어촌마을의 어항을 이전하여 그 자리에 큰 건물을 세울 계획을 세운다. 지금도 부산의 어항에 가면 마을주민들이 모여 용왕제를 열고 한다. 용왕제에 무당을 부르고 어민과 마을주민이 모여 한데 어울려 술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민중문화에서 굿이란 하나의 문화는 공동체적인 문화형성과 더불어 집단의 공동체 정신을 재확인 후에 더 견고하게 다지는 계기라는 것이다.

 

굿이란 것과 혹은 제사를 지낸 이유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무속신앙에서 기본적인 원리는 결국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이다. 위로를 하는 대상이 죽은 자에 대한 위로가 결국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인 것이다. 제사문화에서 한국의 정신이란 바로 공동체적인 정신이다. 그런다고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아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그 소수의 부족과 씨족 혹은 마을주민이 어울리는 작은 공동체로 이루기 때문이다. 박수건달에서 무당이란 자는 결국 그런 의식행사를 진행하고 만들어주는 하나의 상징적 요소이다.

 

단군신화에서 단군은 제사장과 더불어 임금이란 군장을 맡는다. 그가 왕으로서 제정일치를 추구한 것은 왕권이 결국 주종관계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라는 오이디푸스(거세공포와 더불어 죽은 아버지 죽음에 대한 위로와 슬픔, 살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적인 부자관계로서 국가와 부족을 이끈다. 기본적으로 한국이란 농경문화를 가진 민족이었고, 어민이라고 해도 100% 물고기를 잡지만은 않았다.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가축도 기른다. 농경문화의 자급자족인 생활요소가 결국 공동체의식을 키운 것이다.

 

놀이라는 문화가 노동이 수반되기에 특히 농민과 더불어 어민도 민요를 부르며 고기를 낚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기계의 발달로 좋은 장비로 물고기를 잡는다고 해도, 결국 여러 사람들이 많은 배를 동원하여 집단으로 고기를 낚는 방법도 존재하고, 바다에 나가면 풍랑과 재해로 사고를 당할 수 있으므로 서로간의 연락망을 항시 유지하고, 그것을 위해 친분을 유지한다. 그래서 용왕제 굿판은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좋은 볼거리라는 점이다. 작중에서 박신양 씨도 박수건달이 되어 최종적인 위기 전편이 굿판의 모험이다.

 

오이가 위에 떨어지는 바로 두 동강이 나는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무당역에서 위기에 봉착하나, 무당의 신기로 그 위기를 모면한다. 현대과학기술로도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것이 칼 위에서의 무당의 춤이다. 본래 무당이란 용어에서 샤먼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샤먼은 미친듯이 춤을 추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초자아적인 세계에 보이는 현실공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 무당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을망정, 그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무속인은 2가지로 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하여 누군가 해결해주길 바라는 심정이 있다. 그런 무의식적인 불안과 고민이 무당의 존재를 탄생하게 한다.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혼의 존재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없다고만 할 수는 없다. 기적의 이야기는 신화와 설화로서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당의 문제는 집단이 가지고 있는 그런 욕망의 대변인이란 점에서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또한 개인 대 개인으로서 보자면 어느 개인에 대하여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이해해주는 존재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우리 현대인이나 과거에 살던 사람이나 정신적 불안을 영원히 떨친 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문명이 시작된 이래 말이다. 그러나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처럼 중세시대 유럽시대에 광인들이 나오면 그들을 분리하거나 제거하거나 혹은 가두지 않았다. 그들이야 말로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무의식적인 억압이나 혹은 표현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정신병원이 생긴 이래로 그런 자들은 더 이상 거리를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광인 중에서 물이 어는 추운 날에도 덥다는 말을 하고 속옷만 입는 자도 있다.

 

인간이 가진 육체적 조건과 정신적 조건을 모두 무시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무당 역시 현대에서 보면 그저 굿만 하고, 점만 치는 사람으로 떨어진 셈이다. 그래서 박수건달에서 진정 무당의 존재라는 무엇인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 건달이고, 무당 남성은 박수라고 하기에 박수건달이란 작명은 분명 어울린다. 박신양 씨가 하는 행동을 보면 죽은 자가 빙의하여 살아있는 자를 만나게 한다.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살아있는 자가 안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여 심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억압되어 그것이 하나의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갇혀있는 말을 표출하게 하거나 혹은 과잉행동을 하는 것이다. 작품에서 마음의 병이 있는 인물들은 박신양 씨의 이야기에 모두 울고 통곡을 한다. 하지만 박수건달인 박신양 씨도 같이 울고 통곡을 한다. 무당이란 자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가는 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은 무의식적 공간에 깊숙하게 들어가 공유하는 자라는 것이다. 박수건달에서 보이는 한국인의 恨이란 것으로 통해 원래는 무속문화가 인간을 넓리 이롭게 하는 단군신앙의 홍익인간 정신에서 시작되나, 현실은 그저 자기만족에 취하려는 고객과 더불어 그것을 이용하는 상술이 존재하는 게 대부분이다.

 

구복신앙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 무속신앙의 한계점이고, 지금은 기독교, 불교, 수많은 종교들이 대체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천주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란 존재로 통해 넓리 사랑을 전파하는 박애사상이나, 혹은 불교의 부처님이 자비로 통해 중생을 구제하는 박애정신에서 종교의 시작과 교리 및 기타 문화적 조건을 달라도 철학적 베이스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급격하게 신격화 된다. 보살과 부처를 모신 무당의 집에 기독교 신자가 예수님도 영원하다고 하여 그 무당은 예수님의 조각상을 보살과 부처님과 같이 모셨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보살과 부처 이전에 무속신앙은 도교신앙과 결합하여 장군상과 신선, 동자상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은 자신(들)만이 가지는 불안과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미신이라 여기는 무속인에게 간다. 그리고 진짜 무속인을 만나면 그들은 울고웃고, 그저그런 무속인을 만나면 웃거나 근심어린 표정으로 나올 것이다. 그래서 박수건달이란 영화는 진짜 무당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어항을 개발하려고 조폭을 투입하여 이전하고, 그러기 위해 굿을 했다는 점은 폭력조직이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힘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래서 <박수건달>은 한국의 무속에 대해 재밌게 다른 점은 높게 인정하나, 그 전개가 한계라는 점이다.

 

집필시간 : 30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미제라블
톰 후퍼 감독, 휴 잭맨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프랑스혁명의 상징성에서 보여주는 어두운 현실과 더불어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프랑스혁명을 찾아보면 총 5번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프랑스혁명은 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 함락과 더불어 앙시앵레짐(구체제)의 해체를 만든 프랑스대혁명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혁명은 더 있었으나, 역사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일어난 것이 1830년, 이후가 1848년, 잔혹하고 안타까운 1871년 파리꼬뮌, 이후로 1968년 5월 혁명이다.

 

프랑스혁명사에서 18세기와 19세기의 사상과 20세기의 사상은 조금 차이가 있다. 18세기와 19세기 혁명의 정신적 지주는 장 자크 루소였다면, 20세기의 프랑스혁명은 카를 마르크스였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 역시 장 자크 루소의 승계자라고 보는 리오 담로시의 <루소, 인간불평등의 발견자>처럼 장 자크 루소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기여와 더불어 프랑스라는 나라 그 존재성마저 기여한 것이다. 20세기 프랑스 영화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의 색에서 프랑스의 상징인 3가지 색이 블루, 화이트, 레드이다.

 

그것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공화국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프랑스공화국의 그 시초를 이룬 것은 역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이다. 이것을 읽지 않고 프랑스를 말하는 것조차가 어려울 수 있다. 그들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삶의 철학까지 인간 그 자체로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추구하기 위해 투쟁한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그런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대한 투철한 반사의식이 보인다.

 

영화라는 2시간 조금 넘는 런닝타임에서 충분히 만끽할 수 없으나, 장발장이 감옥에 투옥되어 힘들게 살아온 것에서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미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불평등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 있다. 선천적인 것은 인종과 성별이란 생물학적 요소로 볼 수 있으나, 후천적인 요소는 사회적 지위, 경제적 여건 그리고 정치적 입장이다. 구체제에서 저술한 <인간불평등기원론> 그리고 이후에 나온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무척 위험한 도서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느끼기에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상에서 지금도 루소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루소가 물어보고 있는 불평등에 대해 비참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 제목에서 레미제라블에서 레란 res라는 것으로 다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미제라블은 비참하다는 말이다. 레미제라블은 다시 비참해진다는 의미이다. 비참한 역사적 되풀이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릐메르 18일>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역사는 2번 되풀이 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희극으로(소극으로), 희극이란 즐거운 것이 아니나, 루이 16세를 단두대 아래에서 하나를 이슬로 만들었던 프랑스가 다시 왕정군주제로 변모했다.

 

당초 프랑스대혁명을 주도하고, 국민공회를 설치하여 세계민주주의역사에서 큰 획을 긋은 자코뱅당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잠시 몸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의 죽음 이후 테르미도르당의 부패한 정치행위와 무능함은 결국 프랑스를 힘들게 만들었고,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런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루소에 대해 경배했거만, 추후에는 루소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레미제라블에서 황제가 있는 프랑스는 결국 나폴레옹이 집권시절이다.

 

그러나 주인공 장발장이 갇힌 것은 영화배경이 되는 1815년에서 19년 전에 잡힌 1796년이란 점에서 프랑스대혁명의 실패와 더불어 빵 하나를 훔친 것이 큰 죄가 된 것처럼 여전히 프랑스의 하층민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의 영웅에서 당통, 로베스피에르, 마라가 있으나, 결국 혁명의 원인은 대의를 가진 마리우스 같은 인물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빈곤한 농민과 피지배계층의 불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분노였다. 장발장이 가진 것은 처음에 오로지 분노였으나, 어느 성당의 신부님의 구원으로 새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훌륭한 도시의 시장이었고, 탁원한 공장의 운영자였다. 만약 신부님의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신의 은총이 없었다면 계속 어두운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 프랑스혁명 시기나 혹은 장 자크 루소의 관련 서적을 봐도 프랑스 성직자의 부패와 비리는 여전했다는 점이다. 신의 운명에 점찍어 모든 것을 정하는 방식이란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신의 은총을 내린 것은 장발장과 코제트, 마리우스라는 일부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든 소설이나 주인공 위주 서사는 결국 주인공만을 보게 되는 한계점에서 주변 인물의 운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한계성이 있다. 그래도 영화는 충실하게 그 비참한 서민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일반적인 대사보다 오페라 내지 뮤지컬적인 요소로 통해 감정의 기복을 더욱 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에서 그런 진지한 요소는 처음에 장발장이 노예로서 죄수생활을 할 때 24601번으로 가석방 나오는 모습이다.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에게 깃발을 들고 오라고 한다. 깃발은 프랑스의 삼색기, 마지막에 장발장이 죽고 나서 그의 꿈은 역시 삼색기가 흔들리는 광장이다.

 

자유, 평등, 박애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릐메르 18일>처럼 공화국의 상징은 보평, 포병, 기병에 의해 무참히 밟힌다. 그래도 붉은 색의 깃발은 잊을 수가 없다. 검고 어두운 불운한 현실에서 붉은 색의 희망을 찾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붉은 색이란 영화 중간에 혁명을 시도하다 실패한 이들의 붉은 눈물처럼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나무는 인간의 피를 마시고 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 그들은 총과 칼을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가? 혁명의 기본적 문제에서 장발장과 코제트의 어머니 판틴처럼 그들은 현실이 아닌 미래를 잡아가길 원한 것이다.

 

장발장은 자기의 어린 조카가 굶주려서 빵을 훔쳤으나, 결국 수감되고, 조카는 굶주림과 병으로 죽게 된다. 그리고 판틴은 어린 코제트를 살리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고 몸을 팔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에 빠진다. 그리고 비참한 인생의 종말은 죽음이었다. 희망이란 단어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에게 박애정신만큼 위대한 정신이 없다. 자유와 평등이 존재에서는 개인적인 부분에서 존재할 수 있으나, 프랑스혁명을 이끈 로베스피에르가 군중에게 외친 것처럼 자유라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유가 있어야지 자신의 자유가 계속 누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자유란 결국 박애정신이 되는 것이다. 마리우스 친구가 그렇게 죽어갔으나 삼색기와 더불어 붉은 색의 깃발을 흔든 것은 박애정신이다. 그 박애정신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냉혹한 자베르 경감마저 경의로서 자신의 훈장을 어린 소년에게 바친다. 그 소년의 모습이 동서출판사에 나온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서적표지와 어울리지 않은가?

 

 

낭만주의 화가인 외젠 틀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은 결국 1830년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혁명 이후 사라지는 별들이었으나, 위대한 민중들의 의지를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레미제라블은 소설이므로 배경은 1832년으로 되어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바리케이트 너머라는 웅장한 노래처럼 그 너머를 향해 죽음이란 것을 택한 이들의 절대적 신념에 그저 가슴이 쓰릴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 친구들은 모두 죽으나, 마리우스가 장발장에 의해 구출되고, 후에 코제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문제는 마리우스는 귀족의 집안이란 점에서 프랑스혁명가로서 마리우스는 성공하지 못하고, 그저 남자인 마리우스만 성공한다. 영화에서 혁명은 실패해도 사랑은 성공했다는 스토리라인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판틴이 죽어가는 장발장을 데리고 나오는 모습에서 장발장의 영혼은 사랑에 대한 노래에서 혁명을 일으킨 민중들의 노래와 합류한다.

 

어찌보면 지금은 구체제에 순응할 수 없는 코제트(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상)와 마리우스이나, 언제가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이것을 모두에게 전해주는 박애정신이 넘치는 것을 꿈꾸고 있다. 이후 제일 비참한 1871년 파리꼬뮌에서는 당시 몇 만명이 넘는 파리시민이 싸우다 전사하고, 포로로 잡혀도 살해당했다.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나폴레옹3세는 결국 파리시민을 무참하게도 배반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잔혹하고 급박했을까? 13~14세 소년소녀들이 총과 대포를 나르고, 팔이 하나 없어져도 저항하는 모습이 나온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 코제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슬픈 이야기다. 죄를 짓고 싶어서 짓는 게 아니라 죄를 계속 만들 수밖에 없는 비참한 환경을 말이다. 자베르 경감은 법을 무조건 지키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역사의 뿌리인 <사회계약론>에서 국가의 3가지 체계에서 입법, 행정, 사법에서 입법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오로지 잘못된 법을 바꾸는 것은 입법에서 가능하고, 민주주의는 입법에서 시작하는 점에서 말이다. 입법에서 잘못된 관례나 법규를 바꾸고 새로운 제도는 정비하는 것은 법이란 약자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는 국가의 법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한 것은 법이란 결국 힘이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밖에 되지 않는 점이다. 자베르에게 자비를 베푼 장발장에서 민주주의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나, 그것의 기반은 박애정신이다. 자베르 경감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만의 정의라는 법이 결국 박애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베르가 장발장에게 이길 수 없었던 것은 처음 자베르경감이 장발장을 그저 죄인으로 보았을 뿐이었으나, 장발장이 누구보다 더 박애정신이 넘치는 위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죄인으로 보자니 그에게 받은 자비는 자신의 양심을 찌르고, 그를 인정하자니 자베르경감은 자신의 존재적 의미에서 모순을 겪는다. 2명이 존재할 수 없다면 1명은 물러나야 한다. 결국 자베르경감은 자신의 도덕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신이 주는 정의가 법인 자베르경감, 신이 주는 정의는 결국 사랑이란 장발장에서 현실은 자베르경감에 가까우나,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은 장발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쉽지 않다. 낭만주의 문학인 점에서 낭만주의란 목숨을 걸고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로 위험한 일들이 주인공에게 펼쳐진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계속 되풀이 되는 소극이 된다. 물론 소극에서 당하는 자들은 비극이나 말이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