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남도답사 일번지, 개정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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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시절인가?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란 도서가 처음으로 나온 것 같았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 다시 1권을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왜 이 책을 도서관에 비치하고 학생들에 추천도서로 선정했는 알 수 있었는데, 내가 다닌 중학교는 불교재단이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기본적으로 불교유산이 상당히 많다. 유흥준 교수는 불교신자보단 문화재를 사랑하고 미술을 사랑하는 미술사학자이다. 본래는 미학을 전공했으나 문화미술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미적인 감각으로 통해 제자들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은 불교문화에 상당히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가령 삼국시대부터 불교가 들어왔는데, 정치제도적인 구조에서 본다면 원래 한국은 고대정치관은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즉 임금이 제사를 직접 지내는 자라는 점에서 건국신화로 통해 보면 그들이 왕으로서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이데올로기 관점을 내세운다. 가령 우수한 문화와 기술을 소유하고, 게다가 무술과 학문을 가지고 있다면 그 당시에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중국 역사 중에 삼국지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에서 제후들이 왕으로 갈 수 있는 이유는 왕 자체가 하나의 장수이기도 했다.

 

삼국지에서 유비라도 황족이라고 하나, 그는 황건적과 동탁, 조조 등처럼 강력한 적과 라이벌을 싸운 하나의 장수이다. 장수로서 무예와 문예가 어울려진 점에서 고대 정치적인 조건에서 필요한 것은 왕은 하나의 정치지도자이면서도 장수라는 점이다. 왕이 직접 전쟁에서 지휘하고, 선두에서 적을 무찌르며, 정사를 직접 관여한다. 그러나 국가제도가 안정되고 왕의 영역과 권력이 넓어짐에 따라 왕이 직접 전선에 나가거나 혹은 지휘하는 것보단 휘하에 장수로 통해 실시된다. 그러나 만약 그 장수가 왕과 같은 출중한 무예와 지략이 있다면 왕에게 큰 위험존재가 아닐 수가 없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말에 모든 군주의 몰락은 외세의 침략과 더불어 장수들의 반란이다.

 

고려의 왕건 역시 장수이고, 발해의 왕 대조영 역시 장수이며, 조선의 이성계 역시 장수이다. 그런 위험한 정치관계에서 불교의 유입은 왕권의 강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부처나 보살을 왕족이나 귀족에 비유하고 중생을 피지배계급자에게 부여함에서 왕권강화와 더불어 지배체계를 도모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크게 번창하고, 숭유억불이던 조선시대에도 왕족이나 많은 양반들도 불교사찰에 큰 지원을 주었으며, 게다가 중으로 출가한 왕족에 학문의 명성이 뛰어난 승려도 많았다.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혹은 학문적이든 철학적이든 어느 것이라도 후세에 다르게 되면 다른 모습에서 접하게 된다. 당시 매우 신성한 종교적인 요소가 깃든 불교 내지 여러가지 제도의 산물이 지금에서도 강한 종교적인 주술적 도구로 되거나 혹은 예술품 내지 골동품, 더 가치가 있다면 문화재로 승급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부정신학이란 단어가 여기서 탄생한다. 신성한 것으로 탄생된 문화재는 당시로는 큰 종교적 위력을 가진 상징적 존재이나, 지금은 종교보단 오히려 문화재로서 예술과 문화로서 접근한다.

 

그런 문화의 숨결이 우리에겐 일상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쉬운 것인지 어려운 것인지 생각해보면 그 나름일지도 모른다.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우리 주변에 넓린 문화재가 얼마든지 많으며, 우리는 사소한 것이 있는데도 그저 지나가는 행인처럼 여기는 점이다. 거기다가 단순히 보러 온 게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역사적인 맥락과 더불어 조형적인 미까지 더 설명하니 이 책은 문화유산에 대한 시각을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지침서이다. 한국문화의 한계성에서 이른바 스토리텔링이 약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 스토리텔링을 살리기 위해 역사를 알고, 문화를 알고, 그 현장에 가서 채취와 온기 그리고 그 미학적 감각을 맛보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스토리의 발단이다.

 

사소한 돌 하나에 담긴 이야기와 그 공간에서 생긴 사람들의 시간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와 별개로 보이나, 그 물질적 존재는 우리에게 아직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제일 1번의 고향은 남도기행이고, 남도 중에 큰 답사지는 바로 강진과 해남이다. 강진이면 누가 어떻게 유명한가? 유흥준 교수도 역시 먹물을 먹은 사람이고, 먹물들을 만드는 지식인이다.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한국에서 자신들이 지식인이라고 믿거나 혹은 되고 싶은 자들이 뽑는 한국 위인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계신다.

 

물론 나 역시 다산 정약용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 지식인이 되고싶었던 지금이나 지식인이 되는 것과 전혀 무관한 20살 전후 시절에도 그 분을 가장 존경했다. 어려운 다산학에 대해 유학으로서 대하는 것은 나의 역량으로 불가하나, 그 분의 업적과 사상을 들여다보면,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보다 약하고 힘든 농민과 백성을 보면 분노하고 탄성을 했던 그 어진 도량, 특히 애절양이란 시는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을 찌른다. 군포세를 내지 못해 소를 빼앗긴 농민이 관아의 폭정에 참지 못해 자신의 성기를 잘라내고, 아낙네는 자신의 성기를 들고 관아에 가서 군포세 면제를 요청하나 비참하게 외면당한다. 그리고 그 갈대밭의 아나넥의 우는 모습을 본 다산은 그 시를 강진에서 지었다고 하니, 얼마나 강진이 우리 국문학에서 큰 빛을 내었는가?

 

하지만 그 빛은 빛이 나서는 안 될 빛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에 아무런 힘 없이 바라보던 귀향당한 정치인의 비참에서 태어난 시였다. 다산초당이 있는 강진군 도암면 귤동리, 실제로 나도 그 곳에 가서 다산초당도 가고, 혜장스님과 초의선사가 서로 왕래가 있던 백련사(만덕사)에 가보았다. 다산초당에서 보는 강진포구는 아름답지만, 마음에서 우려나오는 그 분에 대한 마음에서 아픔이 스며든다. 강진에서 다산초당을 지나 그분의 외갓집인 해남 녹우당도 나오고, 그런 후에 경주가 나온다.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유흥준 교수가 경주를 알기 위한 3가지에서 신라의 미학을 알 수 있는데, 신라의 본래 예술문화를 보면 단조로움과 소박함이 시작이라면, 후에 갈수록 수려하고 아름다운 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신라는 불교문화를 가장 늦게 받았고, 같은 시기에 백제보다 건축기술이나 귀금속 제조기술이 낮았다. 하지만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불교문화의 유입으로 신라의 천마총을 비롯한 많은 석탑과 사찰의 미는 아주 화려하고 아릅답다.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보이는 건축기술은 세계를 모두 놀래키고, 에밀레종의 울음소리는 매우 아름다워 그 소리를 낼 수 있는 종은 아예 없다는 일본 어느 학자의 말처럼, 우리의 문화는 아름다고 위대한 것이 많다. 자치 하면 민족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나, 급격히 산업화가 된 한국에서 전통문화의 씨앗이 사라지는 현실에서 이런 책은 우리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서적인 것이다.

 

그런 반성과 사유의 내용이 은근슬쩍 들어가 있고, 일제강점기의 고통과 군사독재의 아픔들이 아름다운 강산에 남겨 천박함을 아쉬워하던 유흥준 교수의 글에서 우리가 과거를 보고 현재를 알아가고,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적 메시지도 던진다. 그런 의미답게 유흥준 교수도 자신의 집필의 실수를 혼쾌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여 그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메모도 잊지 않는다. 해외의 문물경험도 좋으나, 한국의 미를 찾는 것도 생각보다 재미있다. 물론 모더니즘이란 엘리트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한계성은 있겠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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