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신작들을 보며 느낀 바가 과연 저 작품이 의미하는 바에서 너무 미소녀 모에 내지 노출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좋은 지적과 참고가 된 철학교수 김용석의 <서사철학>이란 도서에서 서사라는 스토리에서 읽어내는 담론으로 통해 어느 이데올로기를 찾아볼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 점이다. 최근 종용한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를 현재 보고 있는데, 본인은 애니플러스에서 감상하고 있으므로 1주일 정도 늦게 보고 있다.

 

이번주에 아마 12화 마지막을 하는데, 작품 내용을 전반을 보면 용자가 되지 못한 남자 1명에 다수의 미소녀들이 모여 그것도 몸매가 좋아서 걸을 때마다 가슴이 출렁거릴 정도이다. 몸과 가슴이 별개로 움직이는 작화에서 너무 성적인 부분을 강조하지 않은가에서 우리나라 심의등급으로 18세 미만은 금지이니 아마 그럴 것 같다. 문제는 이런 작품들이 난무한 점에서 이런 작품들을 무한히 까댈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 점이다.

 

얼마 전에 용사 이야기에 대한 작품에서 새로운 흐름이 일어났다. 용자와 마왕이 손을 잡는 <마왕용자 마오유우>, 아르바이트를 하는 마왕인 <알바뛰는 마왕>, 그리고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까지를 보면 기존의 용사와 마왕이란 존재에 대한 헤게모니 관계가 해체되어 버린 점을 알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이런 계기는 어디서 나올까?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하든지 마든지 나의 개인적 관점이라 볼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꼭 그렇게 여길 수도 없다.

 

가령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로 해체주의 철학을 강의한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란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그 책이 논하고자 하는 취지만 알면 간단하다.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 바로 위의 마왕들의 소재에서 자본의 국경이 없다는 것을 논하는 것이다. <마왕용사 마오유우>에서 여자인 마왕은 자본주의 기본적인 대량생산 체계에 도움이 되는 과학기술을 전파하고, 오히려 상업적인 전략으로 통해 연합세력을 모운다. <알바뛰는 마왕>의 경우 마왕이 오히려 햄버거가게의 점원이 되어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마지막인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에서 용자나 마왕이나 모두 점원으로 일하는 모습이 나온다. 국경은 바로 마족과 인간의 경계지점에서 발생하는 대립구간이나, 이 구간에서 모두 자본이 뛰어넘는다. 생각해보면 "자본을 국경을 초월한" 것처럼 생산체계가 과거 미소냉전 체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본 그 자체가 모두 초월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 작품들은 다르게 보는 것이 정석이다. 볼만한 게 아니라 보고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전후맥락이 필요한 점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연방 해체이후 러시아 역시 자본주의국가체계를 도입했고, 자본주의국가체계에서도 기존의 소비에트 연방은 국가자본주의라는 점이고, 중공 역시 국가자본주의가 시장경제자유주의를 병행하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어떻게 보자면 제일 유치한 작품이란 너무 입맛에 적당히 칠해진 작품일 것이다. 과거에 <케이온>과 <Beck>에서 개연성과 입맛성을 생각했는데,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이데아적인 세계에 많은 것을 긍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 보다는 그 문제 자체를 없애고 해결하는 것이 목적을 둔다.

 

 

결국 형이상학적 이분법으로 인해 작품성에 논지를 두고 본다면 어설픈 논리만 나오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란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는 그런 문제를 아주 이상하게 꼬집은 작품이다. 마왕이 죽고 죽은 마왕의 딸이 마왕이 되어야 하는 운명에서 분명 마왕의 딸이 인간계로 온 것에서 순탄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필연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잊고 있는 사실에서 진장한 나쁜 것이 무엇인지 악이란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윤리성이다. 과거 미소냉전에는 단지 이데올로기만으로 판단할 수 있으나, 이데올로기가 탈 이데올로기되었다고 해서 그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탈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용사란 평화를 지키고 인명을 구하는 숭고한 임무이나, 그것은 그것을 위협하는 존재가 나오는 경우다. 결국 인간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삶을 지키는 것에서 철학적으로 본다면 그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용사가 필요하지, 그게 완료되면 용사란 그저 필요하지 않은 존재다. 그러나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에서 용사는 상당한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으며, 오히려 마왕이 있어야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운다. 순간 작품을 보며 우리 사회를 보게 된다.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기, 아니라면 안 될 가능성이 높은 자를 오히려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구조를 말이다.

 

라울의 예전동료들은 모두 강력한 힘을 가진 자다. 그런 자들이 장기적인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헤게모니적인 근거를 만들어내야 한다. 결국 피노를 악마의 군주로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작품의 피노는 그저 어린애같은 어리광만 피우는 미소녀 마족이다. 그런 피노가 악으로 되는 것은 악으로 되게 만드는 외압적인 요소가 크다. 이런 점을 파악하고 리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자세이다. 이야기의 구조가 표면적 구조와 달리 내면적 구조 혹은 차용하는 구조까지 같이 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작품에 대한 고찰이다.

 

작품을 내가 보는데 있어서 항상 검토하는 것은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요소이다. 가령 아래의 그림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낭만주의 화풍에서 1830년 프랑스혁명의 상징성을 담고 있다. 여신의 존재에서 그녀는 자유의 여신이기도 하나, 다른 존재에서 보면 최고의 마녀이다. 가령 <마법소녀 마도카 미기카>에서 큐베가 마도카는 최고의 마법소녀이면서도 최고의 마녀가 된다고 했다. 인간의 존재성에서 그 상징적 존재가 가장 위대하면 가장 최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절대왕정에서 루이16세는 태양왕의 후손이나, 1793년에는 자신의 의지보단 주변의 상황에 의해 목이 잘리는 비운을 겪는다. 그렇다면 루이16세가 포악하고 나쁜 왕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의 취미는 열쇠 자물쇠 만들기(장 자크 루소를 그토록 비웃어도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의 책에 따른 영향이 반영)고, 가난하고 배고픈 백성을 염려했다. 하지만 이미 주변에 장악한 봉건귀족의 이권놀이에 더 세금을 거두지 못했다.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 프랑스혁명은 루이16세가 나쁜 왕이 아니라 힘없는 왕이었고, 경제적 구조로 일어난 혁명이다.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에서 피노를 다시 돌아보자.

 

피노는 아버지가 난폭하여 자신의 어머니를 괴롭히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이 있고, 힘이 약한 마족을 괴롭히는 것도 부당하게 여긴다. 마왕의 딸이면서 전혀 일반인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생각조차 않고, 오히려 시장경제자유주의에서 긍정적요소만 바라보고 있다. 그 가치는 분명 도덕적인 상인윤리를 바탕하는 조건이다. 주변 사회의 약자인 노인에게 친절하고, 어린아이와 친하게 지낸다. 누가 보아도 좋은 성품을 지닌 왈가닥 소녀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하나의 상징적 희생양이 되길 바란다. 왕은 가장 훌륭한 상징이면서도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요새 마왕과 용자의 관계를 다시 봐야 할 것이다. 이때까지 용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한 아버지 살해가 정당화 할 수 있는 신화적 이야기로 생각했다.

 

마왕은 나이가 많고 이미 구체계의 지배자고, 용사는 신세계의 지도자이다.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면 공주와 결혼하여 왕위를 이어가거나 혹은 왕위를 이어가지 않아도 왕국의 모든 병사가 대항해도 용사에게 이길 수가 없다. 용사란 신세계에서 새로운 질서이며, 체계이다. 왜 우라노스가 자신의 남근을 크로노스에게 베였겠는가? 제임스 프레이져 경의 <황금가지>에서 어느 남자가 나무 아래서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겠는가? 그 나무 아래 남자는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살해자는 왕이 되고, 몇 년 뒤에 다시 살해당한다. 잘 기억하자. 우리나라 왕족도 가뭄이나 재해가 일어나면 희생양이 되던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용자물이나 용사이야기가 그저 뻔한 이야기만으로 보는 게 좋지 못한 것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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