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이원익 그는 누구인가 - 개정판 오리 이원익 그는 누구인가
함규진.이병서 지음 / 녹우재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위기의 순간은 언제인가? 연산군의 폭정, 조선의 몰락도 있겠지만, 조선의 몰락에서 그 기원은 임진왜란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후기로 넘어가는 과정은 임진왜란과 그리고 뒤에 일어날 병자호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임진왜란 이후에는 정치적 갈등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심각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넘어가면서 붕당정치의 최악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의 붕당의 폐단은 있었지만, 그 전초는 광해군 시대를 중심으로 선조부터가 문제일 것이다.

 

선조가 임금이 된 계기는 명종이 승하할 때, 그의 후사가 없었고, 명종의 아내 인현황후는 그다지 힘이 없었다. 사실 인현황후보다 명종의 어머니 대비마마인 문정황후가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 조선의 왕권을 위해서 신권을 견제하고, 신권을 동맹을 삼기 위해 양반 사대부 집안과 혼인하나, 이것이 문제이다. 사실 여자들은 조선시대에 정치에 관여해서 안 된다. 지금도 여자가 정치하면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자가 정치를 하면 안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왕비가 정치적인 입지가 너무 커지면 인척관계에 있는 척신들이 지나친 횡포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조선 마지막 임금 고종황제께서 정치적 입지가 없던 이유는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아내 명성황후의 관계이다. 명성황후 민비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되었고, 친일파가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팔아먹었기에 명성황후의 인상은 긍정적이나, 사료를 조금 더 들어가보면 아니다. 명성황후가 지나친 정치개입은 민씨 일가에게 큰 부와 권력을 주었고, 부정부패가 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왕비 본인도 흥청망청 재물을 소모하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옛날에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정치적 구조에서 드러나는 현실이었다.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이니 그런 걱정은 없다. 지금은 어리석은 남자나 여자가 정치권력을 잡으면 나라가 혼돈에 빠진다. 당시는 인척간의 관계성이 결국 왕권 약화만 아니라 부정부패로 이어지고, 그 모든 폐단은 백성의 삶을 깊게 파고들었다. 백성의 운명은 오로지 현명한 임금과 어진 신하만이 아니다. 대비와 중전의 인품 역시 크게 작용했다. 정치적으로 선조시기에 중전이 누구의 딸이냐에 따라 정치적 입지가 바뀌었다.

 

즉 붕당정치에서 임금의 옆에 어느 정치세력이 붙는가에서 상대 세력이 몰살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래서 임금에게 충성하는 신하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충성할 수 있는 신하는 외척관계보다 종실의 후손이 유리했다. 종친에는 대군과 군에 따라 작위가 3대 내지 4대까지 내려가고, 그 이후에는 일반 사대부와 같은 입장이 된다. 그래도 왕가의 성씨인 전주이씨가 남아있고, 전주이씨 문무백관은 그나마 신권과 왕권 사이에서 왕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주가 후사가 없고, 군주의 형제도 없으면 방계의 후손으로 임금으로 올린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나, 정조와 순조, 순조의 아들이 죽자, 사도세자의 다른 후손인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임금으로 올릴 수 있는 이유는 이렇다. 조선의 왕족, 전주이씨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을 뽑으라면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 계신다. 세종대왕이 보여준 업적은 한글 훈민정음 창시와 과학의 발전이고, 정조대왕은 조선 최고의 문무를 겸비한 군주이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은 무관이었고, 그 뒤의 임금 중에 그나마 무예가 뛰어난 임금은 세조, 효종과 헌종, 사도세자였다.

 

그러나 전주이씨는 임금과 왕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멸의 이순신>이란 드라마를 보면 충무공 이순신 옆에 정성을 다해 보좌하는 이억기 수사가 나온다. 이억기 수사 역시 전주이씨 집안 출신이다.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전주이씨 문중 인물로 오리 이원익이 있다. 이원익은 태종임금의 아들 중 하나인 익녕군의 후손이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서적을 보다가 함명기 교수의 서적을 보면서 이원익이란 이름을 보았고, 그가 종친이기 때문에 선조가 상당히 의존했다는 글을 보았다. 이원익은 성균관 유생에서 학문을 수행하다 당시 정승인 동고 이준경을 만난 후 이준경의 영향을 받아 실천적 유교를 실행했다.

 

한국 정승 중에서 유명한 사람으로 황희, 유성룡, 채제공을 많이 알 것이다. 황희는 세종대왕과 유성룡은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 장군의 친구이고, 채제공은 영조와 정조를 모신 명신이다. 하지만 이준경과 이원익을 잘 모른다. 그들이 남긴 기록이 많이 없고, 태평성대 시기도 아닌 난세의 세기에 다른 인물에 가려진 정승이다. 이원익과 같은 경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문신 유성룡과 거의 동급으로 볼 수 있다. 이번에 읽은 <오리, 이원익은 그는 누구인가>에서 숨겨진 명정승 이원익이 나온다. 이원익은 조선 역사에서 영의정을 가장 많이 한 신료 중에 하나이다.

 

그의 정치적 스승인 이준경의 초년은 사화와 관계되어 힘든 삶을 살았지만, 이원익이 몸이 약할 뿐이지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문제는 중종과 명종 시기 왕권이 약화되고, 신료들은 정치적인 권력을 이용하여 재산을 불려갔다. 재산이 관계되면 정치권력이 모이고, 게다가 관직의 수는 한정적인데 계속 사람들이 오고갔으며, 동인과 서인이 구분되면서 피를 부르는 바람이 서서히 오고 있었다. 이원익은 동인과 서인 중에 동인계통이었다. 그가 이준경에게 큰 가르침을 받은 것도 있지만, 개혁적인 성향도 있었다.

 

임진왜란 전 기축옥사로 많은 동인 계열 선비가 죽고 상했다. 이 계기로 서인에 대한 복수를 하자는 쪽이 북인, 복수보단 조금 가라앉히고 정국을 주도하자는 부류가 남인이었다. 남인 쪽에 이순신과 유성룡이 있었고, 북인에는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과 이산해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이원익은 남인이도 피를 피로 씻는 정치적 쟁략보단 정국운영이 중요했다. 초급 문관일 때는 사소한 일에도 집중하며, 하급관리의 일도 배웠다. 더 나아가 목민관이 될 그 지역의 문제를 알고 제도적으로 수정했다.

 

민심을 잘 어루 만져주고, 성품도 온화하며, 게다가 청렴하고 검소하여 뭇 백성들로부터 공경을 받았다. 이원익은 조선이 군주의 나라인 것을 아나, 그래도 조선의 군주는 만 백성의 어버이기에 어버이는 자녀를 사랑하며 돌보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이런 성품은 전쟁이 일어나자 바로 알 수 있었다. 백성들은 전쟁이 나자 도망치기 바쁜 선조임금과 고관들을 비난했다. 다른 문관들이 먼저 길을 떠나면 백성들은 야유를 보내나, 이원익이 오자 모두 공손히 받아들인 것이다. 평소 행실이 위급상황을 타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원익이 전쟁에서 가장 활약한 점은 전쟁을 직접 수행하는 것보다 전쟁에서 필요한 정치적 조율이다. 무관이 전쟁이 나가면 식량과 보급, 명군의 외교 등이 어려웠다. 게다가 전쟁이 나면 민심이 크게 동요하니, 다른 것을 몰라도 민심을 안정시키는 게 가장 급선무이다. 무관 중 문예가 깊은 자는 그나마 침착하나, 성질이 포악한 무장은 앞뒤 안보고 적진에 돌격하여 군졸을 죽고 다치게 만들었다. 조금 화가 나면 곤장을 치거나, 자기 말이 군율이기에 부하나 백성의 말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참형에 처하기도 한다.

 

이원익이 가장 잘 한 정치적 행위는 이순신의 보호이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아낀 것은 분명하고, 그의 백의종군에서 사형을 면하게 하려 한 것도 사실이나, 유성룡보다 이원익이 더욱 더 이순신을 구원하려 했다. 책을 보면 느낀 것이나 유성룡은 이원익보다 성품이 더 강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름 이성적이고 냉철하고, 이원익 만큼 여유가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징비록>을 보면 그의 성품이 매우 치밀하고 논리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원익의 논리정연하나 유성룡보다 포용력이 높았다.

 

남에게 싫은 말을 하는 편이 아니고, 게다가 선조의 신임을 무척 받고 있었다. <오리, 이원익은 그는 누구인가>를 읽기 전 이원익의 인물을 잘 알겠지만, 다소 아쉬운 것은 이 책에서 선조는 나름 괜찮은 임금으로 나온다. 이에 반해 광해군은 문제가 많은 왕으로 묘사된다. 선조는 초기에 이황을 스승을 모시고, 조선왕조역사에서 가장 많은 명신을 거느린 군주이다. 신하 중에 뛰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이준경의 종족인 이항복도 있었다. 율곡 이이도 등장하니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을 이룬 것도 이때이다.

 

그러나 임금은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기축옥사를 정철에게 맡겨 피바람을 불게 만들고, 정철이 지나친 옥사를 만들어 사람들이 죽고 다치자,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번에 이산해와 동조하여 정철 무리를 숙청한다. 직계가 아닌 방계승위가 문제였고, 명종시기에 해결되지 못한 권력의 모순이 계속 이어졌으니, 정치권은 말 한 마디에 귀양을 가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 변방의 무장을 이해해주기 보다는 정치권력에서 생각했고, 의병이 북인, 근왕병은 남인 쪽이 많아 그쪽 세력이 강해지자 서인인 원균을 삼군통제사로 올리나 결국 왜군에게 패배한다.

 

죽기 일보 직전인 이순신을 백의종군시키다 결국 이순신은 유성룡의 탄핵 날에 순국한다. 광해군이 아버지 선조로 인한 스트레스와 정실부인이 아닌 서자 차남 출신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북인의 편에서 정국을 운영하던 광해로선 주변 신료들과 마찰이 심했다. 이 책에서 광해군이 다소 평가가 절하되나, 한명기 교수 서적을 보면 광해보다 인조가 더 문제라고 서술한다. 광해군의 정치적 입지를 반대한 무리가 인조반정을 일으키고도 광해군의 정치구도에서 더 나아가지도 못한 것도 모자라, 실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이원익의 활약이 보이는 것은 여기서이다. 대동법을 김육이 했다고 하나, 사실 이원익이 먼저 준비했고, 중종반정으로 모든 백성들이 동요하고 있을 때 이원익이 궁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모두 안도했다고 한다. 다른 신하는 몰라도 이원익 하나를 보고 모두 안심했다는 점에서 이원익의 인품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이 형님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려 할 때 모두 찬성하고 있을 때 이원익만 반대했고, 인조반정 후 광해군을 모두 죽이려 할 때 이원익만 반대했다. 광해군의 실각이 무능 내지 부패라고 하나, 막상 인조가 입권하자 인조의 무능함이 더 심각했다.

 

이원익의 특성은 필요할 일이 있으면 직접 몸소 나서고,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다. 하지만 훌륭한 선비들은 나라의 문제가 발생되면 해결하려 하기보다 자연의 세계에서 처사로 지내기 원했다. 물론 중앙정부에 권력자들은 바른 말을 하던 자를 꼽게 볼 리가 없고, 정치적 실리보단 명분으로 권력을 사유화하기 바쁘니 조선의 운명은 청나라에 밟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원익은 조선의 문제점을 알았지만, 제대로 바꿀 수 없었다. 시대와 흐름은 결국 권력자들의 이기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원익의 외손자 허목 미수는 매우 뛰어난 학자이나, 처사적 삶을 살았고, 추후 예송문제로 활약했으나, 선비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원했다. 그러나 이원익의 공적은 후대에도 전해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나 정조대왕도 이원익의 공덕을 기렸다. 정조대왕 시절 채제공이란 명정승이 있어도, 이원익이 옆에 없음을 아쉬워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오리, 이원익은 그는 누구인가> 작가는 함규진과 이병서이다. 이병서 작가는 이원익의 직계후손이라 하는데, 그의 서문을 저술할 때 녹우당에서 작성했다고 나온다. 녹우당은 해남군 연동리에 위치한 고산 윤선도의 고택이다. 윤선도 역시 이원익 같은 남인 계통이고, 허목은 남인의 영수에 고산 윤선도와 친했다. 윤선도의 고모할머니는 기축옥사에 장형을 당해 억울하게 죽었다. 당시 기축옥사 때 동암 이발의 어머니가 윤선도의 고모할머니였고, 윤선도는 기축옥사 때 억울하게 죽은 정여립을 비롯한 선비들의 신원을 회복하려 했다. 윤선도보다 먼저 이 일을 시작한 인물이 이원익이다.

 

이원익이 하던 일을 윤선도, 그리고 이원익의 외손 허목이 이어갔다. 윤선도가 운명을 하자 허목은 윤선도의 묘비문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생각하면 전주이씨 문중 사람이 전주이씨 고택이나 사적보다 왜 해남윤씨 고택에서 서문을 적을까 하는 생각하면 역사란 지나간 것의 이야기라고 해도 여전히 당시 사람들의 의지는 우리에게 남아있다. 지금도 보면 실제 정책적으로 실행해야 할 안건이 당론에 막혀 일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원익은 상대편이라도 정책적으로 옳으면 실행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원익 추진하고 하는 정책을 입안하면 상대편이 동의해 준 것이다. 이원익은 백성을 중심으로 정치를 한 인물이다. 물론 임금인 선조와 광해군, 그리고 인조를 보필하더라도 오직 백성의 입장을 생각했다. 임진왜란 당시 다들 백성들의 입장보다 자기의 안위만 챙겼지만, 결국 백성의 입장을 생각했기에 전쟁 중이나 복구 중이라도 정국이 돌아갈 수 있었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꼭 배워야 할 자세는 타협의 정치보단 국민을 위한 정치이다. 정치를 하기 위해 타협하는 게 아니라 국민을 위해 타협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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