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7년 세트 - 전7권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2월
평점 :
품절


조선시대 관련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 고관대신과 일반 신료를 보면 표준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료를 보면 조정대신들이 의논이나 토론할 때 방언이 많이 섞여서 잘 알아듣지 못할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언어의 존재성에서 언어란 사회적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적 관계성이란 비단 국내적 상황이 아니라 지역적 조건에도 관련이 있다. 외지에서 살아오다 이제 조정에 와서 표준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다. 평생 전남지역이나 부산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말투가 새삼 다름을 알게 된다.

 

물론 서울사람들이 지역에 내려가면 자신의 말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일정 기간 지나면 어느 정도 대화는 성립된다. 그 지역의 특성, 그 지역의 사람들, 그 지역의 역사, 그 지역의 아픔까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이순신의 7>이란 소설은 그런 작품이다. 이순신과 관련된 미디어로 제일 유명한 작품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영화 <명량>이 있다. 전자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약간의 픽션을 잡어 넣어 어느 정도 재미를 보여준 드라마이라면 후자는 명량대첩의 이순신을 하나의 영웅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 영화이다.

 

어느 것이 좋다 안 좋다 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전자가 좋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의 끈기와 인내심은 분명 높다. 하지만 일방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수하에 많은 장수를 거느린 전라좌수사 겸 수군통제사이나, 막상 회의를 진행할 때 첨사나 만호 같은 상급무관만 아니라 권관이나 주부, 하다못해 일반 수군병졸이나 격꾼까지 모아서 회의를 진행했다. 단순히 위에서 내려보내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수시로 보고를 받고 토의하여 최상의 결론에 도달하는 리더쉽이 2323승의 비결이었다.

 

그런 비결을 보자면 <명량>이란 영화에서 다소 떨어지는 감이 든다. 그나마 <불멸의 이순신>에선 사사로이 병졸 하나하나를 다독거리는 모습에서 이순신 전대의 비결이 나온다. 화살촉 하나 만드는 노인, 배에 올라 열심히 톱질을 하는 목수, 화살을 열심히 날리는 수군 궁병까지 찾아간다. 조선시대 계급사회에서 양반과 상민의 차이는 엄청난데, 거기에 수군통제사라면 당상관 중에서도 상위계급이다. 그런 높은 자리에 있는 장수가 일개 군졸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이해해주면 어느 누가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을까?

 

군대생활에서 일개 사병과 대대장의 차이는 어마하다. 이순신은 지금의 직급에서 생각하면 대대장보다 높은 해군참모총장이다. 해군참모총장이 직접 전선에 올라가 총탄이 날라 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사병을 독려한다면 그 선단은 최고의 용사로 거듭날 것이다. 지금의 군대를 보면 위의 참모진은 안전한 후방에서 마치 체스나 장기 두듯이 전력을 움직인다. 그들의 지휘는 곧 사병들의 목숨 1명을 버릴 것인가? 혹은 100명을 버릴 것인가? 하는 숫자 계산놀이만 하는 셈이다.

 

<이순신의 7>을 보면 이순신이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우리가 늘 미디어에서 보던 이순신은 표준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건천동 일원에서 어린 시절을 잠시 보내고, 청소년과 청년기는 충난 아산 외가 쪽에서 보낸다. 결혼은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하여 전남 보성으로 내려갔기에 그가 겪은 언어적 구조는 서울 표준어보다 지방의 방언이 더욱 많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이야 서울 부산까지 거리가 KTX2시간 반, 항공기로 1시간, 자동차 4시간 이상이면 돌파한다. 그 과거시대 걸어서 한양까지 1달이고, 말을 타고 가도 2~3일은 걸린다. 교통적 편리함은 곧 왕래할 수 있는 시간길이를 척도 할 수 있고, 그 길이에 대한 시간은 타 지역에 대한 정보와 이해도까지 이어진다.

 

높으신 양반들은 표준어, 하층민들은 방언을 사용하는 점은 언어에 담긴 사회적 권력을 의미한다. 반상관계의 엄격함에서 전쟁에서 과연 그런 단합력이 나올 수 있었는가? <이순신의 7>은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노량해전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 마무리는 <이순신의 7>에 대한 후기를 적어준 홍기삼 문학평론가의 글이다. 홍기삼 동국대학교 전 총장의 글을 보면 내가 이 책을 보던 내용과 그가 봤던 부분은 차이가 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내 감이 맞은 것이 있었다. <이순신의 7>을 작성한 정찬주 작가의 고향은 보성이다.

 

전남지역의 해안가는 부산경남과 마찬가지로 왜구들의 침입이 잦았다. 특히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전남 강진 일대는 큰 위기에 봉착했고, 이순신의 조력자 중 하나인 동고 이준경 선생이 지휘하던 관군은 왜구를 무찔렀다. 을묘왜변은 보통 왜구의 숫자와 규모가 달랐다. 제법 큰 군사규모를 가진 해적군단이었다. 전남지역의 앞바다에 계속 왜구가 출현하고, 임진왜란 이전에도 계속 침입하여 많은 양민과 관군들을 피살했다. 보성 역시 해안가가 옆에 있었고, 보성 좌측으로 장흥군과 강진군, 우측으로 순천시와 여수군이 위치했다.

 

이순신이 처음 부임한 곳은 전라좌도 수군영이다. 전라우도 수군영은 해남에 있었다. 전라지역이 경상지역보다 일본 대마다보다 멀기 때문에 군사들은 경상도 수군기지에 더 많았다. 장비와 재물 그리고 지원도 그렇다. 이순신이 속한 전라좌수영은 수군기지 고을도 부족하고, 인력도 부족하고, 전선도 부족했다. 1년 동안 좌수사로 활동하면서 다른 수군기지보다 더 강한 전력을 갖춘 것은 그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거북선을 축조하고, 군량미를 만드는 것은 혼자서 불가능하다. 그것을 같이 만들어나갈 인재들이 필요하고, 그들의 마음을 잘 알아줘야 했다. <이순신 7> 앞부분을 보면, 진무를 맡은 수군집안에 사람이 죽어 이순신이 조문가는 장면이 나온다.

 

좌수사가 일개 수군 병졸을 위해 조문을 가고, 거기에 필요한 장례음식과 물품을 대주는 모습이 나온다. 전쟁 중에 아군의 병력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작전을 유리한 쪽으로 검토하며, 전투과정 중 사망한 병졸 하나하나 기록하고, 그들의 유해를 집으로 보낼 때 곡식이나 물품을 보내고 위로했다. 특히나 전몰장병을 위해 제사를 올리는 장면에서 많은 수군 장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순신이 엄정하고 군기를 세우는 무관인 것은 분명하나, 사실 부하 장병을 아끼고,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어렵다.

 

TV에서 보이는 이순신은 이상화 된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7>은 이상적인 인물보단 서민과 같이 숨을 쉬는 정겨운 모습으로 나온다. 송희립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 이순신은 충청도 사투리를 사용한다. 사투리는 단순히 방언으로 볼 게 아니라 문화와 역사적 공간을 이어주는 전달수단이기도 하다. 홍기삼 문학평론가가 주목한 방언의 가치,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호남이 없었다면 절대로 조선은 없었다고 하는 그 사실에 주목한다. 이 책을 읽을 때 단순히 소설 그 자체도 좋지만, 비봉출판사에서 출간한 <충무공 이순신 전서>, <이순신과 임진왜란>, <난중일기>, <징비록> 모두 같이 보면 좋다.

 

거기에 조금 추가하면 기축옥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은 앞으로 나가지 않은 장수들에게 호통을 친다. 그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 안위 장군이다. 안위는 거제현령으로 명량의 승리로 정3품 통정대부까지 이르고 후에 수사 자리에도 오른 장수이다. 그는 사실 벼슬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1589년 일어난 기축옥사에서 정여립이 안위에게 5촌 당숙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촌형제들의 아이들도 친하게 지내는데, 조선시대라면 상당히 가까운 사이다. 안위는 기축옥사 여파로 귀양 가고, 전쟁 중 풀려나 활약을 했다. 첨사 이응화 역시 기축옥사와 연루되어 귀양가다 다시 이순신의 도움으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기축옥사가 중요한 이유는 기축옥사에서 가장 많은 화를 당한 곳이 호남지역이다.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유배올 적에 호남에서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은 3~4곳 정도라고 했다. 많은 동인 계열 선비들이 유배나 죽임을 당했고, 거북선 돌격대장 이언량은 광산이씨인데, 광산이씨 중에 이발과 이길 가족과 친지들은 선조와 정철에 의해 가장 많은 화를 당한다. 임진왜란 시기에도 동인(북인과 남인)과 서인, 관군과 의병대의 체계가 달랐고, 특히나 북인 위주의 의병, 남인위주의 관군은 전쟁 중에 많은 희생을 받았다.

 

전쟁이 종료될 때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세력은 남인이었다. 이순신이 서거한 날, 서애 류성룡 선생은 파직되었다. 그가 파직된 이유는 탐욕이 많고 시기심이 넘치고, 군왕을 속이고 조정을 어지럽힌 이유이다. 전쟁 중 도체찰사의 업무와 내정, 외교에서 류성룡 선생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게 거품이었다. 이순신의 목숨이 선조에게 위협받을 때 정탁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정탁과 류성룡은 모두 퇴계 이황 선생 문하생이었다. 전장에서 장병들은 죽음과 배고픔에 힘겨워 하는데, 중앙관료와 선조는 권력을 유지하고 누리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만 나온다.

 

홍기삼 문학평론가는 선조를 두고 암군 중에 암군(暗君)이라 한다. 선조를 두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억지로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기축옥사와 인조반정의 특성은 동인의 제거이다. 동인을 제거한 서인의 관점에서 기축옥사는 당연한 일이고, 인조반정에서 동인이 만든 자리를 처리하는 게 제일 급선무였다. 안위 장군이 업적이 있어도, 정묘호란 때 그를 기용하지 않았다. 안위의 동인제거의 기회를 준 정여립의 5촌 조카이다. 광해군과 동인의 후예 북인을 제거한 서인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광해군의 가치를 깎으려면 선조의 입지를 올릴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원균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아주 고약하고 나쁜 모습이다. 같은 조선인까지 잡아 죽여 머리모양을 왜군처럼 만들어 행재소로 보낸 공으로 치부하던 그 모습은 사악한 인간 중에 인간이었다. 이순신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할 때 그가 한 말은 질투에 미친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수군 장병을 수장시키고, 수많은 전선을 침몰시키며, 조선의 백성들이 왜적에게 도륙당할 때, 그를 기용하고 치켜 세운 선조와 윤두수의 행적은 대한민국 역사가 끝나는 그날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의 공적으로 동급으로 취급했고, 원균의 집안에 계속 곡식을 하사하여 그의 공을 치하했다. 선조는 이순신의 업적을 끝까지 인정하기 싫어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원균의 집안에게 내려준 곡식을 금지했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인조와 서인들은 원균의 집안에게 곡식을 다시 내어주기 시작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시점은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어진다. 이순신의 사당을 명나라 장수들이 선조에게 요청했지만, 선조는 끝내 설치해주지 않았다. 홍기삼 문학평론가가 <징비록>의 글을 인용했다. 이순신의 유해가 고향 아산으로 돌아갈 때 많은 백성들이 나와 통곡하고 슬퍼했다고 말이다.

 

그 내용은 비단 백성들만 아니다. 류성룡 선생도 자신이 느낀 슬픔을 백성의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때까지 우리는 이순신의 영웅주의 관점에서 칭송했지만, 인간 이순신에 대한 모습을 잘 몰랐다. <이순신의 7>에서 이순신은 아들과 조카를 똑같이 대해주고, 요절한 두 형님을 대신하여 조카의 생계와 교육, 그리고 결혼까지 챙겨준다. 남솔(濫率)이란 죄가 있다. 부임한 사또가 너무 많은 가족을 임지로 데리고 가면 그들의 부양으로 많은 백성들에게 고통이 온다. 이순신이 남솔에 대해 주변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자, 눈을 흘리면서 답변하길 돌봐줄 사람도 없는 저 어린 것들을 어떻게 내버려두고 갈 수 있냐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며 이순신의 덕을 인정했다. 그 덕분에 이순신의 조카들은 모두 임진왜란에 활약했고, 노량에서 이순신을 대신하여 군함을 지휘했다. 사람을 감동을 시키면 그 감동을 준 자가 죽어도 그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 명예와 체통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지만, 그 명예에 대한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하면 현대사회에서도 본 받은 점은 있다. <이순신의 7>에서 이순은 눈앞에 바다를 두고 왜적만 싸운 것이 아니다. 눈앞의 바다보다 더 깊고 거친 마음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권력자들은 이순신의 목을 언제라도 물어뜯을 기세를 보여주었다.

 

드라마에서 원균이 사망하고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될 때 비장미를 보여주지만, 책에서는 비장함을 보여주기보단 공허감으로 보여주었다. 그래도 그가 칼을 잡고 배 위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주변에 몰려든 조선의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임명사령장을 받지 않고, 그대로 병을 핑계대고 물러났다면 조선의 백성들은 모조리 도륙 났을 것이다. 조선이 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조선의 백성이 몰살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백성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고, 삶의 목적을 부여했다. 이순신은 백성들의 삶과 희망을 주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 우리의 바다를 지키는 바다의 신이 된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8-05-23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주는 의미는 단순히 의사소통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5월 23일이 고 노무현 대통령 기일이라서일까요. 충무공의 모습 속에서 노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8-05-23 21:58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노짱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봉하마을에 가서 제초도 하고 그랬는데, 4~6년 전 봉하마을에서 제초기 돌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평이 아직 좋지 않았으나, 이제 재평가 받으니 마음이 참 착찹하네요...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 기축옥사의 기억과 당쟁론 너머의 역사담론 8
오항녕 지음 / 너머북스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이상한 책이다. 겉으로 당쟁적적 시각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려 하나,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발의 어머니는 윤선도의 고모할머니이고, 윤선도의 할아버지 윤의중은 기축옥사로 연루되어 귀양가는 중 사망했으니 피해자의 기록 자체를 오버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엄청난 오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 -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 백성의 수난사
주돈식 지음 / 학고재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조선시대 가장 비참한 시기가 언제라고 생각해야 할까? 문득 우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의 전쟁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객관적으로 사료를 뒤져보면 그것은 약과에 불과했다. 임진왜란의 상처는 할퀴고 지나가도 어째든 왜군은 격퇴되었다. 격퇴 후 전후복구 사업이 뒤따르므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전쟁은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 내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멸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이 친목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명나라와 신흥세력인 누르하치의 관계가 심각한 사태로 돌아섰다.

 

동북아시아 세력에 큰 변화를 맞이하면서 조선은 풍전등화의 운명을 겪게 되었다. 올해 2018년은 임진왜란이 끝이 난지 420년이 7갑자가 지나고, 정묘호란은 약 390년이 되었다. 정묘호란에서 청나라는 잠시 스치듯이 지나갔다. 이어 다시 돌아온 병자호란은 그렇지 못하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적어도 병자호란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요새 자꾸 든다. 병자호란 당시 심양에 끌려간 조선인 50만이란 말도 있고, 그 이상이란 말도 있다. 전쟁 당시 죽은 백성의 수가 수십만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매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공납을 요구했고, 그 중에는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살아있는 인간이라 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누군가의 가족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문제가 심각했다. 청나라 여진족은 문호가 전혀 없었다. 야만족의 습성이 몸에 베였고, 특히나 수렵생활은 남자만 아니라 여자도 했으며, 강한 자만 살아남는 힘든 공간에서 힘을 키워왔다. 18세기 이르러 청나라도 제법 문학이 높게 되었다. 청나라가 멸망시킨 명나라 한족(漢族)들이 청나라의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그들은 황야의 들개가 아니라 잘 길들여진 집안의 사냥개가 되었다. 들개로 있을 때는 무조건 달라 들어 그 날카로운 이빨로 상대의 목을 물고, 내장을 씹을 정도로 잔혹했다.

 

임진왜란에서 왜군은 포로를 납치하고 자국으로 데려갈 경우 배를 이용하나, 청나라는 달랐다. 그들은 육로를 이용하고, 먼 길 3,000리를 걸어가야 했다. 추운 겨울 걸어서 조선 땅을 벗어나 이국땅에 간다는 사실만으로 절망이다. 거기다 추위와 배고픔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목이 날라 가거나 죽도록 얻어터진다. 여자들은 성노리개가 되고, 남자들의 생명은 부지하기 어렵다. 정묘호란은 1627, 정유재란 종전 1598년이란 아직 전쟁의 상흔이 덜 아문 30년이 지나자 발발했다. 그리고 병자호란은 1636년으로 정묘호란의 상흔조차 가릴 수 없을 때 발발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임금과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추운 날씨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항복했고, 그동안 주화파와 척화파는 서로 나누어 대립했다. 그 사이 남한산성을 지키는 군졸은 얼어 죽고, 성 밖에 살아가는 백성들은 도륙을 당했다. 청나라 군대가 몰려와 백성들을 묶어놓고 산 채로 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400년 전의 기록이나,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나로써도 너무 마음이 아픈 일이다. 전쟁의 비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어떤 자비와 희망도 없이 오로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숙명에 놓인 것이다.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를 읽으면 조상들이 겪은 고통과 그리고 권력자들이 행한 위선에 다시금 통탄을 금치 못한다. 호란이 일어날 때 인조가 즉위했고, 인조는 공신들이 준 명검을 지니며 항상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나 인조는 현실을 몰랐다. 조선은 우물 안의 개구리고, 늘 명분만 중시했지만, 그 명분을 의미하는 진정한 실천을 하지 않았다. 광해군을 혼군이라 하여 반정을 일으킬 세력조차 다시 광해군 시대에 보여준 모순들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괄의 난에서 평양감사 박엽이 만든 정예소총부대가 완전 붕괴되었다.

 

청나라는 조선이란 국가가 약하지만, 명나라와 대결에서 조선에 의한 공격으로 후미가 무너질 경우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래서 명나라 조정 내부의 혼란을 이용하여 조선을 공격하고, 우선 명나라와 전쟁에 집중하고, 명나라 붕괴 후 조선을 정벌하고자 했다. 청나라에게 조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청나라의 기병대는 날 새고, 사나우며, 수렵으로 인한 생계로 창술과 궁술이 뛰어났다. 조선군대는 기강도 없고 훈련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더 약한 군사력을 가졌고, 거기다가 지휘관들도 자기 안위만 원했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의병들이 창궐하여 서로 목숨을 내놓았지만, 청나라와 전쟁에서 많은 관군들이 눈치만 보고, 의병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병기도 형편없고 군사기강도 무너지니 이미 나라는 끝을 본 셈이다. 광해군을 폐위한 김류를 비롯한 고관대신들은 임진왜란의 재조지은이란 명분 아래 명나라만 바라봤고, 그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섬겼다. 백성들은 명나라든 청나라든 아무 상관없었다. 제발 군역을 제대로 세우고, 세금을 지나치게 거두는 횡포만 없으면 될 뿐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가고, 인조의 가족과 친척들이 강화도로 들어갈 때 김류의 아들은 자신의 이득을 노렸고, 결국 강화가 무너지자, 사약을 먹고 죽었다. 김류의 첩과 딸이 청나라에 끌려가자 그는 자신의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많은 은을 포로 대금으로 지불했다. 돈이 많은 권력자야 돈을 만들 수 있지만, 일반 백성에겐 어림없는 일이었고, 그 돈을 설사 가졌다 해도 늘 순위 밖이었다. 만일 청나라에서 조선인 포로가 도망쳐오면 다시 잡아 청나라로 송환되고, 거기서 모진 수난을 당한다. 나라가 나라다운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그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권만 챙기고, 더욱더 화가 나는 건 그렇게 척화를 주장하던 고관대료들은 처음에 강하게 반발하다, 이제 청나라에게 몰락하자 태도를 바꾸었다. 청나라에서 척화신을 데리고 와서 심문하려 할 때 목소리 큰 고관대신은 어디가고 이제 중간 위치에 이른 신료만이 자진해서 갔고, 그들은 끝까지 청나라에 저항하다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참수를 당했다. 죽으면 더 이상 모욕은 받지 않으나 죽음은 너무 가혹한 처사이다. 그러나 죽음조차 감내하던 사람이 많았다. 천인 여성은 모르나 양반이나 양인 규수들과 부인들은 몸을 강제로 욕볼 바에 차라리 자살을 선택했다.

 

남자들도 그렇다. 스스로 목을 매거나 칼로 자해하거나, 종을 시켜 목을 조르게 했다. 종은 주인의 명을 받자 눈물을 흘리며 주인의 목을 줄로 졸려 죽였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물건처럼 취급받았고, 홍타이지 죽음 이후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머물면서 받은 설움과 억울함이란 말할 수 없고, 노예시장에 팔려간 조선의 백성을 볼 때마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에서 병자호란과 관련되어 또 다른 사람의 사연이 소개된다. 어느 사대부 무관의 아내가 청나라로 잡혀갈 때 집의 아이가 엄마를 놓치지 않자, 청나라 병사가 아이의 왼손을 잔인하게 잘려버렸다. 아 아이의 어미는 어떻게든 도망쳐 친정집으로 돌아왔다.

 

청나라의 횡포는 심했지만, 조선의 횡포 역시 심했다. 도망친 파로인들이 만일 내려오면 남자들은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여자들은 겁간을 당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성리학의 도의는 사라졌다. 성리학은 정치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이지, 정치적 신념은 전혀 없었다. 어미는 몰래 친정아버지 집에 살았다. 자신의 친정어머니, 시댁식구, 남편 모두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우연히 아들은 살아있었다. 몇 해가 지나고 과거시험이 열렸을 때 어느 선비가 왼쪽 손목이 없었다. 손이 없던 그 선비가 소문이 나자 인조는 직접 그를 불러 손을 잡아주며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잃어버린 손과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축하의 자리가 눈물의 자리가 되었다. 이 소식이 그의 어미에게 가도 어미는 아들에게 찾아갈 수 없었다. 파로인들이 도망치면 그의 후손들이 엄청난 패널티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조차 용서되지 않은 천륜의 관계이다. 이 책을 보니 뭔가 조금 이해되는 게 있다. 우리는 중국인들을 두고 되놈(때놈)”이라 한다. 그 말의 어원이 병자호란에서 시작했다. 성남에 위치한 남한산성 인근 마을주민들은 가끔 떡국을 나누어 먹는다고 하는데, 이는 인조가 정월 하루 겨우 떡국을 먹을 수 있을 때 성 안에 있는 모든 백성에게 떡국을 내렸기 때문이다.

 

400년이나 된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언어로 내려온다. 특히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리는 여성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화냥년이란 말은 심한 욕이다. 그런데 그 말의 어원은 환향녀이고, 그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정조를 잃은 이유로 시댁에게 버림받고, 친정에서는 출가외인이라 하여 받아주지 않았다. 억울한 한을 풀어야 하는데, 권력층은 이들은 버렸다. 나라가 약하면 이런 비극을 당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위안부로 끌려간 그 많은 소녀들은 성노예가 되어 죽임을 당했고, 원혼도 달래지 못한 채 그렇게 세상을 하나 둘 떠나가고 있다.

 

힘이 없는 이유로 당한 수모의 역사는 피로써 글을 남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효종에 대한 글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효종은 봉림대군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같이 청나라에서 고생을 한 임금이다. 누구보다 더 가까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보았고, 개방주의자 소현세자와 달리 군권주의자 무관임금으로 임했다. 모두들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말하고, 심지어 청나라에 머리를 숙인 이유로 사대부들이 벼슬을 거부하고 숨는 경우도 많았다. 자신의 벼슬이 판서에 이르러도 누구에게 소개할 때 현감이란 지칭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명나라 황제 만력의 연호에 내려진 벼슬은 인정하고, 청나라 태종의 연호는 거부하는 이들도 많았다. 복수를 꿈을 꾸고 청나라를 치고 싶다면 무관을 우대해야 하나 여전히 문관의 권력이 걸림돌이었다. 병력을 모우기 위해 장정을 모아야 하나 양반들은 군포조차 내지 않고, 죽은 시아버지와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갓난아이들이 군적에 오른다. 병역비리는 곧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징조이다. 사형 찬반론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지만, 병역비리의 죄질이 나쁜 자는 총살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연유이다.

 

군인이 잡은 총이 적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에게 총구를 겨냥해 권력을 탐하고, 장정들은 혹독한 처사에 죽어가고, 농민은 수탈만 당하니 어떻게 희망이 있을까? 작가는 효종의 정신을 다시 찾은 이유는 엄정한 군기를 내세우고, 정예 병사를 만들고 키우기 위해 국가 전반의 부조리를 수정해야 했다. 백성들이 잘 살아야 강한 국력이 되어야 하나, 여전히 사대부들의 반대가 심했다. 서인들의 계보 중에 소론과 노론이 있지만, 이전에 한당(漢黨)과 산당(山堂)이 있다. 대동법과 농민조세 부담 경감이 한당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산당이다. 나라가 청나라에 밟힌 이유가 명확한데, 그 책임조차 외면하고, 남에게서 빼앗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구군분투 하던 그들을 보면, 17세기에 끝나야 할 인간들이 아직도 21세기에도 답습하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치욕의 역사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일으킨다. 피가 끓고, 뼈가 녹는 기분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우리가 잊는다면 다시 역사의 비극을 반복된다. 이 책에서 청나라에 끌려간 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그들이 끌려간 땅에 대를 이어간다는 말을 한다. 조선인들이 구한말 간도로 넘어가거나, 일제의 잔인함에 만주로 넘어가 고국을 등진 분들이 많다. 해방되어도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못한 채 영원히 타국의 주민이 되어 한국인이 되지 못한 조선인 동포들, 그들이 조상을 한에서 이어져온 삶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결코 우연이 아닌 연속적인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란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우야담 - 보유편
이월영 역주 / 한국문화사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조선의 역사를 한국에서 언제부터 민중이란 존재가 서적에서 오고가고 했을까? 한국의 문학에 대한 연구에서 설화(舌禍)를 중심으로 이어져갔다. 그 의미는 기록이 아닌 구술적 체계로 통해 전해진 것이다. 한국의 설화문화는 신화나 민담 등과 이야기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구설의 가치는 지금이야 이야기의 소재이지만, 과거에는 민중에서 흘러가는 이야기일 뿐이다. 말로 구전되므로 이야기 내용에서 인물과 장소, 사건과 흐름조차 계속 변해간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으면 자세한 전후를 알기 힘든 부분도 많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역사에서 기록문화를 담당한 사대부 중에 제대로 백성의 삶에도 관심을 가진 자가 있다.

 

유학(儒學)의 가치에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기록이 아닌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를 적은 학자가 있었다. 우리는 흔히 어우야담(於于野談)이란 말을 얼핏 들었을 것이다. 어우(於于)라는 것은 어우당(於于堂) 유몽인이 저술한 책이며, 야담이란 말처럼 정사만이 아니라 야사나 혹은 전설이나 민담조차 넣는 경우도 있었다. 유명한 역사적 기록에도 재미난 내용도 나온다. 유몽인을 임진왜란 당시 중국 명나라 외교를 진행하고, 분조와 무군사를 이끈 왕세자 광해군을 보필했다. 선조 말년과 광해군 집권 시기에도 유몽인은 계속 활동을 했다.

 

전쟁을 겪고, 어지러운 조선 중후기를 보냈기에 어우야담은 온갖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설의 고향이나 혹은 조선의 야사를 다룬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이야기 소재가 <어우야담>에 나온다. 명종 시기 을사사화로 인해 대윤 윤임 일파는 숙청을 당한다. 대윤의 일파 중에 유인숙, 유관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그 시체마저 부관참시를 당하는 화를 당한다. 여기 유관의 하녀인지 혹은 유인숙의 하녀인지 조금 다르게 전개되는 바가 있으나, 어우야담에서 유인숙의 하녀는 주인을 죽게 만든 정순봉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처음 다른 종들은 모두 슬퍼하고 있으나, 얼굴이 고운 이 하녀만 오히려 생기 있는 표정으로 주인을 섬기고, 주인 가족 모두 그 하녀를 아꼈다. 하지만 어느 날 주인 정순봉이 계속 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가족들은 가장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무당을 불러 점을 친 결과 주인이 사용하는 베개 안에 해골이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해골이 베개에 있으니, 그 당시로는 저주, 지금으로는 전염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죽은 사람의 시신을 욕되게 하는 짓은 최악의 행위이다. 그러나 시체의 유골을 가져올 수 있는 이유는 해골의 주인이 병으로 죽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순봉은 자신이 꾸민 계략에 결국 복수를 당한 셈이다. 문초과정에서 주인 가족에게 스스로 죄를 밟히고 그녀는 정순봉의 빈소 옆에서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후 대윤 일파의 무고가 풀리고 명예를 회복하자, 그녀의 시신을 주인의 묘지 옆에 묻혔다. 지금도 문화유씨 일족은 그 무덤을 소중히 여기고 제사를 지내준다고 하니 600년 전의 일이지만, 인간의 도리는 그 자신이 생명이 다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정신이 살아있는 한 영원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순봉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부친이 저지른 죄악에 괴로워하며 평생 벼슬을 나가지 않고, 은거하여 살았다는 점이다.

 

어우야담은 전반적으로 이야기의 전개는 길게 가나, 결론 부는 너무 담백하다. 그가 보여준 글의 깊이는 그 간략성과 결과에서 보이는 삶의 자세이다. 인간은 글에서 자신의 생각과 인품을 보여준다. 한글이 아닌 지식인 계급인 사대부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유몽인의 글은 억지로 자신을 내세우려 하기보단 그저 주변 이야기를 듣고 촌평을 날리는 형태이다. 그가 보여준 글의 정신은 인간의 삶은 순탄치 않은 점, 그리고 과거와 권력에 대한 풍자, 전쟁이 안겨준 고통과 슬픔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직접 수습했던 이로써 안타까운 사연도 많다.

 

사연의 주인공은 비단 양반 사대부일까? 전쟁 이후로 도적이 늘었다. 하지만 도적은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게 아니라 배고픈 배를 해결하는 게 목적이다. 강도짓을 해도 살인을 하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 그들이 양민이었지만, 현실의 빈곤과 어려움이 그렇게 만들었다. 유몽인은 다른 사대부와 달리 시문놀이에 젖은 정치가가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광해군 시절 임진왜란과 명나라 청나라 교체라는 최악의 시기였다. 어려운 시기였으나 어우야담에는 운명론적인 내용과 점복(占卜)에 대한 글이 많다.

 

점복으로 운명을 치는 사람은 양반보단 중과 천민 갖가지 사람이 많다. 또한 전쟁이란 큰 위기를 맞이했으나 귀신이야기도 나온다. 광해군 시대를 검토하면 유일하게 이때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 북으로 청나라에 대해 기미술을 사용하고, 왜국과는 외교와 통상을 재개했다. 북쪽의 평양감사로 박엽이란 인물이 있었다. 박엽이 북쪽에서 지키고 있을 때 청나라는 함부로 조선을 넘보지 못했다. 박엽이 지휘하는 조총부대는 아시아 최고의 사격부대였다. 물론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에서 이들은 모조리 박살났다.

 

그런 박엽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박엽은 성격이 호탕한데, 그가 전쟁 전후로 밤길을 가다 아름다운 여성이 자신의 옷깃을 일부러 스쳐가자, 그녀에게 말을 건 후 그녀의 집에 간다. 그녀의 집에 가니 가족들은 잠들어 있고, 그녀는 박엽에게 술을 접대하고 밤을 그렇게 보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녀는 사람이 아니고 차가운 시신이었다. 제대로 식사하지 못해 굶주림과 병으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모두 죽어 있었다. 옆집에 가서 갖바치에게 사정을 알아보니, 그 집은 사대부 집안이었으나 전쟁 중 굶주림으로 집안 식구가 모두 죽었다는 것을 알자, 박엽은 관을 가지고 와서 그 집 식구 모두 장례절차를 수행하였다.

 

귀신이 단순히 나쁜 존재로 본 게 아니라 귀신조차 현명한 존재로 그려낸 셈이다. 인간의 운명이 죽음을 당할지라도 그 본분을 잊지 않았고, 하물며 유관의 어린 하녀는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복수를 했다. 민중이라도 신분적으로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종복들도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런 유몽인이기에 그의 최후 역시 뭔가 모르게 마음이 아프다. 유몽인은 본래 동인이었고, 동인이 남북으로 갈렸을 때 북인으로 전향한다(그래서인지 동인에서 북인의 영수로 활동한 이산해의 이름이 자주 거론된다).

 

임진왜란 당시 남인 서애 유성룡이 북인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자, 북인 이산해와 그 중심세력이 등장하고, 이때 광해군은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광해군은 의병과 같이 활동한 세력이므로 북인 내에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나누어지고, 선조가 죽자 소북 영수 유영경은 광해군 세력인 이이첨에 의해 귀양 후 사약을 받고 죽는다. 유몽인은 북인에서 중북이었고, 권력에 지향하기보단 그저 업무에 충실히 이행하고, 글을 봐도 권력을 향하기보단 인간의 운명과 도리에 관심을 가진다.

 

말년은 권력의 중심보다 조용히 자연과 함께 살고자 했던 그의 꿈은 박살난다. 1623년 인조반정에서 유몽인은 직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나, 자신의 아들과 주변인물들이 광해군지지 세력이었고, 인조반정에 대한 반정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연좌되어 죽게 된다.

 

유몽인은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이다. 그의 글을 봐도 세상의 풍파가 얼마나 심한지 더구나 기묘사화의 조광조, 을사사화 윤임, 기축옥사 최영경을 거론한 자체로도 당쟁과 정치권력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인간의 도리를 알았다. 아들이 인조반정에 반발할 때 유몽인이 말리려다 참은 이유는 많은 사료에 나온 것으로 유몽인의 시 <상부탄(孀婦歎)>을 아들이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일흔 된 늙은 과부, 안방을 지키며 홀로 사는데(七十老孀婦, 單居守空壺)

이웃이 개가를 권하며 무궁화 같은 얼굴의 선남이라네(傍人勸之嫁, 善男顔如槿.)

여사(궁중에서 글을 맡은 여관女官)의 시를 많이 읽고 태임(太姙)과 태사(太姒, 각각 문왕과 무왕의 어머니로 덕 있는 부인을 상징한다)의 가르침도 익히 아니(慣讀女史詩, 頗知妊姒訓)

흰 머리에 화려하게 단장하면 고운 화장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인조가 왕이 되어도 자신은 광해군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유몽인이 이미 세자시강원에게 광해군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그와 더불어 임진왜란을 수습했기에 누구보다 광해군에 대한 마음이 아련했을 것이다. 북인의 특징, 박엽에 대한 글이 있는 점에서 그가 바라본 정치적 상황은 어림잡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우야담에서 어떻게든 발버둥치려 해도 운명의 길을 접어드는 이야기가 많다. 가령 점술사가 무덤에서 벌이 나오면 나를 죽일 것이라 했는데, 바로 그렇게 되는 이야기나, 아니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이란 예언조차 그렇다.

 

이산해와 관련된 내용에서 아계 이산해의 스승은 토정비결을 저술한 이지함이다. 이지함은 이산해의 작은아버지였던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바뀔 수 없는 것인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준경이 천거한 인물 중에 구수담이란 학자가 있다. 그는 명종 때 억울하게 죽었다, 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여자에게 빠져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이준경이 그에게 큰 호통을 친 후 다시 공부하여 벼슬에 올랐다. 구수담의 아들 구영준이 손톱 하나가 빠져서 이준경이 왜 그런지 물어보니, 아버지 구수담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구영준은 너무 슬퍼서 땅에 손을 계속 움켜쥐었다가 그래 된 것이다.

 

인간의 천성을 고칠 수 있지만, 단지 이준경 같은 희대의 명재상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운명의 행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구수담이 죽은 이유도 이준경의 천거로 조정에 나갔기 때문일 수 있다. 인간의 운명은 알다가 모르고, 일이 끝난 것을 보면 그게 어찌할 도리가 없이 되었다는 것도 볼 수 있다. 어우야담은 그가 직접 보거나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기에 일정한 소재가 아닌 다양한 내용을 등장한다. 하지만 책을 보면서 참 불행 중 다행이라 여겼다. 광해군 시기 한국의 국문학은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한국 국문학에서 한글로 시조를 읊은 고산 윤선도가 광해군 시절 이이첨을 비판하다 귀양가고, 한국 국문학 소설에서 홍길동전이 허균에 의해 만들어진다. 조선의 야사 중에 하나인 어유야담 역시 광해군 시절 나온다. 허균은 능지처참으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기에 그의 서적은 모두 소실될 뻔했다. 다행히 그의 후손이 소중히 보관하여 400년 후 우리나라에서 소중한 소설이 되어주었다. 유몽인 역시 그런 위기에 겨우 벗어난 인물이다. 시대의 아픔에서 저자들은 힘든 여정과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들의 글은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을 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8-03-15 0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의「어유야담」은 중국의 「요재지이」와 같은 성격의 민담설화집인 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3-15 09:23   좋아요 1 | URL
민담과 설화를 문자로 남겼으니 그가 해낸 업적은 가히 높다고 봅니다
 
시골무사 이성계 - 운명을 바꾼 단 하루의 전쟁
서권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이 시작된 시기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을 정해놓으면서 된 일이다. 조선이란 역사를 보면 참 난감한 점들이 많다. 조선이 세워진 시기를 놓고 다시 생각한다면, 광해군 시기와 뭔가 상당히 많이 중첩되는 느낌이 있다는 점이다. 광해군 시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시기라면 조선이 막 개국한 시기에는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올라오던 시기이다. 이성계는 불교와 성리학의 중간에 놓인 고려를 대신하여 유교를 중심인 조선의 시조가 되었다. 생각하면 조선의 이성계와 고려의 왕건 모두 무인에서 시작된 인물이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조차 무인의 기질이 뛰어난 인물이다.

 

무관이 왕이 되어 문관을 등용하면 다시 문관이 무관을 우습게보고, 문관이 병무의 실제 업무를 모르면서 병권을 잡게 되면 난이 생기는 일이 다분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초반에 문관도 많았지만 무관들도 많았다. 공자의 유학자에서 선비들은 원래 춘추전국시대에는 문예를 기르는 자보단 무예를 익히는 자들이 강했다. 무예를 익히는 이유는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직접 마주하기 위해서라면 각 임지를 나돌아 다녀야 하며, 더구나 전쟁이 계속 일어난 시기에 선비들의 본분은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러나 고려를 지나 조선을 오면서 선비는 무관보다 문관에 이르게 되고, 나라의 위기에 처해질 시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비들의 나라, 조선은 이성계와 무관 그리고 신진 사대부들이 함께 일으킨 국가이다. 조선이란 국가는 고려를 멸망했지만, 고려가 멸망한 이유는 다름 아닌 국가권력의 부패와 백성들의 빈곤이었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면서 가장 먼저 정리해야할 것들이 기존 권력을 청산하는 것이다. 왕족과 봉건귀족은 막대한 이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읽은 <시골무사 이성계>에서 신돈이란 승려가 정치를 하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노비의 신분해방과 농민의 억울한 처사를 풀어주는 일이다. 권력자들에게 가장 돈이 되는 것은 땅을 많이 차지하고, 땅에서 나온 소출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다.

 

조선이 세워진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바로 토지에 대한 문제다. 농민이 농사를 짓고 먹고살아야하는데 이게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이다. 땅을 빼앗고, 빚을 갚지 못해 평생 노비로 살아가는 일들이 발생한다. 노비도 인간인데, 이상하게 소와 말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는 게 노비들이다. 권력자들의 비리는 곧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세계 어디를 돌아봐도 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고 사실이다. 고려의 무능한 정치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백성들이 힘드니 군역과 세금문제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전쟁이 나면 어떻게 되는가? 우선 군량을 마련해야 하는데, 군사들에게 먹일 쌀이 모두 중간에서 착복되고, 군사들의 징병해야 하는데 모두 어디론가 도망친다. 게다가 군사들이 모여도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해 싸움을 제대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한다. 겁쟁이가 되는 것은 기본이고, 무기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고려 말기, 홍건적이 조선을 침범하고, 왜구가 계속 남해안을 노략질을 한다. 이성계가 성공한 이유 그것은 무엇인가? 그가 궁술이 뛰어난 강한 무장이라 그런가? 아니면 천하의 문장가 정도전이 있었기 때문인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성계는 처음에 고려의 무관이고, 40대 중반까지 반역할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소설 <시골무사 이성계>를 보면 우리가 아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아니라 그냥 변방에서 떠도는 무관 이성계를 마주한다. 이성계는 변방을 전전하면서 여진족 같은 오랑캐 부족을 의형제를 맺으며 같이 동고동락을 한다. 이성계는 명궁이지만, 한편으로 활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중앙관직이 아닌 변방을 누비며, 그가 찬란한 업적을 보여준 것은 바로 황산대첩이다. 일본 왜구 만여명이 침범하나, 고려의 군사력은 천 명 정도이다. 게다가 지휘내부의 갈등까지 겹치고, 이민족으로 구성된 이성계의 사군들은 모두 형제이고 삼촌조카이었다.

 

이성계에 대한 일화를 보면 그는 순수 조선인 즉 고려인이 아니라 여진족과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자로 나온다. 변방에 살아간 우리 선조들은 다 부족과 싸우기도 했지만 때로는 같이 살기도 했다. 변방의 부족을 국내로 귀화하여 살게 한 경우도 있고, 임진왜란 당시 항왜들을 조선인으로 살게 해주었다. 민족의 단일성보단 민족이 가진 문화적 정체성으로 계속 유지된 셈이다. 고려는 원나라의 종속국이었고, 원나라 본국의 신료와 고려 중앙신료들이 권력자였다. 변방의 장수는 그저 벌거숭이에 불과했고, 이 책에서 이성계는 병법서조차 읽지 않은 그저 한미한 출신의 무관이었다.

 

황산대첩 당시 종2품 도순찰사 직급을 가졌지만, 오랜 기간 변방을 누비면 생사를 오고간 그에게 너무 한미한 벼슬이다. 권력자들이 병권을 잡으면 도순찰사 이상의 벼슬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전쟁에서 1:10의 전쟁은 마치 지나가는 소설책처럼 지나가고, 우리 역시 소설책 읽듯이 스쳐간다. 하지만 진짜 소설에서 오히려 역사책보다 더 리얼한 상황을 느낄 수 있다. 활이 가르고, 칼을 베고, 창으로 찌르며, 도끼로 가른다. 말 한 마리의 숨소리와 비명, 대낮의 전투부터 야간의 전투까지 죽음의 그림자는 언제나 숨을 또 숨을 쉰다.

 

소설이지만, 소설이 현실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역사책에서 전쟁을 일어나면 그 전투장면 하나하나를 묘사하지 않는다. 누가 어떻게 죽고 다치고, 또한 죽이는지 말이다. 드라마에서 이성계를 다루는 모습은 그가 보여준 조선의 창업정신에 대한 영웅성을 보여줄 뿐이다. 그가 위기의 현실을 보여줘도 그의 비참한 모습까지 잘 보이려 하지 않는다. <시골무사 이성계>는 비참한 모습의 이성계를 보여준다. 책 표지에 있는 말을 타고 이성계의 모습은 40대 중반이라 하나, 백발이 무성한 외모는 마치 60대에 가까운 모습이다. 책 내용에서 전장을 누비면서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하고, 늘 죽음을 맞이하기에 괭한 모습만 드러낸다.

 

갑주와 투구조차 낡고 누추하고, 그의 목에는 늑대 가죽을 두르고 있어서 고려국의 종2품의 장수인지 야인인지 알 수 없다. 황산대첩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그저 활을 들고 있는 필부의 모습이다. 그는 필부로 살아갔기에 조선의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전장에 나가면 가장 비참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 칼을 잡는 장병이 아니다. 그저 힘없이 적의 칼에 도륙당하는 백성들이다. 왜장 아지발도가 침범할 때 왜구는 특이한 풍습을 보여준다. 전쟁을 참전하기 전 제사를 지내는데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는 점이다.

 

인신공양은 참으로 끔찍하다. 사실 동물을 그냥 죽이는 것도 끔찍하나 같은 인간, 그것도 어린 아이에게 죽음의 칼을 대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다. 아지발도는 고려 땅을 침공할 때 그 지역의 어린 소녀의 가슴에서 성기까지 칼을 베어 내장을 모조리 꺼냈다. 소설에서 만삭한 자신의 아내의 배를 갈라 뱃속의 아이를 죽였다고 하니 정말 끔찍한 일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은 백성의 죽인 것도 모자라 살아있는 자의 코와 귀를 베어가기도 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전쟁 나는 이유는 단순히 외적의 침입만이 아니다. 외적이 침범해도 그것을 방비할 수 없는 국가의 무능함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된 계기는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격퇴했고, 거기에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과업이 결국 전쟁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이성계의 가르침을 조선의 후대 왕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선조 당시 임진왜란이나 명종 당시 을묘왜변을 봐도 그렇다. 을묘왜변 때 이준경이 있었고, 임진왜란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을 배반하지 않았지만, 이성계는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원과 명의 교체이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는 명과 청의 교체시기이다.

 

나라의 지도자인 군주가 이성계가 밟아온 삶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렇게 처신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시골무사 이성계>를 보면서 문득 나는 예전에 읽은 책 1권이 생각났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이다. <일리아스>를 보면 트로이전쟁에서 전투를 펼치는 모습이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창이 상대방의 머리를 박히고, 도끼가 머리를 박살되며, 뜨거운 피가 용솟음 치고, 내장이 쏟아진다. 단지 <일리아스>는 영웅주의적인 요소지만, <시골무사 이성계>는 영웅을 필부처럼 묘사했다. <일리아스>는 전장을 영웅의 서사시로 그리지만, <시골무사 이성계>는 전장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야생의 짐승들처럼 표현했다.

 

작품에서 또한 인상적인 모습은 간인(間人)들의 모습이다. 간인들은 아주 다양하고 특이한 존재도 많았다. 살기 위해 활동하는 간인도 있다면, 죽을 줄 알면서도 활동하는 간인도 있다. 어제 죽은 왜구의 갑옷을 입고 적의 진영에 침투한 간인도 있고, 고려군 작전회의 자리 인근에서 구걸하거나 엿보는 간인도 있다. 간인들이 정보를 조작하여 적을 몰살시킬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다. 전투는 단순히 칼과 창으로 부딪혀 일기당천으로 해결되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철저히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공간이다.

 

삶이란 그 하나의 공간은 어째 보면 전쟁이다. 진정한 지옥은 전쟁터이도 있지만,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세계에도 전쟁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곳에 내몰린 인간과 그 인간들 위에서 군림하거나 말로만 그들을 대하는 자는 분명히 느끼는 바가 다르다. 내모는 자들의 내몰린 자들의 치열함을 알 수 없다. 그곳이 죽음의 사선이 이어지는 공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냉소적인 세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칼과 활 그리고 같이 죽음을 맞대고 있었던 전우들뿐이다. 동료애와 의리는 단순히 그 감정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고, 자신이 살아갈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시골무사 이성계>를 소개하는 글에서 이 책은 남자의 소설이라 한다. 하지만 보통남자라도 그런 공간에 있기 싫을 것이다. 필부(匹夫)로 등장하는 이성계처럼 나 역시 그저 필부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