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7년 세트 - 전7권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2월
평점 :
품절


조선시대 관련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 고관대신과 일반 신료를 보면 표준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료를 보면 조정대신들이 의논이나 토론할 때 방언이 많이 섞여서 잘 알아듣지 못할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언어의 존재성에서 언어란 사회적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적 관계성이란 비단 국내적 상황이 아니라 지역적 조건에도 관련이 있다. 외지에서 살아오다 이제 조정에 와서 표준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다. 평생 전남지역이나 부산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말투가 새삼 다름을 알게 된다.

 

물론 서울사람들이 지역에 내려가면 자신의 말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일정 기간 지나면 어느 정도 대화는 성립된다. 그 지역의 특성, 그 지역의 사람들, 그 지역의 역사, 그 지역의 아픔까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이순신의 7>이란 소설은 그런 작품이다. 이순신과 관련된 미디어로 제일 유명한 작품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영화 <명량>이 있다. 전자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약간의 픽션을 잡어 넣어 어느 정도 재미를 보여준 드라마이라면 후자는 명량대첩의 이순신을 하나의 영웅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 영화이다.

 

어느 것이 좋다 안 좋다 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전자가 좋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의 끈기와 인내심은 분명 높다. 하지만 일방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수하에 많은 장수를 거느린 전라좌수사 겸 수군통제사이나, 막상 회의를 진행할 때 첨사나 만호 같은 상급무관만 아니라 권관이나 주부, 하다못해 일반 수군병졸이나 격꾼까지 모아서 회의를 진행했다. 단순히 위에서 내려보내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수시로 보고를 받고 토의하여 최상의 결론에 도달하는 리더쉽이 2323승의 비결이었다.

 

그런 비결을 보자면 <명량>이란 영화에서 다소 떨어지는 감이 든다. 그나마 <불멸의 이순신>에선 사사로이 병졸 하나하나를 다독거리는 모습에서 이순신 전대의 비결이 나온다. 화살촉 하나 만드는 노인, 배에 올라 열심히 톱질을 하는 목수, 화살을 열심히 날리는 수군 궁병까지 찾아간다. 조선시대 계급사회에서 양반과 상민의 차이는 엄청난데, 거기에 수군통제사라면 당상관 중에서도 상위계급이다. 그런 높은 자리에 있는 장수가 일개 군졸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이해해주면 어느 누가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을까?

 

군대생활에서 일개 사병과 대대장의 차이는 어마하다. 이순신은 지금의 직급에서 생각하면 대대장보다 높은 해군참모총장이다. 해군참모총장이 직접 전선에 올라가 총탄이 날라 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사병을 독려한다면 그 선단은 최고의 용사로 거듭날 것이다. 지금의 군대를 보면 위의 참모진은 안전한 후방에서 마치 체스나 장기 두듯이 전력을 움직인다. 그들의 지휘는 곧 사병들의 목숨 1명을 버릴 것인가? 혹은 100명을 버릴 것인가? 하는 숫자 계산놀이만 하는 셈이다.

 

<이순신의 7>을 보면 이순신이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우리가 늘 미디어에서 보던 이순신은 표준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건천동 일원에서 어린 시절을 잠시 보내고, 청소년과 청년기는 충난 아산 외가 쪽에서 보낸다. 결혼은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하여 전남 보성으로 내려갔기에 그가 겪은 언어적 구조는 서울 표준어보다 지방의 방언이 더욱 많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이야 서울 부산까지 거리가 KTX2시간 반, 항공기로 1시간, 자동차 4시간 이상이면 돌파한다. 그 과거시대 걸어서 한양까지 1달이고, 말을 타고 가도 2~3일은 걸린다. 교통적 편리함은 곧 왕래할 수 있는 시간길이를 척도 할 수 있고, 그 길이에 대한 시간은 타 지역에 대한 정보와 이해도까지 이어진다.

 

높으신 양반들은 표준어, 하층민들은 방언을 사용하는 점은 언어에 담긴 사회적 권력을 의미한다. 반상관계의 엄격함에서 전쟁에서 과연 그런 단합력이 나올 수 있었는가? <이순신의 7>은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노량해전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 마무리는 <이순신의 7>에 대한 후기를 적어준 홍기삼 문학평론가의 글이다. 홍기삼 동국대학교 전 총장의 글을 보면 내가 이 책을 보던 내용과 그가 봤던 부분은 차이가 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내 감이 맞은 것이 있었다. <이순신의 7>을 작성한 정찬주 작가의 고향은 보성이다.

 

전남지역의 해안가는 부산경남과 마찬가지로 왜구들의 침입이 잦았다. 특히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전남 강진 일대는 큰 위기에 봉착했고, 이순신의 조력자 중 하나인 동고 이준경 선생이 지휘하던 관군은 왜구를 무찔렀다. 을묘왜변은 보통 왜구의 숫자와 규모가 달랐다. 제법 큰 군사규모를 가진 해적군단이었다. 전남지역의 앞바다에 계속 왜구가 출현하고, 임진왜란 이전에도 계속 침입하여 많은 양민과 관군들을 피살했다. 보성 역시 해안가가 옆에 있었고, 보성 좌측으로 장흥군과 강진군, 우측으로 순천시와 여수군이 위치했다.

 

이순신이 처음 부임한 곳은 전라좌도 수군영이다. 전라우도 수군영은 해남에 있었다. 전라지역이 경상지역보다 일본 대마다보다 멀기 때문에 군사들은 경상도 수군기지에 더 많았다. 장비와 재물 그리고 지원도 그렇다. 이순신이 속한 전라좌수영은 수군기지 고을도 부족하고, 인력도 부족하고, 전선도 부족했다. 1년 동안 좌수사로 활동하면서 다른 수군기지보다 더 강한 전력을 갖춘 것은 그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거북선을 축조하고, 군량미를 만드는 것은 혼자서 불가능하다. 그것을 같이 만들어나갈 인재들이 필요하고, 그들의 마음을 잘 알아줘야 했다. <이순신 7> 앞부분을 보면, 진무를 맡은 수군집안에 사람이 죽어 이순신이 조문가는 장면이 나온다.

 

좌수사가 일개 수군 병졸을 위해 조문을 가고, 거기에 필요한 장례음식과 물품을 대주는 모습이 나온다. 전쟁 중에 아군의 병력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작전을 유리한 쪽으로 검토하며, 전투과정 중 사망한 병졸 하나하나 기록하고, 그들의 유해를 집으로 보낼 때 곡식이나 물품을 보내고 위로했다. 특히나 전몰장병을 위해 제사를 올리는 장면에서 많은 수군 장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순신이 엄정하고 군기를 세우는 무관인 것은 분명하나, 사실 부하 장병을 아끼고,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어렵다.

 

TV에서 보이는 이순신은 이상화 된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7>은 이상적인 인물보단 서민과 같이 숨을 쉬는 정겨운 모습으로 나온다. 송희립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 이순신은 충청도 사투리를 사용한다. 사투리는 단순히 방언으로 볼 게 아니라 문화와 역사적 공간을 이어주는 전달수단이기도 하다. 홍기삼 문학평론가가 주목한 방언의 가치,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호남이 없었다면 절대로 조선은 없었다고 하는 그 사실에 주목한다. 이 책을 읽을 때 단순히 소설 그 자체도 좋지만, 비봉출판사에서 출간한 <충무공 이순신 전서>, <이순신과 임진왜란>, <난중일기>, <징비록> 모두 같이 보면 좋다.

 

거기에 조금 추가하면 기축옥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은 앞으로 나가지 않은 장수들에게 호통을 친다. 그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 안위 장군이다. 안위는 거제현령으로 명량의 승리로 정3품 통정대부까지 이르고 후에 수사 자리에도 오른 장수이다. 그는 사실 벼슬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1589년 일어난 기축옥사에서 정여립이 안위에게 5촌 당숙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촌형제들의 아이들도 친하게 지내는데, 조선시대라면 상당히 가까운 사이다. 안위는 기축옥사 여파로 귀양 가고, 전쟁 중 풀려나 활약을 했다. 첨사 이응화 역시 기축옥사와 연루되어 귀양가다 다시 이순신의 도움으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기축옥사가 중요한 이유는 기축옥사에서 가장 많은 화를 당한 곳이 호남지역이다.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유배올 적에 호남에서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은 3~4곳 정도라고 했다. 많은 동인 계열 선비들이 유배나 죽임을 당했고, 거북선 돌격대장 이언량은 광산이씨인데, 광산이씨 중에 이발과 이길 가족과 친지들은 선조와 정철에 의해 가장 많은 화를 당한다. 임진왜란 시기에도 동인(북인과 남인)과 서인, 관군과 의병대의 체계가 달랐고, 특히나 북인 위주의 의병, 남인위주의 관군은 전쟁 중에 많은 희생을 받았다.

 

전쟁이 종료될 때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세력은 남인이었다. 이순신이 서거한 날, 서애 류성룡 선생은 파직되었다. 그가 파직된 이유는 탐욕이 많고 시기심이 넘치고, 군왕을 속이고 조정을 어지럽힌 이유이다. 전쟁 중 도체찰사의 업무와 내정, 외교에서 류성룡 선생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게 거품이었다. 이순신의 목숨이 선조에게 위협받을 때 정탁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정탁과 류성룡은 모두 퇴계 이황 선생 문하생이었다. 전장에서 장병들은 죽음과 배고픔에 힘겨워 하는데, 중앙관료와 선조는 권력을 유지하고 누리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만 나온다.

 

홍기삼 문학평론가는 선조를 두고 암군 중에 암군(暗君)이라 한다. 선조를 두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억지로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기축옥사와 인조반정의 특성은 동인의 제거이다. 동인을 제거한 서인의 관점에서 기축옥사는 당연한 일이고, 인조반정에서 동인이 만든 자리를 처리하는 게 제일 급선무였다. 안위 장군이 업적이 있어도, 정묘호란 때 그를 기용하지 않았다. 안위의 동인제거의 기회를 준 정여립의 5촌 조카이다. 광해군과 동인의 후예 북인을 제거한 서인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광해군의 가치를 깎으려면 선조의 입지를 올릴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원균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아주 고약하고 나쁜 모습이다. 같은 조선인까지 잡아 죽여 머리모양을 왜군처럼 만들어 행재소로 보낸 공으로 치부하던 그 모습은 사악한 인간 중에 인간이었다. 이순신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할 때 그가 한 말은 질투에 미친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수군 장병을 수장시키고, 수많은 전선을 침몰시키며, 조선의 백성들이 왜적에게 도륙당할 때, 그를 기용하고 치켜 세운 선조와 윤두수의 행적은 대한민국 역사가 끝나는 그날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의 공적으로 동급으로 취급했고, 원균의 집안에 계속 곡식을 하사하여 그의 공을 치하했다. 선조는 이순신의 업적을 끝까지 인정하기 싫어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원균의 집안에게 내려준 곡식을 금지했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인조와 서인들은 원균의 집안에게 곡식을 다시 내어주기 시작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시점은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어진다. 이순신의 사당을 명나라 장수들이 선조에게 요청했지만, 선조는 끝내 설치해주지 않았다. 홍기삼 문학평론가가 <징비록>의 글을 인용했다. 이순신의 유해가 고향 아산으로 돌아갈 때 많은 백성들이 나와 통곡하고 슬퍼했다고 말이다.

 

그 내용은 비단 백성들만 아니다. 류성룡 선생도 자신이 느낀 슬픔을 백성의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때까지 우리는 이순신의 영웅주의 관점에서 칭송했지만, 인간 이순신에 대한 모습을 잘 몰랐다. <이순신의 7>에서 이순신은 아들과 조카를 똑같이 대해주고, 요절한 두 형님을 대신하여 조카의 생계와 교육, 그리고 결혼까지 챙겨준다. 남솔(濫率)이란 죄가 있다. 부임한 사또가 너무 많은 가족을 임지로 데리고 가면 그들의 부양으로 많은 백성들에게 고통이 온다. 이순신이 남솔에 대해 주변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자, 눈을 흘리면서 답변하길 돌봐줄 사람도 없는 저 어린 것들을 어떻게 내버려두고 갈 수 있냐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며 이순신의 덕을 인정했다. 그 덕분에 이순신의 조카들은 모두 임진왜란에 활약했고, 노량에서 이순신을 대신하여 군함을 지휘했다. 사람을 감동을 시키면 그 감동을 준 자가 죽어도 그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 명예와 체통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지만, 그 명예에 대한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하면 현대사회에서도 본 받은 점은 있다. <이순신의 7>에서 이순은 눈앞에 바다를 두고 왜적만 싸운 것이 아니다. 눈앞의 바다보다 더 깊고 거친 마음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권력자들은 이순신의 목을 언제라도 물어뜯을 기세를 보여주었다.

 

드라마에서 원균이 사망하고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될 때 비장미를 보여주지만, 책에서는 비장함을 보여주기보단 공허감으로 보여주었다. 그래도 그가 칼을 잡고 배 위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주변에 몰려든 조선의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임명사령장을 받지 않고, 그대로 병을 핑계대고 물러났다면 조선의 백성들은 모조리 도륙 났을 것이다. 조선이 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조선의 백성이 몰살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백성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고, 삶의 목적을 부여했다. 이순신은 백성들의 삶과 희망을 주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 우리의 바다를 지키는 바다의 신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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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23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주는 의미는 단순히 의사소통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5월 23일이 고 노무현 대통령 기일이라서일까요. 충무공의 모습 속에서 노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8-05-23 21:58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노짱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봉하마을에 가서 제초도 하고 그랬는데, 4~6년 전 봉하마을에서 제초기 돌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평이 아직 좋지 않았으나, 이제 재평가 받으니 마음이 참 착찹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