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구광렬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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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지 않았으나, 그가 유명한 인물이라는 것만은 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만든 영화도 있는 것을 안다. 그의 고장 난 500cc 오토바이 포데로사를 타고 남미 대륙을 횡단하고 모험하는 이야기에서 말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아마 영화의 특성답게 뭔가 강렬한 느낌이나 혹은 감동을 전해줄 것이다.

 

직접 그 영화를 본 것은 아니나, 이 책에서 나온 단편적으로 나온 체 게바라의 남미대륙 여행은 큰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보통 우리가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처럼 아름답고 절절한 이야기보다는 아름답고 절실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발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똑똑한 머리와 감수성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킨 체 게바라, 그는 매우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감수성은 많은 독서와 사고, 그리고 시 낭송, 그리고 길가에 만나는 많은 사람들, 이 모든 것이 체 게바라의 인생을 바꾼 하나의 소재였다.

 

그의 여행은 참으로 인상 깊다. 나는 사람을 고치기 위해 의사가 되었으나, 여행을 하고 난 뒤에 세상을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고 말이다. 그는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혁명가로 태어났고, 그의 투쟁은 전 세계 모든 자유와 평등, 인권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큰 메신저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 의해 실존주의가 막을 내릴 때, 그 실존주의자 대표적인 인물인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 인상 깊다. “우리 세기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말이다. 이런 장 폴 사르트르를 체 게바라는 직접 만났다. 장 폴 사르트르는 내가 아는 영역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역시 체 게바라도 마르크스의 도서를 청소년 시절에 읽었다. 그가 바라는 세상이란 마르크스가 외치던 약자들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체 게바라는 투쟁을 한 것이다. 내가 아닌 이 세계의 억압받고 탄압받고 피눈물을 매일처럼 흘리는 그들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체 게바라의 마지막은 자신의 피눈물로 마감하게 되었다.

 

10월 7일 볼리비아 정부군에 포획당한 후에 9일에 총살을 당했다. 그의 두 손은 증거확인을 위해 무참히 잘라나가고, 그의 시체는 포르말린을 주입당한 후 아무렇게 버려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많은 학자들이 그의 유골을 찾아 역사의 기억으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체 게바라의 해골이 보는 세상이란 아직도 아름답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해골을 대신하여 사람들은 체 게바라가 새겨진 티를 입고, 그의 이미지와 로고가 이제 젊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자유란 무엇일까? 청춘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지녀야 할 가치관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체 게바라는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비록 눈을 제대로 감지 못했지만,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에서는 그의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그의 인생, 그의 주변 인생, 그가 보아온 주변 사람들의 인생, 그는 독서를 좋아하여 늘 손에 책을 떠나보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죽을 때의 배낭에는 책이 많이 들어있기 보다는 낡아져 버린 수첩이 들어있었다.

 

그래도 그 수첩에는 자신이 좋아한 69편의 시가 담겨있었다. 아주 강렬하고 열정적인 사랑의 노래도 있었으나, 사랑보다 크고 웅장하며 슬픈 애환이 담겨있었다. 그중에 가장 인상 깊은 시는 아버지는 백인, 어머니는 원주민인 노래다. 남미가 침공 받아 백인들에게 노동을 착취당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는지 원주민 여성까지 범했다.

 

원주민 아이들은 혼혈로서 다시 재착취 대상이 된다. 이 부분을 읽다 보니 전에 읽은 하워드 진의 도서가 생각나기도 하고, 노암 촘스키의 저서도 생각난다. 남미에서 벌어진 잔혹한 행위와 그리고 숨은 진실들을 말이다. 체 게바라는 그런 강대국들의 횡포에 맞서 싸운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나거나 혹은 살아있거나 앞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 공간에서 말이다.

 

그 억압되고 부당한 공간은 당장 없어질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아주 잔혹한 사건을 보았던 것이다. 어느 흑인 소년이 백인아가씨에게 말 한번 잘 못해서 무참하게 맞아 죽었는데, 거기에 모자라 머리에 총을 맞아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는 점, 그리고 무거운 물건을 시체에 달아 강에 버려 시체가 썩어버리게 한 그 잔혹함, 오죽했으면 흑인을 죽이는 행위는 동네 행사로 여기고, 신문광고를 내는 모습은 정말 민주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인가? 하고 의심하게 했다.

 

물론 그 나라는 볼리비아 정부군에 지원을 해주었고, 볼리비아 정부군은 그들의 조직인 CIA에게 명령을 받아 체를 총살시켰다. 체 게바라의 죽음은 체 게바라라는 인물의 생물학적인 죽음이었으나, 그는 결코 죽지 않았다. 그의 이상향인 자유와 평화는 아직도 젊은이들의 입속에서 되풀이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에 반한 체 게바라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미지가 자본주의 상품 기호로 변질되었다. 이런 체 게바라의 영향이 워낙 큰지 안티 체 게바라 이미지도 나온다. 이미 그는 1967년 10월 자신의 심장이 정치적 폭력이 단긴 총알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도 그의 유령은 다시 세상 어디라도 좋으면 나타난다. 민중에 대한 폭력과 착취가 이 세상에서 멈추지 않은 그날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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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좌절 - 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
노무현 지음 / 학고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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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정치인들이나 유명 인사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적으면 대부분 좋은 부분을 적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최근에 이르기까지 큰 중요 사건들을 나열하여 거기에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어떻게 잘 되었는지를 보여주기 바쁜 것이 대부분의 자서전이다.

 

그런데 이번에 보았던 성공과 좌절은 조금 다른 자서전이었다. 그것은 성공과 좌절처럼 성공을 담은 이야기가 아니라 성공보다는 좌절에 순간에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어느 정도 성공한 부분도 있었으나 그것은 단지 일부분이지 이 책의 중심은 성공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많은 이야기였다.

 

노무현이 대통령을 지내면서 이 문구가 정말 생각나게 했다. “시대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라고 말이다. 노무현의 이야기는 어떻게 본다면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한국 근현대사의 이야기도 닮아내었다. 한국이 일제강점기와 625사변 이후 어려운 경제, 정치, 사회적인 변화 속에서 이른바 독재정치라는 큰 압박 속에 대중들이 살고 있었던 시기이다.

게다가 독재정치만 문제가 아니라 독재로 통한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노무현이 가장 싫어했던 부분이 반칙하는 플레이였다. 그리고 기회주의적인 인간들과 사회들도 싫어했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기회주의적인 인간이 득세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가령 나도 그런 생각을 버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흔히 겉으로 공정하고 모든 국민이 자신이 바라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즉 개인 어느 한 사람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성실한 자세로 임한다면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끔은 이런 이야기도 듣는다. “돈 없고 백 없는 인간들은 그저 죽어야지” 라고 말이다.

내가 지금 이런 문구를 적는 것이 이상할지 모르나 그것은 내가 일상적으로 듣거나 혹은 느끼는 이야기다. 심지어 회사에 가서 직장동료와 밥 먹는 중간에도 쉽게 나오는 말들이다. 지금 이것이 내가 혹은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일 줄은 모르겠다. 노무현은 아마 이런 것이 무척이나 싫어했던 모양이다.

 

그의 저서 중에서 다른 책을 보니, 그는 대학교를 나오지 않고 고등학교만 나왔다. 지독한 가난함과 집안가정이 어려워서 대학진학은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법시험에 고졸 출신이 붙은 것이다. 막상 사법연수원에 가보니 많은 동기들이 좋은 대학교에 다녔던 사람으로 모두 노무현을 무시했다.

 

심지어 밥을 먹는 순간에 혼자서 먹어야 했던 그로서는 이미 대한민국의 현실에 많은 턱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물론 얼마 후에 노무현과 같이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서로 도움을 주던 동기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노무현이 느끼는 당시 70년대 중후반의 한국사회는 가장 엘리트적이고 가장 국민을 받들어야 할 판검사 및 변호사 조직들이 특권의식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이 청문회 스타로 혹은 부림사건 이후의 변호사로 활약하기 전에 큰 두각을 나타나지 않았으나, 적어도 그는 계속 대한민국의 모순된 구조와 싸웠다. 물론 대통령이 되어 활동할 때도 계속 싸워야 했다. 전에 어느 신문기사에서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모두 일어나며 박수칠 때 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박수치지 말아야 할 타이밍에 누가 노무현에게 박수를 쳤다고 한다.

 

고등학교 출신에 백도 없는 이유로 야유를 당하기도 했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백이란 단어를 많이 생각했다. “돈도 없고 백도 없으면 그저 입 다물고 구석에 쳐 박혀야 하냐고?”,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으나 깨끗한 미사어구를 날리는 양반들이야 원칙이 서는 나라, 모두가 자유롭게 생활하는 나라, 행복하고 밝은 나라라고 외치는 경우가 많으나 가끔 그들의 행보에선 그런 것이 전혀 느끼지 못할 경우가 많다.

 

당하는 자와 그 당하자는 자의 옆에서 관찰하는 자에 비해 멀리서 방관하고 가해하는 자는 아무런 느낌을 가질 수 없다. 본래 가해자들은 자신이 가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이 당연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사회에서 이런 점은 “나만 잘되면 된다. 우리만 잘되면 된다. 남은 어떻게 되는지 관심 없다. 그저 힘없으면 닥치고 있든지?” 라는 이야기로 당하는 자의 가슴을 상처투성이로 만든다.

 

노무현은 그것이 싫어했던 것이다. 아마 그가 가장 큰 좌절을 느낀 것은 이런 사회를 개선하고 싶었으나, 그것이 되지 않음이다. 모두 먹고 사는 경제만을 외치고 있으나, 조금만 이상해도 경제가 죽니 사회가 죽니 라는 이야기가 그의 눈과 귀에 전달되었다. 아마 당시 1997년 IMF 위기 이후 조금씩 그 과정을 해결해 가는 도중 많은 서민들이 희생되어야 하는 점을 보았을 것이다.

 

노무현은 그런 서민들이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항상 마음속으로 고민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들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바랐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5년이란 세월에 바꿀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정부조직의 변화와 언론의 자율성과 윤리성을 지키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언론이란 과연 중립을 유지하고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기관인지 혹은 정치적인 압박을 넣기 위한 수단인지 고민하게 만든 부분이 많다. 또한 언론의 기능은 국민들에게 올바른 사회, 정치, 경제관을 심어주는 미디어인데, 그것이 제대로 못한다면 국민의 귀와 눈을 속인다고 보았다. 결국 언론과의 싸움에서 노무현을 좌절로 많이 이끈 것 같았다.

 

그가 정치 전반에 다 잘 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몇몇은 분명히 시행착오를 겪었고, 그것으로 힘든 상황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진정 그가 국민들을 위한 업적들이 있다는 것과 그것으로 한층 나라가 좋게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공적인 부분은 보여주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의 좌절은 단순하게 좌절이 아니라 그런 정치적 행위에서 그가 고치고 싶어한 기회주의적인 사회를 개선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좌절이다.

 

기회주의적인 사회에서 그가 바라는 사람 사는 세상은 너무나도 멀게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 자신의 좌절을 이야기하여 성공을 본인이 찾기보단 이 회고록을 보는 이로 하여금 찾기를 바란 것이다. 자신의 실패와 좌절 그리고 눈물과 애한에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책 표지에 적힌 이 문구가 참 인상 깊다.

 

“나의 실패가 여러분의 실패는 아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갈 길을 가야 한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또 뒷면에 “사람답게 대우받는, 사람 노릇을 하는, 사람이 돈과 시장의 주인 노릇을 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처럼 인간이 시장경제의식에 따라 지배받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바란 것이다.

 

솔직히 나나 혹은 세견을 둘러보면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거나 알고 싶지 않은 일들을 종종 본다. “가난한 사람들,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 배가 고픈 사람들, 가족이 없는 사람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희망을 잃은 사람들....”

 

노무현의 꿈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그 인간의 권리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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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유시민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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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것 같다. 국가에서 국민들을 통제하는 방법에서 국가 자체의 정치권력보다는 미디어로 통한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이다. 미디어 즉 매체라는 의미이다. 매체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으로 생각하고 느끼거나 혹은 판단할 수 있을 있게 해주는 정보적인 수용방법 경로이다.

그런 정보경로에서 미디어라는 이름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가령 이전에 봤던 섹스와 돈이라는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도서에서 미디어로 통한 언론의 활약은 국민들의 인식과 행동 자체를 변환시키고 또한 그것에 알맞도록 맞춤식까지 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그 말은 사실이다. 현재 독재국가 중의 하나인 북한에서는 언론을 오로지 (마르크스-레닌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독재정당이 장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언론이 나라 그 자체를 북한과 같은 괴뢰정부가 아닌 이른바 자유주의국가에서 한다면 어떻게 될까나? 물론 언론으로 통한 미디어의 전파는 경제적인 위력과 동시에 정치적인 압박도 들어간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독재가 아니지만 독재 내지 혹은 은폐, 조작, 공작의 방법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최근 내가 읽고 있는 도서 중에서 정치사상에 대한 안내 도서를 읽고 있다. 거기서 그 동안 내가 알고만 있었던 철학자 이름 한 명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마키아밸리이다. 마키아밸리는 이른바 군주론(君主論)이란 정치에 필요한 하나의 교본을 저술한다. 그의 저술명저인 군주론에선 군주가 어떻게 대처해야만 정치를 잘 이끌어갈 수 있는가이다.

따라서 과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정치는 철학적인 영역에서 분리시킨 철학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군주독재의 방법설을 알려준 마키아밸리 역시 알고 보니 그도 인권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군주가 집정하는 집정관, 우수한 엘리트 관료의 원로원, 그리고 국민들이 하는 호민관에서 3가지 정치적인 구도로 통해 독재정치를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사회에서는 군사·외교적으로 불안하여 다소 군주에게 강한 권력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라는 것은 한 곳에 독재되어서는 안되고, 권력의 이동이 계속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안되면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변모하여 모든 정치적인 간섭과 견제를 제외하고, 횡포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국가적인 권력기관 문제가 내내 한국사회의 신문과 방송에서 탑을 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이런 정치적인 권력과 올바른 정보를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국민 대부분은 일일이 정치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을망정, 하나하나 정치적 안건에 대해 참관할 수가 없다. 따라서 국가에서 뽑는 공무원도 있는 반면, 국민들이 선택하여 투표권으로 지정하는 선거도 있다. 문제는 이 선거로 통해 창출되는 정치가들은 상당히 높은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움직임에 많은 국가적인 대사가 좌우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이 좋은 정치가로서 활약하기보단, 역으로 그것을 이용하여 사익을 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국가공무원이라고 모두 그들을 제어할 수 없다. 오로지 그들을 손으로 뽑은 국민들만 가능하다. 그들에게 주어진 그러니깐 그 개인 자신들은 작고 외소하나, 그 개인들이 모이면 아주 크고 웅장한 심판관이 되어 자신들이 선발한  권력들을 심판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권력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얼마나 제대로 하고 있는가? 혹은 하지 않은가를 알아야 필요성이 있다. 이때 그 충실한 국민의 눈과 귀를 해야 할 존재가 바로 언론이다. 언론들이 타락하면 국민들이 거짓말에 넘어가고, 진실은 어두운 저 황혼 아래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언론인들의 양심과 언론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선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가 없다면 그것인 민주주의국가가 아닌 그저 독재정치 세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언론의 자유를 방해하고, 오히려 매도한 언론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이 책을 보는 나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한다. 이전에 그토록 이 책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최근 가질 수 없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했다. 그것은 조선일보에 대한 진실한 언론의 진실성이다.

내가 최초로 조선일보에 대해 의심하던 것은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임과 더불어 터진 김해 봉하마을의 사택이다. 참고로 본인이 사는 집은 경남 김해 옆의 부산이다. 부산 옆에 김해라면 당연히 어느 정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야기는 길가거나 혹은 가게에 물건 사러가거나 심지어 친구와 가족들 사이에도 듣는다.

이때 뉴스에 뜬 김해 봉하마을 아방궁 소식, 국가예산을 막대한 손해를 주면서 만든 그 개인 사택에 대한 기사가 조선일보에서 내내 터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김해 봉하마을 다녀온 주변 사람이나 그밖에 동네 소식으론 순 거짓말이었다. 아니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봉하마을을 가서 확인했다. 그런 헛소문과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하는 것에서 말이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를 보면 안정되어 가기보다는 서민경제가 어려워지고, 중소기업들은 모두 힘들어하고, 엔지니어업체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물론 그런 올가미와 같은 불황들은 나의 목도 조르고 있다. 어느 사람들은 아마 조금 더 노력하면 좋은 곳에 가라고 하나, 내가 그런 곳에 가도 한국사회에는 반 이상의 사람들이 그런 생활에 처해지게 된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역할이라면 국가정책의 문제점과 부정부패나 개선사항을 알리는 것이 우선할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권력에 대한 욕망에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노무현이 조선일보와 싸운 이유이다. 조선일보에 대한 내용은 과거 “부자 신문, 가난한 독자”에서 읽어봐서 어느 정도 짐작했다. 일제치하 고종을 폐위한 송병준이 운영하다가 훗날 독립군인 이상재에게 양도되다, 이상재가 독립적인 행태에 조선일보가 방응모에게 넘어가면서 친일의 역사는 조선일보에서 떼어낼 수 없는 과거이나 그들은 부정했다.

과거 신문기사에 대한 스크랩이 있는데 말이다. 어째든 그들은 친일세력으로 일제에 봉사하고, 해방 후에는 군사정권에 봉사했다. 한국 정치계에서 이른바 반공정치가 하나의 큰 과제일 때 그들은 매카시즘(McCarthyism)이란 정치적인 공세로 통해 민주주의를 억압했다. 당시 한일해방과 625전쟁에 막 휘말린 이후라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이란 미명을 수긍할 수 있으나, 문제는 그것이 계속되는 점이다.

뭔가를 좋은 것을 가져가는 부분이 있다면 뭔가 나쁜 것을 가져가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에 대한 사람들에 대해 인권적인 보장이 없을 때, 이들이 가만히 있으면 선량한 시민이고, 이들이 항의하면 나라에 대항하는 이적행위로 간주했다. 부림사건이나 노동자탄압에서 많은 노동자나 서민들이 희생당했다. 그때 노무현이 등장하여 이들의 변호해주고 조선일보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5공 청문회에서 스타와 각종 정치적인 대립에서 노무현과 조선일보는 적으로 맞붙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책에서는 그런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전쟁을 2002년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후보로 출마하기 전에 나온 도서이다. 이 책에서도 밝히듯이 지금 나는 꼼수다로 한참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가 이때 재미있는 어록을 남겼다.

“‘우리는 대단히 편파적이다.’ 그러나 편파적이 되는 과정은 대단히 공정하다.” 공정함이란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고 주변에서 보는 환경적인 기준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교육수준, 경제적 조건, 사회적인 위치, 그리고 주변 사람들 등 그 많은 것들이 인간의 판단력을 좌우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판단력은 언제나 자기에게 편하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이끌리게 한다. 따라서 한 가지 이데올로기만 집중하여 초점을 맞춘다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보일 것이다. 특히 이런 2원화적인 대립구도는 참 무섭고도 위험하다. 혹은 칸트가 제시한 3원화적인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할 수 없을까? 물론 해도 두 갈래 길 중에 선택해야할 순간은 없다.

인간은 선택에 의해 살아가는 동물이고, 선택의 순간은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야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 사고에 대한 판단기준을 어떻게 제대로 보고 듣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 쪽에 치우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 개인적으로 절대적인 중립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절대적 중립이라 외치는 자들이 더 심각한 이원화적인 대립구도를 가진 사람이라 본다.

그렇다면 노무현과 조선일보라는 여기의 이원화된 구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사람은 노무현을 어느 사람은 조선일보에게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래도 일단 여기서 이 글을 적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노무현의 편이다. 내가 그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내가 살아온 공간에서 자라온 환경이다. 노무현의 고향은 김해이고, 그의 운동지역은 부산이다.

내가 그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여기 공간적인 상황에서이다. 아니라면 그의 어록처럼 “조선일보 사장님 회장님처럼 그렇게 고상한 말만 쓰고 살지 않는지 모르지만, 그분들처럼 천왕폐하를 모시고 일제에 아부하고, 군사독재 정권에 결탁해서 알랑거리고, 특혜 받아 가지고 뒷돈 챙겨서 부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회주의자적인 인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 땅에 가난하고 힘없고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말을 고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시대 기회주의와 편의주의에 절은 그들의 사고방식은 결코 고칠 수 없습니다.”

이 말에 어느 사람은 공감 내지 부정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정치인들은 이런 말을 이구동성을 외친다. 서민을 위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시민들을 위하여 라는 미사어구를 말이다. 그런데 적어도 그런 현실에 놓여있거나 관찰하는 입장과 그것을 직접 보지도 않고 먼발치에 방관하는 자들에겐 이 말에 대하여 과연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도 노무현을 싫어하기도 한다. 그래도 서민들은 누구를 더 좋아할까?

이미 죽어 온 몸을 불살라 뼈만 남아 가루로 되어 어느 단지에 모셔진 노무현이나, 그의 죽음은 조선일보와 전쟁을 끝내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일보의 전쟁을 하게 된 사람은 노무현이 아니라 노무현이 아닌 존재로 되었다. 노무현은 아직도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에 등장하는 유령처럼 혹은 칸트나 마르크스처럼 유령이 되어 계속 전쟁을 하고 있다. 망령이 되어버린 진짜 유령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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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엥겔스 평전
하인리히 겜코브 지음, 김대웅 옮김 / 시아출판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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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맑스·엥겔스 평전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나던 사람들이 여러 있었다. 그것은 나보다는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솔직히 젊은 대학시절 그렇게 철이 없었다. 생각이 얇고, 기분 내키는 성격이고, 침묵과 변덕으로 가득했다. 정말 어리고 어린 철부지였다. 지금도 철부지 어른이지만, 가끔 내 주변에 겪은 가족, 군대, 사회생활하면서 사회적으로 보는 내 눈으로 조금씩 변했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니 우선 나는 내 아버지가 생각난다. 나의 아버지는 노동자다. 그리고 배를 타고 멀리 외국으로 가는 외항선원이다. 현재 당시 다니던 회사에 정년 후에 이제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비정규직으로 되어 국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제는 나는 피부로서 경험한다. 물론 나는 취업해서 일을 하고 있으나 아버지는 계속 일을 하신다.

개인적으로 시간을 달래기도 하겠지만, 가정 내의 살림을 보태기도 위해서다. 맑스·엥겔스 평전을 보면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일을 하는 이유는 바로 생계의 문제이다. 그건 모든 노동자 내지 비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노동자들이 제대로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입장인가이다.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나, 우리 아버지가 처음 노동을 할 때는 지금보다 열악하고, 맑스와 엥겔스가 활동하던 당대 유럽은 훨씬 열악했다.

예전에 맑스의 자본(강신준 교수 번역본)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과도한 노동으로 병을 앓는 사람들이나,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신체적인 기능이 월등하게 하락하는 사람들이나, 또는 임금이 턱없이 못 미치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과연 인간의 생활 영위에서 가능하게 하는가이다. 참고로 내 아버지는 산업재해도 당하고, 근로환경 문제로 화상도 입으시고, 게다가 심장에 문제가 생겨 수술도 했다.

물론 환경적인 부분도 술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가끔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떤 특이한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생활 그리고 일상에 귀를 기울이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본래 노동시간은 1일 8시간(식사시간 제외)이나 가끔 그 이상으로 해야 하고, 때로는 밤을 새서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주말과 휴일에도 노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선박 위에서라는 부분이 있지만, 거기는 육상과 달리 노동자의 권리가 크게 보장 받을 수 없다.

게다가 은연히 나오는 아버지의 입에서는 가난하다고 배운 것이 없다고 멸시받거나 또는 무시당한 적이 있다는 부분이 나온다. 가난은 죄가 아니나 죄가 되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성실하게 일해도 근로조건으로 인해 재해나 질병이 걸리게 될 경우 직장에서 심각한 패널티를 받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아직도 현대에도 전해온다. 솔직히 말하여 국가가 운영하고 사회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어떤 힘든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어떤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렇지만 그런 힘들고 열악한 환경에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 몰아넣어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면 문제다. 전에 어떤 문화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의 80%는 프롤레타리아이라고 말이다. 그 80%들 사이 중에서 위로 가려고 누군가는 그런 일을 맡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일을 맡는 사람들을 단순히 낙오자 내지 종으로 보면서 대해야 하는가? 겉으로는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지만 그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날리며 자기 과시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이 옳은 일인가?

이런 문제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온 문제다. 맑스와 엥겔스는 그런 사회에서 너무 정당화되어 있고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된 이 어긋난 사회를 변화하고 싶었다. 그것은 공상세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아무 의미나 계획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로 통해서이다. 나는 자본과 맑스·엥겔스 평전을 읽으면서 이 생각을 했다. 자본은 1~3권까지 나오나, 자본 4권부터는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맑스가 자본의 집필 지연사유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정문제, 개인 건강문제, 국제노동자연합 관련과 많은 사건들, 그러나 자본은 사회적인 문제와 기존 역사적인 부분에서 서술하자니 맑스가 집필할 시기부터 계속 변화가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수정하고 고치고 변경하니 기간이 지연되었다. 그리고 당시 맑스가 제기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역시 지금으로 보면 상당히 시대에 떨어질 수 있다.

당연히 맑스가 제기한 문제인 당시 사회는 봉건사회에서 시민혁명 이후 소외된 프롤레타리아를 배제한 사회이었고, 자본주의 국가체계도 시작에서 얼마 멀지 않았던 시기다. 그러다 보니 맑스와 엥겔스의 주장은 당시로는 합리적이나 지금은 비합리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부정은 아니다. 가령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시절에 인간이 지구를 날거나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생각했겠는가?

시대적인 흐름과 변화에는 어느 정도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이 지금까지 변화 없이 오는 것은 이 책의 케이스 안쪽에 적혀 있는 장 폴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 문구가 인상적으로 알려준다. “맑스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상황들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사실 내가 있는 시간과 공간적 요소에서 서민계층이나 소외계층을 가끔 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공사현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도 옆에서 보는 기회도 많다.

그러나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아직 많은 보장을 받지 못하는 듯하다. 또한 그런 보장을 받지 못함으로 다소 천박한 말과 행동들 역시 계속 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해도 이제는 짜증내거나 눈살만 찌푸릴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인 것이다. 현장마다 다르겠지만 고단한 노동, 덥고 추운 날씨, 위험한 안전 그 많고 많은 환경들이 이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그렇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안타까운 사실은 맑스와 엥겔스는 이런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였고 당시 그들을 지지하던 사람들 즉 노동자들도 스스로 인권을 찾기를 바랐다. 지금 잘못된 생각으로 보면 이해가지 않으나 당시 노동자에게 투표권이 없었고, 여자들에게 투표권이나 정치참여권이 없었으며, 10대 아이들도 공장과 광산에 끌려가 12시간 넘는 가혹한 노동을 했다. 게다가 사고를 당해도 제대로 보상 내지 보장을 받지 못했으니 그들의 분노를 이미 충만했다. 하지만 그런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풀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분노가 과연 대단했는지 1871년 코뮈나르의 사건은 충격이었다. 독일 전 정부인 프로이쎈군대가 프랑스 국민들을 향해 공격하고, 게다가 그 원인은 부정한 정부였는데, 그 부정한 정부는 자국민들을 총으로 쏘았다. 그때 투쟁하던 국민들 중에서 어린 소년과 여자들도 있었다. 이 어린 영혼들이 왜 총을 맞아가면서 그렇게도 미친 듯이 군대에 저항하였을까? 참으로 비극이었다. 유럽사회가 지금은 엄청난 정치적으로 예술적으로 철학적으로 발달되어 있지만, 그 후면의 역사에선 엄청난 피와 눈물을 흘린 기억이었다.

그 당시 엄청난 피를 흘린 유럽에서 근대를 지나오며 전쟁의 휘몰이에 또 다시 피를 흘렸지만, 지금 유럽을 본다면 그 당시의 피와 눈물이 헛되지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계속 억압당하고 핍박당하고 있다. 지금으로 본다면 맑스와 엥겔스의 정신은 낡은 과거의 유령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유령들은 정말 다시 찾아온다. 찾아 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정말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그들의 유령을 다시 부를 수밖에 없다는 비극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단순히 맑스와 엥겔스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당시 고통 받고 착취당하고 배고픔과 추위에 분노의 눈물과 저주의 피를 쏟았던 이름 없이 사라져간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이 책으로 전하므로 그 진한 여운과 강렬한 인상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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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도의 악몽 - 소설보다 무서운 지구온난화와 환경 대재앙 시나리오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환경공학이란 학문을 배우다 보면 각종 환경오염이나 거기에 따른 현황에 대해 여러 가지 메커니즘(mechanism)을 배운다. 하지만 본인이 막상 환경공학을 배운다고 하여도 환경 문제를 제대로 집어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왜냐하면 환경이란 것이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나 콘크리트 구조물처럼 우리 시선을 확실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눈앞에서 보이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수질 같은 경우 가령 하천에 다량의 토사유출이 발생하여 하천을 오염시킨 것이 있다. 분명히 우리는 그것이 오염되어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대처하는 것에 대해 한 가지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물이란 특히 하천구조는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가고, 흘러가는 도중에 각종 인자에 따라 오염물질이 분산되거나 혼합되는 형태를 보인다. 또한 하천이 다른 하천과 합치거나 분류되는 경우 그 시점에서 주변 지형이나 혹은 주변 오염인자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눈에 보이고 있는 수질오염조차도 그대로 대처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환경은 한곳에 가만히 눌러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또한 수질 이외에 눈에 확연히 띄는 것은 토양이 있다. 그런데 토양의 문제는 토지의 표면에만 오염되는 것이 아니라 토지 내부로 스며들어 지하수까지 도달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예전에 뉴스에서나 혹은 신문에서 큰 이슈로 떠오른 불법 매립한 오염물질이 어떻게 큰 문제를 일으켰는가에 대해 소개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나마 조금 좋은 상황이지도 모른다. 왜냐고 물어본다면 그나마 눈으로도 볼 수 있는 범위가 있고, 물리적으로 손을 댈 수 있는 여지라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가 언제나 옆에 있으면서 옆에 있는 것을 모르고 착각할 만큼 소중한 공기, 특히 그 공기 안의 산소의 중요성은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 생물의 중요한 생존 인자이다.

그런데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오염되는지 알 수 없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것은 길가다가 자동차 배기가스에 나오는 검은 연기나, 공장 굴뚝에서 보이는 노란 연기, 길거리에서 보이는 아지랑이 현상(사물이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그러지게 보이는 현상)을 본다면 조금 대기상태가 좋지 않구나? 하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대기질의 오염은 진짜 심각한 수준에 오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간암 환자가 그동안 아픈지도 모르고 술을 계속 마시다가 우연히 뱃속이 고통스러워 병원에 찾아가니 간암 말기를 선고받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대기오염은 다루기가 어려운 환경 분야인 것이다. 그런데 이 대기오염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일까? 참으로 여러 가지 인자가 있다. 산성비, 오존파괴, 광산화물질 발생, 황사, 지구온난화 등등 우리가 뉴스, 미디어, 시사에서 다루는 대기오염 문제에서 항상 우리의 관심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이다. 공기라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보이지 않은 이상 그것이 인간 자신에게 치명적인 위협으로 돌아오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다.

이런 위험스러운 대기오염 중에서 특히 지구온난화 문제 중에서 <6도의 악몽>은 그야말로 최악의 대기오염 시나리오 중에서 기온 1℃씩 상승할 때마다 나타날 것이란 악몽은 그야말로 지옥에 다가가는 한편의 영화 대본과도 같다. 사실 이 최악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위험한 영화대본은 이미 액션이 시작했다. 물론 서사구조에서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이라는 흐름 속에서 이미 위기의 시나리오는 발단을 지나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개 자체가 위기이고 절정이다.

이 불안한 시나리오 최후의 이야기인 결말은 갈등의 결말로 이어질 것이다. 문제는 갈등을 모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조차도 나올 수 없는 결말 없는 결말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미 그 위험한 영화들은 우리는 이미 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른바 하이퍼 리얼리티 즉 그것은 비현실이나 초현실이 아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 현실 자체와의 ‘허구적인 유사함’으로 수정되고 일신된 현실 속에서 TV로 통해 이미 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 영상 안의 이야기다. 물론 현대 대중은 이런 하이퍼 리얼리티로 통해 현실과 가상의 구분에서 왜곡된 정보를 그대로 수용하기도 한다.

단지 거대한 재앙들이 실제 영화관에서 보는 재앙영화처럼 실제처럼 다가오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비극들은 우리 주변에 찾아온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우리나라 지형이나 주변 해역에서 지구온난화의 위기는 조금씩 우리의 목을 옭아맨다. 이 책을 보면 지구의 온난화는 수위면 상승과 태풍과 폭풍의 활동행위 증가, 홍수와 가뭄현상의 가속화는 지금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는 일이다.

가령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나라는 단백질공급을 가축사육으로 통해 얻기도 하나 바다에서 나오는 어패류에게 얻는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인해 지구의 냉장고인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줄어들고, 그 외의 얼음들이 줄기 시작하면서 위쪽에서 흘러오는 차가운 해수가 줄어들면서 생선 어획에서 문제가 생긴다. 가령 우리나라가 온대성 기후였다면 최근에 (아)열대성 기후로 변모된다. 예전에는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림에서 이제는 활엽수림이 늘어가고 있다.

국가 전체적으로 식물군락이 변동이 생기고, 바다에서는 물고기가 잡히는 것도 달라진다. 어느날 나는 환경스페셜과 같은 방송에서 남해안 일부 해안가에서 어촌 마을에 잡혀야 할 어획물이 생선과 조개 등이 아니라 해파리와 같은 종이었다. 문제는 해파리는 각종 해산어류를 잡아먹음으로 바다 내의 생태환경을 망치는 것뿐만 아니라 일부 해파리는 독까지 가졌다. 또한 한국에서는 상어가 잘 출물하지 않으나, 따뜻한 해류를 따라 백상어리와 같은 식인상어도 나타난다.

이것이 그냥 단순한 자연 내의 변이나 진화단계이기 보다는 자연 그 자체적인 변화로 인해 발생한 문제다. 그것은 기온상승 즉 지구온난화다. 지구온난화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 지구의 물이 97.2% 바다로 구성되어 있고, 만년설이 2.15%이다. 그러니깐 우리가 사영할 수 있는 물은 1% 조차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지하수가 0.62%, 담수호 0.009%, 염수호 0.008%, 하천수 0.00009%, 토양수가 0.005%로 차지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가능한 수원 중에 담수가 0.6%도 안되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자원은 0.01% 이내다. 그런데 이런 수자원이 기온상승으로 인해 큰 차질을 빚었다. 대부분 우리가 수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배우는 기상학, 토목공학, 환경공학 등의 학문은 경험적인 공식이나 이론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온도상승으로 인해 기존 경험식을 이용한 방법들이 조금씩 틀어진다.

즉 예측이 불가하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예측하지 못한 홍수피해로 수재가 난 것이나 또는 심각한 가뭄으로 땅이 메마른 점이다. 기온상승은 몬순 기후에 있는 국내에서 여름철에 지나친 강우가 더 지나치게 내리게 되는 점이다. 이에 반해 아프리카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아 수자원 공급 문제와 비가 내리지 않아 기온을 조절하지 못해 열사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 책에서는 그런 심각한 문제를 1℃ 상승으로 통해 아주 끔찍하게 아찔하게 혹은 비극적으로 몰고 간다. 이미 물과 식량, 에너지로 인해 많은 국가의 사람들은 심각한 생명위기를 느끼고 있는 게 사실이고, 얼음의 유실로 야생동물이 멸종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직접 보이지 않고 당하지 않아 모르고 갈 뿐이다. 혹은 당하더라도 일시적이고 국부적인 현상으로 그저 망각적인 태도로 임할 뿐이다.

이런 환경오염은 항상 심각하게 당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나 당하면 매우 심각하다. 그런 상태에서 유일하게 과거의 문헌기록 및 지질학·고고학적·생태적인 정보로 통해 유추하여 경고만 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6도의 악몽>에서는 그런 악몽조차도 이미 0.1~1℃ 사이의 증가를 기본으로 걸고 시작했다. 사실 그 사이의 악몽도 나에겐 끔찍한데, 그 이상은 정말 끔찍하고도 남는다.

전에 사무실에서 지구기후변화 관련된 조약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혹은 그런 지구기후변화에 따른 많은 환경적인 정책들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나라는 이런 지구온난화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환경적인 업무에 도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이 2008년도에 나온 것을 생각한다면 이 책에서 지구기후변화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발전적인 대처방안을 무엇인지 한번 생각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대처하기는 정말 많이 어려운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환경오염 문제는 산업화에 따른 자본주의 가속화에 대한 잉여적인 부산물이다. 그 부산물은 우리가 직접 관리하고 처리하고 저감하기 보다는 단지 돈이 벌리지 않는다는 이유나 혹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 받았다는 사실이다. 사실 환경공학과를 전공하여 환경업무를 하는 본인도 국내에서 환경을 말로만 중요하다고 하나 그 대우나 처우 그리고 사회적인 인식은 여전히 부실하다. 

앞으로 지구온난화와 교토의정서에 따른 국제협약, 탄소배출권에 따른 경제개발 제약에서 환경 문제는 우리가 결코 무시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있는가? 제일 중요한 사실은 대기오염과 더불어 지구온난화에 대한 문제를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앞으로 조금씩 변화해야한다는 점이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정유사와 자동차 제조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연비 좋은 자동차 생산 내지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제대로 개발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물론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나, 적어도 국내에서 경차, 소형차에 대해 배척하는 태도나 수동기어보다는 자동기어로서 편함만을 생각하면 대기에 들어가는 탄소량은 계속 늘어만 갈 것이다.

분명 앞으로 우리는 에너지 사용은 늘어가고, 문명의 이기와 편익을 위해 우리는 계속 그 혜택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 대기환경에 부담을 준다고 해서 2007년 탄소농도 360ppm에서 내려가지 못할망정 계속 올라갈 것이다. <6도의 악몽>에서는 우리의 잘못된 소비습관을 비판하고 있다. 계속되는 소비의 촉구와 그 소비의 촉구가 곧 인생의 성공이라고 하는 미디어가 결국 에너지의 과소비로 이어지고, 그것은 대기오염으로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지나친 육식은 가축사육을 위해 사용되는 곡식을 심각하게 소모하였으며, 그런 소모들은 식량부족을 겪는 약소국에서 삼림을 파괴하거나 개간하게 하고, 이런 문제는 다시 식량문제로 통해 대기오염 즉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정화할 숲까지 파괴한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이 이렇게 위기에 봉착한 현실에서 우리의 욕망은 끝없이 달려간다. 그러나 그 욕망의 결말은 우리 인간이 욕망조차 느낄 수 없는 파탄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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