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클의 사회 - 문화교양 7
기 드보르 지음, 이경숙 옮김 / 현실문화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카페활동이나 사이트 활동하면서 제일 말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점에 대한 논의다. 어차피 TV, PC, PMP, i-pon, PSP 등 영상매체로 보고 있는 세계는 현실이 아니다. 물론 거기 원본의 이미지가 촬영된 곳이 현실이라 하지만, 그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그 것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TV 뉴스에서 어느 박사가 특수한 연구결과를 내놓아도 얼마 기간 후에 위조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해프닝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래서 TV라는 가상세계 매체에 통해 우리는 얼마나 현실성을 잊혀가는가?



애초부터 TV 드라마보면서 이것은 리얼리티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이 내 옆에 일어나고 있어라고 하는 것은 틀렸다. 드라마속의 아름답고 멋진 광경이 내 주변에 일어나는가? 아직도 TV속의 이쁜 바비인형처럼 꾸며진 세계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가? 현실의 좌절감을 가상세계로 통해 보상심리를 채울 수 있을 망정 왜곡된 사람들의 현실을 바꿀 수가 없다. 사랑이라는 판타지도 어째보면 인간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드라마에선 사랑을 외치지만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인간들은 얼마나 있는가? 마치 드라마를 보면서 그 가상적인 사랑이 이루어진 것에 동의하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은 낭만적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어이없는 농담따먹기도 아닌 그저 바보도 아닌 바보들이 헛소리를 하는 꼴과 같다. 본인들은 현실에서 모든 것을 가려가면서 왜 드라마에서는 그런 것을 따지는 인간을 욕할까? 자신들은 마치 안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드라마 세계의 못된 인물을 욕해봤자 무엇이 달라진다고 그럴까? 드라마 속에 감추어진 작가와 시대의 흐름따위는 눈꼽만치 관심없다. 단지 흥행이나 신드룸이 될만한 요소만 귀를 기울린다. 드마라의 재미를 재미로 보는 것에 대해 나쁘지 않다. 물론 재미있으라고 만든 것이 드라마가 아닌가? 그런데 드라마 세계의 하이퍼리얼리티 세계는 대중들로 하여금 이상한 이념으로 가득차게 한다.



스펙타클이란 말은 그런 현실세계가 아닌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로 들어나는 현상이다. 태풍불어와 집들이 무너지고 길고 긴 장맛비가 내린 후에 하늘은 참 스펙타클하게 푸렇구나 하는 소리는 정말 스펙타클을 알고 하는 소리인가? 아닌가?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는 1967년 출판된 도서이다. 어느날 우연히 기 드보르를 검색하던 도중에 기 드보르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찾았다. 정말 횡재하였다. 1994년 자살을 한 영화감독 기 드보르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그가 주장하던 스펙터클의 사회라는 책을 영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좋으나 문제는 나는 불어를 알아 듣지 못한다. 불어대사와 함께 영어자막가 나오지만 나는 영어실력이 좋지 않아 언어적인 구조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영어단어 몇개와 영상이미지로 통해 뭔가 말하고 싶은가만 생각하고 있다. 다행히도 스펙타클이 사회란 책을 1번 읽어보아 대략적으로 감만 잡았다. 2번 3번 이상 봐야하겠지만, 한번 봤다는 것이 이 작품에 대한 관점을 준 계기다. 먼저 기 드보르의 society of the spectacle를 보기 전에 Critique de la séparation (1961)를 보았다. 불어 글자철자도 모르겠는데, 불어로 말하는 나레이션은 더욱 더 미궁이다. 단지 눈에 가는 것은 이 영화도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나온 내용과 뭔가 중첩이 된다는 점이다.



평범한 어느 한 여성, 시위와 진압, 전쟁, 정치인들의 상황연출은 뭔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 수 없는 곳에서 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리는 듯 싶다. 실제는 존재하나 실제는 허구로 대중 눈앞을 가리는 느낌처럼 말이다. 위에 society of the spectacle 서적의 한 표지에 실린 그림이다. 눈앞에 선글라스를 끼고 앞을 보는 사람들 이게 진정한 스펙타클이라고 말하고픈 기 드보르다. society of the spectacle 영화는 1973년에 나왔다. 도서가 나온지 5년 뒤다. 1968년 5월 프랑스 68혁명 후에 나온 영화다. 그가 이 영화로 전달하고자는 의미는 뭘까? 불어가 안통하는 나로서는 고민이 막중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을 본 직후의 이야기는 이데올로기 통한 국가대립이라는 것과 여성이 성적인 소비대상, 시위와 진압에서 보이는 불합리성, 세계 정치지도자들의 정치활동,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흑백영상의 글자들의 나열은 도저히 개연성의 연계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전위예술적인 요소일까? society of the spectacle 영화에서 흑백으로 된 영상에 어느 한 남자의 나레이션이 계속된다. 이 남성의 음성 아래 하단에 찍히 영어로 읽어보면 스펙타클이 그래 좋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장된 세계의 이미지로 대중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으니깐.  제일 기억나는 장면은 파시즘과 나치즘이다. 광기에 가득찬 이 이념들은 인간을 하나로 만들지만 그런 하나가 타국에 대해서는 전쟁을 불러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전쟁이란 상황이 그야말로 스펙타클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실이다. 문제는 이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들은 뒤에서 가만히 앉아 구경하면서 막상 그 스펙타클한 세계에 휘말리는 것은 대중이란 점이다. 스펙타클은 대중들을 현혹하여 이념적 조장자로 하여금 꼭두각시처럼 행동하게금 한다. 전쟁에서 목숨걸고 싸우는 젊은이들이 전쟁을 만들었는가? 그들은 국가적인 이념아래 간다고 하지만, 자신의 목숨마져 날릴 수 있을 정도로 이념이란 것은 강력한 무기다.



이런 강력한 무기인 이념은 반드시 국가만이 아니다. 문화, 단체, 심지어는 개인들의 일상에서도 존재한다. 우리가 축구를 볼때 토탈사커라고 들어봤는가? 이 집단축구는 오렌지군단인 네덜란드에서 만든 축구전략이다. 물론 스펙타클한 전법이지만, 그렇게 해롭지는 않다. 문제는 이런 스펙타클한 전법을 보는 대중들이 걱정이다. 훌리건이라는 광적인 축구팬들은 자신들의 팀이나 국가가 지면 상대방에게 집단적인 행동으로 들어간다. 각 개인마다 독특한 개성과 인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축구팬 단체란 틀에서 그들은 집단적행위를 시작한다. 누구 하나의 생각도 아닌데, 이렇게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만까지 가는 사람들이 스펙타클한 축구전략이지만, 그 축구경기가 스펙타클하지 않은데도 자신들의 그 경기에 따라 스펙타클한 연출을 하기 시작한다. 



각본도 감독도 없는 없는 훌리건에서 스펙타클이란 반드시 국가적인 이념만 아니라 이런 사소한 일상생활에서도 목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중들의 비일상적인 공간의 스펙타클은 이런 집단에서 나오지 않아도 얼마든지 집단을 대상으로 이념적인 행동들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만들게 하는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쟁, 시위와 진압, 정치인들 활동, 일상생활, 시민들의 선동, 전쟁포로에 대한 억압, 여성의 가슴노출, 글자만 나오는 장면들을 어지렇게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는 점은 여자의 가슴노출에서 처음에 자본주의에서는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는 수동적 존재로 만든 점에서 그런 의도인가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 영화 후반에 어느 해변에 모든 여성들이 상의를 다 벗고 있었다. 누드해변인가? 소문으로 있다고 들어보았지만, 남자나 여자나 모두 상의를 탈의한 채 재밌게 놀고 있다.



최근에 매릴린 옐롬 교수의 서적을 구입하여 초반을 읽고 있다. 패미니스트 인문학자인 그녀는 여자의 가슴에 대해 서양철학 역사 2,500년을 이야기하고 있다. 남성이 보는 여성의 몸이란 섹시한 아이돌스타처럼 그저 보기 좋게 하려는 시각적인 소유물인가? 아니면 당당하게 권리를 누리는 자유인가? 영화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듯하다. 처음에 마치 누드모델처럼 나오는 여자들의 영상이 어느순간 자유로운 누드해변가로 나온다. 영화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가장 많이던 장면은 인간과 인간의 투쟁이다. 전쟁터에서 서로 총을 쏘우는 군인들, 시위자와 그 시위자를 진압하는 공권력, 투쟁의 역사는 좀 더 과학기술적으로 변모하여 항공모항 위로 이착륙하는 전투기들, 스펙타클한 사회란 그런 국가 내에서도 국가 외적으로도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현상이다.

 

 그의 작품 마지막에 1968년 이야기가 나온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68혁명이 일어나고 1969년 드골정부에서 다른 정부로 교체된다. 어째든 그가 보며준 영화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는 전혀 맞지도 않은 서사구조에 전혀 맞지도 않은 이미지에 나레이션을 입혀 놓는다. 전위예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나로서는 전위예술적인 영화란 과연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기 드보르의 영화가 상영될 때 이상한 편집과 해괴한 연출에서 영화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 도구를 위한 영화라는 말처럼 상영객들의 평가가 희비를 달리했다. society of the spectacle,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눈에 보이지도 않은 이미지가 매개로 하여 대중들이 그저 조장된 이미지로 탄생된 미디어 안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인간 그 자체로 능동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언제나 우리 주변은 스펙타클한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대중들이 말하고 있는 스펙타클하다는 그것들. 분명히 스펙타클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스펙타클한 것은 본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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