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토지 11 - 3부 3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1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드디어 몸을 움직이는 상현, 조국에 인연에 더 이상 미련 없이 떠나버리려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시대가 어수선하니 사이비 종교가 득세하기도 하고, 독립운동의 세력 간에도 미묘한 반목이 펼쳐진다.
아편에 중독되어 폐인이 된 봉순이.... 부초처럼 떠돌며 정착하지 못한 여인의 말로가 쓸쓸하다. 유일한 혈육인 딸 양현에게도 집착을 버린듯한 모습, 모든 기운이 다한 모습은 안타깝기만 하다.
환이의 마지막도 허무하고 덧없다...라는 회한.
계명회 회원 검거된 사건에 휘말려 간도의 길상 역시 형무소 생활을 시작한다.
한편에선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 등 노동운동에 대한 의식도 깨어난다.
- 용이는 개운치가 않다. 더욱 기분이 나쁘고 찝찔하다. 자신이 배신자만 같다. 나쁜 놈 같고 야박하기 짝이 없는 놈 같다. 살아 남았기 때문에, 처참했던 윤보의 죽음, 어느 때든 내 반드시 돌아오리, 와서 뼈라도 추려서 양지바른 마을 뒷산에 묻어주리라, 그 굳은 맹세도 세월 따라서 까맣게 잊어버렸으며 윤보를 생각하는 일조차 드물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것은 사람이구나. 용이는 쓴웃음을 띤다. 죽음은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것 같았다. 무더기 무더기 널려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까지 지난 세월은 자신과 아무런 인연이 없고,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조차 낯선 나그네처럼 지나갈 것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이 세월은 살아서 몸을 일으키고 그 수많은 죽음들이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어 용이에게 육박해 오는 것을 느낀다. 부모와 누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강청댁의 얼굴이며, 월선의 얼굴이며, 임이네 얼굴이며, 최치수, 윤씨 부인, 별당아씨 얼굴이며, 노비들, 윤보에 한조, 서금돌, 김 훈장, 어찌 다 셀 수 있을 것인가. 삼월이면 김평산, 귀녀, 실성이, 핏자국 같은 그들 생애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넓은 가을 들판에, 베어서 눕혀놓은 볏가리들처럼 멀리 가까이, 그것은 모두 죽음들이며, 죽음에 이른 무수한 삶의 이력, 삶의 잔해만 같은데 용이에게는, 그것들에 둘러싸여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이 엄습해 온다. 저승과 이승의 끝없는 벌판을 무엇들이 그렇게 애타게 살다갔더란 말인가. 그리고 혼자 살아 남았는가. - 34
- 한 번도 따뜻하게 대해 준 일이 없는 여자, 죽음은 살아 남은 사람에게 회한을 남기게 마련이다. 좋지 않은 추억들을 다 떠내려 보내기 위해선 임이네 생각을 말아야 하고, 그 고독하고 처참한 죽음에 대한, 불쌍한 망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이다. 임이네의 죽음은 슬픔이나 애통보다 용이에게는 충격이었다.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 밑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절망, 죽음은 무도 그럴 것이지만 뼛골까지 스며드는 그 외로운 죽음을 용이는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연민이었으나 임이네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절망이었고, 그 절망감은 죄의식을 몰고 오는 것이다. - 42
-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환이는 자신의 생애가 성인의 길이 아니었음을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투쟁과 방랑, 애증과 원한의 가파른 고개를 넘은, 평지가 오히려 발끝에 설었던 오십 평생은 마음과 몸이 피로 물들었던 것처럼 격렬했었다. 환이는 무엇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인지 그것을 생각한다. - 155
- 서희는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남편의 눈빛을 생각한다. 눈에 담긴 빛의 함량은 어느 만큼이든가. 그것은 생명력을 측량해보는 것이기도 했다. 잘 견디고 있는가. 잘 견디어낼 것인가. 길상의 눈빛은 서희 자신의 눈빛이었다. 그쪽에서 빛이 나면 이쪽도 빛이 난다. 그쪽에서 못 견디면 이쪽에서도 못 견딘다. - 281
- 김환이 진주 경찰서에서 자살한 것은 이 년 전의 일이다. 어둠 속에 묻혔던 인물 김환, 그의 죽음은 최 참판댁의 그 엄청난 비극의 종언을 뜻한다. 김환을 마지막으로 비극의 주인공들은 다 사라진 것이다. 최 참판댁의 영광, 최 참판댁의 오욕, 이제 최 참판댁의 상징은 재물로만 남았고, 호칭도 최 참판댁보다 최 부자댁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최서희의 집념은 창 없는 전사, 노 잃은 사공, 최 참판댁의 영광과 오욕과는 상관없이 단절된 채 아이들은 자라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만이 그들 가슴속의 신화요, 아버지의 존재로 하여 아이들 가슴속에는 민족과 조국에 대한 강렬한 의식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 286
2024. jul.
#토지 #3부3권 #박경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