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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회복하는 인간>에서 보여주는 회복에 관한 강한 거부는 되찾을수 없는 기억을 움켜쥐는 것과 같다.
끝끝내 회복하지 못한 언니와의 관계, 살아남은 자식으로서의 부채감, 오래되어 단단해진 내면의 상처. 그런 것들을 이렇게 담담하고 치열하게 그려낸다.
이따위... 라고 중얼거리면서.
<훈자>
가보지도 않았고 앞으로 갈 일도 없을 이국의 고산지대에 그토록 빠져들었을까.
퍽퍽하고 감당할 일 많은 현실도 그곳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무의식은 꿈으로 발현되는데.
신경이 곤두서는 불면의 감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조금은 불편하다.
<에우로파>
무너진 자신를 일으켜 세우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어떤 작품 하나 빠지지 않고 감정의 너울이 넘실거린다. 조금 시무룩하게. 활기 찬 한강은 상상하기도 쉽진 않지만. :)
2015. Jun.
그해가 지나가기 전에, 당신은 늦은 밤 그녀의 방에서 물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당신에게 등을 돌린 채 화장을 지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얼핏 어두워졌다. 거울을통해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는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 p. 20회복되는 인간 중
마침내 수술실에서 걸어나온 그녀는 울먹이는 당신을 위로하려고 했다. 커다란 멸균 가제와 반창고를 우스꽝스럽게 이마에 붙인 채 머뭇머뭇 반복해 말했다.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 p. 31회복되는 인간 중
모든 통각들이 너무 허약하다고, 당신은 수차례 두 눈을 깜박이며 생각한다.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 부터도 회복되지 않개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에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 p. 34. 회복되는 인간 중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의 한 순간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20 여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 보았다. - p. 69. 에우로파 중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 p. 91. 에우로파 중
<파란 돌>
거긴 지낼 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영원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 감자 생각은 잊었나요. 오래전 꾸었다던 꿈 속의 당신, 부풀어오른 팔로 파란 돌을 건지고 있나요. 물의 감촉이 느껴지나요. 햇빛이 느껴지나요.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 p. 215
<노랑무늬영원>
놀라운 일은 그 직후부터 시작됐다. 가까스로 유예되고 있었던, 격렬하고 부정적인,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공포, 후회, 수치, 분노, 원망, 증오, 억울함, 비참함, 살의. 그리고 혼자라는 것. 철저히, 당연히, 언제까지든 혼자라는 것. - p.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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