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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 ㅣ 창비세계문학 38
류이창 지음, 김혜준 옮김 / 창비 / 2014년 10월
평점 :
홍콩이란 도시는 아무래도 체념과 무기력의 이미지로 다가오는데,
이 소설도 그런 이미지의 연장으로 다가왔다.
상실로 가득한 기울어진 마음이 붕괴되는 과정이 그려진다.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애증으로 변해버린 물질의 시대의 작가.
그 자체아닌지.
중국문학에서 보여지는 광인의 이미지가 술꾼으로 치환되었다. 이성과 감성, 도덕과 본능 사이를 끊임없이 고뇌하는 술꾼.
애처롭게도 요령이 없어 적당히 타협할줄 모르는 술꾼.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가슴을 울리는 문장들에 자주 쓸쓸해졌고 홍콩에 대한 영화적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독서였다.
- 늘 혼자와서 술을 마시죠? 그녀가 물었다.
그렇소.
고통스러운기억을 잊어버리고 싶어서요?
기억 속의 기쁨을 잊어버리고 싶어서요.
고체의 웃음이 얼음처럼 술잔 속에서 헤엄친다. 상상해볼 필요도 없다. 그녀는 나의 유치함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사냥꾼이 꼭 모두 용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네온사인의 숲 속에서 그네에 매달린 순결이란 이미 진귀한 것이 되어버렸다.
한잔. 두잔. 석잔. 넉잔. 다섯잔.
나는 취했다. 머릿속에는 고체의 웃음뿐이다. - 14
- 바퀴는 쉬지 않고 돈다. 홍콩이 손짓하고 있다. 노스포인트에는 샤페이로의 운치가 있다. 스타페리 부두는 새롭게 단장했다. 마천루들은 모두 별을 따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상처받은 감정은 여전히 불빛의 지시를 필요로 한다. 방향에는 네가지가 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상품을 제조하고 있다. 브랜디, 증오를 브랜디에 담근다.
모든 기억은 축축하다. - 34
- 이런 위대한 시대에 살고 있는데 우리는 왜 ‘전쟁과 평화’처럼 그렇게 위대한 작품이 안 나오나요?
나는 웃었다.
그는 나더러 이유를 말해달라고 했다.
러시아에는 유사 이래로 똘스또이 한명밖에 없잖은가. 나는 대답했다. - 41
- 현실은 여전히 잔혹한 것이어서 나는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다. 술이 나의 우울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다면 몇잔 더 마신들 어떠랴. 이성은 절름발이다. 깊은 산의 짙은 구름 속에서 길을 잃어 어디로 갈지 모른다. 누군가는 봄날을 빌리지 못하여 감정의 호수 속으로 뛰어든다.
한잔. 두잔. - 42
- 인간은 하느님의 장난감일까? 하느님은 희망과 야망으로 인간을 가지고 노는 걸까? 그래서 까뮈가 떠오른다. 카프카를 추모하기 위해 그는 ‘이방인’을 썼다. 그는 인간의 행동과 관련한 모든 것에 대해 낙관을 표했다. 하지만 인간의 성품에 대해서는 비관을 표했다. ...... 그런즉슨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답은 아마도 근본적으로 인생에는 목적이 없다라는 것이리라. 조물주는 거짓말을 창조했다. 야망, 욕구, 희망, 쾌락, 성욕...... 이 모두가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원료다. 한가지라도 빠지면 인간은 쉽사리 참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인간은 깨달을 수가 없다. 조물주가 이를 허락하지 않으므로. 모두들 말한다. 덧없는 인생, 꿈과 같다고. 사실은 꿈이 너무나 덧없는 인생과 같은 것이다. ...... 더이상 생각하지 말자. 계속 생각하면 미치광이가 될 거다. - 60
- ‘사랑의 교환소’를 나서자 바닷바람이 손가락처럼 뺨을 어루만진다. 너무 많은 네온사인, 너무 많은 색깔, 너무 많은 고층빌딩, 너무 많은 선박, 너무 많은 웃음소리와 울음소리...... 힘을 합해 현대문명을 떠받치며 인간이 갑자기 달을 좇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끔 만든다.
이리하여 술 한잔이 나타났다. - 78
- 선생님,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시고 동시에 커다란 결심으로 이상을 추구하십시오.
서명은 막호문이었다.
나 자신을 방 안에 가둔 채 온종일 울었다. - 113
- 이게 도대체 무슨 놈의 세상인가? 나는 생각했다. 돈이 되는지 ㅣ아닌지에 따라 글이 좋고 나쁘고가 결정되고, 영화가 훌륭하고 아니고 역시 그러하다니. 문학과 예술이 공리주의자의 마음속에서는 그저 독약을 싸고 있는 한겹의 당의에 불과하다니.
희망은 비눗방울이다. 찰나의 춤을 추면서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하다가 문득 손가락 하나에 터져버린다. 나는 결국 나의 우둔함을 깨달았고 더이상 찬란한 환상을 좇고 싶지 않았다. 내가 번밍에 빠져 있을 때마다 술은 나를 미친 듯이 웃도록 만든다. - 120
- 지금은 번민의 시대야. 나는 생각했다. 양식있는 지식인이라면 모두 질식감을 느낄 거야. - 163
- 여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다. 나는 생각했다. 비열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일수록 더 높이 올라가고, 양심에 충실한 사람들은 영원히 사회의 밑바닥에서 남들에게 짓밟힌다. - 168
- 나는 모진 마음을 먹고 단호하게 문예와 관계를 끊어야 한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자신을 글쓰는 기계로 간주해야 한다.
이건 그리 잘못된 것이 아니다. 최소한 나는 방세를 못 낼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술을 못 살까봐 걱정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 비록 더이상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인식할 도리가 없기는 하지만.
나는 기생충이 되었다. - 198
- 계속 생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 264
2023. may.
#술꾼 #류이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