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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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그라드는 영광.
격변에 순응하고 소멸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영주.

그 세월을 통과하면서도 최소한의 권위를 유지하고 사그라드는 건 그 와중에도 특권이며, 이 글의 관능성, 귀족적 삶에 대한 동경.... 그런 걸 느껴보자는 걸까.
격변의 시대에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무저항으로 변화를 받아들이는 기득권의 모습이 어쩌면 그 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동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국민 소설이라고? 잘 모르겠다. 이걸로 드라마가 나오고,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딱히 극적 요소랄 게 있는 서사인가 싶지만... 
아름답게 영상화하려면 넉넉하게 충족하는 이야기인 것 같기는 하다.

왕정이 공화정이 되는 과정이 순탄했을 리 없으나 피의 기록은 약간의 암시와 단편적 묘사로만 이루어져 있고, 존엄했던 마지막 영주의 시점으로만 서정적인 진술이 이루어져서 뭐랄까.... 존엄하게 소멸하겠다.라는 의지랄까. 

기대했던 그 시절의 서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또 하나 아쉬운 것은 콘체타의 서사.

뭐 이런 정도의 감상으로 마무리된다. 


- 매일 올리는 묵주기도가 끝났다. 영주는 삼십 분 동안 차분한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기했다. 이 삼십 분 동안 웅얼거리는 다른 사람들 목소리가 뒤섞여 나지막이 일렁였는데, 여기서 사랑, 순결, 죽음처럼 예사롭지 않은 말들이 황금 꽃잎처럼 떨어졌다. - 9

- 그의 권위적인 기질, 어느 일면에서 엿보이는 엄격한 도덕성, 추상적인 사고에 대한 선호는 팔레르모 사회 같은 느긋한 서식 환경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오만으로, 반복되는 도덕적인 가책으로, 친척과 친구들에 대한 경멸로 변했다. 영주가 보기에 그들은 느릿느릿 실용적으로 흐르는 시칠리아라는 강물에 표류하는 사람들 같았다. - 13

- 어머니에게는 자부심과 지성을, 아버지로부터는 호색가의 기질과 경솔함을 물려받은 파브리초 영주는 제우스처럼 눈살을 찌푸린 채 끊임없이 불만을 품고 살았다. 자신이 속한 계급이 몰락하고 가문의 재산이 사라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볼 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대응책을 강구할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 14

-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모한 짓은 하지 않고 현상 유지에 전념하는 것? 그렇다면 얼마 전 팔레르모의 황량한 광장에 울려 퍼진 것과 같은 메마른 총성들이 의미하는 행동이 필요한 것인가? 하지만 그런 총격전들 역시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 23

- "너 미쳤구나, 탄크레디! 저런 자들과 한통속이 되다니! 그런 놈들은 다 마피아에 사기꾼들이야. 팔코네리 가문 사람은 국왕을 위해 우리와 함께해야 한다." 탄크레디의 눈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당연히 왕을 위해서죠. 그런데 어떤 왕이요?" 그는 곧 진지해졌는데 그런 모습이 신비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지금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저들이 공화국을 만들 거예요.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면 모두 다 바꾸어야 해요. 제 말 뜻 아시겠어요?" 탄크레디가 조금 울컥한지 외삼촌을 포옹했다. "곧 뵐게요. 삼색기를 흔들며 돌아오겠습니다." - 38

- 많은 일이 일어나겠지만 모두 희극이 될 것이다. 어릿광대의 옷에 핏방울 몇 개가 묻었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낭만적인 희극. 이곳은 타협의 땅이었다. - 48

- 그래도 작고 초라해진 꿈을 주머니에 넣은 채 보잘것없는 위치에서도 자신의 일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었다. 또 가난하지만 점잖은 그에게 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감탄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그리고 실로 마음 깊은 데서, 거만한 그의 마음속에서 혹시 돈 치초가 살리나의 영주인 자신보다 훨씬 신사답게 행동한 것은 아닌지를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147

- 돈 칼로제로가 스스로 깨달은 바를 당장 실행에 옮겼다고 한다면 그건 성급한 말이다. 그 후 좀 더 매끈하게 면도하는 법을 알았고 세탁에 사용되는 비누의 양에 전보다 덜 놀랐을 뿐 다른 점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세다라와 후손들은 끊임없이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계급 상승을 이루었다. 그들은 3세대에 걸쳐서 유능한 농부에서 무방비 상태의 귀족 신사로 변해 갔다. - 176

- 탄크레디는 키스를 거듭하면서 자신이 시칠리아를, 이토록 아름다우면서도 믿을 수 없는 땅을 다시 손에 넣은 기분이었다. 팔코네리 가문이 수 세기 동안 군림한 땅을, 지금 무의미한 반란 끝에 (그의 선조들에게 항상 그랬듯이 그에게 항복하는) 육체적 희열과 황금빛 수확이 약속된 시칠리아를 되찾은 듯했다. - 194

- 언제나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불안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 안심이 되었다. 아마도 자신의 죽음은 무엇보다 온 세상의 죽음이 될 테니까 그렇지 않을까? - 288

- 바다의 포효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 319

- 그녀의 내면은 완전히 텅 비었다. 다만 작은 털 더미에서 불편함의 안개가 피어올랐을 뿐이었다. 이것이 오늘의 아픔이었다. 불쌍한 벤디코조차도 쓰라린 기억을 암시했다. 그녀는 종을 울렸다. "아네타, 이 개는 정말 너무 벌레 먹고 먼지가 쌓였어요. 갖다 버려요."
사체가 끌려가는 동안 유리로 된 눈은 버려진 것들, 되돌려지고 싶은 것들의 무기력한 비난을 담아 그녀를 응시했다. 몇 분 후, 벤디코의 남은 형체는 청소부가 매일 방문하는 마당 한구석으로 던져졌다. 창문에서 던져지는 동안 그 형태가 잠시 재구성되었다. 긴 콧수염을 기른 네 발 달린 동물이 저주하듯 오른쪽 앞발을 들어 올리며 공중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이 납빛 먼지 더미 속에서 평화를 찾았다. - 350

2025. mar.

#표범 #주세페토마시디람페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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