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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세계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81
백은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평점 :
자체적인 세계관과 그 서사가 존재하는 시는 읽기는 가능하나 흥미가 감소한다. 너무 시인만 아는 이야기와 세계를 예쁘게, 혹은 처연하게 꾸민 느낌이랄까.
종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튀어오르는 이미지와 시어들, 이야기가 나의 읽는 행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고.
- 단정한 기계들 깊은 밤
투명한 구름 속을 헤맨다면
서서히 지워질 수 있다면
이토록 차가운, 붉은
고깃덩어리들 그러면 나는
불 속에서 너를 지켜볼게 - 시인의 말
- 계획이 다 탄로 난 뒤에는 어떤 채도를 갖게 될까 노랗게 물든 손가락으로 너는 묻는다 - 어려운 일들 중
- 계속 쓰면 부서질 것들도 부서질 듯 모이고 참 이상하죠?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은 하루하루 사는 데 도움이 됩니다. - 병원 손님 의자 테이블 중
- 이게 끝이면 좋겠다 끝장났으면 좋겠다
젖은 솜처럼
해수어와 담수어의 사이만큼
이미 실패했지만 다시 실패하고 싶다 - 가능세계 중
<아홉 가지 색과 온도에 대한 마음>
초록이었을까. 그건. 눈이 내렸을까. 아니면 손과 손, 지나가는 바람 또 바람. 그런 것들뿐이었을까. 그녀에게. 알 수 없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새는 지도를 버리고 숲 쪽으로 기울어진다. 빛이 많은 악기를 조심하라고 우리는 서로의 이마에 화 자를 새겨주었다.
오늘 밤 내가 할 이야기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녀가 그녀의 숨을 벗고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맸던 것처럼. 부숴버리고 싶은 가느다란 뼈들. 나는 나의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갈 거야. 꿈에는 매번 같은 의자에 앉아 같은 사람과 얘기 나눴다. 더 어두워진다면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을 무섭다고 하지 못하는 것.
수심은 빛을 갖는다. 새의 날개가 부러진다. 우아한 추락이구나. 붉게. 이번 사냥엔 동원될 것이 많다. 나는 네 옷섶을 풀어 최초의 발톱과 눈먼 사자의 털을 넣어준다. 그리고 상아를 깎아 만든 우윳빛 젓가락 한 벌. 빛을 통해, 빛을 통해 어두워질 것.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나요. 냄비는 뜨겁고 손과 물 혹은 손에 갇힌 손, 물에 갇힌 물. 그건 균열에 대한 이미지. 눈이 내리기 직전에는 모든 것이 자리를 바꾸지. 알 수 없는 중력, 알 수 없는 목소리. 복도를 가로지르는 칼날.
뒷모습은 증식한다. 하나둘. 그녀의 안개가 힘없이 수면을 드리웠던 것처럼. 꼼짝 말고 여기 있어. 초록일까. 몸을 관통하는 바람에 대한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무릎을 접고 그녀는 진창으로.
그때부터 이마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길렀다. 작은 나무상자가 불에 덴 잠을 훔쳐갔기 때문에. 그녀가 새를 잡아왔기 때문에. 나는 한 가지 소리만을 움켜쥔다. 거꾸로 처박힌 이미지들. 그것에 관여하는 음은 증발하는 성질. 불의 가장자리와 동일한 손이다.
(전문)
- 나는 슬픈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ㅓ 실은. 너무 슬퍼서 있지도 않은 것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그런데 자꾸 구름만 봤어. 어째서 세상은 이 따위고, 어째서 새나 강물 같은 것을 보며 평화롭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하고 생각하니까. 슬픈 마음을 슬프다고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아서. 낮아지고 있어. - 종이배 호수 중
- 배운 적도 없는데 터져 나오는 첫울음처럼 마주 잡는 두 손, 흩어지는 한순간의 떨림 이름 붙이고 싶은 여러 가지 색들 뾰족한 연필을 쥐고 꾸욱 손가락을 찔러보는 책상 앞의 나날 밤은 어김없이 밤이구나. - 열대병 중
2025.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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