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
사카이 준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검지 손가락 두개를 쫑쫑 부딪히는 일러스트가 왠지 귀여워서.

그러나 본문은 군데군데 괴리감이 생겨서 ...

마케이누, 떠받들어주기, 총애 등등의 키워드로 삼은 단어들이 와닿지 않았다.

일본인 다운 표현이랄까 스스로 모멸감을 심어주는 자학적으로 느껴지는 단어 선택이 그랬다.

미숙함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문화라는 것이 확실하게 다가온달까.

자학이 통쾌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여기에선 그런걸 느끼지 못했다.

캐릭터 티셔츠를 입은 중년을 인파 속에서 흡연을 하는 이와 동급으로 놓는 지점이랄까.... 누군가에게는 큰 민폐라고 생각한다는 점은 글쎄.
화를 내고도 스스로 서태후 같았는지 복기하며 섬뜩해 하는 것도...
엄마정도의 감각은 아니지만 이모정도의 감각으로 조직을 아우른다는 표현도...

그렇게 까지.... 라는 생각.

전체적으로 여성의 중년이라는 시기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저 인간으로서의 노화과정이 아닌 여성을 이야기 한다는 데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볼 만하다.

다른 얘기지만, 후반부에 나이가 들면 <겐지 모노가타리>나 <마쿠라노소시>를 읽는다는 부분에서 살짝 뜨끔했다.
마쿠라노소시를 이미 읽었고, 겐지 모노가타리도 언젠가 읽어야지 하고 꼽아 놓았기에....
일본인 저자 기준 나이가 든 요건을 갖춘 셈인걸까.

생각하던 바에 비해 길게 썼지만, 요약하자면 ‘사노 요코를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이다.

노파를 야유하려는 건 결코 아니겠지만 노에서 노파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노옹과 비교했을 때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노에서 ‘노옹‘은 장수와 행복의 신이다. 노인이기는 해도 그 늙은 모습에는 경사스러움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반면 노파는 ‘너무 오래 산 여자의 황망한 모습‘이고 음침함을 두르고 있다. - 25

그토록 건강하다는 것을 어필하던 중년이 무심결에 이런 고백을 한다면?
˝사실은 무릎이 좀 안 좋아.˝
갑자기 친근감이 넘쳐흐른다. - 169

2016. Dec.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속적인 서사의 흐름보다 분절된 의식의 흐름을 시각화해서 읽어야 하는 ‘공감각‘이 필요했다.

존 밴빌의 스타일리쉬함이 진입 장벽이라면 진입 장벽인 셈이었다.

주인공 맥스에게는 극단적 자기 부정, 계급의 부정, 현실의 부정이 가득하다.

온갖 신들을 소환하여 현신케하지만 정작 불신의 이미지가 가득했던 소년이었다. 자신의 세계에 신들을 욱여넣고 안도하려는 시도다.

그런 소년이 별다른 변화없이 동류의 사람으로 성장해 결혼을 하고 아내를 병으로 잃은 후 급작스레 다가오는 상실감에 괴로워 한다. 그 괴로움의 표현 방식이 과거로의 회귀이다.

자신이 상정한 신들의 장소, 시더스로 돌아오는 것.

그 성스러운 유년의 기억 속 에피소드들과 현재 주인공의 심리가 교차된다.

상실이라는 개인의 작은 재앙, 몰락, 더 나아갈 수 없는 턱에 걸려 있지만, 그가 숨어든 과거 속에도 재앙과 몰락은 존재한다. 결국 인생은 몰락의 반복이라는 것인가. 끊임없이 상실을 경험하는 숙명에 관한 이야기 일까.

늙어가는 육신에 대한 경멸, 늙어가는 자의 고독, 외로움, 수치, 그 너저분함.
더 이상 세계의 주체가 아닌 자에 대한 오욕과 회한이 묻어났다.

마침 겨울비가 종일 내려 더할나위 없이 이입하는 조건이 되었다.

주인공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에 대한 까다롭고 예민한 취향은 화자로서 주인공으로서의 감각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감각을 묘사하는데 이용하기 위해 설정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완벽한 눈과 목소리를 가진 totally 관찰자의 임무.

아 모르겠다. 결국 인간은 개인의 힘으로는 크게 진보할 수도 퇴보할 수도 없고, 그저 관찰자로만 머물다 가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쓸쓸한 독서였지만, 좋았다.




순간 그날 아침 거울처럼 빛나는 토드 씨의 진료실로 들어간 뒤로 나를 에워싸고 있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당혹감이었다. 애나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당혹감, 그래. 공황에 사로잡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어디를 봐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느낌. 다른 것도 있었다. 우리가 빠져들게 된 냉혹한 상황에 대한, 꼭 분노라기보다는 일종의 찌무룩한 짜증, 찌무룩한 울화였다. 마치 어떤 비밀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 같았다. 그 비밀은 아주 더럽고, 아주 지저분해서 함께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서로 상대가 아는 지저분한 것을 알고 있었으며, 바로 그렇게 아는 것으로 둘은 함께 묶여 있었다. 이날부터 앞으로는 모두 속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죽음과 더불어 살아갈 방법이 없을 테니까. - 28

세월이 가면서 나는 내 딸이 나이로 나를 따라잡아, 이제 우리가 거의 동년배가 되었다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아마 그렇게 영리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에 생긴 일일 것이다. 아이가 버티기만 했다면 나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훌륭한 학자가 되었을 텐데. 그애는 또 내가 불안해질 정도로 나를 이해하며, 나를 잘 알지 못해 그만큼 나를 더 두려워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내 약점이나 지나친 점을 받아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 상처하여 상처를 받았으니 응석이 필요하다. 사형 집행 전에 참회의 시간을 길게 주는 곳이 있다면, 내가 지금 가야할 곳이 그곳이다. 날 좀 내버려둬. 나는 속으로 클레어에게 와쳤다. 조롱당하는 낡은 시더스를, 사라진 스트랜드 카페를, 루핀스와 필드였던 곳을. 이 모든 과거를 살금살금 지나갈 수 있도록 해줘. 여기서 멈추면 녹아서 부끄러운 눈물의 웅덩이가 될 것 같단 말이야. - 53

˝과거 속에서 사시네요.˝ 클레어가 말했다.
나는 신랄하게 대꾸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사실 아이 말이 옳았다. 삶,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안, 또 그래, 솔직히 인정하거니와, 아늑함, 그런 것들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들어가버렸다. 이것은 충격까지는 아니라 해도 놀랄 만한 깨달음이었다. - 62

나는 그런 종류의 아이였다. 아니, 나의 일부는 여전히 그때의 그런 종류의 아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 말을 바꾸면, 마음이 더러운 작은 짐승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종류가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우리는 결코 자라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결코 자라지 않았다. - 76

그녀는 심지어 내가 보기에도 창백하지는 않았고, 물감으로 그려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온전히 현실적이었고, 두툼한 육질이 느껴졌고,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이것이야말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내 상상의 영혼인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살과 피로 이루어진, 섬유질과 사향 냄새와 우유로 이루어진 여자였다는 것. 그래서 그전까지는 구출과 사랑의 장난으로 이루어졌던 점잖은 꿈이 이제는 시끌벅적한 환상, 그러나 그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절망적이게도 핵심적인 세목이 빠져있는 환상이 되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육감적으로 짓눌리는 환상, 그녀의 따뜻한 무게에 땅으로 푹 가라앉는 환상, 그녀가 두 허벅지로 나를 타고 앉아 내 몸을 흔드는 환상, 내 두 팔은 내 가슴에 고정되고 얼굴은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는 환상이었다. 나는 그녀의 악마 연인인 동시에 그녀의 아이였다. - 87

그녀는 평소의 온화한, 또 온화하게 몰입한 방식으로 자기와 결혼해달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 그 여름의 먼지 낀 어스름에 슬론 스트리트 모퉁이에서 애나가 나에게 제안한 것은 결혼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환상을 실현할 기회였다. - 101
내가 용케도 그 가파른 사회적 계단의 밑바닥으로부터 그레이스 가족 수준까지 올라갔다는 것은 코니 그레이스를 향한 나의 은밀한 감정과 마찬가지로 특별함의 상징, 선택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선택된 자라는 상징이었다. 신들이 나를 골라 은총을 베푼 것이다. - 105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람은 가지를 치고 흩어진다. 그것은 지속되지 않고, 지속될 수 없다. 그것은 불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죽은 자를 이고 갈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누군가가 우리를 잠시 이고 가고, 그런 다음에는 또 누군가가 우리를 이고 갔던 자들을 이고 가고,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세대들로 이어져간다. 나는 애나를 기억하고, 우리 딸 클레어는 애나를 기억하고 나를 기억할 것이며, 그뒤에는 클레어도 사라질 것이고, 클레어를 기억하지만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소멸한다. 물론 우리 가운데 어떤 것은 남을 것이다. 바랜 사진, 머리카락 한 타래, 지문 몇 개, 우리가 마지막 숨을 쉰 방의 공기에 들어 있던 원자 몇 개.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 지금 우리이고 전에 우리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죽은 자의 먼지일 뿐이다. - 114

어린 시절에는 행복이 달랐다. 그때는 그냥 축적하는 것, 뭔가를 - 새로운 경험을, 새로운 감정을 -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치 광택이 나는 기와인 양 언젠가 놀랍게 마무리될 자아라는 누각에 올려놓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쉽사리 믿지 않는다는 것, 그것 역시 행복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자신의 단순한 행운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그 행복한 상태 말이다. - 137
그녀가 두려워하던 봄은 왔다가 갔지만, 그녀는 너무 아파 그 소요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이제 무덥고 끈적끈적한 여름, 그녀가 보게 될 마지막 여름이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물었다. ˝잘해줘야 하다니?˝ 그즈음 그녀는 이상한 말을 아주 많이 했다. 마치 이미 다른 곳에, 나를 넘어선 곳에, 심지어 말의 의미가 다른 곳에 가버린 것 같았다. 애나는 베개에서 머리를 움직이더니 나를 보며 웃음 지었다. 거의 뼈까지 닳아 들어간 그녀의 얼굴에는 섬뜩한 아름다움이 서려있었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나를 미워하는 일이 당신에겐 허락되지 않잖아.˝ 그녀가 말했다. ˝전과는 달리 말이야.˝ 애나는 밖의 나무들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웃음 지으며 내 손을 두드렸다.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 짓지 마.˝ 애나가 말했다. ˝나도 당신을 미워했어, 조금은. 우리도 어차피 인간이었으니까.˝ 그 무렵 애나는 과거 시제만 쓰려고 들었다. - 146

˝이 사진들은 내 사건 기록이야.˝ 애나가 말했다. ˝내 고발장이지.˝
˝당신 고발장이라고?˝ 내가 무력하게 물었다. 어딘가에서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뭘 고발해?˝
애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모든 걸.˝ 애나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걸.˝ - 172

2016. Dec.

그래, 사물들은 지속된다. 살아가는 것은 조금씩 퇴보하지만. - 16

그녀는 다시 초조하게 고개를 저으며, 내 손을 자기 쪽으로 바짝 잡아당겼다. "저 사람들이 시계를 멈춰 세우고 있어." 가느다란 실 같은 속삭임, 모의를 꾸미는 듯한 목소리였다. "내가 시간을 멈추었어." 그러더니 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안다는 듯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것이 웃음이었다고 맹세라도 하겠다. - 222

나는 늘 독특하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며, 나의 가장 강렬한 소망은 독특하지 않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나는 애나가 나의 변형의 매개가 될 것임을 즉시 알아보았따. 그녀는 나의 비틀린 곳들을 모두 바로 펼 수 있는 놀이공원의 거울이었다. "왜 당신 자신이 되려 하지 않아?" 애나는 우리가 함께 지내던 초기에 커다란 세상을 파악하려는 내 서툰 시도가 안쓰러워 나한테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녀가 나 자신을 알라고 하지 않고 나 자신이 되라고 한 것에 주목하라. 너 자신이 되라! 물론 그 의미는 뭐든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맺은 협정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우리라고 규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짐을 서로에게서 덜어주기로 한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내게서 그런 짐을 덜어주었다. 자니만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해주었을까? 어쩌면 이 알지 못함을 향한 충동에 그녀를 포함시키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무지를 바란 것은 나뿐인지도 모른다. - 201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노스케 테 입숨(nosce te ipsum - 너 자신을 알라). 이 명령은 맨 처음 어떤 선생님이 그 말을 따라할 것을 요구했을 때부터 내 혀에 재 맛을 남겼다. 나는 나 자신을 알았다, 너무 잘 알았다. 그리고 내가 아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201

나는 발을 멈추고 손을 들어올리며 이 사람들에게, 나는 그들의 경의 - 나는 그것이 경의라고 느꼈다- 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죽는 일은 애나가 했고 나는 방관자였을 뿐이라고. 단역이었을 뿐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느꼈다. - 190

이런 나쁜 년, 이런 씨발년, 네가 어떻게 나를 이렇게 두고 떠날 수 있어. 나를 구해줄 사람 하나 없이. 나 혼자 이 더러움 속에서 버둥거리게 해놓고.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 183

그것이 꿈의 전부였다. 여행은 끝나지 않았고, 나는 어디에도 이르지 못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걷기만 했다. 다 잃었지만 꿋꿋하게, 눈과 겨울의 땅거미를 해치고 끝도 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 31

"아,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대령이 말하며 당황하여 헛기침을 한다. 자기가 가족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내가 고통스러운 일들을 연상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니,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요즘 나는 세상을 조금씩 재서 섭취해야 한다. 내가 받고 있는 일종의 동종요법 치료다. 도대체 이 치료로 무슨 병을 고치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쩌면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아니다. 여기에 있는 것은 그저 어디에라도 가지 않는 방법일 뿐이다. - 180

나는 미래를 기대했다기보다는 미래에 향수를 품은 것이다. 나의 상상 속에서 다가올 것이 현실에서는 이미 가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갑자기 이것이 어쩐지 의미심장해 보인다. 내가 고대했던 것은 실제로 미래였을까, 아니면 미래 너머의 어떤 것이었을까? - 94

어린 시절에는 어째서 내 관심을 끄는 새로운 것마다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풍겼던 것인지? 권위자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것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알려진 것이 다른 형태로 돌아온 것이라던데. 유령이 된 것이라던데. 그러나 대답할 수 없는 그 많고 많은 것 가운데 이것은 가장 하찮은 것이다. - 17

나는 늘 둥지와 알 사이의 대비에 놀랐다. 그러니까 아무리 잘 또는 심지어 아름답게 지은 둥지라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마는 우연의 느낌과 알의 완전성, 그 원시적인 충실성 사이의 대비였다. 알은 시작이기 이전에 절대적 결말이다. 알이야말로 자족 그 자체다. 나는 깨진 알, 그 작디작은 비극을 보는 걸 싫어했다. - 150

나의 가엾은 부모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불행은 내 가장 어린 시절의 상수 가운데 하나였다. 청각이 미치는 범위를 살짝 넘어선 곳에서 쉬지 않고 들리는 높은 윙윙거림이었다.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마 사랑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나를 방해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내 시야를 흐려놓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을, 나의 투명한 부모를 뚫고 그 너머를 볼 수 있게 된다. - 39

배버수어 양이 이제 나의 방이 될 곳에 나를 남겨두고 떠나자, 나는 외투를 의자에 걸쳐놓고 침대 한쪽에 앉아 사람이 살지 않아 퀴퀴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오랫동안, 몇 년 동안 여행을 하다, 목적지에, 그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늘 향하고 있던 곳, 내가 머물러야 할 곳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이곳이 이제 당분간 나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장소, 유일하게 가능한 피난처였다. - 148

하긴, 우리의 모든 순간들 가운데, 삶이 완전히. 완전히 바뀌지 않는 순간이 어디 있을까? 그 모든 변화 가운데 마지막, 가장 중대한 변화가 오기 전까지는. - 38

애나는 봄이 오는 걸 두려워했다. 그 모든 감당할 수 없는 법석과 소란이, 그 모든 생명이 두렵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 145

어떤 날 아침에 보면 밤새 운 것처럼 그녀의 눈 주위가 새빨갛다. 일어난 모든 일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며 여전히 비통해하는 걸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의 작디작은 배들이 아닌가, 어두운 가을을 해치며 이 먹먹한 정적을 떠돌아다니는 작은 배. - 72

당시,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삶의 많은 부분이 고요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렇게 보인다. 늘 곁에 머무는 고요. 살핌. 우리는 아직 모양이 정해지지 않은 우리의 세계 안에서 기다리며, 그 남자아이와 내가 서로를 살피듯, 들판의 병사들처럼 무엇이 다가올지 지켜보며 미래를 살피고 있었다. - 19

필드에서 전에 함께 놀던 친구들, 이제는 같이 놀지 않게 된 친구들은 나의 탈주에 분개했다. "걔는 지금은 품위 있는 새 친구들하고만 하루종일 놀아요." 어느 날 나는 어머니가 이전 친구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어머니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남자아이는 말이죠, 벙어리예요."어머니는 나한테는 왜 그레이스 가족한테 양자로 들여달라고 빌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상관없어." 어머니는 말했다. "너를 내 발 아래서 빼내달라고 하렴." 그러면서 어머니는 흔들리지 않는 눈, 깜짝거리지도 않는 그 가혹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버지가 떠난 뒤 자주 나를 바라보던 눈, 마치, 이번에는 네가 나를 배반하겠지, 하고 말하는 듯한 눈이었다. 나도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 104

우리는 햇빛 속으로 걸어나갔다. 새로운 행성에 발을 내딛는 느낌이었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살지 않는 행성에. - 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은-머리들 / 소멸자 / 다시 끝내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실패작들 사뮈엘 베케트 선집
사뮈엘 베케트 지음, 임수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는 읽겠지 싶어서 사놓은 사뮈엘 베케트.

존 밴빌을 읽고 리뷰 쓰기전에 읽어볼 만 하다 오판하였다.

아... 안맞아. ;ㅂ;

표현할 것도 전혀 없고, 표현의 수단도 전혀 없고, 표현의 출발점도 전혀 없고, 표현할 어떤 능력도 없고,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욕망도 없고, 그러면서도 표현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표현. - 84, 해설 중

이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와닿는다 막...

제임스 조이스를 읽어야 겠다.

2016. Dec.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맛 보장 가정식 레시피 2 - 욕쟁이 요리 블로거, 당근정말시러의 맛보장 레시피
당근정말시러 지음 / 빛날희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 방식의 특제? 양념이 꼭 필요하고 손많이 가는 스타일의 레시핀데.

수비드.... 시간도 시간이고 해먹기 귀찮은? 레시핀데...

막상 해서 먹어보면 맛있다는게 어쩔 수 없는 장점.ㅋㅋㅋ

일단 해서 먹고 나면 아 졌다.ㅋㅋㅋ 하게 된다.

장아찌는 그다지 좋아하는 음식군은 아니지만 별책으로 나온 것중 몇개는 해보고 싶어짐.

당근시러 레시피북은 나오면 그냥 사게 될 듯 하다.

2016. Dec.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6-12-21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리뷰를 올리셨군요!

hellas 2016-12-21 21:01   좋아요 0 | URL
이미 해본 레시피도 많고. 쭉 훑어보고 올렸어요:):):)

로제트50 2016-12-2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구입했어요~~
장아찌레시피도 그렇구 업그레이드
깍두기는 깜짝이벤트급 !^^
 
세상의 모든 비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75
이민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상되는 것들.

바젤리츠, 팀 버튼, 프릭쇼, 인상주의, 신표현주의 등등....

매우 크리피한 상상이 가미되는 시라서 어쩐지 섬뜩하기도 하고

그래서 오히려 동화적이 매력이 다가왔다.

설령 오독과 오해의 결과라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해해버린 은유는 엄청난 모험이 되니 왠지 두근거렸다.

가장 멀리 가려고
가장 가까이 있었다 - 시인의 말 중

어디로 숨었을까
손바닥만 뒤집으며 봄날이 간다
눈을 뒤집는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났다 - 하녀 중

세계는 버림받았다
껴안을 수 없는 슬픔으로부터
입을 맞출 수 없는 밤과 낮으로부터 - 죽은 사회의 시인 중

2016. Dec.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