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성차별의 역사 한빛비즈 교양툰 2
솔르다드 브라비.도로테 베르네르 지음, 맹슬기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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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성차별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거 궁금한 적 없었던가? 언제부터 우리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일했고, 왜 뒤늦게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는지, 아버지가 가장이 되어 가정을 꾸리는 방식은 왜 시작되었는지 하는 것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데, 이제껏 살면서 겪어보니 이런 궁금증을 사소하다고 생각하면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더라. 페미니스트가 되어 세상을 바꾸겠다고 열변을 토하는 정도의 열정은 없지만, 적어도 계속 변해야 한다는 생각은 한다. 변해야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성차별이 시작되었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우리가 이 차별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해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첫 인류가 시작된 그때부터 선사시대, 고대, 중대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나폴레옹 법전이 만들어지고 19세기를 살아가는 동안, 20세기 영국 여성들의 참정권 투쟁, 그리고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고 냉전 시대, 미국의 흑인차별, 2000년 이후의 삶까지 들려주면서 성차별의 시작과 흐름을 보게 한다.

 

 

처음 여자와 남자는 삶에서 일어나는 신비에 무지했다. 남자의 정액과 여자의 난자가 만나 아이가 생긴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남자가 정액을 여자의 몸에 뿌리면 저절로 아이가 생긴다고 믿었다. 그래서 남자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겼다. 여자는 고작(?) 자기가 뿌린 씨앗을 받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정자와 난자가 만나야 아이가 생긴다는 사실이 1875년에야 밝혀졌다고 하니, 그 오랜 세월 동안 남자의 우월감은 어느 정도였을까 상상이 된다. 남자는 자기 마음대로 역할을 나누어 여자에게 적용했다. 여자는 대를 잇고 집안일을 하는 사람으로, 남자는 공동체를 다스리고 조직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그런 역할 분담은 모든 법전과 종교 서적이 남자가 집필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이 서적들에는 남자의 관점만 반영되었다. 여자의 존재, 권리, 역할은 여자의 마음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처음 여자와 남자의 역할 분담은, 단지 남자의 정자가 아이를 낳게 한다는 이유 하나로 정해진 것일까.

 

선사시대에 여자가 주기적으로 피를 흘리는 일(월경)은 남자와 똑같이 사냥에 나갈 수 없는 이유가 됐다. 동물에게 피 냄새로 쉽게 들켰기 때문에, 생리 기간 동안에는 사냥에 나갈 수 없었고 임신까지 한 몸으로는 더욱 사냥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사냥은 남자 담당이 되었고, 여자는 열매를 채취하거나 식물을 이용하여 식사를 책임지거나 병을 치료하는 법을 터득했다. 작은 도구들도 만들고, 사냥해온 동물을 죽이는 일도 도맡았다. 식량의 70%는 여성들이 채취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의아했다. 남자가 사냥해온 것이 더 큰 식량이 아니었나? 사실 사냥이 성공하는 일이 아주 드물어서 사냥으로는 식량을 채울 수 없었다고 한다.

 

 

고대 시대 여성에 대한 권한은 아버지에게 있었고,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그 권한이 이어졌다. 집과 재산 등, 여성의 의무는 많았으나 여성에게 주어진 권리는 거의 없었다. 여성은 아들을 낳아야만 했고, 딸은 한 명 이상 낳으면 버리거나, 노예나 매춘부로 팔았다. 남편은 원하는 여자와 얼마든지 성관계를 할 수 있었다. 중세시대에 딸은 일곱 살이 되면 남편이 정해지거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신부는 신랑에게 지참금을 줘야 했고, 남자가 모든 재산을 관리했다. 교회는 여자를 불완전한 존재로 정의했고, 모든 권리를 갖은 영주는 막 결혼한 여자를 첫날밤에 강간할 수도 있었다.

 

 

백년전쟁 이후 과부가 급증하면서 집에 홀로 남은 여성들은 강간이나 약탈의 대상이 되곤 했고, 그 위험을 피하려고 수녀원에 들어갔다. 서원이 없이 '베긴 수녀'가 되어 독립적으로, 노동의 대가로 생활했다. 하지만 이런 베긴 수녀들은 당시의 종교 윤리에 어긋난다고 여겨 화형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여성의 직업은 다양해졌다. 여성 작가, 교육자, 정치가도 생겼다. 의료 활동도 했다. 이렇게 여성이 획득한 자유와 독립성은 남성이 구축해온 권력을 위협했고, 교회는 여성을 악마에게 유혹당하기 쉬운 존재로 보고, 약물치료는 마술이며 특별한 지식과 능력을 갖춘 여성을 마녀라고 했다. 남성과 종교가 자기들의 권력이 줄어들까 봐 걱정한 나머지 여성을 겨냥한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그렇게 잔인하게 마녀사냥은 시작되었고,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올랭프 드 구주의 등장으로 여성의 인권이 조금 나아지나 싶었으나 결국은 그녀도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19세기 나폴레옹 법전이 만들어지면서 여성의 권리는 더 떨어졌고, 특히 결혼한 여성의 권리는 완전히 박탈당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조금씩 여성의 권리와 존엄이 인정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차별은 심했다. 프랑스에서 낙태는 여성을 감옥형으로 처벌했고, 20세기 초 이농 현상과 더불어 혼외 임신이 증가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정부는 출산 장려 정책을 펼쳤고, 많은 여성이 불법 낙태 시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불법 낙태 시술로 또 많은 여성이 낙태 중 사망했고, 여성들은 낙태의 자율화와 무료화를 외쳤다. 법안은 통과되어 오늘날 프랑스의 낙태 비용은 국가가 전액 지원한다고 한다. 미국에서 흑인은 인간이 아닌 노예로 취급했고, 흑인 여성은 농장주에게 정기적으로 강간당했다.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인종 차별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성차별의 역사는 흐르고 흘러, 오늘날에는 남성도 육아 휴직을 쓸 수 있게 되었고, 아내와 딸도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경구 낙태약이 개발되어 수술 없이도 낙태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여성의 인권과 권력을 위한 여러 가지가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유럽, 프랑스의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이보다 못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사후피임약도 우리나라에서는 병원에서 처방받아야 살 수 있다고 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 평등을 위해 많이 변화하고 발전해왔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남성과 여성의 성차별 내용 자체가 아니었다. 이미 어디선가 들어왔던 내용이 그림과 간단한 설명으로 좀 더 듣게 된 것뿐이다. 다만, 인류의 시작부터 성차별이 시작되었다는 게 놀라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한쪽에서 뭔가를 욕심내고 차지하려고 들면서 성차별이 시작되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가 어떻게 생기는지도 모른 채로 자기 우월감으로 여자를 동등하게 보지 않았다는 남성성의 시작이 안타까웠다. 수많은 여성의 투쟁으로 이루어낸 오늘날 여성의 인권이 대단해 보인다. 당연한 권리를 투쟁으로 이뤄내야만 했다는 게 아픈 일이지만,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 책은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성차별에 관한 많은 궁금증과 물음표가 서서히 풀리면서 현재의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이 재미있다. 이 과정을 알아간다는 게 현재를 더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될 듯하다. 여러 세대에 걸친 여성 차별의 경험이 우리 삶 곳곳에 묻어있기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던 내용이고, 성차별에 관해 궁금했던 많은 내용의 답을 찾아가게 한다. 여전히 성차별은 진행 중이지만, 그 차별을 없애는 인식 변화를 위해 필요한 책이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고, 그림과 몇 문장으로 설명하는 간결함으로 성차별 역사의 이해를 돕는다. 성차별의 흐름을 확인함으로써 우리가 함께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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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건축가 2019-10-2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볍게 재미나게 팀독할 만한 책으로 보이네요. ^^

구단씨 2019-10-21 23:04   좋아요 0 | URL
네. ^^
어렵지 않게 접근하는 방식이 좋아서 편하게 읽혀요.
물론 내용도 좋구요.
 
소설 보다 : 여름 2019 소설 보다
우다영.이민진.정영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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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시리즈 2019 여름 편. 정영수 작가의 「내일의 연인들」이다.

주인공 ‘나’는 어느 날 걸려온 선애 누나의 전화에 주거지가 변한다. 선애 누나는 엄마 친구 딸인데, 이번에 이혼하면서 신혼집을 비우게 되었다. 집은 매매로 내놓았지만 빨리 팔리지 않았고, 선애 누나는 집이 팔릴 때까지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때 선애 누나는 ‘나’를 생각해내고, 집의 관리를 맡기게 된다. ‘나’가 선애 누나의 집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일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서 선애 누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학교 다니는 거리가 짧아졌고, 마침 지원과 연애를 시작한 ‘나’는 선애 누나의 집이 데이트 장소로 이용될 수도 있음을 생각했다.

 

처음 선애 누나의 집으로 들어간 순간은 마치 낯선 집의 방문객이 된 것 같았다. 당연하다. 오랜 세월 연락도 없이 지내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맡긴 집 관리 때문이라고 해도 남의 집이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이 친근할 리 없다. 하지만 그런 낯선 감정도 잠깐이다. 어느 순간 그 집에 ‘나’는 익숙해졌고, 처음 조심스럽게 그 집에 드나들던 지원도 이제는 편하게 드나든다. 그 집에서 지원과 ‘나’는 처음으로 섹스를 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사랑을 접고 헤어지면서 떠나온 집일 텐데, 누군가는 그 집에서 새로운 사랑을 싹틔운다. 하긴, 아무리 친해도 남은 남이다. 각자의 인생과 사랑이 있다. 한 사람이 인생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같은 경험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사랑과 이별을 경험하는 과정은 서로 다른 우리들의 인생이어도 비슷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지원과 ‘나’는 뜨겁게 사랑했다. 설레면서도 익숙해지는 시간을 거치고 제법 다정한 연인이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지원은 묻는다. 그 집의 주인은 왜 헤어졌는지 궁금해졌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두 사람이 결혼하고 더 행복해지고 싶었을 텐데 헤어졌다. 그런 집에 들어와 있는 애인을 만나러 지원은 찾아오곤 했고, 두 사람은 그 집에서 관계를 쌓아나갔다.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자기 둘은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을 텐데, 그렇다면 언젠가 그 집의 부부처럼 헤어질 수도 있다고 믿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의 마음에 안정과 평화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완벽하고 완전해 보였던 사랑만큼 이별의 징후가 찾아온다고 해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이다.

 

지금 당장 이별을 하지 않더라도, 지금 눈앞의 사람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생각한다. 상상한다. 언젠가 이 사람과 헤어질 수도 있겠다고. 지금 하는 연애가 너무 아름다운데도 그 사랑에 푹 빠져있기보다는, 언젠가 다가올 헤어짐을 상상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사랑에 젖어있기보다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별을 먼저 상상하는 게 잘못된 생각은 아닌 듯해서다. 사랑의 끝이 두 가지 중의 하나 아니었던가. 계속 사랑을 이어가거나 이별하거나. 그런 두 가지 길에서 우리는 언제나 사랑만을 생각할 수는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행복과 불행을 같이 고민하며 살아가듯이, 사랑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끝까지 지키지 못할 때, 이별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미리 연습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불안을 잠재우는 노력도 해야 한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던 두 사람, 점점 침대의 양 끝으로 자리를 이동하면서, 등을 돌리면서, 각자의 사색에 잠겨 있는... 그 모습이 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사랑에도 편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싶어서다. 조금 떨어져서 누워 있는 게, 옆으로 돌아누워 있는 게 편하면 그걸로 된 거 아니겠느냐고. 그게 꼭 사랑이 끝나서만은 아니지 않겠느냐고. 그러다가 언젠가 사랑이 떠나가고 어쩔 수 없이 헤어짐을 인정하게 되더라도.

 

생각해보면 불안하지 않은 관계가 없고, 불안하지 않은 현실이 없다. 내일은 좀 괜찮을까 싶은 긍정적인 마음을 품다가도 금방 현실 앞에서 무너져 내린다. 때로는 경험으로 때로는 직감으로 그 불안과 불행을 알아차린다. 이들의 연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이었지만 사랑이 아닌 것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게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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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조카가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고민할 때, 나는 그 아이에게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고등학교를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고, 꼭 대학에서 공부해야 하는 것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면 그 아이가 관심 있는 것을 조금 더 빨리 전문적으로 배워서 사회에 나가는 게 여러 가지로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 아이가 대학에 갔으면 하는 바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대학졸업장이 대한민국의 교육에서 당연히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의무교육처럼 느껴져서다. 졸업 후 오랜 세월 취업준비생이 되더라도, 전공과 상관없는 일을 하더라도, 대학졸업장은 필요한 것처럼 여겨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큰조카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해서 대학에 입학했다. 군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다시 여러 가지 고민에 빠졌다는 게 돌고 도는 모순적인 상황인 것 같다. 이 전공을 계속해서 졸업을 해야 하는지, 대학교를 그만두고 조금 더 현실적인 상황에 매달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그 아이를 보면서 마음 아픈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이 책에서 들려주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큰조카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만약 그 아이가 특성화고에 진학했다면 지금과 다른 현실을 살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혹시 대학에 가지 않기로 한 인생 계획에 후회는 하고 있지 않을까? 일찍 진로를 정하고 취업을 목표로 마이스터고에 진학한 동준이는 대기업 현장 실습생으로 일하던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직장인이 아니라 학생이었다. 그 회사의 근로자가 아니라 고등학교 3학년 현장 실습생이었다. 전문적으로 일을 해내는 게 아니라 현장의 일을 배우는 게 그 아이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현장 실습생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은 일을 동준이 혼자 책임지고 해내야 했다. 오랜 시간의 노동을 해야 했고, 사내 폭력을 견뎌야만 했다. 회사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다들 그렇게 배운다고, 다들 그렇게 사회생활 한다고. 더는 버티지 못한 동준이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순간의 고통을 끝냈다.

 

혹자는 물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힘든데 왜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고. 부모님이나 담임선생님에게 말하지. 아직은 학생이고 미성년자인데 당연히 어른의 도움을 받는 거라고 말이다. 동준이라고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아이는 열심히 신호를 보냈다. 힘들다고, 폭력이 있었다고, 일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데 할 게 너무 많다고, 고통스럽다고. 부모님에게 말했고, 선생님에게 의논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사회생활이 어디 쉽겠냐, 조금만 더 견뎌봐라, 한번 확인해보겠다는 식의 답을 들려줄 뿐이었다. 어쩌면 아이는 알았을 것이다. 어른들에게 말해봤자 변하는 게 없을 거라는 것을. 회사의 시스템은 노동자들에게 반복적으로 대물림하듯 가르쳐온 방식이었을 것이고, 학교 측의 몇 마디로 실습 나간 회사의 어떤 게 쉽게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았는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 신호를 보내고 구조요청을 했는데 돌아오는 게 없다면, 이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거나, 아예 말하지 못 하기도 했을 것이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계속 말한다고 달라질 게 없을까 봐. 동준이가 선택한 해결 방식은 이 고통의 시간을 멈추는 것뿐이었다.

 

이런 고통을 겪는 아이들이 어디 동준이뿐일까. 동준이와 비슷한 죽음은 너무도 많았다. 생수 회사에서 일하다가 현장에서 숨진 이민호 군, 통신사 콜센터의 업무 스트레스로 자살한 홍수연 양 등. 모두 현장 실습생이었다. 교과 과정처럼 당연하게 이수해야 한다고 여기며 학교 지침에 따랐을 아이들이 현장 실습으로 잃은 것은 무엇일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힘든 노동 현장의 경험이 배우게 하는 게 분명 있을 테지만, 현장 실습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받은 많은 것이 그 경험마저 잊게 한다. 어쩌면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현장 실습의 과정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기업에서 신입사원보다 경력직을 더 뽑고 싶어 하는 것처럼, 해내야 할 일을 아는 사람을 고용하는 게 기업으로서는 조금은 쉬운 길일 것이다. 취업을 목표로 운영되는 고등학교의 졸업반 학생들이 기업의 현장을 보고 배우는 게 맞는 일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현장 실습이란 과정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바탕이 되어야 할 환경이 있다. 강압적인 업무나 과한 노동시간이 아니라, 선배들의 폭언과 폭행이 아니라, 제대로 일을 가르쳐주고 작업 환경의 안전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현장 실습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 빠진 상태로 일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계속되어 온 것이다.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을 규명하며 애도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의도로 기획된 이 책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그 죽음들과 그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가족의 슬픔, 반복되는 사고와 죽음에 사회가 준비하지 못한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특성화고에 진학하고자 결정한 이들의 몰랐던 진심을 들려준다. 동준이의 꿈은 프로그래머다. 특성화고에 진학해서 그 꿈을 이루고자 했다. 컴퓨터 프로그램 기술을 배우고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3학년 졸업반이 되어 나가게 된 현장 실습은 동준이의 꿈과 관계가 없었다. 대기업의 육가공 공장에서 일하던 동준이가 현장 실습을 통해 프로그래머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인간의 잔인함과 세상의 불공정을 배우지 않았을까? 현장에서 사고로 죽거나 현장 실습의 고통으로 목숨을 끊은 아이들의 가족에게 회사가 처리하는 방식도 너무 닮아서 놀랐다. 산업재해가 아니라 아이의 잘못인 것처럼, 회사 내부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니 발설하지 말라고, 적당한 합의금으로 마무리하는 게 좋은 거라는 식의 회유와 협박. 어린 노동자를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게 익숙한 그들의 방식으로 이 아이들의 죽음을 정리했다. 아이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세상과 회사에 분노를 키워야만 했던 가족들의 마음은 어디서 치유 받을 수 있을까? 아이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남은 가족의 마음은 겨우 버티듯이 시간이 흐르고, 세상에 남은 부모는 그 아이를 생각하면서 오늘을 살아간다. 그들의 아이가, 오늘도 어디선가 현장실습이라는 이름으로 위험에 노출된 이들의 노동 환경을 바꿔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남겨진 일기를 바탕으로 엮은 동준이의 일상과 동준이를 기억하는 엄마의 회상에, 여러 분야의 관련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실어놓은 이 책이 노동자의 인권과 근로 환경, 특성화고 학생들의 현장실습의 역할을 변화시켜주길 바란다. 한번 일어난 산업재해가 더는 같은 원인으로 생기지 않기를, 이 아이들의 죽음이 말하는 이유와 의미를 잊지 말기를, 무엇보다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고자 했던 한 젊은이의 꿈이 사라진 슬픔을 기억하길 바란다. 이 아이들은 바로 나이고, 나의 가족이고, 꿈을 꾸며 살아가고 싶었던 한 사람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내가 아주 잘 아는 아이의 죽음이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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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의 일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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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개, 언제나, 모든 일이 지나간 후에 다시 되짚으며 그날을 떠올린다.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고 후회하며,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게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직접 나서야 하고, 행동해야 하며, 때로는 위험도 무릅써야 한다.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면 더욱 간절히 그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래야 끝난다. 뭐든.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41-42)

 

성경의 어느 구절로 시작하는 이 소설이 어떤 흐름으로 이어질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작가의 전작을 생각하면 또 한 번 강렬한 느낌일 거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시대를 건너 21세기의 이야기를 듣게 되니 좀 놀라웠다. 처음 듣는 성경 구절이 만들어낼 이야기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 더 긴장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수아에게는 SNS 셀럽인 동생 리아(개명 전 이름은 경아다)가 있다. 일명 ‘봉사녀’라는 별명으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많은 봉사활동으로 그 이미지가 굳어졌다. 언니보다 예쁘고 날씬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어느 날부터인가 봉사의 대표적인 이미지인 리아가 치르는 유명세는 톡톡했다. 그러던 중 수아에게 걸려온 경찰의 전화는 동생 리아의 죽음 소식이었다. 리아의 사망은 자살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생각한다. 리아가 자살을 할 사람인지를. 뭔가 자꾸 어긋나듯 리아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장례식장에서 경찰에게 건네받은 리아의 휴대폰. 수아는 리아의 휴대폰 속 세상을 하나하나 꺼내 보며 미처 몰랐던 리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현재 상황의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시작한다.

 

‘경아’ 자살한 거 아닙니다.

 

동생의 SNS 다이렉트 메시지로 온 한 문장은 고요했던 수아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녀는 시간이 없다. 임용고시 통과를 위해 현재의 모든 시간과 인생을 걸었다. 그것만이 그녀가 그동안 겪어온 감정의 상처를 이겨내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런 와중에 리아의 죽음까지 파헤쳐야 하는 돌발 상황이 생겼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그녀는 고시원의 한구석에서 이어가는 시험공부와 리아의 사망 사건을 파헤친다.

 

소설은 두 자매의 과거 시간과 현재 수아가 찾아내야 하는 리아의 시간을 들려준다. 연년생 자매의 성장기, 성격과 취향까지 달라서 티격태격했던 시간, 주변 사람들의 비교 아닌 비교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이었다. 공부를 잘했던 수아, 공부는 못했지만 봉사와 예쁜 외모로 언니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리아. 언니를 걱정하지만 언니의 말 한 마디에 그대로 상처받는 동생, 동생에게 쏟아진 부모의 관심에 외면당했던 언니. 차근차근 돌이키다 보니 알게 모르게 두 자매 사이에는 벽이 생기고 있었던 것 같다. 동생의 염려를 귀찮아하면서 보낸 언니의 답장, 묘하게 생긴 거리로 마음의 말들을 언니에게 할 수 없었던 동생.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이 그 거리를 좁혀줄 수 있을까?

 

리아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수아는 진짜 범인을 향한 복수를 계획한다. 중간에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로 리아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게 했다. 그걸로 됐다. 그녀도 리아도 이제 자기만의 일상으로 돌아가, 서로를 염려하면서도 거리를 만들었던 그때는 잊은 채로 살아가겠지.

 

성경 속의 자매 마리아와 마리다. 어느 날 예수가 그 자매의 집에 방문했는데, 언니인 마르타가 예수와 다른 손님들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할 동안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 앞에 앉아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는 이야기. 마르타가 마리아에게 이리 와서 언니의 일을 도와달라고 했더니 예수는 오히려 마르타를 나무라며, 마리아가 지금 하는 일이 마르타 당신의 일보다 덜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다(130페이지)는 내용이 어떤 식으로 해석되는지에 따라 자매의 입장과 마음이 다르게 보일 것 같다. 예수의 옆에서 그의 말을 경청하는 게 진정한 받듦인지, 아무리 자매여도 그 사람의 그릇이 다르므로 마르타와 마리아의 일이 다르다는 걸 나무라는 것인지, 아니면 동생 마리아를 질투하면서 불러내지 말라는 이야기인지... 수아가 받아들이는 성경 구절의 의미는 부정적이었다. 신데렐라의, 콩쥐의, 마리아의 자매는 나쁜 사람으로 기록된다고. 선하고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는 악하고 게으르고 시샘이 많은 자매가 있다고 말이다. 이 소설은 그런 성경 구절의 의미를 비튼 것처럼, 조금 다른 의미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선하고 지혜로운 여자가 세상의 가십과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기 쉽다는, 보이는 것 이면의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면서 사회의 약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생의 죽음을 파헤치면서 알게 되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낯설면서도 안타깝게 들린다. 언젠가 수아가 했을 말에 상처받았음에도 수아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만 기억한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고 사회적인 이미지를 쌓으며 나름 유명한 사람이 되어있던 동생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동생의 죽음의 실체에 한발씩 다가갈 때마다, 혹시 자기가 동생에 관해 착각하고 오해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한다. 외면받고 비교당하던 입장에서 마르타라고 생각했던 수아의 마음이 변한다. 그동안 못 봤던 리아의 시간을 보게 되면서 알게 된다. 마리아와 마리타는 너무 다른 자매의 모습이 아니라, 그저 서로를 아끼고 염려하며 사랑하는 자매였다는 것을. 두 자매를 보면서 비교하고 많은 말을 쏟아냈던 사람들 때문에 생긴 착각을 하나씩 정리해간다. 소설 속에서 수아에게 리아의 죽음을 직접 전달한 ‘익명’의 말이 내내 걸렸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수의 옆에서 경청하던 제자들과 사람들은 남자였고 그 안에 마리아가 있었다는 게 어떻게 보였을지, 성경을 기록한 사람 역시 남자였다는 것에서 마리아와 마리타의 모습에 부정적인 시선의 해석이 있었다는 것을. 사랑받는다고 믿었던 모습 뒤에 있던 악몽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왜 비교 없는 삶은 없을까? 나부터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비교하는 게 익숙하다. 누구는 이랬는데 누구는 저랬다고, 사소한 것 하나에서부터 비교하는 삶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 남들보다 먼저, 많이, 크게, 좋은 거... 도대체 누구를 위한 비교인가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바라는 행복하고 선한 삶으로 걸어갈 수 있을까?

 

마치 추리소설처럼 리아의 죽음을 밝혀가는 수아의 준비와 행동이 긴장감을 만든다. 그 사이사이 수아의 일상과 부모님의 몇 마디, ‘익명’으로 등장한 남자의 심리 파악하기, SNS 메시지가 밝혀낼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묻고 싶을 때마다 온라인 속이 아닌 현실에서 답을 찾아내는 수아의 추리력은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 같은 면모도 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던 그 진실에서 하나씩 꺼내어가는, 우리가 보고도 못 본척했던 많은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오른다. 살아가는 어느 순간 또 위기가 찾아오겠지만, 마침내 답을 찾은 수아의 내일이 조금은 달라질 것을 믿는다. 동생의 죽음으로 찾아낸, 비극을 이겨내는 법을 알았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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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 시즌 1
이홍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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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22살에 결혼하고 25살에 이혼녀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고, 겨우 3년 살고 이혼할 거 그렇게 요란하게 결혼했느냐고 사람들 입에 올랐다. 여러 가지 이유로 독립할 수 없던 친구는 이혼 후 친정에 와서 지냈다. 밖에 거의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만 지냈고, 혹시라도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어두워진 후에 나갔다. 어느 날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근처 마트에 가는데 차를 가지고 가자고 하더라. 왜? 걸어서 5분이면 가는 거리를? 그때 친구의 말을 듣고 많이 놀랐다. 혹시 자기가 지나가면 저기 누구네 첫째 딸 지나간다고, 이혼하고 와서 친정에서 지낸다고 수군거릴까봐 아예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 무슨 피해의식인지,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왜 그런가 싶었다.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는지 다른 사람들 말에 신경 쓰고 살지 않아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세월이 흐른 후에 알았다. 사람들은 자기와 상관없는 남의 일에 참 관심이 많고, 남의 사정 다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이야기 하는 거 좋아한다. 특히 여자의 이혼에 주홍글씨를 새긴다. 여자라서 받는 차별에 이혼이라는 차별을 더한다.

 

이혼이 무슨 범죄인가? 그 사람의 이혼이 자기에게 무슨 피해를 줬나? 평소에 이혼제도를 환영하던 나는 이혼이라는 화두에 차별을 두는 이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인스타그램에서 인기였던 이야기가 단행본으로 나왔다기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공감했는지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었다. 그림으로 보여주는 이혼녀들의 고통과 상처가 몇 컷의 만화로 다 전달될 수 없겠지만, 이 몇 컷의 만화가 보여주는 효과는 컸다. 주인공 '이홍녀'가 들려주는 이혼 후의 일들이 생생하게 들려와서 마치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우리 가족에게도 있는 '이혼'이라는 이력을 보편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가까이서 듣는 기분이다.

 

 

스마트폰 앱 디자이너 이홍녀는 1년 전 이혼했다. 다시 일을 찾기까지 쉽지 않았지만, 일에 서투르거나 부족함 없이 열심이었다. 하지만 이혼 후 그녀의 일상은 이혼 전과 달랐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받는 차별에 이혼으로 받는 차별까지 더해졌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둘이 되었는데,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어서 혼자인 삶을 택했다는 게 차별받아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이혼 후 집안은 썰렁하다. 결혼 이후의 일상을 생각하면서 산 혼수들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렇게 차지한 자리만큼의 냉기를 뿜는다. 식구가 늘어날 것으로 여겨 마련한 커다란 아파트, 대용량 냉장고, 6인용 소파. 대식구를 기준으로 마련한 집안의 온갖 것들에 이홍녀는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다. 가족들의 대소사에서도 이혼을 숨겨야 하거나 사람들 앞에 함께 나타나지 않게 한다. 여동생의 상견례에 아직 싱글인 언니로 소개되거나, 여동생의 결혼식에 바쁘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못하는 언니가 되어야 했거나. 가족들에게 큰딸의 이혼은 감춰야 할 비밀이 된 거다. 어디 그것뿐인가. 회사의 동료들은 그녀에게 저급한 농담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갔다 온 사람'에게 이 정도의 농담(?)도 못 하냐는 식으로 받아친다. 친구는 또 어떻고. 마치 그녀를 위한다는 식으로 돌싱은 돌싱끼리 만나야 편하다면서 원하지도 않는 소개팅 자리를 주선한다.

 

왜 이혼한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바라보는 세상의 방식을 강요하려 하는지 궁금하다. 결혼이나 이혼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선택이며 행복의 기준이고 방식이 된다. 아이가 한 명이거나 여러 명이거나 하는 것처럼, 그 개인과 가정의 다른 사정일 뿐이다. 그런데 왜 개인의 삶이 깊이 들어오려고 하면서 남의 인생을 설계해주려고 하느냔 말이다.

 

 

이홍녀는 퇴근 후 혼자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자주 가던 술집의 직원은 그녀에게 주문하지 않은 메뉴를 건네면서 거리를 좁힌다. 연하남이다. 군더더기 같은 많은 말 없이 조용히 그녀에게 건네는 위로 같았다.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고 호감을 키워가면서 그녀는 고민에 빠진다. 자기의 이혼 사실을 언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상대에게 솔직하고 진지하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 정확한 자기 입장을 말해야 했겠지. 왜 이렇게 아프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를 만나면서 호구 조사를 하고 경제력을 묻기도 하면서 불편했던 기억, 없는가? 나는 이런 거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데 드러내야 하고, 설명하기 애매한데 상대를 이해시켜야 하는 일들. 왜 한 사람으로 봐주지 않고 내 뒤에 있는 것들을 먼저 밝혀야 하는 게 되어버렸는지... 솔직히 아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누군가를 만나면서 좀 더 진지한 미래를 바라보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 하나만을 보는 건 아니니까. 혹시 내가 만들고 싶은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가 없을지 찾아보고 계산해보고 싶은 걸 안다. 하지만 한 개인의 아픔일 수도 있고, 행복을 설계하는 미래일 수도 있는 이혼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는 조건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답답해지기도 한다.

 

 

28살에 다시 결혼을 생각하던 친구는 지금의 남편에게 말했다고 한다. 자기는 한번 이혼한 적이 있으며, 이 사실을 숨기고 결혼하고 싶지는 않다고. 당시 친구의 남편은 초혼이었으니까 당연히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면서 생각해볼 시간을 주었단다. 당신이 이런 나와 결혼해도 좋을 것 같으면 그때 다시 결혼을 이야기하자고. 기꺼이 친구를 선택한 그는, 한 사람을 보는데 그 사람이 이혼했다고 해서 그동안 봐왔던 그 사람의 인격이 변하지는 않았다고, 그러니 이 여자와 결혼하는데 이혼했다는 사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여럿이 모여 있을 때 이 이야기를 듣는데, 그 친구 남편이 참 선하게 보이기까지 하더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명예나 돈이나 다른 것들이 최우선의 기준이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데 무엇보다 인간적인 모습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걸 다시 배운 것 같았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차별을 경험하며 산다. 싫다고 말하지 못해서 참고 견디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왜 참는지 생각해보면, 참고 있던 그 순간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막상 참아 보니 그 순간보다 더 나은 내일은 없었다. 이홍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이니까, 이혼했으니까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더는 없어야 했다. 이제는 혼자 걸어야 하는 길에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싫은 건 싫다고 말하면서,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걷고 싶으니까. 이홍녀도 우리도, 그동안 끌려가던 삶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인생으로 쓰기 위해 고민한다.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말이다. 혼자여도 충분히 괜찮고, 누구나 자기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응원을 보내는 이야기에 괜히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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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9-09-23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이 웹툰을 인스타에서 봤어요. 연하남이랑 헤어지는 부분까지 봤는데 정말 허탈했어요. 우리는 언제쯤 편견이나 왜곡없이 세상을, 사람들을, 현상을 볼 수 있을까요?

구단씨 2019-09-24 22:09   좋아요 0 | URL
주인공이 연하남과 헤어진 이유가, 단지 이혼했었다는 이유 한가지뿐일까 싶었어요.
어쩌면 연하남은 처음부터 주인공과 진지한 만남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어쨌거나, 말씀하신 그 편견이나 왜곡 없는 세상을 만나는 건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하네요.
안타깝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