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아니, 증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존재 자체로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러지 못한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쩌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비상식과 불평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꼭 편지 같다. 친애하는 당신에게 하고 나는 말할 테다. 이름 없는 당신에게라고. 이름을 붙이면 ‘당신’을 실제 세계에 연루시키게 될 텐데, 그러면 훨씬 더 위험해지고, 훨씬 더 부담이 커진다. 저 바깥 세상에, 당신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그 누가 알겠는가. 당신, 옛날의 고리타분한 사랑 노래들처럼 그냥 당신이라고 부르련다. 당신은 꼭 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당신은 수천 명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건 아니다, 나는 당신에게 말하겠다.

당신이 내 말을 들을 수 있다고 가정하련다.

하지만 소용없다. 당신은 듣지 못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시녀이야기, 72페이지)

 

21세기 어느 날의 미국. 지구는 전쟁과 환경오염, 온갖 성질환으로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이런 불행의 시대를 누군가는 권력을 잡는 기회로 만든다. 대통령은 사라졌다. 국회는 해산됐다.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한 전체주의 ‘길리아드’가 일어났고, 국민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했다. 특히 여성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으면서 체계화하여 관리했다. 통제하고 착취했다. 평화롭게 살던 여성 오브프레드는 갑자기 이름도, 가족도,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리고 사령관의 ‘시녀’가 되어 감시당하고 살아가면서, 사령관의 아이를 임신하도록 강요당한다. 그게 ‘시녀’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존재 이유였다. 평범하게 자유를 누리며 국가의 일원으로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던 여성들이 한순간 모든 권리를 빼앗긴 채 한 인간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게, 상상이 되는가? 갑자기 여성의 은행 계좌는 압류되었고, 기혼 여성의 모든 금융자산은 남편에게 귀속되었다. 여성들은 모두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한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한 삶이 시작되었다. 남성에 의해 지배받는 세상이 왔고, 여성의 신분은 몇 가지로 구분되어 관리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통제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가 누구를 소유하고,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해도, 심지어 살인을 해도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던가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구는 앉을 수 있고 누구는 꿇어앉거나 일어서거나 다리를 활짝 벌리고 드러누워야 한다는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진짜 문제는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다 마찬가지라는 말만큼은 절대 내 앞에서 하지 마라. (시녀이야기, 233페이지)

 

읽으면서 착각을 했다. 혹시 신분 계급이 있던 우리나라의 과거 어느 시대, 양반과 천민의 구분으로 인간 차별을 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던 시절이 생각났다. 뭐가 다른지 한참을 찾고 있는데도 답을 알 수 없었다. 오브프레드가 있던 시설의 시스템이 오직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으로만, 그녀들의 자궁만 존재할 뿐이다. 여성을 아이를 낳는 도구로만 여기면서, 통제하고 교육하면서 각 사령관의 집으로 보내는 게 ‘아주머니’들의 역할이었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 따위는 없다. 쾌락의 요소를 철저히 제거한 상태로, 은밀한 욕망이 꽃필 여지도 전혀 없이, ‘시녀’들은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한, 오직 남자들의 종족 번식을 위해 존재하며 삶을 멈췄다. 시녀들은 원래 이름을 빼앗겼다. 그녀들이 배속된 가정의 남성 이름을 따 '오브000'으로 불린다. 오브프레드, 오브글렌… 처럼, 프레드의 시녀, 글렌의 시녀.

 

21세기의 대한민국은 계급이 없을까? 여성과 남성의 차별이 없을까? 오브프레드의 시대와 다르지 않을까? 소설은 2195년의 어느 날 열린 심포지엄에서 길리어드 시대에 ‘시녀’였던 어느 여성의 녹음을 들려준다. 그 여성이 오브프레드라고 추정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역사의 기록쯤으로 여기면서도 확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불분명한 출처의 기록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불임이 여성의 탓은 아니면서도, 불임의 여성을 다른 여성의 자궁으로 대신한다. 환경오염이나 성병, 핵전쟁으로 세상이 물든 게 여성의 탓인가?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 세상은 불임의 원인을 여성에서 찾고, 여권 신장에서 불안을 느끼며 성경에 바탕을 둔 세상을 만든다. 아이를 낳는 도구로 만든 ‘시녀’를 사령관의 집에 보내고, 기한 안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유배지로 보내서 핵폐기물을 치우는 인생을 만든다. 그러다가 시름시름 앓으면서 죽어가겠지.

 

오직 출산의 도구로 존재하는 여성의 삶이 과거의 어느 시대의 기록이라는 전달은 끔찍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아이를 갖기 위한 성행위에 세 명이 등장한다는 거다. 사령관과 시녀와 사령관의 아내는 아이를 잉태하려는 행위에 같이 참여한다. 불임인 사령관의 아내는 시녀의 뒤에서 단단한 벽처럼 자리하고, 시녀는 사령관과 마주하며 성행위를 한다. 감정은 없다. 쾌락도 없다. 오직 아이를 만들기 위한 의식으로 여긴다. 웃긴 것은, 계급의 위에 있는 이들은 시녀나 다른 이들을 무시한다. 그들의 일상을 위해 존재하는 여러 가지 도구 중의 하나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아이 문제에서만큼은 시녀의 자궁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남편의 아이를 갖기를 원하면서도 남편의 내연녀를 보는 듯한 시선을 던진다.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해도 아무렇지 않은 존재로 말이다. 사령관의 아내는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에 필요한 도구(?)를 들이면서도, 그 도구를 존중할 마음은 전혀 없다. 사령관도 마찬가지. 그의 유희를 위한, 과거의 어느 시절에 성행했지만 지금은 금지된 것들을 은밀하게 즐기기 위한 파트너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출산 과정 역시 기가 막힌다. 마치 대리모의 출산에 참여하듯,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자세를 취하며 출산의 고통에 동참한다. 진짜로 출산하는 것처럼. 자기 것이 아니면서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온전히 자기 인생의 한 장면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들의 이기적인 세상에 희생되는 많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고민한 결과로 소설은 에필로그에서 독자에게 그 과정을 이해시킨다. 한 여성의 목소리로, 그 시대의 진실인지 아닌지 모를 이야기로, 그러나 의심의 여지 없이 진실로 믿고 싶은 역사로 말이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누군가 만든 체제가 운영되고 있을 뿐인 세상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오브프레드가 남긴 목소리는 간절하다.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누군가는 들어줄 거로 믿고 남긴 이야기다. 목숨이 위태로운 그 순간에도 이렇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 지금 이후로의 여성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저자의 말처럼, ‘여성의 삶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으면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고 했다. 그걸 증명하는 게 이 소설의 결말이기도 하다. ‘길리어드’가 무너지고 당시의 자료들은 폐기된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삶과 고통은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길리어드’ 시대의 숨기고 싶은 폭력은,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듯이. 이런 비슷한 장면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은가?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을 상담하던 의사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김지영의 상황과 상태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이해해주면서도, 아이 때문에 선택한 자기 아내의 경력 단절을 아파하면서도, 의사는 다짐한다. 임신 때문에 그만두는 여직원의 후임은 미혼으로 구해야겠다고. 그래서 우리는 반복해야 한다. 계속 말해야 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더는 불합리와 불평등으로 고통 받는 여성의 삶을 이어갈 수는 없으니까. 우리 인생이 암흑이 아닌 빛으로 남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오래전에 샀는데도 미루기만 했던 이야기를 드디어 읽어냈다. 혹시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뭇거리던 소설을 그래픽 노블 출간 때문에 핑계 삼아 같이 읽게 된 거다. 이미 영화나 발레, 오페라로 보여줬던 이야기는 아마 몇 번을 다시 봐도 충격일 듯하다.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기에 몇몇 장면을 찾아봤다. 생각보다 소설의 장면들을 잘 담아놓았다는 느낌에, 언젠가는 드라마로도 만나고 싶어졌다. 피를 보는 것 같은 빨간 드레스, 그와 상반된 하얀 두건은 누구도 그녀들을 침범할(볼) 수 없다는 분위기다. 그녀들의 시선은 오직 드레스에 감춰진 채로 보이지 않는 발끝의 어느 부분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인간이되 인간다움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어디서 이런 설정이 등장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몇 페이지 넘기지 않고서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1985년에 써졌다는 이 소설은 21세기를 통과하는 지금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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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18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픽노블의 그림이 제가 책 읽으며 떠올렸던 바로 그 장면이라 놀랐어요. 같은 책을 읽은 것일테니 당연한거겠지만요. 그림이 참 사실적이네요.

구단씨 2020-03-18 14:04   좋아요 0 | URL
잔인하면서도 놀랍고, 굉장히 기억에 많이 남는 장면이었거든요.
한 사람의 존재감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이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사두고 뒤늦게 읽었다가 충격이었습니다...
 
조용한 아내
A.S.A. 해리슨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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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조디는 남편의 바람을 알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다고 표시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남편 토드 역시 아내가 자기의 바람을 알고 있다는 걸 인지한다. 그렇다고 바람을 멈추지도 않는다. 그저 각자의 어떤 생각 때문인지 현재의 상태를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냥 지금 이대로 흘러가게 놔둘 뿐이다. 조디가 바라는 건 현재의 평온한 삶이고, 토드 역시 조디의 평온을 망치지만 않으면 이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으니 나쁠 게 없다. 하지만 평온은 오래 가지 않았다. 토드의 바람이 조디의 평온을 깨트리는 순간이 왔다. 조디가 간절히 바라던 안정적인 삶이 더는 계속될 수 없게 되었다. 무난히 흘러가기만 한다면, 조용히 이 삶이 유지되기만 한다면 더는 바랄 게 없던 조디는 이제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야만 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설은 아내 조디와 남편 토드의 시선을 교차로 보여준다. 같은 상황 다른 느낌. 우리가 언제나 경계하고 들어야 할 상대의 마음이 아닐까 싶은 진심을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아내인 조디가 바라보는 가정의 모습과 남편인 토드가 유지하는 가정 안에서 개인의 삶이 하나인 듯 아닌 듯 애매하다. 이렇게 유지하는 게 부부의 삶일까? 우리가 아는 가족, 가정이란 게 이런 모습이 맞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처음 조디와 토드의 마음이 하나씩 비출 때마다 의아하면서도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누구나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건 아니니까. 각자가 바라는 최선의 선택이 다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정상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부르는 부부의 모습이 꼭 한 가지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바라보면 조디와 토드의 관계가 틀린 것은 아니다. 이대로 유지만 된다면 굳이 나쁜 결말도 아닌 채로, 그들의 진심은 누구나 들을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부부의 모습으로 그들의 관계를 끝까지 보여줄 수 있었으리라.

 

조디는 왜 토드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화내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을까? 이 부분이 정말 궁금했다.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누군가의 모습, 특히 나를 기만하고 부부의 약속을 배신하는 행위를 한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하지만 조디가 토드를 바라보는 시선은 약간 달랐나 보다.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심리상담사인 조디는 토드를 좀 더 전문가의 시선으로 봐왔던 듯하다. 토드는 현재 자기에게 닥친 문제를 있는 그대로, 혹은 심각한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축소하여 생각하곤 했다. 어머니와 자기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편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특히 자기 어머니에 관해 애착이 심했다. 그래서일까, 보이는 모든 여성에게 성적 욕망을 가진다. 실제 자기의 모습과 상태보다 과장해서 스스로 판단하는 토드의 어리석음과 그런 토드를 바라보는 조디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묘사된다. 그렇게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 특히 토드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서 완벽하다고 생각할 텐데, 정작 거짓말을 하는 당사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웃기고 황당한 상황 같은 거 말이다. 그에 반해 조디의 침묵 역시 궁금했다. 조디는 단지 평온한 일상 한 가지 때문에 토드의 행동을 모른 척하면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일까? 어떤 마음이어야 그런 대응이 가능할까? 이상하게도, 읽으면서 조디의 태도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토드의 배신으로 변한 조디가 오히려 편하게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한 여자의 심경 변화에 공감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바라는 삶이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가 바라는 방향으로 삶이 흐르기를 바란다. 침묵을 깨기로 한 조디의 선택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말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던 아내가 칼을 들고 상대를 겨누기 시작한다. 왜? 이 끔찍한 배신은 더는 참을 수 없는 게 인간이니까. 그동안 참아주고 침묵했던 조디의 노력을 깡그리 무시한 토드의 행동이 더는 그 참을성과 침묵을 유지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준다. 그때부터 조디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든다. 어떻게? 역시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동안 해왔던 대로, 조용하고 간결하게, 의외의 타이밍에 완벽한 결과를 얻기까지 하는 운까지 따라주는 행운의 여신으로 변신한다.

 

분노의 방식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궁금증으로 끝까지 읽게 되는 소설이다. 물론 조용히 참는 아내와 그런 아내의 진실을 알면서도 무시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진행하는 남편의 배신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싶은 호기심에서, 결국 터져버릴 게 터지고 나니 이제는 이 싸움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하는 시선으로 지켜보게 된다. 인과응보처럼 배신의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20년을 한집에서 따로 인생을 살아왔던 두 사람의 모습으로 계속 가게 될 것인가 하는 결말을 보고 싶어서. 그리고 여전히 선택에 관한 고민은 계속된다. 나는 조디처럼 평온을 위해 배우자의 배신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배신을 알게 된 순간 바로 드러내서 해결을 보고 싶을까. 어쨌든, 적어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토드를 응원한 적도, 토드의 바람을 이해한 적도 없다. 서로 합의하고 유지하는 관계를 일방적으로 깨트린 그를, 그런데도 일말의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가 맞이하게 될 결말만이 궁금했을 뿐이다.

 

읽는 내내 조디의 심리를 따라가게 되는데, 예상하지 못한 순간을 맞이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감정 변화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고 싶은데 어렵고, 결국 더는 내가 잃을 게 없다고 여기게 되는 순간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그게 꼭 인생의 정답은 아니겠지만,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만 문제가 끝나는 운명이니까. 어렵게 침묵을 깨고 부딪치는 일상의 벽에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 궁금하다. 잔잔하게 시작되었다가, 커다란 해일을 일으키는 이야기였다가, 밀실 추리소설처럼 한 사람만이 알게 되는 긴장된 결말로 보이는 다양성까지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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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악센트
마쓰우라 야타로 지음, 서라미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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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본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눈에 봐서는 보이지 않는, 숨어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멋진 것이나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발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눈을 돌리고 싶은 거나 아름답지 않은 수많은 것 안에도 어딘가에 반짝이는 빛이 깃들어 있다. 나는 그런 믿음으로, 선입관에 얽매이지 않고 결코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128~129페이지)

 

매일 보던,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장면들에서 찾아오는 어떤 느낌이 있다. 때로 그런 느낌들은 삶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고, 생각의 변화를 만들기도 한다. 오늘을 바라보는 작은 지침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렇게 일상을 채우는,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되는 순간들은 예고 없이 무심한 듯 찾아온다는 거다. 계획하지 않았던 순간에, 무심코 바라보던 작은 꽃잎 하나에서 일상의 생각들이 피어나는 일들. 낯설지 않은 경험이지 않은가? 저자가 조그맣게 얘기하듯 들려주는 일상의 단편들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어제의 경험과 오늘의 시선이 만들어낸, 인생의 작은 지침들이 쌓이는 순간을 만든다.

 

처음 만난 작가다. 그렇다고 낯설거나 어색하지도 않다. 오히려 친근한 말투에,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건네듯 말하는 문장들이 여자들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수다를 떠는 기분에 가깝다. (실제로 저자가 여성인 줄 알았다가 남성인 것을 확인하고 ‘깜놀’했다는 건 안 비밀) 수다를 떤다고 하면 시간 낭비하는 것으로 여기기 쉬운데, 오히려 이 짧은 글들 속에서 인생의 작은 지침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만날 수 있으면 만나고 싶다.”는 말을 좋아한다.

무척 근사한 말이다. 직접적으로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부끄러우니 한 번 에두른다고 할까. 조금 물러나서 “혹시 만날 수 있으면 꼭 만나자.”라는 마음을 담아 쓰는 말이다.

(중략)

그런데 이 말의 본질은 “당신이 좋으니 만나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어떤가? 그런 식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연애 감정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좋아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92~93페이지)

 

그 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마음이 달라질 것이다. 좋게 생각하면 좋은 기억으로, 나쁘게 생각하면 나쁜 기억으로. 하지만 좋은 느낌이 계속 전달되기를 바라는 건 나뿐이 아닐 터. 저자의 저 문장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묻는다. 만날 수 있으면 만나고 싶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투자해야 한다. 시간, 마음, 비용 그 이상의 여러 가지. 때로는 물리적인 이유로 만남을 거절해야 하기도 하고, 마음과는 다르게 만남을 성사해야 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은근 따라오는 스트레스로 그 대상을 떠올리면 괜한 미움까지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저자는 그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고 보듬어 안는다. 내가 좋으니 만나고 싶다는 의미로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그러네. 내가 싫으면 아무리 일 때문에 만난다고 해도 얼굴에서 표가 날 텐데.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자 한다면, 귀찮거나 불필요하다는 생각보다 만나자는 그 마음을 먼저 생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저자의 말을 들을수록 생기는 의문이 있다. 왜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기 일쑤일까. 뻔한 답일 것 같지만, 아마도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도 그걸 받아들이는 마음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부정의 시선으로 보면 한없이 부정적이다. 저자처럼 긍정의 시선으로 보니 세상 모든 것이 차례대로 진행되는 어떤 일처럼 차근차근 흐르는 느낌이다. 작가의 사인본에, 직접 인쇄된 서명의 편지지에 어린아이처럼 기뻐한다. 어떤 값어치의 계산보다 그 선물에 담긴 마음이 먼저 보였기에 그 기쁨을 아는 것이다. 이 선물을 주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을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편지지가 되었으니,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 정도였다는 걸 알게 된 감동 같은 거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감동을 발견한다. 발견하는 것은 감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어떤 시선들을 알아챌 때마다 감동한다. 어떻게 해야 이런 마음으로 일상을 지낼 수 있지? 솔직히 말하면,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상황이나 생각을 먼저 떠올리는 나 같은 사람은 저자의 한없는 긍정과 감동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 긍정의 에너지를 받아 나도 조금은 착하고 좋은 생각을 먼저 하면서 살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를 품어본다. 긍정적인 생각부터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건만, 평소의 습관으로 보면 쉽게 바뀌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기대를 하게 된다. 그만큼 저자의 문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좋은 기운’이 있어서다.

 

이 책으로 나를 만들어가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단조로운 일상에 순간순간 스미는 시선이 어떻게 하루를 변화시키고 삶 전체를 달라지게 할지 궁금해서다. 저자의 모든 것을 그대로 흡수하기는 어렵겠지만, 저자가 보여준 그의 삶의 바탕이 어떻게 일상을 흐르게 하는지 그대로 보여서 무시할 수 없었다. 나 스스로 거는 긍정의 주문이 그동안 내 안에 자리했던 부정의 힘을 밀어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분명하게 삶의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뜻 내 안으로 들이기 싫었던 투정을, 이제는 좀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 반성에 의미를 두고 싶은 글이다. 저자가 말하는 그 경험에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믿는다. 자기가 쌓은 경험만큼 인생을 만드는 건 없다. 이미 알고 있었고, 누군가가 보여준 검증의 순간도 봤다. 그러니 저자의 긍정에너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저자를 통해 일상이 무기력하지 않게, 매 순간 힘을 내게 하는 방법을 더 잘 듣고 싶어진다.

 

무슨 일이든 저마다 ‘알맞게 무르익은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만 맛볼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과 아름다움. 그 순간에 이르러야만 만날 수 있는 뛰어난 품질을 바쁘다는 이유로 멀리하면 안 된다. 결코 안 된다. (중략) ‘알맞게 무르익은 순간’이란 ‘즐거운 순간’이다. 좋은 것보다는 즐거운 것이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고 나는 믿는다. (156페이지)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2년이나 살았다면 당신만 아는 로마의 진면목이나 에피소드가 넘쳐날 텐데 왜 그런 것들을 쓰지 않느냐고. 당신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 마음을 열지 않는 한 무엇을 써도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다고.

글쓰기는 괴로운 일이다. 괴로워도 쓰고 싶은 것이 글이다. (38페이지)

 

여행지에서 단골 식당을 만들고, 신발 장인에게 마지막 선물을 받기도 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A 씨를 만나는, 일주일을 준비하려고 일요일마다 셔츠를 다리는 일들. 누군가는 듣고 웃을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는 한없이 진지하고 중요한 일상의 단편들이다. 그런 조각들이 모여 채우는 하루가 인생이 되어간다. 그런 소박함이 우리 삶 곳곳에 있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그게 행복이 아니면 뭐가 행복이란 말인가. 저자는 자기의 그 소박한 조각들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느끼는 행복의 다양함을 증명한 셈이다. 읽으면서 저절로 느낀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그 행복의 기회에서 멀어지지 말라는 메시지에, 행복의 크기보다 행복 그 자체에 의미를 둔 문장들에 조용히 긍정의 끄덕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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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미 2020-03-1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저도 사소한 일상의 단상들이라고 여기며 읽기 시작했는데 ... 책을 덮고나니 마치 좋은 스승을 만난 기분이었어요.ㅎ 회사 다닐때 이런 상사가 있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싶고...ㅎㅎ 좋은 어른을 만난다는게 이런 일이구나 싶었답니다. 가볍게 시작한 마음과는 다르게 깊게 남은 책이 되었어요.^^

구단씨 2020-03-18 12:22   좋아요 0 | URL
무슨 문장들이... 삶의 문장들 같은 느낌이었네요. ^^
작가가 남자라는 데서 한번 놀랐는데, 어떻게 보면 여학생의 일기 같은 낙서를 훔쳐본 것도 같고... ㅎㅎ
다정하게 들려오는 그 말들이 좋았어요.

노란장미 2020-03-1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ㅎㅎㅎㅎㅎ 여자인줄 알고 한참 읽다가 어느순간 뉘앙스가 이상한 부분이 나와서 검색해보니 남자분이시더라구요. 진짜 엄청 놀랐어요.ㅎㅎㅎㅎ

구단씨 2020-03-18 12:57   좋아요 0 | URL
저도 모르게 글의 분위기만 보고 선입견을 가졌었나 봐요.
이런 경우 몇 번 있기도 했어요. (특히 에세이 만날 때요. ^^)
 
잠자는 미녀들 1
스티븐 킹.오언 킹 지음, 이은선 외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어떤 감염병이 여성에게만 접근한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마음이 들까? 왠지 여자라는 이유로 공격받는 느낌이 들 것 같다. 그리고 이유가 궁금해지겠지. 왜? 왜 어떤 병이 찾아올 때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것일까? 그 원인을 찾고 싶기도 할 것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어하고 싶어지겠지. 스티븐 킹과 그의 아들 오언 킹이 만들어낸 한 편의 소설은, 인간이 맞이할 수도 있는 끔찍한 상황의 두려움과 인간의 기질을 보여줌과 동시에 잔인한 남성들에게 맞선 여성들의 방어가 얼마나 대단해지는지 보여준다.

 

‘오로라 병’이 전 세계를 뒤흔든다. 여성이 잠이 들면, 그 여성은 고치 같은 물질에 뒤덮여 다시 깨어나지 못한다. 이 병이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미국의 애팔래치아 산맥에 인접한 소도시 둘링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오로라 병으로 고요했던 마을의 일상은 한 번에 흐트러진다. 모두가 긴장한다. 원인도 알 수 없어서 대책이 없다. 사랑하는 여성들이 잠들고, 잠든 후 둘러싸인 물질을 제거하려고 할 때마다 여성들은 폭력적으로 변하고 주변 사람들을 공격하기까지 한다. 처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병했다고 해서 ‘오스트레일리아 수면병’으로 불리다가,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인 오로라의 이름을 따서 ‘오로라 병’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여성이 잠이 들면 거미줄처럼 얽힌 것이 여성의 몸을 덮어버린다. 이런 현상이 전 세계에서 보이고, 번지는 속도에 비하면 치료법이나 대응 방법은 없이 속수무책이다. 그 어떤 병보다 빠르게 번지는데, 현재로서 오로라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여성이 잠들지 않는 것. 잠들지 않으면 이상한 물질이 여성을 감싸지도 않고, 여성이 폭력적으로 변해 공격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언제까지 잠들지 않고 견딜 수 있단 말인가. 하루 이틀, 짧은 시간의 단편적인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해결책은 아니다. 인간은 활동하고, 먹고, 자고 하는 일상에 익숙해진 존재니까.

 

뭔가 익숙하지 않은가? 갑자기 들이닥친 병으로 일상이 마비됐다. 끔찍한 사건 사고들이 빈번해지고, 이 이상한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여들어 병원은 붐빈다. 아직 발병하지 않거나 잠들지 않아서 병을 겪지 않은 여성들은 이 병에 대비하고자 몸부림친다. 잠들지 않기 위한 약이나 드링크를 사려고 약국을 습격하기도 하는 모습들. 오로라 병에 걸린 여성들을 감싼 물질이 병을 전염시킨다는 누군가의 말에 여성들을 불태워 죽이기도 한다.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 장면이 최근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를 위협하는 ‘코로나19’ 상황과 닮았다. 치료제를 개발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현재 닥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대비해야 하는 사람들. 평소에는 흔하게 있어도 필요성을 잘 몰랐던 마스크를 사기 위해 약국 앞에 줄을 서 있고, 비슷한 증상에 혹시 내가 감염된 게 아닐까 싶어 선별진료소에 달려가기도 하는 사람들. 온갖 가짜 뉴스에 혼란은 가중된다.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에 또 다른 것들이 공격하는 듯하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답을 찾아내는 것도 어려운데, 가짜 정보로 그 답을 찾아가는 길은 더 어려워졌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위기에서, 인간을 공포에 밀어 넣는 그 어떤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현재 우리의 상황에 맞춰 일어난 일처럼, 소설은 그 생생함을 더한다. 무엇보다 지금의 위기를 미리 알아챈 것도 아닐 텐데, 이 소설을 구상하면서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의 눈이라도 가졌던 것일까? 상상력으로 시작된 이야기이지만, 이미 상상으로 멈추지 않을 이야기라는 것을 증명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1편은 그 상황의 시작을 보여주고, 집단 발병의 시작과 그 엄청난 공포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주기도 하면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게 한다. 엄청난 몰입을 주는 전개와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 그 갈등 안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욕망은 어디까지일지 궁금하게 한다. 남자와 여자의 성대결이라고 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대조적으로 보이는 모습들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2편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병이 다양하게 진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인간의 적나라한 민낯이 드러날 것 같다. 무엇보다 인간 전체가 아닌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감염병이라는 게 아이러니하고 차별 같지만, 끝까지 지켜보면서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와 가까워지길 바란다. 어쨌든 현재의 대한민국과 전 세계의 위기와 닮은 모습에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이야기다. 스티븐 킹과 그의 아들 오언 킹의 합작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주목받기 쉽겠지만, 이야기의 완성도 역시 뒤지지 않을 듯해서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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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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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할 일이 있어서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지냈다. 여기저기 통화를 하고 틈틈이 문자를 확인하면서 답장을 보냈다. 언어가 없었다면, 언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일상은 어떻게 될까? 인간으로 당연하게 누릴 자유를 억압당하고, 하루에 쓸 수 있는 말을 100단어로 제한당한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 소설 속 여성들의 삶이 마치 언젠가 다른 세대가 겪었던 모습인 것만 같다. 어쩌면 어느 날의 우리가 당하게 될 현실 속 불평등과 불합리 같다. 읽는 내내 손목이 꽉 조일만큼 답답한 가슴의 매클렐런이 된 것만 같았다.

 

 

지금 상황은 이렇다. 우리는 하루에 100단어만 말할 수 있다. 책도 모두 빼앗겼다. 그들은 글자가 있는 모든 것을 책으로 간주했다. 심지어 줄리아 차일드(Julia Child)의 책을 복사한 오래된 원고부터 친구가 장난삼아 결혼 선물로 준 빨간 체크무늬 표지의 낡은 요리책까지, 소니아가 손댈 수 없는 수납장에 갇혀 있다. 분명 내 책들이지만, 나 역시 그 책에 손댈 수 없었다. 패트릭은 마치 운동 기구처럼 수납장 열쇠 외에도 각종 열쇠를 한 덩어리로 묶어 들고 다녔다. (31페이지)

 

여자들은 하루에 100단어만 말할 수 있다. 매클렐런은 결혼한 지 17년 되었고,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다. 남편 패트릭은 좋은 사람이다. 누가 봐도 다정한 가족들이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맞이하는 저녁 식사 자리의 화기애애함이 넘쳐흐른다. 조금 이상한 것 하나만 빼고는. 식탁 위에서 들리는 소리는 남편과 아들들의 목소리뿐이다. 매클렐런과 딸 소니아는 조용히 식사를 할 뿐이다. 하루에 정해진 100단어가 초과하는 순간, 손목에 달린 카운터에 전기 충격이 가해진다. 카운터의 숫자가 하나씩 더 올라갈 때마다 전기 충격의 강도는 높아진다. 손목에는 화상 자국이 생기고, 심한 경우 기절까지 한다. 그 공포를 아는 매클렐런은 카운터의 숫자가 100에 가까워져 왔다는 걸 알고 말을 아낀다. 딸 소니아는 카운터의 기능과 역할을 잘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는 것. 말을 안 할수록 좋다는 것. 그러니 매클렐런 집의 저녁 식탁 분위기가 어떤지 상상이 되지 않는가? 아들 셋과 남편의 목소리는 자유롭고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한다. 시시콜콜, 미주알고주알. 하루 사용할 단어의 차감에 대해 두려움이 없이 말이다.

 

나라는 '순수'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삶을 정의했다. 하나님 아래 남성, 남성 아래 여성. 순수한 인간이란, 순수한 여성이란 남편의 말에 복종하고,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 살림에 몰두해야 하며, 나쁜 말을 쓰지 않고, 사회에 나오지 않으며, 개인적인 교류나 의사를 나누는 것은 차단해야 한다. 오직 가정 안에서, 남편의 말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게 좋은 거다. 나라는 '순수운동'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여성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남편에게 귀속했다. 남편은 국가가 마련해주는 일을 하고 돈을 번다. 국가는 남성의 모든 것을 관리할 자격을 가졌다. 그리고 국가는 남성이 관리하는 여성의 권리도 가졌다. 여성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저 먹고 싸고 자는, 최소한의 생리현상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여성은 침묵을 지키고 복종하는 존재이다. 만약 우리가 배워야 한다면, 집안의 가장인 남편에게 물어본다. 신이 정해준 남성의 지도력에 여성이 의문을 제기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139페이지)

 

이런 생활을 한 번이라도 상상한 적이 없다. 그러니 이런 나라가 될 거라는 상상도 한 적이 없다. 내가 사는 이곳이, 여성에게 하루 단어 100개만 허락한다면,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 하루만 해도, 아니, 1분 사이에 내가 한 말은 100단어가 넘고도 남는다. 무엇이 여성의 말에 제한을 걸게 했으며,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게 하는지 궁금했다. 소설 속에서는 그 근거가 성경이 된다. 성경 말씀을 근거로 여성이 남성의 갈비뼈 하나로 태어난 것을 강조하면서, 남성의 세상 안에서 여성은 그저 아이를 낳는 생산 도구, 그들의 후손을 번식하거나 일상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에서도 성경을 바탕으로 여성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애를 낳는 도구로만 존재 이유를 주었는데, 그놈의 성경이란 참...)

 

왜 이런 세상이 되었는지 생각하다가, 매클렐런의 친구이자 페미니스트인 재키를 떠올리게 된다. 세상의 부당함과 부조리함, 잘못된 정치를 향한 쓴소리,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 정책과 국가의 의도에 반기를 드는 목소리를 멈추지 않는 그녀였다. 주변의 사람들은 둘로 나뉜다. 저 정도가 뭐 어쨌다고, 아니면 우리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내거나. 재키는 후자였다. 그러다가 실종됐다. 아마 국가의 정책에 반항하고 사람들(여성들)을 선동하는 그녀를 제거해야만 했겠지. 그럼 매클렐런은 어떤 여성이었을까? 처음에는 재키의 행동과 말이 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재키와 함께 목소리를 냈다. 그런 활동이 점점 지쳐갈 무렵, 남편의 걱정스러운 한 마디에 집회 참석을 그만둔다. 그리고 세상은 고요해졌다. 권리를 찾으려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모든 여성의 손목에는 카운터가 채워졌고, 하루 100단어의 카운터가 자정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일하던 여성들의 자리는 사라졌고, 여성들의 돈은 남편의 계좌로 이체된다. 여성의 여권은 소멸하였고, 외국으로 여행도 불가능해졌다. 미래의 어느 날, 미국의 모습이다.

 

매클렐런이 목소리를 내고 해동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이유는 딸 소니아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의 사랑 로렌조 때문이기도 하다. 마음대로 이혼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는 세상, 불륜이나 동성애를 저지른 이들에게 가해진 충격적인 형벌의 끔찍함을 알아서다. 무엇보다, 말을 배우고 자기 의견을 말할 줄 알면서 성장해야 할 딸 소니아의 미래가 절망적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소니아는 지금보다 더 억압받는 세상에서, 마치 그런 세상이 당연한 듯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신경과 언어를 연구하는 그녀의 과거 능력이 다시 필요해진 정부가 일시적으로 그녀의 카운터를 해제해주었지만, 그녀는 안다. 이 실험이 끝나면 다시 그녀는 카운터 속에 단어가 갇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끔찍하게도 이 실험의 목적이 그녀가 생각했던 좋은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순간, 더는 참지 못했다. 지금도 부당한 세상, 여성이란 존재에게 생명을 주지 않는 그들만의 낙원을 이제는 끝내야만 했다.

 

목소리를 뺏긴 것뿐이지 않으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소리를 뺏기니 모든 것을 뺏긴 세상이었다.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었다. 무엇이 옳은지 제대로 설명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점점 여성들의 목소리가 아예 사라진,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것이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앞서 만난 같은 주제의 소설들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것만 찾아보려고 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굳이 또 만나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읽다 보니 조금씩 보이는 건, 매클렐런이 지난 이야기를 현재 안에서 하나씩 꺼낼 때마다 등장하는 인물 재키의 말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권리를 주장하고 외쳤다. 틀린 것을 수정하려고 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모이고, 나아가고, 소리쳐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의 삶을 조금씩 파먹으며 묻으려고 하는 국가의 의도를 그녀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싸우다가 목소리를 잃고 삶을 잃었겠지. 소설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재키라는 인물은 어쩌면 이 소설이 존재하기 위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이유, 잘못되어가는 세상을 향한 경고,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 재키가 매클렐런에게 다 하지 못했던 말들은 아마 이런 말들이었을 것이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로렌조가 말했다. 하지만 내 잘못이 맞다. 다만 내 잘못은 목요일에 모건의 계약서가 서명했을 때 시작된 게 아니다. 20년 전에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투표하지 않았을 때부터.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시위에 참여하거나 포스터를 만들거나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 수 없다고 재키에게 수없이 말했었던 그때부터였다. (348페이지)

 

여성의 목소리가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이들. 환상적이지만, 현실의 한구석도 닮아 있어서 겁이 나는 이야기다. 여성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어린 남자애들까지 노동의 현장에 투입된다. 국가가 보장한 미래를 꿈꾸며 따르지만, 국가는 언제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 세상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이 보장한 미래도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이 억압하고 차별하려는 여성은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똑같은 인간일 뿐인데, 왜 여성을 사회에서 밀어내면서 순수 운운하며 존재하지 않는 인간 취급을 하는지. 어쩌면 그건 여성이나, 여성의 존재와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국가가 말하는 대로 세뇌되어가는 남자들이 적응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여자니까, 여자는' 이런 이유로 거부당하는 일상의 면면에 경종을 울린다. 가상의 세상을 말하고 있지만, 가상의 공간에서만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너무 잘 알아서. 그래서 두렵고 어렵고 무서운 이야기다. 인간이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이유를 한 여성의 간절한 목소리로 대신 전한다. 손목에 채워진 카운터의 빈자리, 전기 충격으로 검게 타버린 늘어진 그 손을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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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ooster 2020-03-09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 가득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구단씨 2020-03-16 20:57   좋아요 1 | URL
이 책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내용이 훨씬 좋았어요. 재미도 있었고요. ^^

2020-03-09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9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