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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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할 일이 있어서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지냈다. 여기저기 통화를 하고 틈틈이 문자를 확인하면서 답장을 보냈다. 언어가 없었다면, 언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일상은 어떻게 될까? 인간으로 당연하게 누릴 자유를 억압당하고, 하루에 쓸 수 있는 말을 100단어로 제한당한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 소설 속 여성들의 삶이 마치 언젠가 다른 세대가 겪었던 모습인 것만 같다. 어쩌면 어느 날의 우리가 당하게 될 현실 속 불평등과 불합리 같다. 읽는 내내 손목이 꽉 조일만큼 답답한 가슴의 매클렐런이 된 것만 같았다.

 

 

지금 상황은 이렇다. 우리는 하루에 100단어만 말할 수 있다. 책도 모두 빼앗겼다. 그들은 글자가 있는 모든 것을 책으로 간주했다. 심지어 줄리아 차일드(Julia Child)의 책을 복사한 오래된 원고부터 친구가 장난삼아 결혼 선물로 준 빨간 체크무늬 표지의 낡은 요리책까지, 소니아가 손댈 수 없는 수납장에 갇혀 있다. 분명 내 책들이지만, 나 역시 그 책에 손댈 수 없었다. 패트릭은 마치 운동 기구처럼 수납장 열쇠 외에도 각종 열쇠를 한 덩어리로 묶어 들고 다녔다. (31페이지)

 

여자들은 하루에 100단어만 말할 수 있다. 매클렐런은 결혼한 지 17년 되었고,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다. 남편 패트릭은 좋은 사람이다. 누가 봐도 다정한 가족들이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맞이하는 저녁 식사 자리의 화기애애함이 넘쳐흐른다. 조금 이상한 것 하나만 빼고는. 식탁 위에서 들리는 소리는 남편과 아들들의 목소리뿐이다. 매클렐런과 딸 소니아는 조용히 식사를 할 뿐이다. 하루에 정해진 100단어가 초과하는 순간, 손목에 달린 카운터에 전기 충격이 가해진다. 카운터의 숫자가 하나씩 더 올라갈 때마다 전기 충격의 강도는 높아진다. 손목에는 화상 자국이 생기고, 심한 경우 기절까지 한다. 그 공포를 아는 매클렐런은 카운터의 숫자가 100에 가까워져 왔다는 걸 알고 말을 아낀다. 딸 소니아는 카운터의 기능과 역할을 잘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는 것. 말을 안 할수록 좋다는 것. 그러니 매클렐런 집의 저녁 식탁 분위기가 어떤지 상상이 되지 않는가? 아들 셋과 남편의 목소리는 자유롭고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한다. 시시콜콜, 미주알고주알. 하루 사용할 단어의 차감에 대해 두려움이 없이 말이다.

 

나라는 '순수'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삶을 정의했다. 하나님 아래 남성, 남성 아래 여성. 순수한 인간이란, 순수한 여성이란 남편의 말에 복종하고,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 살림에 몰두해야 하며, 나쁜 말을 쓰지 않고, 사회에 나오지 않으며, 개인적인 교류나 의사를 나누는 것은 차단해야 한다. 오직 가정 안에서, 남편의 말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게 좋은 거다. 나라는 '순수운동'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여성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남편에게 귀속했다. 남편은 국가가 마련해주는 일을 하고 돈을 번다. 국가는 남성의 모든 것을 관리할 자격을 가졌다. 그리고 국가는 남성이 관리하는 여성의 권리도 가졌다. 여성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저 먹고 싸고 자는, 최소한의 생리현상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여성은 침묵을 지키고 복종하는 존재이다. 만약 우리가 배워야 한다면, 집안의 가장인 남편에게 물어본다. 신이 정해준 남성의 지도력에 여성이 의문을 제기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139페이지)

 

이런 생활을 한 번이라도 상상한 적이 없다. 그러니 이런 나라가 될 거라는 상상도 한 적이 없다. 내가 사는 이곳이, 여성에게 하루 단어 100개만 허락한다면,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 하루만 해도, 아니, 1분 사이에 내가 한 말은 100단어가 넘고도 남는다. 무엇이 여성의 말에 제한을 걸게 했으며,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게 하는지 궁금했다. 소설 속에서는 그 근거가 성경이 된다. 성경 말씀을 근거로 여성이 남성의 갈비뼈 하나로 태어난 것을 강조하면서, 남성의 세상 안에서 여성은 그저 아이를 낳는 생산 도구, 그들의 후손을 번식하거나 일상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에서도 성경을 바탕으로 여성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애를 낳는 도구로만 존재 이유를 주었는데, 그놈의 성경이란 참...)

 

왜 이런 세상이 되었는지 생각하다가, 매클렐런의 친구이자 페미니스트인 재키를 떠올리게 된다. 세상의 부당함과 부조리함, 잘못된 정치를 향한 쓴소리,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 정책과 국가의 의도에 반기를 드는 목소리를 멈추지 않는 그녀였다. 주변의 사람들은 둘로 나뉜다. 저 정도가 뭐 어쨌다고, 아니면 우리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내거나. 재키는 후자였다. 그러다가 실종됐다. 아마 국가의 정책에 반항하고 사람들(여성들)을 선동하는 그녀를 제거해야만 했겠지. 그럼 매클렐런은 어떤 여성이었을까? 처음에는 재키의 행동과 말이 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재키와 함께 목소리를 냈다. 그런 활동이 점점 지쳐갈 무렵, 남편의 걱정스러운 한 마디에 집회 참석을 그만둔다. 그리고 세상은 고요해졌다. 권리를 찾으려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모든 여성의 손목에는 카운터가 채워졌고, 하루 100단어의 카운터가 자정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일하던 여성들의 자리는 사라졌고, 여성들의 돈은 남편의 계좌로 이체된다. 여성의 여권은 소멸하였고, 외국으로 여행도 불가능해졌다. 미래의 어느 날, 미국의 모습이다.

 

매클렐런이 목소리를 내고 해동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이유는 딸 소니아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의 사랑 로렌조 때문이기도 하다. 마음대로 이혼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는 세상, 불륜이나 동성애를 저지른 이들에게 가해진 충격적인 형벌의 끔찍함을 알아서다. 무엇보다, 말을 배우고 자기 의견을 말할 줄 알면서 성장해야 할 딸 소니아의 미래가 절망적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소니아는 지금보다 더 억압받는 세상에서, 마치 그런 세상이 당연한 듯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신경과 언어를 연구하는 그녀의 과거 능력이 다시 필요해진 정부가 일시적으로 그녀의 카운터를 해제해주었지만, 그녀는 안다. 이 실험이 끝나면 다시 그녀는 카운터 속에 단어가 갇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끔찍하게도 이 실험의 목적이 그녀가 생각했던 좋은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순간, 더는 참지 못했다. 지금도 부당한 세상, 여성이란 존재에게 생명을 주지 않는 그들만의 낙원을 이제는 끝내야만 했다.

 

목소리를 뺏긴 것뿐이지 않으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소리를 뺏기니 모든 것을 뺏긴 세상이었다.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었다. 무엇이 옳은지 제대로 설명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점점 여성들의 목소리가 아예 사라진,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것이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앞서 만난 같은 주제의 소설들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것만 찾아보려고 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굳이 또 만나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읽다 보니 조금씩 보이는 건, 매클렐런이 지난 이야기를 현재 안에서 하나씩 꺼낼 때마다 등장하는 인물 재키의 말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권리를 주장하고 외쳤다. 틀린 것을 수정하려고 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모이고, 나아가고, 소리쳐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의 삶을 조금씩 파먹으며 묻으려고 하는 국가의 의도를 그녀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싸우다가 목소리를 잃고 삶을 잃었겠지. 소설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재키라는 인물은 어쩌면 이 소설이 존재하기 위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이유, 잘못되어가는 세상을 향한 경고,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 재키가 매클렐런에게 다 하지 못했던 말들은 아마 이런 말들이었을 것이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로렌조가 말했다. 하지만 내 잘못이 맞다. 다만 내 잘못은 목요일에 모건의 계약서가 서명했을 때 시작된 게 아니다. 20년 전에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투표하지 않았을 때부터.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시위에 참여하거나 포스터를 만들거나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 수 없다고 재키에게 수없이 말했었던 그때부터였다. (348페이지)

 

여성의 목소리가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이들. 환상적이지만, 현실의 한구석도 닮아 있어서 겁이 나는 이야기다. 여성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어린 남자애들까지 노동의 현장에 투입된다. 국가가 보장한 미래를 꿈꾸며 따르지만, 국가는 언제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 세상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이 보장한 미래도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이 억압하고 차별하려는 여성은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똑같은 인간일 뿐인데, 왜 여성을 사회에서 밀어내면서 순수 운운하며 존재하지 않는 인간 취급을 하는지. 어쩌면 그건 여성이나, 여성의 존재와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국가가 말하는 대로 세뇌되어가는 남자들이 적응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여자니까, 여자는' 이런 이유로 거부당하는 일상의 면면에 경종을 울린다. 가상의 세상을 말하고 있지만, 가상의 공간에서만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너무 잘 알아서. 그래서 두렵고 어렵고 무서운 이야기다. 인간이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이유를 한 여성의 간절한 목소리로 대신 전한다. 손목에 채워진 카운터의 빈자리, 전기 충격으로 검게 타버린 늘어진 그 손을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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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ooster 2020-03-09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 가득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구단씨 2020-03-16 20:57   좋아요 1 | URL
이 책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내용이 훨씬 좋았어요. 재미도 있었고요. ^^

2020-03-09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9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