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 유어 달링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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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피터 스완슨의 킬 유어 달링은 스릴러가 독자를 붙잡는 가장 익숙한 갈고리를 과감하게 내려놓는다. 보통의 추리소설은 누가 죽였는가라는 수수께끼를 끝까지 숨기며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반대로 첫 장부터 독자가 이미 결론을 알고 출발하는 구조를 택한다. 그래서 독자를 몰아붙이는 질문도 바뀐다. “범인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되었는가”. 정체를 숨기는 대신 동기의 층위를 끝까지 파고드는 방식은 독자를 속이려는 반전보다 더 집요하고 더 불편한 방식으로 심리를 건드린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을 관계의 소설로 읽히게 만드는 힘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50대 부부 작가인 톰과 웬디 그레이브스가 있다. 겉으로 보자면 둘은 안정된 삶을 사는 중상류층 부부처럼 보인다. 집도 있고, 직업도 있고, 사회적으로도 문제없어 보이는외형이 있다. 하지만 소설은 그 외형이 얼마나 쉽게 균열을 숨기는지, 그리고 그 균열이 얼마나 오래전에 시작되는지 냉정하게 보여준다. 남편 톰은 술에 무너진 채 살아가고, 아내 웬디는 그의 말과 표정을 늘 경계한다. 둘 사이에 대화는 오가지만 진짜 정담은 없고, 함께 사는 시간이 있지만 서로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고립이 있다. 이 부부의 공기는 싸움보다는 냉각에 가깝고,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큰 사건이 없어도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 그 질식감을 이 작품은 절묘하게 포착한다.

 

그러다 웬디는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중요한 건 그 결심이 어떤 격정적인 선언이나 거대한 광기로 포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장면이 가장 섬뜩한 이유는, 살인이 특별한 악이 아니라 일상의 연장선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악마가 씌어서가 아니라 지겨움과 혐오가 조금씩 축적된 결과로 살의가 만들어진다. 이 작품이 노리는 심리 스릴러의 핵심은 바로 여기다. 충격적인 장면 자체보다 그 장면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자연스러움이 더 무섭다.

 

이 소설이 현실감을 극대화하는 방식 중 하나는 배경 장치다. 웬디가 톰을 밀어 떨어뜨리는 장소는 워싱턴 D.C. 조지타운의 엑소시스트 계단이다. 영화로 유명한 이 계단은 길고 가파르며, 소설 속에서는 단순한 랜드마크가 아니라 살인을 가능하게 만드는 합리적 조건이 된다. 집 안 계단으로는 부족했던 길이가 더 긴 계단을 향한 계산으로 바뀌는 순간, 살인은 충동이 아니라 계획으로 조립된다. 독자는 그 조립 과정이 놀라울 만큼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을 보며 불편해진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이 작품의 성취로 읽힌다. “이런 일이 소설이라서 가능한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렇게 만들어질 수 있겠다라는 감각을 남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핵심 장치는 공간보다 시간이다. 소설은 부부의 결혼 생활을 역순으로 들려준다. 파국의 현재에서 시작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둘의 관계가 어떤 경로로 망가졌는지를 하나씩 벗겨낸다. 보통의 서사는 시간을 쌓아 올리며 인물의 변화와 원인을 설명한다. 반면, 이 소설은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하면서 현재의 균열이 어떤 과거를 전제하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말하자면 시간을 쌓는대신 벗기는서사다. 독자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를 미래에서 과거로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현재의 혐오가 과거의 사랑과 닿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그래서 더 씁쓸하고 더 오래 남는다. 사랑이 단숨에 증오로 바뀐 게 아니라 사랑의 어떤 성분들이 서서히 변질되며 파국이 되었다는 걸 역순이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낸다.

 

게다가 톰과 웬디가 작가라는 설정은 단순한 직업 배경이 아니라 관계를 좀먹는 방식 그 자체로 기능한다. 톰은 위대한 소설을 쓰고 싶어 하지만 초고 앞에서 자멸한다. 완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그 무너짐은 술과 자기혐오로 연결된다. 웬디는 시인으로서 비교적 담담해 보이지만 그 담담함 안에는 현실을 계산하고 견딜 줄 아는 힘이 있다. 글쓰기는 이들에게 직업이면서 자존심이고, 동시에 수치심의 근원이기도 하다. 특히 톰의 미완성과 좌절이 결혼의 균열과 맞물리면서 부부 관계는 단순한 애정 문제를 넘어 자존감과 욕망, 실패의 감각이 뒤엉킨 전장이 된다. 이 설정 덕분에 독자는 두 사람이 그냥 성격이 안 맞아서망가진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결핍이 어떻게 서로를 파괴하는 구조로 굳어졌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남는 주제는 결국 비밀이다. 두 사람을 오래 붙들어온 것은 함께 공유한 비밀이지만, 결국 두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각자가 따로 감춘 비밀이다. 연애 초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해도 삶이 진행될수록 숨겨야 할 것들은 늘어나는 법이다. 문제는 숨김이 단순한 오해나 착각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구조 자체를 바꿔 버린다는 점이다. 죄책감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을 혼자 감당하려 드는 순간 관계는 고립된다. 결국 파탄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지는 사건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든 결과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차분하게 증명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의 살인은 클라이맥스라기보다 결과물에 가깝고, 독자가 진짜로 목격하게 되는 공포는 죽음이 아니라 사랑의 변질 과정이다.

 

물론 이 작품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역순 서사는 독자에게 강한 몰입을 주지만 동시에 어떤 독자에게는 템포가 느리거나 반복적으로 느껴질 우려도 있다. 또한 톰과 웬디는 사람 냄새가 난다기보다는 차갑고 불편한 현실감을 가진 인물에 가깝다. 그런데 이 점이 오히려 이 작품의 장점일 수도 있다. 스릴러가 멋진 캐릭터에 기대어 달리는 순간, 관계의 붕괴가 종종 낭만화되거나 과장되기 쉽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볼 수 있을 법한, 그래서 더 불편한 민낯을 보여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정말 있을 법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 작품의 온도를 낮추고, 그 낮은 온도가 끝까지 서늘함을 유지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단순하면서 강렬하다. “끝까지 솔직했다면, 우리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소설 속 부부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독자는 읽는 내내 저 부부를 보다가, 어느 순간 우리의 관계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우리는 정말 서로에게 솔직한가, 아니면 솔직하다고 믿고 싶은가. 우리는 말하지 않은 것들을 언젠가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말하지 못한 채 관계의 구조를 바꿔 버릴까. 그래서 이 작품은 읽는 동안의 재미도 있지만 읽고 난 뒤의 잔상이 더 강하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반전으로 독자를 속이기보다 역행하는 시간과 심리의 층위로 독자를 끌고 가는 소설이다. 살인의 충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랑이 변질되는 과정이며, 죽음보다 더 불편한 것은 함께 살면서도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고립이다. 스릴러의 외피를 썼지만 결국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범죄보다 관계. “범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냐에 매달리게 만드는 흡인력, 그리고 비밀과 죄책감이 관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주는 힘 덕분에 심리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특히 결혼/연애의 균열, 말하지 않은 것들의 무게, 관계의 피로가 폭발로 바뀌는 과정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소설은 꽤 오래 마음에 남을 것이다.

 

#피터스완슨 #킬유어달링 #가장사랑하는사람을죽일때가장완벽해진다 #부부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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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유어 달링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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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행하는 시간과 심리의 층위로 독자를 끌고 가는 소설. 호불호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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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4
게리 토머스 지음, 이우진.김자운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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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교육학자 게리 토머스는 교사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을 연구해온 학자다. 버밍엄대학교 명예교수로 소개되기도 하는 그는 포용교육과 특수교육을 다루는 한편, “교육 연구가 무엇을 측정하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같은 방법론적 질문까지 함께 붙들어 왔다. 교육을 이상론으로만 띄우지 않고, 제도와 현실의 문제로 끝까지 끌어안아 온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현장을 아는 사람 특유의 감각이 있다. 교육을 말하되 학교를 미화하지 않고, 학교를 비판하되 교육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얇고 빠르게 읽히지만 던지는 질문은 묵직하다. 책이 집요하게 붙드는 핵심은 뒤표지에 적힌 한 문장으로 요약될 듯하다. “학교는 답을 전달하지만, 교육은 질문하게 한다.” 우리는 시험과 경쟁, 성과를 교육이라고 부르며 익숙해져 왔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정말 사람을 키우는 교육인지, 아니면 줄 세우는 선별 장치인지 스스로 묻는 일에는 서툴다. 저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교육은 왜 지금처럼 변했는가, 학교는 왜 좀처럼 변하지 않는가, 진보적 교육은 왜 번번이 실패하거나 왜곡되는가, 교육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더 날카롭게는 나의 앎이 내 삶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독자 앞에 내놓는다.

 

이 책의 힘은 교육을 좁은 의미의 수업 기술로 축소하지 않는 데 있다. 고대 그리스부터 21세기 교육정책의 흐름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 속에서 교육의 두 흐름, 형식주의 교육진보주의 교육의 긴장과 충돌로 문제를 풀어낸다. 형식주의가 지식과 기술의 효율적 전수를 목표로 하며 교사 중심 수업, 시험, 규율을 중시한다면, 진보주의는 아이의 잠재력과 발견, 비판적 사고를 교육의 중심에 놓고 아동 중심·경험 중심의 학습을 강조한다. 문제는 학교가 이 둘을 충분히 소화해 내지 못한 채 어설프게 섞어 운영해 왔다는 점이다. 심리학의 성과가 진보적 교육에 힘을 실어줬음에도, 그 아이디어는 종종 표면만 차용되거나 입시 현실 속에서 활동만 남은 형식으로 굳어지기 쉽다. 반면 학교의 뼈대는 놀랄 만큼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토머스의 비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학교가 왜 더 시험에, 더 측정에, 더 경쟁에 포획되었는지까지 파고든다. 그는 심리측정학과 지능검사의 역사, 그리고 고부담 시험이 교육을 지배할 때 벌어지는 왜곡을 짚는다. 지능을 타고난 특성으로 보고 선별을 정당화했던 논리가 어떻게 교육 제도 안에 구조적인 분리와 차별을 고착시키는지, 그리고 정책 환경 속에서 학교가 성과 중심의 논리로 재편될 때 시험 결과가 학교의 평가와 생존을 결정하는 절대 척도가 되어 버리는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 결과 교육은 질문을 키우기보다 정답을 빨리 찾는 훈련으로, 성찰을 넓히기보다 성과를 증명하는 경쟁으로 쉽게 왜곡된다.

 

이 대목에서 책은 한국 독자에게 특히 불편하고도 정확한 거울이 된다. 우리는 아이들을 왜 이렇게 치열한 학습으로 내모는가. 그 성취는 과연 진정한 성공인가. 그리고 그 성과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가. 우리 교실에서 점수 따기는 교육의 목적을 밀어내고 교육의 언어 자체를 바꿔버렸다. 배움은 성장의 경험이라기보다 통과의례가 되고, 이해는 사치가 되며, 학생은 한 사람이라기보다 등급과 백분위로 설명되는 존재가 된다. 이 구조가 더 단단해지는 방식은 교실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수업이 끝나고 남는 질문보다 정답률오답 유형이 먼저 정리된다. 사고의 과정은 짧게 압축되고 요령과 속도가 실력처럼 취급된다. 수행평가조차 배움을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어떻게 하면 감점 없이 점수를 받을 수 있는가로 재해석되기 쉽다. 루브릭은 성찰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안전한 점수 확보를 위한 점검표가 되고, 발표·토론은 생각을 확장하는 장이 아니라 말문이 막히면 손해라는 불안 속에서 형식만 남는다. 내신과 모의고사, 비교할 수 있는 수치가 곧 능력이라는 신호가 반복될수록 학생은 더 빨리, 더 정확히 맞히는 쪽으로 몸을 맞추게 된다. 사교육의 존재 방식도 이 왜곡을 강화한다. 학교의 바깥이 아니라 학교의 뒤편을 떠받치는 것처럼 굳어지면서 학교는 교육하는 곳이라기보다 평가의 관문으로 인식되기 쉽다. 학원은 학교 진도를 앞서가며 미리 배워 두면 수업이 편해진다는 논리를 만들고, 컨설팅과 자료 시장은 평가에 최적화된 전략을 거래한다. 그 결과 학교는 더 조심스러워지고 교사는 더 많은 기준표와 증빙 속에서 움직이며 학생은 더 촘촘한 경쟁의 레일 위에 올라선다. 공정과 효율을 말하는 관행이 실은 교육을 교육이 아니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경고가 그래서 더 크게 들린다.

 

그럼에도 저자가 인상적인 이유는 절망을 진단하는 데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서 반드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불편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교육자들이 학교를 더 나은 배움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는 점 또한 놓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학교라는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의심했던 이반 일리치의 탈학교론, 프레이리의 문제제기 중심의 대안적 교육철학 같은 논의를 불러오며 학교 밖의 배움가능성까지 함께 상상하게 한다. 코로나19 이후 확산된 혼합 교육과 학습 네트워크 같은 흐름도 단순한 기술 낙관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의 보수성을 넘어설 실마리를 찾으려는 시도로 읽힌다. 결국 그는 교육의 목표를 다시 묻는다. 기업과 조직에 잘 순응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여야 하는가. 아니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휘하며,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변화와 정의를 이끌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어야 하는가. 혹은 우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발이 묶여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이 책을 좋게 본 것은, 교육을 둘러싼 논쟁을 누가 옳다로 단순화하지 않고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끝까지 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만 얇은 책의 숙명처럼 결론이 더 단단하게 정리되어 닫히지못하고 다소 급히 멈춘 듯한 느낌이 남을 수도 있다. 더 광범위한 사회학적 논의를 기대한 독자라면 갈증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국의 교육 현실을 생각하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부모에게 유효한 질문을 건넨다. 점수와 줄 세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져 교육의 목적을 말하는 순간조차 어색해진 지금, 이 책은 우리를 다시 질문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교실은 매일 답을 요구하지만, 교육은 매일 질문을 되찾는 일이라는 걸 이 얇은 책이 조용히 그러나 야무지게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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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왜 친구를 원하는가 - 우리 삶에 사랑과 연결 그리고 관계가 필요한 뇌과학적 이유
벤 라인 지음, 고현석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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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중심 문제의식은 외로움/고립이 개인의 감정 문제를 넘어 뇌와 몸의 건강을 좌우하는 공중보건적 위험 요인이라는 데 있다. 많은 사람이 이미 외로움을 체감하고 있고 그 여파가 사회 전반의 분열과 공격성, 신뢰 붕괴로 드러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현대를 외로움과 고립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수면·운동·식단으로 대표되던 건강의 3대 축에 사회적 관계를 네 번째 축으로 추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외로움(loneliness)과 고립(isolation)을 구분한다. 외로움은 충분히 연결돼 있지 않다고 느끼는 주관적 상태”, 고립은 실제로 혼자 있는 객관적 상태로 정의되며, 두 상태는 사람들로 가득한 콘서트장 한가운데서도 외로울 수 있는 경험과, 가족여행 뒤 잠시 혼자 있고 싶을 때의 편안한 고립감처럼 전혀 다른 현상임을 강조한다. 문제는 현대의 고립이 휴식으로서의 혼자 있음이 아니라, 관계의 결핍과 단절이 누적되는 방식으로 증가한다는 데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첫 번째 핵심 논지는 인간의 뇌가 본래 연결을 위해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화적 환경에서 인간은 식량 부족, 포식자, 질병 등 위험 속에서 혼자 생존하기 어려웠고, 협력적 집단에 속한 사람이 더 잘 살아남았다. 그 결과 뇌에는 사회적 보상 시스템이 자리 잡았고, 타인과의 연결감을 느낄 때 도파민·세로토닌·옥시토신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어 즐거움·안정감·신뢰를 높이며 이들과 더 있고 싶다는 동기와 유대를 강화한다. 사회적 관계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생존과 적응의 산물이며, 지금도 우리 뇌는 서로 곁에 있을 때보상을 주도록 작동한다는 것이다. “왜 고립이 흡연보다 더 해롭다는 말이 나오는가라는 질문을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사회적 연결이 건강의 핵심 변수로 작동할 수 있다는 문제 제기로 끌어올린다.

 

두 번째 논지는 이런 생물학적 설계가 오늘날 분열된(divided) 사회라는 환경 변화와 충돌한다는 주장이다. 사람들이 타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 가까운 친구의 수, 주관적 외로움 등 여러 지표가 전반적으로 악화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개인이 체감하는 고립과 소외가 커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 문제의 핵심을 단순한 외롭다가 아니라 분열로 표현하는데, 정치적 양극화와 집단 정체성의 경직, 온라인 공간의 비공감적 공격성, 타자를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겹치며 고립이 증폭된다는 시각이다. 혼자 있음자체보다 서로를 적대적 타자로 대하는 사회적 정서가 고립을 구조화하고 관계 맺기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세 번째 논지는 고립이 스트레스로서 몸에 작동한다는 점이다. 과거 무리에서 낙오 또는 배척은 생존 위험을 뜻했기 때문에 고립을 감지한 뇌는 경보를 울리고 스트레스 반응 체계(HPA )를 가동한다. 이 과정에서 코르티솔 같은 호르몬이 관여하며 단기적으로는 에너지를 동원하고 집중·학습에 이득이 있을 수 있지만 고립이 길어지면 경보가 상시화되어 몸이 늘 비상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이 만성 스트레스가 코르티솔 둔감(조절 실패)과 만성 염증의 경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대규모 역학 연구와 동물 실험을 근거로 고립이 사망률, 치매 진행 속도, 심혈관 예후 등과 연관된다는 결과들이 반복적으로 보고된다고 소개한다. 결론은 명확하다. 고립은 마음이 불편한 정도를 넘어 뇌·면역·심혈관 시스템에 부담을 주는 생물학적 위험 요인이다.

 

네 번째 논지는 디지털 상호작용이 대면 상호작용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대면 상황에서 뇌는 목소리 톤, 표정, 시선, 말의 간격, 몸의 방향과 자세 같은 복합적 사회 단서를 동시에 읽어 상대의 감정을 추론하고 자신의 반응을 미세하게 조율한다. 동시 처리가 공감과 신뢰 형성의 핵심인데, 문자·SNS·화상통화 등 온라인 소통은 단서를 축소 또는 지연시키며 문맥을 좁힌다. 그 결과 오해가 늘고 공감은 약화되며 불필요한 적대감과 공격성이 더 쉽게 표출될 수 있다. 저자는 이를 가상 탈 참여 가설로 묶어 설명하며, 텍스트 중심 상호작용이 공감 관련 뇌 영역(전전두엽, 대상피질, 섬엽 등)의 작동 방식에 다른 조건을 만든다고 논의한다. ‘소셜 미디어라는 이름과 달리 그것이 제공하는 사회성은 대면 만남의 전부를 재현하지 못한다는 결론이다.

 

다섯 번째 논지는 인간의 뇌 자체에 사회적 함정이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만남을 실제보다 덜 즐거울 것으로 예측하는 경향이 있고 타인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신의 사회적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편향 때문에 실제로는 친구를 만나고 대화하는 편이 뇌에 더 유익함에도 집에 머무르기를 선택하고 결국 연결의 기회를 스스로 줄여 고립을 강화한다. 저자는 이 함정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며, ‘나가서 만나보니 생각보다 좋았다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에 더해 긍정적 상호작용이 주는 보호 효과를 강조한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옥시토신·세로토닌·도파민 분비를 증가시켜 기분 개선과 동기 상승, 유대 강화로 이어진다는 설명은 익숙하지만, 저자는 이를 더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MDMA(엑스터시) 연구를 끌어와 사회적 상호작용이 저강도 MDMA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도발적 비유를 소개한다(비유의 요지는 쾌감이 아니라 유대·신뢰 회로의 활성에 있다). 또한 옥시토신이 사랑 호르몬이라는 통념을 넘어 항염·신경 보호·면역 기능 등과도 연관될 수 있다는 연구를 언급하며, 소속감과 친밀감이 실제로는 몸을 보호하도록 진화한 생물학적 장치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연결은 마음만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몸의 항상성 유지와도 맞물린다.

 

이 논지들을 바탕으로 저자는 사회적 식단(social diet)’이라는 실천 개념을 제안한다. 사회적 관계를 영양 섭취처럼 관리해야 한다는 비유로, 사람마다 필요한 사회적 칼로리가 다르되(내향형/외향형의 차이를 가치판단이 아닌 필요량의 차이로 설명) ‘0’은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준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성향 점검(외향성 척도 등)과 함께 만남 이후의 피로·만족·기분 변화를 기록하는 사회적 저널링을 권한다. 누구를 만나 어떤 대화를 했을 때 에너지가 오르는지/소모되는지를 관찰함으로써 자신에게 맞는 관계의 빈도·형태·상대를 찾아가라는 처방이다. 큰 모임이 부담스러운 사람은 소규모 만남이나 반복적 일상 접촉(짧은 대화, 친절, 동네 커뮤니티)을 통해도 사회적 영양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취지로 읽힌다.

 

책의 후반부는 고립이 특히 치명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노년기를 다룬다. 저자는 고립된 노인의 치매·심혈관 질환 예후가 더 나쁘다는 연구를 소개한 뒤 자기 할머니의 사례를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식단·운동·수면을 철저히 관리했음에도 사회적 연결의 중요성을 배우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혼자 보내면서 언어 기능과 의사소통 능력이 크게 퇴보한 모습이 그려진다. 통계와 개인적 서사가 맞물리는 지점에서 사회적 연결을 건강 습관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연구 요약 이상의 무게를 얻는다.

 

장점과 한계도 함께 정리해본다. 장점은 사회 진단을 뇌과학적 메커니즘과 촘촘히 연결해 외로움/고립을 명확한 생물학적·역학적 위험 요인으로 재정의했다는 점이다. 또한 대면 상호작용의 가치작은 친절·반복되는 만남의 효과를 연구 근거로 뒷받침하며 독자가 생활 수준에서 실천을 상상하게 만든다. 반면 논의가 미국 사회를 전제로 한 부분이 많아 한국의 가족 구조·노동 문화·복지 제도와 결합할 때는 조정이 필요하며, 개인의 습관 변화에 초점이 강해 정책·도시 구조·노동 환경 같은 구조적 요인이 고립을 강제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 다뤄진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저자의 기본 시선이 외향적 화자에 가깝게 느껴질 수 있으나, 내향형에게도 사회적 영양분의 최소치는 필요하다는 점을 반복하며 완전 차단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이 논의가 단순한 경고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뇌가 연결을 보상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거꾸로 말하면 연결을 회복시키는 작은 개입이 생각보다 큰 건강상의 이득을 낼 수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카톡 한 줄로 처리할 일도 가능하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 보라는 식의 생활 속 방향 전환을 제안한다. 동시에 온라인 공간의 설계(익명성, 추천 알고리즘, 갈등을 키우는 보상 구조)가 공감의 단서를 더 줄이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암시하며, 기술·정책·공동체 차원의 분열 완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남긴다. 즉 개인은 자신의 사회적 필요량을 점검하고(사회적 저널링), 최소치의 대면 접촉을 꾸준히 확보하며, 사회는 사람들이 서로를 같은 집단의 구성원으로 다시 인식할 수 있는 안전한 만남의 장(학교, 동네, 직장 문화, 돌봄 체계)을 넓혀야 한다. 외로움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연결의 인프라가 무너질 때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사회적 증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상투적 문장을 최신 뇌과학과 구체적 사례로 실감 나게 복원하는 데 있다. 편리함 때문에 비대면으로 줄여 온 만남과 대화가 사실은 뇌와 몸이 버티는 데 필요한 최소치였을 수 있음을 상기시키며 독자에게 묻는다. ‘오늘 내 뇌에게 얼마나 건강한 사회적 식단을 먹였는가?’ 그 질문이 불편하게 다가온다면 그 불편함 자체가 관계를 다시 점검하라는 신호일 수 있다. 결국 핵심은 더 많이가 아니라 더 건강하게 연결되는 방식을 찾는 데 있다.

 

#뇌는왜친구를원하는가 #더퀘스트 #뇌과학 #고립 #외로움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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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에 바라본 삶 - 시대의 지성 찰스 핸디가 말하는 후회 없는 삶에 대하여
찰스 핸디 지음, 정미화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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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은퇴가 점점 가까워지니 생각보다 많은 질문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교직이라는 긴 여정을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정년이 눈앞으로 다가오니 그동안 익숙했던 일상이 서서히 형태가 바뀌기 시작하는 것 같다. 교무실 책상 위 달력을 넘기다가 아 이제 정말 몇 년 남지 않았구나싶은 생각이 들 때면 괜히 미묘한 정적이 마음 안쪽에 자리 잡곤 했다. 이런 시기에 읽게 된 이 책은 예상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와닿는 조언을 건넨다. 아흔이라는 나이는 멀리 있는 숫자 같지만, 그가 던지는 질문과 통찰은 오히려 지금의 내 고민을 깊이 건드린다.

 

저자 찰스 핸디는 조직··커리어의 변화를 철학적 언어로 풀어낸 아일랜드 출신 경영사상가로 알려졌다. 대기업 중심의 평생직장 모델이 흔들릴 것을 일찍부터 짚으며, 오늘날의 프리랜서/프로젝트형 노동, 유연한 조직, 의미·목적 중심의 일 같은 흐름을 설명하는 개념들을 널리 퍼뜨렸다. Shell에서의 기업 경험을 거쳐 런던 비즈니스 스쿨에서 활동했고 이후 작가·강연가로 대중적인 영향력을 넓혔다.


저자의 열아홉 번째이자 마지막인 이 책은 분명 그의 저서 중 가장 두꺼운책은 아니지만 중요한 의미에서는 오히려 가장 묵직한책일지도 모른다. 그는 202412,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큰 상실이었겠지만 동시에 삶과 일, 비즈니스에 대해 인간적이고도 선견지명 있는 통찰을 평생 남긴 데 대한 고마움도 컸을 것이다. 그는 조직이 지닌 답답하고 우울한 현재를 어떻게 더 나은 미래로 바꿀 수 있는지를 꾸준히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이 책의 끝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낮춰 말한다. “나에 관해 남는 것이라고는 어딘가에 실린 추모 기사와 몇 장의 사진,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추억뿐일 것이라 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비이성의 시대(The Age of Unreason, 1989), 텅 빈 우비(The Empty Raincoat)(미국에서는 역설의 시대, 1994), 굶주린 영혼(The Hungry Spirit, 1998)같은 책들이 남아 있다. 여기에 그의 강연까지 더해지며 그는 경영 구루로 알려졌고, 본인은 사회철학자라는 표현을 더 좋아했다.

 

이 책은 자연스럽게 철학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간다. 특히 스토아 철학이 많이 등장하고 영성도 다룬다. 아일랜드에서 대주교 보좌 성직자의 아들로 자란 성장 배경이 말년에 다시 울림을 만든 듯하다. “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신에 대한 의심을 솔직히 털어놓다가 결국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혼자 떠나게 될 것 같지만 그래도 도와줄 수 있다면 정말 고맙겠다고.

 

그가 말하는 좋은 경영과 통솔력은 결국 한 가지로 압축된다. 사람 안에 있는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제로 쓰게 만드는 것이다. 현대 비즈니스의 경직된 관행을 겨냥한 비판도 여전하다. 많은 리더가 보이는 자기중심성, 사익 추구에 대해 날카롭게 꼬집는데 그 대상은 도널드 트럼프까지 포함된다. 그는 조직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운영하라고 말한다. 또 직원들에게는 긍정적으로 기여할 자유를 줘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쉬운 길인 부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좋은 경영과 통솔력이란 사람 안에 있는 선물을 찾아내 그걸 쓰게 만드는 일이다.

 

저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자주 언급하는데, 특히 아내 엘리자베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엘리자베스는 오랫동안 그의 비공식 에이전트이자 홍보 담당자였고, 대화로 부딪치며 생각을 다듬어 준 토론 상대이기도 했다. 아내는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전반적으로 그는 삶의 끝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냈다는 사실에 오히려 담담하게 놀라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에 맞춰 살려고 했고, 독자에게도 그 기회를 허비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저자가 나이를 바라보는 방식은 특히 흥미롭다. 그는 신체가 늙어가는 속도와 마음이 움직이는 속도는 다르다고 말한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마음은 여전히 새로운 것을 향해 미세하게 움직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내 경험과 정확히 겹치는 말이었다. 학생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만큼 기술 변화가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도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글을 쓰고 외국어를 배우고 무언가를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은 남아 있다. 저자는 이런 모순을 부자연스럽다거나 민망한 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나이 듦을 괜히 감춰야 할 변화처럼 여겼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가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성취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존재 중심의 삶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교직에서 살아온 시간 동안 나는 수많은 숫자에 둘러싸여 있었다. 성적표, 평균, 수행평가, 입시 결과, 등급. 학생들에게는 점수가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계속해서 수치로 평가받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오래 남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진 순간들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다시 한번 교사로서의 시간을 돌아보게 했다. 학생과 나눴던 짧은 대화, 동료가 건넨 한마디, 뜻밖의 감사 인사. 이런 장면들이야말로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는 기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을 바라보는 시각도 은퇴를 앞둔 사람에게 꽤 큰 울림을 준다. 그는 일이라는 것을 직책이나 급여의 문제로 한정하지 않는다. 자기 능력을 의미 있는 방향으로 쓰는 모든 활동이 일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은퇴 이후의 삶을 공백으로만 바라보던 내 생각을 바꿔 놓았다. 학교를 떠나도 여전히 누군가와 지식을 나누거나, 작은 모임을 만들거나, 배움의 자리를 이어갈 수 있다. 글을 쓰는 일, 지역 사회에서 봉사하는 일, 새로운 취미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일 등 일의 형태는 달라질 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설명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은퇴 후의 시간이 잃어버릴 시간이 아니라 다르게 채울 수 있는 시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관계의 재구성에 대해서도 중요한 조언을 남긴다. 교사로 지내는 동안 내 관계의 대부분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형성되었다. 퇴직을 앞두고 그 관계들이 자연스럽게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은퇴가 관계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지도를 다시 그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미뤄 두었던 가족과의 시간, 오래 연락하지 못한 친구들, 취미 모임에서 만날 사람들, 새로운 배움의 공동체 등이 앞으로의 관계를 채울 수 있다는 그의 관점은 현실적이면서도 긍정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세며 불안해하기보다는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우선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은퇴를 앞두고 앞으로의 시간을 계산하듯 바라본 적이 많았는데, 그의 조언을 읽으며 관점이 조금 바뀌었다. 시간의 양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은퇴 후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는 데 힘을 얻을 것 같다.

 

결국 이 책은 은퇴를 앞둔 교사인 나에게 삶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시야를 넓혀준다. 은퇴는 단절이 아니라 재구성의 과정이며 그 과정 안에서 일도, 관계도, 시간도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앞으로의 시간이 막연한 빈칸이 아니라 아직 쓰지 않은 페이지처럼 느껴졌다. 무엇이든 쓸 수 있는 인생의 새 공책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저자의 조언은 결국 이런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이제부터는 자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음 장을 써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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