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은퇴공부 - 손쓸 새 없이 퇴직을 맞게 될 우리를 위한 현실적인 솔루션
단희쌤(이의상)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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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앞둔 직장인이라면 은퇴 이후에는 현재와 같은 생활 수준과 리듬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이제 60개월쯤 후면 그 두려움을 현실로 맞이해야 하는 처지에서 이 책은 매우 시의적절하게 다가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은퇴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배워서 해결할 과제로 다시 보고 있다.

 

한국 사회의 평범한 월급쟁이에게 퇴직은 수십 년간 지켜왔던 정체성의 붕괴에 맞먹는 인생의 대사건이다. 그러니 당황하지 않으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저자가 퇴직을 준비가 아닌 공부의 문제로 바라보는 이유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지식 쌓기가 아니라 삶의 구조를 다시 짜는 연습이며, 불안을 분석해 스스로 길을 찾는 자기 성찰의 기술이다. 이는 은퇴를 인생의 끝이 아닌 2막의 시작으로 보게 만드는 시선 교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제목의 최소한은 단순한 실용 구호가 아니라 원칙이다. 완벽한 대비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 당장 가능한 작은 준비부터 하라는 제안이 핵심이다. 은퇴 직후 1년을 간단히 시뮬레이션하고, 하루 루틴을 설계하며, 지출을 단순화하고 관계를 점검하는 실천을 권한다. 미니멀 라이프의 원리를 은퇴 계획에 적용해 거대한 계획보다 지속 가능한 습관을 중시하는 태도가 돋보인다. 목표를 크게 세우기보다 삶을 조금씩 조율해 실행 가능한 최소치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장수 시대의 화려한 노후 신화를 걷어내고, 삶이 버틸 수 있는 바닥을 먼저 깔아 주는 기술을 제시한다. 재무 팁을 늘어놓기보다 무엇부터, 어느 수준까지라는 질문에 답하며, ···건강·관계 다섯 축을 최소 요건으로 재정리한다. 큰 비법을 약속하지는 않지만,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동사형 과제를 건네준다는 점에서 실용서의 장점을 갖추었다.

 

중요한 전환점은 은퇴를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로 본다는 데 있다. 노후 불안의 근원을 자산 부족보다 삶의 방향 없음에서 찾고, 재테크 공식보다 지출 단순화, 생활 리듬 재정비, 시간 사용의 주도권을 우선한다. 여기서 은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 존재감과 사회적 연결을 유지하는 활동으로 다시 정의된다. ‘쓸모 있는 인간에서 의미 있는 인간으로 옮겨 가자는 제안은 자존감이 삶의 지속 가능성을 떠받치는 토대라는 통찰로 이어진다.

 

책의 중심에는 현금흐름사고가 놓여 있다. 자산 총액에 속지 말고 국민연금 예상 수급액을 기준점으로 삼아 부족분을 메울 버팀 소득을 확보하라고 권한다. 나이로 정하는 뭉뚱그린 자산배분 공식 대신, 월 생활비와 안전마진을 거꾸로 계산해 위험자산 비중을 정하는 접근은 매우 현실적이다. 은퇴는 노동의 끝이 아니라 소득 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분명해진다.

 

후반부에서는 공부의 의미를 인생 후반부의 교양으로 끌어올린다. 은퇴는 생업의 종료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외연을 확장하는 시기로 본다. 독서, 산책, 일기, 명상, 대화 같은 소소한 루틴이 마음의 질서를 세우고 정신을 단련하는 공부라는 주장이다. 이 대목에서 책은 재무 설계서의 외피를 벗고 삶의 미학서 같은 얼굴을 드러낸다. 화려한 비법 대신 실천 가능한 루틴을 남긴다.

 

이 책은 아주 세밀한 재무 공학이나 세대·계층별 차이를 촘촘히 반영한 지침이라기보다는 독자가 스스로 질문을 통해 자기만의 설계를 그리게 하는 촉발 장치에 가깝다. 구체적 수치나 상품 비교를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아쉬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의도는 해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환기하는 데 있고, 그 전략은 설득력이 있다. 은퇴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도 중요하겠지만 결국은 그래서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한계도 분명하다. 자산 관리의 사례로 서울 지역 12억짜리 아파트를 소유한 중산층을 전제하였기에 주택 소유자라 하더라도 서울이 아니거나 무주택자 또는 불안정 노동자에게는 진입 장벽이 높게 느껴질 수 있다. 역모기지, 대체자산 비중, 주거 전환의 타이밍 등 독자의 위험 성향과 지역 격차를 더 세밀히 반영한 보조 지침이 있었다면 내용이 더욱 탄탄했을 것이다. 일례로 수도권·지방 간 의료 접근성 차이를 고려한 대안 경로가 보강된다면 실행 가능성의 범위도 넓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은퇴는 종착역이 아니라 운영체제의 교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최소 요건부터 확보하라는 제안은 두려움을 줄이고 행동의 순서를 명확히 하며, 가족과의 협의를 제도 언어로 정착시킨다. 큰 비법 대신 작은 루틴을, 먼 미래의 복권 대신 오늘의 현금흐름을 제시하는 태도는 기술에 가깝다.

 

이 책의 큰 그림은 재테크 중심의 은퇴 담론을 비껴가 삶의 2막을 의미 중심의 시간으로 다시 짜도록 돕는데 있다. 퇴직을 사회로부터의 퇴장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새 무대의 입장으로 보게 하는 메시지는 따뜻하고 분명하다. 책을 덮고 나면 은퇴는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응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된다. “이제 진짜 나로 살아볼 준비가 되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거창한 계획 대신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천을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은 그 실천으로 가는 길을 단정하고 단단한 문장으로 비춘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노후를 위한 이념서가 아니라 사용 설명서에 가깝다. 덜 알지만 더 움직이게 만들고, 화려한 시뮬레이션 대신 버틸 수 있는 바닥을 깔아 준다. 지금 당장 점검목록과 주간 루틴으로 시작하려는 독자에게 가장 실용적인 동반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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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은퇴공부 - 손쓸 새 없이 퇴직을 맞게 될 우리를 위한 현실적인 솔루션
단희쌤(이의상)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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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절실한 마음으로 읽었던, 가장 현실적인 은퇴 준비 지침서. 그래도 은퇴는 걱정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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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혐오 - 젠더·계급·생태를 관통하는 혐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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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를 특별한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기회가 주어졌다고 상상해 보자.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구조와 패턴이 눈앞에 또렷이 드러나고, 심지어 서구 중심 문명의 앞날까지 어렴풋이 읽힐지도 모른다. 다만 그 시야를 얻는 대가로, 역사 속 공포의 방을 끝까지 통과해야 한다면그럼에도 과연 우리는 보고 싶을까?

 

저자 데릭 젠슨은 작가이자 교사, 환경운동가다. 그는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대규모 벌목과 연어 절멸 같은 현장을 오래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례를 엮어 우리 문화가 지구와 생명을 어떻게 해쳐 왔는지 차분히 보여 준다. 이 책에서 그는 혐오경제가 사회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얽혀 작동하는지를 추적한다. 질문은 단순하다. 왜 노골적 혐오보다 이익의 이름으로 더 많은 잔혹이 벌어지는가? 젠슨은 홀로코스트, 린치, 환경 파괴, 강간, 콜롬비아의 죽음의 분대’, 산업 재해처럼 서로 성격이 다른 사건들을 한데 엮어, 섬뜩할 만큼 설득력 있는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런 만행은 생명보다 생산을 앞세우는 경제 체제에서 필연적으로 맺히는 열매다.

 

자본주의에 익숙한 우리는 모든 것에 가격표를 붙이고, 살아 있는 존재까지 상품으로 환원한다. 젠슨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의 체제는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 탐욕과 세계화를 비호한다. 저자의 주장은 광범위하고 때로 과감해 보일 수 있지만, 그는 미시적 역사와 맥락을 자연스럽게 엮어 오싹할 만큼 그럴듯한 결론으로 이끈다. 젠슨은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이다. 그는 열정적인 목소리로, 겉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의 연결고리를 집요하게 드러내는 데 탁월하다.

 

책은 1918년 미국 조지아주 발도스타에서 벌어진 메리 터너 공개 살해 사건을 섬뜩하게 재구성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시 한 백인 농부가 살해되자 격분한 백인 폭도들은 흑인 남성 11명을 린치했는데, 그중 열 명은 억울한 희생자였다. 메리 터너의 남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격앙된 백인 공동체에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메리 터너가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보복, 아니 최소한의 정의를 공개적으로 요구하자AP 보도에 따르면발도스타의 선량한 시민들은 그녀의 말과 태도를 문제 삼아, 임신 8개월이던 그녀를 휘발유와 흉기, 총탄이 난무한 집단 광란 속에서 잔혹하게 살해했다.

 

환경 파괴와 산업 재해의 장면에서도 같은 질문이 이어진다. 1984년 인도 보팔의 유니언 카바이드 공장 폭발메틸 이소시아네이트 40톤이 누출되어 약 8천 명이 사망하고 20만 명이 부상한 사건을 그는 단순한 사고로 읽지 않는다. 독성 화학물질로 이윤을 내는 구조에서 이런 참사는 예견된 결과에 가깝다. 보팔 공장의 안전장치 축소를 짚는 한편, 미국에서 멕시코계 이주 농업 노동자들이 살충제 산업에서 얼마나 손쉽게 대체 가능한 사람으로 취급되는지도 보여 준다.

 

여기서 다시 책임의 문제가 제기된다. 보팔에 독을 만드는 공장을 지을 권리는 누가 부여했는가. 무엇이 그 일을 정당화하는가. 젠슨은 우리의 법과 관행 속에, 어떤 종류의 죽음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게 만드는 장치가 촘촘히 숨어 있다고 말한다. 생태계 파괴, 유색인에 대한 폭력, 여성과 아동에 대한 범죄는 대개 그렇게 취급되는 반면, 부유층의 재산을 건드리는 일에는 신속히 단죄가 내려진다.

 

이렇듯 책은 증오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깊이 파고든다. 젠슨의 글이 독자의 충격을 노리거나 죄책감을 부추기려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비극적 장면들을 불편할 만큼 자세히 그려 보이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그는 우리’, 곧 평범한 미국인들이 이런 사건들 속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 묻는다. 그 답은 첫 장을 여는 프리모 레비의 인용문이 예고한다. “괴물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수는 너무 적어 진정한 위협이 되지 못한다.

 

더 위험한 것은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은 채 믿고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평범한 사람들, 곧 기능인들이다.” 젠슨은 대다수가 차마 묻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은 대단히 불편하다. 책을 덮을 즈음이면 우리는, 인도 보팔의 참사로 8,000명이 목숨을 잃은 일, 노예제, 아메리카 원주민의 파괴, 생계를 위해 목숨을 갉아먹는 일자리를 두고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현실, 우리 모두의 생명을 떠받치는 생태계를 끊임없이 훼손하는 일 등 온갖 참상을 낳는 탐욕적 기업 문화를 우리가 스스로 떠받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진보’, ‘문명’, ‘개발이라는 이름의 더러운 전쟁에서, 아무 생각 없이 명령에 따르는 일개 보병으로 자신을 발견한다. 이 책은 우리의 경제·사회 시스템이 중심에 증오를 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시스템을 굴러가게 하기 위해 혐오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우리가 살아온 문명은 앞으로도 같은 것을 되풀이해 낳을 것이다. 그것이 이 존재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편한 책을, 어떻게 가능한 한 강한 어조로 추천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젠슨은 서문에서 답한다. “만행을 멈추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낳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이해하고 바꾸어야 한다. 이 책은 무기다. 세계를 인식하고 존재하는 방식에 우리 자신을 묶어 두는 밧줄을 끊어내는 칼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성냥이다.” 우리는 연관성이 없다고 믿는 체하며 시선을 돌릴 수도 있다. 아니면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크게 숨을 들이쉬어, 세계를 바꾸는 일에 착수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우리가 당연시해 온 믿음과 제도를 다시 보게 만들고, 끝까지 책임을 추적하도록 독자를 밀어붙이는, 손에 쥘 수 있는 도구다.

 

#한달한권할만한데 #벽돌책격파 #문명과혐오 #데릭젠슨 #아고라 #책추천 #책리뷰 #온라인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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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에 관한 거의 모든 이야기 - 벤츠에서 테슬라까지, 150년 역사에 담긴 흥미진진 자동차 문화사전
루카 데 메오 지음, 유상희 옮김 / 미래의창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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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살아온 시선이 이끄는 자동차 문명의 입문서이자 애정과 성찰이 균형을 이루는 진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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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에 관한 거의 모든 이야기 - 벤츠에서 테슬라까지, 150년 역사에 담긴 흥미진진 자동차 문화사전
루카 데 메오 지음, 유상희 옮김 / 미래의창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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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은 자동차를 원제 사랑의 사전이라는 틀로 풀어낸 독특한 수필집이다. 제목 그대로 사전의 형식을 빌리지만 사전적 객관성보다는 개인적 기억과 업계에서의 경험을 앞세운다. 저자는 르노 그룹의 최고경영자로 지난 30여 년 동안 유럽의 여러 제조사에서 일한 경영자이다. 이 책은 그가 현장에서 보고 느낀 자동차 문명의 얼굴을 A부터 Z까지 항목별로 정리해 보여준다. 세세한 뒷이야기, 브랜드 전략과 디자인 감각, 정책과 사회 변화를 오가며 자동차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시대를 비추는 문화적 거울임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이 책의 구성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각 항목은 길지 않은 글로 이루어져 있어 어디든 펼쳐 읽기 좋다. “왜 페라리는 빨간색인가와 같은 상징의 기원부터, “19세기 초 전기차는 무엇이 달랐는가같은 역사적 질문, “회전교차로(라운드어바웃)는 교통 문화를 어떻게 바꾸었는가라는 도시 인프라의 이야기, “중국은 어떻게 전기차 강국이 되었는가라는 산업 재편의 흐름까지 폭넓게 다룬다. 항목 간 연결성은 별로 없지만 그 느슨함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동한다. 한 꼭지를 읽을 때마다 소소한 발견을 하고, 그 발견들이 쌓여 자동차라는 거대한 생태계의 윤곽을 자연스럽게 그려 보게 된다.


저자의 목소리는 일관되게 현장 지향적이다. 다행히도 자랑 일색인 성공담을 늘어놓지는 않는다. 시장에서 고전한 모델과 빗나간 전략, 전환기에 나온 실수들까지도 숨기지 않는다. 예컨대 차량의 지나친 무게 증가가 가져오는 역효과,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덧칠된 비현실적 기획, 규제와 보조금의 파도에 휩쓸리는 기업의 의사결정 같은 부분을 담담히 짚는다. 이런 서술은 경영 보고서의 숫자가 아니라 숫자 뒤에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시선을 보여 준다. 독자는 그 시선을 통해 디자인, 브랜딩, 생산, 유통, 정책, 레이스 문화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책의 또 다른 특징은 다양한 직군의 목소리이다. 저자는 곳곳에서 레이서, 디자이너, 경영자, 업계 종사자의 짧은 코멘트를 끌어와 한 항목 안에 여러 시각을 겹쳐 놓는다. 자동차는 오랫동안 기술과 욕망, 안전과 속도, 규제와 자유의 갈등이 교차하는 장소였고 이 책은 그 교차점을 다양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 덕분에 독자는 엔진의 종류신차의 사양같은 시시콜콜한 관심을 넘어 왜 어떤 자동차가 세대의 취향을 바꾸고 도시의 풍경을 다시 그렸는지까지 생각하게 된다. 또한 브랜드의 역사는 단지 마케팅의 산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라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체감한다.

 

읽기의 손맛은 알파벳식 배열이 만들어낸다. 항목 하나하나가 독립된 소품처럼 작동하기 때문에 업무와 일상 사이의 짧은 틈에도 읽기 좋다. 그러나 짧다고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항목의 마지막 문장들은 종종 이어지는 다음 질문을 불러들인다. 페라리의 빨강을 이야기한 뒤에는 색은 어떻게 권위를 얻는가라는 물음이 남고, 초기 전기차의 흥망을 훑은 뒤에는 기술은 왜 어떤 시기에만 대중화되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저자는 답을 쉽게 단정하지 않고 사례와 맥락을 보여 준다. 독자는 그 빈틈을 스스로 메우며 사고의 폭을 넓히게 된다.

 

그렇다고 이 책에 흠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사랑의 사전이라는 기획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어떤 항목은 풍부한 사례와 통찰로 빛나지만 어떤 항목은 짧은 감상에 그치기도 한다. 항목 간의 깊이와 밀도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균질한 백과사전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왕에 사전적 구성을 채택했다면, 거칠게 처리된 스케치보다 컬러사진을 수록하는 방식이 저자가 중시하는 자동차 디자인의 미학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냈을 것이다. 또한 저자가 현직 유럽 제조사의 수장이라는 점은 초점을 일정 부분 유럽과 프랑스로 끌어당긴다. 유럽의 규제 환경, 유럽 브랜드의 미학, 유럽 시장의 맥락이 상대적으로 더 자세히 다뤄진다. 세계 자동차 산업의 균형을 철저히 따지는 독자라면 아시아·북미의 관점이 더 많이 보강되기를 바랄 수 있다. 다만 이 편향은 기획의 성격과 저자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라 장점과 한계가 동시에 담긴 결과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이 책의 의의는 분명하다. 첫째, 산업의 거대한 전환기전동화, 소프트웨어 중심 설계, 자율주행의 꿈과 현실를 내부자의 언어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둘째, ‘기술사문화사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들며 자동차를 둘러싼 욕망과 상징, 제도와 일상의 관계를 쉽게 설명했다는 점이다. 셋째, 성공과 실패를 함께 서술하면서 독자에게 현실적 균형 감각을 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 편의 찬가도, 고발도 아니다. 사랑의 사전답게 애정이 깔려 있지만 그 애정은 맹목이 아니라 성찰을 동반한다.

 

추천 독자는 명확하다. 자동차 문화의 역사와 브랜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 전동화와 새로운 제조 강국의 부상 같은 현재의 재편을 큰 그림으로 보고 싶은 독자, 짧은 글 속에서 실마리를 찾고 스스로 더 깊이 파고드는 독자에게 어울린다. 또한 경영과 디자인, 정책과 도시를 가로지르는 교차점을 수업이나 강연의 예시로 활용하려는 사람에게도 실용적이다. 항목별로 핵심 사례가 응축되어 있어 발췌와 인용이 수월하고, 각 항목이 던지는 질문은 토론의 좋은 출발점이 된다.

 

문체는 읽기 쉽다. 지나치게 학술적이지 않고 대화하듯 풀어낸 문장이 많다. 덕분에 자동차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지 않아도 따라갈 수 있다. 동시에 오랜 업계 경험에서 나오는 구체적 장면들이 글의 밀도를 높여 준다. 디자인 리뷰 회의의 공기, 규제 변화에 흔들리는 예산 편성, 공장에서의 작은 결함이 시장에서 어떤 파장을 낳는지 같은 묘사가 간간이 등장한다. 이런 장면은 숫자와 그래프가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을 보여 준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데이터와 연표로 밀어붙이는 정통사도, 취향 자랑에 머무는 취미 에세이도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언어로 자동차 문명을 다시 쓰되, 사랑이 눈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점검하는 책이다. 편향과 불균등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지만 그 한계를 감수할 만한 내용적 보상이 따른다. 독자는 항목을 넘기며 세계의 도로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그리고 다음 교차로에서 어디로 향할지를 차분히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현장을 살아온 시선이 이끄는 자동차 문명의 입문서이자 애정과 성찰이 균형을 이루는 진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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