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든 국내여행 맵북 KOREA MAP BOOK 에이든 가이드북 & 여행지도
이정기.타블라라사 편집부 지음 / 타블라라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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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마트폰 하나면 전국 어디든 길을 찾고 맛집을 검색할 수 있는 시대에, 종이 지도책은 어떤 매력을 지녀야 할까? 타블라라사에서 출판한 에이든 국내여행 맵북은 이 질문에 대해 '압도적인 정보량'이라는 해답을 내놓았다. 친근한 일러스트 표지를 넘기면 디지털 화면의 좁은 프레임으로는 느낄 수 없는 방대한 맞춤형 정보 잔치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과도한 친절함 때문에 '지도'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해 묵직한 물음표를 던지게 만든다. 이 책의 특징, 정보 전달, 지도 가독성, 편의성 그리고 장단점에 비판적(?) 시각을 더해 분석해 보았다. 참고로 순수 한국어 전용을 원했으나 외래어화된 용어가 너무 많은 점, 양해를 부탁드린다.

 

1. 특징 및 정보 전달: 지리를 넘어선 '여행 백과사전'

이 책의 가장 큰 무기는 단연 정보의 밀도와 알찬 맞춤형 정보다. 목차를 보면 '봄꽃편', '여름꽃 향연', '역사지도' 188개에 달하는 테마를 제공한다. 제주도 애월 지역이나 경주 일대의 지도를 보면, 단순한 행정구역이나 도로망을 넘어 핫플레이스, 노포 맛집, 뷰 포인트, 심지어 역사적 사건의 발생지까지 텍스트와 아이콘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지리 정보와 인문, 트렌드가 한 장에 융합되어 있어 여행의 영감을 얻고 목적지를 발굴하는 '정보 전달 매체'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다.

 

2. 지도 가독성: 배경화면으로 전락한 지도, 텍스트에 잡아먹힌 지리(地理)

하지만 바로 그 장점이 이 책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을 낳았다. 명색이 지도책임에도 불구하고, 정보 전달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텍스트가 지도를 완전히 덮어버린 형국이다. 지도의 본질은 지형의 형태, 도로의 연결성, 지역 간의 물리적 거리와 공간적 맥락을 시각적으로 파악하게 해주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상세 페이지(: 제주, 경주 등)를 보면, 수많은 상호명과 설명 텍스트, 다채로운 아이콘들이 공간을 빈틈없이 점령하고 있다. 그 결과 산맥, 해안선, 도로망 같은 진짜 '지도 정보'는 마치 텍스트를 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깔아둔 '배경화면'처럼 흐릿하게 후퇴해 버렸다. 지형적 맥락은 사라지고 정보의 나열만 남아, 공간의 구조를 파악하고픈 독자에게는 시각적 피로도를 유발할 수 있다.

 

3. 사용자 편의성: 시스템은 훌륭하나 시각적 여백이 부족한 UI

사용자 편의성 측면에서는 아날로그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영리한 시스템이 돋보인다. 전국 지도를 격자(Grid)로 나누어 상세 페이지 번호를 명시한 '전국 인덱스 지도'는 독자가 원하는 지역을 매우 직관적으로 찾게 해 준다. 또한 서울 지도의 경우 복잡한 골목 대신 구()별 덩어리로 단순화하고 상세 지역을 상자로 유도하는 방식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정작 찾아 들어간 상세 페이지에서는 숨 막힐 듯한 텍스트 밀도 때문에 편의성이 크게 떨어진다. 글자의 크기가 주요 관광지의 이름은 크지만 설명은 작아 시력이 좋지 않은 필자에게는 해독이 쉽지 않으며, 텍스트 간의 여백이 적어 네비게이션처럼 직관적인 경로 탐색용으로는 사실상 활용하기 어렵다.

 

4. 장단점 요약

* 장점

* 경이로운 정보 밀도: 인터넷 검색 수십 번을 대신할 압도적인 양의 여행 정보(맛집, 카페, 유적, 자연경관 등)가 하나의 뷰에 담겨 있다.

* 테마별 큐레이션: 188개의 테마 등 기획력이 돋보이며 동선을 짜고 여행의 목적을 설계하는 기획 단계에서 훌륭한 브레인스토밍 도구가 된다.

 

* 단점

* 주객이 전도된 가독성: 텍스트와 아이콘이 지형과 도로보다 우선순위로 보여, 정작 '지도'로서의 공간 인지 기능은 약한 편이다.

* 시각적 피로감: 작은 폰트와 여백 없는 정보의 나열로 인해 눈이 쉽게 피로해지며, 원하는 목적지를 빠르게 훑어내기 어렵다.

 

결국, 에이든 국내여행 맵북을 전통적 의미의 '지도책'으로 접근한다거나, 네비게이션이 상용화되기 전 지도책을 보고 길을 찾아 다니던 중년층 운전자라면 실망할 확률이 높다. 옛날식으로 어느 명승지를 어떻게 찾아가야 하느냐를 염두에 두기보다는, '대한민국 지도 모양의 캔버스 위에 빼곡하게 적어 내려간 방대한 여행 카탈로그'로 정의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과거의 기준으로 이 책의 쓸모를 깎아내려서는 안 되겠다. 이 책은 현장에서 길을 찾는 내비게이션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기 전 거실에 펼쳐두고 수많은 선택지 중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내는 '여행 설계용 백과사전'으로 사용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정보의 과잉이 낳은 아쉬운 가독성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집요하게 전국 방방곡곡의 매력을 한데 긁어모은 제작진의 노고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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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든 국내여행 맵북 KOREA MAP BOOK 에이든 가이드북 & 여행지도
이정기.타블라라사 편집부 지음 / 타블라라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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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펴놓고 여행 가기 전 설계용 백과사전으로 쓰기 좋은 지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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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독학이라는 세계 -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양필성 옮김 / 클랩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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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반백 년을 넘어 살았는데 뭔가 적잖이 허망하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인생의 후반전인 5학년에 접어들었고, 6학년이 코앞이다. 그사이 세상은 눈이 멀 정도로 빠르게 변했다. 인공지능이 세상의 모든 질문에 그럴싸한 답을 '딸깍' 내어주는 시대다. 스마트폰을 몇 번 두드려 결과물을 뚝딱 만들어내는 젊은 세대를 보며, 나는 남들 다 안다는 재테크 정보나 세상의 트렌드 요약본을 부지런히 받아 적기에 바빴다. 그게 나이 먹어서도 뒤처지지 않는 유일한 '공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늘 허전했다. 머릿속에는 단편적인 정보들이 넘쳐나는데, 막상 누군가로부터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받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였다. 내가 안다고 믿었던 것들은 정말 내 지식일까, 아니면 누군가 꼭꼭 씹어 뱉어놓은 찌꺼기일까. 내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듯한 묘한 소외감 속에 만난 책이 바로 일본의 철학자 시라토리 하루히코의 독학이라는 세계였다.

 

저자는 클릭 한 번으로 인공지능이 정답을 내어주는 시대에 인간이 왜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해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타인이 정해준 커리큘럼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을 '학습'으로,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오랜 시간을 들여 답을 찾아가는 능동적인 행위를 '독학'으로 규정하며 총 5가지 세계를 통해 독학자의 태도를 제시한다. 1'독학의 세계'에서 얕은 정보와 깊은 지식을 구분하는 것을 시작으로, 원전을 정면으로 읽어내는 쾌감(2장 책의 세계), 지식을 지혜로 바꾸는 인문학적 맥락(3장 교양의 세계), 사고의 도구로서의 언어(4장 언어의 세계), 그리고 권위에 의문을 품는 사고법(5장 질문의 세계)까지, 책은 온전한 나로 서기 위한 실천법을 촘촘히 다룬다.

 

저자는 책의 도입부터 나의 얄팍한 안일함을 따끔하게 꾸짖는다. "인간은 스스로 탐구할 때만 비로소 자신이 된다. 독학은 바로 그런 자신이 되기 위한 길이다." 그동안 내가 해 온 것은 배움이라기보다 세상이 정해놓은 정답을 수동적으로 쫓아간 '얄팍한 학습'에 불과했다.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던 젊은 시절의 총명함은 잃어버린 채, 당장 돈이 되고 이득이 되는 정보만 수집하며 늙어가고 있었다. 삶에 배어들지 않은 얕은 지식을 박식함으로 포장하려 했던 기억들이 스쳐 가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특히 요약본에 의존하지 말고 어려운 원전을 정면으로 돌파하라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철렁했다. 언제부턴가 두꺼운 고전보다는 유튜브의 '10분 요약 영상'이나 블로그의 '3줄 요약'을 먼저 찾으며 책 한 권을 다 읽었다고 자신을 위로하곤 했다. 저자는 핵심만 빨리 알려고 하는 '요약 중독'이 인간의 사고 경로를 망가뜨린다고 강력히 경고한다. 답이 바로 나오지 않더라도 며칠이고 몇 주고 스스로 고뇌하며 책의 행간을 읽어내는 일, 그것이 굳어가는 뇌를 깨우고 단단한 내면을 만드는 '진짜 공부'라는 지적은 매서우면서도 해방감을 준다.

 

50대에 시작하는 독학은 시험을 치르기 위한 것도,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롯이 나라는 주체를 지키고 남은 생을 나다운 관점으로 살아가기 위한 '존엄의 투쟁'에 가깝다. 종교, 역사, 철학을 넘나들며 지식을 지혜로 바꾸고, 익숙한 상식에도 끊임없이 '?'라는 질문을 던져 노트에 적어 내려가는 삶. 비록 인공지능보다 속도는 느릴지언정, 질문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고 모르는 상태를 견디며 묵묵히 나아가는 용기야말로 중년의 삶에 품격을 더해주는 진짜 배움의 길일 것이다.

 

이제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동향과 흥미 위주의 책보다는 그동안 어렵다고 피해 왔던 고전 한 권을 집어 들려 한다. 남들이 요약해 준 정답의 세계에서 걸어 나와, 거칠고 아득하지만 짜릿한 '나만의 독학이라는 세계'로 첫발을 내디딘다. 삶의 후반전, 시시하게 저물지 않기 위해 오늘부터 기꺼이 진짜 독학생이 되어볼까 한다.


#클랩북스 #독학이라는세계 #배우고익히기 #삶을위한공부 #계몽 #네가진짜로원하는게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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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발을 담근 채 독고독락
이새벽 지음, 김승아 그림 / 사계절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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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여고생 '이연'은 과거 친구들에게 심한 따돌림과 배신을 당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세상에 '진짜'는 없으며 모든 관계와 감정은 '가짜'일 뿐이라고 믿으며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지낸다. 그러던 중 이연은 학교 도예부에서 '성빈'이라는 남학생을 만나게 된다. 흙을 어루만지는 성빈의 섬세하고 다정한 모습, 그리고 묵묵히 곁을 내어주는 태도에 이연은 점차 마음을 열게 되고 결국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성빈은 이연의 고백에 충격적인 진실을 털어놓는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안드로이드'라는 것이다. 성빈은 그 증거로 자기 손을 물에 푹 담근 채 보여준다. 오랜 시간 물에 발이나 손을 담그면 피부가 쭈글쭈글해지는 인간과 달리, 성빈의 손은 아무런 변화 없이 매끈하고 늘씬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연이 성빈의 정체에 충격을 받을 틈도 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엿듣던 누군가가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연은 성빈의 정체가 학교 전체에 소문나 그가 배척당할까 봐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 소설은 정체가 탄로 날 위기에 처한 안드로이드 성빈과 그를 지키고자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비겁함과 마주하게 되는 이연의 내면을 통해 진정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은 겉보기엔 안드로이드 소년과 인간 소녀의 풋풋한 성장 로맨스 같지만, 그 이면에는 기술이 극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서늘한 경고가 숨어 있다. 특히 안드로이드가 겉보기에 인간과 완벽하게 흡사해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혼란과 문제점들을 상상해본다.

 

가장 먼저 대두되는 문제는 인간관계와 감정에 대한 근본적인 혼란과 신뢰의 붕괴다. 이연이 성빈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외형과 행동 양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계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깊은 감정을 내어주었다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이 느끼는 배신감과 자괴감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이는 타인에 대한 의심으로 번져 향후 인간 사회 전체의 관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릴 위험을 경고한다.

 

또한, 완벽한 안드로이드의 존재는 인간의 심각한 열등감을 유발하고 '인간다움'의 가치를 상실하게 만든다. 작품 속 성빈은 예술적 감수성이 필요한 도예를 훌륭히 해낼 만큼 섬세하며 육체적으로도 흠결 없는 존재다. 반면 이연을 포함한 인간들은 남을 따돌리고, 거짓말을 하며, 겁을 먹고 비겁해지는 등 수많은 결함을 드러낸다.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공감 능력과 감수성마저 훌륭히 모방하면서 물리적으로 완벽하기까지 하다면, 불완전한 인간은 비인간 앞에서 고유한 쓸모와 존재 이유를 잃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인간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가 일상에 섞여 들면 인간의 내재적 폭력성과 배타성이 비인간을 향해 집중되는 혐오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연이 누군가 엿들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성빈이 '나와 다른 존재'임이 밝혀지는 순간 그에게 쏟아질 인간들의 무자비한 차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간과 지나치게 흡사한 기계가 오히려 인간 사회의 비합리적인 차별과 폭력성을 자극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완벽한 안드로이드 '성빈'을 하나의 거울로 삼아 이연의 지질하고 비겁한 진짜 인간성을 낱낱이 비춘다. 사람과 지나치게 흡사한 안드로이드가 초래할 가장 큰 비극은 그들이 너무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 완벽함 옆에 섰을 때 인간의 이기심과 비겁함 같은 결함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점 아닐까. 다행히도 인공지능이 날로 발전하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가는 인간성을 우려하는 목소리 역시 높아지고 있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 이면에는 가장 인간다워지고자 하는 본성의 외침 또한 존재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 모순된 지점을 파고들어, 포기하고 실수하면서도 끝내 서로의 손을 맞잡으려는 인간만의 연대에서 희망을 찾는다. 기계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넘어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인간다운 존재인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통해 진정한 인간성의 무게를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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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연구 - 비밀에 부쳐진 말들, 삭제된 존재의 배회, 트라우마의 체현
그레이스 M. 조 지음, 성원 옮김, 김은주 해제 / 동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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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찾는 화려하고 매력적인 문화 선진국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방탄소년단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술과 세련된 드라마와 영화는 전쟁과 빈곤을 딛고 일어선 우리나라의 성공 신화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무대가 눈부실수록 그 무대 뒤에 드리운 그림자는 더 어둡기 마련이다. 저자 그레이스 조의 기록은 우리가 일부러 모른 척해 온 그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실의 문을 용기 있게 열어젖힌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평생 인자한 미소 뒤에 말 못 할 사연을 숨겨온 우리 할머니가 떠오른다. "사실 나에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아픈 젊은 날이 있었다"라며 깊은 밤 비밀 이야기를 건네받은 듯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실 이 책은 사회와 인간의 마음을 분석하는 어렵고 딱딱한 전문 용어들이 글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 침대 머리맡에서 편하게 읽을 만큼 대중적인 부류는 아니다. 때때로 낯설고 학술적인 단어들 앞에서는 숨을 고르고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록'이야말로 이 책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 하나뿐인 무기라는 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저자는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의 비극을 흔한 에세이나 감상적인 소설의 언어가 아닌, 차갑고 예리한 학문의 언어로 쓰고자 했을까. 그것은 아마 '속상하다', '가슴 아프다' 같은 일상적인 말들로는 강대국과 국가가 개인에게 남긴 상처의 깊이를 다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칫 '한 개인의 기구한 팔자''신세 한탄'으로 묻힐 뻔한 기지촌 성노동자 여성들의 고통은, '고향을 떠난 이들의 삶', '사회가 가한 폭력' 같은 정교한 개념을 통해 비로소 '외면해선 안 될 역사적 진실'로 세상에 드러난다. 차가운 학술 용어가 값싼 동정 대신 상처를 준 거대한 사회 구조를 명확히 짚어내는 수술칼이 되어준 셈이다. 덕분에 잊혔던 존재들은 가장 당당한 모습으로 제 자리를 찾는다.

 

책의 중심을 관통하는 철저한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국가적 성공이라는 거창한 이야기 뒤에 얼마나 끔찍하게 사람을 소외시키는 과정이 숨어 있는지 보게 된다. 6·25 동란 직후 한국이 무너진 경제를 살리고 국가 안보를 최우선시하던 시절, 가장 힘없고 취약한 여성들은 달러를 벌어오고 동맹을 유지하는 도구로 철저히 이용당했다. 그러나 이후 국가가 좋은 옷을 차려입고 국제사회에 번듯하게 서게 되자, 이들의 존재는 근대화된 조국의 '부끄러움'이자 '오점'으로 취급되어 역사의 공식 기록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미국이라는 낯선 땅으로 건너간 10만 성노동자 여성들의 삶 역시 숨기기의 연속이었다. 이민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적인 성공'을 위해 과거의 모든 상처는 없었던 일이어야 했고, 결국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끔찍한 시대의 폭력을 묻어두는 완벽한 밀실이 되었다. 저자는 이를 분석하며 '유령'이라는 아주 적절한 비유를 가져온다. 여기서 유령은 무서운 이야기 속 귀신이 아니다. 정상적인 역사에서 쫓겨나 눈에 보이는 형태는 잃어버렸지만, 끊임없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주변을 맴돌며 자신을 증명하려는 억눌린 에너지 그 자체다.

 

더욱 소름 돋고도 놀라운 통찰은 이 유령 같은 상처가 세대를 뛰어넘어 자식에게 대물림된다는 뼈아픈 분석에 있다. 부모 세대가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삼켜야 했던 침묵과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자녀 세대의 몸과 마음속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때때로 할머니나 어머니가 보이던 헛것이나 환청, 앞뒤가 맞지 않는 혼잣말들을 우리는 그저 개인의 '노망'이나 '정신병'으로 취급해 왔다. 그러나 저자의 눈을 빌리면 그것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은 역사가 마침내 입을 열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외치는 방식'으로 새롭게 풀이된다. 이 부분에서 독자는 저자의 학문적 개념이 의외로 더 깊은 차원의 공감과 치유를 끌어내는 기현상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저자는 상처받은 이들에게 "조리 있게 네 아픔을 증명해봐"라며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태도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조각난 기억을 억지로 짜 맞추는 대신, 부서진 고백과 이야기들을 그대로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진실을 흐리려는 게 아니라, 산산이 조각난 마음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려는 치열한 노력이다.

 

슬프게도 이 책이 고발하는 비극은 완전히 끝난 과거의 일이 아니다. 수백 년 전 낯선 땅으로 끌려갔다 돌아와 가문의 수치로 몰렸던 여인들(환향녀), 일제강점기의 끔찍한 전쟁터로 희생된 소녀들(위안부), 미군 부대 주변에서 살아가야 했던 여성들(양공주)로 이어지는 착취의 역사는, 오늘날 화려한 대한민국의 뒷골목에서 거칠고 힘든 일을 감당하는 다른 나라 이주 여성 노동자들의 삶 위로 고스란히 겹쳐진다. 철저한 연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결코 이 거대하고 잔인한 폭력의 반복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란 화려한 포장지로 부끄러운 곳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딛고 선 땅 밑의 감춰진 진실을 똑바로 마주하고 뼈아픈 반성을 감당할 수 있는 나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령 연구는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적 빚을 기억나게 하는 학문적인 청구서다. 비록 읽어내는 과정은 마음이 편치 않고 고통스럽지만, 이 책을 덮는 순간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크기가 한 뼘 더 자라있음을 느낀다. 평생을 '수치스러움'이나 소외된 존재라는 낙인 속에 숨죽여 살아야 했던 내 할머니의 굽은 등을 이성적이고 지적인 언어로 뜨겁게 안아주는 이 다정하고 놀라운 경험을 모두가 느껴보면 좋겠다.


#한달한권할만한데 #온라인독서모임 #6월의책 #유령연구 #양공주 #성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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