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역사 - 소리로 말하고 함께 어울리다
로버트 필립 지음, 이석호 옮김 / 소소의책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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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늑한 카페에서 차 마시며 책을 읽는데 들릴 듯 말 듯 귀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 기분 좋은 저음의 재즈 선율이 깔린다. 술기운에 떠드느라 왁자지껄한 선술집에서 강한 비트의 록 음악에 맞춰 심장이 쿵쾅거린다. 온갖 종류의 향기가 코를 자극하는 백화점 향수 판매장에 우아한 클래식 피아노곡이 흐른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찾은 대형 할인 매장에는 신나는 힙합이 울려 퍼진다. 그런데 이처럼 매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살면서, 여태까지 음악의 역사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있었던가?

 

이 책은 고전 기타리스트이자 음악학자인 저자가 집필한 음악사 입문서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서양 음악의 주요 흐름을 친절하고 쉽게 소개하고 있다. E.H. GombrichA Little History of the World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아 복잡하고 방대한 음악사를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스 시대의 음악 철학에서 시작하여 중세 교회 음악, 르네상스 다성음악, 바로크 시대의 대가들(바흐, 헨델 등), 고전주의(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낭만주의와 현대 음악까지 시대별로 정리되어 있으며 마지막에는 재즈, 영화 음악, 대중 음악, 그리고 세계 음악의 통합적 시선까지 확장되어 폭넓은 음악 문화의 역사적 맥락을 조망한다.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여느 음악사 서적처럼 유럽 중심의 고전 작곡가와 작품, 시대별 음악 양식의 발전사가 소개되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음악사 계보를 떠올리며 어느 정도의 익숙함과 약간의 지루함을 감수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이전에 접했던 음악사 책들이 대부분 그러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던 탓이다.

 

그러나 이 책은 처음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유럽 고전음악에 대한 언급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본질적으로 이 책은 음악이라는 인류 보편의 예술을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넘어 통시적 시선으로 풀어낸다. 선사시대부터 현대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공간 속에서 음악이 어떻게 생성되고 확산되었는지를 폭넓게 탐구한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단순한 시간순의 나열이 아닌, 음악이 인간 공동체와 맺는 관계를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원시 부족의 의식에서 울려 퍼진 타악기의 리듬, 중세 종교와 함께 성장한 성가, 제국의 교역로를 타고 전파된 악기와 선율, 그리고 현대 대중음악의 산업화까지모든 흐름이 유기적인 하나의 서사로 엮인다.

 

문체는 서정적이고 설명적이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음악 이론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라도 부담 없이 내용을 따라갈 수 있을 만큼 친절하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교차 수분(cross-pollina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권의 음악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했는지를 조명하는 대목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 리듬이 재즈와 블루스의 뿌리가 되고, 라틴 음악이 힙합과 결합되며, 인도 전통 음악이 영국 록 밴드에 영향을 미치는 등 장르 간 상호작용의 역동성이 실타래처럼 펼쳐진다.

 

저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스의 의례에서부터 아랍의 마캄, 인도의 라가와 탈라, 중국의 금, 인도네시아의 가믈란, 아프리카의 폴리포니 등 주요 음악 전통을 폭넓게 조명한다. 이들은 각기 고유한 특색을 지니는 동시에 서로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다. 이러한 관점은 유럽 음악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럽 음악은 고립된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기보법의 발전, 지중해 문화의 융합 등 외부 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변화해 온 유기체적 존재로 그려진다.

 

악기의 발명과 개량,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의 등장, 연주회장과 극장의 확산은 사회 구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교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귀족과 중산층의 후원이 활발해지면서 음악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의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산업혁명과 기술의 진보는 음악 출판업과 교육 기관, 상설 공연장의 발전으로 이어지며 음악의 산업화를 가속했다.

 

20세기 이후, 음악은 예술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와 정체성을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흑인 공동체의 저항과 희망을 담아낸 블루스, 재즈, 이후의 팝, , 힙합은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음악은 이제 누구나 만들고 소비할 수 있는 민주적 형태로 변모하였으며,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의 발달은 음악의 생산과 유통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음악 산업은 글로벌 자본시장의 중심축으로 부상하였고, 장르와 국경을 넘나드는 거대한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이 책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과 창작 활동 역시 놓치지 않는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 헨리 퍼셀, 헨델,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고전주의 음악가들의 실험은 음악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밥 딜런과 아레사 프랭클린이 대중성과 메시지를 동시에 추구하며 새로운 문화의 장을 열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음악사에서 오랫동안 소외됐던 여성 음악가들에 대한 조명이다. 피렌체의 귀족 여성, 19세기의 여성 피아니스트들, 클라라 슈만의 사례를 통해 여성의 음악 활동이 곧 사회적 금기와의 싸움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음악사의 또 다른 축이자 오늘날 여성 예술가들의 기반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단순한 음악사 개론서가 아니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음악은 왜 존재해왔는가, 음악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음악은 인간 감정의 언어이며, 역사와 문화의 기록이고, 저항의 목소리이며, 일상의 리듬이다. 책은 방대한 범위를 다루면서도 명료한 서술을 유지하며, 독자에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음악의 자리를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각 장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구성되어 있으며, 독자는 시공을 초월한 문화 여행에 동참하는 듯한 몰입감을 경험하게 된다.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음악에 대한 지식 이상의 것들이 남는다. 그것은 음악을 통해 인간과 문명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 책은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문명과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유익한 독서가 될 것이다. 재미와 정보, 예술성과 학문성을 모두 겸비한 이 책은 애정을 담아 추천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음악은 언제나 인간과 함께 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은 그 긴 여정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소중한 기록이다.

 

#인문학 #음악의역사 #바로크 #낭만주의 #소소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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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역사 - 소리로 말하고 함께 어울리다
로버트 필립 지음, 이석호 옮김 / 소소의책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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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의 긴 여정을 짧고 친절한 이야기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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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공적 감정 앳(at) 시리즈 5
앤 츠베트코비치 지음, 박미선.오수원 옮김 / 마티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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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오랫동안 개인의 생화학적 문제로 여겨져 왔다. 도파민이나 세로토닌과 같은 뇌 속 화학물질의 불균형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며, 치료 역시 개인 내부의 생물학적 이상을 바로잡는 데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만약 우울이 단지 개인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 집단학살, 노예제도, 제도적 차별과 같은 집단적 역사 속에서 탄생한 감정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를 살펴보면, 원주민, 흑인, 라틴계 공동체는 오랜 시간 동안 식민 지배, 노예제도, 문화 말살 정책, 제도적 인종차별에 시달려 왔다. 그 역사적 억압은 현재까지도 사회 구조와 법, 제도를 통해 지속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들은 여전히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며, 관련 치료나 연구조차 부실한 실태를 지적한다. 이들이 겪는 우울은 단지 뇌의 기능 이상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것은 억압의 흔적이자 사회적 폭력에 대한 정서적 반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작년 말 비상계엄령 선포를 기점으로, 내란 및 외환 혐의가 헌정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헌법재판소는 이를 근거로 탄핵을 인용하였다. 이 사태는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 국민 전체에게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최근에는 강력한 외환 관련 증거까지 제시되면서 국민적 분노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 분노는 단순한 일시적 감정에 그치지 않았다. 많은 국민이 허탈감, 무력감, 냉소, 심리적 피로를 공유했고, 이는 일명 내란성 질환으로 불릴 만큼 집단적인 정서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감정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은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였고, 이는 정서적으로 깊은 우울로 이어졌다.

 

이처럼 우울은 단지 개인의 병적 상태가 아니라, 공동체가 겪는 상실과 붕괴의 감정이며, 사회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정서적 감각일 수 있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폭력, 잊힌 역사, 반복되는 억압은 결국 개인의 내면에 스며들고, 그 감정은 우울이라는 형태로 표출된다.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가 대물림된 트라우마를 겪는 방식이나, 한국 사회가 탄핵 정국 속에서 경험한 정서적 혼란은 모두 우울의 사회적 뿌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런 현상과 궤를 같이하며, 저자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정서로서 우울을 바라볼 때 단순히 치료의 대상으로만 삼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저자가 직접 기록한 30쪽가량의 '우울 일지'로 시작하는데, 학자로 활동하면서 겪었던 여러 감정들을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외로움과 절망감을 경험했고, 그러한 감정들을 솔직하게 써 내려갔다. 얼핏 보면 우울증이라는 개인적 문제와 치료 경험을 담은 자서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이 개인적인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더 큰 사회적, 정치적 문제와 연결된다. 또한 페미니즘 연구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최근에는 퀴어나 페미니즘 연구에서 감정과 느낌을 단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이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저자 역시 같은 입장으로, 우울이라는 감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정신적, 정서적, 정치적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가 특별히 주목하는 점은 이러한 감정을 억지로 명확한 정치적 메시지로 변환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우울이라는 감정 그대로에서 학문적이고 예술적인 잠재력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우울이 단순히 잘못된 감정이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 연대를 이루고 정치적인 공간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평범한 우울감을 단순한 증상으로 보지 말고, 더욱 복잡한 사회적이고 공적인 맥락 속에서 바라볼 것을 권한다. 이런 시각은 특히 우울증을 주로 의료적 관점에서 이해하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이 최근의 페미니즘 감정 연구의 흐름과 잘 맞물린다고 설명하며 설득력을 더한다.

 

이전에 발표한 책 감정의 아카이브에서도 마찬가지였듯이, 저자는 다양한 분야와 자료를 통해 우울의 개념을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관점에서 확장시켜 나간다. 독자들이 쉽게 접하지 못하는 낯선 자료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개인적인 경험담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일상적인 우울감 속에서도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저자의 창의적이고 개인적인 시각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연결지으며 새로운 관점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식민지의 역사적 흔적, 사회 계급 문제, 인종 문제, 그리고 퀴어 이론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이 등장한다. 우울이라는 감정을 단지 개인의 내적 문제로 한정하지 않고,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과 연결된 공적 감정으로 새롭게 바라본다.

 

또한 이 책은 미국의 철학자 코넬 웨스트의 글과 슬픔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정치적 폭력이나 인종주의, 정신적인 충격 등의 다양한 문제들을 다룬다. 특히 '일상적인 인종주의 아카이브'라는 개념을 통해 우울을 인종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기존의 우울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주로 백인 중산층의 시각에서 한정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저자는 또한 우울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의 욕망과 함께, 의료적이고 사회적인 우울 모델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균형 있게 제시한다. 우울을 단순히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감정이라고 단정 짓지 않으면서도, 슬픔과 회복, 정치적 활동에 대한 기존의 일반적인 생각들에 의문을 던진다. 대학 교수답게 개인의 일기와 학술적 분석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며, 설득력이 높고 매력적이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퀴어와 페미니스트 공동체가 진행하는 공예나 예술 활동을 통해 '습관과 치유'를 논의하면서, 우울을 단지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서 작은 습관들이 가진 긍정적인 힘을 강조하며 우울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우울을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공적이고 사적인 삶 속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질문과 감정들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예상하지 못했던 희망을 전달한다.

 

이 책은 단순히 우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해석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낯설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왜 우리는 늘 지쳐 있는가, 왜 회복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나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향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가 있다. 우울을 덜어낼 실천적 방법으로 함께 모여 수공예품을 만들고, 글을 쓰고, 집회 참여할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개인의 감정 뒤에 가려진 사회 구조를 드러내며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익숙한 방식으로 감정을 소비해왔는지를 반성하게 만든다. 내란성 질환으로 무기력하고 지친 이들에게 너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말은 가장 강력한 위로일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위로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무언의 연대를 제안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꼭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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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버멘쉬 -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선언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어나니머스 옮김 / RISE(떠오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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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서 역자는 이 책의 원전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Human, all too human>이라 밝히고 있다. 그는 정치와 종교, 사회와 철학 등 여러 분야에 대한 날 선 비판으로 가득한 원전의 내용을 일반 독자가 읽기 쉽도록 순한 맛으로 다듬어 내놓았다고 설명한다. 니체 철학의 흐름을 살펴보면 이 원전은 말 그대로 결정적인 갈림길이라 할 수 있다. 그전까지 예술과 음악의 무대 뒤에서 무겁고 조심스러운 비평을 쓰던 니체는 이 책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철학의 정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대의 거물이었던 바그너와 절연하고 정신적 방황을 겪던 시기에 이 책을 썼기 때문에 그 과정은 전혀 순탄치 않았다. 역설적으로 위기의 순간이 한 인간을 진정한 철학자로 밀어 올린 셈이다. 이후의 작품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안티크리스트도 모두 이 책을 씨앗 삼아 자라난 철학적 열매들이다.

 

무언가를 이루는 사람은, 삶이 고단하다고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고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길을 찾는다. 고민이 많다고 해서 당신이 약한 것은 아니다. 인생이 혼란스럽다고 해서 틀린 것도 아니다. 정말 약한 사람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p49. 정말 쉬운 길이 있을까?)

 

이 책은 형식부터 범상치 않다. 아포리즘, 즉 짧은 격언이나 단상으로 구성된 문장들이 마치 철학적 스냅사진처럼 나열된다. 때로는 상반되거나 모순적인 말이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건 단순히 말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독자의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하려는 배려(?)로 보인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짙게 느껴지는 형식이지만, 니체는 그 틀 안에서 훨씬 더 자유롭고 공격적인 사유를 쏟아낸다. 말하자면 아포리즘은 니체 철학을 담기엔 조금 작지만 그만큼 응축된 진심이 느껴지는 그릇이다.

 

이 책은 자기 극복과 성장, 인간관계와 감정 조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등 113가지 조언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엮었는데, 영역별로 세분하자면 철학, 심리학, 예술, 정치, 종교, 가족, 문화까지 안 건드리는 데가 없다. 한마디로 전방위 조언 종합세트. 표현만 부드럽다 뿐이지 읽다 보면 어느새 정면으로 호되게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인데, 문제는 그게 굳이 부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니체의 날카로운 조언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기존 가치들을 갈아엎고 그 자리에 새로운 토대를 세우자는 제안에 가깝다.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신박하다. 예를 들면, 니체는 종교를 인간의 나약함이 낳은 허상이라고 본다. 신이 사랑이라 말할 때 그는 냉소한다. 기독교 도덕은 자연의 이치와 충돌하며 인간을 병들게 하는 체계라고 일갈한다. 플라톤이나 쇼펜하우어마저도 형이상학적 환상에 빠진 인물로 평가절하한다. 음악과 예술조차 그의 비판의 사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감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그 틈에 형이상학적 믿음을 슬쩍 끼워 넣는다고 지적한다. 꽤 무례한 비평 같지만 곱씹어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남을 깍아내리지 않고도 충분히 빛나는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자시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남의 그림자를 지우려 애쓰지 말고, 스스로의 빛을 더 밝히는 데 집중하라. 결국 그 빛이 당신을 진정으로 높여줄 것이다.(p145. 타인의 성공을 비웃지 마라)

 

니체의 자유에 대한 시선도 흥미롭다. 그는 자유의지라는 개념 자체가 신화에 가깝다고 본다.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은 권력 의지라는 본능적 추동력에 이끌려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단지 지배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내적 에너지에 가깝다. 그 말인즉슨,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하려는 존재이며 그 본성 속에서 진짜 윤리를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사유는 이후 푸코 같은 현대 철학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권력이라는 말이 주는 인상을 제외하면 의외로 낭만적인 철학이다.

 

그리고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초인(Übermensch)’이다. 초인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이 책 이후에 나온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많은 사람이 초인을 어떤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쯤으로 오해한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울퉁불퉁한 근육질과 삼각팬티에 망토 입고 하늘을 날며 악당들을 혼내주는 그런 마블 캐릭터가 아니다. 초인은 기존의 도덕과 관습을 넘어 자기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는 자율적인 인간이다. 그는 외부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내면에서 삶의 방향을 찾는다. 니체는 이 초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당대의 상투적인 가치관을 정면으로 부수려 했다. 이 개념은 영원회귀사상과도 맞물린다. 지금의 이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 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며, 그런 삶을 살아내는 존재가 바로 초인이다. 영원회귀는 단순한 순환론이 아니라 한순간 한순간을 전력으로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에 가깝다. 초인은 그 명령을 내면화하고 실천하는 존재이다. 이런 초인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는 무한한 정보, 가치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지만 실은 더 혼란스럽고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많다. 니체는 그런 시대일수록 더더욱 자기만의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너답게 살아라.”라는 말이 철학의 이름으로 이렇게 진지하게 들린 적이 있을까? 하긴, 나답게 살기가 그리 쉬운 일이었으면 진작에 고민하지도 않았겠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남을 미워하기보다는 자기 삶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다. 누군가가 나를 싫어할까 하는 질문 대신, 이렇게 바꿔보자.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만큼 나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까. 아마 답은 거의 아닐 것이다.(p224. 악은 여유로운 자의 사치다)

 

물론 초인은 자주 오해받는다. 일부는 이를 독단적이고 공격적인 인간상으로 해석하지만, 니체가 말한 초인은 내면을 깊이 성찰하고 타인과의 조화를 무시하지 않으며 자기 삶의 가능성을 밀어붙이는 존재이다. 무엇보다 두려움 없이 자신을 직면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세, 그것이 초인의 본질이다. 그러니 초인은 영웅이기 전에 참 인간이다. 사족이지만, 그런 점에서 최근에 바뀐 대통령이야말로 현실 세계에서 드물게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초인의 모형 아닌가 싶다. 자기 말을 실천으로 보여주던 그의 과거 행정 실적, 사법 탄압으로도 어쩌지 못한 그의 진실성, 국가의 미래 희망을 건설하기 위한 국민적 권력 위임에 대한 그의 생각 등을 듣고 판단한 결과이다.

 

또한, 니체의 철학은 개념 놀이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실질적인 삶의 태도를 묻는다. “그래서 너는 대체 어떻게 살 건데?”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니체의 문장을 계속 곱씹게 된다. 초인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매일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책임지는 삶을 통해 다가가는 목표이자 과정이다. 개인적으로 무신론자인 나는 니체가 종교를 해부하는 방식에 깊이 공감한다. 약간의 흥분과 함께 야릇한 쾌감마저 느낀다. 하지만 예술가와 작가의 정신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그 날카로운 분석에 숨이 턱 막히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작고 얇아 손에 쥐기 편하지만 의외로 내용은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간결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전해주어 오히려 읽는 내내 긴장과 집중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니체가 철학자로서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한 순간을 담아낸 작품이다. 고전이라 불리지만 그 안에서 오늘의 우리를 마주하게 되고 익숙한 것들을 다시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삶의 태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그것이 이 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힐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니체가 단지 19세기의 철학자가 아닌 지금, 여기의 철학자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인생수업 #니체 #인간적인너무나인간적인 #위버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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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버멘쉬 -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선언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어나니머스 옮김 / RISE(떠오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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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답게 살기가 그렇게 쉬었으면 진작에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후회하게 만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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