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 하버드대 마틴 푸크너의 인류 문화 오디세이
마틴 푸크너 지음, 허진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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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공지능이 날로 발전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고 이에 대한 논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간과되고 있는 것은 인공지능이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도서관을 불태워 중남미 역사를 파괴한 정복자들부터 라디오와 소책자를 이용해 유대인 문화를 주류에서 소외시킨 요제프 괴벨스,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역사를 텔레비전에 방영한 러시아, 소셜 미디어에서 자부심을 느낄 민족 중심적 이유를 찾는 우리의 친구와 이웃에 이르기까지, 기술은 옛날부터 지배층에 맞게 역사를 왜곡하고 문화의 의미를 바꾸는 역할을 해왔다.

 

학자이자 작가인 저자 마틴 푸크너는 오늘날 우리가 벌이고 있는 위의 논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질문을 던진다. 고대 로마인과 2012년 댄스 히트곡 '강남 스타일'을 만든 한국 래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1,000년이나 차이가 나는 인도의 왕과 이집트의 여왕은 무엇이 닮았을까?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문화를 창조하고 시간과 거리를 뛰어넘어 문화를 전파하는 청지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연극 및 영어 비교문학 교수인 마틴 푸크너는 수천 년 인류 역사를 통해 있었던 언어, 예술, 음악의 전환점을 강조하며 독자들을 안내한다. 동시에 그는 문화적 차용의 시간, 즉 많은 사람이 보기에 영락없는 도용의 시간을 통한 불변성을 조명한다. 우리는 그와 '문화'의 기원, 교만의 위험성, 인문학의 미래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다.

 

문화는 종종 먼 과거와 직면하면서 발전한다. 인간은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처럼 과거를 거부하기도 하고, 그리스의 플라톤처럼 과거를 발명하기도 하고, 과거를 복원시켜 다시 이해하거나 새로운 환경에 맞춰 변형하기도 한다.” (95)

 

요즘 우리는 인문학의 소멸에 관해 큰 우려를 표시한다. 대학 신입생 가운데 인문학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이 불과 10년 전만 해도 20%는 되었는데, 요즘은 소위 돈이 되지 않는 학과를 없애는 추세와 더불어 지원하는 학생 역시 급감하고 있다. 오죽하면 문과라서 죄송하다는 자조적인 유행어도 인기를 끈다. 그러고는 이렇게 인문학이 쇠퇴해서야 어떡하겠느냐며 한탄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문화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발전하는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문화의 큰 흐름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이런 것들을 생산할까? 즉각적인 쓸모가 없음에도 상당한 자원을 소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컨대 출신 불문하고 정권만 바뀔 수 있다면 혹은 돈만 잘 벌 수 있다면 지도자의 출신 배경이야 아무렴 어떻겠느냐고 했던 우리 욕망의 투사체처럼, 인문학의 쇠퇴는 대학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므로 특수 계층만의 관심거리일 수 없다. 저자는 인문학자들이 이 분야의 흥미로운 점과 중요한 점을 대중에게 더 잘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인문학에서 멀어지면 무엇을 잃게 되는가도 빼놓지 않는다. 이 책은 문화를 만드는 종으로서의 인간의 역사라고 설명할 수 있는데, 그래서 저자는 약 37천 년 전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이 활동의 깊은 역사이다. 요즘 문화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만, 구글에서 문화를 검색하면 문화 전쟁, 문화 취소, 문화 전유와 같은 용어가 더 많이 나오기 때문에 그 깊은 역사가 중요하다. 우리가 문화와 관련하여 매우 논쟁적인 순간에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나쁘지 않지만, 이러한 논쟁은 지난 20년 또는 기껏해야 지난 2세기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현재적 사고방식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저자는 이 논쟁에서 문화사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 사람이 옳다, 또는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화 세계만 바라보고 그것에 얽매이지 말자'고 말한다. 전 세계 문화의 역사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논쟁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자는 것이다.

 

로마는 그리스에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일본은 중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지 않았음에도 문화를 수입했다. 또 로마에서는 그리스 문화의 수입이 영향력은 컸다 해도 사사로운 개인의 일이었던 반면 일본에서는 황제로 대표되는 국가가 문화 전이를 계획했다. 일본에서는 문화 수입이 정부 정책이었던 것이다.” (153)

 

문화의 특성에 대하여 저자가 강조하는 몇 가지 핵심 사항이 있다. 첫째, 문화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문화는 DNA처럼 다음 세대로 자동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저장하거나 전달해야 하고, 저장 매체와 제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전승이 이루어지는 기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가장 초기의 기관 중 일부는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일했던 쇼베 동굴과 같은 선사 시대 동굴이었다. 저장과 기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며 이후 동굴에서 도서관, 박물관, 대학으로 점차 이동한다.

 

둘째, 후발 주자에 대한 강조라고 설명할 수 있는 시사점이 있다. 우리 문화는 누가 먼저 무엇을 발명했는지, 독창성과 새로운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된 일종의 자부심이 있는데, 문화에는 항상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다는 생각은 점점 더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문화차용도 마찬가지로 이 책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는 어떤 형태로든 차용과 관련이 있다.

 

셋째, 마지막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영웅이 과거의 문화를 다루고 있지만, 그 과거는 매우 다르며 가치와 우선순위가 다른 딴 세상이라는 일종의 겸손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점을 존중했고 심지어 자신과 다른 것을 다루는 데에도 흥미로워했다. 여기에는 그리스인이 이슬람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그리스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아랍어 번역가, 기독교인이 아니었음에도 이교도의 과거에 관심을 가졌던 중세의 기독교 서기관 등이 포함된다.

 

이처럼 고대를 되살리려는 학자와 작가들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쓰는 용어가 인문주의자이다. 왜일까? 무엇보다도 고전을 배우면 인간다움이 강화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241)

 

이 책은 특히 식민주의의 맥락에서 엘리트주의적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다른 문화를 탐구하고 혼합할 때 이러한 함정을 어떻게 피할지를 묻는다. 제아무리 대학교수라도 손가락을 들어 "모두가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저자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의 전략은 문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역학관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그것에 대해 설득력 있게 말하며, 그것에 대한 일종의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식민주의나 민족주의에 대한 암묵적인 입장도 있지만, 그보다는 문화적 전유와 관련된 특정 좌파적 입장이 때때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여러모로 공감하지만, 문화적 전유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은 모두를 빈곤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저자는 또한 과거에 현재의 기준을 적용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정적인 판단 없이 과거를 반성하는 방법은 없을까? 저자는 과거를 그 자체로만 연구해야 한다거나 유리 상자에 넣어두어야 한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과거와 과거가 상징하는 모든 것을 숭배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먼 과거와 마주할 때, 그리고 그 먼 과거와 마주하는 인물들을 마주할 때, 저자는 자기 신념을 배 밖으로 던지지는 않지만 왠지 자기 신념과 의견이 조금 덜 절박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 깨닫게 된다. 저자도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총아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 곳에서 살고 있지는 않지만, 역사 공부를 통해 우리는 겸손함을 배울 수 있다.

 

문화 차용과 소유에 대한 오늘날의 불안감은 인간 문화를 관통하는 폭력의 역사뿐 아니라 문화의 유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소셜 미디어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서 생겨나기도 한다. 1990년대 후반 인터넷과 함께 등장한 한류가 바로 그것이다. (426)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수천 년에 걸친 지리적 정치적 변화에 따라 사회가 어떻게 문화를 공유하고, 때로는 우연히 유물을 훔치고, 사상과 신념의 흐름이 빨라지고 느려지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와 지리 전반에 걸친 문화를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공유와 지식 전달의 핵심에는 실크로드라는 무역 연결망이 놓여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저자는 모든 대륙의 다양한 시대와 장소를 살펴본다. 프랑스의 동굴 벽화부터 그리스 연극과 가부키, 케이팝, 불교에서 기독교, 식민지에서 독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제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일화들로 가득하다. 결론적으로 누구도 문화를 소유할 수 없으며 우리는 모두 지식 전달을 통해 혜택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문화사, 문화인류학 등의 분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필독을 권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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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석학이 알려주는 자녀교육법 : 영어 - 우리 아이를 위한 성공하는 영어학습법 서울대 석학이 알려주는 자녀교육법
이병민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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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한다. 한국에서 영어 학습만큼 애증 어린 대상도 없을 것 같다. 학습자 간의 영어 격차는 물론이고 단순한 학과목 이상의 몸값을 지녔다. 좋든 싫든 대학생들의 취업부터 직장인들의 승진 고과와도 연관이 있다. 예전 어느 때만큼 유행하던 영어 학습 광풍은 안 불지만, 그 중요성은 여전하다. 소위 있는 집에서는 기본적인 사회 자본이기도 하다. 영어, 대체 뭔데 이러나.

영어를 말할 때 필요한 지식은 선언적 지식이 아니라 절차적 지식이다. 많은 사람은 영어학습 과정에서 몸소 영어를 해보면서 절차적 지식을 익힌 경험이 거의 없다. 그래서 영어 문법은 알지만 말이 잘 안된다. (90쪽)


개인적으로 페이스북 친구이기도 한 저자의 이 책은 조기 영어교육은 효과적인가를 묻는 첫 번째 질문부터 왜 오랫동안 영어를 공부해도 못하는지를 묻는 열일곱 번째 질문까지 우리 곁 영어의 정체를 묻는 말로 채워져 있다. 자녀의 성공적인 영어 학습법을 강력히 추구하는 이 작은 책의 질문들은 흔하지만 제법 묵직하다. 그렇다고 일즉일답 답변을 척척 내놓는 식은 아니다. 질문이 주는 뉘앙스와 질문의 배경을 더 살펴보고 답변이 될 만한 내용을 내놓고 있다. 한 마디로 똑 부러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영어 학습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지에 대한 이정표를 보여준다고 해야겠다.

어떤 면에서 학교와 학원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구조로 보인다. 학교는 정해진 진도를 나가고, 학생들은 학원에서 추가적인 공부를 해서 필요한 배움을 이어 나간다. 학부모도 이런 학교 교육에 이의가 없다. 그런 모습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학교에서 자녀가 무엇을 배웠는지 알 수 없지만, 진도를 나갔으면 학교가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144쪽)

나이가 좀 든 우리 세대는 영어를 너무 경직된 자세로 배워왔다는 느낌이다. 주어진 문제에 반드시 답이 있으며 이를 실수 없이 골라내야 하는 환경에서 공부했다. 어느 때는 의사소통 기능의 중요성이 부상하며 문법보다는 대화 위주의 학습법이 유행처럼 지나간다. 한동안 잠잠해지면 또 누군가 혁신성을 앞세운 학습법을 주창하고 곧 이어 들불처럼 유행한다. 본래 학습에 유행 사조는 있는 것이지만 어느 장단에 춤출지를 모르는 학습자들만 착실히 수업료를 내고 있는 형국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중립성이 보장되는 전문가의 의견이고 저자의 책을 선택했다면 현명하신 결정이다. 영어 학습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상식이나 소문을 바로잡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영어 학습 환경이 상당히 민주화(?)되고 하향평준화 된 오늘날, 영어 공포증이나 울렁증이 거의 사라진 때임에도 애써 배운 영어를 제대로 활용하는 인구는 크게 늘어나지 않은 느낌이다. 글쎄 어학이라는게 그렇다니까~! 나의 실생활에 접목되거나 밥벌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거나 아니면 내가 미치도록 좋아해서 학습광 정도는 되어 주어야 제대로 알고 써먹지 않을까 싶다.



왜 모두가 어느 단계에서는 부가 의문문을 배우고, 또 다른 단계에서는 가정법 형태를 배워야 할까. 필요할 때, 어느 정도 능숙해지고 좀 더 세밀한 의미의 차이를 구분해서 사용해야 할 단계가 되었을 때, 그때 배우면 되지 않을까. 문법의 역할은 그로서 충분하다. (194쪽)

영어를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지난하다. 특히 언어학적 사춘기인 10살 전후를 넘겨 배우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다. 토스트마스터즈처럼 직접 영어를 사용하고 실수를 반복해가며 체화시키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단체를 이용할 것을 적극 권장해드린다. 뭔가를 배우는데 나이란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자각부터 생기리라 확신한다.

#이병민 #영어교육 #서울대 #석학이알려주는자녀교육법 #영어학습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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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석학이 알려주는 자녀교육법 : 영어 - 우리 아이를 위한 성공하는 영어학습법 서울대 석학이 알려주는 자녀교육법
이병민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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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왔던 이병님 교수님의 영어 학습에 관한 가장 전반적인 질문과 답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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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 어느 소년병의 기억
이스마엘 베아 지음, 김재경 옮김 / 아고라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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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시에라리온은 부패한 정부군과 무장 반군 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이 나라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관광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최소 10년 이상 지속된 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당하고 수백 명의 소년들이 양측에 징집되어 전쟁의 소모품으로 쓰였다. 반군이 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서쪽의 작은 광산 마을에 도착했을 때 주인공이자 저자 이스마엘은 열두 살이었다. 그가 형 주니어, 친구들과 함께 인근 마을에 나가 있을 때 반군이 습격하면서 부모님과 남동생과 헤어져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도망치는 동안 사람들은 무참히 학살당하고, 반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반군은 오후에 광산 지역을 습격했다. 갑작스레 총성이 터져 나오자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방으로 도망쳤다. 일터에 있던 아버지들은 집까지 쏜살같이 달려왔지만, 가족들 모두 어디로 떠났는지 흔적도 없고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그저 멍하니 빈 집 앞에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찾으려고 학교로, 강으로, 수돗가로 울음을 터뜨리며 뛰어갔다. 아이들은 부모를 찾아 집으로 달려갔으나, 정작 부모들은 아이들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총격이 더욱 거세지자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찾는 일조차 포기하고 마을 밖으로 달아났다. (17쪽)

그렇게 이스마엘의 살아남기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된다. 식량은 구하기 힘들고, 반군뿐만 아니라 그를 의심하는 다른 마을 사람들 때문에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회고록이 아니라면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일을 겪는다. 미국 가수의 랩 음악 테이프가 그의 목숨을 구한 적도 여러 번 있다. 테이프가 신분증도 아닌데, 역설적이지 않은가? 그는 정부군에 징집되어 AK-47 소총을 받고 중위가 나눠주는 코카인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마약에 중독된다. 잠을 거의 자지 않아도 힘이 넘치며 편두통도 멈췄다. 그는 소년 중위가 되어 7살밖에 안 되어 총을 겨우 들 수 있는 소년들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마을을 매복 공격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과 같은 소년들로 구성된 반란군을 만나게 되고, 다른 반란군들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게 된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결정해 행동했는데 그 결과가 안 좋게 난 것뿐이다. 전쟁 중에는 흔한 일이었다. 모든 상황이 초 단위로 급변했고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다. 우리는 상황에 적응해야 했고, 결국 생존 전략이라 할 수 있는 행동을 취해야 했다. 그날 밤 우리는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사람들이 자는 동안 음식을 훔쳤다. (50쪽)

이 책 <집으로 가는 길>은 이스마엘의 집이 파괴된 순간부터 재활을 거쳐 유엔 회의에서 다른 소년병들을 대표해 연설하고 마침내 미국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여러 측면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멀고도 강렬하며, 냉정하게 사실적이면서도 감정적으로 끔찍한 이야기이다. 읽는 내내 주인공이 겨우 열두 살이라는 점을 계속 되뇌게 된다. 글은 때때로 사색에 잠긴 어른의 성숙한 어조를 띠기도 하지만, 대체로 15세 남자아이가 학교에 제출하는 보고서를 연상시키는 스타일이다. 이는 단순한 글쓰기 방식이지만, 그가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 수도 있으며, 분명한 점은 꾸밈이 아닌 사실이라는 데 있다. 그는 전쟁 중에 보고 겪은 일들로 인해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데 그것은 상상해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냉정하고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다.

이따금 정어리와 콘비프에 가리를 곁들여 먹거나 코카인, 브라운브라운, 하얀 알약을 섭취할 때에만 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마약들을 섞어 먹으면 활력이 넘치고 사나워졌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물 마시는 것만큼 쉬웠다. 첫 살인 이후로 내 마음은 철컥 문을 닫았을 뿐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남기는 법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적어도 그래 보이기는 했다. (210쪽)

혹자는 전쟁의 배경이 된 정치적 상황 등을 자세히 다뤘다면 더 흥미로웠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분명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지긴 한다. 이 책은 그런 종류의 회고록은 아니며, 만약 독자들이 그런 점을 기대했다면 전직 소년병에 대해 매우 일반적이지 않은 기대를 품은 것이다. 오히려 이 책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지 않는 전쟁의 이면, 즉 어떤 면에서는 전쟁을 인간화하고 둔감하게 만드는 점을 들여다볼 수 있다. 텔레비전을 통해 이런 종류의 일을 단순히 시청하는 것과 슬프고 무서운 개인적인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다큐멘터리의 해설처럼 종종 감성적이지 않은 글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 글을 더욱 믿을만하고 가슴 아프게 만든다.

나는 ‘초록 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유리하고 교묘한 위치를 선정하는 면에서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손바닥만 한 수풀 아래 숨어서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족히 마을 하나를 쓸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위님이 지어주신 별명이었다. (248쪽)

유엔 회의에서 이스마엘의 연설이 시적이거나 심오하거나 웅변술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지옥 같은 삶을 살아온 아이의 입에서 나온 솔직한 고백이었기 때문에 감동적이다. 전쟁 경험이 그를 더 성숙하게 도와주지는 못했지만, 한동안은 확실히 거칠게 만들었다. 이스마엘은 군인으로서의 경험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고 어떻게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그 상황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어떻게 그 상황을 벗어났는지에 대해 균형 잡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쉽게도 그가 어떻게 소년병의 사고방식을 떨쳐버리고 성공적인 '재활'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지 않는다. 이어 미국으로 건너간 과정도 설명하지 않는데, 아마도 미국 이민국이 책에 그런 내용을 싣는 것을 원치 않았거나 이스마엘 자신이 관련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전쟁의 잔혹한 참상도 참상이지만, 책을 옮기는 내내 작가가 독자들에게 이거 하나는 간절히 이야기하고 싶어하는구나 느낀 점이 있었다. 바로 시에라리온 소년들에게 소년병이 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반군 밑으로 들어가느냐 정부군 밑으로 들어가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397쪽)

요약하자면 이 책은 겁이 많아도 지략이 뛰어난 소년에게 커다란 총을 쥐어 주고 사람 죽이는 법을 가르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강력하고 본능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또한 모든 전쟁이 그렇지만 특히 이런 종류의 내전은 무고한 행인을 죽이고, 집에 있는 사람들을 불태우고, 강간하고 약탈하고 공포에 떨게 하면서도 똑같은 일을 저지르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나라를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관련자들이 인간성을 잃고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무의미한 측면을 고통스럽게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옥이 있다면 아마 바로 여기일 것이라는 시선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지금은 소년병 같은 주제의 단골 추천 도서가 된, 지옥 같은 전쟁에서 살아 나온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길 권해드린다. (2023-12-22)

#집으로가는길 #소년병 #시에라리온 #이스마엘 #내전 #한달의기록 #한달한권할만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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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짧은 우주의 역사 - 빅뱅 이후 138억 년
데이비드 베이커 지음, 김성훈 옮김 / 세종연구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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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우주의 모든 이 나타난다. 공간이 나타나 그 모든 을 담을 장소를 부여한다. 시간이 나타나 그이 형태를 바꾸는 것, 즉 역사를 가능하게 한다. 그 모든 은 원초적 에너지이자 물질이며 이것이 우리 주변의 다양한 사물로 바뀐다. (16)

 

저자는 138억 년 전 빅뱅의 순간부터 년 후의 미래까지 우리를 안내한다. 놀랍도록 방대한 숫자인데, 300페이지가 조금 안되는 분량으로 이를 달성한다. 전체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역사의 시기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 무생명 단계: 138억 년에서 38억 년 전.

2. 생명 단계: 38~315,000년 전.

3. 문화 단계: 315,000년 전부터 현재까지.

4. 미지의 단계: 현재에서 년 후

 

서문을 보면 인류가 여기에 얼마나 짧은 시간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전체적인 흐름에서 인류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인류가 나타나기까지 수십억 년이 걸렸고, 겨우 30만 년밖에 살지 않았으며 아마도 그보다 더 짧은 시간 안에 사라질 것이다. 그 후에도 대자연 지구와 우주는 마침내 소멸할 때까지 수천억 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저자가 책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사용하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사회의 복잡성(여기에 흥미로운 순환이 설명되어 있다).

2. 사회/유기체/존재의 에너지 흐름.

3. 공동 학습(우리가 발전하고 혁신하는 방법).

 

위의 내용은 저자가 여기서 논의한 복잡한 문제들을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좋은 틀을 제공한다. 이 책은 전문적으로 저술된 지적인 책이며,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이렇게 짧은 책에서 이런 내용을 다룬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지구는 이미 불과 얼음, 우기와 건기, 극심한 폭염과 혹한 등 많은 일을 겪어왔고, 앞으로도 더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지구가 살짝 덜 치명적인 곳으로 변하면서 생명에게 생존 가능성이 열린다. 분화와 소행성 폭격을 통해 최초의 바다가 만들어진다. 그 바다 안에서 긴 유기 화학물질 가닥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 유기 화학물질이 자기복제와 진화를 시작하며 생명의 출현을 촉발한다. 이 생명체 중 일부가 광합성 생명체가 된다. 이 광합성 생명체가 대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수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이런 역경을 이기고 진핵 생명체와 유성생식이 진화한다. 지구 위에서 일어난 이 마지막 눈덩이 지구 사건으로 최초의 다세포 생명체가 만들어진다. (76)

 


전반적으로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저자는 우주의 탄생부터 지구의 형성, 세포 하나에서 시작된 생명의 진화를 거쳐 현대 인류 사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어떻게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흥미진진하고 종종 유머러스하게 살펴본다. 한편으로는 이 책이 세계의 짧은 역사에 초점을 맞추기가 광범위한 범위와 상충되는 것 같아 세부적인 면에서 아쉬움이 없지 않다. 과학, 인류학, 역사의 흥미로운 사실과 유머를 적절히 섞은 저자의 발표 스타일은 과학이나 인류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지 않더라도 누구나 이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의 설명은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특히 복잡한 시스템을 통해 또는 시스템 간에 에너지가 교환되는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다이어그램을 사용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 지구와 우주의 잠재적 미래에 관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어 생각을 자극하는 독서를 할 수 있었고, 우주가 끝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저자의 예측이 상당히 흥미롭다.

 

길게 이어 내려온 혈통으로부터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한다. 집단학습이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해진다. 인류 역사 98퍼센트 동안 250억 명 정도의 사람이 수렵채집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 유전자 병목 현상으로 우리의 유전자 풀이 1만 명 미만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148)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이 너무 짧다는 점이 단점으로 작용한다. 저자의 스토리텔링 스타일은 흥미롭게 읽히지만, 특히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진화를 다루는 처음 두 챕터에서 많은 부분을 줄여야만 했다. 그 결과 이 책은 마치 저자가 단어 수를 줄이기 위해 더 깊이 있는 정보를 많이 잘라내듯 과학과 역사 모두를 간략하게 요약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차라리 이 책이 비교적 잘 다루고 있는 인류의 역사만 다루었더라면 더 유익한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느낌을 요약하는 가장 효과적인 표현은 '마음에 들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일 것이다. 빠르고 이해하기 쉬운 과학과 인류학 입문서를 원한다면 이 책을 확인해 볼 가치가 있지만, 짧은 분량으로 인해 많은 설명이 손실된 느낌이다. 그래도 저자의 스타일은 재미있고 매력적이며 정보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에 만약 그가 가장 긴 우주의 역사를 쓴다면 꼭 확인해 보고 싶다. 애초부터 "가장 짧은 역사" 시리즈는 방대한 학술서가 아니라 학습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며 그 점에서 저자는 꽤 잘 해낸 셈이다. 과학 및 측정 시스템에 대한 지식에 대한 몇 가지 가정을 하고 있지만 상당히 접근하기 쉬우며, 아마도 고등학교 후반 또는 대학교 초반 수준으로 적당해 보인다.

 

인류세에 살고 있는 인류의 운명은 크게 네 가지 가능성 중 하나로 좁혀진다. 자연적으로 찾아올 우주의 미래에는 복잡성이 서서히 희미해진다. 머나먼 미래의 잠재적 복잡성은 초문명의 등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우주의 최후는 대동결, 대파열, 대붕괴, 대구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254)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흥미로운 공통점은 우주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의 자연의 법칙처럼 점점 더 복잡해진다는 생각이다. 우주를 전체적으로 볼 때 생물학적 복잡성이 천체물리학적 복잡성보다 정말 더 큰가를 묻는 일부 질문은 객관적 사실보다는 가치 판단에 가깝다는 점에서 회의적이지만, 이 생각에 반드시 동의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용기를 내서 서로에게 잘해주자"는 말로 이 책을 사랑스럽게 마무리한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한 종으로서, 그 모든 복잡성에 밀치고 밀리는 가운데 아마 이보다 더 좋은 마무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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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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