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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반타 / 2025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줄거리>
해리 오거스트는 20세기 영국에서 태어나 평범한 생을 마친 뒤, 기억을 지닌 채 같은 시대로 되돌아오는 존재이다. 소설은 그가 여러 차례의 생을 반복하며 자신과 같은 이들이 모인 비밀 결사 ‘크로노스 클럽’과 관계를 맺고, 반복되는 시간을 지식과 기술로 가공해 나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어느 생의 말년에 해리는 같은 부류의 소녀로부터 ‘세상의 종말이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는 경고를 받게 되며, 이 메시지가 릴레이 방식으로 과거로 거슬러 전달된 것임을 알게 된다. 해리는 이후의 생들에서 경고의 원인을 추적하기로 결심한다.
여러 생에서 해리는 학문과 정보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고, 케임브리지에서 천재적 물리학자 빈센트 랭키스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가 환생을 반복하는 ‘칼라차크라’임을 눈치채며 우정과 경쟁의 묘한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세계의 파국을 앞당기는 발원이 빈센트가 주도하는 ‘양자 거울’ 프로젝트임이 드러나면서 관계는 균열을 맞는다. 양자 거울은 하나의 관측으로 우주의 총 상태를 역 추론하려는 시도이며, 이를 위해 빈센트는 칼라차크라들의 축적된 지식을 동원해 기술 발전을 비정상적으로 가속하고 있다. 그 부작용으로 역사적 사건과 발명이 예정 시점보다 앞당겨지며, 세계의 균형이 무너질 위기에 놓인다.
빈센트는 크로노스 클럽의 네트워크를 장악하려 하고, 해리의 출생 정보라는 약점을 이용해 협박과 회유를 반복한다. 칼라차크라에게 출생 정체의 노출은 영구적 제거로 이어질 수 있기에, 두 사람의 대립은 지식전이자 심리전이 된다. 해리는 여러 생을 전략적 자원으로 삼아 자금줄을 끊고, 연구 인맥을 이간하고, 핵심 기술의 계보를 끊는 등 장기적 방해 공작을 설계한다. 마침내 해리는 빈센트의 프로젝트가 임계점에 도달하기 직전 교란에 성공하며 기술 가속의 광란을 멈춘다. 그 결과, 앞당겨지던 종말의 징후는 사라지고 해리는 다시 다음 생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이 서사는 기억의 지속이 자아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무한에 가까운 삶이 윤리적 책임을 어떻게 변형하는지, 그리고 지식이 언제 선이 되고 악이 되는지를 묻는 이야기이다. 해리와 빈센트의 대립은 자유의지와 결정론, 진보와 오만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철학적 논쟁의 형식으로 수렴한다.

<세계관과 설정>
해리는 ‘크로노스 클럽’이라는 비밀 조직을 통해 서로를 돕는 칼라차크라의 규칙을 배우는 인물이다. 이들은 죽으면 다시 같은 인생으로 태어나고, 이전 생의 기억을 그대로 지니고 돌아오는 존재들이다. 특히 유년기에는 성인의 기억을 숨기고 연기하는 일이 가장 큰 과제이다. 클럽의 기본 방침은 “역사에 큰 간섭은 금지”라는 원칙이다. 작은 선택 하나가 미래를 크게 뒤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누군가 이 규칙을 어기기 시작하고, 그 결과 “세상의 끝”이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작품 곳곳에는 “우리는 그저 마음일 뿐이고, 마음은 불완전해 잊는다” 같은 문장이 배치되어 있으며, 환생과 기억, 상실과 소속감, 기쁨과 두려움의 스펙트럼이 섬세하게 포착되어 있다. ‘여섯 살이면서 백오십 살인 아이’라는 모순을 다루는 상상력도 인상적인 장면을 만든다.
환생과 기억 유지라는 전제는 여전히 매력적인 설정이다. 해리가 반복되는 삶 속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애정, 선택의 무게 같은 감정이 꽤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칼라차크라가 이루는 비밀 네트워크, 메시지가 세대를 거슬러 전달되는 구조는 독특한 긴장감을 만든다. 이들이 시간의 앞뒤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방식, 전생의 기억을 지워 새 출발을 시도하는 방법, 심지어 영구적으로 죽는 법까지, 세계의 규칙이 비교적 치밀하게 펼쳐진다.

주제 차원에서도 인과의 복잡성, 정신질환의 역사, 친밀한 관계의 미묘함, 가속하는 기술 발전의 윤리적 함의 같은 문제들이 성숙하게 제기된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곧 맞서 싸워야 할 네메시스가 되는 구조는 복수 서사이자 라이벌 서사의 전형을 충실히 변주한 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아쉬운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첫째, 이야기의 전개 속도가 극도로 느리다. 정신없이 빠른 서사보다야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의 느린 호흡은 ‘굳어가는 시멘트를 지켜보는 것 같다’는 비유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인내를 요구한다. 둘째, 설정의 논리가 다소 성기게 느껴진다. 세계의 스케일이 큰 만큼 논리 또한 촘촘해야 하는데, 서사 진행의 편의를 위해 뚫리는 듯한 대목이 눈에 밟힌다. 대표적인 예가 ‘죽음’의 취급이다. 작품 속에서 죽음은 칼라차크라에게 동시에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자 ‘매우 위험한 사건’으로 묘사된다. 주인공은 죽음을 가볍게 농담처럼 다루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독자의 긴장을 끌어올리는 심각한 위험 요소로 강조한다. 이 두 톤이 반복적으로 충돌하면서 감정선이 흔들린다. 셋째, 간섭의 기준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큰 역사 변경 금지”라고 선언하지만, 실제로는 해리의 결혼 상대가 바뀌기도 하고, 전쟁에 참전했다가 말았다가 하는 식의 변화가 허용된다. 어느 선까지가 ‘큰 변화’이며, 누가 어떤 기준으로 통제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화자의 매력이 기대보다 약하다. 열다섯 번의 환생을 겪은 인물의 내면이라기에는 1인칭 내레이션이 의외로 밋밋하다. 장치와 아이디어는 풍부하지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목소리 자체는 다소 심심하다. “시간이 곧 지혜는 아니고, 지혜가 곧 지성은 아니다”와 같은 문장은 분명 인상적이지만, 개별 문장의 멋이 서사의 추진력을 충분히 대신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준다.

<총평>
제목 그대로, 해리 오거스트는 칼라차크라이자 우로보란이다. 죽으면 다시 같은 인생의 출발점으로 돌아가고, 이전 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닌 채 삶을 반복하는 존재이다. 해리는 열한 번째 삶의 끝자락에서 더 어린 우로보란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세상의 종말이 점점 앞당겨지고 있어, 뒤에 태어날 세대들은 아예 존재할 수 없게 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흐름을 막을 방법을 해리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이다.
읽기 전에는 ‘같은 인생을 계속 반복해서 사는 이야기가 과연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몇 장 지나지 않아 설정 자체의 매력이 서서히 드러난다. 기억을 가진 채 인생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가정, 그리고 그 존재들이 개인의 삶과 세계의 구조에 어떤 파장을 만들어내는지를 탐구하는 방식은 분명 흡인력이 있다.
그러나 인물의 매력은 그만큼 따라오지 못한다. 해리는 작품 속 다른 인물이 직접 “밋밋하다”고 지적할 만큼, 의도된 평범함을 넘어선 무색무취한 인물로 남는다. 도덕적 판단 역시 애매하게 흔들려서 강렬한 관계성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1인칭 서사임에도 정서 표현이 지나치게 임상적이고, 독자와의 거리감이 커서 감정선에 깊이 이입하기가 쉽지 않다. 조연들의 경우도 대부분 단면적인 성격에 그치며, 비중이 얇게 흩어진다.

숙적이 등장하는 지점에서는 ‘이제 라이벌 케미가 폭발하겠구나’ 하는 기대를 품게 되지만, 실제 서사 전개는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애초에 라이벌 구도를 이토록 공들여 세울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플롯 역시 끝까지 매끈하게 굴러간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결말부는 다소 성급하게 마무리된 인상을 준다. 어떤 상대방은 충분한 예고나 축적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해 기능을 수행하고 사라지며, 반대로 오랫동안 차근차근 예고된 다른 인물은 막판에 이해하기 힘든 선택을 반복하다 허무하게 패배한다. 이 과정에서 논리와 설득력이 모두 약해지고, 클라이맥스가 의외로 너무 쉽게 꺼져버린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분명 선명한 장점을 가진 소설이다. 시간과 환생을 다루는 상상력을 촘촘한 규칙과 조직 설정으로 확장시키고, 인과와 도덕, 기술 발전의 윤리를 천천히 곱씹게 만든다는 점에서, ‘아이디어 소설’로서의 매력은 충분히 발휘된다. 인물과 플롯의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이 남지만, 한 번 구축된 세계관 안에서 시간을 여러 방향으로 비틀어 보려는 시도 자체는 흥미롭다.

따라서, 이 소설은 시간·환생·평행우주 같은 테마를 좋아하며 빠른 전개보다 느린 호흡 속에서 세계관과 아이디어를 음미하는 독서를 선호하는 독자에게 어울리는 작품이다. Speculative Fiction(사색적 허구)답게 서사의 탄탄한 긴장감보다는 설정과 철학적 질문을 따라가며 생각하는 시간을 즐기는 독자라면, 느린 전개와 다소 밋밋한 인물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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