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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역사 - 소리로 말하고 함께 어울리다
로버트 필립 지음, 이석호 옮김 / 소소의책 / 2025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늑한 카페에서 차 마시며 책을 읽는데 들릴 듯 말 듯 귀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 기분 좋은 저음의 재즈 선율이 깔린다. 술기운에 떠드느라 왁자지껄한 선술집에서 강한 비트의 록 음악에 맞춰 심장이 쿵쾅거린다. 온갖 종류의 향기가 코를 자극하는 백화점 향수 판매장에 우아한 클래식 피아노곡이 흐른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찾은 대형 할인 매장에는 신나는 힙합이 울려 퍼진다. 그런데 이처럼 매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살면서, 여태까지 음악의 역사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있었던가?
이 책은 고전 기타리스트이자 음악학자인 저자가 집필한 음악사 입문서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서양 음악의 주요 흐름을 친절하고 쉽게 소개하고 있다. E.H. Gombrich의 A Little History of the World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아 복잡하고 방대한 음악사를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스 시대의 음악 철학에서 시작하여 중세 교회 음악, 르네상스 다성음악, 바로크 시대의 대가들(바흐, 헨델 등), 고전주의(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낭만주의와 현대 음악까지 시대별로 정리되어 있으며 마지막에는 재즈, 영화 음악, 대중 음악, 그리고 세계 음악의 통합적 시선까지 확장되어 폭넓은 음악 문화의 역사적 맥락을 조망한다.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여느 음악사 서적처럼 유럽 중심의 고전 작곡가와 작품, 시대별 음악 양식의 발전사가 소개되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음악사 계보를 떠올리며 어느 정도의 익숙함과 약간의 지루함을 감수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이전에 접했던 음악사 책들이 대부분 그러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던 탓이다.
그러나 이 책은 처음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유럽 고전음악에 대한 언급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본질적으로 이 책은 음악이라는 인류 보편의 예술을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넘어 통시적 시선으로 풀어낸다. 선사시대부터 현대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공간 속에서 음악이 어떻게 생성되고 확산되었는지를 폭넓게 탐구한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단순한 시간순의 나열이 아닌, 음악이 인간 공동체와 맺는 관계를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원시 부족의 의식에서 울려 퍼진 타악기의 리듬, 중세 종교와 함께 성장한 성가, 제국의 교역로를 타고 전파된 악기와 선율, 그리고 현대 대중음악의 산업화까지—모든 흐름이 유기적인 하나의 서사로 엮인다.

문체는 서정적이고 설명적이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음악 이론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라도 부담 없이 내용을 따라갈 수 있을 만큼 친절하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교차 수분(cross-pollina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권의 음악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했는지를 조명하는 대목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 리듬이 재즈와 블루스의 뿌리가 되고, 라틴 음악이 힙합과 결합되며, 인도 전통 음악이 영국 록 밴드에 영향을 미치는 등 장르 간 상호작용의 역동성이 실타래처럼 펼쳐진다.
저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스의 의례에서부터 아랍의 마캄, 인도의 라가와 탈라, 중국의 금, 인도네시아의 가믈란, 아프리카의 폴리포니 등 주요 음악 전통을 폭넓게 조명한다. 이들은 각기 고유한 특색을 지니는 동시에 서로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다. 이러한 관점은 유럽 음악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럽 음악은 고립된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기보법의 발전, 지중해 문화의 융합 등 외부 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변화해 온 유기체적 존재로 그려진다.
악기의 발명과 개량,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의 등장, 연주회장과 극장의 확산은 사회 구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교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귀족과 중산층의 후원이 활발해지면서 음악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의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산업혁명과 기술의 진보는 음악 출판업과 교육 기관, 상설 공연장의 발전으로 이어지며 음악의 산업화를 가속했다.

20세기 이후, 음악은 예술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와 정체성을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흑인 공동체의 저항과 희망을 담아낸 블루스, 재즈, 이후의 팝, 록, 힙합은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음악은 이제 누구나 만들고 소비할 수 있는 민주적 형태로 변모하였으며,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의 발달은 음악의 생산과 유통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음악 산업은 글로벌 자본시장의 중심축으로 부상하였고, 장르와 국경을 넘나드는 거대한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이 책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과 창작 활동 역시 놓치지 않는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 헨리 퍼셀, 헨델,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고전주의 음악가들의 실험은 음악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밥 딜런과 아레사 프랭클린이 대중성과 메시지를 동시에 추구하며 새로운 문화의 장을 열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음악사에서 오랫동안 소외됐던 여성 음악가들에 대한 조명이다. 피렌체의 귀족 여성, 19세기의 여성 피아니스트들, 클라라 슈만의 사례를 통해 여성의 음악 활동이 곧 사회적 금기와의 싸움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음악사의 또 다른 축이자 오늘날 여성 예술가들의 기반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단순한 음악사 개론서가 아니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음악은 왜 존재해왔는가, 음악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음악은 인간 감정의 언어이며, 역사와 문화의 기록이고, 저항의 목소리이며, 일상의 리듬이다. 책은 방대한 범위를 다루면서도 명료한 서술을 유지하며, 독자에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음악의 자리를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각 장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구성되어 있으며, 독자는 시공을 초월한 문화 여행에 동참하는 듯한 몰입감을 경험하게 된다.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음악에 대한 지식 이상의 것들이 남는다. 그것은 음악을 통해 인간과 문명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 책은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문명과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유익한 독서가 될 것이다. 재미와 정보, 예술성과 학문성을 모두 겸비한 이 책은 애정을 담아 추천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음악은 언제나 인간과 함께 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은 그 긴 여정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소중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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