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도에 대한 책을 읽었다.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상관없었다.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 싶은 책은 모조리 읽었다. 심지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까지 읽었다. 다 읽지는 못했다. 부드러운 사랑의 유대로 이어진 행복한 유색인들이라는 각색만은 참아낼 수 없었다. (킨 221페이지)


시간여행이란 화두를 떠올리면 참 낭만적인데, 이 소설이 보여주는 시간여행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설레지도 않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불안하다. 두근거리면서 상상하는 즐거움은 저기 밀어두고, 혹시나 그 시간에서 내가 현재로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앞선다. 즐거운 여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이 소설처럼 한번 시간여행을 할 때마다 공포에 떨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976년의 LA. 작가이지만 가난한 흑인 여성 다나는 일하면서 백인 남자 케빈을 만나고 결혼한다. 흑인과 백인의 구분이나 차별이 없어진 시대였지만, 둘은 주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여전히 그들끼리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두 사람은 사랑했고, 같이 살기로 하면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고 짐을 풀기 시작한다. 그때, 다나는 현기증을 느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1815년 미국 메릴랜드의 어느 숲속이었다. 붉은 머리의 백인 소년 루퍼스가 물에 빠져 있었고, 다나는 살려달라는 루퍼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시대로 간 것이다. 어떻게 된 건지? 어쨌든 다나는 눈앞의 소년을 살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이 상황을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본 케빈을 제외하고는.


처음 다나가 루퍼스를 구하러 가서 1800년대에 머물렀던 시간은 불과 몇 분이었다. 그 시간이 현재에서는 단 몇 초였다고 케빈은 말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시간 여행. 루퍼스는 조금 더 자란 소년이었고, 불을 낼 뻔한 상태에서 다나를 불렀던 것. 그렇게 몇 번씩 다나는 루퍼스가 죽을 위험에 처할 때마다 불려온다. 시간을 거슬러 1800년대로 말이다. 흑인 여성 다나가 루퍼스의 시대에 적응할 수 없던 이유는 너무도 많았다. 미국의 남부,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시대였다. 농장주들은 돈으로 노예를 매매했고, 한 인간이 아니라 자기 소유물로 여기며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를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어주는 용도로 이용하는 도구로만 대했다. 여전히 인종의 벽은 높았지만, 현재의 미국 사회에서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이루어낸 다나가 어떻게 루퍼스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다나는 한 가지를 염두에 두고 루퍼스의 부름이 올 때마다 1800년대로 돌아간다. 다나의 조상이 루퍼스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시간을 잘 건너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루퍼스의 성장을 돕는다.


부유한 백인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고 자라는 루퍼스는 어떤 사람으로 자랄까 궁금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다나의 시간 여행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흑인 여성 다나를 노예가 아닌 친구로 대하려고 했다. 물론 자기 기분 내킬 때만. 아니길 바랐지만, 루퍼스는 무자비한 아버지를 닮은 면도 있었다. 갖고 싶은 것에 모든 것을 걸을 수 있는 남자가 되어갔다. 어릴 적부터 마음에 두었던 흑인 앨리스를 사랑했고, 폭력과 잔인한 행동으로 결국 앨리스를 옆에 둔다. 어쩌면 루퍼스가 다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잔인한 농장주로 자랐을지도 모르지. 루퍼스는 앨리스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그 자신은 아버지와 조금은 다른 너그러운 백인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왔는지도. 그는 다나 역시 친구라고 여기며 자기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애정을 쏟는다. 앨리스와는 다른 의미로 다나를 사랑하지만, 상대의 마음이나 간절함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백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시간 여행 소설이지만, 왜 시간적 배경을 1800년대로 정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면서 작가에 대해 찾아보니, 이 소설은 작가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생생한 장면을 상상하게 했다. 1800년대는 노예제도가 가장 혹독했던 시대라고 한다. 그 중심으로 흑인 여성 다나를 보내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거다. 1900년대의 엘리트 여성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갑자기 책에서나 봤던 위험한 시간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게 보일지. 작가의 삶을 이루기 위해 일용직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의 열정이, 1800년대에서는 위험에 처한 상황일 뿐이다. 흑인 노예가 그것도 여성이 글을 쓰고 읽을 줄 알고, 아는 게 많고 때로는 건방져 보이기까지 한다면 어떨까. 고용주에게는 골치 아픈, 노예들 틈에 두면 위험한 노예일 뿐이다. 소설 속 다나는 옥타비아 버틀러가 소설을 쓸 수밖에 없던 현실을 담은 인물이기도 하다. 1960년대는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이 꽃을 피우던 시가라고 한다. 노예로 살았던 선조들에게 격분하면서 부모 세대를 원망하고 저주했다고.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도 있다. 그들은 부모 세대가 버텨온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거 아니겠는가. 사는 것처럼 살지 못했지만, 때로는 의지를 불태우다가 죽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주어 방식으로 삶을 이어왔으며 투쟁을 계속해왔던 거다.


나는 그날 책을 한 권 훔쳐 나이절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케빈과 내가 이 시대에 수월하게 끼어들어갔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정말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쇼를 바라보는 관찰자였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였다. 집에 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들과 비슷한 척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형편없는 배우였다. 우리는 실제로 역할 속에 녹아든 적이 없었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킨 184~185페이지)


이해하지 못하는 시절에 관해 함부로 판단하고 욕할 수 없음을 다나는 보여줬다. 처음 그녀가 흑인 노예가 있던 곳으로 시간 여행을 했을 때는 감당할 수 없었을 거다. 자유와 의지는 언제나 우리 안에 있기에 당연한 거였는데, 그 시절의 흑인은 노예로 살아가면서 그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당연했다. 설마, 그들의 가슴 속에서도 노예의 삶이 당연하다고만 여겼을까? 아니면, 그들 나름대로 버티는 삶을 이어가면서 피 끓는 투쟁을 멈추지 못했을 거로 생각한다. 다나는 루퍼스와 대화하고 그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읽어주면서 여느 노예와 다른 일상을 보낸다. 그녀가 다른 시대에서 왔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녀를 자기와 다른 존재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다나 역시 스스로 자기가 그곳에서 노예로 있는 흑인들과 다르다고 여기지는 않았을까? 그녀가 현재를 살면서 배웠던 지식과 당연한 것들이 그녀를 당당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한번 두 번 채찍질을 당하면서 얻은 건 공포였다. 두려움 앞에서 의지를 꺾고 수긍하는 자세였다. 루퍼스의 말을 어긴 벌로 밭으로 나가서 일하고 쓰러졌던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배운 것은 현실에 수긍하는 법이었다. 권력을 가진 이의 말을 어기면 이렇게 매질을 당하고, 힘든 일을 해야 하고, 언제 돌아갈지 모를 상황에 절망하며 쓰러지는 일. 이게 그녀가 배운 현실과의 타협이면서 권력자의 통제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었으며, 노예 시대의 폭력에 길드는 모습이었다. 조금씩 다나의 태도가 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두려웠다. 그녀는 현대로, 처음 왔던 모습 그대로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현재를 아우르는 여러 가지가 시간 여행을 하는 다나의 이야기 속에 있다. 아니라고 할 수 없게 지금도 여전히 보이는 인종 차별과 폭력, 노예라고 직접 부르지는 않아도 권력자들이 휘두르는 힘에 고통받는 사람들, 여성이기에 이중적으로 가해지는 인종차별과 성폭력 등 인간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문제들이 1800년대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물론 이 소설은 단순히 그런 배경뿐만 아니라, 작가가 다나에게 반영한 애증이라는 인간 감정도 눈여겨 볼만 하다. 다나는 루퍼스가 살려달라고 할 때마다 시간을 초월해 그에게 간다. 그 소년을 위기에서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와 다른 백인 남자로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의 조상이 될 사람이기도 하기에 말이다. 그러면서도 루퍼스를 지켜볼 때마다 조금씩 변하는, 점점 그의 아버지와 닮아가면서 노예를 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증오한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이해하면서도 그녀에게까지 위험을 가할 때마다 그를 증오하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현재로 돌아와서 안도하면서도 루퍼스와 있던 곳을 집으로 여길 정도로 그리워하고 안도하기도 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 애증의 감정이 어떤 결말을 만들어냈을지 생각하면...


처음에는 그저 상상과 판타지로 만날 자세를 가졌었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다나가 시공간을 초월한 순간들이 무엇을 바꿔놓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게 됐다. 그때의 노예제도가 다나의 등장으로 얼마나 다른 길을 걸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루퍼스가 있던 와일린 가의 흑인 노예들은 다나의 존재로 자기 의지와 자유에 대해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바라본다. 현실의 불안과 불평등에 고민하고 투쟁할 자극이 되는 존재. 한 세기를 거슬렀던 다나의 시간 여행은, 여행 그 이상의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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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1-06 0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여행은 보편의 관점에서 봤을 때 노예제라는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제도인가를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잘 보여주는것 같았어요. 저도 이 책 참 좋아하는데 구단씨님 리뷰 읽으니 더 좋아지네요. 😁

구단씨 2021-01-06 01:45   좋아요 1 | URL
오랫동안 미루다가 이제야 읽었어요.
읽기를 잘 한 것 같아요. 너무 좋네요. ^^

psyche 2021-01-06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았어요. 주인공이 느끼는 공포가 어찌나 생생했던지 책을 읽은 날 악몽에 시달렸다는...

구단씨 2021-01-09 20:40   좋아요 0 | URL
진짜 생생했어요. 만약 그 상황에 있는 사람이 나라면? 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면서 읽게 되더라고요.

scott 2021-02-10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나의 시간여행은 21세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단님 이달의 당선 축하합니다.^.^

구단씨 2021-02-19 21:4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어느 한 시대에, 시간에 머물러 있는 소설은 아닌 것 같아요.
 
라이팅 클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2
강영숙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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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처럼 책을 읽고 그 기록을 남긴다. 단순한 내용 정리가 되기도 하고 너무 와 닿아서 내 감정과 이야기가 많이 섞이기도 한다. 책을 읽어온 시간이 길어지면서 소박한 바람은 점점 커졌다. 그저 후기를 남겨야겠다는 다짐은 후기를 잘 쓰고 싶다는 바람으로 남았다. 작가가 될 것도 아니면서, 책을 읽었다고 누가 후기를 남기라고 등 떠미는 것도 아닌데 언젠가부터 그런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잘 쓴 글에 눈길이 가는 건 당연하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그대로 잘 표현되면 기분도 좋다. 어쩌면 책을 읽고 그 후기를 잘 쓰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잘 표현되었는지 하는 만족의 문제인 듯하다. 이 소설의 모녀, 계동의 글쓰기 모임의 사람들, 해컨색의 라이팅 클럽 사람들은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책을 쓰느냐 아니냐,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에 앞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영인의 엄마 '김 작가'는 작가 지망생이면서 동네 글쓰기 교실을 운영한다. 좀 거창하게 들리는 글쓰기 교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딸 영인이 보기에 그냥 동네 수다방이다. 그런데도 그곳에 모인 여성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내면서 세상 진지하다. 영인이라는 이름보다 화자인 '나'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계동의 이 글쓰기 교실에서 태어난 글들을 쓰레기로 여겼다. 기껏해야 남편과 아이들 이야기에 일상을 푸념하는 글로 채워진 문장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모임의 대표 격인 김 작가를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영인은 또래 아이들보다 좀 더 빨리 자란다. 김 작가는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엄마의 모습이 없는 엄마였기에 영인은 그에 대한 분노로 글쓰기에 치열해진다. 어린 나이부터 책을 손에 들고 뭔가 그럴싸하게 보일 이미지를 만들며, 정말 필요한 문장을 찾으려 계속 읽고 쓴다. 점점 그녀의 글쓰기는 분노의 쏟아냄은 물론이고 자기 삶에 화해하는 글쓰기에 이른다. 이는 그녀의 오랜 세월이 만든, 어찌 보면 치열하고 파란만장한 생을 거쳐 온 그녀만의 재산이 되는 과정 같다. 만년 작가 지망생인 엄마에게 대항하고자 진짜 작가가 되겠다며 열심히 써댄 그녀 노력의 결과 말이다. 이렇게 쓰는데, 안 써지면 안 되는 거지.


생각해 보면 나는 김 작가와 떨어져 살았던 어린 시절에도 쓰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혼자 놀기 위한 대본이 필요했던 것 같다.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등장인물, 혼자만의 날씨, 그래서, 그런데, 그랬거든, 그건 아니고 등으로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했었다. 이야기만이 시간을 이길 수 있었다. (257~258페이지)


참 특이한 소설이다. 처음에는 저렇게 자식을 방치하는 엄마가 있을까 싶다가도, 누군가 아이를 키우는 방식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작가가 되고 싶은 엄마의 갈증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싱글맘으로 아이를 키우는 일상과 본인의 미래가 불안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현재의 자기 삶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건 아닐까. 보통의 삶이라고 하기 어려운 김 작가의 현실은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더는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바랐을 글 쓰는 삶을 계동의 평범한 주부들과 이룬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쓰자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라고, 생각만 하지 말고 일단 쓰라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모여 글을 쓰는 여성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저마다 옆구리에 노트 한 권 끼고 어딘가로 향하는 발걸음을 그려본다. 남편과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꾸리는 일상을 운명처럼 여긴 그녀들의 오늘이 무엇을 만들어낼지 기대되는 건 당연하다.


김 작가와 대조적이면서도 비슷하게 흐르는 영인의 인생은 또 어떠한가. 글쓰기가 전부라고 해도 좋을 이 모녀는 각자의 삶에 치열하다. 문인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는 것 같으면서도 계속 뭔가를 쓰는 김 작가, 아무 배경도 없고 부모의 사랑도 없이 세상에 소리치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하는 영인. 처음에는 읽는 것으로 가슴을 채우고 계속 쓰면서 분노를 잠재웠다면 점점 글쓰기의 욕심은 진짜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은 거였다. 영인의 글쓰기는 결국, 이 소설은 영인의 글쓰기 성장 과정이다. 영인이 작가가 되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글쓰기의 진짜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보는 것들, 그런 영인의 시선을 우리가 따라가면서 같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게 중요하다. 혹시 글쓰기는 경험으로 채워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경험한 게 많은 사람이 쓰고 싶은 게 많은 거로 여겼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하게 보고 겪는 사람이 아는 것도 많은 거 아니겠나. 보이는 게 많을수록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거로 생각한다. 그러니 영인의 경험은 쓸 수 있는 무궁무진하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성장이 글쓰기의 길을 열어준다. 동성애를 겪고, 외모와 환경에 주눅 들고, 무작정 고백하는 짝사랑에 거절당하는 게 쉬운 인생일 수 없다. 성인이 되었다고 그녀의 인생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친구의 죽음이나 사회생활, 이상하게 시작된 결혼과 이혼을 겪으며 내면의 경험까지 꽉꽉 채워간다. 영인은 그 모든 순간에 글을 썼다. 그녀가 처음부터 글쓰기의 의미를 찾았던 건 아니다. 삶이 혹독해질수록 글쓰기는 치열해졌고, 그렇게 자기와의 싸움처럼 이어진 글쓰기가 습관처럼, 당연한 일상처럼 된다. 이제는 무엇을 쓰는가 하는 게 아니라 글쓰기 그 자체에 삶의 의미가 생긴 거다. 그렇다고 그녀가 글쓰기의 의미를 모른 채 아무거나 쓰지는 않는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작가 J의 가르침대로 묘사를 위한 관찰을 습득한다. 사람과 사물의 모습, 표정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들여다보는 시선을 가다듬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동안에는 관심 없고 몰랐던, 무시하기까지 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엄마인 김 작가의 인생에도 관심이 생긴다. 자기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에 무엇이든 써왔던 엄마,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로만 보였던 계동 글쓰기 교실 사람들의 이야기가 글이 되고 인생이 되는 거였다. 그들이 글을 쓰는 목표가 등단이나 출판이 아니라, 쓰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 문장에 담긴 삶을 보는 거라는 걸 이제야 안다. 보통의 사람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게 전부일지 모른다. 그냥 쓰고, 그냥 읽고, 소박한 서로의 문장 속 이야기를 듣는 것. 글쓰기의 즐거움,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그때 뭔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것,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탐구하는 것이 글을 쓰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공간을 제대로 설정하라, 그러면 글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써지고 훨씬 더 힘 있게 진행된다! (216페이지)


"학생은 왜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해?"

J 작가가 물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냥 재미있어서 보는 게 아닐까요?"

오히려 내가 J 작가에게 되물었다.

"그래, 재미있어서 그래. 재미라는 게 뭘까. 아마 사람들이 소설을 재미있어하는 건 사람들 사는 모습이랑 소설이 제일 비슷하기 때문일 거야. 안 그래?"

"네 맞아요."

생각을 안 해 봐도 J 작가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았다. (101페이지)


이쯤 되니 독자인 나는 소설을 왜 읽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쓰는 존재 이전에 읽는 존재였던 영인처럼, 나도 소설을 즐긴다. 그 이야기 속 세상에 빠져 허우적대다가도, 허구의 세상에서 틈새로 끼어든 현실의 한 자락을 마주할 때면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야기에서는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한다. 이야기가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는 고통을 마주한다.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을 온갖 세상, 많은 사람의 삶, 세상 구석구석의 감정을 읽는다. 혹자는 그런 소설을 읽으면서 무슨 발전을 하겠느냐고, 뭐가 변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소설이 없다면 우리는 또 어디서 세상의 다른 시선을 보고 누군가의 인생에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까?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세상을 경험하고 가끔은 너무 알 것 같아서 우울한 기억을 꺼내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또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쓰기 위해 모이고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읽기 위한 의미를 계속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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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두 번쯤 엄마 집에 간다. 엄마가 해주신 밥을 먹고 싶기도 하지만, 혼자 지낼 엄마가 같이 밥 먹어줄 사람이 필요하진 않을까 싶은 나의 오버이기도 하다. 근데 정말로 엄마는 누군가 오니까 그대로 챙겨놓고 밥을 먹는다고 하시더라. 나도 마찬가지. 집에서 혼자 밥 먹어야 할 상황이 되면 그냥 굶거나 대충 한두 가지 꺼내놓고 먹거나. 누가 보면 참 부실하다고 할 테지만, 저절로 그렇게 된다. 먹는 것만 부실해지면 다행인데, 점점 일상이 귀찮아지고 정리를 미루면서 하나둘씩 뭔가 쌓여간다. 건강을 챙기겠다면서 사다놓은 운동기구가 옷걸이나 빨랫줄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그때그때 정리하지 않으면 자꾸 미뤄지고 쌓여가고, 집에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좁아져가고, 어느 순간 쳐다보기만 해도 막막하고 한숨이 나올 테지. 집 밖으로 나가는 물건보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 물건이 더 많아지면 이건 뭐, 최악이다.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집 안으로 들어오는 물건이 점점 많아진다면,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근데 사실, 우리가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잖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선뜻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하고, 아끼는 거 버리는 거 망설여지고, 이거 버리기 아까운데 싶어서 들었다 놨다 하면서 추억에 잠기기도 하는... 그러니까 이런 거 아닐까. 공간만 있다면 내가 아끼고 소중한 것을 다 품에 안고 살고 싶다는 바람. 하지만 우리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살아야 하고, 비우는 것 없이 계속 들여오기면 한다면 정말 숨이 막혀서 죽을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자, 그럼 정리가 답이다. 공간이 들어올수록 답답함은 사라지고, 내가 무엇을 원하고 좋아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아끼는 것들을 버릴 수 없어서 갖고 있기만 할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눈에 두고 보면서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언뜻 보면 저자도 그저 공간을 정리해주는 전문가인 것 같지만, 저자의 책을 읽다 보면 그동안 정리정돈이나 살림 노하우를 담아놓은 책과 다른 점이 있다. 그 공간의 사람을 읽고 위로한다는 거다. 왜 정리가 필요한지,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면서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지 읽는 능력. 저자에게는 그게 있다.


많은 분이 집을, 그리고 지나간 세월을 정리하고 싶어 하지만 부끄럽고 확신이 없어서 주저하거나 망설이곤 합니다. 집 정리는 다이어트와 비슷합니다. 한번 다이어트에 성공해본 사람은 이후에 다시 쪘다 빠졌다는 반복하더라도, 살이 빠졌을 때의 느낌을 알기 때문에 다시 성공할 확률이 높고 성공한 상태를 유지하기도 쉽습니다. 지금 당장은 좀 부끄럽더라도 작심하고 다 덜어내고 정리해보면, 또 살면서 짐이 늘고 어수선해지겠지만 언제든 좋았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좋았던 상태'가 어떤 것인지 직접 경험해보고 느껴본 사람만 가능한 일이죠.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드립니다 141~142페이지)


다른 매체나 방송에서 보고 저자가 이 일을 꽤 오래 했을 거로 여겼다. 어디선가 들으니 저자가 이 일을 시작한 건 3년여. 3년 만에 이런 이슈를 만들 수 있는지 의아했지만, 생각해보면 사람의 마음을 읽은 결과일 테다. 누구나 가슴 속에 품은 바람을 알아채고, 그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일이 반응을 일으키는 건 당연하다. 가끔 TV에서 저장강박증에 걸린 사람을 보고, 일명 쓰레기집이라고 불리는 그곳을 보면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누가 봐도 쓰레기인데 뭐가 그리 귀중하다고 저걸 쌓아두고 살까 싶어서 말이다. 그들을 인터뷰하고 어렵게 속내를 듣고 보면 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인간의 마음에 비워진 공간을 그렇게 물건으로 채우고 싶었던 거라고. 그걸 끌어안고 있어야 허한 마음 조금이라도 채워질 거로 믿었던 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집이라는 공간 안으로 무언가를 자꾸 끌어들이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마음일 것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 부족한 감정이 물건으로 다 채워질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비워내고 정리하는 게 마음을 치유하는 답이 된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저자는 그렇게 읽어낸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는 법을 찾아냈고, 사람들에게 눈으로 보이는 정리 이상의 결과를 안겨주었다.


정리의 시작은 의외로 간단하다. 누구를 위한 집인지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정리의 방향은 정해진다. 과감하게 잘 비우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숨기지 말고 그대로 드러내는 거다. 물건을 분류하고, 내가 생활하기 편한 동선으로 꾸린다. 전문가의 조언이나 타인의 고정관념 같은 건 버려도 좋다. 내가 좋은 게 가장 좋은 거 아닌가. 의미 없는 물건이 나열된 공간을 재배치하고 효율성과 안락함을 높여야 한다. 공간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내 마음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 된다면 행복할 테니. 무조건 새로운 가구나 정리할 상자를 사는 게 아니라, 정리하는 방식을 찾는 게 우선이다. 어쨌든 가구도 상자도 공간을 차지하는 건 마찬가지이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물건은 집의 가장 큰 공간에 혹은 좋아하는 공간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집도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책은 무조건 서재에, 와인은 반드시 주방에만 두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 집은 머물고 싶은 곳이 됩니다.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드립니다 25~26페이지)


이런 집에 살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나 혼자 산다면, 거실에 TV나 소파가 아니라 심플한 책장을 두고 싶다고, 주방에 식탁을 두고 식사를 하거나 책을 읽고 싶은 공간으로, 방에는 꼭 침대 하나만 두어야겠다고. 물론 나 혼자 사는 공간을 생각했을 때 말이다. ^^ 다른 가족 구성원과 함께 산다면 집은 나만의 공간은 아니므로 서로가 원하고 바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각자 필요한 공간을 생각하고 의논하면서, 이 집은 어떤 공간으로 구성하고 만들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한다. 저자가 이 일을 하면서 단순히 공간 배치를 하거나 비우고 정리해주는 게 아니었다. 의뢰인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다. 무엇을 정리하고 싶은지, 어떤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하는 여러 가지 사연과 생각을 듣는다. 의뢰인의 마음을 충분히 읽고 공간의 구성을 계획한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현재 상황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가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 아빠의 방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을 때 놀랐는데, 차근차근 설명을 듣다 보니 이해가 된다. 아직 어린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보통 아이는 엄마(부모)와 같이 자는 경우가 많고, 바로 옆에서 돌봐줘야 하니 항상 같이 있는 시간이 많다. 늦게 퇴근하고 들어와 자는 아이가 깰까 봐 조심스럽게 안방을 드나드는 것보다, 조금은 편히 쉬고 잘 수 있는 현관에 가까운 방을 아빠의 쉼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좋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배치는 의뢰인에게 호응이 좋았다고 하니, 말하지 않아도 아는 저자의 능력이 대단하다.


무조건 버리는 게 정리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움의 매력을 어필하는 듯하지만, 비움도 나름 이유가 있어야 한다. 내가 가장 소중하고 필요하다고 여기는 걸 버릴 필요는 없다. 그 양이 많다고 해도 정리만 잘하면 그 집에 머물 이유가 충분하다. 정리하고 싶은 카테고리의 물건을 다 꺼내어 놓고, 우선순위를 매긴 다음 버리거나 남겨두거나 정한다. 그러고 나면 한곳에 모아두고 정리하는 게 남는다. 베이킹하는 의뢰인의 예를 들어줄 때는 놀라웠다.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던 베이킹 도구들이 다른 가족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는데, 의뢰인이 포기할 수 없었던 베이킹을 더 즐겁게 하게 만든 정리는 기적 같았다. 방 하나에다 집안 곳곳에 방치되었던 베이킹 도구들을 모아놓았다. 듣고 보면 이렇게 간단한데, 우리는 왜 그 방법을 몰라서 자꾸 어수선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것인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불편한 것을 그냥 참고 살거나 불편한 줄 모르고 산다고 한다. 일일이 기억할 수 없지만, 나에게도 그런 생활의 단면이 있을 것이다. 가구나 물건도 조금만 바꾸면 굉장히 편리해지는데, 그걸 모르고 살거나 알면서도 그냥 두고 살았던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다고 한다. 오른손잡이 아이의 책상에는, 연필꽂이와 책꽂이는 오른쪽에 스탠드는 왼쪽에 있는 게 효율적이다. 옷장이나 행거에 옷을 걸을 때도 방향에 맞추어 걸어놓는 게 옷이 덜 상하고 관리하기 쉽다. 물건을 잘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치와 사용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 것. 집이라는 한정적인 공간 안에서 우리가 편히 지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비우기이지만,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추억은 잘 정리해서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야 가치가 있다. 아무리 소중해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그건 추억도 뭣도 아닌 게 된다.


각 챕터 마지막에 정리나 청소 팁을 알려주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미 알던 것도 있지만, 관심 없어서 그냥 방치하듯 내버려 두었던 것도 저자의 팁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옷방의 공간을 나누어 옷의 종류별로 보관하고, 잘 보이게 걸어서 보관해야 찾기 쉽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어두운색의 옷을 걸어두고, 액세서리 종류는 형태를 유지해서 보관하라고 한다. (이 부분 읽고 옷장 구석에 던져두었던 가방이 생각나서 신문지를 막 접어서 넣어두었다는 건 안 비밀. ㅠㅠ) 린스나 설탕으로 욕실 물때는 벗기고, 건식 화장실의 습기는 구석에 소금을 조금 놓아두면 되고, 수도꼭지 청소는 과일로 닦아주면 깨끗해진단다. 욕실 구석에 생긴 곰팡이는 소독용 알코올을 헝겊 봉에 묻혀서 닦으면 해결된다니, 가끔 욕실 청소할 때 힘으로만 벗기려고 했던 것을 반성하고 반영해봐야겠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꼭 입주 청소도 내가 할 수 있을 듯한, 무모한 자신감이 든다. 비싸게 돈 주고 했는데 만족감도 못 느꼈던 입주 청소 맡긴 때가 생각난다. 자신 있게 청소하고 돌아가신 사장님께 입금하고 나중에 보니, 여기저기 거슬리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던. 이 정도면 그냥 내가 할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더랬다. 물론 전문가라고 하니 내가 모르는 노하우로 내가 할 수 없는 곳까지 열심히 청소해주셨겠지만, 가성비를 따질 수밖에 없는 소비자이다 보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더라.


읽으면서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을 둘러보게 되고, 그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공간을 유심히 보게 된다. 저 공간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나는 어떻게 공간을 이용하고 있는지 자문하곤 한다. 저자는 실제로 많은 사람이 공간을 너무 비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고정관념 때문에 불편을 불편인 줄 모른 채 살고 있다고. 주방에서 밥을 먹고, 거실에서 TV를 보고, 방에서 잠을 자고, 방 하나를 창고로 만드는 일반적인 이야기들이 새롭게 들려온다.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많다. 가족이 함께 산다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고, TV만 보면서 모여 있는 것도 아니다. 각자 손에 휴대폰을 들고 한 공간에 있기도 한다. 주방에서 서류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걸 보면, 주방과 서재가 같은 공간이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 (책에 냄새 배려나?) 그래도 나는 내가 주방에 있는 시간이 많다면 주방 가까이에 책장 하나 두고 싶기도 하더라. 저자의 말대로라면, 공간에 제대로 된 역할을 부여하고, 쓰는 사람의 성향과 상황을 고려하면서 만든 집이야말로 필요하고 편안한 곳이 아닐까. 고정관념을 버리고 무심코 따라 하지 않으면, 인생은 나에게 맞춰 편하게 간다고 말이다.


코로나 때문인지 사람들이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집 밖은 위험하니까) 그러다 보니 집은 더 중요해졌다. 단순한 먹고 씻고 자는 것을 해결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집밖에서 했던 거의 모든 것을 집안에서 해야 하는 곳이 된 거다. 공간과 인생은 거의 같은 것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저자의 많은 사람이 공간 정리로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저자의 말처럼, 나 역시도 정리의 순간 개운함과 기분전환을 느낄 때가 많다. 가장 흔하게는 일부러 손빨래하면서 깨끗해지는 옷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하고, 한 번씩 책장의 책을 다 꺼내어 정리하기도 한다. 특히 책을 정리할 때면 내 책장에 이런 책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소장해야 할 책과 내보내도 되는 책을 구분해서 책장을 비워둔다. 그럼 또 다른 책들이 찾아와 그 공간을 채우겠지만, 또다시 비움의 시간을 만들면 되니까 괜찮다. 한 번씩 책장 정리하면서 책장의 비워진 공간을 보면 가슴이 뚫린다. 책장 하나 정리했다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달라지거나 정리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일상이 정리되는 시원함과 즐거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사실 안 쓰는 물건을 비우는 것만 잘해도 집은 충분히 훤해집니다. 알맞은 자리를 찾지 못하고 수납공간 바깥으로 삐져나온 물건들이 집을 계속해서 좁아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대체로 수납공간 안에 들어가 있던 물건들 중에 버릴 물건이 많습니다. 안쪽에 쌓여 있어서 있는 줄도 몰랐던 물건을 모두 처리하고 나면 바깥에 나와 있던 물건을 품목별로 정리해서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물론, 살다 보면 새로운 물건들이 계속해서 들어올 것입니다. 그때마다 미루지 말고 꾸준히 정리한 후, 3달이 지나도 필요가 없다면 그때 놀고 있던 큰 가구들을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드립니다 183페이지)


큰 게 아니었다. 아주 작은 변화, 원래 있던 가구의 재배치나, 방치되어 있던 물건의 제자리를 찾아주거나,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물건으로 건네지거나 하는 변화가 물건과 사람에게 새 인생을 만들어주는 순간을 만났다.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하고 마지막 집 정리를 하던 의뢰인이 집 정리 과정을 지켜보면서 변했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정리가 뭐라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준 걸까 싶지만, 그 작은 변화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일을 해낸 거다. 이게 기적이 아니면 뭐가 기적이란 말인가. 누군가는 그냥 평범한 주부가 하는 일이라고 가볍게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나 스스로 정리하지 못해서 점점 쌓아지는 것들을 경험했기에, 저자의 일이 결코 쉽거나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안다. 겉으로 보이는 변화 너머에 가슴을 울리는 시간을 만드는 '금손'이다. 조금만 따라 해도 일상이 바뀌고 표정이 변하고 인생이 달라질 것을, 이제는 안다. 저자가, 물건을 비우면 공간이 보이고, 공간이 보이면 비로소 사람이 보인다고 말하는 의미를 눈으로 확인했다. 일의 경험으로, 매체에서 마주한 의뢰인들의 표정으로 말이다. 공간의 크기가 아니라, 공간의 의미와 정리 때문에 행복해진 그들의 표정에서 행복이 저절로 읽힌다.


비움을 시작으로 마음을 보듬는 일이 이렇게 이루어진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작은 시작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평소에 꾸준히 정리하는 습관과 일상의 불편함을 눈여겨봐야겠다. 가끔 나를 돌아보고 싶을 때, 뭔가 꽉 찬 마음을 확인하고 싶을 때 한 번씩 우리의 공간을 채운 것들을 비워보는 건 어떤지? 정리는 이렇게 우리 인생을 새로 만들 힘을 주기도 하니까.



저녁이 되니 하나둘 집에 불이 켜진다.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인생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의 집이 궁금해졌다. 얼마나 비우고 얼마나 쌓아두고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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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5 0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어제 트리 하그루 놓고 갔는데 아침에 눈떠보니 사라졌으용 ㅜ.ㅜ
다시 그려 놓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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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rry ☆ Christmas! ** ★
│Merry..........:+☆+:............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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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메리 크리스마스^.~

구단씨 2020-12-29 13:31   좋아요 1 | URL
인사가 늦었습니다. ㅠㅠ
크리스마스 즐겁게 잘 지내셨나요?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게 우울해지는 일년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제 남은 며칠 무사히 잘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연말 보내고 있습니다.
항상 건강 챙기시고, 그래도 해피하게 2020년 마무리되기를 바랍니다. ^^

scott 2021-01-09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페이퍼 읽고 감동 받았는데
이달의 당선작으로!
추카~추카~
강추위 주말 따숩고 평안하게 보내세요.^.^

구단씨 2021-01-17 21:3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다시 추위가 찾아오고 오늘밤 여기는 폭설 예보가 있어요.
건강 유의하시고 겨울 즐겁게 지내세요~
 
노라와 모라
김선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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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매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굉장히 친한 사이인 두 여자의 이야기일까. 나의 예상은 이 정도였다. 제목에서 풍기는 이름이 너무 닮아있지 않은가. 소설을 펼치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했다, 어느 정도는.


노라와 모라는 7년을 같이 살았다. 곤륜산에서만 자란다는 돌배나무의 뜻을 가진 이름, 노라. 어느 날 갑자기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삶이 팍팍한 이유가 노라 때문이라고 입에 달고 살았다. 어느 날 엄마가 만든 자리에 따라간 노라 앞에는 가지런한 그물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모라와 그녀의 아빠가 앉아 있었다. 사실 모라의 엄마는 오래전 집을 나갔고, 아빠는 먼 친척에게 맡겨둔 모라를 가끔 보러 올 뿐이었다. 그런 모라에게 엄마를 만들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아빠는 노라의 엄마와 재혼했다. 그렇게 노라와 모라는 7년을 자매로 같이 살고, 이 부부가 다시 이혼함으로써 남남이 된다. 한때 가족이었다가 남이 된 사이, 하지만 두 사람이 가족이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설은 고백처럼 읊조리는 노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자기 이름의 뜻을 말하는 삼십 대 여자의 일상이 평범하다 못해 무료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살아왔을까. 가끔 들리는 엄마의 근황과 과거, 그녀가 기억하는 어느 순간의 이야기와 모라. 무엇보다 노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참 담백하다. 아니, 이건 건조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혹시 감정이 없는 사람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일상의 모든 것이 무심하다. 타인의 감정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그럴까 싶은 궁금증이 생길 무렵, 어쩌면 노라의 그런 성격은 엄마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노라의 엄마는 노라가 자기 딸이 맞는가 싶게 냉정하게 대했다. 엄마의 가시 돋친 말 한마디로 수도 없이 상처받았던 노라. 하도 찔리기만 해서 그 부분이 단단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읽으면서도 노라의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노라의 지금 모습이, 자기만의 감정과 생각에 빠져 살면서 타인에게 영향 받지않는 모습이 엄마 때문에 만들어질 것으로 확신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노라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는 주는 사람이 되고 만다.


교차로 진행되는 방식인데, 소설의 앞부분이 노라의 이야기였다면 후반부는 모라의 이야기다. 마치 그동안의 세월이 아무렇지도 않게 모라는 노라에게 전화를 건다. 아버지의 부고를 알리면서 장례에 와달라는 말을 꺼내는 모라. 문득 노라가 되어 모라의 전화를 받는 나를 상상했다. 한때 자매였지만 이제는 남이 된 사이에서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나는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까. 모라 아버지의 장례에 내가 참석해야 할 의무나 이유가 있을까? 이제 나에게 없는 존재들에게 나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 걸까. 수많은 물음표로 이들의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애쓰지만, 이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나는 아직 이들의 마음과 의도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같은 상황과 사건을 두고 경험한 시간 속 기억에서 상대와 내가 전혀 다른 이미지를 꺼내고 있다면 그 감정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남는다. 그러니까 이런 거 말이다.


노라에게 엄마는 자기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이다. 엄마라는 존재의 개념을 새롭게 쓴 존재 같지만, 모라가 바라본 노라의 엄마는 그냥 엄마다. 똑같은 딸로 대하지만, 노라의 엄마는 모라보다 노라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주곤 했다. 모라가 어린 나이에도 생존의 법칙을 알게 된 건 이런 소소한 장면들 때문일 것이다. 아빠가 결혼한 여자와 그 여자의 딸에게 미움 받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것을 몸이 먼저 배웠다. 이들에게 잘못보이면 또 아빠가 맡겨놓은 시골의 먼 친척 할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모여 사는 게 지금도 앞으로도 좋을 거라는 어린 마음의 계산 같은 게 모라를 휘어 감고 있었을 테지. 엄마에게 상처만 받았다고 기억되는 시간의 노라와 그런 엄마마저도 부러웠을 모라의 마음이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들려오는 게 참 아프기만 하다. 부모는 부모대로 바쁘고 그들만의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어린아이의 마음과 생각 따윈 알려고도 하지 않은 순간들이 이기적인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비춘다.


부모의 정서적 학대와 방치로 유년기를 보냈던 두 소녀의 만남은 세월이 흘러서도 그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로 가슴에 묻고 산다. 헤어진 후로 서로 잊고 산 듯하지만, 사실은 문득 한 번씩 찾아왔던 사람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노라와 모라는 서로를 보면서 자기에게 비어 있는 것들을 찾는다. 노라가 보는 모라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 것은 물론이다. 모라의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노라는 부러워했다. 자기에게 없는 성격이 저 아이를 빛나게 해주고 있다고 믿었을까. 사실 모라는 타인의 시선에 반응하고 맞춰주며 사는 것을 배워야 했던 건데. 모라에게 노라는 새침한 아이였다, 정작 노라 자신은 상처받았다고 여기며 외톨이처럼, 타인과 섞이지 못하는 하루를 지낸다고 생각했을 텐데.


울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을 누군가에게 말해 본 적은 없다. 그 마음이 뭔지는 나도 잘 몰랐으니까. 다만 입술을 깨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뻣뻣해지면 덩달아 목이 아파져서 울고 싶어진다는 걸 알 뿐이었다. (68페이지)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모라의 시선과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무심하게 살아가는 노라의 시선이 겹쳐지고 얽히면서, 이제는 다른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만든다. 다시 만난 노라의 무심하지만 담담한 말들로 모라는 이제 자기 자신으로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려고,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아가기보다는 이제는 스스로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다짐 같은 거. 노라 역시 타인에게 무심해지는 게 상처받지 않는 방법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시간을 뒤로하고,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조금씩 배운다.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 이 두 여성의 미래가 희미하게나마 그려지기 시작한다.


왜? 왜요?

나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묻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마음이 있듯이, 이유를 알고 싶은 마음들이 있다. 나는 모르고 그들은 아는 마음과 나는 알고 그들은 모르는 마음. 그 사이에 우리가 있다. 이유를 묻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마음들. 그건 아주 오래되고 사적인, 비밀들이고 그 비밀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덧붙이고, 이어갈 거다. 내가 묻고, 또 묻는 이유다. (186페이지)


아마 각자의 시선대로 느끼면서 생각하고 살아왔을 그녀들일 것이다. ‘나 때문에, 나만 아니면’이라는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며 생존의 순간을 버텨왔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아이였을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생각하면 아프기만 하다. 가족이기에 감당해야 했던 감정과 상처가 더는 계속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소설이다. 결국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들의 삶은 다시 시작되는 셈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기억으로 존재하는 많은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같은 기억으로 남은 어느 날 밤. 태풍이 지나가던 그 밤의 기억은 두 사람에게 비슷하게 남았다. 모라가 노라의 이불 속으로 기어서 들어갔던 그 밤, 혼자가 아니라는 고요하고 따뜻함을 실감했던, 혼자라는 걸 깨달을 때마다 떠올렸던 그날의 기억.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을 그 순간이 그대로 전해진다. 힘들었을 모든 순간에, 나만 아픈 건 아니었을 거라는 위안이 되는 단 한 장면이 새겨진다. 어쩔 수 없이, 언제나, 우리는 모두 혼자인 시간을 살아갈 테지만, 그때마다 ‘함께’였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위로가 될까.


노라와모라,김선재,다산북스,다산책방,소설,성장,치유,위로,위안,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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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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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이 좋은 집인가요?"

"잘 팔리는 집이요."

일 년 전,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닐 때 주변에서도 부동산에서도 똑같이 말했다. 잘 팔리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집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에게 집을 팔고 나갈 때를 먼저 생각하고 하는 말이 우습기도 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진지하게 새겨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 손으로 처음 집을 구하러 다닌 때였다. 아는 것도 없었고, 안다고 해도 눈 뜨고 코 베이는 시대이니 무섭기만 했다. 한참을 더 보러 다니면서는 귀찮고 힘들기까지 했다. 집값을 예상했음에도 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가격에 심란하던 때였다. 이사할 때 필요한 이런저런 비용까지 생각하면 집값을 매매 가격 그대로만으로 생각해서도 안 되었다. 큰돈이 오고가야 했으니, 결정도 신중해야 했다. 먼저 예산을 정하고 가고 싶은 동네를 몇 군데 추렸다. 그 동네의 거의 모든 집(아파트)을 보러 다닌 것 같다. 석 달의 주말을 집을 보러 다니면서 보냈다. 집을 보러 다닌 지 석 달 만에 겨우 집을 계약하고, 계약 후 거의 넉 달 만에 이사를 했다. 나에게는 첫 이사였다.


나는 한 존재를, 한 시절을 잃고 이 집에 왔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슬픔과 상실을 안고 시작되었지만 그조차 이 공간에서 만들어갈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이제는 여기가 내 삶의 새로운 배경이 될 것이다. (181페이지)


사실 집에 관해서라면, 나는 거의 할 말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사하기 전 엄마와 살던 집이 내가 살던 집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오랫동안 이사를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던 그 집에서, 나는 나왔고 엄마는 아직 살고 계신다. 작고 오래된 집이다. 여기를 고치고 저기를 조금씩 넓히면서 여덟 식구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던 엄마의 공간이자 지금 엄마에게 남은 전부다. 집도 사람처럼 나이를 먹으니, 이제 더는 손댈 수 없는 낡은 집이 되었다. 길게는 1년이라는 시간을 잡고 이제는 엄마가 이사할 집을 생각하는 중에,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당연히 엄마였다. 울컥해지는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듣기만 했던 엄마의 시간을 상상했다. 나는 기억도 못 하던 시절, 엄마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이사 다녔다고 했다. 어떤 날을 한밤중 리어카에 이삿짐을 싣고 옮긴 적도 있단다. 내 기억에 없는 엄마의 그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여전히 우리는 부자도 아니고, 가끔 생기는 큰일에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해야 하는 생활이지만, 지금은 쫓기듯 이사하는 상황을 모면했으니 다행인 건가. 아니면, 저자의 말처럼 부자인 걸까.


대구 북성로의 첫 집은 저자의 가족이 모두 모여 살던 곳이다. 조부모와 부모, 부모의 형제들, 저자의 자매까지. 지금은 드문 구성의 가족이 그 집에 살았다. 오래전 우리가 익숙하게 생활했던 시간을 떠올린다. 남편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이었고, 아내는 아이와 시부모를 돌보는 게 역할이라고 여겼던 시절. 시어머니는 아들 가진 존재로, 여자가 아닌 '시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집안의 가장 큰 방을 차지하고, 자매는 한 방을 나누어 썼으며, 삼촌들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게 저자의 부모였다. 아버지에게는 서재가 있었지만, 엄마에게는 집안의 어느 곳도 엄마의 공간이 되지 못했다. 엄마의 방을 묻던 딸에게 집안 모든 곳이 엄마의 방이라고 말하는 표정이 저절로 읽혔다고 말하면 내가 오버일까. 유난히 책을 좋아했던, 틈틈이 책을 읽던 저자 엄마의 시간 어디에도 엄마의 방은 없었다. 역할을 구분하고 존재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읽히는 문장 앞에서 수시로 울컥했다. 엄마, 아내라는 이름으로 감당했을 상처의 무게가 보여서다. 어쩌면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 공간이 바로 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역할의 구분은 물론이고 방공호도 있던 집이라고, 중국 요릿집 회전판이 놓인 식탁이 있는 북성로의 집은 그들이 곧 이사하게 되는 수성구의 명문 빌라와 대조적이었다.


수성구의 명문 빌라는 갑자기 시대가 확 바뀐 느낌이었다. 대구의 강남이라 불리는 곳, 학군 따지면서 "어디에 살아?" 하는 물음에 우쭐하며 대답할 수 있던 시절의 저자가 본의 아니게 세상을 한번 배운 때였다. 그전까지는 집이라는 공간이 가족들 모여 살면서 부대끼고 같이 먹고 잠자는 곳이 전부였다고 생각했다면, 명문빌라에서의 시간은 집의 개념을 새로 배운 곳이 아니었을까. 집의 브랜드로 경제력을 따져가면서 사람을 판단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게 슬픈 건지 현명한 건지 모르겠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흔하게 보던 내용인 것도 같다. 민간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를 사이에 둔 학교의 아이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차단벽, 옆 아파트의 놀이터 출입금지를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다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또다시 여러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보냈던 20대의 저자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았던 여러 방과 원룸, 다세대주택을 거친다. 그때 봤던 가난의 흔적들, 상대적 시선의 부와 가난 그 경계를 서성이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을 쓰고 14인치 TV로 세상을 읽으며 자발적 감금 상태였던 시간은 불안의 나날이었고, 누군가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내가 그 피해자가 되지 않은 순간에 안도하는 나날이었다. 어쩌면 가난은 불안과 동의어로 다가왔던 시절인지도, 저자가 바랐던 품위 있는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던 거다.


가난은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월세 30만 원짜리 쪽방이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거리로 내몰린 노숙인의 삶이었다. 가난을 가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 현재든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마포의 30평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을 다녀온 날, 나는 가난했다. 원룸에서 불과 몇 정거장 떨어진 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58~59페이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이 집이 온전한 나의 집이 되리라 믿었다. 내가 바꾼 공간이 이곳에서 보낼 나의 시간을 바꾸리라 기대했다. 그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아등바등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절박하게 애쓰지 않으면 나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집을 고치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104페이지)


여러 방을 거치며 동생과 함께 살던 집을 뒤로 하고, 다시 혼자임을 맞이하며 구했던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집에서의 시간은 가장 의미 있어 보였다. 읽는 나에게도 뭉클한 순간이었다. 비로소 독립적인 존재로 바로 서는 어느 공간의 입구에 있는 기분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셀프 인테리어를 하며 '아등바등' 몸부림치던 순간이 만든 건, 우리가 온전히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거다. 자기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집을 고치는 일이 왜 필요했을까. 다시 혼자인 공간을 만들면서 혼자여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그러니 무엇이든 해도 괜찮은 삶을 시도했는지도 모르지. 그전까지의 시간이, 몇 년 동안 여러 방(집)을 거치면서 보여주고 싶은 시절이었다면, 행신동의 집은 부끄러운 기억을 묻어두고 성장하듯 발을 디딘 곳이라고 보인다. 요가와 수영을 배우고, 유럽을 여행하고 유기견을 임시 보호했다. 그전에는 시도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일상을 이곳에서 채웠다. 보호하던 유기견은 반려견이 되었고, 유럽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인연은 애인이, 남편이 되었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니 짝사랑의 고백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저자는 자기만의 삶을 완성해나가고 있었다.


듣다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는 것들이 사실은 꽤 어려운 시도였다는 것을 안다. 혼자서 해외여행을 꿈꾸지만 쉽지 않다는 현실을 마주친 적이 여러 번이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쉽지도 않은 일이 되고야 마는 걸까. 몸의 불편함을 느껴서 요가나 수영을 생각한 적도 있지만, 선뜻 등록하지 못하고 학원 앞에서까지 망설이게 되는 서성임.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일이 이렇게 가벼운 발걸음일 수 있을까? 무심코 드는 의문에 답을 주는 건 저자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자산이라고 여기는 집의 의미를 다르게 겪어온 저자의 경험이 삶의 다른 방향을 열어준 거라고 말이다. 내가 집을 구하면서 들은 조언처럼 잘 팔리기 위한 집이 아니라,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채워가는 시간이 준 것은 거대했다. 수많은 이사로 만들어진 집에 대한 생각이 현재 저자가 머무는 집을 채우고 있다. 번잡하지 않고 조용한, 조금만 걸으면 숲길이 보이는(이른바 숲세권? ^^) 곳에 터를 잡고, 일상을 보낸다. 저자가 경험한 집들이 곧 저자의 역사가 된다. 그 집들을 거치며 성장한 한 사람의 내면에 무언가 차곡차곡 쌓여있을 것을 생각하니, 당시에는 힘들다고 여겼을 순간들이 다르게 보인다.


지금까지 거쳐 온 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집에서 보낸 시간의 힘을 말하고 있다는 게 저절로 느껴진다. 세월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세상의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 그 공간들을 거치지 않았다면 다 알지 못할 지금의 다짐이나 생각 같은 거.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삶의 배경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집 자체보다는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때면,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오랜 문장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아이, 아빠, 엄마, 모두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주방이나 거실처럼 공동의 공간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 혼자 존재하고 싶을 때 거침없이 문을 열 수 있는 공간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곳, 쏟아지는 눈물을 펑펑 쏟아낼 수 있는 곳. 그런 공간을 가진 집을 생각하면 또 경제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좋은, 좀 더 넓은 집을 꿈꾸며 그 집에 존재할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지니까. 그런데도 저자의 이야기에 소박한 공간을 더 떠올리게 되는 건, 물리적인 부유함이 아니라 비좁은 곳에서 부대끼며 걸어온 시간이 만들어준 '나'라는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형제자매가 많아서 단 한 번도 나만의 방을 가져보지 못한 나였는데, 언젠가 나만의 공간을 꿈꾸던 그 오랜 세월을 뒤로하고, 이제 비로소 나만의 공간이 생겼는데도 그리워지는 어떤 것들 때문에. 그러니 '나만의 방'의 문제는 물리적인 '방' 자체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지금 집으로 이사하면서 두 가지 감정에 힘들었다. 그 오래되고 낡은 집에 엄마를 버려두고 온 것 같은 죄책감과 오랫동안 벗어나고 싶은 그 집에서 나온 홀가분함 때문에.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 먼저 생각나는 집이었다. 나의 몇십 년을 책임지기도 했지만, 사는 내내 힘들다는 생각에 우울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저자의 명문빌라 시절의 대조적인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지방 소도시의 작은 마을, 오밀조밀 모여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정겹게 느낄 수만은 없었던 시선을 먼저 배웠다. 그 집에서 우리 형제자매는 울고 웃으며, 부대끼고 싸우면서 자랐다. 어느새 성인이 되어 각자의 자리를 찾아 하나둘 집을 떠났고,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떠났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엄마만이 그 공간에 남았다. 자랄 때는 어쩔 수 없이 당연하게, 커서는 잠시 머물고자 했던 선택으로 물리적인 공간이었던 집은 이제 우리에게 무엇일까.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 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 (198페이지)


저자의 문장 곳곳에서 마주했던 가족, 여자, 엄마의 공간을 생각한다. 이제 나에게 집은, 내가 새로 꾸린 이 공간에서 만들어갈 내일을 고민하는 곳이고, 엄마에게 새로 만들어줄 공간을 그리고 상상하는 곳이다. 이 집에서 당연하게 나에게 내어준 방 한 칸을 채우는 시간을 그리고 있다. 아직은 달랑 책상 하나만 놓여 있는, 방 구석구석에 정리되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는 공간이 어떻게 변화할지, 나에게 또 무엇을 채워줄지 궁금하다. 여전히 게으르고 미흡한 것투성이지만, 어제와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볼 나를 그리는 일은 즐겁다. 동시에 단 한 번도 자기만의 방을 가진 적 없던 엄마의 공간을 같이 만들어가고 싶은 욕심을 맘껏 부린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 시간은 기다림과 간절함, 설렘으로 채워지겠지.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시간을 상상하는 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그렇게 만들어갈 엄마와 나의 또 다른 역사를 기대한다. 엄마와 나 각자의, 엄마와 나 우리 모녀의 삶을 만들어줄 집, 방, 공간, 자리를. 너무 늦게 독립한 나의 미안함을 고백하면서, 나의 성장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엄마의 고생에 보답하기 위한 기다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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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0-12-18 2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다 한 번 이상 울 거 같은 예감이 드네요~ 벌써 찡...ㅠㅠ

구단씨 2020-12-21 21:33   좋아요 2 | URL
어떻게 집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나 싶었어요.
순간순간 뭉클해지고, 가슴이 서걱거렸네요.
추천합니다. ^^

scott 2020-12-24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구단님,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 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이구절은 나한테 하는말 마음을 들킨것 같네요 집이라는공간 가족 그리고 시절 ,,,뭉클해지는 이야기

구단씨 2020-12-25 00:50   좋아요 1 | URL
문장이 너무 좋죠? ^^
진짜 뭉클한 부분이 많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