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도에 대한 책을 읽었다.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상관없었다.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 싶은 책은 모조리 읽었다. 심지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까지 읽었다. 다 읽지는 못했다. 부드러운 사랑의 유대로 이어진 행복한 유색인들이라는 각색만은 참아낼 수 없었다. (킨 221페이지)
시간여행이란 화두를 떠올리면 참 낭만적인데, 이 소설이 보여주는 시간여행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설레지도 않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불안하다. 두근거리면서 상상하는 즐거움은 저기 밀어두고, 혹시나 그 시간에서 내가 현재로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앞선다. 즐거운 여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이 소설처럼 한번 시간여행을 할 때마다 공포에 떨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976년의 LA. 작가이지만 가난한 흑인 여성 다나는 일하면서 백인 남자 케빈을 만나고 결혼한다. 흑인과 백인의 구분이나 차별이 없어진 시대였지만, 둘은 주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여전히 그들끼리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두 사람은 사랑했고, 같이 살기로 하면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고 짐을 풀기 시작한다. 그때, 다나는 현기증을 느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1815년 미국 메릴랜드의 어느 숲속이었다. 붉은 머리의 백인 소년 루퍼스가 물에 빠져 있었고, 다나는 살려달라는 루퍼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시대로 간 것이다. 어떻게 된 건지? 어쨌든 다나는 눈앞의 소년을 살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이 상황을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본 케빈을 제외하고는.
처음 다나가 루퍼스를 구하러 가서 1800년대에 머물렀던 시간은 불과 몇 분이었다. 그 시간이 현재에서는 단 몇 초였다고 케빈은 말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시간 여행. 루퍼스는 조금 더 자란 소년이었고, 불을 낼 뻔한 상태에서 다나를 불렀던 것. 그렇게 몇 번씩 다나는 루퍼스가 죽을 위험에 처할 때마다 불려온다. 시간을 거슬러 1800년대로 말이다. 흑인 여성 다나가 루퍼스의 시대에 적응할 수 없던 이유는 너무도 많았다. 미국의 남부,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시대였다. 농장주들은 돈으로 노예를 매매했고, 한 인간이 아니라 자기 소유물로 여기며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를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어주는 용도로 이용하는 도구로만 대했다. 여전히 인종의 벽은 높았지만, 현재의 미국 사회에서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이루어낸 다나가 어떻게 루퍼스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다나는 한 가지를 염두에 두고 루퍼스의 부름이 올 때마다 1800년대로 돌아간다. 다나의 조상이 루퍼스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시간을 잘 건너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루퍼스의 성장을 돕는다.
부유한 백인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고 자라는 루퍼스는 어떤 사람으로 자랄까 궁금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다나의 시간 여행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흑인 여성 다나를 노예가 아닌 친구로 대하려고 했다. 물론 자기 기분 내킬 때만. 아니길 바랐지만, 루퍼스는 무자비한 아버지를 닮은 면도 있었다. 갖고 싶은 것에 모든 것을 걸을 수 있는 남자가 되어갔다. 어릴 적부터 마음에 두었던 흑인 앨리스를 사랑했고, 폭력과 잔인한 행동으로 결국 앨리스를 옆에 둔다. 어쩌면 루퍼스가 다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잔인한 농장주로 자랐을지도 모르지. 루퍼스는 앨리스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그 자신은 아버지와 조금은 다른 너그러운 백인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왔는지도. 그는 다나 역시 친구라고 여기며 자기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애정을 쏟는다. 앨리스와는 다른 의미로 다나를 사랑하지만, 상대의 마음이나 간절함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백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시간 여행 소설이지만, 왜 시간적 배경을 1800년대로 정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면서 작가에 대해 찾아보니, 이 소설은 작가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생생한 장면을 상상하게 했다. 1800년대는 노예제도가 가장 혹독했던 시대라고 한다. 그 중심으로 흑인 여성 다나를 보내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거다. 1900년대의 엘리트 여성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갑자기 책에서나 봤던 위험한 시간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게 보일지. 작가의 삶을 이루기 위해 일용직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의 열정이, 1800년대에서는 위험에 처한 상황일 뿐이다. 흑인 노예가 그것도 여성이 글을 쓰고 읽을 줄 알고, 아는 게 많고 때로는 건방져 보이기까지 한다면 어떨까. 고용주에게는 골치 아픈, 노예들 틈에 두면 위험한 노예일 뿐이다. 소설 속 다나는 옥타비아 버틀러가 소설을 쓸 수밖에 없던 현실을 담은 인물이기도 하다. 1960년대는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이 꽃을 피우던 시가라고 한다. 노예로 살았던 선조들에게 격분하면서 부모 세대를 원망하고 저주했다고.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도 있다. 그들은 부모 세대가 버텨온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거 아니겠는가. 사는 것처럼 살지 못했지만, 때로는 의지를 불태우다가 죽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주어 방식으로 삶을 이어왔으며 투쟁을 계속해왔던 거다.
나는 그날 책을 한 권 훔쳐 나이절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케빈과 내가 이 시대에 수월하게 끼어들어갔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정말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쇼를 바라보는 관찰자였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였다. 집에 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들과 비슷한 척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형편없는 배우였다. 우리는 실제로 역할 속에 녹아든 적이 없었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킨 184~185페이지)
이해하지 못하는 시절에 관해 함부로 판단하고 욕할 수 없음을 다나는 보여줬다. 처음 그녀가 흑인 노예가 있던 곳으로 시간 여행을 했을 때는 감당할 수 없었을 거다. 자유와 의지는 언제나 우리 안에 있기에 당연한 거였는데, 그 시절의 흑인은 노예로 살아가면서 그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당연했다. 설마, 그들의 가슴 속에서도 노예의 삶이 당연하다고만 여겼을까? 아니면, 그들 나름대로 버티는 삶을 이어가면서 피 끓는 투쟁을 멈추지 못했을 거로 생각한다. 다나는 루퍼스와 대화하고 그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읽어주면서 여느 노예와 다른 일상을 보낸다. 그녀가 다른 시대에서 왔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녀를 자기와 다른 존재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다나 역시 스스로 자기가 그곳에서 노예로 있는 흑인들과 다르다고 여기지는 않았을까? 그녀가 현재를 살면서 배웠던 지식과 당연한 것들이 그녀를 당당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한번 두 번 채찍질을 당하면서 얻은 건 공포였다. 두려움 앞에서 의지를 꺾고 수긍하는 자세였다. 루퍼스의 말을 어긴 벌로 밭으로 나가서 일하고 쓰러졌던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배운 것은 현실에 수긍하는 법이었다. 권력을 가진 이의 말을 어기면 이렇게 매질을 당하고, 힘든 일을 해야 하고, 언제 돌아갈지 모를 상황에 절망하며 쓰러지는 일. 이게 그녀가 배운 현실과의 타협이면서 권력자의 통제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었으며, 노예 시대의 폭력에 길드는 모습이었다. 조금씩 다나의 태도가 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두려웠다. 그녀는 현대로, 처음 왔던 모습 그대로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현재를 아우르는 여러 가지가 시간 여행을 하는 다나의 이야기 속에 있다. 아니라고 할 수 없게 지금도 여전히 보이는 인종 차별과 폭력, 노예라고 직접 부르지는 않아도 권력자들이 휘두르는 힘에 고통받는 사람들, 여성이기에 이중적으로 가해지는 인종차별과 성폭력 등 인간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문제들이 1800년대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물론 이 소설은 단순히 그런 배경뿐만 아니라, 작가가 다나에게 반영한 애증이라는 인간 감정도 눈여겨 볼만 하다. 다나는 루퍼스가 살려달라고 할 때마다 시간을 초월해 그에게 간다. 그 소년을 위기에서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와 다른 백인 남자로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의 조상이 될 사람이기도 하기에 말이다. 그러면서도 루퍼스를 지켜볼 때마다 조금씩 변하는, 점점 그의 아버지와 닮아가면서 노예를 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증오한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이해하면서도 그녀에게까지 위험을 가할 때마다 그를 증오하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현재로 돌아와서 안도하면서도 루퍼스와 있던 곳을 집으로 여길 정도로 그리워하고 안도하기도 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 애증의 감정이 어떤 결말을 만들어냈을지 생각하면...
처음에는 그저 상상과 판타지로 만날 자세를 가졌었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다나가 시공간을 초월한 순간들이 무엇을 바꿔놓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게 됐다. 그때의 노예제도가 다나의 등장으로 얼마나 다른 길을 걸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루퍼스가 있던 와일린 가의 흑인 노예들은 다나의 존재로 자기 의지와 자유에 대해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바라본다. 현실의 불안과 불평등에 고민하고 투쟁할 자극이 되는 존재. 한 세기를 거슬렀던 다나의 시간 여행은, 여행 그 이상의 의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