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타고 싶다..."
늦은 저녁, 가끔 집 뒤로 산책하러 갈 때가 있다. 그 길을 기찻길과 나란해서 거의 30분 정도 걷다 보면 몇 번이나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보게 된다. 어떤 날은 기차 안이 텅 비어 있기도 하고, 어떤 기차는 입석까지 꽉 차서 지나가기도 하고... 이런 감정은 코 흘리며 놀던 어린 시절에나 생길 줄 알았는데, 그렇게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기차 타고 싶다고 말하면, 나도 덩달아 저 기차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엄마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기차 타고 통학했다고 한다. 집 근처 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리는 역 근처에 학교가 있어서 그랬다고. 그때는 버스보다 기차가 더 편한 통학 수단이었다고 했다. 요즘엔 시내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되는데, 기차는 장거리 이동에 타게 되는 수단인데 그런 말을 들으니 진짜 옛날 일이구나 싶다. 그러면서 생각이 이어진다. 통학하는 게 아닌 기차를 타고, 엄마는 어디로 가고 싶었던 걸까.
김탁환의 『엄마의 골목』을 가방에 넣어서 다니면서 밖에 있는 시간에 천천히 읽었다. 분량이 길지도 않아서, 집중해서 읽으면 앉은 자리에서 한두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글인데도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아서 한참을 들고 다녔다.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했는지 처음부터 보여서다. 순간순간 울컥해지고, 미안해지고, 바로 옆에 있는데도 엄마가 그리워졌다. 오랜 시간 엄마와 함께 살아왔는데도,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다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일상의 틈틈이 비집고 들어왔다.
오래전부터 엄마에 관해 쓰고 싶었다.
내 나이 서른 살에도, 마흔 살에도, 엄마의 삶이 궁금했다.
그때는 써야 할 이야기가 넘쳤으므로, 엄마는 자꾸 밀렸다. 언제나 내 뒤에 서 계실 거니까. 이번이 아니라도, 곧 돌아와 쓰면 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한번 미루니 두서너 해가 휙휙 지나갔다. 그렇게 나는 장편작가가 되었고 등단 20년이 지났지만, 엄마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며 문장으로 옮기진 못했다.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옮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너무 늦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이. (엄마의 골목, 8페이지)
그랬다. 엄마는 자꾸, 언제나 뒤로 밀렸다. 친구나 애인이랑 놀러 다니느라, 공부한다는 핑계로, 귀찮다는 진심은 숨긴 채 '다음에'라는 변명으로. 그렇게 뒤로 미루다 보니 이제는 엄마가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다리가 아파서 어렵고, 멀미가 나서 힘들고, 병원에 다니느라 시간이 안 난다고. 작가도 그랬을까. (아마 그랬을 거로 생각해야 내 맘이 좀 편할 것 같다) 엄마와 함께 걷고,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일. 쉽지도 않지만 어렵지도 않은 그 일을 그가 미룬 것처럼 나도 그랬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는 동안 다가오는 감정은, 미안함이 제일 앞선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도 엄마가 몸과 마음 의지하고 지내왔을 그곳을 이제야 같이 걸으며 적는 작가의 마음을 계속 따라갔다. 작가는, 언제 가더라도 늘 따뜻한 밥상을 내놓는 엄마의 마음을, 번거로운 일을 왜 하느냐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늦게 배운 하모니카를 부르는 엄마의 표정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을 거다. 일찍 부재한 아버지 자리의 크기를 가늠이나 할 수 있었을까. 엄마가 살아온 그 시간을 걸으며 엄마의 표정을 담는 작가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지만, 아마 이 책을 몇 번을 읽어도 다 알지 못할 것 같다. 작가가 적어낸 글로는 그 마음이 다 표현되지 못했을 것을 안다. 누구나 그러하듯, 내 맘의 모든 것이 그대로 표현되지 않을 감정의 크기를 우리는 아니까 말이다. 그 감정의 크기를 재단해야 하는 대상이 엄마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아마도 작가는, 엄마와 진해를 걷기로 했을 그 순간 오직 한 가지만 떠올리지 않았을까.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것.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를 비껴갔던 엄마의 시간 듣는 일을 이렇게 시작한 거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뭔지 아니? 일흔 살을 넘기며 늙어간다는 게 뭔지 아느냐고."
"……"
"이야기가 많아진다는 거야. 차곡차곡 이 가슴에 쌓이지. 그렇다고 그걸 전부 누군가에게 말해야겠단 생각은 안 들어. 다만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찾아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야. 네가 와서 이렇게 함께 걸으니, 네게 이런저런 이야길 하는 것이고." (엄마의 골목, 156페이지)
작가의 엄마는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찾아오는 것도 감사하다고 한다.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얼마나 듣고 있나? 엄마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고 쌓아두고 있을까. 아마도 엄마가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시간은, 할 얘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야기할 기회'가 너무도 찾아오지 않아서는 아닐까. 고작 내가 듣는 엄마의 이야기는 이런 건데. TV에서 나오는 신작 영화 예고편을 보면서 '저거 재밌겠다!' 하는 엄마의 혼잣말을 듣고 무슨 영화인지 기억해두었다가 예매하는 것, 피부과에서도 완치해주지 못하는 엄마의 머릿속 질병에 마사지를 해주는 것, 옷 사러 가서 직설적으로 말하며 엄마의 선택 장애를 완화해주는 것. 홈쇼핑을 보면서 사고 싶은 게 있는데 주문하지 못해서 밖에 있는 나에게 전화하는 엄마를 귀찮아하지 않는 것? 너무 사소하다. 사소해서 기억에서 잘 지워진다. 그냥 그랬던 일이 있는 하루로 지나가버린다. 엄마의 이야기는 대개 그런 거였다. 물론 우리가 자랄 때는, 가장인 엄마가 고민하고 꺼내야 할 이야기는 너무 거대했을지도 모른다. 어린 우리가 들어도 모를 일, 안다고 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일들이었을 거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어른이 되고 엄마가 늙어가는 이 순간에, 엄마에게서 나오는 말들은 사소했다. 뭔가 먹고 싶다던가, 쓰레기 분리수거를 잘하라던가, 처방받아온 약을 먹기 싫다던가, 하는 그런, 그냥 휙 지나가버리면 들었는지도 모를 말들. 아주 몰랐던 것도 아니 텐데, 작가의 글을 읽다 보니, 사소해서 부담 없는 게 아니라, 사소해서 슬퍼지는 말이 되고 말았다. 뭐가 그리 어려웠다고...
되풀이하는 후회와 부끄러운 반성으로 『엄마의 골목』을 읽다 보면, 저절로 생각나는 책이 있다. 한설희의 『엄마, 사라지지 마』다. 처음 『엄마의 골목』을 펼쳐 들었던 날, 집에 들어와 『엄마, 사라지지 마』를 찾았다. 출간 때 읽었으니 몇 년 만에 꺼낸 거다. 그동안 다시 꺼내어 볼 만큼 별로였던 책이 아니다. 두 번은 읽기 힘들어서다. 그런데도 그 순간에는 꺼내지 않을 수가 없더라. 밖에 있는데 계속 생각이 났다. 엄마의 길을 걷고, 엄마의 모습을 찍는 두 책이 닮았다.
노모를 찍는 늙어가는 딸. 지금은 좀 더 나이가 들었을 테지만, 그 당시의 두 사람은 69세와 93세였다. 69세의 딸이 93세의 노모의 모습을 카메라의 뷰파인더 속에 담는 순간 어떤 감정이었을 지가 고스란히 전해져와 한 컷 한 컷에 담긴 그 모습을 독자와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주인공인 엄마의 표정을 계속 보게 되는데,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노모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을 쉽게 찾을만한 표정이 없었다. 아니, 표정이 없는 게 아니라 그 표정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고 해야 하나. 곧 사라질 것만 같은 분위기에 뭐라도 하나 붙잡고 싶었다. 아마 작가도 비슷한 바람이지 않았을까. '늦든 빠르든 우리는 언젠가 고아가 된다.'는 작가의 말이 사실이니까, 그 순간이 빨리 오지 않게 간절하게 붙잡고 싶은 뭔가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작가는 엄마를 찍는 모든 순간에 아파하고 있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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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찍으면 찍을수록 쓸쓸해진다.
엄마의 고요한 적요가 사진에 남겨질수록 두려워진다. (엄마 사라지지 마, 215페이지)
엄마가 나를 두고 멀리 떠나버릴 것 같아서
나는 이 사진을 보면 조금 슬퍼진다.
하지만 그 일이 곧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엄마도, 나도. (엄마 사라지지 마, 47페이지)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안다. '찰칵'하는 순간 손이라도 떨렸는지, 작가가 찍어놓은 사진이 흐리다. 종이에 눈물이 떨어져서 번진 것처럼 선명하지 않은 페이지가 됐다. 그런데도 그 감정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엄마의 뒷모습이 하는 많은 말을 그대로 듣게 된다. 김탁환 작가가 엄마와 같이 걸으며 보았던 엄마의 많은 표정과 말을 한설희 작가도 엄마를 찍는 매 순간 그대로 들었을 거다. 그러면서 이별의 순간을 연습하는지도 모르겠다. 연습한다고 해서 이별이 이별이 아닌 게 되지도 않고, 이별이 슬프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폭풍을 만난 것처럼 이별이 거대해질 것 같아서 무서워서,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두 작가가 그려낸, 언젠가 마침표가 되어도 끝나지 않을 엄마의 기록들이 뜨거운 이 여름에 서늘하게 다가온다. 봄날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고 또 후회했다. 얼마 전에야 알았는데, 내가 사는 이곳 시에서 하루 코스 투어버스가 있더라. 작은 동네에서 '투어'라는 말이 우스웠지만 궁금해서 찾아봤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지명들이었는데,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몰랐나? 마침 그중에 몇 곳이 엄마가 궁금해 하던 곳이라 투어 신청하려고 했더니, 더워서 싫단다. 이 더위에는 그 어디도 가고 싶지 않다고. 엄마와 나는 입맛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데, 더위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건 또 닮아서, 이 작은 투어 버스를 타는 건 가을로 미뤄졌다. 여름보다는 걷기 좋은 계절일 거다, 가을은... 덥다 덥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이 여름도 금방 가겠지. 조금이라도 바람의 느낌이 달라지는 그때가 되면 작정하고 걸어야겠다. 살 게 없는데도 저녁에 산책 삼아 가는 동네 마트도, 무서워서 미루고만 싶은 병원도,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그 길도, 같이 걸어야겠다, 엄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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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엄마 얼굴을 머리맡에서 가만히 내려다봤다. 죽은 엄마 얼굴도 이러할까. 잠든 얼굴과 죽은 얼굴은 어떻게 차이가 날까. 질문 두 개가 연이어 떠올랐을 때, 엄마가 눈을 떴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자, 엄마는 처녀처럼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죽음이란 단어를 걷어내기라도 하듯. (엄마의 골목, 171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