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
요스트 더프리스 지음, 금경숙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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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터넷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세계에 몰입하는 이들의 모임을 보면 놀라울 때가 많습니다. 때로 일반인들이 상상하기조차 싫어하는, 생각만 해도 비위가 상할 듯한 주제를 놓고 심도 있게 토론하며 무아지경으로 몰입하기도 합니다. 때로 이런 모임에서 놀랄 만한 결론도 도출되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나올 법하지 않은 성과입니다.

만약,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인류사 악마와도 같은 존재에 대한 몰입이라면, 반드시 그 인물에 대한 존경, 숭배의 마음가짐 그 소산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히틀러 같은 악인에 대해 100% 완전한 객관화가 이뤄지려면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할 수 있겠으나, 이들 마니아들은 그저 역사상에 놓인 특이점 하나만으로도 열광하며 관심을 쏟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지적 호기심으로 인류사가 발전하는 법이며, 이 과정에서 탄생한 여러 성과는 다른 방향으로 얼마든지 응용될 수 있습니다.

히틀러에 대한 진지한 연구자들은 현실 세계에 아주 많습니다. 그 대부분이 연구 대상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이며, 구태여 마음가짐(윤리적 태도)을 그쪽으로 쏟지 않더라도, 악마의 삶에 대한 연구란 어떤 경향성을 별반 필요로 하지 않기에, 파다파다 보면 단죄와 지탄, 탄식 쪽으로 자연히 마음이 향하게 된다는 점에서 좋습니다.

대상이 비록 히틀러 같은 악마일망정 그 연구 대상에 대한 최고 권위자의 평판을 지니려는 욕망, 어설픈 야망, 공명심은 누구도 비껴갈 수 없습니다. 그 분야 일인자 명성이라면 차라리 사양하겠다... 네덜란드는 2차 대전 당시 특별히 나치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나라인데도 이 소설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딱히 이런 생각을 갖진 않습니다. 단죄를 위해서라도 연구는 철저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마음가짐일까요? 그런 면도 크겠지만, 그보다는 그저 지적 호기심과 열정의 출구를 찾고자 함입니다. 처음에는 이처럼 유쾌한 발놀림이었는데, 나중에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를 보면 주인공들은 젊은 시절 급진 좌파 단체에 몸을 담던 청년들입니다. 이들이 우연히(?) 프랑스 혁명사 한 끝자락에 엮인 음산한 저주("자끄 드 몰레, 드디어 우리는 당신의 복수를 완성했습니다.")와, 그로부터 수백 년 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몰살한 기사단 이야기를, "날조"를 통해 연결시킴으로써, 장난으로 시작된 파문이 연쇄 살인극으로까지 스노볼처럼 발전합니다.

이 소설도 비슷합니다. "너는 나의 도팽(왕세자로서 후계자)이 될 것인가, 아니면 로베스피에르(왕정을 파멸시킨 공화파의 독재자)가 될 것인가?(p10)" 저 가상의 세계에서 히틀러 연구의 최고봉인 요시프 레길리멘스 브리크 교수의 뜻하지 않은 죽음 후, 그의 후계자로 인정 받고 싶었던 프리소는 엉뚱한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깁니다. 엉뚱하게도 먼 나라 칠레에 브리크의 진짜 후계자가 살고 있었던 거죠.

책 중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 사람 역시 히틀러의 대를 이어 제국을 통치하리라는 기대로 가득했던 악당이었습니다. 히틀러라든가 저 하이드리히에 대해 우리의 프리소가 설마 동경 같은 걸 품지는 않았으리라 믿고 싶지만, 소박하고 어찌 보면 우습기까지 한 질투심, 공명심에 눈이 멀었을 때 적어도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한 어리석음만큼은 저 둘을 매우 빼닮아 보이는 게 안타깝죠.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개봉된 어느 미국 영화의 제목인데, 구태여 이 작을 끄집어 내 농담의 소재로 삼는 데에서 어느 정도 "스승(?)에 대한 프리소의 배신감"이 암시됩니다. 역주에 패러디라고 자세히 나와 있는데, 그 외에도 영단어 you(당신)와 Jew(유대인)의 발음이 비슷한 사정까지 감안해야 더 재미있어지겠습니다.

본문과 역주에도 잘 나오지만 앤디 워홀은 실제로 그 사고를 겪은 후 자신의 모든 체험이 마치 TV를 통해 겪는 듯 느껴졌다고 합니다. 실감의 상실, 현실로부터의 자기 소외라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p180에 처음 이 말이 나오고, p199 이하 호텔의 TV를 켠 후 그녀와 나의 정사 영상을 마치 남의 모습처럼 담담히 시청하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대목에서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광대의 파토스를 전달받습니다.

프리소에게 마뜩지 않은 경쟁자가 출현한 곳은 칠레입니다. 칠레는 과연 그럴 만도 한 곳인 게, 20세기 초 경제적 활황을 누릴 때에도 인종주의가 만연한 고장이었으며, 이 책에도 나오듯 일종의 "멜팅 팟(미국처럼)"을 만들기 위해(p204) 비정형적 이름을 권하는 풍조가 지배적이기도 했습니다. 그 실험은 결국 실패로 바뀌어 갔으며, 남미의 허약한 등뼈(p202, p128)라는 비유가 적절하게도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마침내 피노셰(피노체트) 같은 군부 독재자가 등장합니다. 히틀러 같은 주제에 깊숙이 침잠하려면 이런 나라가 배경이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맘마 미아>로 유명한 아바의 히트곡 중 "워털루"란 게 있죠. 실제 나폴레옹은 워털루가 아니라 더 떨어진 로슈포르에서 항복했다는 필립의 말(p252)은 매우 냉소적이지만, 한편으로 프리소의 무리가 어디서 길을 잃기 시작했는지 날카롭게 짚습니다. 히틀러는 (책 역주에도 나오지만) 그 의회 연설에서 "몽유병자"의 길을 스스로 천명한 이래 정말 갈 데까지 가 보자는 도박꾼의 심정으로 막된 길을 걸었는데, 안타깝지만 소설에 나오는 누구의 행보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판돈으로 건 몫이 어느 정도 무모했는지 사이즈의 차이가 있을 뿐.

"롱기누스의 창(p95)"은 중세인들이 광신을 투영하던 가짜 성물인데, 어이없게도 히틀러 역시 비이성적인 열정을 이런 가짜 상징물에 퍼부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도 나오죠. 우리가 나치식 경례로 아는 그 동작도 훨씬 유구한 역사를 지니는데, 히틀러 아닌 그보다 훨씬 오랜 역사에 호기심과 지적 능력을 투자하는 이들이 박탈감에 억울해할 만합니다. 히틀러는 살아생전에 수많은 무고한 목숨을 빼앗았고, 죽은 지 반 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은 마니아들에게서 그들의 호기심이 향할 정당한 권리를 빼앗고 있습니다.

"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 로마 공화정의 혼란을 극복하고 일인자 자리에 올랐지만 "나는 그저 일등 시민"일 뿐 황제가 아니라며 프린키파투스라는 호칭을 고집한 옥타비아누스 같은 인물도 있었습니다. 야심은 하늘을 찔렀지만 동시대 다른 이들의 컨센서스를 철저히 (겉으로만) 존중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현명한 정치인이었죠. 저 라틴어구는 영국 수상(총리) 등을 가리킬 때도 쓰이는데, 왕이나 대통령 같은 게 아닌, 그저 같은 위치의 장관들 중에서 으뜸일 뿐이라는 뜻이지만 사실상 현실의 권력 세계에 그런 겸손함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왕(브리크)은 죽었다. 왕(프리소) 만세!" 대관식을 하고 싶었던 프리소의 얼띤 야망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동을 낳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이중의 무지를 극복해야만(p284) 이 우행의 트랩, 루프에서 풀려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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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대처력 - 나는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강준린 지음 / 북씽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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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 받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직장發(발)입니다. 누구나 회사에서 우등생이 되고 싶어하지만 마음 같이 되지를 않습니다. 학교 공부는 대부분 책에 나온 대로, 정형화한 해결 방안이 마련되어 있고 이에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끝입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마주치는 난관, 문제들은 정해진 해법이 없을 뿐 아니라 때로는 같은 상황인데도 반대로 대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직장에서 발휘해야 할 진짜 능력은 PT 실력, 외국어 구사 능력, 기획력 같은 게 아니라 순간순간 엄습하는 상황에의 대처 능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기는 버릇을 들여라." 누구인들 지고 싶어서 지겠습니까만 상황에 계속 순응하다 보면 지는 게 버릇이 될 수 있습니다. "일이라는 것은 결과가 좋으면 재미있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재미있어지면 일도 순조롭게 진행된다.(p14)" 어떻게 하면 일과 그 결과가 재미있어질까요? 저자는 그 원인을 날카롭게 짚습니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 때문에 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지나치게 긴장하기 때문에 진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지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지는 셈이다.(p15)" 저자가 제시하는 답은 "난관에 처했을 때는 하나라도 무슨 성과를 내어라. 자신감도 생기고 주위의 평가까지 바뀌면 발언력도 커지고 활력도 생긴다."

여기서 제가 주의하여 본 건 "활력"입니다. 버릇은 "아 내가 이 버릇을 들여야지"하고 억지로 마음 먹는다고 들여지질 않습니다. 몸은 매우 정직하기에, 즐거웠던 체험이 없으면 몸에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저자는 "이기는 습관과 이기는 리듬"을 말하는데, 일단 성과와 이기는 경험을 겪어 봐야 하며, 다음으로 그것이 주는 쾌감이 따라야 합니다. 이런 게 몸에 배어야,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그 짧은 시간 동안 긴장하지 않고 과감히 이기는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히딩크는 이걸 두고 "킬러 인스팅트(instinct)"라고 명명한 적 있죠.

드라마 <사랑과 전쟁> 같은 데서도 나오지만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배우자와 트러블을 겪는다든가 하면 그 일 잘하던 사람이 어느날 문제사원으로 찍히고 맙니다. 저자는 다른 부작용 요소는 접어 두고, 일단 이런 일이 생기면 "일에 재미를 못 느낀다"고 지적합니다. 이 책은 대처력, 이기는 습관 등에 대해 논하는 책이므로 "가정 불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에 대한 집중, 재미를 어렵게 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셈이죠. 여튼 우리 독자는 "가정 불화 등이 일을 어렵게 하는 현실"을 있는그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멍하니 시간만 보낼 게 아니라, 회사 안에도 내 편이 있을 수 있는 만큼 어떤 도움을 구해야 하며, 무기력하게 버티다 사내 이미지가 나빠지는 과정은 극력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실패"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이때 무작정 의미 없은 실패를 겪기만 하는 건 "지는 습관"을 몸에 배게 하기에 좋지 않습니다. 실패를 할 때 하더라도 그 전에 온갖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하여 신중하게 결정하고, 결정한 후에는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결과가 실패라 해도, 이미 많은 시나리오를 머리에 그려 봤기에 적어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는 않으며(고심 끝에 내린 결정), "다른 대안으로 이렇게 해 봤더라면" 같은 게 공연한 미련, 회한으로 남는 게 아니라 확실한 전략 자산으로 마인드 안에 정리가 됩니다. 이제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정답으로 바로 실행이 가능하죠. 그러나 무의미하게 저지른, 멍한 상태에서 저지른 실패는 결국 다음 번에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고 도움을 구하는 습관은 어떨까요? 우리는 이런 쉬운 습관이 좋지 못하다고 지레 판단하지만 사실 남에게 뭘 물어 보는 건 의외로 어려운 결정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창피한 기분 때문에 못 물어 보는 게 더 흔합니다. 오히려 남에게 뭘 물어 보는 건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저자는 혼자 끙끙대지 말고 직장이건 어디서건 도움 청하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합니다. 도움을 구하는 사람을 오히려 낭패에 빠뜨리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당장 우리만 해도 누가 내게 길을 물어 보면 "폰에서 검색해 보세요."라고 쌀쌀맞게 거절한 후 지나치겠습니까? 가능한 한 자세히 가르쳐 주겠죠. 사람은 타인에게 도움을 줄 때 뿌듯함, 만족감 등을 느끼는 때가 더 많습니다. 도움을 청하되 해당 분야에 밝은 이들에게 청하여 시행 착오를 피하는 요령이 중요합니다. 또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친분을 쌓고 건설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죠. 이때 도움이 "민폐"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오늘부터 금연을 하겠다, 다이어트를 하겠다 결심했을 때 되도록 주위에 널리 알리고 다니라는 조언이 있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작심삼일, 변덕, 중도포기를 스스로 막기 위해서입니다. p74에서 저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납기일이 정해져 있고 지불 날짜가 눈 앞에 버티고 있으면 이를 게을리할 수 없는데, 문제는 그 만기라는 게 자신만 알고 있다면 마음에 나태함이 생기는 게 당연합니다. "반드시 지키겠습니다!"를 남들에게 공언하고 다니는 것만큼 경각심이 돋는 건 없죠. 중요한 업무 말고, 하다못해 책상 치우는 사소한 일도 며칠까지 마치겠다며 반드시 남들 앞에 떠들고 다니라는 게 저자의 조언입니다.

약간 재미있는 충고도 있습니다. "이 회사에 계속 다니는 것에 회의가 들고, 비전도 안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상식 선에서 다섯 가지 정도의 시나리오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4)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전업을 한다. 5) 회사를 그만두고 유유자적 시간을 보낸다 등은 사실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모두가 머물고 마는 건 1) 별 생각 없이 계속 다닌다 이겠는데, 저자가 보다 바람직하게 여기는 건 2) 계속 직장을 유지하되, 다른 곳에서 반드시 즐거움을 찾는다 입니다. 2)라고 해서 혁신적이라거나 현실을 멋지게 타개하는 방안은 못 되지만, 지는 습관을 몸에 배게 하는 1)보다는 낫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바꿔 먹어도 여전히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요즘은 어떤 회사도 직원에게 무엇인가를 강제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못하지만, 여전히 사원은 현실이 불만스럽기 마련이죠. 그때 저자가 제안하는 건, "구직시장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대기하는지 보라, 혹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지를 떠올려 보라"입니다. 제가 학식 때 어떤 친구는 "줄을 선 저 뒤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쾌감이 느껴지지 않냐?"고 하더군요. 확실히 모든 일은 생각하기,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부하직원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 건 부하직원에게 원인이 있는 게 아니다." 많은 관리직들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영이 서지 않고 권위가 먹혀 들지 않는데, 자신들이 승진의 사다리를 오를 무렵에는 조직의 분위기가 이와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지적하는 원인은 "과거와 달리 현재는 IT 시대이기 때문에 사장이건 부장이건 심지어 신입사원이건 입수할 수 있는 정보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는 게 힘이라고, 포스트의 높이에 무관하게 손에 넣는 정보가 비슷하다면 의사 결정을 할 때에도 재량의 범위가 넓습니다. 이러니 예전처럼 상급자에게 절절 매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사회 분위기와 구조가 이처럼 바뀌었는데도 아랫사람이 "왜 나를 존중하지 않지?"라며 격분한다면 그건 당사자의 판단 착오에 불과합니다.

"아이들은 반항하지 않는 동물들을 괴롭힌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있는 자신을 확인할 수 있어서이다." 인간사도 마찬가지라서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상급자건 뭐건 꾸준히 찾아와서 괴롭힙니다. 이럴 때에는 가만히 있는 게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나 마찬가지라서, 유급 휴가 사용 건이건 뭐건 일일이 이치에 맞게 따지는 게 상책입니다. 책 뒤에는 "봐도 못 본 척하는 건 구세대의 룰이다"란 말도 있습니다.

사내 괴롭힘 때문에 곤란을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참다참다 한번 크게 터뜨리곤 하던데, 마치 바람 핀 배우자의 직장이나 불륜 상대녀한테 찾아가서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며 소동을 피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과거에는 이런 게 통했는지 모르지만, 현대에는 오히려 자해, 자충수에 가깝죠. 그렇게 하다가 역으로 폭행죄, 명예훼손죄, 업무방해 등으로 고소당하기나 쉽습니다. 저자가 제안하는 건 "정정당당히 싸우되 사내 규칙, 법규 등은 철저히 지키라"는 겁니다. 내 기분을 푸는 게 목적이 아니라, 부당한 처우로부터 구제를 받거나 배상을 챙기는 게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맞는 X이 이기는 세상"이라고도 하죠. p184에는 성희롱 대처법도 나오는데 특히 여성분들이 잘 읽어 둘 필요가 있겠네요.

냉정히 말해 회사는 거대한 조직이 사원들을 이용하는 구조입니다. 대신 과거에는 평생 고용 등을 통해 사원에게 회사가 큰 혜택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림도 없죠. 저자는 그전에 "사원은이제 회사를 이용해야 한다"는 말에, "그게 아니라 활용하는 것"이라 정정했다고 하는군요. 아무리 커리어 구축이 자유로운 시대라지만 헤드헌터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는 이는 드물고 한 직장에서 끝까지 버텨 보는 사람의 수가 훨씬 많습니다. 만약 전직, 퇴직이 마음 같지 않은 상황이라면 "수동적으로 있을 게 아니라 내가 이 회사를 활용해 보자"라는 시선 전환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전보다는 더 많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겠냐는 거죠.

세상이 본디 복잡하게 바뀌니 어떤 정해진 해법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합니다. 정해진 해법에 집착하다가는 낙오자나 되기 십상이죠. 복잡한 세상을 고정된 각도에서 보지 말고, 나만큼이나 변덕이 심한 생물로 간주하여 대처하는 게 좋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통해 대처력을 함양하려면, 정확하고 객관적인 현실 인식, 낙관적 세계관이 아마 필수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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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척도
마르코 말발디 지음, 김지원 옮김 / 그린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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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하는 도시, 혹은 국가가 그런 질서와 안녕을 누릴 수 있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이들의 노력과 지혜가 쌓여야 하지만, 공동체의 안보, 안정이 무너지는 건 불과 한순간입니다. 그 원인이 질병이 되었든, 혹은 불순한 외부 세력의 간여(干與)와 공작이 되었든 말입니다. 소설은 어느 미스테리어스한 살인 사건(인지도 처음엔 모를 만한)을 해결하는 과정을 다루지만,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만족이 결코 거저 얻어진 게 아니라는 교훈도 은근히 전달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르네상스의 천재 기술자,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이지만 그가 활약한 도시를 다스렸던 권력자 루도비코 스포르차도 큰 비중으로 나옵니다. 이 소설에 나오지는 않지만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끝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이 소설에서 그가 갖고 노는 멍청한 프랑스 왕이 그 후계자를 맞은 후에는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여 유폐되는 신세로 떨어지는데 바로 자신이 저지른 어느 악행의 경과(이 소설에도 잠깐 묘사되는)와 비슷한 꼴입니다. 역시 인간의 악업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인가 봅니다. 자신이 알든 그렇지 못하든 말입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이 소설 속에서, 또 실제 역사에서, 적어도 통치 초기에는 매우 유능하고 노련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다 빈치가 근거지였던 피렌체를 떠나 그가 다스리는 밀라노로 이주한 것도, 밀라노에서는 광신적 믿음에 들떠 아무 일에나 코를 들이미는 무도한 세력의 간섭을 비교적 멀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도 수시로, 아니 매우 자주, 무지몽매한 종교 맹신 속에 시드는 인간의 지혜와 각성에 대한 안타까운 느낌이 표현됩니다. 그들은 겉으로야 신(神)의 뜻, 정의를 입에 올리지만 본인들이 신이 아닐진대 누가 감히 신의 뜻과 정의의 본질에 대해 확언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건 비루한 사익과 탐욕에 불과합니다.

어느날 스포르차의 궁정 한복판에 웬 젊은이의 변사체가 발견됩니다. 변사체라 함은 그 죽은 원인이 특별히 수상하게 보이는 시체를 가리키는데, 겉으로 보아 자연사와 다를 게 없으며 점성술사 등 일 모로가 거느리는 전문가(?)들은 질병의 창궐, 즉 직전 시기에 전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재유행 조짐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현재 코로나 때문에 고생하는 한국 독자들도 괜히 신경이 쓰이죠(이 소설은 몇 년 전에 지어졌습니다). p79에는 편지를 소독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러나 시신 앞에서 다 빈치는 유독 긴장된 반응을 드러내고(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후반부에 밝혀집니다), 이 젊은이가 색다른 방법으로 타살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후부터 우리 독자들과 다 빈치, 권력자 일 모로가 함께 그 진상을 추적해 가야 합니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 소개가 꽤 긴데 보통 소설 앞에 놓인 캐릭터 요약은 굳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이 부분이 거의 본문의 일부에 가까워서, 좀 힘들더라도 미리 읽어 두는 편이 좀 낫습니다(안 그래도 상관 없지만). 소개에서도, 또 본문에서 샤를 8세는 많이 모자란 위인으로 나오는데 다른 누구보다 전지적 시점의 작가가 가장 큰 경멸감을 가진 듯합니다. "무장은 우리가 하고 전쟁에는 네가 나가라"가 아마 샤를 8세의 모토가 아니었을까 하는 문장이 있는데 저는 1970년작 영화 <패튼>에서 병사들의 불만이었던 "His guts, our blood."가 생각 났습니다.

소설 처음에 페라라 공국의 대사(밀라노에 파견된)가 나오는데 기대보다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주의깊게 봐 둬야 합니다. 사실 인물 소개에 나오는 인물들 중 상당수는 본문에서 비중이 적거나 아예 안 나오곤 합니다. 소설을 2/3 정도 읽고 "이 많은 사람들은 언제 다 나온다는 건지?" 싶었는데 혹시 작가가 시리즈를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릅니다(기대가 되는데 말이죠). 페라라의 지배자 데스테 가문은 유럽 전체에서 손 꼽는 명문가로서 찬탈자 스포르차 따위와는 격이 다르죠. 이탈리아 드라마 <보르자>에서도 교황 알렉산데르를 배출한 보르자 가문을 서슴없이 무시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너무 가문이 비천해서 니네 집안 딸(루크레치아)은 못 맞아들이겠다고 하죠. (그러나...)

이 소설에는 전지적 작가의 내레이션이 수시로 끼어들어 코믹한 멘트를 치는 게 하나의 특징입니다. p38에는 "이상한 소리 같겠지만 15세기에 밀라노는 이미 교통 체증을 겪었다.", p157에는 "현대의 꽉 막히는 길을 SUV로 달리는 기분"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통 체증은 대도시에서 시대를 불문하고 치르는 곤욕이며, 원래 기술이라는 게 이런저런 불편을 딱 그 시대가 감당할 만큼만 발달하는 까닭이죠.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p60에는 "요즘은 시(詩)가 아니라 인터넷을 보고 (경험하지도 못한 바에 대한) 헛소리를 떠든다"는 말도 나옵니다. p63에서 "공작에게 공작은.."은 같은 대목에서 역자가 적절한 보충어구를 끼어 넣어 약간은 난해한 작가의 원문이 매끄럽게 읽힙니다. "계속 부연 설명을 해서 미안하지만..." 같은 유머도 여전합니다.

p38에 "갈레아초는 미남이라 레오나르도가 관심을 보일 만한..."이라든가,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아들처럼"(p117), "베네치아식 취향" 같은 말로 다 빈치의 성적 취향을 제멋대로 짐작하는 다른 인물들의 대사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러나 소설 후반부에 나오듯, 다 빈치의 성향을 지레짐작하고 수작을 건 어느 인물이 웃음거리가 되는 장면에서 작가는 이런 추측들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셈이죠. 소설에 등장하는 다 빈치의 어머니도 도통 장가 들 생각을 하지 않는 아들에 대해 걱정하는 말이 있는데 다 빈치는 적어도 그건 아니라는 식으로 대꾸를 합니다. 결국 이게 거짓말은 아닌 걸로 소설에서는 정하고 갑니다. 작가 에필로그에 "섣부른 추측은 그 정도 되는 천재에게 예의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독자인 제 생각도 그렇네요.

p56에 "사회적 승격이 제한된 프랑스의 군인들은 이탈리아 인들과는 달리 죽기살기로 싸운다"는 말이 있는데 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19세기에 대영제국이 그처럼 번영한 것도, 사회적 하층민이 식민지에서 열심히(?) 일한 덕을 보았지요. 한편으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의 꽃이 활짝 핀 건, 이런 열린 사회의 특성에 기댄 바도 큽니다. 다 빈치가 프랑스에 태어났더라면 과연 그처럼 활력을 얻을 수 있었을지.

p74에는 발기부전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임포텐치아 코에운디"가 나오는데 coeundi는 어느 동사의 동명사꼴에다 다시 소유격을 취한 꼴입니다. p82에는 오스트리아 황제를 연상하는 마시밀리아노라는 이름으로 어린 아들을 불렀다고 하는데 그거야 작가의 상상입니다.
"막시밀리안"이란 이름이 이탈리아식으로 자음 생략된 형태인데 이것 말고도 여러 예가 있습니다. p84에 레오나르도는 라틴어를 잘 모르고 실력이 형편없다는 말이 있는데 저 뒤 p134에도 consider의 어원이 "cum sideribus(별과 함께)"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현대의 어원학자들도 고작 그 정도밖에 못 밝혀내었죠. 물론 그 당시의 학자들(와 교양인)에게 기대치가 더 높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p109의 라틴어 표기에서 페라라의 지배자 에르쿨레라는 이름이 Heracules에서 유래했다는 걸 우리 독자들이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저 뒤 p208에도 나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천재성은 여러 대목에서 작가의 생생한 필치로 묘사됩니다. 예를 들어 "2D가 3D보다 훨씬 구현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고대 회화가 하나같이 우습게 보이는 건 원근법 등 특정 기술이 발견되기 전이어서이다. 한편 조각은 하나같이 빼어나다는 설명이 따라옵니다. 백번 타당한 서술이죠.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p105에 "그를 만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관습적인 가벼움"이라든가, p117의 "사근사근함" 같은 표현에서 특유의 유쾌한 성격이 드러납니다.

p179의 "제 자신이 판 함정"은, 만약 다 빈치 본인이 거짓말을 했다면 주위 점성술사들의 대세 의견에 따라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하면 그만일 것을 구태여 살인이라며 일을 크게 벌일 게 뭐 있겠냐는 항변이고 이걸 일 모로가 잘 이해하는 대목입니다. 윗사람이 머리가 나빠서 괜한 의심을 일삼으면 아랫사람이 참 미치기 직전까지 가죠. 이 소설은 일 모로와 다 빈치가 여러 번 충돌하고 때로는 좋지 않은 기색으로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 통에 독자가 괜히 긴장도 하게 되는데 이게 다 작가의 페이크이니 속으면 안 됩니다. 은근 반전과 복선이 많은데, 다만 작가가 현학적인 말투라서 이 멋진 장치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작가는 장에서 다른 장으로 넘어갈 때, 전혀 다른 장면과 인물들 사이의 사건을 두고 공통된 단어로 연결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p139의 "명령"이라든가, p112의 "물론 긴장했지", 그 외에도 많은데 일종의 이중노출 기법일까요? p286 "화가서로 -> 화가로서" 같은 게 유일한 오타이며, "지아코모, 지오아키노" 같은 인명은 국어원의 이탈리아어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자코모, 조아키노 등으로 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p108 "알프스 건너편 사람 억양" p109 "알프스 아래쪽" 같은 표현은 아직도 유럽 문명의 중심이 이탈리아에 놓였을 무렵, 심지어 알프스 건너편에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표현의 흔적입니다. p185에는 "진짜 명나라 도자기를 깬 코커스패니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멋진 비유이며 과연 이 무렵에는 중국 대륙에 명조가 있었지요. 명나라라면 이미 중국사의 황혼기인데 유럽에선 겨우 이 시기에 본격 문명이 꽃피었으니 두 대륙의 성숙도 차이를 실감합니다. p200의 익명의 제노바인 항해사는 물론 콜롬부스입니다. p211 화음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 대목은, 왜 그렇게 우리가 서양 고전 음악에서 평온한 쾌감을 느끼는지 잘 설명해 줍니다. 아름다운 건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 사이의 관계이며, 이를 동아시아 음악에선 구현하는 데 실패했죠. 안타깝게도요.

책표지에는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며, 그 실수를 통해 발전을 하는 게 인간의 척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편으로,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는 신의 뜻, 정의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어떤 무지, 광신을 극복하는 게 참된 인간의 척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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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존엄에 대한 요구와 분노의 정치에 대하여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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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이란 대체 누구일까요?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0년대 후반 <역사의 종말(혹은 종언[終焉])>을 써서 전세계적 유명세를 탄 학자입니다. 또 이후 그는 저작 <트러스트>를 통해, 이른바 사회적 신뢰가 있는 사회(국가)와 없는 사회를 준별하여 또한번 화제에 오른 바 있습니다. 이 중 <역사의 종말>은, 인류가 더 이상 이념과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도도한 세계화의 물결 속에 물질적 영달에만 골몰하게 된다는 취지로 "역사의 끝"을 선언했기에 엄청난 여파를 불렀더랬죠.

재미있게도 그 예측은 다소 묘한 방향으로 빗나간 듯 보이는데, 그동안 이 교수님이 적잖이 피곤했던 듯합니다. 이 책 서문에서는 그에 대한 일종의 해명을 내놓고 있는데, 독자에 따라서는 변명(?)으로도 읽혀 무척 흥미롭습니다. 똑똑하신 분이 자신의 전적에 대해 진땀을 흘리며 해명에 나서는 건 여튼 보기에 재미있기 때문이죠. 물론 저는 그런 해명의 취지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편인 독자입니다. 학자는 점쟁이가 아니기 때문이죠.

여튼 그건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고, 다시 이 책 제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존중 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대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요? 그 전에, 우리는 일상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존중을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까?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흔쾌히 "예"라고 나오지 않는다면, 어쩌면 이 책은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그렇다고 쳐도, 그런 우리들(?)을 위해 정치학씩이나 필요한 걸까요?

책을 다 읽은 독자인 저로서는, 이 제목이 누굴 염두에 둔 것인지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습니다(고 생각합니다). 잘라서 말하자면, 교수님이 물론 일상의 우리들을 일차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쓴 건 아닙니다. 이 책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이란, 분명 어떤 특정 그룹, 특정 사회,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겁니다. 허나 예컨대 문제적 사회, 혼란한 위기의 공동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법한 한국인들이, 과연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그거 장담 못하겠다" 싶었습니다. 지금부터 차근히 저자의 주장을 저 개인적 시각에서 리뷰해 보겠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아이덴티티>입니다. 몇 달 전 광화문에서 조국 장관 반대 시위가 벌어졌을 때, 청와대의 한 관계자(라고 언론에 나온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최측의 정체성이 모호한 시위이다." 아마 이 책 제목, 또 내용에서의 "정체성, 아이덴티티"는 이 맥락에서의 의미와 좀 닿아 있을 것입니다. 또, 뭐 구태여 특정 맥락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보통 쓰곤 하는 그런 의미의 "아이덴티티"와 그리 다르지도 않습니다만 여튼 저자가 논하는 건 좀 더 현대적인, 우리가 사는 지금의 시대에 포커스가 맞혀져 있습니다. (이 책에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다룬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다 읽고 나서 보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이라는 우리말 제목은 참 잘 붙여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이 책에서 말하는 "존중"이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서문 도중인 p12에 보면 이 책의 핵심 개념으로서 책을 읽어 나가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두 가지 키워드가 나옵니다. 옮긴이께서도 본문 중 역주를 통해 자세히 설명하듯이, 그리스어에는 "투모스"라는 개념이 있는데, 혈기, 격정, 기개 정도의 뜻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 기원은 소크라테스의 이론에 서 찾으며, 인간의 혼에 대해 설명할 때 용기, 분노, 격분, 자부심 등이 일어나는 부분이라는 게 역자의 설명입니다(p12). 이 정도로도 대략 무슨 뜻인지는 독자에게 충분히 감이 옵니다. 참고로 사실 투모스는 원 발음으로 "튀모스"에 가깝고 왜 고 이윤기 선생 책에서 신화를 "뮈토스"라 쓰는 것과 같습니다만 책에서 이렇게 개념어 표기를 고정시키므로 그대로 따르는 게 좋겠습니다. 앞으로 일상에서 토론 같은 걸 할 때에도 괜한 혼란 없이 "투모스"란 단어가 정착했으면 합니다.

그 다음으로 이 투모스의 근원에 대해, 저자는 인간의 두 가지 욕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대등 욕망"이요, 다른 하나는 "우월 욕망"입니다. 내가 이 정도는 남들처럼 대접 받아야지 하는 게 전자이며, 그를 넘어 내가 남들처럼 대접 받고 그칠 수는 없다는 게 후자인데, 전자 못지 않게 후자 역시 흔한 인간의 동기와 본성, 욕망 중 하나입니다. 즉 사람은 의외로 "아니 이거 내가 누군줄 알고 니들이 감히!" 라며 발끈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심심하면 터지는 갑질 파문이라는 게 다 뭣에 기인하겠습니까.

저자가 조명하는 건, 현재 국제 사회가 왜 이렇게 시끄럽냐는 겁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이런 욕망, 이런 인정 욕구, 이런 감정 반응을 개인 차원 아닌 집단 차원에서 발현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겁니다. 미국에서 흑인, 여성, 성소수자, 빈곤층 등이 제각각의 이유에서 대등 욕망을 표현하는 게 작금의 혼란으로 드러나며, 국제 사회 역시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한 종족, 민족, 혹은 강대국에 의해 과거, 혹은 현재 핍박을 받은(혹은, 그렇다고 여기는) 국가가 이런 동기에 의해 행동한다는 겁니다. 이들이 모두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이며, 현대 정치(국내이건 국제이건)는 바로 이 점, 이 현상에 주목해야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물론 종족의 자부심, 자존감, 독립 욕구, 혹은 남을 지배하려는 충동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특히 현 21세기 초에는, 어떤 계급 해방이라든가, 거대 민족 사이의 패권 다툼이라든가, 자본의 피말리는 경쟁 구도 같은 것보다 이 요인이 더 지배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작용한다는 게 저자의 견해입니다. 확실히,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테러, 분쟁, 총기 난동 등은 이 요인으로 어떤 통일적 설명이 가능합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이들의 정체성이야 사건마다 천차만별일망정 말이죠.

p22에는 샘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이 언급됩니다. 이 이론 역시 이 책 저자 후쿠야마 교수의 <역사의 종언>과 비슷한 시기에 제기되었습니다만 훨씬 강한 설명력과 유효성을 여태 유지하는 듯합니다. 아무튼 이 무렵부터 이념 대결이 종식되고 세계는 구미, 그 중에서도 미국 중심으로 문화, 경제 등 모든 면이 재편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경제 체제, WTO가 주도한 국제 분업 체제가 특히 심각한 도전을 맞았습니다. 이 책은 2018년에 저술되었으므로 코비드 19의 만연까지는 목도할 수 없었지만, 현재는 서플라이 체인이 이 전염병 대유행 탓에 결정타를 맞고 구조 재편을 꾀하는 중입니다. 여튼 저자는 전염병 이전부터 이미 "존중받고자 하는 자들의 몸부림" 때문에 세계화 추세가 멈출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는 거죠.

일단 값싼 노동력을 찾아 선진국의 기업과 자본이 해외로 이동하고, 그 와중에 기존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고 생계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무리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이라 해도 이들은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에, 자국 내에 들어와 있는 불법 체류자들을 향해 거침 없이 혐오의 표현을 내뱉고 일자리와 자존을 지키려 듭니다. 이것이 표면화한 결과가 2016년 "국외자" 트럼프의 집권으로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몇 달 전 브렉시트 역시 국경이 허물어진 EU 로부터(혹은 그 권역 외로부터까지)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와 경계심이 발동한 후과입니다.

유럽에 이주한 아랍인, 북아프리카인들 역시 이런 "투모스"를 표현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왜 너희들은 종교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를 차별하는가? 이런 몸부림이 각종 테러로 나타나는 건데 설령 동기면에서 납득이 갈 부분이 있다 해도 여튼 폭력이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 와중에 서유럽은 기존의 존경, 권위, 리더십을 잃고, 그 결과로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회의도 확대되었으며, 이는 다시 중국, 헝가리, 터키, 필리핀 등에서 발호하는 신 권위주의, 독재체제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죠.

저자는 특히 ISIS 같은, 명백히 인류 보편의 가치와 상식에 반하는 집단에 대해서조차 젊은 세대가 자발적 참여 행태를 보이는 데에 경악합니다. 이들 젊은이들은 기존의 사회, 기성 체제가 보여 주지 않은 관용, 포용, 존중을 바로 저 반사회적 반인륜적 기구, 집단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당장 대한민국의 "김군"만 해도 자발적으로 찾아가 입대하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게 역시 "존중받지 못한 자의 몸부림"에 해당합니다. ISIS에 소속된다고 해서 무슨 실질적 존중이나 물질적 혜택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의 천국을 약속하며 그들은 이런 어린 대원들에게 자살 공격 따위를 거리낌 없이 시킵니다. "죽음"이란, 현생의 종말을 뜻하는 건데 대체 사후의 복락, 쾌락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도 이들은 "투모스"를 충족하기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내가 어떤 이념, 더 큰 자아를 위해 죽는다는 자체가 그들에게는 무한한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겁니다. 인간의 행동 동기 중에는 이처럼 비이성적, 비타산적(?)인 것도 있습니다. 아쉽지만 이 역시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고, 저자는 이런 본성이 종족, 민족, 국가 단위로 나타나는 현상, 부작용 등을 분석하는 거죠.

저자는 니체의 이른바 초인 개념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기존 개념과 가치를 모두 재평가하고 새로이 창조하는 존재입니다(p102). 그런데 작금의 무질서와 혼동은, 이런 니체식 의미에서의 각성에서 기인하는 게 아닙니다. 니체의 초인은 어디까지나 개인 레벨의 각성이지만, 현재의 "정체성 몸부림"은 개인이 아닌 집단 정체성 차원의 모색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월한 민족, 남성, 백인, 기독교(혹은 이슬람)인 집단"을 그들 행동의 준거로 삼고 이를 맹렬히 내세웁니다. 이런 움직임은 (앞서도 말했지만) 21세기에 들어 처음 나타난 게 아니고 예컨대 에스파냐의 카탈루냐인, 바스크인 등 소수 민족들이 수십 년 전부터 표방해 온 움직임입니다. 다만 아일랜드 분리주의나 바스크 민족주의는 지도자들의 성숙한 결단에 의해 차츰 수그러드는 추세(역주에서 에스파냐 북동부라고 한 건 아마 역자의 착오인 듯합니다. 카탈루냐는 북동부가 아니라 남동부죠)이며, 반대로 저 멀리 스리랑카의 분쟁은 엉뚱하게도 일방의 패권이 우세해지며 폭력적으로 종식되는 단계입니다.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동 역시 21세기에 들어 이론적 분석의 집중적 목표가 된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새로 탄생한 "행동경제학"의 경우, 사람들은 크기에 무관하게 이익보다는 손해의 회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이익의 경우 아무리 액수가 크고 확률이 높아도, 만약 작은 손실이나마 감수해야만 한다면 쉽사리 선택을 안 한다는 겁니다. 저자는 이런 심리를 중산층, 빈곤층 등이 느끼는 비이성적 반응에까지 적용하여, 혹시나 상실될 수 있는 계급적 이해(근거가 없다 쳐도)에 왜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설명하려 시도합니다. 이 대목에서도 저자는 헌팅턴 교수와 예전 알렉시 드 토크빌의 책을 인용하는군요.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건, 이것 연관하여 저자가 태국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비교적 자세히 분석하는 대목입니다.

"각 집단에게, 외부인은 가질 수 없는 고유한 정체성이 있다는 믿음은 1970년대 대중문화에서 빈도가 급증한 체험이라는 단어에도 반영되어 있다(p181)." 사실 이런 믿음은 잘못된 것이지만, 특히 우리 같은 단일민족이 소중히 여기는 착각이기도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경험과 체험(lived experience)은 서로 다르며, 이는 독일어 단어 Erfahrung과 Erlebnis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합니다(같은 페이지 중반부). 이에 저자는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는데, 에를레프니스를 에어파룽으로 전환하기를 어려워하는 대중이, 공동의 기억을 와해시켜 가며 마침내 폭력성으로 전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p182). 이를 두고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야만성의 시대를 논하며, 바로 이 개념에 착안한 게 저자의 "정체성 위기"라는 겁니다. 독자인 제가 주관적으로 정리하면, Erfahrung은 보편적 가치를 담은 경험, Erlebnis은 분개와 원한이 그대로 녹은 미성숙한 체험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네요.

이제 다시 이념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역사의 종말을 어떤 이념의 종말로 인식한 건 당시 미디어와 대중의 오해이며, end는 종말이라기보다 목표, 도착지점에 가깝다"고 합니다. ㅎㅎ 솔직히 저는 고개가 갸웃해지지만 이 저자께서 젊은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를 분석틀 중 하나로 줄곧 사용해 온 것은 사실이며 이 책에서도 요소요소 전통적 좌파 사회과학 키워드가 기본 프레임으로 인용됩니다. 이제 논의는 기존의 좌파, 우파 정치 진영이 이런 현상을 어떻게 대처할지로 이어집니다. "빚을 내어서라도 명품을 걸쳐야 한다"는 많이 모자란 허영심을 정체성, 존중감의 일부로 삼는 낙오자가 만연한 사회 역시 결코 정상이 아니며, 좌파 우파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현실 대응 능력과 균형 잡힌 인식을 어떻게 함양할지에 대해 이른바 지도자들이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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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Philos 시리즈 4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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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과 방송인 빌 모이어스 사이의 대담을 싣습니다. 책 자체는 한국어판이 십 수 년전에 이미 나왔더랬고, 생전에 이윤기 선생이 번역까지 하여 큰 관심을 모았던 책인데 이번에 21세기북스에서 새 장정으로 다시 출판되었습니다. 더 깔끔하고 보기 좋은 편집이 된 듯도 하고, 언제 읽어도 심오한 진리를 담은 대담 내용이라서 독자는 새롭고 경건한(그러면서도 유쾌하고 재미있는) 기분으로 정신을 물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한국에서도 많은 독자를 확보한, 일종의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며 <천의 얼굴을 가진...> 같은 책이 큰 화제가 된 적도 있죠.

"그 영적 잠재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까?- 모이어스"(p30)
"선생님께서는 신화의 정의를 의미의 모색에서 의미의 체험으로 바꾸신 거죠?-모이어스"(같은 페이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캠벨은 석가의 염화시중 고사를 인용합니다. 누군가 삶의 오의를 물었고 석가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꽃을 들었을 뿐이며, 이에 좌중의 단 한 사람만 의미를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는 대답을 합니다. 우리가 모두 알듯 이 좌중의 한 사람은 석가모니의 제자 중 한 분인 마하가섭이죠. 참된 의미는 이미 분석의 대상이 아니고, 실제로 체험(육체적, 감각적인 것이든 순수 내적인 것이든 간에)을 해 봐야 알 수 있을 뿐이라는 게 캠벨의 의도이겠습니다. 그 전까지 서양의 거의 모든 신화학자(나아가 인문학자)들이 취한 태도와는 사뭇 대조적이고, 여기서 우리는 동양인 독자로서 뿌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다음 페이지에서 뜬금없이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데, 캠벨 박사께서 무슨 인생 상담을 해 주시나 싶지만 일단 그는 신화의 한 화소로서 결혼을 언급할 뿐입니다... 만 읽다 보면 진짜 인생 상담도 겸하는 걸 우리 독자들은 느낄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건 인간이 신의 모상이라는, 신의 이미지를 따라 만들어졌다는 원형적 발상이 깔려 있고, 결혼할 때 서양의 남녀들이 "You complete me."라고 말하는 뜻을 이해해야 더 잘 와 닿을 듯합니다.

"나(캠벨)에게는 이것이 바로 비교신화학에 입문한 계기였습니다.(p40)" 이 책의 날개에 보면 "북미대륙 원주민 신화와 아더왕 전설(sic.)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걸 깨달은 캠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히 이 대목을 염두에 둔 요약 소개이겠습니다. "고만고만한 중류 가정 출신의 처녀들에게 어떻게 정통 종교와 다른 이 신화를 가르쳤습니까?"라고 묻는 모이어스는, 이 무렵만 해도 구식 기독교 가정 문화에서 압도적인 영향을 받고 자란 여성들에게 자유분방한(때로는 문란한) 신화 이야기를 들려 주고 의미를 교습(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말했지만)하려는 시도가 적잖이 어려웠으리라는 짐작을 하는 거죠. 그에 대해 켐벨은 "젊은 사람들은 덥석 집는다"는 말로 한칼에 자릅니다. 뒤에 나온 설명을 요약하면, "신화가 곧 생생한 삶의 표현인데 이를 받아들이는 데 무슨 장애가 있겠냐"는 겁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캠벨의 내러티브가 워낙 힘이 있기에 가능했겠죠?

이어 캠벨은 말합니다(p43). "신문을 한번 보세요. 엉망진창입니다. 예전에는 미덕이던 게 오늘날에는 악덕이 되었구요. 예전에 악덕이던 게 오늘날에는 필요악 정도가 되었습니다." 캠벨은 사회와 시대상이 변한 만큼, 종교는 이제 더 이상 윤리와 도덕률로 작용하기 어렵게 낡은 틀이 되어 버렸고, 반면 유연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화는 시공을 초월하여 "낡은 종교"를 (어느 정도는) 대신할 수 있다는, 이미 (그 여학생들에게) 대신하고 있었다는 게 캠벨의 암시이겠습니다. 게다가 신화는 종교와 달리 재미있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이 왜 하필 13개의 주(州)로 출발을 잡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는 없고, 멀쩡한 주를 두 개로 쪼개어 14개로 출범한다든가, 아직 제도가 미비한 테리토리가 더 성숙하길 기다린다든가 하는 여유를 부리기에는 현실이 급박했겠죠. 고작 미신 때문에 말입니다(버지니아에서 웨스트버지니아를 분리한 건 그보다 훨씬 후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여기서 캠벨은 그 연혁적 이유를 설명하는 건 아니고(역사학자가 아니니까요), 피라미드의 몸체에 나 있는 구획이 13개이며, 미국 독립 연도인 1776에서 숫자 하나하나를 다 더하면 이성의 숫자 21이 된다며 수비학(?)적 풀이를 합니다. 13 역시 불길한 숫자가 아니라, 예수와 십이 사도가 곧 죽어서 재생(원문 그대로입니다)하니 이는 현세 초극의 상징이라고까지 말합니다(독자는 바로 이런 맛에 캠벨을 읽는 것입니다). 12궁 역시 태양의 숫자를 더하면 13이 되지 않냐고 합니다. 여기서 그는 대담하게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이런 사정까지 다 감안하여 독립 당시 연방 가입 주 수를 13으로 정했다고까지 하는데 ㅎㅎ 과연 켐벨 답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인문적 상상력으로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부활과 재생과 새 생명의 상징이 13이라는 게 그의 결론 - 그 다음에는 "이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라는 강조까지 덧붙이네요. 이러니 여대생들에게 인기를 끌죠ㅋㅋ 그에 그치지 않고 국장에 나오는 라틴어 "노부스 오르도 세클로룸"이라는 구절 역시 자신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합니다. 저승의 그 국부들이 들으면 무척 흐뭇해할 것 같습니다.

다만 그저 웃어넘길 게 아닌 대목은, 캠벨은 이 책(이 대담)에서뿐 아니라 전(全) 저작, 전 강의를 통해 일관되게 강조하는 주제가 있다는 겁니다. 바로 "삶의 재생, 신의 모방(을 통한 인간의 불멸 동경)"인데 13이라는 숫자에까지 이런 의미를 부여, 강조하는 대목에서도 독자는 그의 사상과 주제의식의 일관성을 감 잡아야 할 듯합니다. "동경"이라는 주제어에 대해서는 책 좀 앞으로 돌아가서 p43에 보면 자세히 나옵니다. 또 그의 주된 필드가 비교신화학이라는 사실과, 기발하게도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미국 국장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내는 그의 시야를 우리는 동시에 염두에 둘 필요가 있죠.

"인류는 어떤 것을 노리고 이런 식으로 산화를 다룬다고 생각하십니까?(p108)" 모이어스의 질문에서 "이런 식"이라는 건 각국, 각 종족의 창세 신화가 상당한 차이를 보이면서도 일종의 원형을 공유하는 걸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켐벨은 "삶의 체험과 초극 의지의 조화(상반되는 둘 사이의)"를 의도한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p270에서 두 사람은 "녹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녹기사를 다룬 영화로는 <용사의 검>이라는 숀 코너리 주연의 1984년작이 있는데 꽤 재미있고 예전에 KBS 2TV 토요명화 시간에 더빙으로 틀어 준 적이 있습니다. p151에서 두 사람은 아름다움의 창조라는 관점에서 샤머니즘을 분석하는데 왜 저기 토테미즘을 보면 부족이 특정 동물을 숭배하죠.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왜 짐승 따위를 숭배하는지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어색할 때가 있는데 이 두 분 대담 속에서 그 모순점이 거의 해명되는 듯합니다. 물론 이게 유일한 해명은 아니고 많은 설명, 답안 들 중 하나이겠죠. p237에는 불(의 이용과 발견) 덕분에 인간은 짐승과 비로소 결별할 수 있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p151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일본 사무라이 특유의 恩과 恥의 관념에 대해 다루는데, 어느 사무라이가 주군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잡았는데, 상대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더랍니다. 그러자 이 자는 원수를 그냥 놓아주는데, 이유인즉슨 "지금 원수를 갚자고 처단하면 이는 내 개인의 감정 풀이일 뿐 대의의 실현이 아닌 게 된다"는 거랍니다. 그래서 원수를 다시 놓아주고 추적해 들어가는, 처음부터 다시 그 기나긴, 고된 과정이 되풀이된다는 거죠.

"체험"은 이 책 내내 되풀이되는 관념으로서, 역시 캠벨 사상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p124에는 메시지에 이르는 단서를 간취(看取)하기 위해서는 체험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며 예로 "스키를 책으로 배울 수 없다"고도 듭니다. "간취" 같은 번역어에서 이윤기 선생의 흔적이 느껴지기도 하죠? 다음 페이지에는 성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聖別로 씁니다(남녀라는 뜻이 아닙니다). p183을 보면 consecratio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거하고 서로 통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네요.

p221에는 "인생에 있어 자신만의 천복(天福)을 소중히 여김"이란 대목이 있습니다. 뭐 다양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저 개인적으로 좀 울림이 깊은 문장이었네요.

저 앞에서도 "변화한 시대를 더 이상 포용할 수 없는 낡은 종교의 옷"이 여러 번 언급되었는데 p259에도 또 비슷한 지적이 있습니다. "강령, 계명 때문에 종교는 신학으로 축소되었다." 물론 강령이나 계명, 나아가 신학에도 특별히 긍정적인 의미 부여가 가능하지만 여튼 켐벨은 그런 뜻으로 썼다는 것입니다. p214에는 살바도르 달리의 십자가형 그림이 도판으로 나오는데 네이버에 보면 달리가 특별히 4차원으로 고안해 그린 그림이라는 멋진 수학적 설명이 나오니 한번 참조하십시오.

pp.54~55, pp.264~265 두 군데에 걸쳐 영화 프랜차이즈인 스타워즈에 대한 재미있는 수다가 펼쳐집니다. 이로써 왜 캠벨의 신화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고 현대의 독자들에게 광폭의 호응을 얻는지가 잘 설명됩니다. 해당 페이지에는 영화의 스틸 사진 몇 컷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참고로 p49에는 존 웨인의 어느 출연작에 대해서도 도판 하나와 함께 언급이 있는데 이게 바로 "왜 조셉 캠벨인가?"에 대한 대답 그 작은 실마리 하나를 제공한다고나 해야겠네요.

p204에는 유명한 안드레아 만테냐의 <악덕을 제압한 지혜의 승리> 도판이 나옵니다. 이 페이지 전후로 약 열 쪽에 걸쳐 컬러 도판이 모여 있고 독자는 작품 언급이 나오는 해당 챕터를 비교해 하며 읽는성의를 좀 보여야 합니다. 만테냐는 대표작 <십자가형>으로 잘 알려진 르네상스 화가인데 참 무서운 그림이고 이후 후배들의 많은 작품에 영향도 주었죠. p211에는 구원(atonement)이란 단어를 "at-one-ment"라고 재미있게 파자(破字)했는데 이게 그저 말장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캠벨 사상에서의 "생각과 하나되는 체험(과 그를 통한 깨달음)"을 함께 떠올려야 합니다.

p211에는 영웅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물리적 삶을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이라는 건데, 멋지지 않습니까? 몇 페이지 뒤로 가면(p211) 예수의 말,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을 인용합니다. 이게 바로 켐벨이 파악하는 신화상의 영웅인 것입니다. p363에는 그노시스 계열에서 중시하는 토마 복음에 대한 짧지 않은 평가도 나옵니다. 이 모든 이질적인 토픽이 "신화"라는 캠벨식 개념에서 하나로 엮이는 것입니다.

신화가 어렵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일상에서 매번 겪는 체험의 연장선상이며 가장 소박한 진리의 표명이라는 점은 캠벨만이 구사할 수 있는 친숙한 내러티브 속에서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이래서 고전 명작은 언제 어디서 읽어도 유익하며, 매번 새롭고 재미있기까지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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