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의 습관 버티는 기술 - 3년만 버티면 부자가 된다!
김광주 지음 / 솔로몬박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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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은 저처럼 "부자들의 습관 버티는 기술"로 되어 있지만 내용을 읽어 보니 현재 경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라든가 저자님만의 통찰이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꼭 부자가 되기 위한 어떤 습관이나 팁만 알려 들게 아니라, 저자의 세계관과 비전에 대해 공감도 하고 배울 게 있으면 따로 배우려는 자세로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p113에는 "천멸중공"이란 말이 대뜸 나와서 좀 놀랐는데 현재 우리나라에도 활동 중인 파룬궁, 법륜공이라는 단체가 있죠. 중국 공산당 당국으로부터 부당하게 박해를 받는 집단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들이 보통 쓰는 말입니다. 이 책에는 그런말은 없고, 본래 오프쇼어링이라는 게 1990년도 민주당 빌 클린턴이 집권했을 때 집중적으로 추진했던 정책입니다. 이게 트럼프 정권 들어 "리쇼어링"으로 바뀐다는 지적인데, 저자는 이미 오바마 때부터 이런 기조가 만연했다고 하며 딱히 트럼프의 변덕 때문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이미 미국과 중국 간의 전쟁은 시작되었다는 거죠. 이게 바로, 수십 년 간 부자들을 상대해 오며 세계 경제 추세를 지켜 본 저자가 가진 냉엄한 판단입니다.

"초보자의 운"이란 말이 있습니다. 주식 같은 거 할 때 우연히 남 추천 받아서 오른 종목이 있으면 아 나는 정말 주식 천재인가 보다, 그냥 막 시작한 게 이처럼 수익률이 좋으니.. 라며 자기 만족에 빠지는데, 이게 큰 착각이란 거죠. 저자는 "단기 투자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고 하는데, 이른바 대박주, 급등주라 불리는 종목 샀다가 크게 물리고 손절하면서 비싼 수업료를 내는 게 다 과정이라는 겁니다. 저자는 단언합니다. "개인은 절대 기관이나 큰손을 이길 수 없다."

부자는 어느 정도라야 부자라고 불릴 수 있을까요? 저자는 증권맨으로서 이십년 이상 부자들을 상대해 오며 어떤 관점 같은 게 정립되었다고 합니다. 적어도 30억원 이상은 있어야 부자라 불릴 만하며, 그 30억도 금융자산, 즉 현금이라야 한다는군요. 비싼 아파트에 살고는 있으나 매번 쓸 돈이 쪼들리면 그걸 두고 부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또 30억 정도는 있어야 경제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버틸 수 있는 저력"이 생깁니다. 그리고, 부자들은 이처럼 "버티는 습관"을 통해 부를 쌓아 온 것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하이엔드 고객을 노려야 돈을 번다고도 하죠. 20%의 상위 고객으로부터 80%의 수익이 나옴은 이미 파레토라는 경제학자가 밝혀 낸 바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해야, 최소의 노력만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최대의 수익을 낼 수 있을까요? 저자가 말하는 바는 오히려 한 쪽에만 너무 치중하지 말라는 겁니다. 평소에 안 팔리던 그저 그런 책들 80%의 매출 합계가, 거꾸로 베스트셀러 상위 20%의 매출을 능가하는 현상을 보고 크리스 앤더슨 편집장은 롱테일 마케팅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를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고" 투자 안정성을 높이는 분산 패턴을 실현하라는 겁니다.

어떤 종목에 투자를 해야 할까요? p226에 보면 배당 성향이 높은 기업들 중 한국의 것들이 표를 통해 나열됩니다. 단기적으로 뭐가 오른다 뭐가 급등한다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결국은 주주인 나한테 배당 많이 해 주는 종목이 좋은 종목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외적인 배당률에만 치중해서는 안 되며, 주가의 흐름과 해당 기업의 재무 상황까지도 폭 넓게 살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재산을 불리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우량주에다 투자하여 몇 년이고 계속 묻어두는 겁니다. 돈 버는 게 그렇게 간단할까요? 그게 바로 부자가 되는 핵심, 즉 "버티는 방법"인데 많은 이들이 이걸 실천 못 합니다. 지금 장이 이렇게 좋은데, 하나에만 돈이 묶여 있으면 그 치르는 기회비용이 대체 얼마인가? 이게 아주 쉽게도 듣는 핑계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급변하는 장세에서 개인이 기관이나 큰손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듣는 정보라든가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의 볼륨 등 모든 면에서 이길 수 없는 싸움이죠. 바로 이래서 팔랑귀가 되지 않고, 진득하게 버틸 수 있어야 부자가 된다는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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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속에 핀 꽃
장은아 지음 / 문이당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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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사는 외세의 침략과 동족 상잔으로 얼룩진, 세계 역사에 보기 드문 비극으로 점철된 예입니다. 한민족은 더군다나 다정다감한 성정에 깊은 정한을 간직하고 사는 성향이라 이 굴곡진 역사 속에서 그 맻힌 사연과 한의 깊이와 폭이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소설은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을 거쳐 개발시기 현대까지를 관통하는 중 어느 집안의 기나긴 곡적을 담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주인공이 어려서 어느 지주의 집안에 민며느리로 들어온 봉임 한 사람이며, 모진 시집살이와 남편과의 불화 끝에 여인으로서의 삶이 시들어가는 비극을 다룬다거나, 아니면 부당한 학대, 억압에 맞서싸우는 여인의 당찬 투쟁을 그렸다거나 한 줄 알았습니다만 그 이상이었습니다. 


물론 봉임은 찢어지게 가난한 친정을 뒤로 하고 거의 팔려오다시피한 시집에서 (당시 거의 누구나 그랬을 만하게)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본성이 악하지는 않을(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인간 본성이 악해서 모진 시집살이를 시키지는 않죠) 어르신들을 향해 순종, 근면, 인내의 미덕을 발휘하여 결국 며느리로서 자리를 잡고 집안을 일으켜 나간다는 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식의, 뭔가 개척적이고 긍정적인 이야기 전개가 더 마음에 들더군요.


또 주인공은 (예상 밖으로) 봉임 한 사람뿐이 아닙니다. 시아버지 오영천, 그의 아들이자 깨인 의식을 지닌 도쿄 유학생 석근(즉 봉임의 남편), 오씨 집안에서 땅을 부쳐먹고 사는 소작인들 가족, 석근의 첫사랑 하루코 등 대하소설의 줄기를 이룬다고 해도 될 만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분량만 상대적으로 짧다뿐 <토지>나 펄벅의 <대지>와 비교해도 될 정도입니다. 


저는 이 소설이 특히 펄벅의 <대지>와 닮은 점이 많다고 여겨졌습니다. <대지>에서는 우연한 사건 와중에 큰 부를 걸머쥔 왕룽의 세 아들이 시대상의 변천에 따라 각각 다양한 삶의 가지를 쳐 나가는데, 여기서도 오영천에게는 세 아들이 있습니다만 뚜렷한 자기 궤도를 잡아가는 인물은 도쿄에서 공부한 석근뿐이고 나머지는 정직하지도 못하고 삶의 주견도 없이 욕심만 가득하거나 아예 무지한 인간들입니다. 


대신, 시대의 모순을 자기 나름으로 대변(?)한다며 영천, 석근 부자에 일종의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둘 다 소작농의 아들이며 하나는 일본에 붙어먹어 앞잡이 노릇을 하는 순사 노기찬, 다른 하나는 나중에 공산주의에 공명하게 되는 전직 은행원 출신 박근우입니다. 두 청년 다 머리는 영특했으나, 소작인으로서 고생하는 제 부모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출세에 한계가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여 일종의 삐딱선을 타는 셈입니다. 전자는 인성 자체가 타고난 악질이며, 후자는 결국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지식인의 함정에 빠지는 운명입니다.


여튼 사연의 초반부는 봉임이 주도(?)합니다. "주도"라는 말을 쓰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는 게, 봉임은 너무도 순종적인 성격이라서 대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모순과 부조리에 무슨 대항을 할 줄 모릅니다. 요즘 같으면 이런 "착함"만으로도 비판의 대상이 되기 충분하지만, 여튼 저는 읽으면서 어떤... 인생의 선함, 바른 양심, 주변 사람들에게 충실되이 자기 의무를 다하고 최선을 마쳐 내는 마음가짐을 억누를 어떤 최강의 악덕 같은 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새삼 들었습니다. 결국은 착한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아닐까요? 뭐 적어도, 이 소설이 그런 교훈을 강조하는 게 저 개인적으로는 너무도 좋았습니다. 


석근은 일본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타고난 인간적 자질 자체가 출중한 엘리트입니다. 이런 그에게 일본 여성인들 반하지 않을 수 없죠. 사람이 잘나면 주변 모두가 그에게 승복하기 마련입니다(반대로, 어디서 웬 못된 인간 쓰레기들에게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만). 하루코의 부친은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가의 가장이라 대체 "조센진" 사위를 들이는 게 마뜩할 리 없습니다만 딸이 식음을 전폐하고 스트라이크를 벌이는 데 도통 방법이 없습니다. 사윗감의 인물됨 자체야 워낙 탁월하니 그는 일단 딸 목숨은 살려 놓고 이 청년을 일본인으로 개조시켜 집안의 동량으로 삼을 생각을 합니다. 일본에서는 성(姓)과 씨(氏)가 분리되기에 사위가 특정 가문의 성을 받아들여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게 드물지 않죠. 


석근은 비록 상민 출신이긴 하나 민족혼이 투철하고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인 자신의 아버지 영천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근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민며느리로 일찍 들여온 봉임이 매우 착한 여인인데다 자신을 향한 순정이 대단하다는 점, 또 결국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냥 하루코를 포기하고 맙니다. 하루코를 포기한다는 건 앞으로 사내로서 입신 출세할 길을 모두 포기한다는 뜻도 됩니다. 대체로 당시 유학생 출신들이 교육의 물을 좀 먹었다는 이유로 이미 혼례까지 마친 여인을 서슴없이 버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직 민며느리 신분이었을 뿐인 봉임을 별 주저없이 받아들인 석근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우고 못 배우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먼저 다해야 그게 인간인 겁니다. 


봉임은 비록 순종적이고 다소 미련한 모습까지 보이지만 결코 여인으로서 센스까지 둔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로, 하루코가 마을을 찾아왔을 때 (뭐 일본인 상류층 답게 잘 찾아입고 왔겠지만) 한눈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신방(물론, 불과 며칠 전에 차린 자신과 석근의 신장)에 그녀를 공손하고 친절히 안내한 후(여기서 이게 가식이나 전략이 아닌 진심임이 잘 드러나게 소설이 서술됩니다) 점심상은 물론 이부자리까지(!) 차려 주고 나갑니다. 순종적 아내상은 일본인이 전형이라고 하지만 이 대목에서는 하루코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놀란 건 남편 석근으로서, 아내의 이런 순도 100%의(ㅎㅎ) 진심을 보고 크게 각성하여, 앞으로는 마음 한 구석에서조차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로 마음 먹습니다. 이 대목에서도 저는 석근이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릇 사내자식이라면 이런 맛이 있어야죠. 


석근도 그 부친 영천도 참 로맨티스트인데, 영천 역시 젊은 시절 몰락 양반의 어느 딸내미와 정분이 날 뻔했다가 "반상이 유별하거늘!"이란 부친의 호통을 듣고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재산도 많고 배운 것도 아주 없지 않지만(그래서 그 양반댁 규수가 좋아했던 거죠) 엄연히 상민은 상민이라 공연한 말썽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과 맞는 여성과 결혼하고 그게 바로 봉임의 못된 시어머니 강씨입니다. 강씨도 태생이 나쁜 인성은 아니고 제 시어머니 송씨에게 모진 시집살이를 해서 그렇게 된 건데 봉임과는 달리 처녀적부터 그리 진득한 인성은 아니었지 싶습니다. 다만 드센 성미를 누르고 남편한테 희생을 한 건 같죠.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둬 키우는 게 아니라고 오영천 집안은 그 소작인들에게 넉넉하게 대해 준 편이었지만 시대가 한번 변천을 겪을차치면 못되고 비틀린 심성을 드러내는 악종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노기찬이 그 한 예이며, 오영천은 비밀리에 만주 독립 운동을 후원까지 하는데 그 기미를 일정 당국에서 눈치 못 챌 리 없지만 적절히 뇌물을 먹여 가며 위기를 넘깁니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대목이 몇 번 나오는데, 우리 국사에서는 제대로 안 가르치는 만보산 사건 등 화교- 조선인 간의 대립이 그것입니다. 물론 일본인들이 교묘히 뒤에서 조장한 게 분명하지만 여튼 교과서에서는 자세히 안 배웁니다. 


시대의 굵직굵직한 대사건들이 개인의 사연 안에 잘 녹아들며 서술된 것도 좋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매력적이고 공감가는 것도 좋았으며, 구수한 구어체 표현이 등장하여 이야기 읽는 맛이 더한 것도 좋았습니다. 너무 자세한 독후감은 스포일러이겠기에 여기서 서평을 줄이며, 저는 이 장편 소설을 잘 간직하여 두고두고 읽어 볼 마음을 먹었습니다 ㅎㅎ 생각 같아서는 더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글자 수가 10,000자도 넘길 듯하여 이쯤에서 자제하겠습니다. 김동리도 <무녀도>를 개작하여 <을화>를 썼는데, 이 작가님도 아예 10권짜리 대하소설을 좀 써 보시면 어떨지요. 


ps

제목을 보면 "눈물 속에 핀 꽃"이란 글자 위에 "리멘시타(라 이멘시타의 축약)"라고 쓰여 있는데 이건 1960년대 한국에서도 대학생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 칸초네입니다. 가사 중에는 "눈물"이라는 단어가 안 나옵니다만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불렀겠음은 누구라도 짐작 가능합니다. 자니 도렐리의 버전도 유명하겠지만 한국에서 압도적으로 인기 있었던 건 이탈리아 여성 가수 밀바의 버전입니다. "넬리멘시타"라고 속삭이는 듯 노래를 마무리짓는 그 특유의 저음을 잊을 수 없죠. "이 '광대한' 세상 속에 나 같은 작은 존재의 슬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님"을 다짐하는 여성 화자의 마음이 갸륵한데 아마 봉임의 세계관, 마음가짐을 대변한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 밀바의 보컬은 세상에 다소 독기를 품고 외치는 듯한 음색이라서 소설 속 봉임이하고는 완전히 매치되는 게 아니죠(그 반대면 모를까). "이멘시타"는 영어의 형용사 immense하고 어원이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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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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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무엇일까요? 혹 우리가 그럭저럭 착한 삶을 살았다면, 우리를 맞을 지 모르는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요? 악한 생이 마주하게 될 지옥은 둘째치고라도, 천국 역시 전혀 우리가 알 수 없는 운명이란 점에서 두렵고 낯선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 속에서도 사미르의 입을 통해 언급이 되지만. 신약성경에도 "어린이의 목소리, 어른의 목소리..."처럼 그 영혼의 성장 단계에 따라 어떤 구분 같은 게 있나 봅니다. 또, 이 생에서 맺은 부모, 배우자, 자녀, 친구 같은 인연은 (역시 기독교의 성경 중에도 설명이 있지만) 거의 흔적도 없이 소멸한다고도 하죠. 그렇다면 현생에서 소중히 가꾼 관계, 사랑, 정 등은 다 무의미하단 뜻인지. 이런 데 생각이 미치면 유한한 생에 대해 한없이 슬퍼지는 감정이 드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여튼 어느 종교나 도덕적 가르침에서도 "현 생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우리들에게 당부하는 건 공통적이죠. 우리는 주어진 삶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며, 눈 앞의 과제에 최선을 다하되 타인의 감정과 이익도 살펴야 합니다.

주인공 애니는 이 작품 중에서도 설명이 되지만 나이아가라 캐나다 쪽 지역에서 실제 있었던 어느 용감한 여인의 이름을 따 그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죠. 작품 처음엔 그녀의 인생 가장 극적인 순간만을 먼저 보여줘서 몰랐는데, 알고 보니 굴곡과 시련이 많은 생을 산 (아직은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저는 1980년대 어느 고아의 삶을 소재로 한 뮤지컬이 생각나기도 했는데, 실제로 고아라고 해도 좋을 듯한, 남자 때문이건 혹은 그 부친 때문이건 여러 시련을 겪은 불쌍한 여인이더군요.

애니는 어렸을 때 어느 나이 든 엔지니어의 자기 희생 덕분에 카트 추락 사고에서 목숨을 건지지만 대신 한 손을 잃습니다. 이때 그 어머니는 애니를 무서운 기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다른 지방으로 이사까지 떠나는데,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책임감, 죄의식이란 이처럼 영혼을 더 높은 단계로 성숙시키곤 한다는 걸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지만 어떤 나쁜 일을 겪은 후에는 그 기억이 계속 환기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들게 됩니다. 반대로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까지도 자책하는데, 애니가 어렸을 때 그 부친이 자신과 어머니를 떠난 게 모두 스스로의 탓이라고 마음아파하는 장면이 또한 그렇습니다. 이런 애니는 아직은 어린 틴에이저 시절 한 청년을 만나게 되며, 그보다 좀 이른 시기에 파울로와 친해질 뻔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 역시 무책임한 남자 때문에 큰 시련을 겪은 어머니는 이런 관계를 걱정하며, 어머니의 진심을 이해 못한 애니는 도리어 모친과 멀어지죠. 그 과정에서 아이를 갖고 곧 그의 죽음을 마주하는 등 큰 시련을 겪습니다.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이 이어지는데도 소설 초반에 독자들은 전혀 감을 못 잡은 채 "웬 행복한 젊은 커플의 안타까운 사고"만 대뜸 접하게 됩니다. 알고 보면 더 가슴이 아파지는 사고였죠.

천국 초입에 잠시 들르게 된 애니는 어떤 노부인을 만나는데 낯이 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입니다. 알고보니 이 노부인은 친하게 지내던 개의 영혼이었고, 생의 순간에 어떤 식으로건 연을 맺은 모든 영혼들과 천국에서, 그것도 단 다섯 명 몫의 만남 안에 드는 식으로 마주친다는 발상이 흥미로우면서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애니의 인생은 왜 이렇게 불행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더 큰 비극을 면하기 위해 다른 이의 도움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받게 되고, 이 역시 운명, 혹은 신의 섭리 같은 것이 섬세히 예비해 둔 계획, 배려라는 설명이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늙은 관리자 에디 역시, 젊은 시절 참전했던 태평양 전쟁에서 무고하게 목숨을 앗긴 어느 일본 소녀에 대한 죄책감을 그런 식으로 풀었다는 진실 역시 마음이 찡해지더군요.

"남을 위한 일들은 절대 헛되지 않아(p114)."
"자녀가 필요로 하면, 그 부모의 욕구는 절로 사라지지(p133)."

우리 인생은 다 자신의 노력에 의해 성과가 나는 듯해도, 알고 보면 타인의 배려와 희생에 기대는 바가 큽니다. 또, 부모님의 사랑과 보살핌의 은혜란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슬프면서도 마음이 벅차 오르는, 동화 같은 감동에 젖게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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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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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이 단편집 마지막에 수록된 작품의 제목입니다. 하지만 이 단편집에 실린 모든 작품들은, 어떤 종류의 불 속에서 무엇인가를 잃은 우리의 상실, 좌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불은 대개 "공포"이며, 혹은 믿었던 누군가에 대한 큰 실망, 좌절,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는 공동체 성원들의 절망, 가난과 범죄, 불신이 빚은 무기력, 증오 같은 것으로 이어집니다.


<더러운 아이>는 빈민가에서 온갖 사회악과 범죄에 노출된 어느 아이, 아주 어린 아이에 대해 주인공 여성이 느끼는 타자의식(죄의식 가득한)을 담습니다. 처음에 주인공은 이 아이가 어느 여성의 소생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가 상상도 못할 잔인한 방법으로 죽고 그 시신이 발견된 후 조금 다른 진상을 (뉴스를 통해 그 소식을 접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알게 됩니다. 자신만의 편안한 안식처에서 듣고 보게 되는, "바깥 세상의 온갖 끔찍한 소식"들이란 사실 실감이 크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아이가, 한때 잠시나마 바깥 세상(가난이 지배하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마주친 누군가였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잠시, 이웃 대부분이 고생 중인 지옥이야말로 현실이고, 편안한 곳에 고립된 자신이 혹 환각에 빠진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합니다.


"난 아들이 없단 말이야!" p54에는 역주를 통해, 원문의 se는 복수일 수도 단수일 수도 있다고 설명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단수, 즉 산 라 무에르테에게 이 미친 여인이 아이를 바쳤다는 뜻이라면, 범죄자는 그 어머니(혹은 큰이모일 수도 있습니다)이겠습니다. 끔찍한 가난은 여인을 광신으로 내몰며, 인륜의 기본을 까맣게 망각하고 짐승만도 못한 범행을 저지르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혹 이게 마약조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도, 어떤 초월계의 악마가 아닌 현생의 마귀들에게 비슷한 공양을 했다는 뜻이겠죠. 사실 se는 단수든 복수든 별 뜻의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스테리아 호텔>에서 개인적으로 저는 몇 년 전에 만들어진 이탈리아 영화 <신데렐라>가 떠올랐습니다. 오래된 호텔, 투숙객이 그리 많이 찾지 않는 호텔은 동네에서 볼 때 살짝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주인공인 어린 여자아이는 "담배 연기 때문에 구역질이 난다"고 하지만(p57), p64에서는 "낙엽을 태우면서" 그 고소한 향기를 즐기기도 합니다(이 대목에서 이효석의 어떤 수필이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낭만적인 후각적 심상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 호텔은 금세 공포의 발원지가 됩니다.


주인공은 행실이 나쁜 여동생 랄리 때문에 약간의 고민거리를 가졌는데, 로시오라는 (이름도 남자 같은) 친구가 생기면서 다소의 탈선을 시도합니다. 이 건물이 과거(대체로,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혹은 언급되는 군사 독재 시절은 "과거"일 뿐입니다)에 경찰학교로 쓰였다는 설명이 있지만(p66), 아마 그날밤 두 꼬마가 마주친 무서운 군중은 그 시절 희생된 민중의 원혼이 아니었을까 저는 짐작했습니다. 사장 엘레나는 아이들의 설명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혼을 내는데, 저는 읽으면서 행여 엘레나가 아이들의 환각에 공감했다면 많이 김이 샐 뻔했다고 안도했습니다. 호러, 고딕에는 인물 사이에 개연성 없는 공감이 과하게 이뤄져서는 안 되니 말입니다.


<마약에 취한 세월>에서는 1인칭 화자가 (앞 작품들과는 달리) 빈민층에 속한 가망 없는 밑바닥 인생입니다. 독특하게도 화자는 1980년대말~90년대 초를 회상하는데 그만한 지성이 없어 보이는 점을 고려하면 의외인 구성이고 언급입니다. 앞의 "대통령"은 알폰신이겠고 뒤에 전화를 깔아준다는 공약을 한 후임자는 메넴이겠죠. p90에서 주인공은 아무 무서운 눈빛을 한 아이를 만나는데 "...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여자아이가 누군가의 딸이었다고 믿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습니다(즉 악령 비슷한 존재였다는 뜻이겠죠. 자신에게는). 이 아이는 p104에 어떤 비유의 보조관념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어떤 불량 청소년 집단에서 유치한 비행에 몰입할 수 있는 건 그 또래들끼리 같이 지내다 보면 수치심과 객관화를 깡그리 잊을 수 있어서입니다. 그러다가 멀쩡한 이성친구라도 생기면 여태까지의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는데, 나머지 멤버들에게는 친구의 이성친구가 죽이고 싶도록 밉겠죠. 결말에서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이처럼 단순한 설명이 가능하지만, 주제는 빈곤이 자연스럽게 빚어내는 구조적 타락과 그로 인한 공포이겠습니다. p93의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여러 약품"은 과거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겠습니다(마약류까지는 아니지만). p96에서 나스카 유적 어쩌구는 읽으면서 고개가 갸웃했는데 역시 의도된 유머였습니다.


p99에서 낙태가 금지된 시절 오히려 미혼모들이 길에 영아를 버리거나 아예 개한테 먹이로 준다는 끔찍한 풍속도(작품에서도 소문일 뿐이라고 합니다만) 같은 서술은 민주화 이행 후에도 여전히 혼란에 싸여 있던 아르헨티나의 암울한 사회상을 드러냅니다(심지어 지금도?). p101에 "쐐기풀에 베여 다리에 피가 송송 맺힌다"는 묘사는 한국에서도 공감할 만한 풍경의 묘사겠죠. "드라곤시토"가 일종의 애칭을 만드는 축소사라는 역주 설명이 있는데 저 뒤 다른 작품의 p333 "실비니타"라든가, p236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부르는 "파울리타" 같은 예도 나옵니다.


<아델라의 집> 역시 어떤 건조물이 빚는 공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델라는 나면서부터 한쪽 팔이 없는 아이인데, 주인공의 오빠 파울로와 친해지고 나중에 미스테리어스한 사건을 겪게 됩니다. 제 생각에 이 작품집에 수록된 중 고딕 호러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작품 같았습니다. p102에 "캘리포니아에 가면 머리에..."는 역주 설명에도 나오는데, 이건 작가의 착오일까요 아니면 의도적으로 작품 중에서 그렇게 바꾼 걸까요? p114에 "자기 아내를 토막내서 냉장고에 숨긴..."에서는 정말로 에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p125의 "누렇게 말라죽은 정원", p118의 "누런 이", p119의 "누렇게 말라 있었다" 등이 비슷한 느낌을 환기합니다. p110에서 "뇌가 뼈에 눌려 광기로 발전하는 도베르만"과, p119의 "무엇인가 안에 갇혀 못 나오고 있는" 같은 문장 들을 잘 연결하여 읽어야 작가의 의도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다. p131 가면, 빈껍데기가 스페인어로 서로 비슷한 발음임을 이용한 말장난도 흥미롭습니다.


(이하 내용 누설이 조금 있습니다)


<파블리토가 못을 박았다>는 약간의 반전(제 생각에)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성실한 가이드이며, 최근에 결혼도 하고 아내는 갓 아이도 낳은, 행복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내와의 사이는 예전 같지 않고, 어려서 많은 보호가 필요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이 와중 그는 관광객들에게 과거의 어느 연쇄살인범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며 흥미를 돋우는데, 불필요하게 그 끔찍한 인간들에 과몰입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당황합니다. 어느 순간 그는 이 과몰입을 직업에의 헌신 모드로 자연스럽게 전환하며 안도하는데 독자의 입에 흐뭇한 웃음이 지어지는 유일한 결말이더군요(제가 잘못 읽은 게 아니라면 - 혹은, 이 가이드의 전생이라는 소린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 어차피 선량한 일상인들일 듯한 그들 관광객은 왜 그렇게 "시그니처 액션"이니 뭐니 하며 오버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아마 이게 우리들 평균의 자화상이겠죠. p156의 각주에 나오는 빠른 발음 말장난은 우리 식이라면 "간장 공장 공장장"이라든가 "쇠창살" 어쩌구 하는 놀이와 같겠죠.


<거미줄>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배경이 아르헨티나 북쪽 국경 파라과이인 작품입니다. 아르헨티나가 비록 여전히 경제와 사회상이 불안합니다만 일찌감치 민주화로 이행한 데 반해,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파라과이는 여전히 군사 독재의 상흔을 말끔히 떨치지는 못한 모습입니다. 저 뒤 <검은 물속>은 배경이 아르헨티나이긴 하나 공권력에 대한 강한 불신이 잘 표현됩니다.


마지막의 그 "실종"은, 아내와 처제에게 완전한 환멸을 느낀 남편의 자발적인 행동("결별")일까요, 아님 그 트럭 운전수들과 여인들이 공모한 일종의 범죄일까요? p175에서 "여기엔 모두 범죄자들뿐이라고!"라며 소리지르는 남편은, 여성들이 영원히 거리감을 느끼는 타자적 남성상, 압제자, 소통 불능의 이미지를 표현합니다.


p164에는 과라니어(語)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본디 남미는 원주민들이 오랜 세월 살았고 스페인 정복자들이 몹쓸 짓을 한 역사가 있죠. 작가가 다분히 이를 의식하여 삽입한 코드이겠으며, 앞 <오스테리아 호텔>에는  p73의 역주에 "케추아어로 물에 젖게 하다라는 뜻"이란 설명도 나옵니다.


일본 애니나 드라마, 소설을 보면 "자해하는 여고생" 테마가 자주 등장합니다. <학기말>도 기괴한 분위기의 어느 왕따 학생이 얼굴과 사지에 자해를 하는 이야기가 주된 줄기인데, 피해자에 대한 일종의 죄의식이 과한 반응을 일으켜 주인공 역시 "무엇인가에 홀려" 같은 패턴으로 자해를 한다는 결말이 충격입니다. 저 뒤에 나오는 <초록색 빨간색 오렌지색> 역시 서두에 일본 문화 코드 몇을 언급하는데 결국 히키고모리의 사이버 범죄 이야기로 이어지는 게 충격이었습니다. 본래 남미에는 일본인 이민자들이 많이 살았죠. 특히 <초록색...>은 최근 한국에서 터진 손 아무개의 다크웹(이 작품에는 "디프웹"이란 용어가 나옵니다) 범죄라든가 N번방 사건을 연상시키는 묘사가 등장하기 때문에 시사적이기까지 합니다(시기는 이 작품집이 훨씬 먼저지만).


<이웃집 마당>에는 체구가 작은, 마치 고양이 같은 남자아이가 공포를 유발하는데 아동학대 이슈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소설집에는 남성의 성*가 대체로 일관된 심상을 유발하는 듯합니다. "발*한 성*가 18cm나 되었다"라는 묘사라든가(<파울리토가 못을 박았다> p152), 앞 <거미줄>에서 "어딘가 남성의 성*를 연상시키는 살잠자리(p168)", 또 바로 이 작품에서 "남자아이의 고추가 보였다(p241)"는 문장 같은 건, 남성기가 여성을 향해 자아내는 이질감, 공포감 등을 드러냅니다. 반면, 역자 후기 중 특히 p365에서 "집"을 두고 바기나 덴타다를 언급하는데 오타이며, vagina dentata가 맞습니다. p249에 "트럭 운전수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나오는데 앞의 <거미줄>에서도 그랬습니다. 광활한 대륙에서 도로 위의 난폭자 노릇을 하는 이들에 대한 나쁜 인상은 북미나 남미나 비슷한 듯합니다.


살찐 몸에 대한 어떤 불편한 의식이 드러나는 문장으로는 p219의 "걸을 때 허벅지가 서로 스칠"이라든가, p84의 "걸을 때마다 살이 쓸려 짜증.."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중세의 마녀사냥과 현대의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듯한 "아내 혐오 범죄"를 연결하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어머니, 진취적인 행동파에 키 큰 여성이었던 분을 일종의 롤 모델로 삼습니다. 앞의 다른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그 부모와 불편한 관계이기도 했던 점과는 대조적입니다. 사회적 약자로서 "불에 타는 의식"으로 부당한 혐오의 대상이 되고 박해를 받는 여성들의 분노를 담았습니다. p200의 <거미줄>에 보면 주인공이 그전날밤 꿈에서 본 "불에 타는 노파" 심상과도 이어 생각해 볼 만합니다.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에서 빚어지는 공포는, 등장인물, "작품 자체"와 그 배후에서 작가인 포가 협업하여 빚어내는, 그야말로 순수 공포의 원형입니다. 반면 이 작품의 호러는, 비참한 가난과 사회적 폭력 따위가 인위적으로 지어낸 것에 가깝습니다. 아무튼 온갖 사회악 때문에 고통 받는 이웃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공포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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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였을 때
민카 켄트 지음, 공보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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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내가 나이길 바라며, 그저 동물적인 욕구나 충족된다고 삶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나라는 정체성은 오랜 세월 동안 나에 의해 형성되며, 비록 그 결과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내가 오랜 동안 소중히 가꿔 온 만큼 내가 사랑하고 또 내가 책임을 지는 대상인 것입니다.

브리엔은 몇 달 전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이상한 건 그 일이 있은 후 주변의 모든 이들이 자신에게서 떠났으며, 머리를 다친 탓인지 몇몇 기억이 분명치 못하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호화로운 저택에 살지만 사고 후 그 큰 집에 혼자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젠틀한 의사인 나이얼을 세입자로 들입니다.

나이얼은 나무랄 데 없는 매너와 인성, 훌륭한 직업을 가진 남성인으로 브리엔 눈에 보이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건 그가 부인 케이트와 별거 중이라는 사실입니다(이렇게나 훌륭한 남자인데, 어떤 여자가 감히... 같은 생각이죠). 브리엔은 차츰 세입자인 그에 대해 깊이 알아가지만, 또 하나 이상한 점은 그가 처음에 알던 나이얼에 대한 이런저런 사항이 알고 보니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겁니다(p55에 "이 사람이 그 얘길 했던가"라며 고민하는 모습 나옵니다). 하긴 이 역시 브리엔 자신이 사고의 충격으로부터 채 회복을 못한 탓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모두 자신이 성치 못하다고 하니, 브리엔 자신이 매사 조심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p11에는 수혈을 통해 낯선 이의 피가 내게 흐르는 느낌이라는 브리엔의 말이 나옵니다(이게 1부 말미의 어떤 사건에 복선 구실을 하죠). 작품은 크게 3부로 나뉘었는데 1부는 브리엔, 2부는 나이얼, 3부는 두 사람의 시점이 교차 서술됩니다. 음.... 우리 독자들은 1부 내내 1인칭 시점에서 이어지는 브리엔의 말을 조심스레 따라갑니다만, 브리엔 본인도 뭔가 확신이 없고, 이 여성이 스스로 그리 지각(perceive)한다는 것일 뿐 진상은 전혀 다른 곳에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조금씩 품게 됩니다.

브리엔은 그저 사고 후유증 때문에 고민하는 게 아닙니다. 우연히 그는 자신과 이름, 신분 사항, 심지어 외모까지도 똑같은 여성을 웹상에서 보았는데, 자신의 많은 지인, 친척들마저 그녀의 소셜 미디어 계정에 연결하고 있는 걸 보고 경악합니다. 도대체 누가 나를 사칭하고 다니는 걸까? 그것도 하필 자신이 사고를 당한 후 취약,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후에 말입니다. 정신과는 아니고 종양학 전공이지만 의사인 세입자 나이얼에게 도움을 청할까 생각도 해 보지만 조심스럽습니다.

이런 힘든 상황일수록 누구에게건 친구가 필요합니다. 브리엔이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유독 친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예를 들면 p27의 "내가 괴한에게 습격당한 후 네 친구들은 내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 라든가, p66의 버려졌다 운운하는 대목, p81에서 (세입자이자 이제는 유일한 친구인) 나이얼마저 잃고 싶지 않다고 하는 부분 등이 있습니다. 나이얼과 식당에서 근사한 한 끼를 먹는 대목(p85)에서 전에 친했던 앰버를 만나는 대목도 그렇죠. 참고로 저는 여기서 이 앰버라는 친구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그렇지는 않고, 뒤에 가면 마리솔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그 몫을 대신(?) 하더군요. 조금 맥거핀 같아 보였습니다.

p105에서 그녀는 다시 "나이얼은 가장 친한 친구"라며 의존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진상이 다 밝혀진 p282에서는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왜 모든 친구들이 나를 버렸는지"를 알아내게 됩니다만 사실 독자들은 여기쯤에서는 별반 궁금함을 품지 않게 됩니다. 바로 그 몇십 페이지 앞에서 누가 진상을 다 이야기했기 때문이며,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더 앞에서 다 알아챌 만도 했습니다. p154에서 "나에게 친구는 있어요?"라고 그녀가 말하는데 이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 때 꼭 남의 흉을 보며 뒷담화를 일삼는 이들이 있죠. 여기서도 브리엔은 이웃인(아마도) 두 아줌마를 의식하며 괴로워합니다(p32).
p19에선 "내가 괴물이 아님"을 분명히하고 싶다고도 하는데 독자가 보기에도 왜 일이 이 지경까지 왔을지가 의아하죠.

브리엔은 이 사고가 아니었더라도 가뜩이나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음이 p56에 나옵니다. 그녀의 생모가 어렸을 때 부모(즉 브리엔의 조부모)와 불화하고 집을 나간 후 완전히 떨어져 산 거죠. 조부모의 가정이 매우 윤택했으므로 브리엔은 별 불편을 겪지는 않았으나 생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이 큰 상처가 아닐 수는 없었을 텝니다. 뭐랄까, 다친 사람이 더 자주 다치는 경향처럼.

브리엔의 조부모가 했다는 말, "졸부는 요란하고 거부는 조용하다."에서 어느 정도 집안 분위기가 짐작됩니다. p96에서 "아직 외조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헐지 않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우리는 뭔가 이분이 자신만의 환각 속에 사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됩니다. 일단은 말이죠.(대충 이런 말이 나오면, 이 장르의 관습상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이 소설에는 여러 번 레거시 미디어의 명칭이 등장해서 문화 코드를 환기합니다. p58의 "ESPN 하이라이트나 보며 곯아떨어지는...", p79의 "데이트라인을 마치 노부부처럼 시청하는..." p168의 "NPR 채널에서 클래식락을 들었다"는 부분 등이 그렇습니다. p58의 저 문장은 그래서 그런 남자하고는 엮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데 문득 엠스플 베이스볼 투나잇을 보며 잠드는 저하고 비슷하다 싶어서 뜨끔해지기도 했습니다. p161에는 "찌그러진 기아차Kia"라는 말이 나오는데 물론 우리 한국의 그 자동차 메이커가 만든 상품을 가리킵니다. 기아차라고 하면 한국 독자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이런 대목에서조차 고유명사라고 영어를 병기한 출판사의 태도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물론 꼼꼼하고 일관된 편집 원칙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브리엔은 점잖고 조신한 여성인데 작품 중에서는 거친 말이 자주 등장해서 약간은 당황스러웠습니다(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지만). 예를 들면 p67의 "싸가지 없는 것들에게는 사과 따윈 하지 않는다."라든가, p75의 "돼먹지않은 개새x" 같은 게 그렇습니다. 이 둘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p290)"를 향한 게 아니라서 이상하죠(물론 놈한테라면 상관 없습니다만). p267에서는 회계사(진짜 고맙고 일 잘하는 사람ㅋ)와의 통화 후 비로소 모든 걸 알게 되어 "그 개자식이 내 재산을 털었다."고 합니다만 이건 뭐 당연한 반응이겠고요.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스포일러라고는 했으나 2부 시작부터 벌써 나이얼이 자신의 정체와 의도를 모두 독자 앞에 밝히기 때문에, 이후에는 마치 "재능있는 리플리씨"가 어떻게 법의 추적을 피하는지 구경하는 느낌으로 이 스릴러를 읽게 됩니다. 3부 끝무렵에는 나이얼이 본인 입으로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처럼(p303)"이란 말을 하기도 하죠. 그는 거의 평생 좀도둑질과 사기, 자기 합리화로 점철된 삶을 살았는데 마지막에 만만히 봤던 브리엔에게 정신적으로 치명타를 맞습니다. 근본이 잘못된 인간이기는 하나 꽤나 치밀한 편이었던 그가 마지막에 실책을 연달아 저지르는 건 아마 이 타격이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이얼, 아니 소설 후반부에 셰인 넛센이라고 본명이 밝혀지는 범죄자는 여튼 본인 딴에는 꽤나 유능하다며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이 자가 어떻게 브리엔을 알게 되었는가. 그에게는 계모이자 인생의 사표였던 소냐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이 계모는 고생고생하며 피 한 방울 안 섞인 셰인을 키웠습니다. 이 점에서 아 소냐라는 이름의 그녀나 그 아들 셰인이나 근본이 나쁘지는 않은 사람들이구나 하고 잠시 착각도 했습니다만, 나중에 브리엔이 "그 수많은 편지 중 너(셰인)에 대한 언급은 한 번도 없었다"며, 일종의 세뇌, 가스라이팅 대상으로 셰인을 갖고 놀았다는 것, 혹은 세상에 자신의 복제품 하나를 내놓는 걸로 보람을 삼았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사만다는 어렸을 때부터 셰인이 동료로 삼은 여성인데 셰인은 내내 그녀에 대해 애정이 아니라 "충성심"을 확인하며 만족합니다. 물론 사만다는 충성심과 애정을 동시에 품었겠습니다만 후자는 셰인에게 큰 의미가 없었을 텝니다. 그렇다고 셰인이 (나중에 사만다가 "깨달은" 대로) 그녀를 철저히 이용만 한 건 아니지 싶고, 적절한 보상이랄까 대접은 해 줄 생각이었던 듯합니다.

반면 무고한 피해자이기만 한 브리엔에게는 나중에 "죽일" 생각까지 품었는데, 이 역시 계모 소냐의 가스라이팅이 성공적으로 먹힌 결과입니다. p177에 "꿈을 이루는 녀석"이라는 평가가 나오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죠. p186, p172에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다"며 셰인은 다짐을 거듭하거나 합리화를 시도 중인데 역시 계모에게 세뇌된 결과입니다. p153에서 셰인은 브리엔에게 "장모님은 교과서처럼 꼬장꼬장하며 자기도취 성향이 강하다"고 하는데 이걸 보아 그의 계모가 비정상이었음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런 장르는 독자들이 익숙한 분야인데 p128에선 대프니 듀모리에가 직접 언급(오마쥬)되며, 그 장편(<레베카>)의 배경인 만달레이 별장과 관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p210에 랭곤크랩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p338에서야 이 소설의 전체 주제이다시피한 "가스라이팅"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p373에는 윌리엄 윌키 코린스의 장편 제목이기도 한 "월장석"이 언급되네요.

p245에서 브리엔은 "수 개월 동안 살아 오다 왜 지금 정신병원에 나를 보낸" 나이얼이 이상하다며 의사를 설득하는데 이 점은 독자들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대목이며, 작게 봐서는 나이엘의 계획이, 좀 크게 보면 소설의 구성이 다소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게는 저 말이 작가의 솔직한 고백처럼도 들렸습니다.

p306을 보면 브리엔이 본명을 알아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친구 마리솔에게 말하는데 미국 사법제도가 이처럼 허술한 면이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 범죄자 특정이야 필요하지만 우리 같으면 경찰이 충분히 수사에 나설 만한 사안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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