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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속에 핀 꽃
장은아 지음 / 문이당 / 2020년 6월
평점 :
근대 한국사는 외세의 침략과 동족 상잔으로 얼룩진, 세계 역사에 보기 드문 비극으로 점철된 예입니다. 한민족은 더군다나 다정다감한 성정에 깊은 정한을 간직하고 사는 성향이라 이 굴곡진 역사 속에서 그 맻힌 사연과 한의 깊이와 폭이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소설은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을 거쳐 개발시기 현대까지를 관통하는 중 어느 집안의 기나긴 곡적을 담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주인공이 어려서 어느 지주의 집안에 민며느리로 들어온 봉임 한 사람이며, 모진 시집살이와 남편과의 불화 끝에 여인으로서의 삶이 시들어가는 비극을 다룬다거나, 아니면 부당한 학대, 억압에 맞서싸우는 여인의 당찬 투쟁을 그렸다거나 한 줄 알았습니다만 그 이상이었습니다.
물론 봉임은 찢어지게 가난한 친정을 뒤로 하고 거의 팔려오다시피한 시집에서 (당시 거의 누구나 그랬을 만하게)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본성이 악하지는 않을(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인간 본성이 악해서 모진 시집살이를 시키지는 않죠) 어르신들을 향해 순종, 근면, 인내의 미덕을 발휘하여 결국 며느리로서 자리를 잡고 집안을 일으켜 나간다는 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식의, 뭔가 개척적이고 긍정적인 이야기 전개가 더 마음에 들더군요.
또 주인공은 (예상 밖으로) 봉임 한 사람뿐이 아닙니다. 시아버지 오영천, 그의 아들이자 깨인 의식을 지닌 도쿄 유학생 석근(즉 봉임의 남편), 오씨 집안에서 땅을 부쳐먹고 사는 소작인들 가족, 석근의 첫사랑 하루코 등 대하소설의 줄기를 이룬다고 해도 될 만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분량만 상대적으로 짧다뿐 <토지>나 펄벅의 <대지>와 비교해도 될 정도입니다.
저는 이 소설이 특히 펄벅의 <대지>와 닮은 점이 많다고 여겨졌습니다. <대지>에서는 우연한 사건 와중에 큰 부를 걸머쥔 왕룽의 세 아들이 시대상의 변천에 따라 각각 다양한 삶의 가지를 쳐 나가는데, 여기서도 오영천에게는 세 아들이 있습니다만 뚜렷한 자기 궤도를 잡아가는 인물은 도쿄에서 공부한 석근뿐이고 나머지는 정직하지도 못하고 삶의 주견도 없이 욕심만 가득하거나 아예 무지한 인간들입니다.
대신, 시대의 모순을 자기 나름으로 대변(?)한다며 영천, 석근 부자에 일종의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둘 다 소작농의 아들이며 하나는 일본에 붙어먹어 앞잡이 노릇을 하는 순사 노기찬, 다른 하나는 나중에 공산주의에 공명하게 되는 전직 은행원 출신 박근우입니다. 두 청년 다 머리는 영특했으나, 소작인으로서 고생하는 제 부모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출세에 한계가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여 일종의 삐딱선을 타는 셈입니다. 전자는 인성 자체가 타고난 악질이며, 후자는 결국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지식인의 함정에 빠지는 운명입니다.
여튼 사연의 초반부는 봉임이 주도(?)합니다. "주도"라는 말을 쓰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는 게, 봉임은 너무도 순종적인 성격이라서 대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모순과 부조리에 무슨 대항을 할 줄 모릅니다. 요즘 같으면 이런 "착함"만으로도 비판의 대상이 되기 충분하지만, 여튼 저는 읽으면서 어떤... 인생의 선함, 바른 양심, 주변 사람들에게 충실되이 자기 의무를 다하고 최선을 마쳐 내는 마음가짐을 억누를 어떤 최강의 악덕 같은 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새삼 들었습니다. 결국은 착한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아닐까요? 뭐 적어도, 이 소설이 그런 교훈을 강조하는 게 저 개인적으로는 너무도 좋았습니다.
석근은 일본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타고난 인간적 자질 자체가 출중한 엘리트입니다. 이런 그에게 일본 여성인들 반하지 않을 수 없죠. 사람이 잘나면 주변 모두가 그에게 승복하기 마련입니다(반대로, 어디서 웬 못된 인간 쓰레기들에게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만). 하루코의 부친은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가의 가장이라 대체 "조센진" 사위를 들이는 게 마뜩할 리 없습니다만 딸이 식음을 전폐하고 스트라이크를 벌이는 데 도통 방법이 없습니다. 사윗감의 인물됨 자체야 워낙 탁월하니 그는 일단 딸 목숨은 살려 놓고 이 청년을 일본인으로 개조시켜 집안의 동량으로 삼을 생각을 합니다. 일본에서는 성(姓)과 씨(氏)가 분리되기에 사위가 특정 가문의 성을 받아들여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게 드물지 않죠.
석근은 비록 상민 출신이긴 하나 민족혼이 투철하고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인 자신의 아버지 영천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근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민며느리로 일찍 들여온 봉임이 매우 착한 여인인데다 자신을 향한 순정이 대단하다는 점, 또 결국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냥 하루코를 포기하고 맙니다. 하루코를 포기한다는 건 앞으로 사내로서 입신 출세할 길을 모두 포기한다는 뜻도 됩니다. 대체로 당시 유학생 출신들이 교육의 물을 좀 먹었다는 이유로 이미 혼례까지 마친 여인을 서슴없이 버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직 민며느리 신분이었을 뿐인 봉임을 별 주저없이 받아들인 석근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우고 못 배우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먼저 다해야 그게 인간인 겁니다.
봉임은 비록 순종적이고 다소 미련한 모습까지 보이지만 결코 여인으로서 센스까지 둔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로, 하루코가 마을을 찾아왔을 때 (뭐 일본인 상류층 답게 잘 찾아입고 왔겠지만) 한눈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신방(물론, 불과 며칠 전에 차린 자신과 석근의 신장)에 그녀를 공손하고 친절히 안내한 후(여기서 이게 가식이나 전략이 아닌 진심임이 잘 드러나게 소설이 서술됩니다) 점심상은 물론 이부자리까지(!) 차려 주고 나갑니다. 순종적 아내상은 일본인이 전형이라고 하지만 이 대목에서는 하루코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놀란 건 남편 석근으로서, 아내의 이런 순도 100%의(ㅎㅎ) 진심을 보고 크게 각성하여, 앞으로는 마음 한 구석에서조차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로 마음 먹습니다. 이 대목에서도 저는 석근이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릇 사내자식이라면 이런 맛이 있어야죠.
석근도 그 부친 영천도 참 로맨티스트인데, 영천 역시 젊은 시절 몰락 양반의 어느 딸내미와 정분이 날 뻔했다가 "반상이 유별하거늘!"이란 부친의 호통을 듣고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재산도 많고 배운 것도 아주 없지 않지만(그래서 그 양반댁 규수가 좋아했던 거죠) 엄연히 상민은 상민이라 공연한 말썽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과 맞는 여성과 결혼하고 그게 바로 봉임의 못된 시어머니 강씨입니다. 강씨도 태생이 나쁜 인성은 아니고 제 시어머니 송씨에게 모진 시집살이를 해서 그렇게 된 건데 봉임과는 달리 처녀적부터 그리 진득한 인성은 아니었지 싶습니다. 다만 드센 성미를 누르고 남편한테 희생을 한 건 같죠.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둬 키우는 게 아니라고 오영천 집안은 그 소작인들에게 넉넉하게 대해 준 편이었지만 시대가 한번 변천을 겪을차치면 못되고 비틀린 심성을 드러내는 악종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노기찬이 그 한 예이며, 오영천은 비밀리에 만주 독립 운동을 후원까지 하는데 그 기미를 일정 당국에서 눈치 못 챌 리 없지만 적절히 뇌물을 먹여 가며 위기를 넘깁니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대목이 몇 번 나오는데, 우리 국사에서는 제대로 안 가르치는 만보산 사건 등 화교- 조선인 간의 대립이 그것입니다. 물론 일본인들이 교묘히 뒤에서 조장한 게 분명하지만 여튼 교과서에서는 자세히 안 배웁니다.
시대의 굵직굵직한 대사건들이 개인의 사연 안에 잘 녹아들며 서술된 것도 좋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매력적이고 공감가는 것도 좋았으며, 구수한 구어체 표현이 등장하여 이야기 읽는 맛이 더한 것도 좋았습니다. 너무 자세한 독후감은 스포일러이겠기에 여기서 서평을 줄이며, 저는 이 장편 소설을 잘 간직하여 두고두고 읽어 볼 마음을 먹었습니다 ㅎㅎ 생각 같아서는 더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글자 수가 10,000자도 넘길 듯하여 이쯤에서 자제하겠습니다. 김동리도 <무녀도>를 개작하여 <을화>를 썼는데, 이 작가님도 아예 10권짜리 대하소설을 좀 써 보시면 어떨지요.
ps
제목을 보면 "눈물 속에 핀 꽃"이란 글자 위에 "리멘시타(라 이멘시타의 축약)"라고 쓰여 있는데 이건 1960년대 한국에서도 대학생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 칸초네입니다. 가사 중에는 "눈물"이라는 단어가 안 나옵니다만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불렀겠음은 누구라도 짐작 가능합니다. 자니 도렐리의 버전도 유명하겠지만 한국에서 압도적으로 인기 있었던 건 이탈리아 여성 가수 밀바의 버전입니다. "넬리멘시타"라고 속삭이는 듯 노래를 마무리짓는 그 특유의 저음을 잊을 수 없죠. "이 '광대한' 세상 속에 나 같은 작은 존재의 슬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님"을 다짐하는 여성 화자의 마음이 갸륵한데 아마 봉임의 세계관, 마음가짐을 대변한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 밀바의 보컬은 세상에 다소 독기를 품고 외치는 듯한 음색이라서 소설 속 봉임이하고는 완전히 매치되는 게 아니죠(그 반대면 모를까). "이멘시타"는 영어의 형용사 immense하고 어원이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