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 -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와 기계의 원리
라이언 노스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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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0으로 돌아간 상태, 즉 그라운드 제로에서 새출발을 하라면 참 상상만으로도 막막합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선조들이 일궈 놓은 문명의 혜택에 대해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먼 과거까지 거슬러올라갈 것도 없이, 우리 동시대의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편익은 또 어떻습니까. 내가 할 줄 모르는 걸 어떤 타인이 모르는 저 먼 구석에서 그의 재능을 발휘하는 중이기에 나의 편리, 나아가 나의 생존이 가능한 법 아니겠습니까.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는 자신의 능력만으로 잘도 정글에서 살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혼자 힘으로는 일상의 영위조차 어렵습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시간 여행이 혹 가능하다 가정하고 전혀 연고가 없는 시간대에 뚝 떨어졌을 때, 특정한 기술이나 장치, 노하우가 아직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를 재현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흥미롭게 독자를 가이드하는 내용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참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게 결코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 맨땅에서 하나하나 지어올라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환경과 타인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겠죠.

감자는 유럽인들에게 "악마의 작물"이라 불렸는데 그 이유는 성경에 이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정도는 저도 어려서부터 읽은 바가 있는데, 이 책에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특히 그리 받아들여졌다는 점 또 처음 알았습니다(또 그 이유에 대해서도 더 재미있는 이유를 저자는 제시합니다). 감자의 발견(감자 입장에서 전혀 "발견" 같은 게 아니겠으며 인류 그룹을 놓고도 유럽 대륙 거주자였던 이들에 한정하여 타당하겠지만)이 특히 농민들에게 축복이었던 이유는, 익히지 않고 먹을 시 독성이 남아 있어 여타의 동물에게 먹거리로 부적합했다는 서술이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각주에서 보노보 원숭이라는 예외가 있기에 "거의 다"라고 말했다는 문장에서 저자의 위트가 느껴집니다(사실 이 대목뿐이 아닙니다만).

인간은 많은 동물을 길들여 아예 다른 종으로 바꿔 놓았다는 이유에서 참 놀라운 동물이기도 합니다. 종의 탄생과 진화는 그저 자연의 섭리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 같은데 말이죠. 개나 고양이는 다른 가축과 달리 자발적으로 인간에게 다가온 점이 특이한데, 그 중에서도 고양이는 "1) 인간에게 뭘 바라지 않고도 유익한 봉사를 하며 2) 야생종과 애완용이 유전적 차이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다릅니다. 사람이 일군 문명도 놀랍지만, 그 문명에 자기들 나름대로 적응하는(혹은, 적응당한) 동물들의 행태도 역시 경이롭습니다.

"죽기 싫으면 반드시 챙겨야 할 영양소" 필수 영양소는 다들 알듯이 탄수화물, 지질(요즘은 용어가 바뀌었더군요), 단백질 등입니다만 비타민 종류는 비교적 최근에 인식되어 여러 종류로 분류되었고 그 효능과 실체에 대해선 아직도 논쟁이 진행 중이긴 합니다. 학자들과 이 책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이유는 이들 비타민이 체내에서 직접 합성이 안 되므로 반드시 외부로부터의 섭취를 요하기 때문입니다. 비타민에 비타민이란 이름이 붙여진 건 비교적 최근이지만 사실 이 영양소에 대해선 고대 이집트인들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비타민은 적어도 일곱 번 망각과 재발견을 겪었다는 게 저자의 평가입니다. 발견이라는 게 얼마나 상대적이고 인위적 개념인지 다시 확인 가능하며,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숨겨진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케플러는 스승 티코 브라헤의 관측 자료을 바탕으로 마침내 행성의 궤도가 타원이라는 걸 알아냈다고 하죠. 궤도가 원이 아니라는 게 성경의 해석(완전무결해야 하는 신의 창조 섭리)에 반한다고도 하지만 사실 타원이기나 하다는 점도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타원 역시 수학 방정식으로 우아한 표시가 가능한 도형이니 말입니다. 측정의 문제는 물리학에서도 가장 처음에 놓이는 단계인데, 이 측정의 문제에 초석을 쌓은 학자들, 선구자들의 업적이야말로 대단합니다. 저자가 말하듯이, 막연히 미지근하다 시원하다 정도의 평가, 느낌으로 일을 진행한다면 얼마나 잦은 시행착오로 고생해야 할지, 상상이 안 가는 문제이죠.

유형적인 기술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책 p375 이후에는 인간의 위대한 발명 중 하나로 "논리"가 중요한데, 이 논리학은 우리 나라에서 그 기초를 중등 교육 과정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안 가르치기도 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타인과의견을 조정해 가며 살아야 하는데, 그저 목소리만 높이면 다인 줄 아는 사람들, 혹은 자신이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유명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조건 진리인 줄 아는 사람들 때문에 합리적 공동선이 추구되지 않는 현실이 그저 답답할 뿐이죠. 고도의 기술이 발전하면 뭐하겠습니까. 멍청하고 열등감 가득한 인간들이 사회에 뭐 하나 기여는 못할망정 훼방 놓는 거 하나는 확실하게 해 내며 진보를 가로막는다면 다 죽는 길 외에 다른 결과가 어디 있겠습니까. 논리를 "발명" 중 하나로 꼽은 저자의 혜안이 대단하며, 보통 과학사학자들의 저작에서 간과되기 쉬운 이슈를 잘 다뤘다고 생각합니다. 기술만능주의는 정답이 아니며, 어떤 영역에서도 메타적으로 기능하는 장치가 하나 더 마련되어야 합니다.

정말 시간 여행이 가능해지기라도 해서 엉뚱한 데서 길을 잃기라도 한다면, 부족하나마 이 책 한 권은 꼭 챙겨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이 책에 실린 "각도기" 도면 하나도, 우리가 초등학생 때부터 요리조리 갖고 놀던 흔한 물품이지만 간단한 건조물 하나를 만들거나 정확한 마름질을 위해서 꼭 필요한 도구이며, 이것 하나를 쓰고 안 쓰고에 따라 엄청난 오차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는 여러 명언들이 인용되었는데, 그 출처를 놓고 (물론 원 발화자와 함께) "당신"을 병기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시간대에 떨어졌을 경우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여태 그 말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그 고안자, 저작권자인 양(저작권이란 말도 없겠지만) 잘난 척하며 내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우리는 이미 이런 선구자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기에 우리의 사고, 사소한 직업상의 업무 수행 하나하나가 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행해지는 거죠. 우리는 앞선 기여자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고, 한편으로 이런 기여를 미세하나마 루틴 속에서 재현, 재생하는 중이라는 점도 새길 만합니다. 내가 하는 게 내가 하는 것일뿐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빌려 다시 활동 중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연속성을 지닌 문명의 속성입니다. 그 연속성 밑에 도도한 시간이 깔려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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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토익 스피킹 입문 - 21일 만에 끝내는 결정적 토익 스피킹
김소라 지음 / PUB.365(삼육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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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는 토익이 아주 요령 위주의 시험이라서 설령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 못 하더라도 그저 점수만 높이는 요령이 널리 통했습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점수따기 경쟁이 벌어지는 한국인들이 그저 요령만으로 시험 제도 하나를 유린하기란 그저 식은죽먹기였을 뿐입니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으나 토익 본부(주관 단체인 미국 ETS 등)에서도 이 점을 의식했는지 제도를 크게 개편하였습니다. 스피킹 같은 것은 예전 분들에게는 꽤나 낯선 파트이겠습니다.

외국어는 그저 어린 나이에 외국에 나가서 무수히 많은 접촉, 자극, 소통을 해야 발음도 나아지고 상황에 따라 필요한 발화가 바로바로 나오겠으나 그럴 여건이 못 되는 이들도 많고, 어쩌면 구태여 외국에 안 나가고 독학만으로 터득하는 게 진정한 능력이고 성취인지도 모릅니다(무엇보다 돈을 덜 들이는 게 메리트죠). 이런 토종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장벽이, 발음기호, 철자 따위와 전혀 매치가 안 되는 듯한 발음 익히기입니다. 사실 국제음성기호는 "아, 에, 이, 오, 우"가 명확히 읽히는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에 영어에는 잘 통하지 않는 면이 많고, 미국, 영국 등에서는 아예 잘 쓰지도 않습니다. 프린스턴 리뷰 같은 데서 내놓는 영어 교재는 발음기호를 잘 쓰지도 않고, 한국어판에서 부랴부랴 국내 학습자를 위해 병기하는 해프닝이 벌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 김소라 강사님의 <결정적 토익 스피킹>에서는 단어나 문장마다 일일이 한국어로 발음을 적어 놓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영어 교재에 이렇게 하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발음은 어디까지나 원어민의 발음을, 음원을 통해 익혀야 올바른 학습이 된다는 거죠. 그런데 초심자, 입문자에게는 아무리 그렇게 하라고 시켜 봐야 그 첫번째 장벽을 넘지 못하고 매번 그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레서 이 책 저자님처럼 최대한 한글로 원 발음에 가깝게 써 놓은 건 매우 실용적인 접근이라고 생각되네요.

예를 들어 maintenance 같은 것은 [메인-는쓰]같이 쓰고, 강세가 놓이는 첫 음절은 볼드체로 굵게 써 놓았습니다. 책에도 여러 차례 강조되지만 t 발음은 특히 미국 구어에서 거의 발음되지 않습니다(정확하게는, 발음이 되기는 하나 성대가 긴장된 채 울리는 단계에서 그치죠. 아랍어에도 이런 발음이 있습니다).

operation, approach 처럼 첫 음절에 강세가 안 오는 단어들은 [어]처럼 발음을 써 놨지만, occasion 같은 것은(같은 o로 시작하는데도) [으]로 써 놓았습니다. 이건 사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실제 원어민의 발음을 들어 보면 그렇게 정말 들립니다. 저자의 섬세한 감각이 돋보이는 대목이죠.

토익 스피킹 점수 안 나오는 분들은 대략 두 가지 유형 같습니다. 1) 하나는 말하는 스크립트 내용 자체를 머리 속에서 바로바로 구성 못하는 경우이며, 2) 다른 하나는 문장은 잘 만드는데 발음이 나빠서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점수를 다 까먹는 케이스. 물론 상당수는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합니다. 제가 2주 가까이 이 책을 "초보자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본 결과, 책은 한국 학습자들의 약점을 정확히 캐치하고 이 두 가지 학습자층을 집중 공략한 듯합니다.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점수가 안 오르는 사람한테 "점수 오르는 방법"만 딱딱 찍어서 컴팩트하게 정리한 책이, 수험서로는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답변에도 전략이 필요한데,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바로바로 말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가만있자, 이 말이 문법적으로는 오류가 없나?"라며 자체 점검을 하고 머뭇거리고 할 여유가 없습니다. 이때 저자는 앞에 나온 표현을 최대한 활용하라(p76), 어떻게 하든 내용 전체의 요지를 잘 파악하면 설령 몇가지 정보를 빼먹었다 해도 순발력 있게 재구성할 수 있다(p120), 그 와중에도 "묘사할 인물 등을 미리 정해 두라(p50) 같은 걸 전략으로 제시합니다. 이런 건 사실 영어뿐이 아니라 한국어로 진행하는 PT, 인터뷰도 마찬가지입니다. 앞 문단에서 1)이 안되는 이들은 사실 영어만 안되는 게 아니라 한국말도 잘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초보 스킬을 넘어 "문장들이 응집력 있게 연결되어야 한다"거나, "표의 정보가 일치하는 어휘가 들리면 위치를 바로 파악하라"거나 "한 가지 해결책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라" (p161)같은, 어떤 근본의 원칙을 분명히 강조합니다. 토익 단기 고득점도 고득점이지만, 언어 소통에 있어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어떤 소통의 정석(언어 종류와 무관하게)을 다시 새기는 계기가 되어서 매우 유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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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민화로 떠나는 신화여행 인문여행 시리즈 2
하진희 지음 / 인문산책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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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 반(半)신들, 영웅들의 계보를 머리 속에 잘 정리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도인들이 섬기는 힌두의 신들은 무려 "수백 억 명(이 책 p8)"이나 되기 때문에, 이 정도면 해당 충실히 믿는 이들에게라고 해도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지 싶은데요. 소설 한 편 읽을 때에도 등장인물이 너무 많으면 아무리 재미난 이야기라 해도 따라가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평균적인 한국인들이 힌두 신화를 매우 낯설어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멀리하기에는 힌두 신화가 너무도 재미납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인도, 중국 등에서 전래된 불교를 믿어 왔는데 그 역사가 거의 천 오백년이나 되며 이와 관계된 문화 유산도 많습니다. 불교 설화도 파고 들면 재미난 게 많은데, 불교를 멀리서 잉태했던 인도의 전 신화 체계를 (그 대략이나마) 섭렵하면 얼마나 흥미롭겠습니까. 근래 한국에서는 라틴어 공부 바람이 부는 중인데, 라틴어 어원, 문법을 깊이 공부하면 그 먼 친척뻘인 산스크리트와 만나는 대목이 많습니다. 그런데 산스크리트 문헌 공부는 또 이 힌두 신화와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당장 불의 신 "아그니" 같은 것만 해도 그 이름의 복잡한 변화(denomination)를 외워야 하는데, 아그니가 누구인지를 알면 그 암기의 고역이 조금은, 아니 상당 부분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330여쪽의 예쁜 동화책, 민담집처럼 보입니다. 어린이들이 읽어도 쉽게, 재미나게 술술 읽힙니다(어떤 아이에게 시켜 봤는데 아주 좋아하더군요 ㅎㅎ). 그런데 어른들, 특히 산스크리트어, 인도 문화 전반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공부하고 싶은 완전 초짜들이 읽어도 참 좋겠다 싶었습니다. 어려운 내용은 처음 들어갈 때는 쉬운 포맷으로 시작해야 장벽이 낮아집니다. 힌두 신화의 주인공 격 몇몇 캐릭터만 확실히 잘 알아도 그게 뼈대가 되어 다른 연관 신들이 머리 속에 잘 정리됩니다.

저자 하 박사님은 "인도에서는 특히 부녀자들이 익히는 필수 교양 중 하나가 인도 신화이며, 손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베틀로 천에 수를 놓거나 하는 방식으로 이를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나라도 조선 후기부터 서민층의 각성을 통해 고급 예술의 컨벤션에 얽매이거나 기 죽지 않고 자유로운 붓끝을 놀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수록된 여러 작품들은 보기에 유쾌하고, 공감을 끌어내고, "뭘까?' 하는 호기심으로 시선을 잡아챕니다. 사실 이 책의 텍스트를 구태여 쪼아붙이지 않더라도, 책에 실린 그림 구경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그림에 설명이 없어도 재미있는 각각의 그림들인데, 전공자의 정확하고 흥미로운 설명까지 달려서 더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군요.

"신들은 하나이지만 다른 이름들로 불린다." 그 심오한 뜻이야 우리가 미처 깨달을 수 없겠지만, 창조, 보호, 파괴를 각각 담당하는 세 신이 힌두 신화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은 잘 명심헤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신화에서건 "빛"이 창조의 수단이요 시작점이라는 건 공통이라서 재미있습니다. 제임스 캐머론의 영화 덕분에 더 유명해진 "아바타"라는 단어(그 이전에 게임의 역할도 컸지만)도 이 신화, 이 오리지널리티 속에서 그 생생한 의미를 새로 우리에게 밝힙니다.

그리스 신화 등과는 닮은 점도 간혹 보이지만 다른 점이 당연히 압도적으로 많고, 그 전에 비교 대상도 아니다 싶을 만큼 내용이 많고 풍부합니다. 신의 숫자만 수백 억이라는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태양신은 많은 신화 체계에서 주신(主神) 포지션이지만 그리스 신화에서는 헬리오스, 아폴른 등이 따로 맡고, 여기 힌두 신화에서도 "수리야"가 별개로 있습니다. "삶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신"이라는데, 가장 당연한 듯 그 혜택을 접하면서도 우리가 그 고마움을 곧잘 잊곤 하는 존재입니다. 천체의 비중 면에서는 상대가 안 되지만, 해의 신이 있으면 항상 달의 신도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찬드라입니다. 이들에 관한 그림만 해도 여섯 폭이 책에 실렸는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그림 같기도 하고 피카소의 작품마냥 달관의 생략이 느껴지기도 하며 마치 신문 만평처럼 풍자와 해학이 묻어나기도 합니다.

문화권에 무관하게 사람의 도리, 예절, 의리, 윤리는 어느 신화 체계에서나 강조되는 덕목입니다. 사람이 받은 게 있으면 베풀 줄도 알아야 합니다. 원수를 갚을 때에는 엉뚱한(무고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해서 안 되지만, 은혜를 갚을 상황에서는 (은인 혹은 그 관계인에게 갚는 게 불가능하다면) 누구에게나 베풀어도 무방합니다. 어차피 처음에 베푼 이가, 이자까지 쳐서 되받을 생각으로 그리한 게 아니기 때문이죠. 어미새는 새끼를 구해 준 은혜를 갚고 청년이 꿈에도 그리던 처녀와 결혼하게 도와 줍니다. 동물도 그 사는 이치가 이러하거늘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인종적으로 지리적으로 다소 먼 거리지만, 이런 훈훈한 정서(그리고 이를 표현한 그림의 개성)만큼은 우리 문화와 확실히 닮은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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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길더 구글의 종말 - 빅데이터에서 블록체인으로 실리콘밸리의 충격적 미래
조지 길더 지음,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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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도래한 어떤 세상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몰락하고, 그 자리를 전혀 다른 또하나의 질서가 차지한다는 예언. 참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자 조지 길더가 "앞으로는 구글의 세상이 올지니 잘 대비하라"고 이 책에서 말했다 쳐도 우리 독자들은 눈 크게 뜨고 집중해서 읽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그를 넘어, 저자는 이제 막 도래한 거인 구글이 괜한 짓을 벌이는 중이며, 이러이러한 이유로 다른 세상을 맞이하는 발판이 되리라며, 대담하고 장구한 예언을 합니다. 독자로서 넋을 놓고 그의 박자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화 <스타워즈>에서 광막한 우주의 무수한 생명체들은 이미 떡하니 세상을 지배하는 "제국"에 굴종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합니다. 끝내는 압제를 거부하는 세력이 승리를 거두는데, 아마도 이런 희망적인 결론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토록 저 영화의 세계관을 지지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광범위한 사건, 의지, 생각, 거래 따위를 포함하면 할수록 그를 통제하는 확고한 "중앙 집권 세력"을 필요로 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럴수록 우주는 이를 배척하며, 또 그럴수록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디지털 혁명은 이미 사람이 사는 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꿔 놓았으며, 이는 첫째 개인 레벨에서의 보안 강화, 둘째 (그러므로 필연적이게 될) 탈 중앙집권화의 원칙 준수, 이 둘이, 모든 개체의 생존을 위해, 또 질서의 유지를 위해 반드시 요구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IT 혁명 이후 이 판의 유일한 지배자로 군림하는 구글은 이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중이며, 그래서 구글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단지 구글뿐 아니라, 보안 경시, 광고의 타락한 기획과 집행, 뭐 이런 행태를 일삼는 아마존(특히 이 회사의 알렉사라든가, 애플의 시리 같은 음성 중심 주문 체제의 구축을 두고, 저자는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시도라며 힐난합니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저자의 약력을 보면(저는 이 대목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무려 1939년생이시라고 나옵니다. 1939년.... 이분보다 십 년, 아니 이십 년 정도 연하라고 해도, 이미 급변하는 세상에 대한 적응 노력을 포기한 채 꼰대짓이나 일삼는 게 흔한 풍속입니다. 그러나 팔십을 훌쩍 넘긴 저자의 유연한 사고가 펼쳐 놓는 담론을 읽으면, 마치 이십 년 전의 워쇼스키 형제(이제는 자매)기 <매트릭스>에서 놀라운 환상(아마도 이미 현실이 된?)을 펼치는 모습과 비슷하다 할지(그러나 그들은 젊기라도 했죠).

이미 <텔레비전 이후의 삶>에서도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 주신 적 있지만(그의 책들은 고도의 과학기술 이슈를 다루면서도 "문학, 이야기"처럼 신명나고 박력 있습니다), 이 책도 마찬가지. "그런 주제를 이런 투로 이야기할 수도 있구나" 싶게, 마치 판소리처럼 독특한 흥이 배어납니다. 나이 40까지 비즈니스, 정치 분야에서 자기 경력을 확실히 쌓다가 그 늦은 나이에 기술 담론 쪽으로 전향했는데, 이 분야 기초 소양인 미적분 등 고급 수학도 비로소 시작했다고 하며 이 책에도 그것 관련 회고가 잠시 나옵니다.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어디에 모여 있다. 당신들은 자발적으로, 또 공짜로 거기 모였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다른 것'을 위해 거기 동원된 것이다." 맥이 탁 풀리지만 정곡을 찌른 날카로운 한 마디입니다. 이게 뭘 두고 하는 말인가 하면, 바로 구글 서비스와 사업 핵심을 간파한 저자의 일침입니다. 우리는 소중한 정보를, 어떤 유능하고 거대한 회사가 제공하는 검색 서비스를 통해 얻습니다. 상당 부분은 오락과 호기심 충족, 상당 부분은 생계와 관련되었지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결과가 제법 만족스러우니 이를 가능케 한 구글의 "능력"에 속으로 경탄합니다. 바로 이걸 두고 저자는 크게 비웃는 겁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책 서두는, (직전) 수백 년 동안 과학자들, 특히 뉴턴과 아인슈타인 등이 어떻게 일반 대중이 모르는 새("대중"이란 개념도 비교적 새롭지만) 세상을 바꿔 놓았는지 설명합니다. 그들은 그저 수학, 과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세상이 동작하는 질서를 탐구하여 이를 석명함으로써 그 근본 토대까지 변화시켰다는 겁니다. 직접 비교할 게 아닐지 모르지만, 마르크스 역시 자본주의를 신랄히 비난하며, 직전에 등장한 원시 공산제, 고대 노예제, 봉건제 등을 선명히 프레임화한 적 있습니다.

책 제목을 다시 보죠. "구글의 종말(원제는 '라이프 애프터 구글'인데, 이 말이 벌써 '구글이 한 번은 망함'을 전제로 삼는 겁니다. 우리말 번역이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30년 전의 저서 <라이프 애프터 텔레비전>가 한국에 번역 소개되면 또 어떨지 모르겠네요)". "비포 구글"에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었고, 구글과 함께 새로 등장한 질서는 이러이러한 취약점, 자기 모순이 있으며, 앞으로 그래서 구글식 질서는 망한다는 겁니다.

엊그제 프로바둑기사 이세돌과 한국형 AI 한돌 사이의 대국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AI도 이 책에서 중심 화두 중 하나인데, 저자의 표현을 잠시 인용하면 "... 문제는 인공지능 그 자체가 아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삶을 개선한다는 많은 약속을 짊어진 매우 인상적인 기술(p175)일 뿐"이라는 거죠. 그럼 뭐가 진짜 문제인가? p49로 돌아가 보면 저자는 빅데이터, 인공지능, 가상화폐 등을 둘러싼 수많은 논쟁과 경쟁, 방황과 혼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처럼 느릿느릿하게 지식을 탐색(초기 알고리즘적 접근을 저자는 이렇게 묘사하더군요)하는 게 아니라(본인도 아마 그러셨겠죠?)" 무한히 빠른 속도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센서 프로세서(우리의 뇌도 이에 가깝다고 합니다)"가 주도하는 세상이 곧 도래한다...

저 "느릿느릿 탐구"하는 진리 체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졌던 이가 다비트 힐버트(뿐 아니라 앞선 그 모든 과학자, 철학자들이 거의 다 포함되죠)였으며, 이런 신뢰를 무참히 뭉개 버린 이가 괴델이었고, 힐버트의 저자이기도 했으며 이 과정을 다 지켜 본 폰 노이만이 그 맹아를 다진 게 바로 "정보 중심의 패러다임"입니다. 이것도 이제는 상식이 되어 버렸지만 사상사를 이런 식으로 간편명쾌하게 정리하는 트렌드도 따지고 보면 이 조지 길더가 선구자입니다.

새로운 질서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미 전작 <마이크로코즘>에서 잘 설명했지만 저자는 여기서 다시 한 번 1) 개인 차원의 보안 2) 탈중앙집권화 등을 거론합니다. 예를 들어, 어떻게 유전자가 이처럼이나 세상에 번성하게 되었는가. 위의 원칙들을 잘 지켜서 그렇다는 거죠. 책 후반부에는 "구글의 종말"을 끌고 올 블록체인 등을 설명하는데 이 과정에서 비트코인의 창시자 나카모토 사토시와의 "대화"에 대해 긴 분량을 할애합니다. 아직도 그의 실체에 대해 논쟁이 분분한 가운데 이 책에서의 "나카모토 사토시"는 자신을 사칭한 누군가에 대해 분개하기도 하고, "자기 말을 못 알아 먹는" 저자에 대해 경멸감을 드러내는 등 생생한 피와 살을 지닌 실물의 이미지라 더 재미있습니다.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아인슈타인이 처음 상대성 이론을 들고 왔을 때 이해 못했던 이들도, 그가 새롭게 해석하는 뉴턴 이론을 설명할 때 뭔가 새로운 각성이 왔었다고 하죠. 이 책 저자 조지 길더가 말하는 새로운 질서에 대해 설사 이해가 어렵다고 해도, 그가 극복된다고 예언한 현 질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여러 이유로 참 재밌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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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 왜란과 호란 사이 - 한국사에서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
정명섭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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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격변 와중에는 항상 결정적 순간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그 간발의 사건이 반대 방향을 틀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만약을 쉴 새 없이 떠올려가며 판국을 복기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재미있을 뿐더러 오히려 진지한 반성, 성찰, 모색의 건설적인 과정이기도 합니다.

제목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에는 38년의 간극이 있습니다. 왜 나라가 흔들릴 만큼의 큰 국난을 겪고 나서도 또 한 번의 큰 시련을 다시 치러야 했을까? 이 38년의 기간 동안에는 광해군의 즉위, 북인 정권의 수립, 북인 정권과 광해군 사이의 자체 갈등, 서인이 주동이 된 소위 "반정", 이괄의 난, 그리고 호란 등이 이어집니다. 정명섭 선생의 이 책에는 한편으로 치밀한 분석과 반추가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당시 긴박한 사건을 소설처럼 묘사한 대목이 있습니다. 분석은 분석대로 치밀하고, 소설처럼 재구성된 장면은 그것대로 긴박감이 넘칩니다.

갑작스럽게 터진 왜란 때문에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장정이란 장정은 모조리 국토 방어와 인명 보호를 위해 쓰여야 했기에 많은 소년들이 병장기를 잡아야 했습니다. 책 1장에는 어린 병사들의 사연이 짧은 소설처럼 삽입되었는데 마치 한국전 당시 소년병 징집도 연상됩니다. 작가도 이 점을 의식한 듯 그런 언급을 하고 지나갑니다. 이 "아동대"는 과연 어떻게 대우받았을까. 현재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소년병들은 정말 유감스럽지만 총알받이 이상이 아닙니다. 책에는 "군량도 충분하지 못하니 폐지하는 것이 어떠냐"는 윤근수의 진언이 나옵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로 당시 군량이 부족했을 수도 있었지만(그랬겠죠), 그보다는 인도애적 고려가 더 우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자는 참 꼼꼼한 게, "부디 그들이 무사히 고햐향에 돌아갈 수 있었기를" 기원하네요. 소집해제(?)가 끝이 아니라 사실 이 점이 진짜 중요하죠.

여진족은 오랜 동안 명과 조선의 골칫거리였는데 책에는 "멧돼지 가죽"이란 이름이 붙었던 누르하치가 이 견제 시스템을 어떻게 깨고 나왔는지 설명이 자세합니다. 정명섭 저자의 책은 표준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자신만의 관점에서 "진짜 궁금해해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잡고 나서 재미있게 문제를 파고들어간다는 점이 뛰어납니다. 교과서 등에서 수동적으로 접한 이슈들이 그의 책에서는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또 상식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 풀립니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광해군은 오랜 동안 폭군, 심지어 암군의 이미지로 인식되다가, 참 엉뚱하게도 일제 강점기에 들어 비로소 "비운의 개혁 군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은 몇몇 교수 등의 선창에 의해 아예 절대 선 비슷하게 과장되는 경향까지 있지만 말입니다. 정명섭은 이런 대중의 착각, 선입견에 영합하지 않고, "그는 폭군, 암군으로 이해될 이유가 분명히 있지만,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도 따로 있다"고 아주 또렷하게 선을 긋습니다. 어설픈 양비론이 아니라 오히려 무지에 의한 폭주를 경계하는 이런 신중한 태도가 그의 책들에 무게감과 신뢰도를 더하는 겁니다.

무엇이 그럼 높이 평가되어야 할 대목인가? 후금과의 충돌이 명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점을 일찌감치 꿰뚫어 보았다는 게 저자의 평가입니다. 사태를 관망하는 게 조선으로서는 현명한 태도였고, 다만 이를 넘어 무슨 광해군이 장차 후금에서 대륙을 다 차지하는 미래까지 내다보았다는 건 터무니없는 우상화입니다. 당시 조선에 무슨 전폭적인 참전, 나아가 대명 원조까지 할 국력이 있었겠습니까.

광해군의 집권 기반인 북인은 그럼 과연 실리 외교를 펼쳤을까요? 그렇기는커녕 정반대였습니다. 서인과 적대한 건 맞으나 이는 학문 지향성, 내정 방침, 그리고 궁내 문제(인목대비, 영창대군 처리 문제) 등을 놓고 벌인 대립이었을 뿐, 오로지 명분에 죽고 명분에 사는 남명 조식의 학통을 이은 북인들이 무슨 실리 외교를 주장했겠습니까. 저자는 이런 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역사에서 가장 무모한 반응이, 무엇은 절대로 옳고 무엇은 절대로 그르다는 식의 극한론입니다.

인조가 잘못한 건 본래 타고난 인간됨 자체가 용렬한 근본적 한계가 있었겠으나(돌머리한테는 뭘 가르쳐도 못 알아먹는 법이죠) 자신을 옹립한 반정 공신들 사이의 다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을 드러냈고, 참 한심하지만 명나라로부터의 승인도 못 얻어내었다는 실책이 있습니다. 게다가 명나라는 뭔 생각인지 자신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광해군을 끝까지 버리지 않거나, 혹은 이를 기화로 조선, 인조에게서 뭘 뜯어먹으려 들었습니다. 소탐대실이란 이런 걸 두고 이름이죠.

이 책에도 나오지만 광해군이 저지른 가장 멍청한 짓은, 가뜩이나 피폐한 민생을 돌보지 않고 경복궁 재건 공역에 또다시 일반 백성을 동원했다는 점입니다. 흔히 말하는 "전란 복구를 위한 실리 정책"의 이미지하고는 정반대되는 사실이죠. 인조는 이런 것, 또 백성을 등쳐먹는 탐관오리 등을 징벌함으로써 마치 포퓰리스트처럼 일단은 민심을 달래려고 들었습니다만 근본적인 방책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왕만 바뀌었을 뿐 바뀌지 않은 조선" 저는 결국 이 글귀가 이 책의 핵심을 잘 요약한다고 생각되네요. 광해군 체제도 문제가 많았지만 그를 대체하고 들어선 인조 정권이 더 무능했던 게 비극이었죠. 서인은 사실 이후 북학파도 그 속에서 나오곤 했지만 오히려 유연하고 실용적인 편이었습니다. 그런 서인도 결국 경직된 숭명 외교를 고집했던 게 안타깝고, 이건 조선 사회를 이끈 유교 사대부 자체의 한계입니다.

인조 반정은 사실 아주 어설픈 쿠데타였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광해군은 그 결정적인 밤에 제대로 대비를 하지 않습니다. 이 책뿐 아니라 대부분의 시각이 "이전까지 허위 고발이 자주 들어왔기에 경계심이 해이해졌다"는 식의, 이른바 거짓말쟁이 양치기 비유(혹은 주나라의 폭군 유왕과 포사 설화도 있죠)로 설명하지만, 독자인 제 생각으로는 그냥 자포자기 상태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책 p122에 보면 "북문 혹은 자하문이라 불리는 창의문에서 북소문으로 진격..."이란 대목이 있는데, 북소문=자하문=창의문이고 북대문은 숙정문이라고 해서 따로 있습니다. 착오가 아닐까 싶습니다.

"... 역사는 과거에 대한 지양 또는 지향이라는 흐름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며 그 전후관계를 살피는 시도들은 많았으나 사건과 사건을 연결하는 틈, 사이의 시간 자체에 주목하는 경우는 아직 널리 소개되지 않은 듯하다. 《38년》에서는 이러한 ‘틈의 역사’에 주목했다.." 사실 우리 같은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사건 자체가 긴박하게 흐르는 그 내러티브에, 소설이든 역사서에서든 매료되게 마련인데 정명섭의 책은 이런 독자의 니즈를 언제나 만족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재미에 치우쳐 진지한 접근을 희생한 게 또 아니라는 건 앞에서도 거듭 말했고요. 아주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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