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척도
마르코 말발디 지음, 김지원 옮김 / 그린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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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하는 도시, 혹은 국가가 그런 질서와 안녕을 누릴 수 있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이들의 노력과 지혜가 쌓여야 하지만, 공동체의 안보, 안정이 무너지는 건 불과 한순간입니다. 그 원인이 질병이 되었든, 혹은 불순한 외부 세력의 간여(干與)와 공작이 되었든 말입니다. 소설은 어느 미스테리어스한 살인 사건(인지도 처음엔 모를 만한)을 해결하는 과정을 다루지만,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만족이 결코 거저 얻어진 게 아니라는 교훈도 은근히 전달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르네상스의 천재 기술자,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이지만 그가 활약한 도시를 다스렸던 권력자 루도비코 스포르차도 큰 비중으로 나옵니다. 이 소설에 나오지는 않지만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끝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이 소설에서 그가 갖고 노는 멍청한 프랑스 왕이 그 후계자를 맞은 후에는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여 유폐되는 신세로 떨어지는데 바로 자신이 저지른 어느 악행의 경과(이 소설에도 잠깐 묘사되는)와 비슷한 꼴입니다. 역시 인간의 악업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인가 봅니다. 자신이 알든 그렇지 못하든 말입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이 소설 속에서, 또 실제 역사에서, 적어도 통치 초기에는 매우 유능하고 노련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다 빈치가 근거지였던 피렌체를 떠나 그가 다스리는 밀라노로 이주한 것도, 밀라노에서는 광신적 믿음에 들떠 아무 일에나 코를 들이미는 무도한 세력의 간섭을 비교적 멀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도 수시로, 아니 매우 자주, 무지몽매한 종교 맹신 속에 시드는 인간의 지혜와 각성에 대한 안타까운 느낌이 표현됩니다. 그들은 겉으로야 신(神)의 뜻, 정의를 입에 올리지만 본인들이 신이 아닐진대 누가 감히 신의 뜻과 정의의 본질에 대해 확언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건 비루한 사익과 탐욕에 불과합니다.

어느날 스포르차의 궁정 한복판에 웬 젊은이의 변사체가 발견됩니다. 변사체라 함은 그 죽은 원인이 특별히 수상하게 보이는 시체를 가리키는데, 겉으로 보아 자연사와 다를 게 없으며 점성술사 등 일 모로가 거느리는 전문가(?)들은 질병의 창궐, 즉 직전 시기에 전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재유행 조짐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현재 코로나 때문에 고생하는 한국 독자들도 괜히 신경이 쓰이죠(이 소설은 몇 년 전에 지어졌습니다). p79에는 편지를 소독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러나 시신 앞에서 다 빈치는 유독 긴장된 반응을 드러내고(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후반부에 밝혀집니다), 이 젊은이가 색다른 방법으로 타살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후부터 우리 독자들과 다 빈치, 권력자 일 모로가 함께 그 진상을 추적해 가야 합니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 소개가 꽤 긴데 보통 소설 앞에 놓인 캐릭터 요약은 굳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이 부분이 거의 본문의 일부에 가까워서, 좀 힘들더라도 미리 읽어 두는 편이 좀 낫습니다(안 그래도 상관 없지만). 소개에서도, 또 본문에서 샤를 8세는 많이 모자란 위인으로 나오는데 다른 누구보다 전지적 시점의 작가가 가장 큰 경멸감을 가진 듯합니다. "무장은 우리가 하고 전쟁에는 네가 나가라"가 아마 샤를 8세의 모토가 아니었을까 하는 문장이 있는데 저는 1970년작 영화 <패튼>에서 병사들의 불만이었던 "His guts, our blood."가 생각 났습니다.

소설 처음에 페라라 공국의 대사(밀라노에 파견된)가 나오는데 기대보다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주의깊게 봐 둬야 합니다. 사실 인물 소개에 나오는 인물들 중 상당수는 본문에서 비중이 적거나 아예 안 나오곤 합니다. 소설을 2/3 정도 읽고 "이 많은 사람들은 언제 다 나온다는 건지?" 싶었는데 혹시 작가가 시리즈를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릅니다(기대가 되는데 말이죠). 페라라의 지배자 데스테 가문은 유럽 전체에서 손 꼽는 명문가로서 찬탈자 스포르차 따위와는 격이 다르죠. 이탈리아 드라마 <보르자>에서도 교황 알렉산데르를 배출한 보르자 가문을 서슴없이 무시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너무 가문이 비천해서 니네 집안 딸(루크레치아)은 못 맞아들이겠다고 하죠. (그러나...)

이 소설에는 전지적 작가의 내레이션이 수시로 끼어들어 코믹한 멘트를 치는 게 하나의 특징입니다. p38에는 "이상한 소리 같겠지만 15세기에 밀라노는 이미 교통 체증을 겪었다.", p157에는 "현대의 꽉 막히는 길을 SUV로 달리는 기분"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통 체증은 대도시에서 시대를 불문하고 치르는 곤욕이며, 원래 기술이라는 게 이런저런 불편을 딱 그 시대가 감당할 만큼만 발달하는 까닭이죠.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p60에는 "요즘은 시(詩)가 아니라 인터넷을 보고 (경험하지도 못한 바에 대한) 헛소리를 떠든다"는 말도 나옵니다. p63에서 "공작에게 공작은.."은 같은 대목에서 역자가 적절한 보충어구를 끼어 넣어 약간은 난해한 작가의 원문이 매끄럽게 읽힙니다. "계속 부연 설명을 해서 미안하지만..." 같은 유머도 여전합니다.

p38에 "갈레아초는 미남이라 레오나르도가 관심을 보일 만한..."이라든가,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아들처럼"(p117), "베네치아식 취향" 같은 말로 다 빈치의 성적 취향을 제멋대로 짐작하는 다른 인물들의 대사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러나 소설 후반부에 나오듯, 다 빈치의 성향을 지레짐작하고 수작을 건 어느 인물이 웃음거리가 되는 장면에서 작가는 이런 추측들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셈이죠. 소설에 등장하는 다 빈치의 어머니도 도통 장가 들 생각을 하지 않는 아들에 대해 걱정하는 말이 있는데 다 빈치는 적어도 그건 아니라는 식으로 대꾸를 합니다. 결국 이게 거짓말은 아닌 걸로 소설에서는 정하고 갑니다. 작가 에필로그에 "섣부른 추측은 그 정도 되는 천재에게 예의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독자인 제 생각도 그렇네요.

p56에 "사회적 승격이 제한된 프랑스의 군인들은 이탈리아 인들과는 달리 죽기살기로 싸운다"는 말이 있는데 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19세기에 대영제국이 그처럼 번영한 것도, 사회적 하층민이 식민지에서 열심히(?) 일한 덕을 보았지요. 한편으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의 꽃이 활짝 핀 건, 이런 열린 사회의 특성에 기댄 바도 큽니다. 다 빈치가 프랑스에 태어났더라면 과연 그처럼 활력을 얻을 수 있었을지.

p74에는 발기부전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임포텐치아 코에운디"가 나오는데 coeundi는 어느 동사의 동명사꼴에다 다시 소유격을 취한 꼴입니다. p82에는 오스트리아 황제를 연상하는 마시밀리아노라는 이름으로 어린 아들을 불렀다고 하는데 그거야 작가의 상상입니다.
"막시밀리안"이란 이름이 이탈리아식으로 자음 생략된 형태인데 이것 말고도 여러 예가 있습니다. p84에 레오나르도는 라틴어를 잘 모르고 실력이 형편없다는 말이 있는데 저 뒤 p134에도 consider의 어원이 "cum sideribus(별과 함께)"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현대의 어원학자들도 고작 그 정도밖에 못 밝혀내었죠. 물론 그 당시의 학자들(와 교양인)에게 기대치가 더 높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p109의 라틴어 표기에서 페라라의 지배자 에르쿨레라는 이름이 Heracules에서 유래했다는 걸 우리 독자들이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저 뒤 p208에도 나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천재성은 여러 대목에서 작가의 생생한 필치로 묘사됩니다. 예를 들어 "2D가 3D보다 훨씬 구현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고대 회화가 하나같이 우습게 보이는 건 원근법 등 특정 기술이 발견되기 전이어서이다. 한편 조각은 하나같이 빼어나다는 설명이 따라옵니다. 백번 타당한 서술이죠.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p105에 "그를 만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관습적인 가벼움"이라든가, p117의 "사근사근함" 같은 표현에서 특유의 유쾌한 성격이 드러납니다.

p179의 "제 자신이 판 함정"은, 만약 다 빈치 본인이 거짓말을 했다면 주위 점성술사들의 대세 의견에 따라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하면 그만일 것을 구태여 살인이라며 일을 크게 벌일 게 뭐 있겠냐는 항변이고 이걸 일 모로가 잘 이해하는 대목입니다. 윗사람이 머리가 나빠서 괜한 의심을 일삼으면 아랫사람이 참 미치기 직전까지 가죠. 이 소설은 일 모로와 다 빈치가 여러 번 충돌하고 때로는 좋지 않은 기색으로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 통에 독자가 괜히 긴장도 하게 되는데 이게 다 작가의 페이크이니 속으면 안 됩니다. 은근 반전과 복선이 많은데, 다만 작가가 현학적인 말투라서 이 멋진 장치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작가는 장에서 다른 장으로 넘어갈 때, 전혀 다른 장면과 인물들 사이의 사건을 두고 공통된 단어로 연결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p139의 "명령"이라든가, p112의 "물론 긴장했지", 그 외에도 많은데 일종의 이중노출 기법일까요? p286 "화가서로 -> 화가로서" 같은 게 유일한 오타이며, "지아코모, 지오아키노" 같은 인명은 국어원의 이탈리아어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자코모, 조아키노 등으로 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p108 "알프스 건너편 사람 억양" p109 "알프스 아래쪽" 같은 표현은 아직도 유럽 문명의 중심이 이탈리아에 놓였을 무렵, 심지어 알프스 건너편에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표현의 흔적입니다. p185에는 "진짜 명나라 도자기를 깬 코커스패니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멋진 비유이며 과연 이 무렵에는 중국 대륙에 명조가 있었지요. 명나라라면 이미 중국사의 황혼기인데 유럽에선 겨우 이 시기에 본격 문명이 꽃피었으니 두 대륙의 성숙도 차이를 실감합니다. p200의 익명의 제노바인 항해사는 물론 콜롬부스입니다. p211 화음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 대목은, 왜 그렇게 우리가 서양 고전 음악에서 평온한 쾌감을 느끼는지 잘 설명해 줍니다. 아름다운 건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 사이의 관계이며, 이를 동아시아 음악에선 구현하는 데 실패했죠. 안타깝게도요.

책표지에는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며, 그 실수를 통해 발전을 하는 게 인간의 척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편으로,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는 신의 뜻, 정의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어떤 무지, 광신을 극복하는 게 참된 인간의 척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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