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존엄에 대한 요구와 분노의 정치에 대하여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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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이란 대체 누구일까요?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0년대 후반 <역사의 종말(혹은 종언[終焉])>을 써서 전세계적 유명세를 탄 학자입니다. 또 이후 그는 저작 <트러스트>를 통해, 이른바 사회적 신뢰가 있는 사회(국가)와 없는 사회를 준별하여 또한번 화제에 오른 바 있습니다. 이 중 <역사의 종말>은, 인류가 더 이상 이념과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도도한 세계화의 물결 속에 물질적 영달에만 골몰하게 된다는 취지로 "역사의 끝"을 선언했기에 엄청난 여파를 불렀더랬죠.

재미있게도 그 예측은 다소 묘한 방향으로 빗나간 듯 보이는데, 그동안 이 교수님이 적잖이 피곤했던 듯합니다. 이 책 서문에서는 그에 대한 일종의 해명을 내놓고 있는데, 독자에 따라서는 변명(?)으로도 읽혀 무척 흥미롭습니다. 똑똑하신 분이 자신의 전적에 대해 진땀을 흘리며 해명에 나서는 건 여튼 보기에 재미있기 때문이죠. 물론 저는 그런 해명의 취지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편인 독자입니다. 학자는 점쟁이가 아니기 때문이죠.

여튼 그건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고, 다시 이 책 제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존중 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대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요? 그 전에, 우리는 일상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존중을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까?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흔쾌히 "예"라고 나오지 않는다면, 어쩌면 이 책은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그렇다고 쳐도, 그런 우리들(?)을 위해 정치학씩이나 필요한 걸까요?

책을 다 읽은 독자인 저로서는, 이 제목이 누굴 염두에 둔 것인지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습니다(고 생각합니다). 잘라서 말하자면, 교수님이 물론 일상의 우리들을 일차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쓴 건 아닙니다. 이 책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이란, 분명 어떤 특정 그룹, 특정 사회,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겁니다. 허나 예컨대 문제적 사회, 혼란한 위기의 공동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법한 한국인들이, 과연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그거 장담 못하겠다" 싶었습니다. 지금부터 차근히 저자의 주장을 저 개인적 시각에서 리뷰해 보겠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아이덴티티>입니다. 몇 달 전 광화문에서 조국 장관 반대 시위가 벌어졌을 때, 청와대의 한 관계자(라고 언론에 나온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최측의 정체성이 모호한 시위이다." 아마 이 책 제목, 또 내용에서의 "정체성, 아이덴티티"는 이 맥락에서의 의미와 좀 닿아 있을 것입니다. 또, 뭐 구태여 특정 맥락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보통 쓰곤 하는 그런 의미의 "아이덴티티"와 그리 다르지도 않습니다만 여튼 저자가 논하는 건 좀 더 현대적인, 우리가 사는 지금의 시대에 포커스가 맞혀져 있습니다. (이 책에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다룬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다 읽고 나서 보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이라는 우리말 제목은 참 잘 붙여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이 책에서 말하는 "존중"이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서문 도중인 p12에 보면 이 책의 핵심 개념으로서 책을 읽어 나가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두 가지 키워드가 나옵니다. 옮긴이께서도 본문 중 역주를 통해 자세히 설명하듯이, 그리스어에는 "투모스"라는 개념이 있는데, 혈기, 격정, 기개 정도의 뜻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 기원은 소크라테스의 이론에 서 찾으며, 인간의 혼에 대해 설명할 때 용기, 분노, 격분, 자부심 등이 일어나는 부분이라는 게 역자의 설명입니다(p12). 이 정도로도 대략 무슨 뜻인지는 독자에게 충분히 감이 옵니다. 참고로 사실 투모스는 원 발음으로 "튀모스"에 가깝고 왜 고 이윤기 선생 책에서 신화를 "뮈토스"라 쓰는 것과 같습니다만 책에서 이렇게 개념어 표기를 고정시키므로 그대로 따르는 게 좋겠습니다. 앞으로 일상에서 토론 같은 걸 할 때에도 괜한 혼란 없이 "투모스"란 단어가 정착했으면 합니다.

그 다음으로 이 투모스의 근원에 대해, 저자는 인간의 두 가지 욕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대등 욕망"이요, 다른 하나는 "우월 욕망"입니다. 내가 이 정도는 남들처럼 대접 받아야지 하는 게 전자이며, 그를 넘어 내가 남들처럼 대접 받고 그칠 수는 없다는 게 후자인데, 전자 못지 않게 후자 역시 흔한 인간의 동기와 본성, 욕망 중 하나입니다. 즉 사람은 의외로 "아니 이거 내가 누군줄 알고 니들이 감히!" 라며 발끈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심심하면 터지는 갑질 파문이라는 게 다 뭣에 기인하겠습니까.

저자가 조명하는 건, 현재 국제 사회가 왜 이렇게 시끄럽냐는 겁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이런 욕망, 이런 인정 욕구, 이런 감정 반응을 개인 차원 아닌 집단 차원에서 발현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겁니다. 미국에서 흑인, 여성, 성소수자, 빈곤층 등이 제각각의 이유에서 대등 욕망을 표현하는 게 작금의 혼란으로 드러나며, 국제 사회 역시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한 종족, 민족, 혹은 강대국에 의해 과거, 혹은 현재 핍박을 받은(혹은, 그렇다고 여기는) 국가가 이런 동기에 의해 행동한다는 겁니다. 이들이 모두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이며, 현대 정치(국내이건 국제이건)는 바로 이 점, 이 현상에 주목해야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물론 종족의 자부심, 자존감, 독립 욕구, 혹은 남을 지배하려는 충동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특히 현 21세기 초에는, 어떤 계급 해방이라든가, 거대 민족 사이의 패권 다툼이라든가, 자본의 피말리는 경쟁 구도 같은 것보다 이 요인이 더 지배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작용한다는 게 저자의 견해입니다. 확실히,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테러, 분쟁, 총기 난동 등은 이 요인으로 어떤 통일적 설명이 가능합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이들의 정체성이야 사건마다 천차만별일망정 말이죠.

p22에는 샘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이 언급됩니다. 이 이론 역시 이 책 저자 후쿠야마 교수의 <역사의 종언>과 비슷한 시기에 제기되었습니다만 훨씬 강한 설명력과 유효성을 여태 유지하는 듯합니다. 아무튼 이 무렵부터 이념 대결이 종식되고 세계는 구미, 그 중에서도 미국 중심으로 문화, 경제 등 모든 면이 재편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경제 체제, WTO가 주도한 국제 분업 체제가 특히 심각한 도전을 맞았습니다. 이 책은 2018년에 저술되었으므로 코비드 19의 만연까지는 목도할 수 없었지만, 현재는 서플라이 체인이 이 전염병 대유행 탓에 결정타를 맞고 구조 재편을 꾀하는 중입니다. 여튼 저자는 전염병 이전부터 이미 "존중받고자 하는 자들의 몸부림" 때문에 세계화 추세가 멈출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는 거죠.

일단 값싼 노동력을 찾아 선진국의 기업과 자본이 해외로 이동하고, 그 와중에 기존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고 생계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무리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이라 해도 이들은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에, 자국 내에 들어와 있는 불법 체류자들을 향해 거침 없이 혐오의 표현을 내뱉고 일자리와 자존을 지키려 듭니다. 이것이 표면화한 결과가 2016년 "국외자" 트럼프의 집권으로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몇 달 전 브렉시트 역시 국경이 허물어진 EU 로부터(혹은 그 권역 외로부터까지)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와 경계심이 발동한 후과입니다.

유럽에 이주한 아랍인, 북아프리카인들 역시 이런 "투모스"를 표현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왜 너희들은 종교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를 차별하는가? 이런 몸부림이 각종 테러로 나타나는 건데 설령 동기면에서 납득이 갈 부분이 있다 해도 여튼 폭력이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 와중에 서유럽은 기존의 존경, 권위, 리더십을 잃고, 그 결과로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회의도 확대되었으며, 이는 다시 중국, 헝가리, 터키, 필리핀 등에서 발호하는 신 권위주의, 독재체제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죠.

저자는 특히 ISIS 같은, 명백히 인류 보편의 가치와 상식에 반하는 집단에 대해서조차 젊은 세대가 자발적 참여 행태를 보이는 데에 경악합니다. 이들 젊은이들은 기존의 사회, 기성 체제가 보여 주지 않은 관용, 포용, 존중을 바로 저 반사회적 반인륜적 기구, 집단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당장 대한민국의 "김군"만 해도 자발적으로 찾아가 입대하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게 역시 "존중받지 못한 자의 몸부림"에 해당합니다. ISIS에 소속된다고 해서 무슨 실질적 존중이나 물질적 혜택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의 천국을 약속하며 그들은 이런 어린 대원들에게 자살 공격 따위를 거리낌 없이 시킵니다. "죽음"이란, 현생의 종말을 뜻하는 건데 대체 사후의 복락, 쾌락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도 이들은 "투모스"를 충족하기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내가 어떤 이념, 더 큰 자아를 위해 죽는다는 자체가 그들에게는 무한한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겁니다. 인간의 행동 동기 중에는 이처럼 비이성적, 비타산적(?)인 것도 있습니다. 아쉽지만 이 역시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고, 저자는 이런 본성이 종족, 민족, 국가 단위로 나타나는 현상, 부작용 등을 분석하는 거죠.

저자는 니체의 이른바 초인 개념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기존 개념과 가치를 모두 재평가하고 새로이 창조하는 존재입니다(p102). 그런데 작금의 무질서와 혼동은, 이런 니체식 의미에서의 각성에서 기인하는 게 아닙니다. 니체의 초인은 어디까지나 개인 레벨의 각성이지만, 현재의 "정체성 몸부림"은 개인이 아닌 집단 정체성 차원의 모색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월한 민족, 남성, 백인, 기독교(혹은 이슬람)인 집단"을 그들 행동의 준거로 삼고 이를 맹렬히 내세웁니다. 이런 움직임은 (앞서도 말했지만) 21세기에 들어 처음 나타난 게 아니고 예컨대 에스파냐의 카탈루냐인, 바스크인 등 소수 민족들이 수십 년 전부터 표방해 온 움직임입니다. 다만 아일랜드 분리주의나 바스크 민족주의는 지도자들의 성숙한 결단에 의해 차츰 수그러드는 추세(역주에서 에스파냐 북동부라고 한 건 아마 역자의 착오인 듯합니다. 카탈루냐는 북동부가 아니라 남동부죠)이며, 반대로 저 멀리 스리랑카의 분쟁은 엉뚱하게도 일방의 패권이 우세해지며 폭력적으로 종식되는 단계입니다.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동 역시 21세기에 들어 이론적 분석의 집중적 목표가 된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새로 탄생한 "행동경제학"의 경우, 사람들은 크기에 무관하게 이익보다는 손해의 회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이익의 경우 아무리 액수가 크고 확률이 높아도, 만약 작은 손실이나마 감수해야만 한다면 쉽사리 선택을 안 한다는 겁니다. 저자는 이런 심리를 중산층, 빈곤층 등이 느끼는 비이성적 반응에까지 적용하여, 혹시나 상실될 수 있는 계급적 이해(근거가 없다 쳐도)에 왜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설명하려 시도합니다. 이 대목에서도 저자는 헌팅턴 교수와 예전 알렉시 드 토크빌의 책을 인용하는군요.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건, 이것 연관하여 저자가 태국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비교적 자세히 분석하는 대목입니다.

"각 집단에게, 외부인은 가질 수 없는 고유한 정체성이 있다는 믿음은 1970년대 대중문화에서 빈도가 급증한 체험이라는 단어에도 반영되어 있다(p181)." 사실 이런 믿음은 잘못된 것이지만, 특히 우리 같은 단일민족이 소중히 여기는 착각이기도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경험과 체험(lived experience)은 서로 다르며, 이는 독일어 단어 Erfahrung과 Erlebnis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합니다(같은 페이지 중반부). 이에 저자는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는데, 에를레프니스를 에어파룽으로 전환하기를 어려워하는 대중이, 공동의 기억을 와해시켜 가며 마침내 폭력성으로 전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p182). 이를 두고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야만성의 시대를 논하며, 바로 이 개념에 착안한 게 저자의 "정체성 위기"라는 겁니다. 독자인 제가 주관적으로 정리하면, Erfahrung은 보편적 가치를 담은 경험, Erlebnis은 분개와 원한이 그대로 녹은 미성숙한 체험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네요.

이제 다시 이념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역사의 종말을 어떤 이념의 종말로 인식한 건 당시 미디어와 대중의 오해이며, end는 종말이라기보다 목표, 도착지점에 가깝다"고 합니다. ㅎㅎ 솔직히 저는 고개가 갸웃해지지만 이 저자께서 젊은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를 분석틀 중 하나로 줄곧 사용해 온 것은 사실이며 이 책에서도 요소요소 전통적 좌파 사회과학 키워드가 기본 프레임으로 인용됩니다. 이제 논의는 기존의 좌파, 우파 정치 진영이 이런 현상을 어떻게 대처할지로 이어집니다. "빚을 내어서라도 명품을 걸쳐야 한다"는 많이 모자란 허영심을 정체성, 존중감의 일부로 삼는 낙오자가 만연한 사회 역시 결코 정상이 아니며, 좌파 우파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현실 대응 능력과 균형 잡힌 인식을 어떻게 함양할지에 대해 이른바 지도자들이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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