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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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든 늙든 우리가 왜 이렇게 아픈지 이젠 알 것 같다. 자기 존재에 주목을 받은 이후부터가 제대로 된 내 삶의 시작이다. 거기서부터 건강한 일상이 시작된다. - P47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뛴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 P50

다 가진 자는 금은 넘쳐나는데 쌀은 한줌도 없는 이상한 기근을 겪는다. 금이 없어도 쌀이 있으면 살 수 잇지만 금이 산더미같이 있어도 쌀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존재에 대한 주목이 삶의 핵심이라는 사살을 모르고 질주하다 보면 현실에선 아무 쓸모도 없는데 사이버 세상에선 떼부자인 다 가진 자처럼 되기 십상이다. - P67

의사는 심리 검사를 해야 한다, 우울증이다, 약을 먹아야한다는 의학적 판단에 집중하느라 예전에 엄마가 그랫던 것처럼 아이의 존재 자체에 주목하는 일을 뒤로 미뤘을 가능성이 있다. (중략) 의사뿐 아니아. 상담 교사는 자살 충동이라는 지표에서 겁을 먹었고 엄마에게 배턴을 넘겼다. 엄마는 더 나은 전문가를 찾는 일에 매달렸고 의사에게 다시 배턴을 넘겼다. 그러는 동안 교사와 엄마의 시선에서 아이는 사라졌다. - P73

아이는 자기 존재의 상태를 주목해 주고 알아주는 사람을 찾지 못한 채 기진맥진한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 옆의 어른들은 수건 돌리기하듯 아이의 고통을 다음 사람에게 순차적으로 넘기고 있었던 셈이다. 상담 교사는 부모에게, 부모는 정신과 의사에게, 정신과 의사는 약물치료와 다음 만난ㅁ으로 공을 넘겼다. 이런 행태는 ‘일상의 외주화‘이다. - P76

인간의 마음이나 감정은 날씨 같다.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화창하고 맑다가 바람이 불기도 하고 태풍이 몰아치기도 한다. 예고 없이 지진이 일어나기도 하고 쓰나미가 덮치기도 한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지개가 걸린다. 모른 체하는 데 일등이 있다면 날씨가 그렇다...중략...감종도 그렇다.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감정은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중략...그러므로 우울은 질병이 아닌 삶의 보편적 바탕색이다. - P86

무기력은 은회 후 우울증이라는 병인가. 해결하고 극복할 과제인가. 아니다.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순하게 수용해야 할 삶의 중요한 감정이다. 은퇴 후에 이런 감정이 없다면 그게 외려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다. 퇴직 후에도 여전히 방부제를 많이 넣어서 썩지 않는 햄버거처럼 퇴직이라는 삶의 자연적인 흐름을 무언가로 계속 막다 보면 결국에는 터진다. 어차피 한 번은 직면하고 받아들여야 할 섦의 중요한 숙제를 계속 뒤로 미루다 보면 이자까지 붙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 P87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직장 생활은 과장하자면평생 감옥에 있다 출소하면서 눈부신 햇빛에 눈을 찡그리는 출소자같은 상태다. 감방을 나온 사람의 눈동자에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홍채라는 조리개 기능으로 일단은 차단하듯, 너무 많은 시간과 자유와 자극으로부터 당분간은 주춤거린 채 있어야 한다고 알려주는 신호다. - P88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감정들은 삶의 나침반이다. 약으로 함부로 없앨 하찮은 것이 아니다. 약으로 부조건 눌러버리면 내 삶의 나침반과 등대도 함께 사라진다. 감정은 내 존재의 핵이다. - P92

내 생각이 옳은가 아니면 내 감정이 옳은가. 감정이 항상 옳다. ‘나‘라는 존재의 핵심이 위치한 곳은 내 감정, 내 느낌이므로 ‘나‘의 안녕에 대한 판단은 거기에 준해서 할 때 정확하다. - P103

내 직장 이야기보다 직장에 대한 나의 느낌이 더 나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내 취향이나 기호도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도 내 몸에 걸친 옷이나 액세서리에 해당하는 것이다. 내 견해나 신념, 내 가치관도 그렇다. 내 견해, 신념, 가치관이라 함주어 말하는 것들 대부분 사실 그 시원은 ‘나‘가 아닌 다른 곳에서 유입된 것이 대부분이다. - P104

내 상처의 내용보다 내 상처에 대한 내 태도와 느낌이 내 존재의 이야기다. 내상처가 ‘나‘가 아니라 내 상처에 대한 나의 느낌과 태도가 더 ‘나‘라는 말이다. - P105

언제나 나를 놓쳐선 안 된다. 언제나 내가 먼저다.
...중략...
공감은 내 등골을 빼가며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이 아니다. 그 방식으론 상대를 끝까지 부축해 낼 수 없다. 둘 다 늪에 빠진다. 공감은 너를 공감하기 위해 나를 소홀히 하거나 억압하지 않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 P120

공감은 그저 들어주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듣는 일이다. 정확하게라는 말은 대화의 과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공감에는 과녁이 있다......공감적 대화의 과녁은 언제나 ‘존재 차제‘다. - P132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과 공감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대한 인정과 주목을 존재에 대한 주목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에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먹어도 기대만큼 포만감이 없다. 물론 존재 자체에 대한 공감도 없고, 오른 석차에 대한 반응도 없는 무관심보다는 낫다. 하지만 밥 없이 반찬으로만 배를 채운 사람처럼 아무리 많이 먹어도 편안한 포만감이나 포만감으로 인한 안정감이 없다. 반찬으로만 채운 배는 한계가 있다.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과 공감은 갓 지은 밥 같은 것이다. 잘 지은 밥이 있으면 간장 하나만 가지고도 든든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밥이 기본이라서다.
공감은 누군가의 불어난 재산, 올라간 직급, 새로 딴 학위나 상장처럼 그의 외형적 변화에 대한 인정이나 언급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씀에 대한 반응이다. - P142

내 공감을 포갤 곳은 생각과 행동이 아니라 마음, 즉 감정이다.
...중략...
자기 마음이 공감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이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기 마음이 온전히 수용되었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옳다‘는 명제는 언제나 옳다. - P161

그러나 성인 간의 관계는 다르다.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지만 나만 잘한다고 되지 않는다. 상대가 감당해야 할 몫도 있다. 그것까지 내가 짊어질 이유는 없다.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 어떤 관계에서든 납득할 수 없는 심리적 갑을 관계가 일방적이고 극단적으로 계속된다면 이런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것이 더 건강하다. 우선 내 건강성을 지켜야만 나중을 기약할 수도 있다. - P171

공감은 모 아니면 도가 아니다. 엄마가 담배 피우는 것을 허용하고 공감해 줬다고 담배까지 사다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담배를 사다 주지 않았다고 담배 피우는 것을 허용한 엄마가 아닌 것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두 사안은 별개다. - P195

사람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껴야 자신이 놓인 상황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공감에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사람은 믿어도 되는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일한 역할이 그것이다. 온 체중을 다 실어 아이를 믿어주면 그게 어떤 일이든 본인이 오히려 ‘내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는 건 아닌가‘ 열심히 고민한다. 안전하면 입체적이고 온전한 성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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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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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있는 재료만 가지고 거기 맞춰 집을 짓듯이 기억을 꾸미거나 다듬는 짓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글짓기를 해보았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집의 규모와 균형을 위해선 기억의 더미로부터의 취사선택은 불가피했고, 지워진 기억과 기억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 주기 위해서는 상상력으로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가의 말중에서 - P6

저녁 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서 보면 낯설듯이. - P28

사랑마당과 뒷간이 있는 텃밭사이를 흐르는 개울은 뒤란 개나리 울타리 밖을 휘돌아 내려오는 거였다. 뒤란은 또한 안방 머리맡이기도 해서 장마철엔 물소리가 콸콸 시끄럽게 들렸다. 보통 때는 조잘대는 것처럼 유쾌하게 들릴 적도 있고, 졸졸졸 귀기울여도 들릴락 말락 할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물이 넘치거나 마른 적은 없었다. 겨울에도 가장자리만 얼고 가운데는 쉬지 않고 흘렀다. 가장자리의 얼음장은 별의별 신기한 무늬로 아롤겨렸었다. 추운 줄도 모르고 환상적인 모양의 살얼음을 깨트려서 입 속에 넣고 아삭거리면 핏줄까지 씻겨 내려가는 것처럼 상쾌했다. - P57

가장자리에선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일이 잘 보였고. - P73

나는 숨넘어가는 늙은이처럼 헐벗고 정기 없는 산을 혼자서 매일 넘는 메마른 고독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추억을 만들고, 새울 아이들을 경멸할 구실을 찾았다. - P76

더위가 퍼지기 전 이른 아침 이슬이 고인 풍성한 이파리 밑에 수줍게 누워 있는 애호박의 날씬하고도 요엄한 자태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은 또 어떻고. 못생긴 걸 호박에 비기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도시 사람들이 지어 낸 말이다. 늙은 호박에 비한 거라고 해도 그건 불공평하다. 사람도 의당 늙은이하고 비교해야 할진대 사람의 노후가 늙은 호박만큼만 넉넉하고 쓸모있다면 누가 늙음을 두려워하랴. - P97

내 꿈의 세계 창 밖엔 마루나무들이 어린이 려람실의 단층 건물보다 휠씬 크게 자라 여름이면 그 잎이 무수한 은화가 매달린 것처럼 강렬하게 빛났고, 겨울이면 차가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힘찬 가지가 감화력을 지닌 위대한 의지처럼 보였다. 책을 읽는 재미는 어쩌면 책 속에 있지 않고 책 밖에 있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창 밖의 하늘이나 녹음으로 보면 줄창 봐 온 범상한 그것들하곤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사물의 그러한 낮섬에 황홀한 희열을 느꼈다. - P135

그때까지의 독서가 내가 발붙이고 사는 현실에서 붕 떠올라 공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재미였다면 새로운 독서 체험은 현실을 지긋지긋하도록 바로 보게 하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 P181

감수성과 기억력이 함께 왕성할 때 입력된 것들이 개인의 정신사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듯 결정적이라는 걸 생각할 때, 나의 그런 시기의 문화적 환경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너무도 척박했었다는 게 여간 억울하지가 않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밑바닥 가난 속에서도 드물게 사랑과 이성이 조화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덕이었다고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강경애의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 - P182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도처에 범람했지만 별안간 그 눈부신 걸 바로 보기엔 우리가 눈을 뜬 지 불과 얼마 안 돼 있었다. - P195

실상 그때 우리가 날뛴 것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닌, 학교 재단문제일 수도, 미 군정이 밀가루나 드롭스처럼 흥청망청 쏟아부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앓은 배탈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었다. - P196

텃밭이 거기 있음으로써 그건 귀가가 아니라 귀향이 될 터였다. - P227

단박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갈 만큼 승승장구할 때 승자가 과연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 필요가 있었을까. 승리의 사간은 있어도 관용의 시간은 있어선 안 되는 게 이데올로기의 싸움의 특성인 것 같다. - P260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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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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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나는 고백한다.

박완서 작가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한국문학에서 꼭 알아야 하는 몇 분의 소설가가 있다. 토지의 박경리가 그러하고 태백산맥의 조정래, 조세희, 황석영, 그리고 수 많은 한국문학에 한 획을 그은 소설가들. 그 중에 박완서가 있다.

아주 오래 전 MBC에서 <미망>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었다. 박완서의 작품이라고 했다. 드라마 앞 부분을 몇 편 시청했는데 개성 큰 상단의 외동 손녀딸이 상단의 주인인 할아버지가 죽고 상단을 맡아 이끄는 내용이었다. 손녀딸의 엄마가 집 안의 종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드라마 초기 에피소드를 보곤 박경리의 토지와 비슷한다고 생각을 하고는 원작자인 박완서에 대하여 그만 편견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박완서의 작품을 절대 읽은 적이 없었다.

 

우연히 듣게된 이남희 작가의 수필쓰기 수업에서 아주 여러 번박완서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물론 주로 좋은 쪽이다. 수업을 통해 이남희 작가가 좋아졌다. 그런 이남희 작가가 수없이 언급한 작가라니, 내가 편견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박완서 작가의 수많은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그 많은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골랐다.

 

작가의 말 2쪽과 1장 '야성의 시기' 25쪽을 읽고 나니 내 오해와 패배가 확실해졌다. 모든 장을 다 읽고는 나는 그저 작가에게 경탄을 넘어 외경심까지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작가가 단지 기억에만 의존하여 쓴 작가의 유년시절에 대한 자전적 소설이다. 자서전도 아니고 "기억"에만 의존하여 쓴 "소설"이다. 분류가 참 애매할 듯도 하다. 기억에만 의존해서 썼다니 자서전일 듯도 하고 작가가 소설이라고 작가의 말에서 스스로 말했으니 소설일 수도 있겠다. 시대의 흐름 순으로 기술되기는 했어도 어찌보면 수필로 분류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듯 분류가 모호한 책이지만 분명한 것은 책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약 7살 무렵쯤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작가가 20살이 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까지 약 13~4년을 다루고 있다. 작가의 유년시절이면 1930년대 후반과 가장 혹독했던 일제시대인데도 작가가 아직 철없는 아이때라 그런가 유년의 기억은 시골 마을에서 해맑게 자연과 친구들과 뛰어놀던 이야기들이다. 나와는 40년이 넘는 시간의 틈이 있는데도 나 역시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가 작가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읽으면서 충분한 공감과 이해를 하였다. 특히 시골에서 서울로 학업을 위해 이사를 하고 서울 아이들의 생활과 시골에서의 작가의 생활을 비교하는 부분에서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여 도시 아이들과 대면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격한 공감을 했을 것이다. 시골에 있다가 도시로 가면 처음에는 도시의 휘황찬란함과 새로운 번잡함에 잠깐 기가 죽기는 하나 얼마 안가 도시 아이들은 모르는 시골 생활의 풍부함, 흡족감에 표시는 내지 않지만 남몰래 우쭐해하는 것이 있다. 도시 아이들에게 말은 안하지만 '우리는 너희가 모르는 놀이와 추억과 즐거움이 있어. 너희는 평생 절대 모를 걸. 하지만 나는 알고 있고 또 평생 추억할 수 있지. 아, 꼬셔라~'라는 은밀한 우쭐감과 자랑스런 비밀을 시골 출신들은 다들 가지고 있는데 박완서도 나와 같은 이런 기분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이 박 작가의 가족들 이야기인데 그 중에서도 할아버지와 엄마 이야기가 많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박완서 작가는 할아버지를 아비처럼 믿고 의지하며 자랐도 할아버지 또한 아비없이 자란 손 귀한 집 손녀딸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만큼 귀여이 여기며 키웠다. 오죽하면 할머니가 애 버릇없이 키운다고 남편인 박작가의 할아버지에게 지청구를 할 정도였을까. 할머니에게도 박작가는 귀한 손녀였음은 매한가지였을텐데 말이다. 그만큼 할아버지와 박작가는 긴말한 유착 관계가 형성된 특별한 가족이었기에 작가의 유년과 청소년기에 많은 영향을 끼첬다.

 

엄마, 엄마라는 존재는 참 한 인간의 성격 형성과 인격 됨됨이에 끼치는 영향이 너무도 지대하여 모성애가 중요시되는 것이 음모라고 가끔씩 반박하는 나조차도 많은 부분 엄마의 영향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딸들은 특히 엄마에 대한 애증의 산과 골이 더 높고 깊게 마련이다. 박완서 작가도 그의 많은 작품에서 엄마를 소재를 쓴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이번 작품을 통해 인지하게 되었다. '엄마의 말뚝'은 연작으로 까지 나왔다.

박작가의 엄마는 남편의 죽음으로 인하여 시골의 무지에서 탈출하고 도시와 문명을 따른다. 자식을 남편과 같은 꼴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이 송도 그 시골에서 시부모의 반대까지 무릎쓰고 자녀들은 대처에서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지켜내었다. 삯바느질로 연명하여 아들과 딸(박완서)을 서울로 전학시키고 서울대로 입학시켰다. 요즘 시대로 하면 극성 학부모인 셈이다.

 

김대중 자서전에서도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어머니가 아이는 꼭 공부를 많이 시켜야 하고 시골이 아닌 큰 도시에서 공부시켜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 김대중 대통령이 국민학교다닐때 신안의 조그만 섬에서 목포로 이사를 나갔다. 생계 수단이 없었는데도 오로지 자식 교육때문에 가족이 이사를 한 것이다. 박완서 작가의 엄마도 같은 케이스였다.

양쪽 다 어쨌든 세속된 기준으로 보면 세상에 이름을 남겼으니 이 두 어머니들 모두 자식 교육에 성공한 셈이던가.

 

박 작가 엄마의 에피소드를 읽을 때 김대중 대통령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우리 엄마 아버지도. 우리 집도 역시나 넉넉한 형편이 안되었고 자녀의 학업에 그리 신경을 쓴 집이 아니었다. 그저 고등학교까지만 마쳐주면 제 입에 풀칠이나 하면 만족하는 집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학을 가겠다고 바득바득 우겼고 여자아이가 집을 떠나면 큰일나는 줄 알았던 우리 아버지 엄마는 동네 가까운 학교를 겨우 허락하셨다. 그 때 내가 만약 대처로 공부하러 갈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하는 아주 쓰잘데기 없는 공상을 두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잠깐 하였다. 마찬가지로, 지금 엄마가 된 내 입장에서는 아이들 교육에 조금 더 신경을 썼다면 우리 아이들 역시 미래와 선택이 좀 달라졌을까는 생각도 하였다. 부모에 대한 아쉬움과 자식에 대한 미련은 언제 어느 세월에서도 없어질 수는 없는것일 거다.

 

한동안 해외고전문학을 많이 읽다가 우리말로 된 소설을 읽었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엄마를 통해 습득한 언어가 왜 모국어인지 확연히 알수있었다. 단어 하나 하나가 별 생각과 설명없이도 가슴 속에 콕콕 박히고 묘사 한줄 한줄은 마치 내가 언제 어디선가 본 것같이 그림이 그려진다. 국어가 한국말이 자연스럽게 내 몸에 내 정신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말이 이렇게나 아름답고 묘사가 풍부한 언어였던가.

 

물론 이것은 한국어의 차원 높음도 있겠지만 이 차원높은 언어를 담백하지만 격조있게 아주 썩 잘 써낸 작가의 위대함이렸다. 글을 써보기로 하고 읽은 우리말 소설, 박완서의 국어는 '그래 나도 할 수 있어'와 '어떻게 하면 이런 언어를 생각하고 그릴 수 있을까'하는 근거없는 자신감과 감히 넘어볼 수 없는 벽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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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사계절 1318 문고 36
라헐 판 코에이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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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쓴이 라헐 판 코에이는 특수교육을 전공한 장애인 복지에 관심이 많은 작가이다. 소설을 읽었을 때 작가가 전문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의 완벽한 어울림때문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은 너무도 유명해서 누구나 한번은 보았음직한 그림이다.

스페인 펠레페 4세와 그의 딸 마르가리따 공주가 있고 공주를 그리는 벨라스케스 화가 자신 역시 그림 속에 조그맣게 그려져 있다. 마르가리따 공주 옆에는 못생긴 난장이 여자와 남자가 각각 오른쪽에 서있고 공주의 왼쪽에는 공주의 시녀로 보이는 여자가 한명 무릎을 꿇고 공주를 향해 앉아있다. 가운데 뒤쪽에는 조그맣게 펠리페왕와 왕비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어 그림을 보는 관객은 벨라스케스가 그림을 그리는 주인공은 펠리페 왕과 왕비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여 준다. 그리고 공주의 오른쪽 아래에 갈색의 큰 개가 한 마리 앉아 있고 남자 난장이가 개의 등을 밟고 서 있다.

이것이 <시녀들>의 그림이다.

 

나는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이쁜 공주를 그렸나보다고 생각했다. 공주만 하얀 빛으로 색칠되어 있고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흔히 중세의 주인공은 왕자나 공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벨라스케스가 이쁘고 아름다운 공주를 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주의 주위를 둘러싼 시녀들은 예의있고 공주를 충실히 모시는 사람들이라기 보다 광대같은 못생긴 난장이들이다. 그것을 보고 화가가 왜 이런 시녀들을 그림에 그렸을까? 좀 더 정숙하고 건실한 시녀들도 많았을텐데 이 난쟁이는 너무 못생겨서 그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나의 예술적 안목은 딱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이 그림에서 난 전혀 집중하지 않았던 큰 개 - 이 개에 작가는 시선을 집중하고 개를 주인공으로 하나의 근사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자신의 전공인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의 시대적 배경인 펠리페 국왕과 마르가리때 공주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과하지 않게 가미하여 한 치의 어긋남도 없고 넘치지도 않은 이야기를 창작하여 내었다.

 

바르톨로매는 아버지 후안 어머니 이사벨 형 후아킨 누나 후안나 여동생 베아트리스과 마누엘과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는 등이 심하게 굽은 곱추에 키가 작은 난쟁이이다. 중세 시대 난쟁이 곱추라 주변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했을지 가히 상상이 된다. 스페인 시골에 살던 바르톨로메 가족은 마드리드로 이주하게 되고 후안의 지시로 바르톨로메는 집 밖을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다. 그런 바르톨로메는 형 후아킨과 누나 후안나의 도움으로 수도사에게서 글자를 배우게 되지만 사고로 마르가리따 공주의 눈에 띄게 되면서 공주의 장난감이 된다. 여기서 장난감은 바로 '인간개' 바르톨로메의 생김새때문에 5살의 공주는 그를 인간개로 만들고 이미 궁중에서 공주의 친구노릇을 하고 있던 여자 난쟁이와 남자난쟁이에게서 많은 구박을 받으며 진짜 개같은 취급을 받게 된다. 이러는 와중에 바르톨로메는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벨라스케스의 도제 화가와 벨라스케스의 도움으로 마침내 공주의 인간개 노릇을 마치고 화가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시녀들>이라는 그림과의 연관성을 배제하고 위의 스토리만 본다면 약간은 흔한 장애 소년의 성장담일 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장애와 특수교육에 관심이 많은 한 사람이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보고 특히 '개'에 집중을 하여 바르톨로메라는 인물을 창조해내고 바르톨로메가 실존 인물인 펠리페 국왕, 마르가리따 공주 그리고 벨라스케스를 접촉하면서 빚어내는 이야기가 마치 역사 속 실제의 한 장면을 떼어다가 그대로 서술한 듯한 느낌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전문 작가가 아닌 작가의 상상력과 스토리텔링 능력에 그저 감탄만 할 뿐이었다.

 

작가는 유명한 그림에서 장애를 가진 인물을 끄집어 내어 우리가 갖고 있는 장애에 대한 편견을 일깨우고 그것이 얼마나 편견일 수 있는지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있는지를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작품에서 바르톨로메의 아버지 후안은 타인으로부터 받을 조롱을 걱정하여 아들을 집안에만 가두려 하였다. 부모인 나는 후안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고 나라도 후안과 다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작가는 제목에서부터 메세지를 전했다.

곱추난쟁이 바르톨로메는 마르가리따 공주의 '인간개'가 아니다.

그는 개가 아니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닌 하늘이 똑같은 권리를 부여한 인간이다.

 

후안과 같은 실수를 할만한 나는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되새김질하여야 나도 제대로 된 인간이 될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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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모던 컬렉션 시리즈 4
에밀리 브론테 지음, 송근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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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소설이 고전소설이다. 폭풍의 언덕을 생각한다면, 위의 명제가 참인것도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어릴 적 읽었던 아주 좋아하는 만화 중에 '유리가면'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한국 작가의 작품인 줄 알고 읽었으나 실상은 일본 작가 '미우치 스즈에'의 작품이었는데 이 만화는 연극을 소재로 한 어느 소녀의 성장 만화이다. 이 만화에는 아주 많은 고전 작품들이 연극으로 재현되어 있었는데 '폭풍의 언덕'도 그 중 한 작품이었다.

 

'유리가면'에서 남여 주인공이 연기했던 캐서린과 히드클리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보고 원작소설을 꼭 한번 읽어보리라 생각했었는데 '유리가면'을 통하여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서는 마치 책을 다 읽은냥 아는체를 했었다. 만화책을 통해서 본 줄거리와 느낌으로는 우울한 워더링하이츠 저택의 주인이 주워 온 히스클리프라는 우울한 아이와 그집 딸 캐서린이 서로 서랑에 빠지지만 다른 이의 방해로 둘의 사랑은 이어지지 못하고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완역판을 읽어보니, 내가 알고있던 내용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맞는 내용은, 1.히스클리프는 주워 온 우울한 아이이다. 2.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서로 아주 사랑했다. 3.둘의 사랑은 이어지지 못하고 캐서린이 죽는다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줄거리는, 1.다른이의 방해로 사랑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남자를 선택한 것은 캐서린 본인의 선택이었다. 2. 우울하고 비실대는 줄 알았던 히스클리프는 실상은 아주 못됐고 자기중심적인 사디스트이며 성격파탄자이다. 3.캐서린과 히스클리프 외에 캐서린의 딸 캐시, 히스클리프의 아들 린튼, 캐서린의 오빠인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까지 개성있고 주요한 다른 인물들도 많고 그들의 이야기도 상당 부분 차지한다는 것이다.

 

줄거리를 상세히 나열할 필요까지는 못 느끼겠다. 다만 한 가지 이 책을 읽고 드는 생각 하나는 정리를 하고 싶다.

 

이 책은 1847년에 씌여졌다. 이 보다 앞선 제인 오스틴이 쓴 소설 <오만과 편견>은 1813년 작품이다. <오만과 편견>과 <폭풍의 언덕>은 약 30년의 차이가 난다. 멀다면 먼 세월이긴 하지만 영국 귀족 사회의 세태가 바뀌기에는 부족한 세월일 것이다. 즉, <오만과 편견>의 시대나 <폭풍의 언덕>의 시대나 여성들의 삶에 있어서는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 사랑의 씨앗은 바로 아버지의 재산 상속이 이뤄지지 못했던 19세기 영국 사회의 열악한 여성의 지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비극적 사랑의 씨앗이 발아하여 쑥숙 자라 비극적 결말을 불러온 것도 시대의 부조리때문이라 생각한다.

 

캐서린 언쇼는 아버지가 주워 온 히스클리프를 사랑했다. 그가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현실은 현실. 우울하고 무식하고 너무 가난한 히스클리프와 사랑만으로 미래를 그리기엔 당시 영국의 여성이 처한 현실은 암담했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와 결혼이라도 한다면, 그녀는 사랑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생활을 해야하고 영국의 농노나 하녀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해야할 수도 있었다. 캐서린에게는 이것이 감당이 안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편안한 선택을 했다. 잘생기고 돈도 많고 캐서린을 너무도 사랑하는 썩 괜찮은 남자 에드거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부터 히스클리프는 캐서린과 에드거, 즉 워더링 하이츠 가문과 드러시크로스 가문에 대한 복수를 꿈꾸었다.

 

여성에게 재산이 상속이 가능했더라면 캐서린은 편안하지만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았었을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아버지가 죽고 오빠가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상태에서 사이가 안좋았던 오빠 힌들리와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는 힌들리로부터 어떤 은혜도 받지 못할 것은 뻔했고 캐서린은 오빠의 호의가 아니라면 역시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오만과 편견>에서 의탁할 아들이 없은 베넷부인이  4명의 딸의 혼사에 그렇게 목숨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딸이든 부인이든 남성끼리만 가능한 재산의 분배, 유산의 상속. 돈있는 사위, 돈있는 아들이 아니라면 부인과 딸들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선택했어야 했어라고 말한다면 캐서린에게는 억울한 말일 수도 있겠다. 때로는 극복하지 못하는 시대적 한계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불굴의 의지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사랑을 쟁취했어야지라는 단선적인 요구는 시대를 모르는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의 오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캐서린의 선택은 히스클리프의 삐뚤어진 복수를 부르고 양쪽 집안이 다 망가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 모든 결과를 초래한 원인인 히스클리프 역시 그 시대의 남성이 갖는 시대적 한계에 대한 책임은 지는 법. 그 역시 평생 먼저 죽은 캐서린의 망령을 떨치지 못하고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을 보면 에밀리 브론테는 그래도 한가닥 희망은 놓치는 못했나보다. 캐서린의 딸 캐시는 사촌(캐서린의 오빠 힌들리의 아들)헤어튼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비록 헤어튼이 무식하고(히스클리프가 복수때문에 가르치지도 대우해주지도 않았다)천박하고 교양없고 돈도 없지만 헤어튼과 결혼을 결심하였다. 이것만으로도 캐시에게는 큰 결심을 한 것이다. 에밀리 브론테는 여성 스스로의 선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접 말로는 하지 못하고 이렇게 작품 속 캐시의 행동으로 보여주려 한 것이 아날까 한다.

그리고 히스클리프의 갑작스런 죽음과 유언장으로 히스클리프가 가졌던 모든 재산과 두 저택은 캐시와 헤어튼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나마 작가는 희망과 여운을 남기려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나는 '폭풍의 언덕'의 서글픈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작품이라기 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의 비극적 처지와 한계를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로 돌려서 이야기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단지 표현이 <오만과 편견>은 밝고 쾌할하며 현명한 선택을 하는 여성 캐릭터로 신데렐라가 되는 과정을 그렸다면 <폭풍의 언덕>은 치기어린 사랑과 변덕적인 선택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여성 캐릭터를 그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에밀리 브론테가 가여워졌다. 시대를 앞선 두뇌로 과거속을 살아가는 기분이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허난설헌처럼. 나는 앞서기는 커녕 뒤처지지 않을려고 발버둥치는데도 힘든데 누구보다 힘든 삶과 고뇌가 느꼈을 그녀들에게 별 쓸데없을 내 위로와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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