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번에는 있는 재료만 가지고 거기 맞춰 집을 짓듯이 기억을 꾸미거나 다듬는 짓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글짓기를 해보았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집의 규모와 균형을 위해선 기억의 더미로부터의 취사선택은 불가피했고, 지워진 기억과 기억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 주기 위해서는 상상력으로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가의 말중에서 - P6

저녁 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서 보면 낯설듯이. - P28

사랑마당과 뒷간이 있는 텃밭사이를 흐르는 개울은 뒤란 개나리 울타리 밖을 휘돌아 내려오는 거였다. 뒤란은 또한 안방 머리맡이기도 해서 장마철엔 물소리가 콸콸 시끄럽게 들렸다. 보통 때는 조잘대는 것처럼 유쾌하게 들릴 적도 있고, 졸졸졸 귀기울여도 들릴락 말락 할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물이 넘치거나 마른 적은 없었다. 겨울에도 가장자리만 얼고 가운데는 쉬지 않고 흘렀다. 가장자리의 얼음장은 별의별 신기한 무늬로 아롤겨렸었다. 추운 줄도 모르고 환상적인 모양의 살얼음을 깨트려서 입 속에 넣고 아삭거리면 핏줄까지 씻겨 내려가는 것처럼 상쾌했다. - P57

가장자리에선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일이 잘 보였고. - P73

나는 숨넘어가는 늙은이처럼 헐벗고 정기 없는 산을 혼자서 매일 넘는 메마른 고독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추억을 만들고, 새울 아이들을 경멸할 구실을 찾았다. - P76

더위가 퍼지기 전 이른 아침 이슬이 고인 풍성한 이파리 밑에 수줍게 누워 있는 애호박의 날씬하고도 요엄한 자태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은 또 어떻고. 못생긴 걸 호박에 비기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도시 사람들이 지어 낸 말이다. 늙은 호박에 비한 거라고 해도 그건 불공평하다. 사람도 의당 늙은이하고 비교해야 할진대 사람의 노후가 늙은 호박만큼만 넉넉하고 쓸모있다면 누가 늙음을 두려워하랴. - P97

내 꿈의 세계 창 밖엔 마루나무들이 어린이 려람실의 단층 건물보다 휠씬 크게 자라 여름이면 그 잎이 무수한 은화가 매달린 것처럼 강렬하게 빛났고, 겨울이면 차가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힘찬 가지가 감화력을 지닌 위대한 의지처럼 보였다. 책을 읽는 재미는 어쩌면 책 속에 있지 않고 책 밖에 있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창 밖의 하늘이나 녹음으로 보면 줄창 봐 온 범상한 그것들하곤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사물의 그러한 낮섬에 황홀한 희열을 느꼈다. - P135

그때까지의 독서가 내가 발붙이고 사는 현실에서 붕 떠올라 공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재미였다면 새로운 독서 체험은 현실을 지긋지긋하도록 바로 보게 하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 P181

감수성과 기억력이 함께 왕성할 때 입력된 것들이 개인의 정신사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듯 결정적이라는 걸 생각할 때, 나의 그런 시기의 문화적 환경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너무도 척박했었다는 게 여간 억울하지가 않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밑바닥 가난 속에서도 드물게 사랑과 이성이 조화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덕이었다고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강경애의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 - P182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도처에 범람했지만 별안간 그 눈부신 걸 바로 보기엔 우리가 눈을 뜬 지 불과 얼마 안 돼 있었다. - P195

실상 그때 우리가 날뛴 것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닌, 학교 재단문제일 수도, 미 군정이 밀가루나 드롭스처럼 흥청망청 쏟아부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앓은 배탈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었다. - P196

텃밭이 거기 있음으로써 그건 귀가가 아니라 귀향이 될 터였다. - P227

단박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갈 만큼 승승장구할 때 승자가 과연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 필요가 있었을까. 승리의 사간은 있어도 관용의 시간은 있어선 안 되는 게 이데올로기의 싸움의 특성인 것 같다. - P260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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