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으로 세간이 떠들썩하다.

노벨 문학상의 영광을 안은 작가의 작품들이 수면위로 떠오르고, 각 출판사별로 야단법석이다.

작년에도 그랬던것 같다. 먼로의 작품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고, 그녀의 책을 읽지 않으면 안될것 같은 분위기까지 느꼈다.

사유와 지성의 깊이와 척도를 가늠하는 노벨상 수상작 읽기였을까?

너도 나도 선물을 하고 읽어대고 주체할 수 없는 감동에 환호를 질러대곤 했다.

미욱하기 이를데 없는 천박한 독자였던 나는 먼로의 책을 펼쳤다 이내 덮어버렸다.

번역이 문제였을까? 투박하고 거친 번역체와 도무지 이입이 안되는 서사에 기대만큼의 실망과 지루함을 느끼고, '아, 나는 노벨상 수상작을 읽어낼 만큼의 깜냥이 안되나봐'라는 자조적인 평가를 내리고 말았다.

여튼, 이번에도 어김없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이 떠들썩하다.

이미 읽었던 것이라 다행이다 싶다. 최소한 과도한 기대나 영광스러움에 몸서리칠 일은 없을테니 말이다.

 

  언젠가 엄청난 세일을 할 때였을거다. 그때 묶음으로 몇권 같이 주문해서 읽게 되었었다.

 흰 표지들로 이루어진 여러 전집들 사이에 검은 표지로 테마를 잡은, 이 시리즈가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 때 같이 온 책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책을 주문할 당시 어떤 일관성이 작용했는지 사뭇 궁금해진다.

  이렇게 고르게 된 데는 필시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문학상은 그렇고..

우리 나라도 존경받지 못하고 폄하되고 조롱받는 평화상 수상자가 있었다. 충분히 축하받아야 마땅하고 기억됨이 정당하고 찬사를 보내야 함에 분명한 일임에도 힘있는 자들은 이 상의 수상내용과 업적을 가리기에 급급하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임에도 이렇게 조롱당하고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유일하지 싶다.

오죽했으면, 한국에는 더 이상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없을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일까?

이번 평화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역시 중동이다.

중동의 종교적, 정치적문제들이야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으며, 그 지난한 내분의 과정을 오래도록 보아온 탓에 한켠 '그러려니..'또는 '여전하군..'하는 식으로 깊이 있게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IS의 참수 사건으로 여론의 집중을 받게 되면서 그들의 싸움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참담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가.

그 땅에 태어난 것이 축복일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태어남'의 책임이 너무나 잔혹한 것은 아닌가.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속을 스쳤다.

 

 

  얼마전 읽게 된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그리고 어제부터 모든 도서관련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나는 말랄라'

 이 두 책이 절묘하게 입속에서 꼬인다.

라말라, 말랄라...

말랄라의 책은 다양하게 출판되어져 있다.

 

 

 

 

 

 

 

 

 

 

 

 

 

 

 

 

 

 

 

 

문학동네의 말랄라가 제일 갸름한 얼굴을 하고 있다. 예쁘긴 하지만, 다른 표지들이 더 정감이 간다.

또다른 수상자인 카일라시 사티야티. 더불어 읽어볼 만한 책들이 생각났다.

 

 

 

 

 

 

 

 

 

 

 

 

 

 

 

SNS에서 어떤분의 말이 떠올랐다.

문학동네는 노벨출판상인가보다..라는.

논란도 많고 문제점도 다각도로 지적되고 있는 출판그룹이지만, 그러면서 성장하리라 본다.

모질게 잘라내고 다듬어야할 일이다. 가끔은 오래 주물럭거린다고 좋은 것이 나오진 않는다. 단칼에 베어내고 다듬어야 할 일도 있다. 오래 주무른 것은, 신선하지 않다. 신선한 건강함을 추구한다면, 비겁한 변명을 배우기보다 단호함을 배우면 좋겠다.

 

이번 기회에 중동에 대한 집중이 시작되었을 때, 좀 더 많은 작가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친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 그 암울한 시기에 우리나라 문학의 큰 뿌리들을 만났던 것 처럼 말이다.

 

여성과, 아동과, 종교와 지역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 이런 것들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문득,

이란과 인도보다 우리가 나은게 뭘까?를 생각해본다.

생각만 해본다.

 

책이나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하세요. 영성/인문 출판 브랜드 판미동 입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신간, 『나의 눈』이 오늘 (10/10) 출간되었습니다.


『의식 혁명』에 이은 호킨스 박사의 또 하나의 역작!

삶의 진실을 바라보는 눈을 갖고싶다면 주저말고

『나의 눈』의 서평단 신청을 부탁드립니다.





나의 눈』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여는 법




의식 수준 이론의 핵심을 명확히 꿰뚫는,

삶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가장 상세하고도 주관적인 보고서



이 책은 호킨스 박사 이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의식 수준과 운동역학을 이해하기 위한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또한 생각과 감정, 경험과 습관 등 우리의 내면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어리석고 모호한 것들을 분명하게 밝히는 도구로서, 깨달음을 정의하고 깨달음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친절히 설명하는 길잡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그간 호킨스 박사 이론 중 다소 난해하게 여겨 온 ‘이원성과 비이원성 양극의 초월’이라는 내용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학과 종교, 물질주의와 영성, 에고와 영이라는 영적 영역의 오래된 문제 역시 말끔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궁극적으로는 의식이 확장되고 자명한 삶의 진실과 만남으로써 깨달음으로 가는 올바른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이 주제가 되는 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슷한 논조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에게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는 전개되고, 결과적으로 스스로 변화하고 (이는 체제에 순응하고로 읽히기도 한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체제의 문제나 사회정치적인 해결책은 없다. 사회정치적 모순과 체제의 불합리함을 뒤흔들거나 무엇이 개인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가에 대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개인의 의지의 문제로 귀결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계발서에 집중하고 환호한다. 어쩌면 아무리해도 안되는 것에 대한 위로를 받고 싶거나, 글쓴이의 때때로 무례한 지적에 마조히스트적인 대리쾌감을 느끼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무엇이 문제일까? 요즈음 대다수 청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절박함과 결핍으로 점철되어있다.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자격증과 시험을 통과하며 그것들이 삶의 질을 향상시켜줄 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 노력들을 보아주지 않는다. 더 노력하라고, 잘못된 선택이었노라고 야멸차게 밀어내고 있다.

선택,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얼마나 더 있을까?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것을 얻어야만 하겠지만, 그 역시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청춘으로 당연히 아파야할 것들이라고 낭만적으로 조언을 던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먼 훗날 뒤돌아보며 웃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함만으로 살아내라고 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선택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할 수 있는 권리일 수 있다. 자신이 한 선택에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하다. 그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아닌것이었는지는 선택한 주체가 책임을 지는 것이 맞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혹은 처음부터 “옮음”이 전제되지 않은 선택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건 하나를 사는데도 꼼꼼하게 리뷰를 읽어내리고 비교를 하며 가장 좋은 걸 선택하는 것이 요즈음의 추세다. 그렇게 해야만 세상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언젠가 문제가 되었던 가습기 사건이나, 요즘 세간의 문제가 되고 있는 sns 카카오톡의 문제도 그렇다. 그것을 선택하고 사용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것인가?

잘못된 정보와 제품을 제공한 사람들에게 문제는 없는 것인가?

“그러게 왜 그런걸 선택해가지고..”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읽으며 생각해본다.

개인적 행위가 될 ‘선택’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가.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면..

“선택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필수적인 능력이다. 개인이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곧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우리가 선택을 오로지 전적으로 합리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그래서 경제 이론과 소비자의 관점에서 선택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견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을 인간의 정신 및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파악하는 더 폭넓은 이해 방식이 필요하다. (...) 선택이란 관념을 강요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 차이와 인종적.성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선택권은 실제로는 사회적 분할에 따라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 선택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선택 이데올로기가 지금껏 승승장구해 온 원인이다. 그 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관계들을 변화시킬 선택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p209~211)

선택이라는 것이 그 사회의 문화적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선택은 본질적으로 변화를 위한 행위인 것이다. 좀 더 나은, 혹은 좀 더 올바른 것에 대한 바람이 근저에 깔려있는 행위여야 한다. 좀 더 좋은 것을 위한 선택이라면 그것이 도외시되거나 거부되어서는 안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택이 환영받지 못한다.

그 사회 전반을 꿰뚫고 있는 지배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선택, 혹은 집단의 선택을 달가워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좀 더 나은 것을 위한 선택일것이나 이미 기득권을 쥐고 있는 그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반체제라는 딱지를 붙여 사회로부터 그들을 밀어내려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표적인 반공이데올로기가 선택을 강제하고 있는건 아닐까?

쉬운 예로 근로자의 복지와 권익을 향상하기 위한 노동조합의 결성과 가입조차 당연하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시와 우려의 눈총을 받아내야 한다. 어떤 개인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려 할 때, 주변의 반응이 다양하게 나오게 되는 것만 보아도 말이다.

 

어떤 것을 선택했을 때, 그 결과가 긍정적이라면 대부분 비슷한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이라면 대부분은 기피하게 될것이고, 또한 그것이 사회적 지위획득에 걸림돌이 되어질것이라는 불안이 가중되어지면 기득권세력이 아님에도 기득권세력인양 행세하며 보호받기를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선택은 개인의 욕구와 결정이라기 보다는 사회전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통제되고 제어되는 선택이 되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주인은 자신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명제이다. 그러나 그 주인이 진짜 주인이 아닌 권위자나 통념에 사로잡힌 존재라면 삶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 것이다. 권력과 체제의 주입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행해지는 선택은 과연 “나”의 선택인 것인가? 반문해야만 한다. 다분히 개인적이어야 할 행위에 체제와 집단의 이익과 요구가 깔리게 된다면 그것을 올바른 선택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또한 개인의 선택이 발전적 변화를 위한 작은 몸짓이 아니라 고착화된 부정과 부패를 지켜내는 단단한 산성의 벽돌로 자신도 모르게 활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선택은 합리성과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개인의 이익과 성공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가차없이 버려도 좋다는 선택의 의지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기 시작했고, 더불어의 의미는 점점 퇴색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가당찮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어쩌면 우리가 하게 될 선택은 단순하게 설명될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함께” VS “소수의 성공” 혹은 “발전적 변화” VS “수동적 유지”.

단어의 호감도로 보아도 뻔하게 보이는 선택지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그것을 인정해도 좋을지 자신의 상황과 사회적 지위를 계산하고 있는 것 뿐일 것이다. 또는 지금까지 이루어 온 것들에 대한 보호욕구가 발동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루어낸 것인데..

얼마나 어려운 선택들을 하고 현재의 지위에 올라섰을까? 현재를 사는 사람으로써 충분히 납득이 되고 이해도 된다. 그러기에 연민이라는 감정을 갖게 되기도 하는 것일게다.

 

얼마전 어떤 연구결과를 보았다.

“최근 미시간주립대 연구팀은 노력과 선천적 재능관계를 조사한 85개 논문을 대상으로 이 분야 연구 중 가장 광범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그 결과 학습 분야에서 노력한 시간이 실력의 차이를 결정짓는 비율은 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음악·스포츠 등에서는 실력의 차이에서 차지하는 노력 시간의 비중이 20~25%였다. 어떤 분야든 선천적 재능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대가가 될 수 있는 확률은 높지 않다는 결론이다. 또 선천적 재능과 함께 조기교육이 성공의 주요 요인이라고 했다.

미시간주립대의 연구결과는 선천적 재능보다 꾸준한 노력이 대가를 만든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을 완전히 뒤집게 됐다. (2014.7.24다양한 일간지)“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고, 노력의 선택을 강요했던 사회는 재능에 의한 성공을 폄하해왔다. 예를 들면 재능있는 사람들은 게으르다는 식으로 말이다. 과연 그랬는가?

노력하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끝없이 노력하라고, 노력이 부족하다고 강조하던 이들의 말은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과연 노력이 부족해서였는가?

선택이란, 이렇게 비합리적인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선택은 인간이 갖는 가장 숭고한 행위일 수 있다.

하루를 살아내는데도 수천,수만의 선택을 하며 살아낸다. 그 속에 과연 자신의 의지가 온전히 발휘된 선택이 몇 개나 있는지 의문이 된다. 통념과 지배이데올로기에 익숙해진 복종의 선택은 아니었는지, 나의 선택으로 고통을 이어가야했을 이웃은 없었는지 말이다.

자신의 삶의 주인은 자신이듯, 선택의 주도권도 자신이 갖아야 한다.

또한 선택의 근저에는 “더불어 함께 변화 발전하는”이라는 대전제를 작용시켜야한다.

그런 선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할지..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할 수 있다. 그 후회 역시 건강한 선택의 동력이 되어지도록 하는 것 역시 스스로 선택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쉬운 언어와 예시로 농도 짙은 질문과 이야기가 전개되는 책의 구성이 좋다. 레타나 살레츨의 필력과 사상적 기반이야 두말할 것도 없지만, 역자의 시각과 힘 또한 만만치 않았던 책이라고 생각된다.

적당한 분량으로 어렵지 않게 읽히지만 그 무게감만큼은 가볍지 않다.

수없이 반문하고 되짚으며 읽게 되는 책이다.

 

내 선택의 주인은 “나”였는가? 자꾸 되묻게 된다.

"선택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필수적인 능력이다. 개인이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곧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우리가 선택을 오로지 전적으로 합리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그래서 경제 이론과 소비자의 관점에서 선택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견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을 인간의 정신 및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파악하는 더 폭넓은 이해 방식이 필요하다. (...) 선택이란 관념을 강요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 차이와 인종적.성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선택권은 실제로는 사회적 분할에 따라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 선택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선택 이데올로기가 지금껏 승승장구해 온 원인이다. 그 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관계들을 변화시킬 선택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p209~2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적의 세기
캐런 톰슨 워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1. 공통분모

 

어릴 때 그랬다. 방학식을 하는 날이면 방학숙제가 빼곡히 적힌 가정통신문을 보며 방학때는 시간이 천천히 갔으면..하는 바람을 품기도 했다.

일단 학교를 안가도 된다는 여유로움과 아침부터 놀아도 된다는 즐거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숙제의 부담은 즐거운 시간을 하나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과 이어졌고 포기할 수 없다면 시간을 늘이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36시간이나 40시간쯤 되면 얼마나 좋을까? 친구랑 더 오래 놀 수 있고, TV도 더 많이 볼 수 있고, 늦잠을 오래오래 잘 수 있으니 말이다.

그 철없던 바람이 현실이 된다면 어떨까?

살아오면서 누구나 한 두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음직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을 때,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가는 사람을 배웅할 때, 어른이 될 준비가 안되었을 때...등등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적어낸 서평들을 보면서 낮은 탄성을 질렀던 것은, 이런 생각이 특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미래로 향하는 타임머신이 나오는 글이나, 자고 일어났더니 미래에 와있다거나, 혹은 시간이 멈추어버린 순간의 이야기들은 때때로 접해보긴 했지만 시간이 조금씩 늦어진다는 건..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시간이 느려지면 좋겠어. 라고 생각한 것이 "나" 뿐만이 아니었으며 "나쁜"마음도 아니었다는 공통분모를 확인하고 책을 펼쳐본다.

 

#2.

어느 날부터인가 시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한다. 해가 뜨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한낮이나 되야 해가 떠오른다. 지구의 자전이 조금씩 느려진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슬로잉'이라고 불렀다.

특별한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열한살의 소녀 줄리아와 그의 가족들 역시 지구라는 공간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슬로잉으로부터 비껴갈 수 없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한시간은 60분, 하루는 24시간, 일주일은 7일, 한달은 30일, 일년은 12달의 의미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조금씩 느려지는 시간들은 며칠씩 낮이 이어지고 며칠씩 밤이 이어지는 상황에 이르른다. 

시간이 느려짐과 동시에 중력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더 강력한 중력이 작용한다. 일조량을 맞추지 못하니 식물들이 말라가고 식물을 먹이로 삼는 작은 동물들이 죽어가고, ..

연쇄적인 생태계의 파괴가 이어진다.

수천년,혹은 수만년 익숙해진 "하루"라는 싸이클이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변화에 맞게 진화해 온 인류,혹은 인류를 둘러싼 모든 환경들이 맞게 되는 파괴의 시간인 것이다.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공포'이다. 지구의 종말이 찾아올까?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저마다 이 공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종교적인 대안을 따라 움직이거나 생필품을 쌓아두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지구 밖의 어디쯤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느려진 지구 위의 생물체들이 아주 빠르게 집단 이동하거나 집단 페사하고 있지 않았을까?

전쟁 중에도 꽃은 피어났다.

슬로잉의 재앙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라기 시작했다. 이전의 시간들 속에서 익숙하게 지냈던 시간이 아닌, 폭력적이기까지 한 시간을 살아내기 시작한다.

성장을 하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며 위로를 하고 상처를 주고 보통의 아이들이 자라듯 그렇게 성장한다.

물리적 환경의 변화 속에서 사람들의 정서적인 부분도 침해되고 불안하게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끌어안으며 살아낸다.

그 삶의 질이 어떠했는가보다 그 삶의 가치가 어떠했는지를 물으며 말이다.

"존재함"

온전히 그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던 사람들과 줄리아의 이야기가 조근조근하게 그려진다.

 

 

#3. 표지


 

표지가 독특하다. 파란 표지 위에 송송 구멍이 뚫려있다. 커버를 벗기면 여자아이의 옆모습이 그 밑에 있다.

마치 행성들의 군집처럼 노랑과 오렌지색으로 점점이 찍힌 제목과 구멍들을 손끝으로 문질러보면 그 느낌이 좋다.

우주를 표현하고 싶었던걸까?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저 여자아이는 아마 줄리아일지도 모르고, 나와 내가 아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환경의 무자비한 변화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낼 가치가 있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건지도 모르겠다.

책상위에 던져놓고 슥슥 표지를 문지르는 것이 재미있다. 오톨도톨한 느낌..밋밋하지 않은 시간들이 그 사이에 끼여있는것 같다.

 

#4. 그래서.

어쩌면 황당한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르고, 뭔가 공포에 휩싸여 어쩔줄 몰라하는 인간 군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파란 표지가 보여주는 것처럼 단지 '절망'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시간을 늘이거나 줄여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며, 사소하게 생각되는 작은 변화가 가지고 오는 파괴적인 상황에 대한 우려까지 하고 있는가 되묻게 되는 것이다.

여름 장마철..

한 사나흘 비가 내리면 우울감에 몸서리를 치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해야 한다. 그렇게 변화한 환경에 휘둘리는 여린 존재이지만, 어쨌든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아내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 때, 그 곳에 있었음을 자랑스러워해도 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악한 상황에서 만나는 소중함의 의미. 간절함의 의미. 그 의미들이 어떻게 사람을 키우는지도..

 

  



"그 말을 잊지마, 알았지? 인생에는 흑백으로 나뉘지 않는 것도 있어." (p360)



이윽고 두 아이는 젖은 시멘트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지극히 단순한 진실, 그러니까 이름과 날짜 그리고 이 글을 새겼다. 우리는 이곳에 있었다. (p3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읽는 것도 병이라고 했다. 잘 읽으면이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마는..읽는 것에 중독되어 금세 까먹을 것들도 악착같이 확인하고 읽어내고 싶어한다.

정보의 과잉 속에서 손해보지 않고 잘 선택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 하나를 사들여도 속는 줄 알면서도 후기를 꼼꼼하게 살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을 보면 실수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표현양태로 읽어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가 늘 좋지만은 않아서 때론 잘 못 선택한 댓가를 치르게 된다. 이상한 물건이 온다거나, 금세 망가진다거나.

문제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선택한 자신에게로 돌려진다는 것이다. 이상한 물건을 팔거나 내구력이 없는 물건을 팔거나 불량식품을 만들어낸 그들이 아닌..그런 물건을 미련하게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한다.

이런 된장..

읽는 것은 선택과 연관된다.

 

 " 선택 이데올로기의 역설은, 현실에서 선택의 여지가 점점 더 줄어든다 할지라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자기 잘못이라고 믿어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 불안할 때 우리는 해야 할 것을 일러주는 권위자에게 너무 빨리 선택권을 넘겨 버리고 그와 동일시한다.(p13)"

 이 문장을 읽으며 섬뜩했다. 자기 잘못. 이라는 말과 동일시 라는 말.

 

 

 

 

 

 

 

 

 

읽어야 할 기록들이 쌓여있다. 선택 뿐 아니라 선택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야 할 것들..잊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세월호의 이야기 같은..

21세기 자본으로 한바탕 홍역을 앓았고,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긴 하지만 문학동네가 나름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 같다.

 

   문학동네 계간지를 세월호 특집으로 꾸려 재쇄에 들어갔다고 했다.

 세월호 이후 작가들의 작품을 실은 책을 냈다고 했다. 보급형으로 가격도 낮추고 수익금도  전액 기부된다고 한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등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자 하는 다양한 움직임"에 기부된단다. 이런 움직임이 좋다.

 

 장바구니에서 읽고자 하는 책 다섯권을 들어냈더니..이 책 열권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것도 사재기니 뭐니 해서 논란거리가 될까? ..하도 예민한 일들이 많이 생기니 조심스럽다.

 

 

  정말 꼭 읽어둘 "기록"이다.

 

 

 

 

 

 

 

 

 

 

 

 

 

 

읽는다는 건, 잃지 않고 싶은 것일거다.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고 싶은 것, 혹은 획득하고 싶은 것.

또한 자신이 가진 것들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가진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그래서..읽는다.

읽는 것은 선택을 종용당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피로감을 주는 글읽기라니..얼마나 재미없는 일인지.

 

이런 기록들이 쓰여지는 종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라는 부제가 멋지다.

 

종이의 역사와 이야기..정말 흥미롭다

이리저리 쌓여진 책들을 수습하느라 받아두기만 하고 아직 시작도 못했지만..

휘리릭 펼쳐보는 페이지들 사이에 그림이며 글들이 눈에 와 박힌다.

 

 

 

 

 

 

 

 

 

 

 

읽고 읽고 읽고...

쓰고..는 내 몫이 아닌고로 열심히 읽어댄다. 그렇다고 취미란에 "독서"라고 쓰진 않는다.

일상을 취미라고 쓰는 사람은 없으니까.

취미 :식사 후 양치하기..

이런거 웃기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