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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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이형을 처음 읽은 건 2014년 이었다. 쿤의 여행. 글을 읽으며 내내 흥분했다. 같은 단어를 다르게 조합하고 있다는 느낌.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촘촘하게 의미를 박아넣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 후 기회가 될 때마다 윤이형의 작품을 읽었다.

우퍼스피커 같은 작가라고 나는 평가했다. 묵직하게 소리만 울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듣는 존재까지 공명하게 하는 힘이 있는 작가라고..차이라면 우웅~울림 뒤에 오는 날카로움일거다.

이 책을 읽어야지 하고 꺼낸 날. 이상문학상에 관련된 이야기가 세간에 회자되고 급기야 작가의 절필선언(?)을 듣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는 마지막 작품인셈인가?

오늘, 문학사상사측에서 올린 사과문을 읽었다.

다만 문학사상사의 문제일까? 라고 의문을 품다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 의문은 늘 뒷맛이 썼다.

어쨌든 붕대감기를 읽었다. 작가가 세영이처럼 한바퀴 더 돌리는 바람에 '악'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만 심한 압박감을 받으면서..

그러나 뿌리치진 못했다.

 

2. 헤어디자이너 해미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기가막힌다고 밖에 설명할 방도가 없다.

율아와 서균이, 두 꼬맹이를 빼고, 성추행 가해자인 천을 빼고 모두 열세명의 이야기가 레고조각처럼 맞물리며 쌓여간다,

책을 덮으며 아라크네를 생각했다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신들을 그려낸 아테나와 붙어서(?)도 조금도 꿀리지 않았던 아라크네. 그녀의 천 위에 그려진 인간의 세밀한 삶의 모습은 신들의 권능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거미가 되고 말았지만 그 패기.

속속들이 파헤쳐 들어간 이야기와 이야기 속 사람들을 이렇게 펼쳐놓다니..근래들어 읽은 책 중에 가장 진솔하고 가장 영민하며 가장 치밀하다고 생각했다. 아라크네는 거미줄을 내려왔지만 결국 다시 거미줄을 짜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3.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뻔한 이야기라서 소름돋게 이해가 되고 저절로 그려지는 단점(?)이 있었다. 등장인물들이 대상화되지 않는다. 나는 진경이며 세연이고 지현이며 바람이고 해미면서 윤슬이거나 명옥과 효령같은 사람인 것이다. 어떤식으로든 교집합이 성립되는 이야기 속에서 투영되는 '나'를 보게 만드는 글의 힘이 대단했다.

단언컨대 이 이야기는 줄거리라고 장황하게 적어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을 빼도 안되니말이다. 물론 진경과 세연을 중심으로 큰 조각을 이야기하려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4. 아군도 적군도 모호해지는 페미니즘, 혹은 여성운동의 허와 실을 담담하게 써내려간 부분이 좋았다. 전선이 수시로 바뀌고 신념과 아집사이를 넘나드는 그 위태로운 발걸음이 미덥지 못하다기보다 단단히 연대해 주어야 할 이유가 되어준다.

사람으로 시작해서 우정을 매개로 그려내는 상처와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몸짓, 그리고 서로에게 어깨를 대어주고 연습으로라도 서로의 상처에 붕대를 감아 줄 친구가 되어주는 것의 의미를 본다.

그러고보니..나도 세연이 같은 친구가 있었네.

 

5. 책장을 덮으며 전화번호를 뒤적여본다.

문득..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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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는 어디 있나요
하명희 지음 / 북치는소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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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덟개의 작품들이 눈 내린 아침 담장 위에 쪼르르 앉은 눈사람들처럼 모여 있다.

소설집이라고는 하지만 작품의 갯수가 '?' 싶을만큼 적지 않다.

 

문학평론가 김명인님은 추천사를 통해 '하명희의 소설들은 따뜻하다'라고 했다. 세상을 따뜻하게만 보려는 사실상 방관하는 온정주의와는 거리가 먼 확실한 방향성을 가진 따뜻함이라고 한다.

보통은 추천사나 해설을 잘 읽지 않는다. 책을 읽기 전에는 선입견이나 과한 기대를 품게 만들기도 해서..다 읽고 나서는 내가 읽은 것과 엄청난 괴리를 보이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어느 해 겨울을 강타했던 유행어 '내가 이러려구 책을 읽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 대한 추천사에는 동의한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아마 그 즈음일거다. 엄마는 지금으로 치면 공방처럼 뜨개질한 옷과 소품들을 수출하는 일을 하셨다. 아침을 먹고 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실과 도안이 넘쳐나는 작업장에 앉아 하루 종일 자신이 맡은 부분을 뜨기 시작했다. 소맷단만 뜨는 사람, 오른쪽 소매, 왼쪽 소매, 앞판, 뒷판, 제일 늦게 출근해서 제일 늦게 퇴근하는 시아게 아줌마까지. 커다랗게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바늘과 바늘을 따라 나서는 색색의 실들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시아게 아줌마가 두툼하게 썰어놓은 생선살 같은 작업물을 모아 하나씩 이어붙이면 가디건도 되고, 스웨터도 되고, 조끼며 망토가 되었다. 마지막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확인되는 정체들.

책을 읽으며 열 여덟 개의 조각들이 만들어 가는 고요의 정체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림자의 이야기. 어쩌면 너무 꾹꾹 눌러놓은 탓에 저도 모르게 흘러버린 이야기들일지도 몰랐다. 엄마한테 잔뜩 혼이 난 원두(반려묘)가 의기소침하게 앉아있는 그림자. 그 그림자는 원두의 설움과 서운함과는 관계없는 배트맨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용감한 정의의 용사(?)

이야기는 바로 거기에서 싹이 나고 열매가 되는 건 아닐까? 서러운 현실과 그림자 속 정의. 그 간극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이야기.

고요는 어디있나요? 헐겁게 대답하자면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스치듯 지나가버렸던 시간과 길과 사람들 사이에 오도카니 앉아있었을 고요. 너무나 고요해서 눈치채지 못했던 고요.

하명희의 글은 내가 지나왔던 길모퉁이 어디쯤에서 서성이던 고요를 깨닫게 한다.

..거기 있었구나. 거기 있었겠구나.

 

천천히, 어느 가을 날 길의 시작부터 끝까지 나뭇가지에 노란 리본을 묶어가며 걷듯 읽었다.

기억할께요’ ‘기다릴께요’ ‘죽지 않을께요혼잣말을 보태며 읽었다.

 

소란하고 소란한 세상의 틈에 오도카니 박혔던 고요를 만나는 일. 사람의 눈과 그림자의 이야기를 만나는 일. 하명희의 글은 그런 일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돌아오는 일.

세상에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일. 고요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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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고독
강형 지음 / 난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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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를 지날 무렵. 습관적 우울과 절망에 잠식 당하던 시절. 살아있다는 것이 못견디게 힘겨울 때면 벽제 화장터에 갔었다. 무작정..시외버스를 타고 가기도 했고, 기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 벽제가 가까워지면 늘 해가 기울기 시작했고 한껏 타올랐던 연기들이 습습 내려앉곤 했다. 무언가 타는 냄새. 어쩌면 떠나는 사람이 지상에 남기는 마지막 흔적일 냄새를 들이마시곤 했다. 그저 나무가 타는 것과는 다른 냄새. 나는 그 냄새를 '미련의 냄새'라고 불렀다. 낮고 천천히 '잘가요'라고 인사도 했다. 그러고 나면 땅에 잘 붙어있는 내 발바닥이 대견했고 아직은 미련의 냄새를 남길만큼 삶에 남은 미련이 없다는 것이 억울해서 오기가 생겼다. 더 살아볼께. 이상한 다짐을 하게 되고 막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은 아주 늦은 밤이었다.  이 기괴한(?) 습관을 알게 된 친구들은 나와 거리를 더 두거나 호기심으로 더 가까워지곤 했다.

어쩌면 철 없던 내가 원한 것은 '고독'이었을지도 몰랐다.

 

조금 더 자라서 여행에 대한 로망을 품던 때, 유적을 찾아서, 먹거리를 찾아서, 패션을 찾아서..등등의 주제들 속에 '묘지를 찾아서' 라면 꼭 떠나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었다.

유명인이 묻힌 묘지들을 가끔 TV에서 보았지만 그런 근사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 아닌 황량하고 인적 드문 그런 곳을 찾아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술이 잔뜩 취했던 날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흙투성이가 된 채 망우리 공동묘지 근처에서 눈을 뜬 일이 있었던 것을 친구들은 아직도 이야기한다. 친구들의 이야기는 할 때마다 뭔가 조금씩 덧붙여져 이제는 거의 설화처럼 들릴 지경이지만..그 끝에 '얘가 아주 고독한 애였어 그치?'라고 붙여주는 건 여전했다.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딱 두가지였다.

작가도 출판사도 아니고 '고독'이라는 제목과 '묘지'라는 공간.

묘지관라인 피터와 묘지의 유령들의 이야기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다. 작은 소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의 시간에 끼어든 유령의 이야기일수도 있고 유령의 시간에 발 들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살이있음과 이미 죽었음의 경계를 걷는 피터를 찾아 온 한 형사와 나눈 일주일간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힘이 제법이라고 느낀 것은 책을 다 읽어갈 무렵이었다. 음성지원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하는 그런 경험. 늙은 피터의 음성으로 읽히는 책. 두껍지 않은 책을 빨리 읽지 못했던 건 그런 이유였다. 재미가 없어서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라 피터의 진술(?) 속도에 맞춰 읽어지는 것. 하루에서 다른 하루로 넘어갈 무렵엔 긴 한숨을 쉬게 되고 커피를, 물을 한 잔 마시게 되는 묘한 상황.

살아있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피터는 정말 고독했을까? 유령들과 이야기하며 피터는 고독하지 않았을까?

 

수정구슬에 갇힌 한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 '태자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린 아이를 유괴해 굶기고 굶기다가 작은 통에 먹을 것을 넣어두고 아이를 유인하면 아이는 먹을 것에만 집중한다. 그것을 먹으려고 할 때 아이를 죽이면 아이는 자신이 죽는줄도 모르고 먹을 것에 대한 집착으로 통에 갇힌 귀신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한나가 수정구슬에 갇히게 되는 과정도 비슷하다. 왜 아이여야 하는가. 순수한 집착 순전한 기다림 순결한 죽음이기에 아이여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이는 또 얼마나 잔인한가. 태자귀는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 갇혀버린 영혼이라는데 한나 역시 다르지 않다. 이런 잔인한 일을 벌인 리즈는 자신의 딸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려고 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집착.

집착을 놓으면 주박이 풀리고 자유로워질텐데 끝끝내 놓지 못하는건 욕심인건가? 본성인건가?

 

생각이 묘지의 묘비만큼 많아졌다. 산 사람의 발소리가 잦아든 시간에 시작되는 유령의 시간을 가늠해본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라고 한 폴 틸리히의 말을 빌어온다.

어쩌면..?

그렇다면..?

피터는 충분히 '고독'했으리라..

외롭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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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플라톤의 대화편 현대지성 클래식 28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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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보면, 시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멀리 나와 앉아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 시작은 소설이었고 시였지만 인간에 대한 물음과 현실의 불협화음 사이를 서성이다 의문은 깊어지고 답을 찾아내고 싶은 열망에 휩싸이는 것이다. 니체로 스피노자로 들뢰즈로 돌아다니다보면 어느 순간 고대의 어느 광장에서 끝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

거기, 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 되돌아오는 이유는 뭘까.

거기 물음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최초의 물음들..그 사이에서 지혜를 다투는 사람들 사이에 소크라테스가 오랜 화석처럼 서있곤 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혹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으로도 유명한 플라톤의 대화는 오랫동안 꾸준히 번역되어왔고 연구되어왔다. 어느 한부분쯤은 읽어봤으리라. 수없이 인용되고 차용되어지느라 조금씩 변형되거나 본래의 의미가 왜곡된 것도 있었을거다.

성경처럼. 누가 번역했느냐에 따라 찍혀지는 방점이 다르고 방점의 위치에 따라 해석이 달라졌으리라.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이라는 어쩌면 가장 최근에 옮겨졌을 책을 읽는다.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 사형이 선고된 소크라테스. 탈옥을 제안하는 크리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을 본 파이돈. 그리고 향연에 이르기까지 ..

이야기들의 가독성이 좋다. 소크라테스씨의 폐활량이 대단했던걸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길고 긴 문장들을 읽는데도 걸리는 것이 별로 없다. 긴 문장 속에서 조금씩 말을 틀어가는 소크라테스의 언변이 놀랍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설득되지 않는 부분도 분명 있을테지만 토론에서 보여지는 투지(?)만큼은 대단하다.

한 번도 아테네를 떠나지 않은 소크라테스는 도망가자는 사람을 설득하며 아테네와 아테네의 법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자신이 살아왔고, 혹은 자신을 살게 한 아테네와 아테네의 법을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그것은 아테네를 부정하는 것이며 배반하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소크라테스는 반박할 수 없는 논지를 펼쳐낸다.

 

문득. 법은 공정한가. 법은 꼭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위대한 소크라테스씨의 이야기는 아테네의 시간과 공간에서 다시 없을 명문이었을것이다. 일정부분 현재에도 그 힘이 닿아있을것이다.

법을 수호하고 법을 집행하는 자들을 믿을 수 있을 때, 그 법이 모두에게 공정할 때, 지켜내야 할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법을 남용하고 법을 오용하는 자들에게 법이 볼모로 잡혀있는 상황이라면 그 법 또한 지켜내야 하는가? 라고 물어보고 싶었나보다. 검사가, 판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면 법이 과연 공의를 위한 잣대가 될 수 있는 상태인가?

그렇다면 그 때의 법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막연하게 외면할 것이 아니라면 법은 어떻게 제자리를 찾아야 하는가? 지혜는 법을 어떻게 풍요롭게 할 것인가? 등등의 물음들이 머릿 속을 맴돌며 소크라테스씨에게 물어볼 목록만 길어진다.

 

여자와 노예와 외국인이 아닌, 남자이며 시민이며 내국인인 소크라테스의 신분이 그의 변론의 일정부분 동력은 아니었을까도 의심해본다.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사는 것"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여전히 타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말은 우리에게 여전히 타당하네

제대로 산다는 것이란 명예롭고 정의롭게 산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는 말도 웅리에게 여전히 타당한가?

그 말도 여전히 타당하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이 지금까지 서로 일치한 것들을 토대로 해서, 아테네 사람들이 나를 방면하고자 하지 않는데도 내가 이곳을 빠져나가고자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농담삼아 그런 말들이 돌았던 적이 있다. 배 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 라는

근래 읽는 소크라테스는 가끔 배부른 소리를 했던 것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사상들을 읽는 건 유의미하다.

특히 '무지'를 인정하고 끝없이 탐구하는 자세는 삶을 꾸려가는 몇가지 자세 중에 꼭 넣어둘만한 가치가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할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 배움의 틀을 짓는 일. 끝없이 의심하고 묻고 답을 찾아내려 고민하고 공부하는 것. 그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걸 남들이 모른대도 상관없는 '앎'의 삶. 거기에 신념이라는 것이 싹 틀 자리가 준비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생각이 끼어들기 좋은 책이다. 딱딱하지 않게 옮겨진 글은 생각없이 죽 읽기에도 좋다.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다소 싱겁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여태 읽어 본 소크라테스 중 가장 가독성은 좋은 것 같다.

 

근데 변명 하나도 이렇게나 길고 길다니..더 길고 길게 천 하루의 밤동안 이야기를 이어가 목숨을 부지한 세헤라자데처럼 천일 쯤 변론을 이어갔으면 소크라테스씨도 조금 더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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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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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말엔가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머리가 아프다. 일종의 저기압에 반응하는 신경이 있는 셈이다.

생각보다 이런 증세를 갖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도 딱히 이상한 점은 없고 의사는 늘 만병통치같은 혹은 마스터키 같은 말을 했다 '신경성입니다'

그래도 처방을 해주시면..이라고 말끝을 흐리면 진통제와 함께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라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내어준다.

그런 처방을 받고 돌아오면 '나는 왜 이따위로 생겨먹은거지?'하는 생각이 들고, 이 두통의 원인은 나 이며 결국 내 잘못인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그 날도 진통제 한 알을 먹고 책을 집어들었다. 하필 '이제야 언니에게'를.

작가는 섬세하게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섬세함은 가끔 방만함으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영리한 작가는 충성스런 네비게이션처럼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 이야기의 중심을 잘 잡고 간다.

희뿜하게 어떤 장면들이 겹쳐졌다. 삼촌이 자꾸 만진다는 얘기를 하던 경미. 아빠 친구가 술을 주었다던 은정이.

모두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다 키웠고 일찍 결혼한 경미는 곧 할머니가 된다고도 했다.

어리다고 하기에도 뭣하고 다 컸다고 하기에도 뭣한 경계의 시기에,'여자'의 삶이 준비되던 시기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추행을 당했던 이야기들은 제법 들었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애매한..엄마한테 말했다가 오히려 호되게 혼난 이야기를 들었다.

니가 뭘 잘못했겠지. 그 사람이 괜히 그랬을리가 없어.

싸가지 없이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죽을 때까지 입도 뻥긋 하지마. 너는 결혼 안할꺼야?

동네 창피해서 살 수가 없다. 넌 애가 왜 그러니? 조심성 없이.

이런 말들을 보통 듣고 와서 아이들은 엉엉 울거나 엄마가 계모가 틀림없다는 분노를 쏟아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숨어서 욕을 했고, 숨어서 저주했다.

제야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무도 알지 못하게 꽁꽁 싸매 봉인 해 두었던 '너 이 얘기 죽을 때까지 비밀 지켜야 해'라며 입을 열던 친구의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그 친구는 결국 '여성'도 '엄마'도 되지 못하고 여고생의 모습으로만 남았다.

가해자가 보호받는, 피해자가 손가락질 받는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아직도.

 

어른스럽고 모범적으로 보이는 제야를 따라 온 당숙.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는 제야가 성폭행을 당해도 싸다는 이유가 된다. 요즘 세간에 화제가 된 모 가수의 성폭행 사건에 직업여성인데 성폭행이 가당키나 하냐는 이야기를 들으며 실소가 나왔다. 어떤 취향을 가졌고,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이 성폭행을 당해도 할 말 없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여자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갖고 치밀하게 기획하고 실행하는 자들이 이상한 것이고 이것은 순간적 충동이나 그 어떤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 범죄인 것이다.

전형적인 그루밍을 실행한 당숙, 그 그루밍을 받아들이지 않은 제야. 세상은 성공한 남자인 당숙의 편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얌전한 줄 알았더니 발랑까진 제야의 편이 아니었다.

 

그런 제야의 이야기를 읽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한동안 책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너무나 선명하고 너무나 참담해서..

 

책을 읽는 동안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머리가 아픈 것을 잊었다. 머리 말고 다른 곳이, 온 몸이 아팠다. 딱히 어디가 아프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온 몸에서 통증이 감각됐다. 기억이었을까? 책이었을까? 통증의 원인은...

 

 

책을 다 읽고도 한 동안 책 속의 장면들이 오롯이 남아 힘에 부쳤다.

이제야 뭐라도 한 글자 남길만큼 한 발 물러설 수 있다.

 

피해자에게 2차, 3차 가해가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너무나 잘 그려낸 작품. 감정에 호소하는 오로지 피해뿐인 글이 아닌 제야에게 이입할 수 밖에 없는 글의 힘이 좋았다.

상처는 결국 낫겠지만 흉터는 평생 고통을 저장하고 있을거다. 그 흉터가 생긴 싯점, 상황, 사람들..그 모든것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고통도 끌고 올 것이다.

누구라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제야 제야에게 말해 줄 수 있겠다.

네 잘못이 아니야.

 

세상의 모든 피해자들에게. . .당신의 고통은 신경성이 아니예요. 그것은 피해의 흔적이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예요.

라고 말해야겠다.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가해와 피해의 문제 그 시선의 문제 확대되는 가해와 자신이 가해자인지 모르는 가해자들의 범람을 인정해야 한다.

 

제야는..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당숙은 제야를 강간한 게 아니라 여자를 강간한 것이다. 여자 중에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여자.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여자.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여자.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여자. 일을 벌인 후에도 가까이서 통제할 수 있는 여자. 남들한테 얘기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여자. 그래서 또다시 강간할 수 있는 여자. ...미성년자인 친척 여자. 제아는 그 조건을 충족시켰다.

더 나은 선택이란 없다. 지옥뿐이고, 지옥 뿐이라면 당숙도 지옥에 있어야 한다.

나이 많은 여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말 그런 일을 겪었다 쳐도, 그래도 너는 잘못이 있다. 그렇게 자랑하듯 떠벌리면서 벌을 주겠다고 그러는 것도 정상적이지는 않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너도 부끄럽고, 우리도...
우리가 다 부끄럽다. 감추고 쉬쉬해도 모자를 판에 이게 재판을 받겠다고 나설 일이냐. 대체.
당숙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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