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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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자기계발이 주제가 되는 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슷한 논조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에게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는 전개되고, 결과적으로 스스로 변화하고 (이는 체제에 순응하고로 읽히기도 한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체제의 문제나 사회정치적인 해결책은 없다. 사회정치적 모순과 체제의 불합리함을 뒤흔들거나 무엇이 개인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가에 대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개인의 의지의 문제로 귀결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계발서에 집중하고 환호한다. 어쩌면 아무리해도 안되는 것에 대한 위로를 받고 싶거나, 글쓴이의 때때로 무례한 지적에 마조히스트적인 대리쾌감을 느끼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무엇이 문제일까? 요즈음 대다수 청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절박함과 결핍으로 점철되어있다.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자격증과 시험을 통과하며 그것들이 삶의 질을 향상시켜줄 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 노력들을 보아주지 않는다. 더 노력하라고, 잘못된 선택이었노라고 야멸차게 밀어내고 있다.

선택,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얼마나 더 있을까?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것을 얻어야만 하겠지만, 그 역시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청춘으로 당연히 아파야할 것들이라고 낭만적으로 조언을 던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먼 훗날 뒤돌아보며 웃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함만으로 살아내라고 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선택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할 수 있는 권리일 수 있다. 자신이 한 선택에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하다. 그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아닌것이었는지는 선택한 주체가 책임을 지는 것이 맞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혹은 처음부터 “옮음”이 전제되지 않은 선택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건 하나를 사는데도 꼼꼼하게 리뷰를 읽어내리고 비교를 하며 가장 좋은 걸 선택하는 것이 요즈음의 추세다. 그렇게 해야만 세상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언젠가 문제가 되었던 가습기 사건이나, 요즘 세간의 문제가 되고 있는 sns 카카오톡의 문제도 그렇다. 그것을 선택하고 사용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것인가?

잘못된 정보와 제품을 제공한 사람들에게 문제는 없는 것인가?

“그러게 왜 그런걸 선택해가지고..”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읽으며 생각해본다.

개인적 행위가 될 ‘선택’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가.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면..

“선택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필수적인 능력이다. 개인이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곧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우리가 선택을 오로지 전적으로 합리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그래서 경제 이론과 소비자의 관점에서 선택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견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을 인간의 정신 및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파악하는 더 폭넓은 이해 방식이 필요하다. (...) 선택이란 관념을 강요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 차이와 인종적.성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선택권은 실제로는 사회적 분할에 따라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 선택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선택 이데올로기가 지금껏 승승장구해 온 원인이다. 그 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관계들을 변화시킬 선택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p209~211)

선택이라는 것이 그 사회의 문화적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선택은 본질적으로 변화를 위한 행위인 것이다. 좀 더 나은, 혹은 좀 더 올바른 것에 대한 바람이 근저에 깔려있는 행위여야 한다. 좀 더 좋은 것을 위한 선택이라면 그것이 도외시되거나 거부되어서는 안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택이 환영받지 못한다.

그 사회 전반을 꿰뚫고 있는 지배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선택, 혹은 집단의 선택을 달가워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좀 더 나은 것을 위한 선택일것이나 이미 기득권을 쥐고 있는 그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반체제라는 딱지를 붙여 사회로부터 그들을 밀어내려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표적인 반공이데올로기가 선택을 강제하고 있는건 아닐까?

쉬운 예로 근로자의 복지와 권익을 향상하기 위한 노동조합의 결성과 가입조차 당연하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시와 우려의 눈총을 받아내야 한다. 어떤 개인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려 할 때, 주변의 반응이 다양하게 나오게 되는 것만 보아도 말이다.

 

어떤 것을 선택했을 때, 그 결과가 긍정적이라면 대부분 비슷한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이라면 대부분은 기피하게 될것이고, 또한 그것이 사회적 지위획득에 걸림돌이 되어질것이라는 불안이 가중되어지면 기득권세력이 아님에도 기득권세력인양 행세하며 보호받기를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선택은 개인의 욕구와 결정이라기 보다는 사회전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통제되고 제어되는 선택이 되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주인은 자신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명제이다. 그러나 그 주인이 진짜 주인이 아닌 권위자나 통념에 사로잡힌 존재라면 삶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 것이다. 권력과 체제의 주입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행해지는 선택은 과연 “나”의 선택인 것인가? 반문해야만 한다. 다분히 개인적이어야 할 행위에 체제와 집단의 이익과 요구가 깔리게 된다면 그것을 올바른 선택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또한 개인의 선택이 발전적 변화를 위한 작은 몸짓이 아니라 고착화된 부정과 부패를 지켜내는 단단한 산성의 벽돌로 자신도 모르게 활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선택은 합리성과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개인의 이익과 성공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가차없이 버려도 좋다는 선택의 의지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기 시작했고, 더불어의 의미는 점점 퇴색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가당찮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어쩌면 우리가 하게 될 선택은 단순하게 설명될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함께” VS “소수의 성공” 혹은 “발전적 변화” VS “수동적 유지”.

단어의 호감도로 보아도 뻔하게 보이는 선택지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그것을 인정해도 좋을지 자신의 상황과 사회적 지위를 계산하고 있는 것 뿐일 것이다. 또는 지금까지 이루어 온 것들에 대한 보호욕구가 발동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루어낸 것인데..

얼마나 어려운 선택들을 하고 현재의 지위에 올라섰을까? 현재를 사는 사람으로써 충분히 납득이 되고 이해도 된다. 그러기에 연민이라는 감정을 갖게 되기도 하는 것일게다.

 

얼마전 어떤 연구결과를 보았다.

“최근 미시간주립대 연구팀은 노력과 선천적 재능관계를 조사한 85개 논문을 대상으로 이 분야 연구 중 가장 광범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그 결과 학습 분야에서 노력한 시간이 실력의 차이를 결정짓는 비율은 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음악·스포츠 등에서는 실력의 차이에서 차지하는 노력 시간의 비중이 20~25%였다. 어떤 분야든 선천적 재능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대가가 될 수 있는 확률은 높지 않다는 결론이다. 또 선천적 재능과 함께 조기교육이 성공의 주요 요인이라고 했다.

미시간주립대의 연구결과는 선천적 재능보다 꾸준한 노력이 대가를 만든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을 완전히 뒤집게 됐다. (2014.7.24다양한 일간지)“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고, 노력의 선택을 강요했던 사회는 재능에 의한 성공을 폄하해왔다. 예를 들면 재능있는 사람들은 게으르다는 식으로 말이다. 과연 그랬는가?

노력하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끝없이 노력하라고, 노력이 부족하다고 강조하던 이들의 말은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과연 노력이 부족해서였는가?

선택이란, 이렇게 비합리적인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선택은 인간이 갖는 가장 숭고한 행위일 수 있다.

하루를 살아내는데도 수천,수만의 선택을 하며 살아낸다. 그 속에 과연 자신의 의지가 온전히 발휘된 선택이 몇 개나 있는지 의문이 된다. 통념과 지배이데올로기에 익숙해진 복종의 선택은 아니었는지, 나의 선택으로 고통을 이어가야했을 이웃은 없었는지 말이다.

자신의 삶의 주인은 자신이듯, 선택의 주도권도 자신이 갖아야 한다.

또한 선택의 근저에는 “더불어 함께 변화 발전하는”이라는 대전제를 작용시켜야한다.

그런 선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할지..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할 수 있다. 그 후회 역시 건강한 선택의 동력이 되어지도록 하는 것 역시 스스로 선택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쉬운 언어와 예시로 농도 짙은 질문과 이야기가 전개되는 책의 구성이 좋다. 레타나 살레츨의 필력과 사상적 기반이야 두말할 것도 없지만, 역자의 시각과 힘 또한 만만치 않았던 책이라고 생각된다.

적당한 분량으로 어렵지 않게 읽히지만 그 무게감만큼은 가볍지 않다.

수없이 반문하고 되짚으며 읽게 되는 책이다.

 

내 선택의 주인은 “나”였는가? 자꾸 되묻게 된다.

"선택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필수적인 능력이다. 개인이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곧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우리가 선택을 오로지 전적으로 합리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그래서 경제 이론과 소비자의 관점에서 선택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견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을 인간의 정신 및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파악하는 더 폭넓은 이해 방식이 필요하다. (...) 선택이란 관념을 강요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 차이와 인종적.성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선택권은 실제로는 사회적 분할에 따라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 선택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선택 이데올로기가 지금껏 승승장구해 온 원인이다. 그 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관계들을 변화시킬 선택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p209~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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