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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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이국기.

 

십이국기라고 말들이 많았다. 환호하는 사람들..시리즈를 모두 모았다는 사람들..애니메이션을 흥미있게 보았다는 사람들..판타지 애호가? 혹은 전문가들이 많았다.

판타지나 쟝르문학쪽은 거의 문외한이다. 그렇다고해서 다른 문학적인 분야에 빠삭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것도 아니다. 내게 독서는 놀이이고 말 그대로 취미일 뿐이지 대단한 정보의 습득과 학습의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환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가제본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원을 받고, 출판사에서 정식 출간 전에 미리 받아 본 <십이국기 가제본>

 

첫 장부터 어리둥절했다. 글의 전개가 빠르다. 낯선 단어들과 생경한 어휘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온다.

무슨 말인지 처음엔 하나씩 찾아보려했다. 그렇게 단어들을 찾고 어휘들을 이해하려 꼬깃꼬깃 접어가며 밑줄 그어가며 읽다보니 지루해졌다.

까짓것 모르면 어때? 이 호흡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무식하면 용감해진다고 했다.

그냥 읽기로 한다. 잘 모르는 말들과 낯선 지명들, 사람들, 지나치기로 한다.

신기하게 읽히기 시작했다. 모르는 말..괜찮다. 읽다보니 느낌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낯선 나라의 글을 배우듯, 상황을 이해하며 읽는다.

그러자 생각이 났다.

아이들이 어릴 때,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넋놓고 보던 만화영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따라하던 주문들..속속들이 알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아채는거다.

그러다보니 재밌다. 장면 하나 하나의 묘사가 세밀하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거기에 피가 흥건한 웅덩이와 찢겨져 나온 살덩이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 반칙.

 

서평을 쓰려니 막막했다.

"재미있었어요." 이 한마디로 시작과 마무리를 모두 할 수는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동영상을 찾아보고, 먼저 읽은 분들의 서평도 살펴본다.

번역의 문제를 제기하시는 분도 있고, 주인공인 요코의 내면의 이야기와 외부의 전투를 정리해 내는 분도 있었다. 또 비슷한 서사 구조를 갖는 잘 알려진 작품을 예로 들어가며 정리해 주신 분도 있다. 도움이 되었다. 뭔가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줄거리는 단순할 수도 있다.

요코라는 여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이키에 이끌려 낯선 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뭔가 낯설지만 익숙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문제는 그 내용에서 얼마나 생동감이 있으며 흡입력이 있는가의 차이일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본다면, 최고(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비교할 자료나 경험이 없는 까닭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해 본다. 열광하는 매니아들에 대한 수긍이 되는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말 때문이었는지..그나마 보았던 '디 그레이맨'이랄지 ''베르세르크''블리치' 등의 캐릭터들이 머리 속에서 겹쳐지기 시작했다. 게이키는 어쩌면 그리피스를 닮았을꺼야..요코는 어쩌면 리나리같이 생겼을꺼야..이런식의.

머릿속에서 원작과 상관없는 캐릭터들이 줄줄 생겨나기 시작한다.

애니메이션을 찾아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의 문장들이 범상치 않다. 주인공 요코의 심리의 묘사,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혼란과 갈등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작가의 힘이겠다. 이런 섬세함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단단한 서사구조와 다양하지만 난잡하지 않음이 좋았다. 깔끔함. 이럴 수도 있구나..싶어지는 대목이다.

 

#. 그래서.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라는 부제가 있는 십이국기 그 첫번째는 초보가 읽어도 읽어봄직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다가 뭔가 껄끄러우면 가차없이 덮어버린다. 그것이 노벨상 수상작이라 할지라도, 내 목소리로 읽히지 않는건 더는 읽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도 맹꽁이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나름의 규칙이다. 그간 판타지류의 책을 읽지 않았던 건, 거의 황당함을 추스려 줄 무언가를 아무리 읽어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명되지 않는 의문은 이내 가치를 상실하고 흥미를 제거시킨다.

가제본이다 보니 오타도 있고, 매우 이상한 문장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안그래도 낯선 화법에 당황하고 있는데 뭔가 요상한 말들 때문에 헤매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정식 출간된 책들이 궁금하다. 삽화도 하나 없었다. 어떤 그림들이 정식 출간본에 들어있을지..요코는, 어떻게 그려져 있을지..궁금해지는 것이다.

궁금해진다는 건 확인해보고 싶다는 의지일테니, 나는 아마도 이 시리즈를 다 보게될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어떤 것과 마주섰다.

그 첫인상은 낯섬이었다. 아직까지 적극적인 소통과 공감이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분명한건, 나쁘지 않다는 것,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는 것. 더 알아가도 괜찮겠다는 긍정적인 호의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썩 괜찮은 첫만남이었다고 초보 판타지 독자로서의 감상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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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 문학동네 시인선 61
임경섭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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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독으로 시작하는....

 

임경섭의 죄책감이 나왔다는 알림글을 보고 바로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본다.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 미출간정보조차 없다. 엉뚱한 책들이 쏟아진다.

검색에 검색을 다시 하고 다시 확인하고를 반복하다 깨닫는다. 임경업. 수치심.으로 찾고 있었다.

국사공부를 열심히 한것도 아니고, 딱히 임경업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닌데..익숙한 글자구조 혹은 어감의 탓이었을까. 나는 임경업을 자꾸 찾는다.

죄책감이라고 소리를 내어 읽어 놓고도 손가락은 수치심을 찾고 있다.

 

어쩌면 이 둘은 슬픔으로 가는 두 량(輛)짜리 기차일지도 모르겠다.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지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 비슷한 상황 속에서 여지없이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기차 말이다. 죄책감의 앞얼굴을 보고 잠시 비켜 서 있다 돌아보면 수치심의 뒤통수를 보게 되는 것처럼 쏜살같이 지나가는 기차.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나 망설이며 건널목에 서 있는 서러운 존재여야 하겠다.

건너지도 돌아서지도 못하고 서성이다 잃어버린 것들을 헤아려보고 잃은 것들의 자리를 대체할 저 건너의 것이 낯설어 건널목 앞에서 죄책감과 마주서게 되는 그런 존재말이다.

비켜서지 않으면 부딪고 지나가겠다는 강렬한 달음질과 그 강렬함을 닮은 여운이 긴 바퀴소리..그 바퀴소리가 멀어져도, 들리지 않아도 오래도록 귓가에 덜컹덜컹 소리를 달고 지낸다.

그 소리를 잊을 때까지 결단코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똬리를 틀고 앉는 죄책감. 소리가 사라지는건 생각보다 길고 오래 걸리곤 한다. 어쩌면 영 사라지지 않아서 환청을 듣는 귀 조차 바퀴가 되어버리는지도 모른다.

 

#2. 죄책감이 흐른다.

죄책감..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한다. 죄책감에 빠졌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죄책감은 어떤것인가 싶어졌다. 사전을 찾아보니 '명사: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다.

정말 그게 전부일까? 책임을 느끼는 마음?

시집을 읽으며 죄책감은 상실 앞에서 발현되는 통곡이라고 생각했다. 절절한 죄책감은 죄를 고백할 대상이 곁에 없을 때, 속죄의 보장이 사라져버렸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자책은 그렇게 죄책감으로 자라나 삶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형과 누나와 아버지와 어머니와 애인과 그 외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책과 상실로 꿈을 그려낸다. 무채색의 그림은 한없이 지루하고 흐릿하게 제 모습을 숨기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시인은 하나씩 집어내며 자신의 자책과 1:1로 대응시켜가며 완만한 곡선의 그래프를 만들어 낸다. 그 속에 무리하게 색채를 입히려 하지 않고 때론 눈물로 희석하거나 때론 더 검게 칠해 그 음영을 더 할 뿐이다. 처음 부터 색을 갖고 있지 않았던 관계이며 삶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누군가 이 고해를 들어줄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떨어지면서 사람들은 괴성을 질렀고

나는 애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상황에서 왜 이름을 불러? 애인이 물었고,

떨어질 때의 소름이

널 처음 만났을 때와 닮았다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애와 인/중에서>

거짓말. 애인이 옆에 있어서 둘러대는 거짓말.그말을 믿어줄거라 계산되어있던  그 애인은

 

꼭 자정이 넘어서야 애인은

잠도 안 자고

자라지도 않은 발톱을 깎았다

 

이만큼이 내 어제야

(...)

 

고백하자면 애인은

발톱 깎는 시늉에 바쁜 날이 잦긴 했었다.

(...)

<척, 한/중에서>

자라지도 않은 발톱을 잘라 문밖으로 던져버리며 어제 속에 버려지는 역할을 맡은 그를 같이 버려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을거다. 거짓말에 대한 응당한 불성실. 불안정한 사랑은 허투루 마지막을 듣는다..

 

어젯밤 애인은 내 목소리 위로

버들낫 같은 짧은 달을 박아놓고 갔다

목줄에 매인 주인과 개처럼

천천히 기다리자고 했다

긴긴 시간을 헐떡이면서

오래도록 헤어지자고 했다

서로에게 벗어나기 위해 잡아당기는 목줄 같은

질긴 것들만이 큰 소리를 뽑아낼 수 있다는 여자의 울음,

볼록 솟은 여자의 울림통 같은

(....)

 

여자가 울었다

소문처럼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울었다

내 입술은 아무런 질감을 가진 적 없다

나는 끝끝내 여자의 표정을 알지 못했다.

<무성한/중에서>

 

한바탕의 믿을 수 없는 말들 사이 날카롭게 박힌 진실들은 사랑의 표정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이별 또한 오랫동안 울었다.

착하기만 한 누이며 앓아 누운 어머니, 아버지의 독백..형의 무심함은 그렇게 시집 이쪽 저쪽 귀퉁이에 놓여있다.

마치 어느 곳을 보아도 네 자책을 키울 준비가 되어있어.라고 힘주어 말하듯이, 자책의 증거들을 나열해 놓은 목록의 마침표처럼..

 

죄책감은 쉽게 피어나지 않는다. 조금씩 스멀스멀 피어오르다, 자책이라는 이름으로 별것도 아닌양 성장하다, 용서를 구할 대상이 상실되는 싯점에서 봄날 목련이 벙그듯이, 파도가 덮쳐오듯이 쏟아진 시너 통 위에 떨어진 담뱃불처럼 일순간 확장되어버리며 그 정체를 드러낸다. 거칠고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일순간..

죄책감은 그렇게 발현된다.

 

죄책감이 시작되는 싯점에 나는 차라리 꿈을 꾸기로 한다. 내가 잃은 속죄의 기회인 엄마가 거기 있다. 꿈 속에서는 '있다' 그러니 꿈을 꾸어야 한다.

 

(...)

그러나 꿈이다

꿈은 더이상 졸립지 않다

꿈은 슬퍼도 슬퍼하지 않는다

꿈은 집이다

꿈은 내가 사는 집인데 우리집은 아니다

꿈은 경계를 구획하지 않아서 벽지를 바르지 않는다

꿈은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다

꿈은 아프지 않다

꿈속에서 우리가 결코 싸우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꿈은 깨어난다

 

꿈에서 깨어나는 꿈을 꾼다.

<꿈이 꿈을 대신한다 /중에서>

 

꿈 속에서 경계가 모호한 꿈 속에서는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은것이다. 일순간 일어난 죄책감이 속죄의 대상을 찾는 꿈속에서 싸우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즉, 속죄를 해야할 것이 없다. 싸움도 다툼도 노여움도 용서 받을 것도 할 것도 없는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다. 하지만 정말일까? 그 꿈은 정말이었을까?

 

 

 #3. 원죄에 대한 고백.

 

어쩌면 시인의 죄책감은 "사람"으로 태어난 순간 느껴야 하는 관계 속에서의 갈등과 상실과 엮임과 화해의 소용돌이를 한 발 벗어나 들여다 보고 하나씩 떼어내어 저마다의 자리에 재배치하는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원래 있던 자리..

가난한 집일수록 깔끔하고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 우리 집이 그랬다.

무엇 하나 함부로 소비할 처지가 안되다보니 무엇이든 아껴써야했고,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단단히 단속해야했다.

나는 늘 제자리에 물건을 놓아두지 않는다고 혼나는게 일상이었지만, 좀체로 고쳐지지 않았다. 서랍 맨 앞에 자와 가위 그 뒤에 각도기, 각도기 위에 풀과 컴퍼스 그 옆에 반쯤 남은 연필들 그 뒤로 못쓰는 필통을 잘라 만든 볼펜깍지들과 더는 못쓸만큼 짧아진 연필의 잔해들이 놓여있었다. 풀을 쓰고 책상 위에 그냥 둔다. 엄마는 그러다 떨어져서 책상 밑으로라도 들어가버리면 꺼내기도 어렵고 그러면 또 사야하는데 물건 아까운줄 모른다고 지청구를 하셨다.

그래도 고집스런 나는 무엇이든 잃어버리기 좋은 자리에 던져두곤 했다. 그것이 없어지고 나야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것이 지금 쓰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갖고 싶었다.

이사를 하던 날 옷장이 나간 자리에 서너개의 자와 뚜껑이 열려 반쯤 흘러버린 물풀과 뚜껑이 사라져 색이 다 날아가버린 싸인펜, 쓰다만 스케치북 들이 패잔병처럼 너절한 모습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책상을 들어내자 상황은 더 참혹했다. 친구에게 주어야했던 편지들이 갈갈이 찢겨진채 책상 뒷편에서 곰팡이와 뒤엉켜있었다.

 

시인은 원래 있던 자리가 불편하다. 제자리에 놓여있는 것들의 결핍과 마주하는 것도, 그것들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도..

그것이 "나" 이기에 견뎌내야 하고 겪어야 하는 원죄의 시작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도 불편하다.

그래서 그는 자꾸만 자책한다. "나는 왜 (...)훼방 놓지 못할까 생각했다<우두커니/중에서> . 하지만 해결방도는 훼방이 아니다. 그저 그 죄책감을 끌어덮고 잠을 청하는 것 뿐..

"우리의 수업은 잠을 자는 것/ 계속해서 깨기 위해 계속해서 자는 것/ 오늘의 침묵은 거역의 방식<시뮬레이션1/중에서>"그렇게 그만의 방식을 찾아낸다.

 

#4. 그냥

그랬다.

노란 표지의 시집을 자꾸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시 한편 한편의 무게가 간단치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가슴 한켠에 쓱 들어와 앉는 시들..그리고 떠나지 않는다. 다음의 시가 또 들어와 앉았다.

그렇게 자꾸 쌓여가는 시들이 늘어갈수록 나는 호흡이 가빠진다. 떨구어내려해도 떨구어지지 않는 참담함 그 밑에서 음울한 색과 모양을 가진것이 떠올랐다

호기심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호흡이 가쁘니까..

나의 호기심이 가 닿지 않아도, 그것은 조금씩 균열을 시작했고 추하고 가련한것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를 쏙 빼닮은 그것이 담담하게 자기 소개를 한다.

"안녕? 나는 너의 죄책감이야. 잘 지내보자"

노란 현기증이 일었다. 아무래도 판도라의 상자를 연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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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인 좋아하세요? 라는 물음에 딱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면..정말 좋아하는 시인이거나 유명한 시인일게다.

나의 경우는 최승호, 최승자,(마치 남매처럼 비슷하게 닮은 이름들..), 함기석, 오은, 유희경등이 먼저 손에 꼽힌다.

도대체 취향을 알 수 없다고 누군가는 쥐어박는 소리를 했다. 젓갈을 좋아하면서 스파게티도 좋아하면 이상한건가?

내가 저들을 우격다짐으로 억지로 엮어보자면 '슬픔'이다.

조금 더 차고, 조금 더 날카롭고, 조금 더 끈적하며 조금 더 맑은 슬픔이라는 차이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슬픔의 시들이다.

 

 

 

 

 

 

 

 

 

 

 

 

 

 

 

 

 

 

그리고 최근 이 시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졌다.  그저 이것 저것 묶어놓은 것이 아니라 잘 쓰다듬어 뒤섞이지 않게 깔끔한 구절판이나 신선로처럼 내어놓는 묶음집들도 많아졌다.

그 중 두 권을 오래도록 펼치게 된다.

 

  순간을 읊조리다..영원한 귓속말..

 두 제목이 서로 마주하는 것이 재미있다. 순간과 영원..

그러나 그 목소리는 비슷하게 닮았다. 낮고 조용한 읊조림이며 속살대는 귓속말..

 

 

 

 

 

 

 

 

 

 

 

사실 순간을 읊조리다를 더 오래 끌어안고 다닌다. 왜냐하면..유희경 때문이다. 작년..나는 유희경의 맑은 슬픔에 매료되었다. 몇마디 안에 갇힌 슬픔. 그래서 좋았다.

 

아, 아직 미출간이긴 한데 곧 출간 될거라는 소식을 SNS로 알게 된다.

 

 

 

 

 

 

 

 

 

 

 

 

 

 

"16시" 라는 제목으로 나오는 세 권의 책에 관심과 기대를 하게 된다. 아직은 '유희경'이라는 이름에 이끌려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누가 아는가? 이것을 통해 나는 또 다른 이들과 만나게 될지 말이다. 책등에 베이다를 보며 '이로'라는 작가를 눈여겨 보게 되고, 어렵지 않게 책등에 베이다를 권하곤 했다.

 

『16시』는 시인과 타이포그래퍼가 한 짝꿍을 이뤄 만드는 작품집이다. 『16시』는 제한된 16쪽의 평면을 시인과 타이포그래퍼에게 제공하고, 짝꿍은 이 공간을 채운다. 그 채움의 형식은 협업이 될 수도, 대결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온전히 짝꿍의 몫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작업이 짝꿍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시와 타이포그래피가 한몸이었던 적이 있었다. 『16시』는 과거를 굳이 발판 삼지 않고, 시간이 흐르며 나뉜 둘을 다시 합쳐보는 작은 놀이이자 실험이다. 『16시』의 놀이와 실험은 어떤 시곗바늘도 16을 가리키지 않는 세계에서 펼쳐진다

 

놀이와 실험..이 두 단어만으로도 뭔가 가슴속에서 쿵쾅거리며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11월이 꼿꼿하게 마주 선 걸음으로 성큼 다가왔다. 곧 떠나갈게다. 한쪽 다리가 휘어 휘청거리며 12월이 되어질게다.

어쨌든..16을 가리키지 않는 세계에 대한 기대가 점점 증폭된다. 출간 알림을 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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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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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다 ⁃ see ⁃ 見

 

 

김영하의 글에 대한 소문과 평은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들 중 높은 순위에 속한다. 그의 책들은 늘 출간되기 전부터 기대감에 차 있었고, 출간 후엔 환호의 대상이 되곤 했다. 반작용이었을까,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의 열광에 끼고 싶지 않다는 졸렬한 마음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책을 사 놓고 읽지 않는다. 한창훈의 책을 사자마자 훌훌 읽어버리는 것에 비하면 이건 일종의 작가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르는 행위이다.

그런 식으로 별것도 아닌 독자가 벌이는 무례한 모독을 견뎌야 하는 작가가 하나 더 있다.

하루키. 어쩌면 김영하도 하루키도 과한 열광의 전조들과 들쑤심(?)이 없었다면 나는 그들의 글을 좀 더 호감을 가지고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래?’ 라는 삐딱한 시선으로 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거다. 어쨌든 각도를 잘못 잡은 탓에 그들의 글은 늘 대단치 않은 무엇으로 결론 내려지곤 했다.

 

 

김영하의 글을 꼼꼼히 읽은 처음은 ‘살인자의 기억법’이었다. 늘 삐딱한 시선으로 그의 글을 마주한 탓에 그의 글들은 늘 심드렁했고 그 심드렁함은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을 즈음엔 별 기대가 없었으며 덕분에 삐딱하게 설정된 시선은 각도를 잃었다. 편견없이 읽어내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아주 빨리 읽었다. 그렇게 읽고 나서 멍한 상태로 며칠을 지냈다.

‘내가 뭘 본거지?’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혼란이 생겼고, 그것이 김영하의 글이란 것을 떠올리며 나는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김영하의 글들을 찬찬히 다시 되짚어 읽으며 생각한다. 이 사람은 ‘잘 보는’사람이구나. 그래서 ‘잘 쓸 수 있는’사람이구나. 본다는 것이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것들에 작위적인 시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펼쳐져 있는 사물, 혹은 사건, 사람의 틈을 읽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여지는 전면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지만, 전부가 아니라면 그 이면에 품고 있는 의미나 음모는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반문 또한 없었던 나의 “봄”은 얼마나 근시안적 인가를 확인하고 만다.

 

시간과 공간과 사람과 사건의 틈새에 놓여진 생각들을 작가는 잘도 찾아낸다.

 

어릴 적 문방구에 가면 조잡하고 싼 조립식 장난감들을 살 수 있었다. 오빠들이 그것을 조립하는 과정을 구경하는 건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게 부러워서 나는 그들의 손의 움직임과 조립의 과정을 눈이 빠지게 살폈다. 어쩐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열심히 “보았”으니까 말이다. 다음 날 나도 문방구에 가서 조립식 장난감을 하나 샀다. 레지스탕스의 비밀 지령문을 펼치듯 조심스레 뚜껑을 열고 비닐을 뜯고 네모난 플라스틱 구조물 사이에 매달린 부품들을 잘라냈다. 무슨 모양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하나씩 잘라내어 주르륵 펼쳐두고 조립도를 보며 맞추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 작업을 성공하지 못했다. 영민하지 못했던 탓일 수도 있으나, 자꾸 어제 “본”것들이 헷갈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오빠들에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본 것에 대한 비웃음이나 조롱이 따라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어려도 자존심은 있었으니까.

 

본다는 건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아마 그 때 배운것 같다.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재조립하고 적당한 온도를 유지시켜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봄”의 완결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작가는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더 나아가야 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 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고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 한다. 본다는 것은 개별화의 과정이 아닌, 타자화를 통해 확장되고 공유되어지는 결과물이 된다. 온전히 개인적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보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작가가 썼던 스물 여섯 개의 칼럼. 그 속에서 넓혀보기, 좁혀보기, 파고들기, 펼쳐두기가 이어진다. 또한 작가의 이야기가 그가 읽었던 책들의 이야기가 조밀하게 엮여서 마치 잘 짠 화문석처럼 펼쳐진다. 아, 김현영의 일러스트도 빼먹을 수 없다. 과장되거나 생략된 그림들, 강렬한 색채들 말 그대로 김영하의 [보다]에서 가능한 행위는 “보다” 뿐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문득 영화 아바타에서 한참의 여운을 주었던 인사말이 떠올랐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 I see you". 시각적으로 본다는 의미가 아닌 상대를 이해하고 그 깊은 곳까지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았던 것으로 기억되는 그 인사. 본다는 것이 행위적 의미 뿐 아니라 내밀한 의미의 확장이며 대상과 연결되는 고리가 된다는, 그래서 공통의 서사를 만들어 낼 시작이 된다는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김영하의 [보다]는 ‘보다’ 잘 ‘보기’ 위한 조언 같은 것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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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첨자 발표 : 11월 5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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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기간 : 11월 12일(수)~11월 23일(일)


2. 인원: 5명 (최종 응모자 수에 따라, 추첨 인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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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모 방법: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와 스크랩 주소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 서평 방법 : 서평 기간 동안 알라딘 계정으로 서평을 작성 후, 

<만물의 공식> 서평단 발표 포스팅에 알라딘 개인 블로그 및 그 외 블로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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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으로부터 삶의 통찰력을 얻어야 하는 시대,

만물의 공식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며, 인간을 정의하는가?

 

 

인간이 알고리즘을 정의하는가, 알고리즘이 인간을 정의하는가?

세상이 숨 가쁘게 변화하고 있다. 얼마 전 SF 영화나 소설 속에서 본 것들이 어느새 눈앞의 현실로 나타난다. 손 안의 컴퓨터가 되어버린 스마트폰, 음성이나 안면 인식으로 오픈되는 출입문, 피 한 방울로 온갖 질병을 알아내는 시대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기억하는가? 2054년의 워싱턴을 배경으로, 범죄가 일어나기 전에 이를 예언하는 선지자들에 의해 범죄를 막고 예비 범죄자에게 벌을 주는 범죄예방국 이야기다. 참으로 인상적이었던 이 영화는, 제목과는 달리 메이저급 히트를 쳤다. 영화가 개봉된 2002년 당시에는 미리 범죄를 예측한다는 것이 먼 미래의 이야기로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만물의 공식>의 저자는 이것이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처럼 홍채와 얼굴을 인식해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며 친근하게 광고하는 세상이 멀지 않았다는 말이다.  

물론 영화에서와 같은 선지자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알고리즘이 있다. 알고리즘은 우리 주변 곳곳에 파고들어 있다. 흔히 알고 있는 인터넷 검색뿐 아니라 오락, 연애, 결혼, 이혼, 법률을 비롯해 영화, 음악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알고리즘과 얽혀 있다. 곧 인간의 창조성과 정체성, 인간관계까지도 알고리즘이 규정할 날이 머지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측정한다 고로 존재한다

우리는 알고리즘을 단순히 수학과 기계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알고리즘은 어디에나 있고, 무엇이나 한다. 이를테면, 알고리즘을 통해 엄청난 양의 문서를 빠른 시간 내에, 훨씬 정확히, 값싼 비용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래서 초급 변호사들이 하던 소송의 사전 심리 절차인 증거 개시를 이제는 알고리즘으로 해결한다. 2012년 애플 대 삼성의 특허 소송에서도 사람의 손이 아닌 알고리즘으로 문서를 처리했다. 리걸줌이라는 자동문서조합시스템은 유언장, 회사 정관 등을 헐값에 작성하게 해준다. 위보스라는 이혼 서비스는 이혼 절차를 좀 더 매끄럽게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술을 마신 사람이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감지하는 자동차가 개발되고, 구글에서는 무인 자동차를 개발하고 있다. 또한 알고리즘은 안면 인식 기술로 테러리스트를 가려내기도 하고, 의료 보험이나 식량 배급표의 혜택을 주기도 한다.

이런 생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알고리즘은 점점 인간의 창의성을 대신하고 있다. 에퍼고직스는 어느 영화가 성공을 거둘 것인지 분석해주고, 심지어 시나리오의 어느 부분을 보완하면 되는지 조언해준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구글 번역은 쓸 만한 수준이고 점점 나아지고 있다. 미술의 진품과 위작을 판별하는 자동미술비평 알고리즘도 개발 중이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이아모스라는 음악생성 알고리즘이 작곡한 음악을 연주했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 알고리즘이 모든 일을 대신할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알고리즘은 완벽하지 않다. 일률적인 법 적용은 규칙과 기준의 문제를 제시한다. 8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려서는 안 된다는 법을 규칙으로만 적용한다면, 도로나 운전자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범칙금을 물릴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무인 자동차가 대신한다면, 아무리 급한 환자가 있어도 구급차는 8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릴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의료 보험을 적용하거나 식량 배급표를 배부할 때도 일률적인 규칙만 따른다면 수많은 예외 상황을 적용하기 어렵다. 알고리즘에 맞춘다면 점차 법률은 단순화되고 일률적으로 변해야 할 것이다.

예술의 문제는 좀 더 미묘하다. 과연 오리지널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 것인가?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하는 알고리즘이 듣기 편하고 보기 좋은 작품을 생산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우리에게 판단을 맡긴다.

 

 

알고리즘의 미래,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알고리즘이 여전히 고전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특히 인간에 맞먹는 인공지능의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자동화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럴 수 없는 일이 있다. 아직도 인간에게는 너무도 쉽고 당연한 것들은 어렵고, 어려운 것은 쉽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능을 필요로 하는 일, 즉 의학적 진단이나 처방, 법률적인 조언은 인공지능이 뛰어난 부분도 있다. 그런데 오히려 교육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혹은 동물이라도 할 수 있는 일들, 이를테면 명암을 구별하든가, 혼잡한 지형을 통과하든가, 컵을 컵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직도 인공지능에는 부족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주식 분석가나 공학자, 가석방 심사위원은 알고리즘으로 대체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원사나 요리사, 안내원 등은 대체될 수 없는 직업이 될 것이다.

물론 앞으로의 사회에서 알고리즘은 많은 일을 대신할 것이다. 알고리즘을 생성하는 컴퓨터과학자와 수학자는 법률을 결정하거나 문화적 결정권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알고리즘이 인간보다 더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작업 공간에서는 아주 적은 수의 인간만이 노동하고 나머지는 모두 알고리즘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다. 알고리즘이 작업에 드는 비용을 낮추면서 일자리도 줄어들 것이다. 어쩌면 더 이상 인간은 노동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반드시 자발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디스토피아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겪게 될 것이다.

멜빈 크랜즈버그가 “기술은 좋지도, 나쁘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고 말했듯이, 알고리즘은 좋지도, 나쁘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알고리즘을 설계한 이의 편견과 성향은 반드시 알고리즘에 반영된다. 그러므로 알고리즘이 적용되는 방식 또한 객관적일 수는 없다. 물론 알고리즘이 가치 판단을 내리지는 않지만 말이다. 문제는 알고리즘이 미치는 영향력이 무척이나 광대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알고리즘은 너무 복잡해서 사실 이를 만들어낸 엔지니어조차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알고리즘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에서 윤리적, 성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알고리즘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을 분석하고 분류하려 드는 알고리즘의 시도를 방해하거나 끊어내는 전술을 개발한다. 그러려면 현대의 가장 귀중한 수단을 포기하고 공적 담론에서 소외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굳이 그런 불편을 감수하기보다는 알고리즘의 투명성과 불투명성 문제에 집중하고, 만물의 공식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우리의 인간다움을,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일 수 있겠다.

 

지은이와 옮긴이

지은이 루크 도멜

컬럼리스트이자 영화 제작자이다. 《애플 혁명》을 썼다. 〈패스트 컴퍼니〉, 〈더 챕〉, 〈컬러오브맥〉 등의 잡지에 글을 싣고 있다. 대중문화와 과학의 접목에 관심이 많으며 다양한 세상문제를 예리한 저널리스트의 눈과 학자적인 풍성함으로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게 펼쳐내,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언 매캘런과 알랭 드 보통을 비롯한 출판계․방송계 인사들과 수많은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여러 편 감독하기도 했다.

옮긴이 노승영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한다. 옮긴 책으로 《측정의 역사》, 《통증 연대기》, 《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 《흙을 살리는 자연의 위대한 생명들》, 《이단의 경제학》, 《게놈의 기적》 등이 있다. 직접 ‘만물의 공식’ (http://socoop.net/TheFormula)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독자와 소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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