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나은 선택이란 없다. 지옥뿐이고, 지옥뿐이라면, 당숙도지옥에 있어야 했다. 

경찰은 이 일은 어른들한테 맡기고 학생은 일단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나 아니면 아무도 몰라요. 나 혼자 겪은 일이라고요. 그런데 나를 빼고 뭘 한다는 거예요??
이건 어른들이 해결할 문제라고 경찰은 대꾸했다. 

 저항하면 죽을 것 같았다고 제야는 소리 질렀다. 강간이 잘못이지 반항하지 않은 게 어떻게 잘못이냐고 발을 구르며 소리 질렀다

나이 많은 여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말 그런 일을 겪었다 쳐도, 그래도 너는 잘못이 있다. 그렇게 자랑하듯 떠벌리면서 벌을 주겠다고 그러는 것도 정상적이지는않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너도 부끄럽고 우리도…..
우리가 다 부끄럽다. 감추고 쉬쉬해도 모자랄 판에 이게재판을 받겠다고 나설 일이냐, 대체.
당숙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제야는 혼자 울었다. 남들 앞에서는 울지 않고,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잘못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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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겐 각자의 그늘이 있지. 나는 그 그늘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때로는 그늘이 그 사람을 고유하게 만드는 것도 같다.
 어른들은 눈치 못 챘겠지만 나도 종종 그렇다. 욕하고싶고 울고 싶고 죽고 싶고 내가 너무 초라하고 막막하고불행한데 이상한 것에 웃음을 멈출 수 없고 아무나 보고두근거린다. 아니, 아무나는 아니다.

내 입장에서 말하는 사람은 없다. 내 입장이 되고 싶지않은 거겠지. 나와 같은 일을 자기들은 겪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하면 다음 삶으로 넘어갈 길이 보일까. 기억을기억으로만 두고 감정을 제거할 수 있을까. 

 제야가 두려워하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기를 질책하는 말,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게
선명해졌다.
신고할 거야.
제야가 말했다.
잡아가라고 할 거야.

 모든 게 거짓말 같은데 시각적 기억이, 몸에 남은 감각이 너무 또렷했다. 후려치듯 떠올랐고 실제로 맞은 것처럼 아팠다.

당숙은 제야를 강간한 게 아니라 여자를 강간한 것이다. 여자 중에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여자.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여자.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여자.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여자. 일을 벌인 후에도가까이서 통제할 수 있는 여자. 남들한테 얘기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여자. 그래서 또다시 강간할 수 있는여자……… 미성년자인 친척 여자. 제야는 그 조건을 충족시켰다. 제니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밝아올수록 제야는또렷해졌다. 있었던 일과 들었던 말과 그 의미까지, 곱씹을수록, 제자리를 찾아갔다.
제야는 자기를 지키고 싶었다. 제니를 지키고 싶었다.
제야는 강해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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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카시오페이아는 의자에 앉아 거꾸로 매달리는 벌 을 받았고 그대로 별자리가 되었다고 그랬잖아. 근데 우 주에도 위아래가 있나? 우주에도 거꾸로가 있어?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승호가 물었다. 어릴 때는 밤하늘이 마냥 천국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저곳에 지옥도 섞여 있는 것 같다고 제야는 생각했다. 

 처음에 개똥무덤이라고 나오잖아. 개똥벌레는 개똥벌레지 반딧불이가 아니라니까.
너는 개똥벌레가 뭔지도 모르면서.
너도 모르잖아.
난 알아. 울다가 잠드는 벌레는 다 개똥벌레지. 

가끔 아저씨가 별로라고 생각될 때가 있는데, 뭐든명성이나 돈이나 그런 걸 기준으로 좋다, 나쁘다 말하는것 같을 때. 근데 사실 안 그런 어른이 어디 있나. 우리 엄마도 아빠도 그러는데. 어른만 그런가. 내 친구들도 그러는데, 나라고 안 그런가. 나는 안 그러고 싶다. 안 그러고싶다는 마음을 계속 갖고 있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정말 괜찮다고 또 거절해야 했다. 어른한테 싫다고 말하는 건 왠지 무례한 것 같아서 괜찮다고말하는 건데 생각해보면 아저씨 아닌 다른 사람들도 자주 그런다. 거절인지 모르고 같은 말을 계속하고, 괜찮다.
고 대답하다보면 나는 점점 안 괜찮아지고, 

싫다고 말해봐. 싫어. 싫다고 말해봐. 싫은데, 그런 말을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계속 웃었다. 여기에 싫다.
는 단어를 계속 쓰다보니까 싫다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단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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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일기를 쓸 때 제야는 단어의 한계를 답답해했다. 단어들은 너무 납작하고 단순해서 진짜 감정의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바람이나 햇살, 풍경과 냄새를 표현할 때도 궁핍했다. 입체를 평면에 구겨 넣는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사과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사과를 하고그런다. 동우는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결국 쓰지 못했다

제야는제니가 부러웠다. 글을 잘 쓰는 제니도 부러웠지만, 싫어요‘라고 말하는 제니가 더 부러웠다. 어른들은 제야를 보고 만이라서 의젓하다고 했다. 제니에게는 막내라서 철이 없다고 했다. 제야는 그런 식의 구분이 싫었다. 그런 말로자기를 싫어요‘라는 단어에서 멀리 떨어트려놓는 것만같았다.

일어난 일은 종이가 아니니 찢어도 태워도 없어지지 않고 없던 일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없애버리고 싶었던 일로 만들고 싶은 건 엄마도 아빠도 마찬가지인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쓰고 있다. 내게 모든 걸떠밀고 나를 없애버리고 있다. 지금의 나를 쓰레기로 만들어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다 나를 위해서라고, 내 미래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찢어버리고 싶은 건 내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찢어지고 있다. 

어째서 당하고만 있었는지. 어째서 부끄럽지 않고 고통스러운지. 당신들이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그 모든 것들, 설명을 요구하는 그 모든 의심들, 설명해봤자 핑계나 변명으로 듣는 걸 알아. 어째서 내가 변명을 하나. 변명은 가해자가 하는 것 아닌가. 당신들에게 나는 가해자인가..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건 내 감정이 아니다. 내겐 아무잘못이 없다. 아무 잘못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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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그녀는 자기 거울을 아프로디테에게 바쳤다. ˝나 자신을 지금 모습대로 보고 싶지 않지만 과거 모습대로 볼 수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짧은 인생은 자연이 내려준 가장 큰 축복이라는 대 플리니우스의 말이 전혀 놀랍지 않다. 정신과 신체의 기능 쇠퇴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살아도 산다‘고 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로마에 항상 일거리가 있긴 했어도, 최저생활 수준으로 사는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또 아마도 정신적으로 상당한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온갖 위험한 장소에서 날이 좋거나궂거나 고된 노동에 시달렸으니 상해 및 사망률이 오늘날 기준으로 봤을 때 그야말로 아주 높았을 터이다. 

아테네에서 공직은 30세를 넘긴 모든 성인 남성에게 열려 있었고 최종 임명은 추첨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공직자로 이름을 올리기에 앞서 수많은 질문에 답변해야 했는데, 그중 하나가
‘부모님을 잘 모시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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