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호들갑을 떨면서 약봉투를 들고 약국을 찾아왔다.
"무슨 이런 약이 있어요? 내가 정말, 놀란 거 생각하면..글쎄, 내가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큰 볼 일을 봤는데 말이죠. 보통 때 같으면 그냥 물을 내릴텐데, 그날따라 괜시리 흐뭇해져서 확인을 했더니, 세상에...약이 녹지도 않고 고대~로 응아에 묻어서 물 위에 둥둥 떠다니지 뭐에요? 이 무신 이런 일이 다 있다요? 이거, 소비자고발센터에 신고해야 되지 않나요? "
"어머. 놀라셨겠어요. 약 드릴 때 말씀드렸는데, ㅎㅎ 바로 잊어버리셨구낭~ 이 약이 제형이 원래 그러케 만들어져서 그래요. 오로스 제제는 그런데요. 약을 먹으면 삼투압 원리로 인해 약 안의 내용물만 쏘옥 빠져서 흡수되고, 약 껍데기는 그대로 변으로 빠져나오게끔요. 그러니 약이 흡수가 전혀 안 된 게 아니고 모두 흡수되었으니 걱정마시구요. 앞으로 변으로 나와도 그냥 흐뭇하게 웃으시면 되셔요. 제가 약을 보여드릴께요. 이름은 아달라트 오로스. 여기에 보믄 아주 미세하게 작은 구멍이 보이지요? 이쪽으로 약물이 쪼매씩 흘러나오는 거에요. ㅎ 신기하지요?"
손님의 경험담을 들으며 막 재미나게 수다를 떨다가 문득 옛 생각이 났다. 학교 때 무슨 과목인지 기억도 안 나는 1학년 1학기 첫 수업 시간에 키가 커다랗고 삐쩍 마르신 남자 교수님의 재미있었던 구충제 이야기. 우리나라 약의 역사에 관한 수업이었는데, "옛날의 구충제는 충을 죽이지 못하고 사람의 배 속에서 못 견디게끔 만든다. 그래서 결국 충이 살아서 인체 밖으로 나가게 된다. 그러니 변 속에 보면 충이 꿈틀거리는 게 보이지. 그러나, 지금의 구충제는 형식이 바뀌어서 충의 외피를 그야말로 흐물흐물 녹여버려. 그래서 변을 보아도 꿈틀거리는 충이 보이질 않지. 그래서 예전과 달리 시원한 맛은 좀 떨어져." 이런 내용의 이야기였다. 우리는 모두 으악, 징그러. 하면서 손사래를 쳤는데 나 역시 그러하다가 문득 잊혀진 어린 시절의 한 토막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까마득히 잊고 있던 일이.
기억 속의 나는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서너살 쯤의 어린 아이였다. 네 살 위의 큰언니는 그저 무섭기만 했지만, 두 살 위의 작은 언니는 나를 데리고 잘 놀아주었다. 어린 얘들은 낯선 곳에 가면 길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어른들로선 어린 얘들을 밖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러나 모험심 강한 작은 언니는 종종 몰래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는데, 그날은 시장에 아주 재미난 사람들이 온다고 어르신들이 상기된 얼굴들로 우루루 시장으로 몰려가셨다. 내 사는 곳은 시골이라 오일장이 서는데 재미난 사람들이 아주 재치있는 만담을 하며, 신기하기 그지없는 일들을 벌인다는 말들이 나돌았다. 작은언니는 일하느라 분주한 엄마와 아빠 눈치를 보더니 나를 데리고 시장으로 갔다. 아..짧은 다리에 시장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다리가 아파 징징대던 나를 작은 언니는 업고서 데리고 갔다. 시장에 도착했을 때의 그 활기. 그 소음.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은 색다른 세상이었다. 사람들의 큰소리,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심장이 벌렁거리고 흥분해서 나는 너무나 좋았다. 어디선가 큰 목소리가 들려왔고, 북 소리, 하모니카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있는 곳이 보였다. 아, 저곳이다! 키가 작은 나와 언니는 어른들 가랑이 사이로 파고 들어서 맨 앞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선 어떤 사람은 아주 우렁차고 세련된 목소리로 인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의 몸 속에 충이 우글거린다면 믿겠느냐. "아니요" 그 충을 그냥 배 속에 넣어둘 거냐 "아니요" 경상도 사람들은 대답도 잘 한다. 시끌벅쩍, 와글와글하다가도 앞에 선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조용해지고, 그 사람이 물으면 신나서 대답도 잘 한다. 한마디로 준비된 청중이라고나 할까. 그럼, 내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그 충의 정체를 보여주리다. 자, 희망자 나와보세요. 어른은 쪽팔리니까 작은 아이가 나오면 좋겠는데? 아...뭔지 모르지만, 나는 손을 들고 싶었다. 신기한 무언가를 하는데 나도 동참하고 싶었다. 앞으로 나서려는데 작은 언니가 팔로 나를 잡는다. "쉿. 우린 여기 몰래 온 거야. 괜히 나섰다가 우릴 알아보는 어른들이 있으면 곤란해. 그러니 오늘은 그냥 구경만 하는 거야." 내 끓는 피를 언니는 주저앉혔다. 언니가 미웠다. 맞은 편에 있던 조금 덩치 큰 남자아이가 튀어 나왔다. "제가요. 제가 해볼래요." '저 자식이..내가 할 건데..ㅠ.ㅠ'
약장수는 아이에게 약을 먹이고 물을 먹였다. 그리고 아이를 한 켠에 두게 하고선, "좀 있다 배가 아플테니 여기에다가 응아를 하면 돼." 하신다. 그래놓고 약장수는 이런저런 구수한 이야기를 하면서 입담을 뽐내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으하하, 와하하, 신나게 웃고 난리가 났다. 나는 약장사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 아이만 쳐다봤다. 그 아이는 이윽고 기미가 오는지 응아를 했는데 엄청 했다. 엄청나게 많은 응아 속에 꿈틀거리는 회충들. 응아를 뒤적거리던 아저씨는 응아 속에서 발견한 회충을 작대기로 건져서 보여주면서, "자, 이런 것들이 당신들의 배 속에 있답니다. 이제 저를 믿으시겠습니까?" 와~믿어요. 믿어. 여자 어른들은 징그럽다고 난리가 났다. '칫. 저게 뭐가 징그러. 지렁이보다도 더 작은데..' 그 시절 나는 지렁이를 보면 손톱으로 반토막을 뚝뚝 내면서, 그래도 살아 꿈틀거리는 걸 보며 환호하던 잔인한 어린 시절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자. 그럼 이제 얘들은 다들 집에 가세요. 얘들은 가라 가. 자 어르신들. 평소에 피로를 많이 느끼십니까? 어깨가 아프십니까? 무릎이 시큰거리십니까?" 란 말을 뒤로 하며 언니와 나는 손을 잡고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하늘은 무척 파랬고, 신기한 시장 구경을 해서 좋았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 뱃 속에도 충이 들어 있을텐데. 구경만 하다니. 아..너무 분해' 흐르는 눈물과 함께 어쩜 내 생애 최초 일지도 모를 흥분은 그렇게 가라앉았다.
약장수들
김형수
나는 어릴 때 약장수 굿을 좋아했다
손에는 하모니카, 등에는 큰북, 발뒤축에는
심벌즈를 치는 끈 달린 신을 신고
보여요? 안 보여요 들려요? 잘 안 들려요
부딪치는 발길에 밀려드는 파도에
얘들은 가라!
감기 든 날 오후에 이불 속에 묻혀서도
어른들 가랑이를 끼어 다녔다
그리움은
어둠 속 별처럼 허기진 가슴에 빛을 뿌린다
약장수가 오면, 약장수가 와서 또 굿판을 벌이면
팡팡 쏟아지는 말씀의 포탄들
새떼들도 놀라고 낮달도 아득히 머리 위를 떠가지만
석양이면 장터는 멸망한 왕조처럼 빈터만 남는다
돌아서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것을
약장수 떠들던 제품도 효능도 썰물에 씻겨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생각나요? 아무 생각 안 나요
그래도 세상은 장터로 변하여
정치도 시도 약장수들 판이다
약국에서 약을 팔다가 문득 어린 시절에 봤던 약장수의 그 언변이 떠오를 때면, 사람들에 우~ 둘러싸여 있던 약장수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갇힌 공간을 유독 싫어하고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나에게, 갇힌 공간의 갑갑함을 잠시 잊게 해 주는 건 손님들과의 재미난 이야기. 그건 바로 그때 그 시골장터에서 약장수가 구경꾼들과 교감했던 그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