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시디 왔어?"
"아니요.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주문하는 데 시간이 걸려요."
"음..그래?"

<일주일 뒤>

"피아노 시디 이제 왔는가?"
"아니요. 제가 좀 바빠서요. 기다리신 김에 조금만 더요."
"뭐..그러지 뭐."

<일주일 뒤>"

(아주 호들갑스럽게 반기며)
"어머. 기다렸는데 왜이렇게 늦으셨어요? 피아노 시디 왔단 말에요. 자요, 선물! 히히히"
"어이구. 그래? 이게 그 시디야? 너무 고마워. 잘 들을께."

약국 오픈 때부터 오시던 마도로스 출신 할배네 집에 이제 전기가 들어 옵니다. 시골 구석탱이 중에서도 아주 깊은 심심산중에 있는 종갓집을 돌보면서 지내는 할배네에는 그동안 전기가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작년 여름이 깊어가도록 할배는 낮이면 산에서 쓰러진 나무들을 모아서 장작을 팼습니다. 한쪽 구석에 수북히 쌓아놓은 장작으로 가을 밤부터 겨울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고, 그 위에 얹힌 무쇠솥 안의 뜨끈하게 데워진 물로 몸을 씻었으며, 따끈한 아랫목에서 포근하게 잠을 잤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저녁이면 호롱불을 켜놓고 분위기를 즐겼고, 군립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밤을 지새우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전자 올겐을 보면서 전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나 봅니다. 군청이며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민원도 넣고, 청탁도 하고,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죄다 해 보시더니 결국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한참 떨어진 아랫 동네 민가에서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나, 할배네에 전기가 들어오는 걸 싫어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네들은 전기가 들어오면서 말입니다. 할배네에  전기가 들어오려면 전신주를 세워야는데 그 전신주가 아랫 동네의 이익과 상충하나 봅니다. 이래저래 시간을 끌더니 어느 날엔가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이제 할배는 밤에도 책을 볼 수 있고, 고대하던 피아노도 칠 수 있습니다.
 
할배의 피아노 실력은 도레미파가 어디 붙었는지 아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주 자신만만하십니다. 벌써 피아니스트가 된 양 의기양양해 하십니다. 모르면 배우면 된다! 그게 할배의 지론이거든요. 시골에 무슨 그런 강좌가 많은지 저는 할배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할배는 컴퓨터도 어딘가에서 공짜로 배우시고, 피아노도 공짜로 배우시고, 무슨 토론도 하시고, 이것저것 안 배우시는 게 없으십니다.  할배는 생활보호대상자여서 정부에서 다달이 얼마를 주는 게 있나 봅니다. 그걸로는 생계를 유지하시고, 시골에서 읍내를 오갈 때 쓰는 차 기름값을 얻기 위해서는 뒷산 밤나무에 올라가 밤을 따서 내다 팔기로 하고, 호두도 팔기도 하더니, 어느 날엔가는 버섯을 따기도 하더군요.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던 마도로스 할배가 시골에 오더니, 완전 산골 노인네가 되어서 못하는 게 없으십니다. 할배는 어딘가에서 공짜로 갈켜주는 곳을 찾아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도레미파를 손가락 번호대로 따라 연습을 시작하더니 매일 꾸준히 하셨나 봅니다.  수업을 듣고 나면 약국에 종종 오셔서 자랑을 하고 가시는데 한동안 자랑이 뜸하다 싶더니 한 달 쯤 전에는 피아노 책을 들고 가게에 들어 오십니다. 체르니 30 번이네요.

"이봐. 약사. 이걸 내가 잘 모르겠단 말야. 이것 좀 봐봐. 왼손 치는 음이 오른손 치는 음으로 왔어. 이걸 어떻게 쳐야 해?"
" 네? 그게 무슨..아..잠깐만요. 책 좀 봅시다요. 아~ 이거요? 오선지가 두 개 있잖아요? 위에 높은 음 자리표는 오른손 치는 거, 밑에 낮은 음 자리표는 왼 손 치는 거. 그런데 왼손도 가끔은 높은 음을 칠 수 있잖아요. 그럴 때 위에 오선지로 이사와서 그리기도 해요. 이걸 어케 구분하냐 하면요. 음표 꼬리가 위로 올라갔으면 오른손, 밑으로 내려갔으믄 왼손. 이래 보시믄 되요."
"근데, 이게 그럼 위치는 어떻게 되는거지?  이게 음이 뭐야?"
"아..음은 오른 손 음이 치는 거 그대로요. 자, 잘 보세요. 블라블라...."
"아하! 그렇구나. 실은 요새는 내가 독학을 한단 말이야. 근데 독학을 하려니, 이게 무슨 음이 나오는지 잘 이해가 안 가서. 그래 내가 피아노 잘 치는 약사에게 물어보러 왔지. 고마워."
" ㅎ 네. 언제라도 모르시는 거 있으심 들고오세요. 참, 그리고 독학을 하시려면 피아노 시디를 같이 듣는 게 좋아요. 뭐..제가 선물 하나 해 드릴께요. 저도 시디 들으면서 피아노 치니까 한결 도움되고 좋더라구요."

이 말이 끝나고, 할배는 한 서너 번은 가게에 들러서 시디 왔냐고 계속 보챘습니다. ㅋㅋㅋ 게으른 저는 깜빡 잊고 주문 안 해놓고선, 어머~ 이상하게 주문이 늦네요? 어머~ 시디 찾는게 시간이 걸리나? 어머~ 담에 드릴께요~ 등등. 할배를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ㅋ 오랜 기다림 끝에 시디 선물을 받으신 할배는 며칠 뒤  미니 오디오를 들고 가게에 왔습니다. 집에 있는 오디오는 고장이 났다고 하네요. 그래서 겸사겸사 새로 오디오를 사셨답니다. ㅋㅋ 구두쇠 할배가 큰 돈 쓰셨네요. 거금 5만원이나 한다네요? 와우. 할배는 오디오를 자랑도 할 겸, 또 조언도 들을 겸 놀러오셨습니다.

"이봐. 약사. 근데 이거 왜 이렇게 빨라. 이렇게 빨리 쳐야 돼? 함 들어봐봐."

처방전 손님이 오가고, 매약 손님이 오가는 약국에 피아노 선율이 흐릅니다. 띵 띠리리리.

"아..할배. 이거는 느리게, 빠르게, 두 번 나눠서 치는 거 잖아요. 할배는 느리게, 그 속도에 맞추시면 되요. 빠르게, 속도는 할배에게 너무 빨라요. 이거는 음대 목표로 하는 얘들 치는 거구요. ㅎ 저는 저 빠른 속도로도 죄다 쳤답니다. 히히히"
"그래? 이거는 연습 안 해도 돼? ..."
"그럼요. 들어보셔요. 빠르게, 부분은 음이 잘 들리지도 않잖아요. 이게 얼매나 빨리 치는 건데요. 할배는 그저 앞에 느리게, 속도보다도 더 느리게 치셔도 되셔요."

둘의 대화를 듣고 계시던 다른 처방전 손님이 할배가 나가자 한 마디 하십니다.

"어우, 너무 존경스런 노인네시네. 저렇게 늙으셨는데 아직까지 정열이 남아 있다니, 너무 대단해."
" ㅎ. 그렇지요? 저 할배 너무 귀여우세요. 평생 청춘이실 분이세요."

벌써 2년째 봄이 오면 할배는 헌화가의 할배인 양 제게 꽃을 바치십니다. 꽃 몽우리가 살짝 올라오는 진달래를 꺽어서 들고 오시기도 하고, 강변에 피어있는 어여쁜 들꽃을 한아름 꺽어서 오시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안개꽃 닮은 이름 모를 꽃을 잔뜩 들고오시기도 했구요. 올해는 무슨 꽃을  들고 오실 지 궁금해지는 4월이 이제,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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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5 10: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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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6 2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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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16: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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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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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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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14: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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