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떠올리는 사람은 나와 정신적 세계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불과 얼마 전인데 나는 이렇게 어느새 시의 세계에 모종되듯 넘어와 있다. 언제 어떻게 넘어오게 되었는지는 나 조차 알 수 없는 사연이다. 어떤 미래에 내가 시집을 들고 있고, 시를 읽고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없었건만, 미래는 나를 이 곳으로 데려다 놓았고, 나는 시인들의 새로운 세상이 가득 펼쳐져 있는 시집을 한 권씩 읽고 있으며 시 속에 시인들이 숨겨놓은 향기를 만끽하고 있다. 최근에 읽은 여러 권들 중에서 황지우의 시집을 시발점으로 해서 리뷰쓰기를 지속적으로 하고 싶은 개인적 바램이 있다. 시집 말미를 장식하신 분은 이인성이란 분인데 황지우 시인과 친한 눈치다. 게다가 글을 쓰시는 분이란다. 발문을 읽으면서 발문을 쓴 사람에게 관심이 갔다. 아..멋진 부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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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내 몸은 방금 껴안았던 이 시집 옆에 축 늘어져 누워 있건만, 내 마음은 어서 다시 껴안고 싶어 안달이다. 뭐라고? 그토록 매혹적인 존재라면 감추어진 비밀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해보라고? 솔직히. 나도 내친김에 이 시집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그 다채로운 촉감의 질들을 내 식으로 - 소설적으로- 자세히 묘사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쯤에서 멈춘다. 아무래도 그건 안 될 일이다. 이 시집이 나에게 처녀성을 주었는데, 그래도 첫 흘레의 비밀만은 혼자 속에 간직해두는 게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건 이것대로 솔직히, 여기까지 써온 것만 해도 내가 너무 해펐다는 자책감이 든다. 조금 정색을 하자면, 황지우가 평론가의 '해설' 대신 소설쟁이의 '발문'을 원한 이유도 헤아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생선회 치는 칼로 뼈만 발라놓을지 모르는 분석이라는 것 대신, 독자들로 하여금 시적 체험의 직접성을 향유하도록 매개하는 '뚜쟁이'를 원해서였다면, 나는 이 정도로만 변죽을 울리는 게 옳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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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이런 멋진 발문이라니. 그러니까 평론가는 해설, 소설가는 발문이로구나. 아하~ 어쩐지 기존의 다른 글들과 다른 느낌이 들어서 신선하더라니, 발문이었구나~ 나는 소설가에게도 관심이 생겨 내신 책이 있나 찾아봤다. <식물성의 저항> 음..제목부터 근사한데? 다음 번에 이분 책도 도전을 해야겠다. 발문을 이토록 멋지게 쓰시는 분의 소설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다시 시집의 발문으로 돌아가서, 소설가의 말에 무척!공감한다. 첫 흘레의 비밀을 만방에 퍼뜨릴 수는 없는 일이다. 글 쓰는 작가라면 은당 그 비밀을 아주 잘 간직해서 숙성시켜 이후 자신만의 새로운 작품에 양념으로, 혹은 메인으로 사용할 일이다. 소설가 이인성처럼 나 역시 황지우의 시집을 옆에 끼고 있다. 땀이 나고 정신 없는 시간들이 지나간 후 축 늘어진 정도까지는 아직 아니지만 말이다. 황지우의 시는 중간중간 어렵고 난해한 부분이 있어 해석에 조금 기대어가려 했더니 기대 밖의 성공이다. 시를 좀더 맛있게 읽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다시 책을 들어 읽었던 시를 새로 하나씩 읽어본다. 이번에는 황지우의 시어 중 '
바깥'의 의미와 '
진흙'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극과 극은 통하듯이, 거시우주와 미시우주 역시 통한다. 아주 작은 원자를 분해해 나가다 보면 그 속에 우주의 형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즉 안의 안은 바깥과 같다는 말일 터이다. 이러한 자연법칙은 그 속의 피조물인 인간의 삶에도 고스란히 투영되는데 삶에서 안의 안이 바깥이 되는 경험을 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인지하기는 무척 어려울 터이다. 그러니 황지우 같은 시인이 탐침의 기법까지 써가며 바깥을 찾으러 애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깥을 추구하는 건 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불교에서 선의 개념이 이와 동일할진대 이들의 수행방식도 또한 내 안에서 선(혹은 도)를 찾는 방법과 바깥에서 찾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극도의 이타심과 극도의 이기심이 일맥상통하듯이 이들의 수행방식도 극에 달하면 그 차이가 없어진다. 소설가 이인성에 의하면 황지우는 바깥의 갈구를 먼저 했다. 그러다 개인적, 사회적으로 다양한 사건들을 접하면서 안의 안으로 탐침을 시도한 듯 하다. 이번 작품은 확실히 '안의 안' 으로 그 지향점이 나 있다. 여기에 이인성이 덧붙이는 말은 이는 표층적 자아의 지향점이고, 이와 다른 분열적 자아는 거기에 저항을 하는데
소설의 묘미는 이 두 자아의 부딪침으로 인한 새로운 시적 실존 공간의 구축이라고 말을 한다. 조금 어려워진다. 황지우는 바깥, 즉 안의 안으로 탐침을 시도하지만 이는 선의 추구, 이상향의 지향과는 조금 각도를 달리하는, 현실이 아무리 비루하고 어렵더라도 그래도 이 땅에 발 딛고 살아야겠다는 힘겨운 의지를 보여주는 거라 생각을 하니, 이인성의 말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무궁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내 속에 오래도록 담겨 있는 것이 내 주위의 타인의 입으로 무심결에 나오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나를 안 지 얼마 되지않는 이웃의 입에서조차 그 말은 나올 수 있는데,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나도 모르는 내 깊은 곳의 비밀을 헤아리는 경우도 있기에 그런 상황을 마주치면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지게 된다. 언젠가 소설가 이인성의 입에서 나온 진흙 속의 미꾸라지의 비유는 그런 의미로 황지우에게서 오래 담겨 있게 된다. 황지우는 특히 진흙에 생각을 집중했는데 갯벌에서 진흙으로 손장난을 해 본 적이 잇으면 진흙이 얼마나 부드럽고 감미로운 입자인지 알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달려간다. 이 엄청난 진실은 때때로 잔인한 현실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데,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에 오히려 그동안 그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어리석은 현실에 더 경악을 하는 경우가 생긴다. 뼈와 살이 있는 형상으로 태어나 낳아준 우주로 모두 화하는 지점에 가장 근접한 것은 흙, 바로 진흙이다. 그 모태적이자 최종 정착지인 질료로서의 진흙에 대해서도 황지우는 탐침을 하는데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너무나 멋진 시가 탄생하게 된다. 우리는 진흙으로 가고 있는 예비 진흙들인 것이다.
<점점 진흙에 가까워지는 존재>
원목 옷걸이에 축 처진 내 가다마이, 일요일 오후의
공기 속에 그것은 있다
나를 담았던 거죽,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깨닫는 나의 한계;
(중략)
길게 모로 누워 있는 일요일; 이 내용물은
서서히 금이 가면서 점점
진흙에 가까워지고 있다
아시아나기 잔해에서 실신한 여자를 헬기가
끌어올릴 때 바람이 걷어올리는 붉은 팬티;
죽음은 그렇게 부끄러움을 모른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