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약국이다보니 고객분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으시다. 그러나 요새는 할아버지인지 아저씨인지, 할머니인지 아주머니인지 구분이 어려울 때가 많다. 대부분 염색약으로 머리카락을 물들이는데다, 요새는 외모 또한 가꾸는 시대라 그런지 외모로도 구분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예전엔 할머니들의 경우 대부분 허리가 구부러지고 꼬부랑 지팡이를 짚으시는 걸루 분간하기도 했는데 요새는 지팡이를 짚으시는 할머니들도 소수에 속한다. 몸관리들을 잘하셔서 허리가 구부러지는 사람도 줄어들었나보다. 그래서 나는 유독 흰머리를 고수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나는 아직은 흰머리가 하나도 없는데 흰머리가 나중에 생겨도 염색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흰머리의 고운 결을 은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흰머리가 하나씩 생기기 시작해 흰머리, 검은머리가 서로 섞이며 사이좋게 지내듯이 보이다가 흰머리로 도배하게 되는 날은 그동안 수고했다고 하늘에서 주는 은메달 훈장을 받는 느낌일 거 같애서다.
감기약이나 몸살약은 당장 아프기 때문에 사람들이 약을 받자마자 먹는 경우가 많다. 진통제 성분이 들어있으니 식사 후 30분 지나서 드시라고 하셔도 당장 아프시다 하소연을 하시곤 한다. 어쩔 수 없이 이번 한 번은 그냥 드시라고 하는데, 노인네들의 경우 약알을 흘리시는 경우가 많다. 내가 좋아하는 흰 백발의 최씨할아버지의 경우도 그러했다. 시골 어르신들은 병원 나들이가 큰 하루 일과에 속한다. 그래서 병원 오시는 날에는 집에 있는 옷 중 제일 깨끗하고 정갈한 외출복을 입고들 오신다. 그러나 안에 받치는 옷은 농사일 할 때 입던 옷 그대로여서 언밸런스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또한 얼마나 정감이 가는 패션인지 모른다. 할아버지는 그동안 입고 오시던 낡았지만 깨끗했던 점퍼 말고 새 옷 느낌이 물씬나는, 그래서 사각사각 소리까지 상큼하게 나는 연한 파랑 줄무늬가 들어간 흰색 점퍼를 입고 오셨다.
감기약 처방전을 들고 오셨길래 약을 지어드리고는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아서 약을 드시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약 드시는 동안 말벗이라도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약알을 주르르 흘리셨다. 급히 새로 약을 지어서 나와 보니 기다리시던 중에 물도 흘리셔서 앞섶과 소매부리, 입매에 물기가 흥건하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할아버지를 웃기기 위해 말을 돌려본다.
"어머. 할아버지. 이거 못 보던 옷이네요? 어머, 멋지세요. 누가 사주신 거에요? "
"으응. 우리 아들이 이번에 사줬어."
"어머~ 아들이 사준 이쁜 꼬까옷을 적셔서 어떡해요. 제가 깨끗하게 닦아드릴께요. 닦고나면 표가 안 날 거에요. 아드님이 효자신가봐요. 이렇게 멋진 옷도 다 사주시구요."
할아버지 입가에 미소가 고인다. 어르신들에게는 그저 아들 칭찬이 최고의 자랑거리이다. 우리 아들이 어디 사는데 연봉이 얼마고, 직업이 뭐고, 이번에 뭘 해줬고 등의 자랑이 늘어지는 다른 분들과 달리 이분은 그저 미소만 빙그레 지으신다. 순하신 양반의 미소 속에 앞서의 많은 자랑들이 담뿍 들어있다. 휴지로 할아버지의 소맷부리를 닦아주는데 할아버지가 부동의 차렷자세로 얌전히 앉아계신다. 웃으며 입가를 마저 닦아줄 때는 아예 눈을 감으신다. 아! 저 모습은 조카가 아이였을 적 밥 먹이고 입가 닦아줄 때의 표정과 꼭같구나! 어르신의 어렸을 때가 잠시 떠오르다 사라졌다.
약국엔 또다른 흰머리 김씨할아버지가 오신다. 그러나 김씨할아버지는 따뜻한 속마음과 달리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약간 거칠다. 얼마전 최씨할아버지의 기억으로 투덜이 김씨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투덜이 할아버지여도 자식 자랑은 남 부럽지 않게 하겠지, 이번에는 투덜스런 말 말고 고운 말을 들을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가 내심 있었다.
"어머 할아버지. 점퍼 너무 멋져요. 아드님이 사주신 거에요? 신세대 옷으로 골라주셨네요? 어머. 할아버지 멋쟁이 되셨어요~"
"아니야~아들이 내려올 때 입고 왔던 걸 갈 때 놔두고 가더라구. 입기 싫다고, 주고 간 거야."
"에이. 아드님이 할아버지 옷 새로 사왔다고 하면 비싼 옷 샀다고 뭐라 하실까봐, 일부러 그런 핑계로 놔두고 가신 거 아네요? 아드님이 이벤트쟁이시구나~ 속도 깊으셔~"
"아니야. 정말 지 입기 싫어서 나에게 버리고 간 거야. 디자인도 봐. 이렇게 후진 디자인이 요새 어딨어. 요새는 다 가벼운 신소재로 만든다던데 이건 뭐, 무겁기만 하고, 디자인도 구식이고. 에이.."
".........................."
두 할아버지의 자식 자랑법이다. 표현은 달라도 다 자식을 조선에 없는 내 아들이라 생각하겠지. 나는 아직 김씨할아버지의 사랑 표현법에 익숙하진 않지만, 어느 날엔가는 익숙해지리라 생각한다. 투털이 할아버지는 아직도 철이 안 든 어른아이같다. 나이 들어서까지 저래 철이 안 들면, 그것 또한 청춘의 한 모습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익숙해질 듯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