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 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일상적인 풍경에 눈이 시릴 때가 종종 있다. 양파 껍질을 까지도 않았는데 눈에서 물이 나올 때가 있다. 세월의 눈을 고스란히 받아 새하얗게 내려앉은 할머니의 쪽진 흰머리를 볼 때 그러하다. 지팡이를 짚고 헛둘 헛둘 걷고자하나 한 걸음 디디기가 고역인 모자 쓴 할아버지를 볼 때 그러하다. 할머니 등 뒤에서 배시시 천사 웃음을 지으며 빠이- 손을 흔드는 어린 아가를 볼 때 그러하다. 시장 좌판을 내고 오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며 파 한 단, 배추 한 포기를 파는 아주머니의 주름진 손을 볼 때 그러하다.
말이 없이, 풍경으로도 '시'가 되는 그러한 정경이 정현종의 눈에는 잘 보이나보다. 정현종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서 파가 쑥쑥 자라는, 그 형언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를 어찌한단 말인가. 정현종은 어찌하여 시간의 흐름을 쑥쑥 자라는 파로, 막무가내로 피는 밤꽃으로 묘사할 수가 있단 말인가. 막무가내라니..막무가내는 약간 무식하고, 제멋대로고, 막가파적인 단어 아닌가. 그런 단어를 가지고 어찌 이리 곱디고운 미소로 만들었을꼬. 막무가내로 피는 예쁜 밤꽃..
아..나도 막무가내로 피고 싶다. 나도 막무가내로 살고 싶다. 막무가내로, 삐까번쩍 고층빌딩 아래 삐죽이 솟아나는 잡초처럼 자라고 싶다. 막무가내로, 구르는 새똥 속에서 싹이 자라듯이 그렇게 구르고 싶다. 그런 막무가내를 내 속에 마구 담고 싶다.
이 시가 포함된 시집을 찾다가 이 시에 관한 어떤 해석을 하나 읽었다. 아이가 악기를 부는 순간, 아주머니가 파를 파는 순간, 할아버지가 뛰는 순간, 아가씨들이 연인에게 꽃을 바치려는 두근거리는 순간, 이런 순간들은 금방 지나가니 사랑할 시간은 턱없이 작다. 그러니 사랑할 수 있을 때 맘껏 사랑하라..라는 정도의 해석이었다. 에게? 이 시가 이렇게 읽힌다고?...
아..이래서 시의 해석이 천차만별이구나, 싶었다. 물론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가 서두에 왔긴 했지만, 그렇다고 뒤에 달아서 나오는 풍경들이 찰나적인 순간들의 대변은 아니지 않나.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들인데 고작 찰나적인 순간의 대변에 그친단 말인가. 뒤에 나오는 풍경들은 찰나이면서 영원의 순간들이다. 단순히 시간의 지속성만으로 영원의 순간을 말하진 않는 법이다. 영원의 순간은 이 순간의 풍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여기서 시간이 정지된다해도 좋겠다, 싶을 정도의 극치의 아름다운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씨앗이 떨어져 땅 속에서 자라 씨앗을 깨고 나와 흙 속에서 부지런히 자라고 자라 어엿한 하나의 파가 된 존재는 뿌리가 대지에서 뽑힌 순간에도 계속 쑥쑥 자란다. 뿌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뿌리는 대지의 기억만으로도, 잃어버린 흙의 추억만으로도 제 존재를 잃지 않고 아주머니의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란다. 뿌리마저 잘려나가 그 기억이, 그 추억이 흐려질 때까지 영원의 시간 속에서 파는 자란다. 뿌리없는 밤꽃도 마찬가지다. 대자연과 생식의 약속을 한 밤꽃은 꽃이 떨어지지 않는 한, 저절로 시들어 떨어질 때까지 그 약속을 지킨다. 아주머니의 보따리 속에서도, 막무가내로.
버스를 향해 뛰어가는 할아버지에게 한없는 연민을 느끼는 그 누군가에게는 그 장면이 또한 순간이며 영원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꽃을 바치려는 아가씨들의 두근거리는 마음에 봄꽃같은 화사함을 느끼는 그 누군가에게는 그 장면이 또한 순간이며 영원이다. 흐르는 시간을 느끼지 않고 부- 부- 플라스틱 악기를 부는 아이에게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퍼져가는 듯한 아스라함을 느낀다면 그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또한 순간이며 영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또한 사랑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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