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모리] 모노폴리 / 아이닷 Cable Winder [ 케이블와인더 / 와인더 ] - Brown
모노폴리
평점 :
절판


게으른 여자에게 좋은 깔끔한 스맛폰 케이블 와인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모리] 안테나샵 / m.Humming 아이스탠드 [ 스마트폰 거치대 / 스탠드 ] - Orange
안테나샵
평점 :
절판


거치대에 아이폰을 올려놓으니 음악이 스테레오로 들린다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아팠다. 언제부터 내가 그곳에 있었을까. 그곳엔 아이들이 많았다. 그곳은 재활원이다.  

우리 중에는 편지를 받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읽을 수 있는 아이도 있었지만 읽을 수 없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글을 알았다. 나는 그들이 내게 부탁을 하면 글을 읽어주었다. 아이들은 간호사들이 글을 읽어줬어도 다시 내용을 거듭 읽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나는 반대로 바꾸어서 읽어줬다. 예를 들자면, "우리의 사랑스런 아기야, 절대로 낫지 말거라. 우리는 너 없이도 잘 지내고 있단다. 너는 우리에게 아무 필요도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네가 거기에 계속 남아 있기를 희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집안에 신체장애자를 두고 싶은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는 소포 꾸러미를 받는 아이들도 꽤 많다. 과자, 비스킷, 꿀, 햄, 소시지 등이 들어 있는 꾸러미들이다. 나는 그들 중 하나에게 접근해서 물어본다. "소포에 독약이 들어 있을 수 있어. 그들은 불구인 자식이 죽기를 바라거든. 너는 거기에 뭐가 들어있을지 두렵지 않니?"

우리를 보러 오는 부모들도 있었다. 부모들이 현관에 도착하면 기다리고 있다가 아이의 이름을 물어본다. "안됐습니다. 그 아이는 이틀 전에 죽었어요. 편지를 아직 못 받으셨군요." 

나는 글을 모르는 아이에게 글을 읽어줬을 뿐이고, 소포 꾸러미를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내용물에 대해 대화를 했을 뿐이고, 단순히 아이의 이름을 혼동해서 부모에게 잘못 말했을 뿐인데 원장이 오해를 하고 나에게 따져 묻는다. 나는 억울하다. 나는 단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원장이 말한다.  
  

   
  "나는 네가 누구에게도 도움이 주지 않기를 바란다. 알겠니?" 

"네. 원장님.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아이든 층계 오르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거나, 넘어진 것을 일으켜주지 않았다고, 또 산수를 잘 가르쳐주지 않았다거나, 편지 쓰기에서 틀린 철자를 지적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제게 불평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내가 누군가를 돕는 것을 금지시키려고 하시거든, 누군가가 내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금지시켜주십시오."  (p30)
 
   

 

눈물이 주룩 나왔다. 아이의 외로움이, 아이의 들리지 않는 절규가, 아이의 보이지 않는 눈물이, 아이의 심장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이는 기억에도 없는 아팠던 몸이 나아가고, 휠체어에서 목발로, 다시 지팡이로 바뀌는 힘겨운 재활 과정을 그치는 긴 세월동안 한 통의 편지도, 한 번의 소포꾸러미도 없이, 한 번의 방문도 없이 견뎠던 것이다. 꿈인지 현실인지 가물거리는 단란한 가족의 기억만으로. 초록색 덧문의 하얀 집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노래를 하고, 뜰에서는 아버지가 나무를 자르고, 작은 방 다른 침대에서 같이 잤던 형제의 기억만으로. 나에게는 아무도 없었던 걸까. 나는 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걸까.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은 흐르고 나의 기억인지 상상인지 모를 것들의 존재는 갈수록 변형되어간다.

무언가를 이미 가진 사람은 그 행복을 종종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가졌던 것을 잃어버린 뒤에야 그것의 존재가 '행복'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물론 처음부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행복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억울한 그 심정만은 확실히 안다. 나에게는 없지만 남에게는 있는 그 무엇. 그것. 그것을 가지려면 어떡해야할까. 떼를 쓰면 될까. 간절히 바라면 될까. 아이는 그 모든 것을 다 해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순간 느꼈을 것이다. 아이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남의 행복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는 것이 그당시 아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남을 괴롭히는 자신을 표출하면서, 자기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의 괴로움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아이는 간절히 바라고 있던 것이 아닐까.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폭격으로 죽는 사람이 흔한 세상에 아이는 폭격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을 허파 속에 감추었다. 아이는 글을 쓸 줄 안다. 아이는 노트를 장만했고 노트가 하나씩 늘어났다. 노트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질까. 상상인지 흐릿한 기억인지 모를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갈까. 지금은 곁에 없지만 항상 같이 행동하고 같이 잤던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갈까. 현실의 나는 지팡이를 짚는 신세지만  이야기 속의 나는 아주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그저 즐거운 일만 일어나는 나날 속에 무럭무럭 자라는 건강한 아이로 바뀌어 들어가는 건 어떨까. 아니면 '행복, 단란, 사랑' 이런 단어들을 배제하고 감정을 죽이는 연습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그저 시간을 죽이며 자라는 아이로 들어가는게 좋을까.
 
내가 마음이 많이 아플 때, 
지금의 나보다 행복한 아이를 그리는 것이 나에게 위안이 될까. 아니면, 
지금의 나와 비슷한, 아니 지금의 나보다 훨씬 비참한 상황을 견디는 아이를 그리는 것이 나에게 위안일까.
 
아니면, 노트에 무언가를 쓰고, 행복이든 불행이든 상관없이 무언가를 쓰는 동안 내 곁에 존재해주는 가상의 그 무엇의 존재를 느끼는 그 자체만으로 위안일까. 어쩜, '소설'의 진정한 의미에 이것이 포함되기도 할까. 때론, '거짓말'이 삶을 지탱해주기도 하듯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웃 알라디너의 페이퍼에서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되고, 작가의 작품을 알게 되고난 후 같은 책을 읽는 일이 종종 생긴다. 좀 두근거리기도 하고, 좀 긴장되기도 한다. 책을 펴면서, 그 사람이 감동받았던 지점을 지나쳐갈 때 나는 어떤 느낌이 들까, 라는 생각도 든다. 그 사람이 지나갔던 길의 궤적을 뒤따라 밟는 듯한 느낌은, 왠지모를 진한 동질감도 동반되는 듯하다.

아. 책을 읽다가 나는 문득 알았다. 처음 들어본 이름의 작가가 아니었다. 나는 언젠가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더랬다. 그래놓고 읽지 않았다. 몇 장 들춰보고선 읽지 않았다. 왜?  

글쎄..왜였을까..곰곰 생각해도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선물씩이나 받아놓고서 왜 읽지 않았던거지? 

곰곰..곰곰..아! 알았다! 

나는 그때 김훈의 '남한산성'에 빠져있었을 때였구나. 그래, 그 시절이면 이해가 간다. 그때는 '남한산성' 이외의 그 어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심지어 동화책도 읽히지 않았고, 내가 아주 좋아라하는 '만화책' 류들도 읽을 수 없었지. '남한산성' 안에서 임금이 울고, 김류가 울고, 사람들이 울 때 나도 따라 울었으니까. 남한산성 안에서 그들이 하는 말, 그들이 먹는 음식..아, 그 음식엔 말(馬)도 해당이 되었다. 그들이 울면서 말죽을 끓일 때 나도 거들었고, 말죽을 퍼나를 때 나도 따라 퍼날랐다. 그렇게 일 년 이상을 '남한산성'에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은 이제 다시 내게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책 한 권으로 그 정도까지 홀릭한다는 건, 그 책 한 권이면 족하다. 나는 아마 '남한산성' 이외의 책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나는 내어주고도 싶다. 다시 한 번, 그때처럼 책 속에 흠뻑 빠져 그들과 같이 울고 웃고 싶다. 그 가슴먹먹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한 번의 생에 한 번 이상을 바라면 욕심이 될 터. 그때 '남한산성'의 그림자에 가려 읽지 못한 책 중에 '로드'가 있었구나..그래서 내가 코맥 매카시도 이제사 알았구나.. 

<모두 다 예쁜 말들>을 예쁜그녀를 통해 알게 된 후, 조금씩 읽고 있다. 그녀가 감동받은 지점도 이미 지나쳤다. 그 지점에서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렀다. 아주 오래. 그리고 나는 그 지점을 지나쳐, 그녀가 언급하지 않은 뒷 부분을 읽고 있다. 어느 순간, 나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낀다. 그래서 책을 잠시 덮었다.  나는 쉬면서 예쁜 말들의 표지 사진을 바라본다. 예전에 어느 나라에서 탔던 아주 건장한 녀석이 떠올랐다. 내가 다시 갈 어느 나라에서, 다시 예쁜 말을 만나, 그들의 눈을 마주하고, 그들의 목을 쓰다듬어주고 있는 미래의 어느 날이 예감되었다.   

   
  여긴 정말 시골 같지?
그래. 그만 자자.
있잖아?
응.
옛날 카우보이는 이렇게 지냈겠지?
그랬겠지.
여기에 얼마나 머물고 싶어?
한 100년. 그만 자자.  (135p)
 
   

오늘 아침, 그곳에서 말을 타고 있는 사람에게서 카카오톡이 왔다. 넓디너른 평원 어드매쯤에서 전파가 송신되었을까. 나도 미래의 어느 날에 한국의 그녀에게 카카오톡을 보내기로 마음먹어본다. 아마 전파가 통하는 곳을 찾느라 오늘 아침의 그처럼 나도 고생을 할테지.

" 나 지금 예쁜 말 타고 있어요. 당신의 예쁜 말로 두근거려줄래요?"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1-08-18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진짜 아름답죠? 아름답다는 단어는 이 책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요.

달사르 2011-08-18 13:44   좋아요 0 | URL
정말 아름다워요. ^^ 이 책이 코맥 매카시의 국경 3부작인가, 광야 3부작인가에 속하나봐요. '로드'까지 읽고나서, 나머지 3부작에 해당되는 책도 읽고 싶어졌어요. 다락방님 덕분에 아름다운 책 알게 되었어요. 히.

2011-08-18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1-08-18 13:53   좋아요 0 | URL
이 책이 국경3부작의 두번째 작품이래요. 첫번째 작품은 [국경을 넘어] 고요 세번째가 [평원의 도시들] 이래요. 첫번째 책의 주인공과 두번째 책의 주인공(우리가 아는 존 그래디)이 세번째 책에서 만난대요. 아 완전 궁금해요.

2011-08-18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사르 2011-08-18 17:40   좋아요 0 | URL
앗. 그래요? 꺅. 이 시리즈가 연결되는 내용이었군요! 와우~
첫번째 책의 주인공이 누군지도 상당히 궁금해요. 게다가 존 그래디와 세번째 책에서 만난다라니. 와..너무 멋져요. 책이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두 사람이 세번째 책에서 만난다라니..아..세번째 책은 아무래도 올해 안에 읽어야겠는데요. 궁금해서요!

2011-08-18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 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일상적인 풍경에 눈이 시릴 때가 종종 있다. 양파 껍질을 까지도 않았는데 눈에서 물이 나올 때가 있다. 세월의 눈을 고스란히 받아 새하얗게 내려앉은 할머니의 쪽진 흰머리를 볼 때 그러하다. 지팡이를 짚고 헛둘 헛둘 걷고자하나 한 걸음 디디기가 고역인 모자 쓴 할아버지를 볼 때 그러하다. 할머니 등 뒤에서 배시시 천사 웃음을 지으며 빠이- 손을 흔드는 어린 아가를 볼 때 그러하다. 시장 좌판을 내고 오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며 파 한 단, 배추 한 포기를 파는 아주머니의 주름진 손을 볼 때 그러하다.

말이 없이, 풍경으로도 '시'가 되는 그러한 정경이 정현종의 눈에는 잘 보이나보다. 정현종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서 파가 쑥쑥 자라는, 그 형언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를 어찌한단 말인가. 정현종은 어찌하여 시간의 흐름을 쑥쑥 자라는 파로, 막무가내로 피는 밤꽃으로 묘사할 수가 있단 말인가. 막무가내라니..막무가내는 약간 무식하고, 제멋대로고, 막가파적인 단어 아닌가. 그런 단어를 가지고 어찌 이리 곱디고운 미소로 만들었을꼬. 막무가내로 피는 예쁜 밤꽃..  

아..나도 막무가내로 피고 싶다.  나도 막무가내로 살고 싶다. 막무가내로, 삐까번쩍 고층빌딩 아래 삐죽이 솟아나는 잡초처럼 자라고 싶다. 막무가내로, 구르는 새똥 속에서 싹이 자라듯이 그렇게 구르고 싶다. 그런 막무가내를 내 속에 마구 담고 싶다. 

 

이  시가 포함된 시집을 찾다가 이 시에 관한 어떤 해석을 하나 읽었다. 아이가 악기를 부는 순간, 아주머니가 파를 파는 순간, 할아버지가 뛰는 순간, 아가씨들이 연인에게 꽃을 바치려는 두근거리는 순간, 이런 순간들은 금방 지나가니 사랑할 시간은 턱없이 작다. 그러니 사랑할 수 있을 때 맘껏 사랑하라..라는 정도의 해석이었다. 에게? 이 시가 이렇게 읽힌다고?...  

아..이래서 시의 해석이 천차만별이구나, 싶었다. 물론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가 서두에 왔긴 했지만, 그렇다고 뒤에 달아서 나오는 풍경들이 찰나적인 순간들의 대변은 아니지 않나.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들인데 고작 찰나적인 순간의 대변에 그친단 말인가. 뒤에 나오는 풍경들은 찰나이면서 영원의 순간들이다. 단순히 시간의 지속성만으로 영원의 순간을 말하진 않는 법이다. 영원의 순간은 이 순간의 풍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여기서 시간이 정지된다해도 좋겠다, 싶을 정도의 극치의 아름다운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씨앗이 떨어져 땅 속에서 자라 씨앗을 깨고 나와 흙 속에서 부지런히 자라고 자라 어엿한 하나의 파가 된 존재는 뿌리가 대지에서 뽑힌 순간에도 계속 쑥쑥 자란다. 뿌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뿌리는 대지의 기억만으로도, 잃어버린 흙의 추억만으로도 제 존재를 잃지 않고 아주머니의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란다. 뿌리마저 잘려나가 그 기억이, 그 추억이 흐려질 때까지 영원의 시간 속에서 파는 자란다.  뿌리없는 밤꽃도 마찬가지다. 대자연과 생식의 약속을 한 밤꽃은 꽃이 떨어지지 않는 한, 저절로 시들어 떨어질 때까지 그 약속을 지킨다. 아주머니의 보따리 속에서도, 막무가내로. 

버스를 향해 뛰어가는 할아버지에게 한없는 연민을 느끼는 그 누군가에게는 그 장면이 또한 순간이며 영원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꽃을 바치려는 아가씨들의 두근거리는 마음에 봄꽃같은 화사함을 느끼는 그 누군가에게는 그 장면이 또한 순간이며 영원이다. 흐르는 시간을 느끼지 않고 부- 부- 플라스틱 악기를 부는 아이에게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퍼져가는 듯한 아스라함을 느낀다면 그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또한 순간이며 영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또한 사랑하는 순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