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팠다. 언제부터 내가 그곳에 있었을까. 그곳엔 아이들이 많았다. 그곳은 재활원이다.
우리 중에는 편지를 받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읽을 수 있는 아이도 있었지만 읽을 수 없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글을 알았다. 나는 그들이 내게 부탁을 하면 글을 읽어주었다. 아이들은 간호사들이 글을 읽어줬어도 다시 내용을 거듭 읽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나는 반대로 바꾸어서 읽어줬다. 예를 들자면, "우리의 사랑스런 아기야, 절대로 낫지 말거라. 우리는 너 없이도 잘 지내고 있단다. 너는 우리에게 아무 필요도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네가 거기에 계속 남아 있기를 희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집안에 신체장애자를 두고 싶은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는 소포 꾸러미를 받는 아이들도 꽤 많다. 과자, 비스킷, 꿀, 햄, 소시지 등이 들어 있는 꾸러미들이다. 나는 그들 중 하나에게 접근해서 물어본다. "소포에 독약이 들어 있을 수 있어. 그들은 불구인 자식이 죽기를 바라거든. 너는 거기에 뭐가 들어있을지 두렵지 않니?"
우리를 보러 오는 부모들도 있었다. 부모들이 현관에 도착하면 기다리고 있다가 아이의 이름을 물어본다. "안됐습니다. 그 아이는 이틀 전에 죽었어요. 편지를 아직 못 받으셨군요."
나는 글을 모르는 아이에게 글을 읽어줬을 뿐이고, 소포 꾸러미를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내용물에 대해 대화를 했을 뿐이고, 단순히 아이의 이름을 혼동해서 부모에게 잘못 말했을 뿐인데 원장이 오해를 하고 나에게 따져 묻는다. 나는 억울하다. 나는 단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원장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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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누구에게도 도움이 주지 않기를 바란다. 알겠니?"
"네. 원장님.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아이든 층계 오르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거나, 넘어진 것을 일으켜주지 않았다고, 또 산수를 잘 가르쳐주지 않았다거나, 편지 쓰기에서 틀린 철자를 지적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제게 불평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내가 누군가를 돕는 것을 금지시키려고 하시거든, 누군가가 내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금지시켜주십시오."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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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주룩 나왔다. 아이의 외로움이, 아이의 들리지 않는 절규가, 아이의 보이지 않는 눈물이, 아이의 심장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이는 기억에도 없는 아팠던 몸이 나아가고, 휠체어에서 목발로, 다시 지팡이로 바뀌는 힘겨운 재활 과정을 그치는 긴 세월동안 한 통의 편지도, 한 번의 소포꾸러미도 없이, 한 번의 방문도 없이 견뎠던 것이다. 꿈인지 현실인지 가물거리는 단란한 가족의 기억만으로. 초록색 덧문의 하얀 집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노래를 하고, 뜰에서는 아버지가 나무를 자르고, 작은 방 다른 침대에서 같이 잤던 형제의 기억만으로. 나에게는 아무도 없었던 걸까. 나는 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걸까.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은 흐르고 나의 기억인지 상상인지 모를 것들의 존재는 갈수록 변형되어간다.
무언가를 이미 가진 사람은 그 행복을 종종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가졌던 것을 잃어버린 뒤에야 그것의 존재가 '행복'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물론 처음부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행복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억울한 그 심정만은 확실히 안다. 나에게는 없지만 남에게는 있는 그 무엇. 그것. 그것을 가지려면 어떡해야할까. 떼를 쓰면 될까. 간절히 바라면 될까. 아이는 그 모든 것을 다 해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순간 느꼈을 것이다. 아이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남의 행복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는 것이 그당시 아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남을 괴롭히는 자신을 표출하면서, 자기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의 괴로움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아이는 간절히 바라고 있던 것이 아닐까.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폭격으로 죽는 사람이 흔한 세상에 아이는 폭격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을 허파 속에 감추었다. 아이는 글을 쓸 줄 안다. 아이는 노트를 장만했고 노트가 하나씩 늘어났다. 노트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질까. 상상인지 흐릿한 기억인지 모를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갈까. 지금은 곁에 없지만 항상 같이 행동하고 같이 잤던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갈까. 현실의 나는 지팡이를 짚는 신세지만 이야기 속의 나는 아주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그저 즐거운 일만 일어나는 나날 속에 무럭무럭 자라는 건강한 아이로 바뀌어 들어가는 건 어떨까. 아니면 '행복, 단란, 사랑' 이런 단어들을 배제하고 감정을 죽이는 연습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그저 시간을 죽이며 자라는 아이로 들어가는게 좋을까.
내가 마음이 많이 아플 때,
지금의 나보다 행복한 아이를 그리는 것이 나에게 위안이 될까. 아니면,
지금의 나와 비슷한, 아니 지금의 나보다 훨씬 비참한 상황을 견디는 아이를 그리는 것이 나에게 위안일까.
아니면, 노트에 무언가를 쓰고, 행복이든 불행이든 상관없이 무언가를 쓰는 동안 내 곁에 존재해주는 가상의 그 무엇의 존재를 느끼는 그 자체만으로 위안일까. 어쩜, '소설'의 진정한 의미에 이것이 포함되기도 할까. 때론, '거짓말'이 삶을 지탱해주기도 하듯이 말이다.
